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물기행 유일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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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5.29. 02:02조회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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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이윤 사회환원’ 이정표 세운 유일한(1895~1971)
한국의 기업인은 기업의 역사가 벌써 1백여년이 됐는데도 아직까지 해방 이전‘친일의 굴레’와 해방 이후‘정경유착’의 오명 때문에 삶의 행적이 대부분 그리 긍정적으로 조명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지난 3월말 각 언론의 보도는 사람들로 하여금 우리 기업인 중에 이런 사람도 있었다는 기억을 되살려놓았다.
2대에 걸쳐 전 재산 기부
기업이윤의 사회환원, 소유와 경영의 분리 등으로 한국기업의 이정표를 세운 유일한의 이름이 다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게 된 것은 그의 딸 유재라씨가 죽으면서 아버지에 이어 전 재산을 사회에 내놓겠다고 한 유언장의 내용이 공개됐기 때문이다.
유재라씨는 지난 3월 19일 미국 시애틀에서 63살로 타계했는데, 유언장에 따르면 그는 시가 45억원 상당의 유한양행주식 2만5천주와 시가 160억원의 서울 영등포구 대방동 집터 1천8백평 등 모두 2백5억원을 공익재단인 유한재단에 기부했다.
그의 유언장은 71년 유한양행 창업자인 부친의 것만큼이나 사회적으로 주목을 받아‘2대에 걸쳐 전 재산을 사회에 환원했다’는 평가를 낳게 했으며, 부친의 활동을 사회적 관심사로 재등장시켰다.
유일한은 동학혁명·갑오경장·청일전쟁 등으로 나라 안팎이 급격한 변화의 소용돌이로 치닫고 있던 1895년 평양에서 8남매 가운데 맏아들로 태어났다.
유일한의아버지인 유기연은 일찍이 서양문물을 받아들여 당시에 이미 재봉틀 대리점을 운영했다. 그는 한일합방이 되자 가족을 이끌고 북간도로 건너가 독립당의 재정적 후원을 맡는 등 항일독립운동에 참여했다. 유기연은‘유능한 사람들을 외국에서 교육시켜야 나라가 바로 설 수 있다’는 당시의 개화독립론에 영향을 받은데다 그가 다니던 교회선교사가 적극적으로 권유하자 1904년 아홉 살밖에 되지 않은 유일한을 귀국하는 미국인 선교사에 맡겨버린다.
미국에 건너간 유일한은 서교사의 연고지인 네브레스카에서 고등학교까지 마친 뒤 미시간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한다.
그가 대학 재학중 일어난 3·1독립운동은 그의 생애를 결정하는 중요한 계기가 된다.
귀국뒤 제약 회사 차려
경술국치 이후 대한인국민회를 중심으로 뭉쳐 있던 재미동포들은 국내에서 3·1운동이 벌어지자 한달 뒤인 4월 14일부터 3일동안 필라델피아에서‘한인자유대회’를 열어 국내의 독립운동에 호응하고 나섰다. 스물다섯살의 유일한은 이때 이승만·서재필·조병옥·임병직 등과 함께 대화에 주도적으로 참석해 정부와 국민의 관계, 정부의 형태와 행정내용 등 한국민이 정부를 가지게 되면 나라와 민족을 위해 해야 할 일을 담은‘한국 국민의 목적과 열망을 석명하는 결의문’을 대표로 낭독한다.
대학을 졸업한 뒤 동양인 중 최초로 제너럴일렉트릭에 입사한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회사를 그만둔다. 회사쪽이 그를 장차 동양시장 개척을 위한 총지배인으로 임명하려 했기 때문이다. 유일한은 사직서를 낸 뒤 미국인 친구와 함께‘라초이’식품회사를 설립해 숙주나물사업을 시작한다.
중국요리에 긴하게 쓰이는 숙주나물은 특히 만두에는 빠져서는 안 될 재료이다. 당시 미국에서는 숙주나물의 원료인 녹두를 구하기가 어려운데 착안한 유일한은 미국 전역을 돌아다니면서 녹두를 구해다 숙주나물을 재배하여 유리병에 넣어 팔았다.
그러나 유리병에 담은 숙주나물이 잘 팔리기는 하지만 자주 깨져 손실률이 컸다.
유일한인 이 한계를 통조림으로 극복해 4년 만에 50만 달러 이상의 거금을 손에 넣게 됐다.
그는 1924년 녹두 구매 차 귀국해 함께 일하자는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 에비슨 학장의 권유를 받게 된다.
