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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끼굴
삼산원의 주인 <호풍환우> 능유광은 진강부에서도 무림계
명사로 이름 높은 분이요, 지방 토혹 중에서도 그 지위가 자못
높으신 어른이다.
이런 유명 인사께서 하루 아침에 정체 내력도 모를 괴한들에게
습격받아 장원이 쑥대밭으로 변했으니, 기막힌 노릇이 아니고 뭐
냔 말이다.
습격자들은 백주에 공공연히 병기를 뽑아들고 쇄도해 들어갔다.
물론 장원에도 손님들이 적지 않게 묵고는 있었으나, 장추산의 행
방을 수색하러 모두 출동해 버리고 주인 나으리께서 기르는 호위
무사들도 절반 가까이 손님의 응원군 명목으로 내보낸 뒤라, 겨우
절반 남은 병력 가지고는 역불급도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호위무사들은 습격자의 무자비한 손에 깡그리 몰살당했고, 요행
으로 목숨을 건져 도망친 숫자는 불과 다섯 손가락에 꼽을 정도였
다.
그래도 주인 <호풍환우>께선 별명 붙인 대로 비바람을 일으켜
타는 재주가 있었던지 잽싸게 달아나서 한 목숨 건질 수 있었으
나, 그 으리으리하던 별장의 규모는 한마디로 묵사발, 건물 집채
며 세간 살림은 차마 눈뜨고 보지 못할 만큼 풍비박산이 나 버렸
고, 사상자도 참담할 정도로 심각해서 하루 한시도 더는 머물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 .
<호풍환우>는 이 사건을 관가에 신고하지 못했다 .
또 관가측에서도 벙어리 장님이나 된 듯 조사하지도 않았거니
와, 설령 신고가 들어갔어도 귀머거리가 되어서 귓등으로 들은 척
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무림계의 은원이란 천 가닥 만 가닥, 실꾸리처럼 얽히고 설켜
끊어지는 법이 없다. 당사자들은 한결같이 자신을 영웅호걸로 자
처하는 터라, 모든 은원관계는 자신이 풀면 풀었지 관가에 신고하
거나 관헌의 힘을 빌려 해결하는 법은 절대로. 없다 .
가령 관가측에서 주도적으로 조사를 할 경우에도, 당사자는 온
갖 핑계와 구실을 내세워 사실을 은폐하고 협조를 거절하게 마련
이다. 그렇기 때문에 관가측도 피해자의 고발이 없는 마당이라 두
눈 멀뚱멀뚱 뜨고서 추궁이나 조사에 게으름을 부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또 피해를 입은 삼산원이 관가에 신고하지 앓았는데야, 이웃이
라고 어딜 감히 신고하러 나서겠는가?
진강부 아문에서 파견관이 몇 사람 나온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
나 이들은 삼산원 현장에 들어가 사건을 조사하기는커녕 오히려
이웃한 마을 이정과 보정에게 경고를 내리고 돌아갔을 따름이다.
뭐라고 엄명을 내렸던가?
그것은 이번 삼산원의 괴상한 강도 약탈사건에 대해서 오늘 이
후 일체 거론하면 안 된다는 함구령이었다.
교활한 토끼는 굴을 세 군데나 파 놓고 산다. <호풍환우> 역시
소굴을 셋쯤 두고 있는 것은 물론이다. 그 중 하나가 강천사(江天
寺)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금산(金山) 옥대교(玉滯橋) 부
근에 자리잡고 있다.
강천사는 이 무렵 금산사(金山寺)로 개명했는데, 이 일대에 부
원림(富園林)의 명승을 끼고 거대한 장원이 한 채 세워졌고, 여기
서 대문을 나서면 바로 옥대교 왼쪽에 내학루(來鶴樓)가 마주 바
라다보인다. 또 금산에 유람차 납시려면 누구나 배를 타고 가야
한다.
능씨 댁은 개인용 쾌속선을 여러 척 갖추고 있기 때문에, 금산
장원을 드나드는 데 여간 편리하지 않다.
토끼굴 대청에는 주인과 손님측 수뇌급 인물들이 꽉 들어차 있
었다.
주인 <호풍환우> 능유광은 올해 겨우 반백의 나이, 무림계의 호
패(豪覇)라기보다는 차라리 얼굴 모습이 둥글둥글하게 잘 생긴 부
잣집 영감처럼 생겨서, 아무리 뜯어보아도 강호상에서 비바람을
마음대로 불러일으킨다는 <호풍환우>의 별명을 얻을 만한 무림의
대호걸답지 않았다.
손님들도 적지 앓았으나, 주빈(主賓)은 신분이라든가 지위, 명
망으로 보아서 누구보다 높은 영락거사 남문존신과 그 아드님 영
락 공자 남문영유 부자가 되는 것이 당연했다.
강남일지홍 역시 한 자리를 차지했다. 이 강호의 여류명사의 지
위도 결코 낮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노파로 변장했던 여인은 이제 바람막이 모자를 벗고 본래의 면
목을 드러낸 상태다. 역용술(易谷術)을 지우지 않고 머리카락에도
흰 가루를 뿌려서 아직 희끗희끗해 보이는데다 얼굴의 주름살도
거의 진짜처럼 보였으나, 초롱초롱한 두 눈망울만큼은 늙은이의
것으로 바꾸지 못하고 한창 젊은 나이의 아낙임을 그대로 보여 주
고 있었다.
"동(董) 소저 !"
<호풍환우>가 별로 시덥지 않은 기색으로 젊은 아낙 쪽을 바라
보았다. 부르는 말씨도 사뭇 기분 나쁜 투가 역력했다.
"왜 진작 손을 쓰지 못했소! 두려워서 그랬소? 그게 아니면 딴
속셈이 있어서요? 네 사람씩이나 억울하게 죽은 것은 모두 당신
책임이야!"
"능씨 나으리, 질책은 받겠습니다. 하오나 그 말씀은 공평치 못
한 줄로 생각됩니다."
노파로 분장한 동 소저의 쭈그렁 얼굴에 황공스런 기색이 떠올
랐다. 하지만 말투에는 억울하다는 뜻이 없지 않아 있었다.
"제 단장독산(斷腸毒散)은 한마디로 만성 독약올시다. 그런데
절더러 무공이 1백 배나 뛰어난 적수 앞에 나서서 도전하라니, 정
말 그랬었다가는 손을 써볼 기회도 잡지 못하고 제 한 목숨만 먼
저 날려보냈을 겁니다. 능씨 어른측에도 독을 잘 쓰는 인재가 많
지 않습니까? <백독진군>(百毒眞君)도 계시고 또 <독낭군>(毒郞
君) 같으신 분은 이 <단장화>(斷腸花) 동애고(童愛姑)의 솜씨보다
열 배는 강할 겁니다. 그런데 하필이면 절더러...."
"뭣이라구?..."
"유광 형, 동 소저를 책망하실 것 없소이다."
영락거사가 중간에서 화해를 붙이고 나섰다
"그 햇내기 녀석은 확실히 무예가 화경에 이른 놈이었소. 내가
천풍절검의 살초를 세 번이나 썼는데도 효과를 보기는커녕 하마터
면 반대로 그놈의 칼날 아래 내가 쓰러질 뻔했단 말이오. 만약 동
소저가 나섰던들, 그놈의 일검은 둘째로 치고 아마 반검(半劍)도
받아내지 못했을 거외다. 그나마 동 소저가 막바지에서 단장독산
을 뿌렸길래 더 이상 희생자를 내지 않고 철수할 수 있었던 거요.
