상계동 편지 - 버클리풍의 사랑노래 들으며 [조정권]
안녕하셨어요 삼년 겨울 내내 팔 접고 있었던 공작단풍이 날개를 조금 폈습니다 저 활짝 필 붉은 잎 붉은 색깔들을 거느리고 장닭이 홰치듯 선생님 모시고 한잔하고 싶군요
아직도 호박밭과 깨밭 고추밭을 지나 목화구름 쏟으며 시골기차가 다니는 연천 한없이 시골스러운 갑갑한 마음들 눌러놓고, 연락드렸더니 전화가 주무시고 계시네요
막 풀어놓은 봄햇빛 속에서 이동갈비 가는 차들 막히고 백운산 계곡 광덕산 등산길 어귀 여인숙에서 하응백과 더덕주 속 천산(天山) 골에서 헤매다가 1박 하고 다시 오른, 정상 휴게소 입구 시골 할머니들이 내려놓은 보따리에서 막 기어나오는 고사리, 기어다니는 산고사리들처럼 살아 있고 싶군요
- 떠도는 몸들,창비, 2005
목화밭 이야기 [이은규]
탄성으로 피어나는 꽃이 있다
피어날 때 하양
지기 직전 분홍을 완성한다는 목화에 대해 알고 있니
아침에 희고
저녁을 지나 붉어지는 이치
혀끝 속삭임에 물들어가는 마음과 같이
가까운 하양과 먼 분홍 사이
완성되지 못한 문장들이 피었다 지다 피었다 지다
목화의 꽃말은
여럿 가운데 가장 뛰어나다는 뜻의 우수
그런데 우리는 왜
근심 쪽으로 몸이 기울었을까, 함부로
혹은 입춘과 경칩 사이 절기를 떠올렸을까
오래 속삭여도 좋을 이야기에 대해 알고 있니
목화꽃이 지고 나면 둥글게 차오른다는 다래
다래의 맛이 달아 하도 몸이 달아
몰래 숨겨놓고 먹었다는 소년의 비밀비밀
그런가 하면 다래가 터뜨린 솜꽃을 편애한 자가
어느 시험에서 두 번 꽃 피우는 나무에 대해 물었다고 해
구름처럼 피어오르는 속삭임, 귀가 멀어도 좋을
한 시인은
목화밭과 소년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줬는데
우리는 아직 지나가고 있을까
이미 돌아오고 있을까
약속을 잊어버린 약속처럼
먼 분홍과 가까운 하양 사이
안 들리는 탄성으로 피어나는 기억 한 점
- 오래 속삭여도 좋을 이야기, 문학동네, 2019
첫눈은 내 혀에 내려앉아라 [신미나]
오늘은 날이 좋다 좋은 날이야 손을 꼭 잡고 베개를 사러 가자 원앙이나 수壽자를 색실로 수놓은 것을 살 수 있겠지
이것은 흐뭇한 꿈의 모양, 어쩐지 슬프고 다정한 미래
양쪽 옆구리에 베개를 끼고 걸으면, 열두 폭의 치마를 환하게 펼쳐서 밤을 줍는 꿈을 꾸겠네
목화꽃 송이, 송이 세 송이 콧등을 스치며 높은 곳에서 하나씩 떨어지는 모양을 바라보아도 좋겠네
너와 나, 꿈길의 먼 이부자리까지 솜을 틀자 이불이 짧아 드러난 발목을 다 덮지 못해도
꿈속에서는 미래의 지붕까지 덮고도 남겠지
오늘은 날이 좋다 좋은 날이야 철 지난 이불은 개켜 두고
일단 종로로 가자
종로에 가서 베개를 사자
- 당신은 나의 높이를 가지세요, 창비, 2021
베로니카 [이산하]
모든 게 그렇겠지.
이제 패색이 짙은 낙엽처럼 다른 길은 없겠지.
홀로 핀다는 게 얼마나 속절없이 아픈 일인데
아름답기 전에는 아프고 아름다운 뒤에는 슬퍼지겠지.
그대 뒤에서 그대를 은은하게 물들이거나
세상 뒤에서 세상을 은은하게 물들이거나
이기지 않고 짐으로써 세계를 물들이는
그런 저녁 노을 같은 것이겠지.
어차피 질 줄 알면서도 좀더 잘 지기 위해
잘 지기 이해 잘 써야지, 거듭 나를 치다가도
이 난공불락의 외로움은 어쩔 수 없어 혼자 중얼거리겠지.
낙, 낙, 나킨온 헤븐스 도어.......
낙, 낙, 나킨온 헤븐스 도어.......
모든 게 그렇겠지.
아직 다른 길이 없으니 왔던 길 계속 가야겟지.