마침내 유일한은 그와 그의 부인을 각각 상과 교수와 세브란스 병원의 소아과 과장으로 초빙하겠다는 에비슨 학장의 편지를 받은 뒤 소아과 전문의였던 중국인 부인 호미리와 주변의 반대를 무릅쓰고 26년 가을 회사를 정리해 영구 귀국한다.
당시 동아일보는 그의 귀국을‘적은 자본으로 식료품 장사를 시작해 수백만원의 큰 회사를 이룬 류일한씨...’라는 기사로 부부 사진과 함께 보도하고 있다.
국내에 들어온 유일한은 그러나 교수직을 맡기로 했던 당초 계획과 달리 26년 종로2가에 유한양행을 상호로 하는 제약회사를 설립하여 본격적으로 사업에 뛰어든다.
그가 제약회사를 차린 데는 복합적인 동기가 작용한 것으로 전해진다. 당시 국내상황은 일본의 식민지정책이 뿌리내리기 시작하면서 본격적인 수탈이 이뤄져 가난과 질병이 극으로 치닫고 있었고 일본인들에 의해 무지가‘정책적으로 권장’되고 있었다.
회사공개 때 ‘물타기’ 일축
그는 이런 가난과 질병을 제약회사를 통해 극복하고 거기서 벌어들인 돈으로 무지를 벗어나기 위한 교육사업을 벌이겠다고 생각한 듯싶다. 당시 독립운동의 주요 흐름을 무장독립운동과 애국계몽운동 등으로 대별해본다면 후자쪽을 택한 셈이다.
물론 그는 제약업만을 전문으로 할 생각은 아니었다. 이 때문에 상호를 ○○제약이 아닌 종합무역회사에 걸맞는‘양행’으로 지었고 실제로 해방 이후에는 제약업과 약품의 수출·입 외에 자동차 수입, 철공업, 선박·보험의 대행업 및 죽세공예품 등 토산품 수출업 등에까지 영업범위 확대를 꾀하기도 했다.
그는 몇가지 경영원칙을 세운 뒤 그 원칙를 끝까지 관철시켰는데, 이것이 유한양행의 기업 이미지와 그의 전 재산 사회환원이라는 결과를 만들어 냈다.
그의 가장 중요한 원칙은‘기업은 나라와 민족의 것이고 국민의 소유’라는 것이었다. 미국에서 나라없는 설움을 겪어야 했던 그는‘나라와 민족이 없이는 기업은 물론 개인의 존재도 무가치하다’는 것을 경험을 통해 뼈저리게 느꼈기 때문이다. 이 원칙은 철저한 자진납세, 국가정책에의 적극협조로 구체화됐으며 소유·경영의 분리와 기업이윤의 사회환원이라는 선구적 행동을 낳게 했다.
그는 말 그대로 성실한 납세자였다. 그의 납세정신은 유한양행을 63년 전국유일의 우량납세기업체 표창을 받게 했으며, 68년에는 세무사찰을 받은 뒤 오히려 국세청으로부터‘국세청 선정 모범납세업체’라고 새긴 동으로 만든 현판을 받게끔 했다.
기업이 국민의 소유라는 그의 생각은 회사 공개와 종업원 지주제 도입으로 구체화됐으며 마침내는 경영 권한을 함께 일해 왔던 후배에게 맡기고 전 재산의 유한재단 기증으로 끝을 맺는다.
그는 36년 개인소유의 유한양행을 주식회사로 바꿔 주식의 일부를 임직원에게 나눠준 뒤 62년에는 주주에게 이익금을 나눠줄 필요가 없다는 임직원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제약회사로서는 최초로 주식을 상장해 회사를 공개했다.
특히 공개과정에서 유일한은 일부 간부들이“회사의 실제 자산이 발행주식의 총액면가보다 6~7배나 많으므로 공개 전에 무상증자를 실시하자”는‘물타기 증자’를 강력 주장했음에도 이를 물리치고 액면가대로 상장했다.
그의 밑에서 총무과장을 거쳐 상무이사까지 지냈던 연만희 사장은“당시 액면가는 1백원이었기 때문에 6배 정도의 무상증자가 충분히 가능했는데도 유 회장이 증자를 하면 투자자들이 손해를 본다는 주장을 펴 액면가 상장을 했다”고 말하고 있다. 이 때문에 주식이 상장되기도 전에 증권회사 직원들이 이것을 모두 사버려 이를 다시 찾아다 재상장하는 촌극이 빚어지기도 했다. 주식은 상장되자 주가가 1천원까지 치솟았다.