정말 고마운 일이 아니고 뭐요?"
"그렇다고 동 소저가 성공한 건 아니잖소?"
<호풍환우>는 여전히 불만스러운 기색으로 풍파를 일으켰다 .
"유광 형, 이 아우되는 사람은 그 풋내기 녀석과 갈씨란 계집이
다른 사람에게 잡혀가는 것을 확실히 목격했소이다."
희끄무레한 팔자 수염의 중년인이 한마디 끼어들었다.
"저는 경구역 부두에서 정체 모를 두 사람에게 찍혀서 감시당하
는 바람에 그놈들이 어디로 갔는지 행방을 잃어버렸소, 하지만 지
금 한창 실마리를 쫓고 있으니까 이내 판명되리라 생각하오."
"동 소저, 그 단장독산은 목숨을 끊는 데 얼마나 시간이 걸리지
요?"
영락거사가 <단장화>를 돌아보고 물었다.
"정상적인 사람은 열두 시진쯤 걸리지요. 체내의 오장 육부가
튼튼하고 또 벽독 영약으로 치료하려 든다면, 거기서 한 여섯 시
진을 더 연장할 수 있고 말입니다."
"해독약은 어떤 거요?"
"이 <단장화>의 독문 해약을 빼놓고는, 옛날 천하 사대독왕이
다시 살아오더라도 그것을 풀어 줄 약은 없을 겁니다."
<단장화>는 오기 만만하게 덧붙였다.
"아마 <백독진군> 같으신 일세의 독괴(毒魁) 어르신도 제 말에
동의를 하시리라 믿습니다. 그분은 이독공독(以毒攻毒), 독물을
가지고 독을 치료하실 뿐이라 제 약효를 여섯 시진쯤밖에 억제할
수 있습니다. 그외에 달리 해독약은 없습니다."
"하면 그 풋내기 녀석은 반드시 죽는다 그 말이오?"
"반드시 죽습니다."
"그럼 됐군! 엎어치든 메어치든 간에, 우리 심복지대환(心腹之
大患)은 제거된 셈이니까."
영락거사는 마음이 놓이는 듯 한숨을 푹 내리쉬었다.
"우리 그 일 가지고 더 이상 마음 쓸 것 없겠군. 유광 형, 여기
일은 수고 좀 해주셔야겠소. 이 아우는 내일 아침에 강을 건너갈
예정이오."
"무슨 단서라도 잡혔소이까?"
<호풍환우>가 돌연 전음입밀(傳陰入密) 수법으로 물었다.
"아니오, 없소."
영락거사도 전음입밀로 대답했다 .
"죽일 놈들! 계속 낭패만 당하는 모양이오."
"인원수는 아직 넉넉하오?"
"충분하고 말고!"
여기까지 전음수법으로 대답을 마치자, 영락거사는 다시 모든
사람이 들을 수 있게 보통 목소리로 바꾸었다.
"제가 본래 양주를 거쳐서 북으로 올라가 회안(進安)에 계신 소
유천(小有天) 주인을 뵙고 얼마 동안 머물렀다가 천풍곡으로 돌아
가서 새해를 맞이할 작정이었소. 그런데 양주에서 사고가 났으니,
어쩔 수 없이 고향집으로 곧장 돌아가야겠구료, 얘, 영유야."
"예, 여기 있습니다."
영락 공자가 허리를 굽신하고 응답했다.
"양주 관헌들이 널 잡으려고 한다지? 죄명이야 뭐 그리 대단하
겠느냐마는, 그래도 여러 모로 불편할 게다. 더구나 양주부 아문
에는 이 애비의 친구가 하나도 없으니 어쩌겠니? 만약 수배문서라
도 나돌아 추궁을 당하게 된다면 그것 적지 않게 골치아플 테니,
너도 일찌감치 행장을 꾸려가지고 집으로 돌아오너라. 설날이라도
지내고 다시 나오면 되지 않겠느냐?"
"저는 여기서 처리할 일이 좀 남았습니다."
영락 공자가 대답했다.
"아버님께서 한 걸음 먼저 가시지요. 저는 자잘구레한 일이 끝
나는 대로 곧바로 뒤따라 가겠습니다."
"그것도 좋겠지 !"
영락거사는 고개를 주억거리면서 동의를 표했다.
"허나 더 이상 말썽을 일으키지 말아라! 알겠느냐? 유광 형님을
도와드려 삼산원을 뒤엎은 범인들이나 찾아내도록 힘쓰고 말이
다."
그 말을 계기로 대청 안 사람들의 화제가 바뀌었다. 모두들 정
색을 하고 삼산원을 습격한 범인들의 정체에 대해서 왈가왈부 의
론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영락 공자만이 어림으로나마 안춘 소저의 내력을 놓고 대충 짐
작이 갈 뿐, 그 나머지 사람들은 칼부림이 출신입화(出神入化)의
경지에 복면을 한 습격자 아홉 명, 그 중에서도 표범처럼 사납게
설쳐 대던 여섯 장한들에 대해서 아는 것이라곤 털끝만큼도 없었
다.
<호풍환우> 역시 꿀먹은 벙어리였다. 그로 말하자면 진강부에서
도 내노라 하는 토박이 용(龍)이었으나, 그로서도 삼산원 습격자
들의 정체 내력에 대해선 깜깜 절벽, 도시 맹물이었던 것이다.
이날부터 오리무중 속에서 장님 코끼리 다리 더듬듯 은밀한 수
소문이 진행되었다.
진강부 일대의 토박이 건달 왈패들까지 모두 동원하여 장터와
골목 구석구석을 샅샅이 수소문해 보았으나, 그 사건이 벌어지기
전에 습격자와 닮은 패거리를 보았다는 사람은 하나도 나타나지
않았다.
<호풍환우>는 마침내 결론을 내렸다. 그렇다면 삼산원 습격자들
은 적어도 최근 이틀 전에야 외부로부터 잠입한 고수라는 얘기가
되는 것이다.
극도로 신비에 싸인 인물, 무서운 실력을 보유한 이들이 어떻게
해서 별로 이름도 없는 안춘 소저를 위해 목숨까지 걸어가며 삼산
원을 습격, 쑥대밭으로 엎어 버릴 수 있었던가? 그것은 아무도 모
른다.
좌우지간에 이러니 <호풍환우>와 같은 혁혁한 강호 명사들을 깨
끗이 바보 멍청이로 만들었을 수밖에 !...
호거문(虎踞門) 밖 하향지(荷香池) 연못 곁의 진씨 댁, 진강부
에서도 가장 의리 깊고 인자하시다는 <신조냉표> 진홍 나으리의
대저택은 텅 빈 도깨비 집이 되어 버렸다. 하다못해 문지기조차
남아 있지 못하고 식구와 하인 하녀, 몸종 부엌데기에 이르기까지
사람이란 그림자 하나 없이 모조리 실종되었다. 도대체 어디로 사
라졌는지 온 데 간 데가 없다. 진씨 댁은 이제 침몰 직전의 배와
같았다. 배가 가라앉게 되면 선실 귀퉁이와 배 밑창에서 놀던 쥐
떼들은 말끔히 내빼는 게 상책이다 .
그것은 삼산원이 신비의 패거리들에게 치명적인 습격을 받은 직
후에 일어난 일이었다 .