케테 콜비츠 판화 같은 세상도 여전하고
들판에 하얀 목화꽃이 팡팡 터지는 꿈도 사라지고
이젠 너무 멀리 이송되어 돌아갈 곳도 잊어버리고
방향이 틀리면 속도는 아무 소용도 없어지겠지.
어느날 내가 심해어처럼 베니스에 홀로 누워
마지막 별빛의 조문이 끝날 때마다
속눈썹 같은 물안개로 피어오르던 그대의 가슴에 묻혀
그대의 폐사지 같은 눈빛을 보며 다시 중얼거리겠지.
낙, 낙, 나킨온 헤븐스 도어.......
낙, 낙, 나킨온 헤븐스 도어.......
- 악의 평범성, 창비, 2021
목화밭 목화밭 [배세복]
목화를 따러갔네 누이에게 배운 노래 흥얼거리며, 목화꽃은 이상하기도 하지 어떤 게 진짜 꽃일까 누이는 분홍색 진짜 꽃만 꽃이라 불렀지만 목화 다래 익어 벌어진 목화솜도 나는 목화꽃이라 우겼네
목화밭 목화밭~, 홀로 목화를 따러갔네 누이 없이, 목화꽃은 이상하기도 하지 멀리서 볼 때만 한없이 아름다운 꽃이었네 두둥실 흘러갈 것만 같은 꽃이었네 아무리 따도 바구니는 채워지지 않고 세상 모든 것이 다 멀리서만 그러하였네
목화를 따러갔네 목화를 따지 않았네 밭둑 사이 피어난 나무 그늘에 누워 하늘을 보았네 목화꽃은 이상하기도 하지 하늘에도 저렇게 많이 피어 있다니, 저 꽃으로 뭉텅뭉텅 바구니 채웠으면 좋겠다 그치? 없는 누이에게 말을 걸고 또 말 걸고, 잠이 들었네 몇 겹으로 꿈을 꾸면서
- 목화밭, 목화밭, 달아실, 2021
아버지, 마트료시카 [김명지]
볼가강에서 배를 끄는 인부들*을 보고 와 잠든 밤
꿈에
마트료시카 뚜껑을 열고 아버지가 걸어 나온다
골 깊은 주름 너머로
손을 흔들며 지나가는 인부들이
끌고 가는 명태손수레
목화 같은 눈송이가 펄펄 날리는 길
엿장수의 등장에
작대기를 흔들며 따르는 아이들
명태꾸러미와 엿을 바꾸려는 때
아버지의 기침이 기척으로 들렸다
여섯 다섯 넷 셋
점점 작아지는아버지
그 아버지가 다시 마트료시카 속으로 걸어 들어갈 때
우리 모두 밧줄로 끌고 가는 파도
하얀 겨울파도
* 일리아 레핀의 그림
- 세상 모든 사랑은 붉어라, 도서출판b, 2018
벙어리장갑 [오탁번]
여름내 어깨순 집어 준 목화에서
마디마디 목화꽃이 피어나면
달콤한 목화다래 몰래 따서 먹다가
어머니한테 나는 늘 혼났다
그럴 때면 누나가 눈을 흘겼다
-겨울에 손 꽁꽁 얼어도 좋으니?
서리 내리는 가을이 성큼 오면
다래가 터지며 목화송이가 열리고
목화송이 따다가 씨아에 넣어 앗으면
하얀 목화솜이 소복소복 쌓인다
솜 활끈 튕기면 피어나는 솜으로
고치를 빚어 물레로 실을 잣는다
뱅그르르 도는 물렛살을 만지려다가
어머니한테 나는 늘 혼났다
그럴 때면 누나가 눈을 흘겼다
_손 다쳐서 아야 해도 좋으니?