그는 점점 회사가 안정성장 상태에 집어들자 자신의 마지막 목표인 교육사업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54년에 사재를 털어 재단법인‘고려공과기술학원’을 세웠으며 60년에는 재단에 기증한 1천2백여평의 대지에 학교건물과 보일러실을 지은 뒤 학원 이름을‘한국직업학원’으로 바꿨다.
63년에는 연세대에 연구기금으로 1만2천주, 보건장학회에 5천주를 기증했으며, 64년에는 유한공고를 설립했고 2년 뒤에 유한중학교를 추가 설립했다. 그의 육영사업은 기업이윤의 사회환원과 맥을 같이해 그가 죽기 이전에 이미 유한양행 주식의 40% 이상이 교육기관 등에 기증됐고, 나머지도 마지막에는 재단법인‘한국사회 및 교육신탁기금’에 넘겨졌다.
그의 또 다른 경영원칙은 유한양행 광고정책에 깊게 영향을 끼쳤고 결과적으로 회사를 성장시키는데 결정적 공헌을 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28년 3월 5일자 동아일보에 유한양행이 처음으로 내놓은 광고는 회사의상표인‘버드나무를 맨 위에 넣고 그 밑에 약의 효능 등을 설명한 다음, 마지막으로 의학박사인 부인 이름과 총독부 약제사의 이름을 싣고 있다. 이런 광고는 모든 약을 만병통치약인 것처럼 과대선전했던 당시의 광고방식을 벗어나 회사상표와 권위자 이름을 넣어 신용을 강조했다는 점에서 주목을 받았다.
상공부장관 입각 거절
유한양행이 강정제인‘네오톤’과 설파제인‘GU사이드’판매를 통해 제약회사의 선두를 차지하자‘버드나무표만 붙어있으면 믿고 사게 하자’는 유일한의 신용중시 정책이 성공했다는 평가가 나왔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일제시대부터 유일한과 유한양행을 한국의 대표적 기업인과 기업으로 꼽게 만든 것은 기업을 정치바람에 휩싸이지 않도록 하겠다는 그의 경영철학이었다.
미국에서 벌인 활동 때문에 그는 항상 일본경찰의 주목을 받아왔다. 더구나 유한양행이 일본의 제약회사를 제치고 정상의 제약회사로 떠오르자 조선총독부의 직·간접적인 견제와 협박·권유가 훨씬 강화됐으나, 그는 적당한 거리를 두면서 끝내 협박에 굴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38년 미국에 건너간 뒤 태평양전쟁 말기부터 해방되기까지 귀국하지 못했고 41년에는 사장직에서까지 물러나야 했다.
그는 태평양전쟁 당시 미국 육군전략처의 한국관계 책임자를 맡았고 초대 상공회의소 회장까지 역임한다. 미국 유학당시 맺은 인간관계 등을 고려할 때 미군정 당시 마음만 먹으면 이 배경을 이용해 큰 사업을 벌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이승만의 상공부장관 입각을 거절한데다 정치자금 지원요청까지 묵살해 오히려 치안국으로부터 6천만원 탈세 혐의로 수사를 받기까지 했다.
이처럼 유일한은 철저히 기업경영을 정치권의 바람으로부터 독립시키려 했고 이 원칙은 오늘날 유한양행의 기업 이미지로 정착했다.
그러나 그의 이런 경영원칙은‘기업인의 이정표’라는 이름을 얻었지만 그에 상응하는 한계를 드러냈다.
장학·교육사업 등 앞장
일제시대는 물론 60년대까지만 해도 국내 최대기업의 하나였던 유한양행이 이제는 제약회사 서열에서조차 선두자리를 내주고 있다. 이것은 국내기업의 대부분이 정치권력과의 제휴에 성공해 외부 자본을 끌어다 사업을 확장한 반면, 유일한은 자기자본만으로 기업을 꾸리겠다는 경영방침을 고수한 데서 오는 필연적 결과로 평가되고 있다.
유일한은“외부 자본이 들어올 경우 경영이 외부의 영향을 받게 된다”며 자기자본 경영원칙을 고수했다.
유일한은 따라서 소유와 경영의 분리, 기업이윤의 사회환원은 실현했으나 정치권력과의 관계를 적절하게 설정해 기업의 성장을 도모하는 데는 실패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연만희 유한양행 사장은“이 문제는 유일한 개인에 국한된 것이라기보다는 그의 뜻을 잘 읽지 못한 후배 경영진을 포함해 우리 사회 전체 차원에서 다루어져야 할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출처] 유일한|작성자 바람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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