이로 미루어, 진씨 댁과 삼산원 사이에는 서로 긴밀한 연줄이
맺어져 있고 또 그 소식통도 아주 정통하다는 얘기요, 따라서 그
신비의 습격자들이 쳐들어오기 전에 참새떼 흩어지듯 재앙을 피해
서 와르르 도망쳐 간 것이다.
뱀은 뱀들끼리 가는 길이 따로 있는 법이고, 쥐는 쥐들끼리 드
나드는 구멍이 있게 마련이다.
어느 한 족속이든 부류이든, 어떤 수단 방법을 써서라도 동류들
끼리 함께 숨거나 모이는 장소를 마련하는 법이다.
예를 들어보자. 좀도둑들은 어느 곳에 가야만 장물아비를 찾을
수 있는지 빤히 알고, 도박에 미친 귀신은 어느 곳에 노름판이 열
리는지 육감으로 알아 차린다. 그런가 하면 또 난봉꾼의 코는 어
느 곳에서 갈보들의 지분 향기가 풍기는지 훤히냄새맡고 귀신같이
들어서게 마련이다.
진강 부성 교외의 치안은 단도현(丹徒懸)에서 책임 맡고 있다 .
단도현의 현승(懸丞) 여씨(呂氏) 대인께선 운하 관리 업무까지 겸
하고 계시므로, 치안책임이 막중하시다. 그 수하로 일하는 포두
(捕頭) 공원경(孔元慶)은 별호가 <사해공조>(四海功曹), 사람 됨
됨이 아주 유능하고 솜씨 빠르기로 유명하다.
경구역에 주둔하는 치안 책임자 엄 주부(嚴主簿) 나으리의 수하
에는 아른바 '날치' 라는 별명을 가진 포두가 계시다. 유식한 말
로 하면 <비어>(飛魚), 성함은 도규(陶奎)라고 부르는데, 이 도
포두께서 사건 혐의자를 한 번 물고 늘어졌다 하는 날에는 철두철
미하게 진을 뽑아 놓는다고 해서 <도철저>(陶徹底)란 별명을 붙일
정도다.
이 <도철저>는 <사해공조>보다 더욱 솜씨 좋고 능력 있는 포두
로 평판이 나 있다. 이 두 양반은 경쟁 의식 따위 염두에도 두지
않고 수륙 양면으로 물 한 방울 새거나 바람 한 점 통하지 못하도
록 사이 좋게 협력해서 그 동안에 적지 않은 건수를 올려 왔다.
그래서 진강부 토박이나 타향에서 굴러 들어온 건달이나 불한당
은 섣불리 큰일 한 탕 치를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자잘구레한 부스
러기만 건드리기 일쑤요, 진짜 큰일을 벌였다가는 결코 이들 두
사람의 손아귀에서 빠져나가지 못했다.
오후가 지나서 얼마 안 되어, 공 포두와 도 포두는 제각기 포쾌
두 사람씩 거느리고 초산(焦山) 서북쪽 벽도만(碧桃灣) 하씨(夏
氏)댁에 왕림하셨다.
초산은 금산과 약 10리 남짓 거리를 두고 마주 바라보이는 산악
인데, <진강삼산> 가운데 으뜸으로 손꼽히며, 그리로 가자면 뱃길
을 이용해야 한다.
벽도만은 초산 동북쪽의 청옥오(靑玉塢)와 더불어 물가에 삶의
터전을 세우고 '강물 먹고 사는 뱃사나이들' 끼리 드나드는 연락
참이다.
또 풍랑이 심할 때는 긴급 피난항구로 쓰이기도 하는 요충지다.
진강부 일대에서 일을 저지른 호한(好漢)들은 치안요원의 이목을
피해서 통상 배를 타고 한밤중에 이 지역을 드나드는데, 치안요원
들도 그 점을 뻔히 알면서 눈감아 주는 게 관례다 .
벽도만의 하씨 댁은 명목상으로 초산의 어부라고 알려져 있다.
이름은 하명(夏明), 진강부 일대에서 별로 소문도 없는 어부의
집안이나 그 뼈다귀를 들춰보면 해양선박을 보유한 밀수꾼의 수로
안내인으로 유명하다. 동업자들 사이에는 어부 하명이 아니라 <범
상어> 즉 <호사> 하광(夏光)으로 불리우는 막강한 실력자이다.
집 안에 들어서자, <범상어>가 새끼 상어 하평(夏平), 며느리
손씨(孫氏)를 거느리고 아주 공손한 자세로 이들 여섯 관헌 나으
리를 맞아들였다. 느닷없이 방문해서인지, 영접을 하면서도 <범상
어>의 얼굴 표정은 사뭇 떨떠름하게 찌푸려졌다 .
"이봐, 범상어!..."
<사해공조> 공 포두 어른이 찻잔을 왁살스럽게 내려 놓으면서
수작을 건넸다. 말투에 손님답게 겸손한 맛이라곤 한 점도 비치지
않는다.
"진홍이 여기 없다구? 그런 수작 또 한마디라도 지껄였다가는
나하고 도철저 포두하고 이 길로 곧장 포방으로 돌아갈 거야. 그
다음에 우리 다시 만나서 다시 얘기하기로 하고 말씀이지 !"
"헤헤해, 공 포두님. 그러실 것까지야 없지 않습니까?"
<범상어>는 우거지 상판에 비굴한 웃음기를 띠고서 안쓰러운 듯
이 컷밥을 잡아당겼다.
"그 양반, 자기네 사람들을 데리고 아침 일찌기 청옥오로 떠났
습죠. 어디로 갔는지도 모르고 또 언제 돌아온다는 말도 안 했는
데, 소인이 어떻게 안단 말입니깝쇼?"
"좋아, 그 사람이 여길 거쳐서 부랴부랴 떠났다면 우리하고 일
부러 안 만나려고 피해 간 모양이로군! 나중에 만나거든 내 말 단
단히 일러두게. 복이냐 아니면 재앙이냐, 그것은 저쪽에서 택할
일이라고 말이야! 또 재앙은 머리 쳐박고 숨어 다닌다고 될 일이
아니지. 흥, 기껏해야 열흘 보름이나 숨어 다닐까? 평생토록 머리
통만 내밀고 엎드려 있지 못할 거라고 해. 알겠나?"
"그야 만나뵈오면 말씀드리겠습니다만...."
"내가 모를 줄 아나? 그 사람, 여기서 온갖 잡배 영웅 호걸들을
끌어 모으고 있단 말이다! <호풍환우> 능씨 어른과 협력해서 그
외지에서 왔다는 신비한 패거리들을 상대하려 한다는 사실, 그것
쯤은 우리도 다 안단 말씀이야. 아마 그렇게 되는 날이면 이 진강
부천지가 훌떡 뒤집히고 강물 대신에 핏물이 흐르게 되겠지? <범
상어>도 짐작하겠지만, 진짜 그 소동이 났다가는 이 공 포두하고
우리 <도철저> 포두 어른이 쪽박을 깨는 신세가 되지 않겠나? 그
래서 말인데, 제발 우리 성미 좀 건드리지 말아달라고 전해 주
게."
"또 한 가지 있어...."
이번에는 잠자코 듣고만 계시던 <도철저> 포두께서 끼어들었다.
"건청방 진강 분방은 벌써 단(壇)을 폐쇄하고 분타도 옮겨갔어
. 너희 패거리더러 자기네를 건드리지 말아달라고 부탁을 하던데,
어떤가? 피차 집쩍거려 봤자 골치 아픈 일만 더 생기지 않겠나?
