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샘레터 34/눈물 한 바탕]『그라시재라』라는 시집
참내, 허다허다 별 일이 다 있다. 시 서너 편을 소리내어 읽다가 눈물샘이 터진 듯 울어버릴 줄은 참말로 몰랐다. 고약한(?) 일이었다. 엊그제(12일) 전라도 광주에서 『전라도닷컴』 남신희 편집장이 선물한 시집 『그라시재라』(조정 지음, 이소노미아출판사 2022년 6월 발행, 239쪽, 16500원)이 그것이다. 맨처음 실린 시 <달 같은 할머니>를 감상할 때는 너무 좋았다. 할머니와 손녀의 대화록이다. 먼저 같이 소리내어 읽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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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무니 애렜을 때도 달이 저라고 컸어요?
아먼 시방허고 똑 같었재
할무니는 추석에 뭐 했어요?
우리 아바님 지달렸재
할무니도 아부지 있어요?
그라재 아배 없이 난 사람이 있다냐
으디서 지다렸어요?
동네 앞에 사에이치 비석 있지야 전에는 거그 큰 소낭구가 있었는디 거그서 지달렸재
할무니 혼자요?
아니 우리 성허고 동상허고 항꾼에 지달리재 아바님은 저녁에 해가 지우러야 오싱께 혼자 지달리면 무서와 그때는 할무니도 똑 너 같이 생겠어야
할무니가 나랑 똑같았어요?
그라재 할매도 너같이 열 살일 적 있었고 열한 살일 적도 있었니라
와∼최고 이상허네
이상헌 거이 아니라 사람은 다 애기로 나서 할아부지 할무니가 되는 거시여
그럼 나도 나아중에 할무니가 돼요?
안 그라믄 좋재 좀도 좋재 그란디 누구나 다 그리 된단다 악아
할무니는 추석날 되면 머 했어요?
우리 아바님은 먼 데 장사 다니신께 집이를 잘 못 오세 글다가 추석 되면 우리 댕기도 끊고 저구릿감도 끊어서 가꼬 오셌재 우리 아바님이 사온 국사로 엄니가 밤새와 추석빔 맹글어주면 그 옷 입고 달맞이허고 강강술래도 뛰고 그랬재
그때는 할무니도 여기 팔뚝 살이 흘렁흘렁 안했어요? 다리도요?
아이고 이노무 새깽이 그때는 할매 살도 희고 탄탄했재 너마니로
진짜로 할무니가 열 살일 때가 있었다고?
아먼 진짜재
할무니 그란디 왜 달은 안 늘그고 계속 그때랑 지금이랑 똑같어요?
금메마다 달은 안 늘근디 어찌 사람은 이라고 못쓰게 되끄나이
할무니 못 쓰게 안 되얐어요 달 같이 이뻐요 참말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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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떠하신가요? 시 한 편 감상할 마음의 여유가 없으신가요? 사투리 방언이 제법 있지만 이해못할 말은 없겠지요. 단지 소리내어 읽을 때 그 특유의 뉘앙스나 인토네이션 등이 문제가 될 거예요. 우리가 조정래의『태백산맥』이나 『아리랑』 이문구의 『관촌수필』 백석시인의 시를 읽을 때 모르는 단어투성이라 문해력에 방해되듯 하지는 않지요? 할무니와 손녀의 묻고 답하는 게 재밌더군요. 손녀는 할무니가 못쓰게 안되었다며 정말 달같이 이쁘다고 합니다. 전라도 출신이 아니어도 꼬옥 소리내어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그건 그렇고, 5부로 나누어진 46편의 시들은, 시골 할머니들(공산떡, 월산떡, 화순떡 등)의 마실하면서 주고받은 말들을 녹취하거나 받아적기를 한 듯한 모음집이더군요. 아마도 70대초에서 80대 중반의 나이였을 것입니다만, 지금의 농촌과도 못해도 30여년의 간격이 있을 듯합니다. 말하자면 거개가 깨 팔러 저 세상에 가신지 오래일 것입니다. <그라시재라>라는 제목부터 생소하신가요? 상대방의 아픈 사연이나 어떤 상황의 얘기를 들으면서 긍정적으로 장단을 맞추는 대꾸입니다. “아무렴, 그랬겠지요”“왜 그렇지 않겠어요” "맞아요” 의 뜻입니다. 지금은 아마도, 모르긴 몰라도 어디에서도 어떤 노인에게서도 쉽게 듣지 못할 것입니다