까치설날 아침에 잣눈이 내리면
우스꽝스런 눈사람 만들어 세우고
까치설빔 다 적시며 눈싸움한다
동무들은 시린 손을 호호 불지만
내 손은 눈곱만큼도 안 시리다
누나가 뜨개질한 벙어리장갑에서
어머니의 꾸중과 누나의 눈흘김이
하얀 목화송이로 여태 피어나고
실 잣는 물레도 이냥 돌아가니까
- 밥 냄새,지식을만드는지식, 2012
도장골 시편 - 입하부근 [김신용]
백로들이 햇살처럼 부풀었다가 가라앉는다
긴 잠을 깬 봄의 들녘을 철벅철벅 걸어가는
뿔 없는 소의 그림자 뒤에서
백로들이 목화 꽃밭처럼 피었다가 내려앉는다
내려앉아 들밥을 먹는다
소풍 나온 듯 푸르게 푸르게 들밥을 먹는다
백로들도 알고 있는 것이다. 불도저가 무논을 썰고 지나가면
땅 속에 숨어 있던 미꾸라지며 땅강아지들이 놀라 몸을 일으킨다는 것을
하지만 알고도 모르는 척 짐짓 뒷짐 지고 저만큼 걸어가는 것이다
걸어가, 무뚝뚝한 손길로 제 새끼 머리를 쓰다듬듯
논바닥만 고르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소가 걸어간 자리
沼소처럼 맑게 고여오는 산 그림자에 발 담그고
시침 뚝 뗀 얼굴로 서로 먼산바라기도 되어보는 것이다
백로들이 다시 하얗게 부풀었다가 가라앉는다
오늘 , 백로들은 그 飛蚊비문으로 배부르겠다
그 풍경 들밥 먹고 나 또한 하품하겠다
- 도장골 시편, 천년의시작, 2007
사라진 것들의 목록 [천양희]
골목이 사라졌다 골목 앞 라디오 수리점
사라지고 방범대원 딱딱이 소리
사라졌다 가로등 옆 육교 사라지고 파출소
뒷길 구멍가게 사라졌다 목화솜 타던
이불집 사라지고 서울 와서 늙은 목포댁 재봉틀 소리
사라졌다 마당 깊은 집 사라지고 가파른 언덕길도
사라졌다
돌아가는 삼각지 로터리가 사라지고 고전음악실
르네상스 사라지고 술집 석굴암이 살졌다 귀거래다방
사라지고 동시상영관 아카데미 하우스 사라졌다 문화책방
사라지고 굴레방다리 사라졌다 대한 뉘우스
사라지고 형님 먼저 아우 먼저 광고도
사라졌다
사라진 것들이 왜 이리 많은지 오늘의
뒤켠으로 사라진 것들 거짓말처럼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그런데 왜 옛날은
사라지는 게 아니라 스며드는 것일까 어느
끈이 그렇게 길까 우린 언제를 위해 지금을
살고 있는지 잠시 백기를 드는 기분으로
사라진 것들을 생각하니 내가 나에게서
사라진다는 것 누구나 구멍 하나쯤 파고 산다는
것일까 사라진 것처럼 큰 구멍은 없을 것이네
- 나는 가끔 우두커니가 된다, 창비, 2011
버들강아지 [이윤학]
얼음이 풀리고 강가에 나갔네
십 년 동안, 아니 그보다 더 오랫동안
편지를 쓰지 못했네
목화씨를 닮은 버들강아지들
다닥다닥 피어 있는 강가에서
이제 막 얼음이 풀려 나간 강가에서
버들강아지 가지 하나가
강물 속에 펜 끝을 대고,
글씨를 쓰고 있네
그 많은 목화씨들이,
그 가지 끝을 따라 흔들리고 있네
얼음이 풀린 환한 대낮에
얼음 속에서 꼼짝 못한
버들강아지 가지 하나가
얼음 속이던 그곳에서
긴 편지를 써 가고 있네
- 나를 위해 울어주는 버드나무, 문학동네, 1997
목화 씨앗 속삭임 [이은규]
별이 뜰 것만 같은 밤
구름 모양 탁자 위에 목화 씨앗 흩어져 있습니다
몇 송이 목화송이 함께 놓여 있고요
작은 양팔저울도 보입니다
무게를 재는 원리는 수평에 있지요
균형을 잃지 않는 것이 오랜 소원입니다만
먼저 다정한 마음과
다정할 마음 중에서
무엇을 건네줄까 궁리하는 한 사람이 있지요
도무지 잴 수 없는 무게일 때
양팔 저울을 사용해보십시오
왼쪽 접시에 목화 씨앗을
목화송이를 오른쪽 접시에 올려놓습니다
기울어지는 마음이 더 무거운 이치
헤어질 때 다정한 사람이 덜 사랑한다
덜 다정한 사람이 더 사랑한다는 문장
그런 법칙, 어느쪽에도 기울지 않는 마음입니다
먼 하양과 가까운 분홍보다 하양분홍이 좋아요
모든 고백은 출처 없이도 아름다운 인용
학명을 잊는 순간 꽃이 꽃처럼 보이듯
목화 씨앗 한 알과
한 송이 목화의 무게를 재려다 그만 멈춥니다
기울어진 어깨로도 포옹은 가능해요
그러니 속삭이는 말에 기지개를 켜고 멀리 날아가렴
파종은 멀지 않을 것
한 사람이 희미해질 때마다 씨앗점을 찍어요
그 점들을 이어 아직 오지 않은 별자리를 그리면
저만치 누군가 양팔을 벌리고 서 있을지도 모릅니다
한 손에 하양을 다른 손에 분홍을 물들이고
- 무해한 복숭아,아침달, 2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