그러니 잘 생각해서 처신하라구!"
"소인이 진씨 어른께 꼭 전갈하겠습니다."
<범상어>는 일단 응답을 하고 나서 다시 <사해공조>를 돌아보았
다.
"공 포두님, 속담에 '팔은 안으로 굽는다' 했는데, 맞는 말씀입
죠?"
"그렇지, 옳은 말이네."
"그렇다면 두 분 나으리께선 어째서 외지 사람을 수사하지 않으
시고 이 진강부의 토박이로 계신 능씨, 진씨 어른을 지목해서 이
러쿵저러쿵 시비를 거는 겁니까? 얘기가 거꾸로 된 셈 아닙니까?"
"문제는 너희 녀석들 신상에서 벌어졌기 때문이야!"
"우리라니요?"
"네놈들이 먼저 외지 사람들을 위해 보복을 한답시고 날뛰지 않
았더냐?"
"그럴 리가...."
"영락 공자는 어디 사람이냐? 그 작자는 외지 사람이 아닌가?
응?"
"그 사람은...."
"내 말 똑똑히 들어라, 이 죽은 <범상어> 놈아!"
<사해공조>가 버럭 호통을 쳤다.
"네놈들이 먼저 살인 방화를 저지르지 앓았는가? 그러니 저쪽에
서도 맞불을 지르고 나올 수밖에! 터놓고 말한다만, 그 신비의 칼
잡이들에 대해선 우리도 그 정체를 파악하고 있지 못한 실정이다.
허나 내가 받든 지시에 따르면, 삼산원과 진씨 어른 저택에서 누
군가 불칙한 무리들이 역모를 꾀하고 있었다고 한다. <범상어> 너
도 이 일이 얼마나 엄청난 것인지 모를 리 없겠지?"
"뭐라굽쇼? 불칙한 무리가 역모를 꾀한다구요?"
<범상어>는 놀라다 못해 입이 딱 벌어져서 다물 줄 모른다.
"그래, 불궤(不軌)를 도모하는 놈들이 있었단 말이다! 흥, 사람
이나 죽이고 불 지르는 거야 뭐 그리 대단한 일이겠느냐마는, 반
역을 도모했다가는 삼족이 멸문지화를 당할 뿐만 아니라 그 집터
를 기둥뿌리 하나 남겨 놓지 않고 파헤쳐서 연못으로 만들어 버린
다는 국법도 모른단 말인가? 30년 전, 강남 상주(上奏) 사건이 터
졌을 때 이 강남땅의 부호 향신 집안이 1만 가호나 거덜 났고, 명
사(明史) 사건 때도 참수형을 당한 선비가 2백10명이었어. 강남
충의군 사건 때는 어쨌는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죄수만도 1천
여명이 넘었지. 또 무슨 강남 과거장(科擧場) 사건이니, 통곡묘
(痛哭廟) 사건 때도 망나니의 칼이 번쩍했다 하면 최고 1천 명,
적어도 1백 명의 목숨이 날아갔었지. 그러니, 우리 강남땅은 역모
를 꾀하는 근원지로 평판이 날 수밖에 더 있겠나? 너희들이 죽고
싶어서 안달이 나더라도 제발 그런 끔찍스런 죄명일랑 쓰지 말라
구! 우리한데도 불똥이 될 테니까 말씀이다."
"그게... 어디서 나온 말입니까?"
"성방장군(城防將軍)과 강방수비(江防守備) 두 아문에 벌써부터
정보가 들어와 있었다. 그래서 진강부와 속현에 군관을 파견해서
탐문해 본 결과, 강북 양주성에서 빠져나온 잔당이 진강부로 스며
들어서 또 다시 역모를 꾀하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그
직후, 장군부와 수비부에서 그놈들의 행적을 적극적으로 탐색 체
포하라는 엄명이 부현(府懸)에 내려졌다."
"으와아! 장군부, 수비부에서 말입니까?..."
"나도 더 이상 말을 못하겠다만, 네놈들이 담보 크게 패거리들
을 동원해서 일을 저지르는 날에는, 아마도 만성(滿城)의 팔기병
관군부대가 모조리 출동해서 소탕하려고 할 것이다. 그때는 아무
도 너희들을 감싸 주지 못할 테니까, 잘 생각해 보고 처신하는 게
이로울 것이다."
포두 일행 여섯을 배웅하고 났을 때, <범상어> 부자는 온 몸이
식은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패거리를 모아들일 수 없다!... 그렇다면 모든 계획은 풍비박산
이 나는 게 아닌가? 세력을 집중시키지 못하고 무슨 일을 벌인단
말이냐?...
분산된 힘으로는 초일류급 고수를 어떻게 상대할 도리가 없을
터, 그러나 인원을 대규모로 출동시켰다가 관군의 토벌을 받고 소
굴까지 복멸(覆滅)당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독자적으로 움직여서
복수전을 추진하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
금산 능씨네 토끼굴과 초산 <범상어> 댁에 모였던 패거리들은
그날 밤중으로 당초 계획을 바꾸어 소규모 행동대를 조직하고, 전
보다 더욱 은밀한 행동으로 신비의 칼잡이들을 추적하기 시작했
다. 대규모로 공공연히 출동하는 것보다 타격력이 훨씬 제한받는
노릇이었으나, 현 상황으로는 그 수밖에 딴 도리가 없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라도 관가측의 압력을 감히 얕잡아 보아선 안 된다.
크든 작든, 관헌의 눈에 나서 좋은 결과를 얻어 본 적은 없기 때
문이다.
더구나 대 청나라 황실은 중원 통일 30여 년 이래 바야흐로 정
치를 엄정하게 바로잡기 위해 총력을 기울이고, 불순세력의 토벌
진압에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있는 때가 아닌가?
명나라 말엽부터 건국 초의 혼란기를 틈타 막강한 세력을 보유
했던 지방 토호들은 더 이상 노골적으로 불법을 저지르며 공공연
히 날뛰지 못하는 시대가 왔다. 청나라.조정 관원들에게는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토호 악패의 세력을 탄압하고 억누를 권한이 부
여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토박이 호족을 징치(懲治)하는 일을 자신의 천직
으로 여기는 청백리에게 사소한 꼬투리라도 물렸다 하는 날이면,
그 길로 변발 댕기 머리채를 잡혀서 형장으로 끌려가는 신세가 되
는 것이다.
민심이 무쇠덩어리라면, 국법은 용광로라고 할 수 있다. 진강부
의 호족 악패들과 강호상에서 의리를 내세우는 나으리들께선 무쇠
덩어리도 아니고 강철도 되지 못한다. 그런데 어딜 감히 국법의
용광로를 무릅쓰고 한탕 벌일 엄두를 내겠는가?
이리하여, <능소객>과 <호풍환우>의 피비린내나는 대규모 복수
전 계획은 풍비박산이 나고, 장추산과 신비의 칼잡이 세력을 상대
로 치고받고 죽이고 다치는 소규모 암투만 전개되기 시작한 것이
다.
경구역 부두 최남단으로부터 1리 밖쯤 떨어진 강변에는 언제부
터인가 여객 화물선 한 척이 닻을 내리고 있었다. 조하의 물길을
이용하는 항행 선박으로 친다면, 이 배는 승객도 태우고 화물도
싣는 중형급 대선에 속한다.
규모가 큰 무역상은 보통 이 정도의 개인용 선박을 갖추고 있어
서, 긴급한 화물이나 적은 인원을 수송하느라 선행(船行: 선박회
사)의 배를 세내지 않는다.