이런 기이한(?) 시집, 처음입니다. 시골 할머니들의 수다떠는 말들이 고스란히 시詩로 바뀌어버리는 신기한 경험을 하게 됩니다. 시집의 제목 ‘서남 전라도 서사시’는 더 특이합니다. 전라도의 서남쪽 지역(영암, 목포, 나주 등)일 것이나 ‘서사시敍事詩’가 호기심을 자아냈는데, 2부 9편의 시를 보고 고개를 끄떡였습니다. 이 할머니들은 일제강점기를 소녀시절에 겪고 1950년 인공(人共. 한국전쟁)을 적(겪)으면서 말이나 글로 못한 일들을 온몸으로 당한 이야기가 서사시로 탈바꿈된 것입니다. 9편 모두 눈물을 자아냈으나, 끝내 꺼이꺼이 울게 만든 시 <산 사람은 살아야지>를 전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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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산에 간 사람들이 거지반 죽었다든/디 떼보 각시는 살어 있다는 말 있대 자네/도 들었는가?/살았재 성님도 들으셌구만 떼보네 식구들/토벌 때 다 죽고 떼보 각시만 포로가 되야/가꼬 자응 갱찰서에 잽해 있다가 뭔 사연/인가 토벌 갱찰하고 살게 되얐다대요//그래이 사람 일을 알 수 없어이 즈그 서방/자석 죽인 웬순디 그 사나그랑 살 수도 있/으까/아이고 성님 좋아서만 산다요//양님네 아짐이 아들 혼수 헐라고 광주 갔/다가 장바닥서 잘팍 부닥쳤다능거여 입성/은 깨꼼허니 갠찬한디 아짐을 보고 낯바닥/이 노라니 밴함서 주저않을락 하드랑만 양/님네 아짐은 인공 때 저짝 사람들 손에 서방님허고 시동상까지 다 학살 당했능가안/그때 떼보 각시가 여맹위원장 맡어가꼬 동/네서 인공 노래 갈치고 그랄 땡께//오메 이 사람아 어째 이랑가 못 살 시상 살/어 남았으니 되얐네 그라지 마소 함시로/달갱게 이라고저라고 저 사는 언정을 하/드라여 살도 못 허고 죽도 못 허고 산다고/눈물바람 하드랑만//나도 으디인편에 쪼까 들었소야/딸 둘에/아들 한나 낳고 산다는디 잘 살 것이요 손/도 야물고 부뚜막 반들반들허게 살림허고/누에 칠 때 뽕이포 질로 많이 따고 안 그랍/디여//아먼 잘 살아사재 죽어불먼 어짜도저짜도/못한디 그 고비 냉겠응께 존 시상도 봐사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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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로선, 우리 고향으로도 감정이입이 될 까닭이 없는 할머니들의 인생푸념을 들으며 왜 울었을까? 위안부할머니, 강제징용 노동자, 부녀자들의 사연을 알며 분노하듯이, 좌우익 이념대립이 격화하고 동족간의 학살이 이어진 그 참담한 시절에 우리의 할머니, 어머니들이 당한 고통과 고난 이야기를 ‘육성肉聲’아니 ‘육필肉筆’로 들으니 눈물이 주르르 흐르게 된 걸 게다.
마지막으로 시인의 할머니가 시인이 어릴 적 들려준 말이 이 말이었던 모양이다. “사노라면 굳이 살아지니라/삶은 구슬과 같다/금간 구슬도 고요히 아름다운 법이다/꿰어두어라” 지독한 아픔의 연륜이 아니라면 도저히 나올 수 없는 말을 들으며, 시인의 시집의 서시처럼 쓴 제목도 없는 시 한 편을 적는다.
나는 꽃 중에 찔레꽃이 질로 좋아라
우리 친정 앞 또랑 너매 찔레 덤불이
오월이먼 꽃이 만발해가꼬
거울가튼 물에 흑하니 비친단 말이요
으치께 이삔가 물 흔들리깜시
빨래허든 손 놓고 앙거서
꽃기림자를 한정없이 보고 있었당께라
추기: 그 누가 사투리, 방언이 촌스럽다고 하는가? 사투리와 방언은 그 지역의 표준어인 것을. 이제 우리의 어매, 할무니들이 써온 말들이 시나브로, 아니 폭삭 사라지고 있다. 언어가 사라진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할머니 한 분의 말이 '언어박물관'일 수 있는 것을. 그분들은 모두 어머니 자궁에서부터 듣고 배운 '탯말'로 일평생을 일관했다. 탯말은 당연히 우리의 원초적인 언어이다. 탯말을 모르거나 잊고 사는 것은 슬픈 일이다. 지역마다 전라도탯말, 제주도 탯말, 경상도 탯말 등 탯말은 다르다.
전라도닷컴이라는 월간잡지가 있다. 잡지 이름이 '닷컴'이어서 컴퓨터나 SNS 관련이겠거니 짐작하겠지만, A4크기의 오프라인잡지이다. 밀레니엄이 시작하는 2000년 1월부터 발간된, 토종 지역잡지로, 그 지역(전라도)의 문화, 사람, 자연만 다루고 있다. 정치, 경제, 사회가 아닌 문화잡지. 지역색을 내세우는 게 아니지만, 일찌기 도올 김용옥이 '이 잡지 하나 살리지 못하고 죽어가면 전라도라 할 수 없다'는 식으로 역설하며 그 잡지 기사회생에 힘을 보태며 특강 중 <호남가>를 부르기도 했다. 이제 우리의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육성을 그 잡지에서 들을 수 밖에 없다가, 조정 시인(난 그가 누군지 전혀 모른다)의 시집을 접하고 좀 흥분했다. 전라도 출신의 조정 시인이 있듯이, 조선 팔도에 그 지역 출신의 사투리와 방언을 자유자재로 구사하고 글로 쓸 수 있는 글쟁이들이 있으면 좋겠다. 아니, 당연히 있어야 하지 않을까.
첫댓글 나는 꽃 중에 찔레꽃이 질로 좋아라
거울가튼 물에 비친 찔레꽃이
으치께 이삔가 물 흔들릴깜시
빨래허든 손 놓고 앙거서
꽃기림자를 한정없이 보고 있었당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