이 중형 대선은 선실도 완벽하게 꾸민데다가 쌍돛대를 장착했
다.
날이 어두워졌어도, 돛대에 규정대로 안전등을 밝히지 않고 선
박 안팎이 온통 캄캄 절벽, 사람의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는다. 배
는 이물과 고물 양쪽으로 어른의 팔뚝만큼이나 굵다란 삼밧줄을
늘어뜨려 강기슭 말뚝에 비끄러매였는데, 우현(右舷)을 바깥쪽으
로 향한 것을 보건대, 상류로 거슬러 올라가던 배인 듯 싶었다.
길다란 디딤 널판이 좌현 갑판으로부터 뻗어나와 강뚝까지 걸쳐
놓았는데, 제방(堤防)에는 해묵은 버드나무가 줄줄이 늘어서서 찬
겨울 바람에 메마른 가지를 너울거리고 있다.
이따금씩 지나가는 바람 소리, 물결치는 소리가 한바탕 울릴뿐,
사방 천지는 고요하기만 하다.
북쪽으로 흐르는 강물도 갈수기를 맞아서 거의 움직이지 않고
있으나, 흐름을 멈춘 물은 살얼음이 잡힐 정도로 차가워서, 발가
락만 담가도 뼈속이 시릴 판이라, 미친 녀석이 얼어 죽으려고 환
장하지 앓고서는 이런 물 속에 들어가서 활개칠 자는 하나도 없을
것이다.
날도 어둡고 물도 캄캄하다. 설령 사람이 있다손 치더라도 움직
임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딸랑, 딸랑!..."
선실 안에서 작은 종소리가 은은하게 들려나왔다. 물론 외부 사
람은 그 종소리에 무슨 뜻이 담겼는지 모를 것이다 .
"와당탕! 쿵쾅!"
급작스레 사나운 음향이 터지더니, 좌현의 선실 창문이 한꺼번
에 와장창 열리면서 밧줄 10여 가닥이 무더기로 쏟아져 나왔다.
밧줄 한 가닥의 길이는 대략 3, 4장, 밧줄과 밧줄의 간격은 1
척, 얼핏 보아서는 삼밧줄 같으나 실상은 구합금사(九合金絲)로
꼬아 만든 특제품으로서, 밧줄 2척쯤 되는 부분에 또 그물처럼 가
로끈을 두 가닥씩 늘어뜨리고 있는데, 한 가닥마다 낚시바늘처럼
구부러진 갈고리가 세 개씩, 그것도 네 방향으로 날카로운 끄트머
리를 내밀고 매달려 있었다. 창칼로도 끓지 못하는 가느다란 철사
를 여러 겹 꼬아서 만든 밧줄에다 네 갈래진 갈고리를 여럿 매달
았다면 바로 관군이 전투에서 적의 기병대를 거꾸러뜨릴 때 쓰는
요구삭(攬鉤索)이다.
배의 길이는 9장 5척, 선폭은 2장 4척이다.
요구삭의 길이와 수량, 여기에 선박의 외형 규격으로 보건대, 9
장 남짓한 이 배위 바깥쪽 수면 4장 면적은 물 위에서부터 물 밑
에 이르기까지 모두 요구삭의 통제 아래 들어 있다는 얘기가 된
다. 이쯤되면 아마 몸통이 좀 커다란 물고기는 갈고리에 얽혀들기
십상일 것이다.
갈고리 밧줄은 흡사 강변에 주낚을 늘어뜨린 형태로 퍼져 있다.
물 밑에서 본다면 천라지망(天羅地綱)을 덮어씌운 형국인 셈이다.
"풍덩!... 쏴르르!..."
갑자기 물보라가 사방으로 흩날렸다.
어느 틈에 나타났는가, 좌현 갑판 위에는 검정 옷차림의 뱃꾼
20여 명이 한 줄로 늘어서서 '어영차, 영차!' 구령을 맞춰가며 밧
줄을 당겨 올리기 시작했다.
요구삭에 걸려든 물고기(?)는 도합 두 마리, 비단제 잠수복을
걸친 이들은 갈고리 밧줄을 끊으려고 필사적으로 분수도(分水刀)
를 마구 휘두르면서 끌려 올라왔다.
뱃전에 거의 닿을 때가 되자, 이들은 칼도 팽개치고 두 손으로
갈고리 끝을 뽑아내려고 몸부림쳤다. 절망적인 몸부림, 그러나 손
등 팔뚝까지 날카로운 갈고리에 찢고 찍혀 선혈만 낭자하게 흩뿌
릴 뿐, 발버둥칠수록 저항력만 떨어지니 어쩌면 좋으랴?
"생포하라!"
앞쪽 선실에서 엄한 호통소리가 들려왔다.
잠시 후, 배는 또 다시 무거운 정적에 잠겼다.
포로들도 선실 안으로 끌려 들어가고, 창문도 단단히 닫혔다.
그 무시무시한 요구삭도 가지런히 정리되어 특별히 설치된 발사
통안에 다시 장전되었다. 수면이나 물 밑으로 침입해오는 자가 있
으면 또 언제든지 발사되어 깡그리 낚아 올릴 태세가 갖춰진 것이
다.
얼마 안 있어, 이번에는 제방 외곽 반 리쯤 떨어진 언덕비탈에
서 움직임이 보였다 .
쥐색 경장 차림의 괴한 20명이 4개 조로 나뉘어 낮은 포복과 개
구리 뜀뛰기 동작을 반복하면서 강뚝을 향해 접근하더니, 선두가
먼저 강뚝 머리에 납죽 엎드려 아래 쪽 강변을 굽어보았다 .
괴선박은 어둠침침한 형체만 드러낸 채 이따금씩 기우뚱거릴뿐,
갑판 위에는 귀신의 그림자조차 없다.
"삐익 !---- "
휘파람을 신호로, 네 조의 괴한들이 일제히 강뚝에 올라섰다.
그와 동시에 괴선박에서도 반응을 나타냈다.
"댕!..."
징을 울리는 소리가 길게 여운을 끄는 동안, 선실 창문이 한꺼
번에 활짝 열리고 스무 자루 남짓한 횃불이 내밀어 나왔다. 활활
타오르는 불빛 아래, 강변은 삼시간에 대낮처럼 밝아졌다.
"뎅!..."
징이 또 한 차례 울리자, 이번에는 강뚝 뒤편 잿빛 괴한들의 배
후에 유령 같은 물체가 연속으로 나타났다. 방패 네 개와 넉 자루
의 협봉단도로 무장한 전열(戰列)이 8개 조, 횃불 빛이 환하게 비
치는 가운데 도합 32자루의 협봉단도가 눈부신 서슬을 번뜩이고,
장방형 무쇠 방패 32개가 철벽을 이루었다
"내려가서 결판을 내자!"
잿빛 괴한 중에서 누군가 큰 목소리로 명령을 내리더니, 자기부
터 앞장서서 괴선박을 향해 돌진하려 했다.
이에 응답이라도 하듯, 좌현 갑판 뱃전 아래 엎드려 있던 사수
(射手) 20명이 일제히 허리를 펴고 일어섰다. 스무 개의 활 시위
가 천천히 당겨지면서 늑대 이빨처럼 예리한 낭아전(娘牙箭)의 살
촉을 번뜩였다.
명령 일하에 일제사격이 퍼부어질 판국인데, 어느 미친 놈이 돌
격을 감행한단 말인가? 이래서 잿빛 괴한들의 발걸음이 주춤했다.
고물쪽 선실 문이 열리고 여우 가죽옷을 입은 사람 셋이 걸어
나왔다.
이들은 갑판 위에 뒷짐지고 서서 강변 제방 쪽을 바라보기 시작
했다. 그 천연덕스런 태도는 참혹한 살육전을 지휘하려는 게 아니
라, 밤경치라도 즐기듯 여유만만하기 짝이 없었다.
"자백을 다 받아 놓았는데, 뭣하러 또 죽으러 오는지 모르겠
군."
셋 중 키가 좀 훤칠한 사람이 일부러 목청을 높여 중얼거렸다.
제방 쪽 괴한들에게 들리라고 하는 소리다.
"아무렴, 산 놈은 더 필요없는데 말이지!"
또 한 명이 맞장구를 쳤다.
"혹시 저놈들 속에 중요 인물이 있을지도 모르잖나?"
우두머리쯤 되는 자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모조리 죽여 없애자
는 얘기에 동의할 수 없다는 투였다.
"몰살해 버리면 나중에 뭐라고 해명을 한단 말인가?"
"아마 수뇌급 인물은 오지 않았을 겁니다."
키다리가 말을 받았다.
"꼭 그렇다고만 볼 수 없지, 좀 물어 본다고 헤서 뭐 그리 힘들
게 있나?"
"그래도 좋겠군요."
"가만 있게, 우선 내가 수작을 건네 볼 데니까."
우두머리는 동료의 입을 막아 놓고 제방 쪽을 향해 소리쳤다.
"어이 ! 당신네 중에 <호풍환우>나 <신조냉표>는 없소?"
강뚝 위, 잿빛 괴한 스무 명은 하나같이 검정 두건으로 복면을
해서 신분과 내력을 알 수가 없다. 괴선박 쪽에서 수작이 건너가
자, 이들 중 선두가 앞으로 몇 걸음 더 나섰다.
"당신들, 도대체 어디서 온 패거리인가? 먼저 이름을 밝히시오!
어쩌면 우리 서로 친구가 될 수도 있으니까."
"친구가 되다니 ! 네놈들이 뭐 말라 비틀어진 물건인데 우리하
고 맞먹겠다는 거야? 죽일 놈들, 어디다 그 따위 아가리를 놀려?
에잇 퉤 !"
괴선박의 우두머리는 한바탕 욕설을 퍼붓고 더럽다는 듯이 뱃전
바깥으로 가래침을 탁 뱉았다.
"네놈들, 장추산의 친구들이지?"
제방 쪽에서 또 힐문을 던져왔다.
"공연히 혓바닥 놀릴 것 없어 ! 이제 너희들한테 살 기회를 주
겠다. 누구든지 영락거사 부자의 은신처를 자백할 의향이 있는 놈
은 병기를 내던지고 이 배로 올라와라. 이게 목숨을 살릴 유일한
기회니까, 쉽사리 넘겨 버리지 않도록! 자, 누가 첫번째로 올라오
겠나?"
"삐이익 ! -----"
오만불손한 제의에 응답은 날카로운 휘파람 소리, 공격신호가
떨어지자 강뚝 위의 괴한들은 일제히 무릎을 오므리고 용수철 퉁
기듯 몸을 날려 제방 아래로 돌진했다.
그러나 제아무리 빨라도 강궁(彈穹)의 시위 소리보다 더 빠르
랴! 공격자의 휘파람 신호가 울리는 찰나, 갑판에서도 첫 발의 화
살이 힘차게 시위를 떠났다. 그 다음에는 일제사격, 활시위가 미
친듯이 울리는 가운데 화살이 기슭 쪽을 향해 우박같이 날아갔다.
"퓽! 퓨웅!..."
"쏴아아!----"
"으왁!... 으아앗!..."
참담한 외마디 비명이 꼬리를 물고 터졌다. 잿빛 괴한들은 20명
가운데 삽시간에 3분지 1 이상이나 거꾸러졌다.
그와 동시에 배후 퇴각로를 차단하고 있던 방패진이 움직였다.
넉 자루씩 8개 조로 편성된 서른 두 명의 도수(刀手)들이 볼 좁
은 칼끝을 방패 사이로 내민 채, 보무도 당당하게 밀려와서 괴한
들을 에워싸기 시작했다.
왼쪽 손아귀로 움켜잡은 방패가 정면의 요해 부위를 가리우고
있으니, 제아무리 강력한 뚝심으로 암기를 발사해 봤자, 이런 종
류의 철엽순(鐵葉盾)을 꿰뚫고 들어갈 수 없을 터요, 도검으로 후
려치고 찔러 봤자, 아무 짝에도 쓸 데가 없다.
"으와, 안 되겠다! 후퇴해라!"
그 광경을 바라본 괴한 10여 명은 간담이 뚝 떨어져 아우성을
쳐가며 달아나려 했다. 전의(戰意)를 상실하면 백만 대군도 오합
지중, 하물며 병기 장비는 물론이요 수적으로도 까마득히 열세에
처했으니 이 엄청난 살겁(殺却)에서 무슨 재간으로 도망칠 수 있
단 말인가?
거북이 잔등처럼 밀착한 방패진이 겹쳐지면서 방패와 방패 사이
로 협봉단도가 한꺼번에 불쑥 찔러나왔다. 한 번 내찌를 때마다
한 목숨씩 날아갔으니, 참혹하기 이를 데 없다.
잠시 후, 강변 부근에는 피비린내만 남겨 놓고 더 이상 얼씬거
리는 사람의 그림자가 보이지 않았다.
하늘과 땅은 암흑 속에 잠기고, 모든 것은 다시 고요한 정적으
로 돌아갔다.
금산 옥대교 근처의 대저택, <호풍환우>의 토끼굴에서는 영락거
사가 부하들을 거느리고 떠난 직후 외부로 나가서 움직이기로 한
패거리들마저 앞다투어 배편으로 부랴부랴 토끼굴을 버리고 달아
났다.
<호풍환우> 역시 측근 호위무사만 데리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심복들조차도 주인이 어느 곳으로 옮겨갔는지 전혀 알지 못했
다.
영락 공자는 떠나지 않았다. 아버지 영락거사를 배웅한 후, 그
는 주인도 없는 객청을 독차지하고 느긋이 자리 잡았다.
강남일지홍은 벌써부터 영락 공자의 정부(情婦)로 인정받은 터
라, 공공연히 사내와 한방에서 밤낮없이 묵었다.
객청 침실에는 난롯불이 훈훈하게 피워져서, 한겨울철의 추위라
곤 한 점도 느낄 수 없다.
하녀도 이들에게 뜨끈한 찻주전자를 가져다 주고 눈치 빠르게
물러났다.
"간악한 매국노도 처치했으니까, 이제 마음이 놓이는군 천향,
아직도 무슨 걱정거리가 있소? 얼굴 펴지는 걸 못 보겠으니 말이
오."
영락 공자는 아주 근심스런 기색으로 물었다. 강남일지홍이 앉
아 있는 의자 곁에 서서 그녀의 귀밑머리와 뺨을 쓰다듬어 내리는
두 손길이 아주 다정스럽기 이를 데 없다.
"그놈을 산 채로 붙잡아서 자백을 받아 내지 못한 것이 정말 한
이에요."
그녀는 무거운 마음으로 중얼거렸다.
"삼차하 밀고사건은 그놈 혼자서 될 일이 아니었어요. 장추산같
은 놈은 어떤 일을 주재할 위인이 못 되거든요. 그러니까 반드시
어떤 유능한 수뇌급 인물이 따로 있을 게 분명해요. 그놈 하나만
죽였다고 해서 저는 조금도 달갑지 않단 말이에요."
"천향, 이번 일은 부득이해서 그렇게 된 거요. 우리 능력이 모
자라다고 탓할 일이겠소? 그놈처럼 무공을 헤아리지 못할 고수를
생포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보아야 할 거요."
"영유, 제가 왜 당신들을 탓하겠어요?"
그녀는 얼른 사내의 입을 막았다. 그리고는 얼굴에 와서 닿는
손길을 와락 끌어당겨 뜨겁게 입맞춤을 했다.
"저도 그놈의 무공 조예를 완전히 잘못 짚었어요. 지금 생각만
해도 소름이 쪽 끼치고 몸서리가 쳐지는 걸요. 아, 참! 영유, 당
신 혹시 내 신분을 아버님께 말씀드리지는 않았죠?"
"이런 바보같으니! 내가 뭣하러 그 얘기를 하겠소?"
영락 공자는 아예 의자 팔걸이에 걸터앉아서 그녀의 어깨를 감
싸안았다.
"사실 말이지, 아버님을 포함해서 우리와 같은 강호의 호걸들은
명예와 이익을 위해서라면 죽음도 삶도 일체 도외시하고, 서로 죽
이고 싸우느라 마음 편한 날이 하나도 없는 사람이오. 수틀리면
칼부림부터 벌이니, 서슬 퍼런 칼날을 뱃속에 쳐박았다가 시뻘겋
게 물들여서 뽑아내는 것이 우리 생활 아니오? 오직 강자가 되기
위해서 싸우고 오로지 이기기 위해서 생사를 등한시하는 것이 바
로 아버님과 나같은 강호인이란 말이오."
"어디 강호인이라고 다 그렇겠어요?"
"아니야, 만약 당신네 천지회에 우리 같은 사람들을 끌어들여
무슨 반청복명이니 민족대의니 하는 명분으로 함께 일하자고 요구
한다면, 아마 모두들 염병이나 옮는 것처럼 귀를 막고 도망쳐 버
릴거요. 능 선배 같은 사람은 당신이 천지회 소속원이라는 사실만
알아도 당신 목숨을 없애 버리려고 들 거요."
"아이구머니 ! 그럼...."
"그런 사람들은 제 몸에 불똥이 튈까봐 늘 전전긍긍하고 있지 !
그러니 아궁이에서 잘 타는 장작불이라도 끄집어내서 꺼 버리고
싶지 않겠소? 또 당신을 쥐도 새도 모르게 죽여 없애야만 천지회
와 시비거리도 안 생길 데고 관가의 추궁도 모면할 테니, 이른바
<부저추신>(釜底抽薪)의 수단만이 유일한 양수 겹장이 될밖에 !"
"영유, 그럼 당신은 어때요? 당신도..."
"내가 천지회를 존경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당신도 잘 알지 않
소? 물론 내 욕심도 없지 않아 있긴 하지만..."
"욕심이라니요?"
"바보 멍텅구리 아가씨 ! 내가 당신을 좋아한단 말이야."
영락 공자는 그녀의 뺨에 쪽 소리가 나도록 입을 맞추더니, 싱
글벙글 웃어가며 부드럽게 속삭였다.
"그렇기 때문에 당신 하는 일을 좋아하기도 하지. 천향, 내 당
신한테 분명히 해 둘 것이 있어."
"뭘 분명히 해요?"
"난 당신 일을 암암리에 도와줄 수 있을 뿐이야."
영락 공자는 사뭇 심각한 표정을 짓고 말을 이었다. 이상하게도
눈빛은 화롯불보다 점점 더 뜨겁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또 당신 개인에 한해서만 도움을 줄 수 있소. 천지회와
는 전혀 상관없이 말이오. 솔직히 말해서, 나는 천지회 사람들이
하는 일에 참여하고 싶지도 않고 또 그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
오. 내 말뜻 이해하겠소?"
"알아요. 저도 당신께 우리 회의 일을 해 달라고 부탁드릴 생각
은 없으니까, 안심해요."
"그럼 됐군! 나는 당신만을 위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다하겠소. 이것은 당신과 나 사이에 애정 때문이지, 그
밖의 딴 일과는 결부시킬 것이 못 된단 말이오. 천향, 혹시 이곳
책임자와 무슨 연락 같은 것은 없었소?"
"연락은 닿았어요."
"그 사람들이 당신한데 무슨 지시를 내립디까? 내가 암암리에
돌봐 줄 일은 아닌지 모르겠군."
"강녕부 쪽에서 책임자 되시는 분이 조만간에 오실 거예요. 삼
차하 사건 진상을 추적 조사하는데, 그 일을 주재하실 모양이에
요. 영유, 부탁이에요. 뒤에서나마 절 돌봐 주시는 일일랑 그만
두세요. 공연히 오해를 불러일으키게 되니까 말이에요. 그분들깨
오해라도 사는 날이면... 저는... 저는 당신 곁을 떠나게 될지도
몰라요. 영유, 난 당신 곁에 있고 싶어! 정말 못 떠나겠어!..."
그녀는 격렬한 몸짓으로 영락 공자를 부여안았다. 그리고 눈물
이 그렁그렁 맺혀서 미친 듯이 사내의 입술을 찾아 물어뜯었다.
이것이 그녀의 진정이었다. 그녀는 이 영준하고도 정열적인 애
인을 죽도록 사랑했다. 자기 본연의 공작업무에 대한 열정도 예나
다름없지만, 지금 이 자리에서만큼은 잃어버린 나라를 찾기 위해
죽음의 문턱을 넘나드는 그런 피비린내 풍기는 살벌한 광경은 차
츰 모호하게 흐려져 가고 있었다.
그녀라고 쇳덩어리를 부어 만든 사람이 아니요. 바윗돌로 다듬
어 만든 사람도 아니다. 그녀는 자신의 감정에 속한 삶을 누릴 필
요성도 있거니와 또 그럴 권한도 있었다.
영락 공자가 바로 그 감정 생활의 중심이었다.
이 사내는 그녀가 분투 노력하는 목표에 도움을 주었고, 그녀의
신념에 대해 격려해 주었지, 결코 책망하거나 저지하는 일은 없었
다. 그리고 뜨겁게 사랑해 주었다. 이런 모든 것들이 바로 그녀가
영락 공자를 죽도록 사랑하게 만든 원인이기도 했다.
성 남쪽으로 7, 8리쯤 떨어진 회룡산(廻龍山), 시든 나무 숲이
두루 깔린 작은 산골짜기에 세 칸짜리 아담한 정사(精舍) 한 채가
암벽을 의지해서 세워져 있다 .
이곳은 사람의 발길이 드물어서 숨어 살기에 안성맞춤이다 .
봄 가을철 한창 좋은 시절이면 아리땁게 차려 입은 젊은 남녀
유람객들이 팔공암(八公巖)의 동굴을 구경하러 찾아들지만, 여느
때 나무꾼이나 지나치다 시냇물에 발 담그고 땀을 식히러 드나들
까, 이 작은 산골짜기를 거쳐가는 유람객은 전혀 없다.
정사 내실은 온통 참담할 정도로 깊은 수심의 구름에 덮여 있었
다.
침상은 두 개, 왼쪽 병상에 누워서 식은땀을 뻘뻘 흘리는 사람
은 장추산이었고, 바른쪽 침대에는 갈패옥 소저가 누워 있다 .
그녀는 벌써 오래 전부터 엄청난 복통의 충격에 시달리다 못해
녹초가 되어서 절반쯤 혼미상태에 빠진 채로 이따금씩 고통을 호
소하는 신음성만 내고 있다 .
고통은 아주 극렬하게 엄습했다. 하지만 간헐성(間歇性)의 진통
이라, 약 반 시진에 한 차례씩 밀어닥쳤다. 또 일단 진통이 밀어
닥쳤다 하면 1각 남짓한 동안 견딜 수 없게 흉악을 부려서 환자를
초주검 상태로 만들어 놓곤 했다. 증세는 오장 육부를 쥐어짜다
못해 금방이라도 끓어질 정도로 무서웠다.
환자들은 파도처럼 줄기차게 밀려드는 격심한 고통을 견뎌 내느
라 얼굴빛이 시퍼렇게 질렸다. 정말 무쇠로 두드려 만든 사람이라
도 그 고통 앞에서는 붕괴당하지 않고 배기지 못할 정도였다.
장추산은 아픔을 참고 또 참아가며 한 차례 한 차례씩 진통을
겪어냈다. 정신을 잃지 앓는 만큼, 그 고초도 이루 말할 수 없었
다.
낯익은 하녀 두 사람이 뜨거운 물그릇과 숯불 화로를 돌보느라
줄창 흘러내리는 얼굴의 땀을 훔쳐낼 겨를도 얻지 못한다. 몸종
소도는 갈패옥을 돌보았다.
안춘 소저는 몸소 장추산을 돌보았다 .
이들 두 간호인은 환자의 고통을 덜어 주느라 쑥뜸질을 하고 내
장이 수축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 뜨거운 습포를 배에 덮어 주었
다.
오장 육부와 근육을 풀어 주기 위해서 부득이한 방법이겠으나,
그것은 한마디로 모험이었다.
냉뜸이든 열뜸이든, 원인 불명의 복통을 치료하는 데 있어서 둘
중 어느 것이나 모두 상당한 위험을 각오해야 했다. 증상에 맞지
않거나 또는 사용법이 옳지 못할 경우에는 오히려 증세를 악화시
킬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은 그저 눈앞에서 환자의 고통을 덜어주기만 애타게
추구할밖에 달리 선택할 방도가 없었다.
쑥뜸이나 뜨거운 습포는 환자의 극심한 고통을 다소나마 풀어주
는 데 효과가 있긴 했다.
약 한 시진을 주기(週期)로 밀어닥치는 진통의 기세는 그야말로
뇌정만균(雷霆萬鈞), 환자를 미쳐 날뛰게 만들도록 무서웠다.
발작이 일어날 때마다 안춘 소저와 그 나머지 사람들은 놀라움
과 두려움에 손을 어떻게 써야 할지도 모른 채 그저 곁에서 덜덜
떨기만 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으면서도 진통이 물러갔을 때,
이들은 환자나 다를 바 없이 소금에 절인 채소처럼 기진맥진한 상
태가 되어 있었다.
네번째 발작이 찾아들었다. 그것은 중독당한 이후 지금까지 네
시진이 경과했다는 것을 의미했다.
안춘 소저는 눈물을 머금고 또 다시 바쁘게 뜸질을 시작했다.
진통이 시작되면서, 장추산은 또 다시 어금니를 악물고 고통을
참아 내고 있었다. 시퍼렇게 질린 얼굴에서 끊임없이 배어나오는
땀방울, 힘줄이 시퍼렇게 돋아난 목덜미를 바라보는 동안, 그녀
역시 똑같은 고통을 느끼고 입술이 터져라 악물었다 .
"하늘에 맹세코!..."
그녀는 울음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하늘에 맹세코 내 그 영락장을 피바다 도살장으로 만들어 버릴
거야! 어디 이 두 손에 그놈들의 피를 묻히나 안 묻히나 두고 봐
라!..."
"그런 말... 하지 말아요, 소춘."
장추산은 얼굴에 억지 웃음을 쥐어짜냈다.
"이게 바로 강호 뜨내기들이 겪어야 할 일이고 인생이 아니겠
소? 인간이란 누구나 자신의 생사와 이해를 걸고 싸우게 되면 냉
혹하고 비정해지는 법이오. 일단 죽음과 삶의 갈림길에 서게 되면
온갖 수단을 다 써서 상대방을 죽이고 자기를 보전할 수밖에 없는
거요, 죽든 살든, 모두가 하늘의 명에 달린 것인데 누굴 원망하겠
소?"
"추산! 그래도 나는...."
"원한과 보복이란 끝도 없는 거요. 한평생을 영원히 증오 속에
서 살아야만 한다면 그렇게 산들 무슨 의미가 있겠소? 이 일은 단
순히 나하고 영락거사 부자 사이에 맺어진 원한이오. 그러니까 영
락장의 다른 사람들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소. 소춘, 내 부탁을 하
나 들어 주겠소?"
"무슨 부탁을 들어 달란 거예요?"
"들어 주겠노라고 승낙부터 하시오."
"그건.... 알았어요. 승낙하죠!"
"나를 매장할 때, 그 원한도 복수심도 함께 묻어 주시오."
"추산!... 당신... 당신이...."
그녀는 두 손으로 누르고 있던 열뜸 수건을 치워 버리더니, 장
추산의 목덜미를 끌어안고 울음을 터뜨렸다. 얼음보다 더 차가운
목덜미의 살갗에 뜨거운 눈물이 철철 쏟아져 주름살을 타고 흘러
내렸다.
"난 승낙 안 하겠어! 난... 그렇게 못 해요!... 내 귀에 그런
불길한 말은 안 들린단 말야! 당신은 날 버리고 떠날 수 없어
요!... 추산, 추산! 제발 나를 위한다면 살아줘 ! 날 좀 생각해
달라구요!..."
"틀렸어, 안 되는 일이야..."
장추산의 목소리가 한층 굳어졌다.
"이것은 내장을 천천히 삭여서 마지막에는 녹아 없어지게 만드
는 기막힌 극독이오. 백전금단(百轉金丹)을 쓴다 한들, 아무런 효
력도 없을 거요. 나는 잘 알고 있소. 이제 내 의지력으로 한 시진
이나 더 버틸까, 그 다음에는 회천(廻天)하고 싶어도 지쳐서 안
될거요."
진통이 차츰 가실 무렵, 맞은편 침상에 누워 있는 갈패옥도 깨
어났다.
"추산 오빠, 당신... 당신 그 내공력으로 독물을 몰아내면 안
돼?"
꼬마 아가씨는 목소리가 떨려나왔다.
"지난 번에는 곧잘..."
"바보 같으니, 내공력으로 이물질을 몰아내는 것도 한도가 있는
거야."
장추산의 목소리가 몸뚱이와 더불어 나른하게 풀리기 시작했다.
고통이 썰물처럼 급속하게 빠져나가는 모양이다.
"외부에서 타격으로 가해진 독룡장독은 근육과 뼈에 스며들지
만, 근육이나 골격은 모두 내 능력에 따라 통제되니까 독을 몰아
낼수 있었지. 허나 이번의 독물은 내장에 침투했어. 오장 육부를
통제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나? 제아무리 의지가 강하고 공력이 뛰
어난들 위장의 소화작용을 멈추게 할 수 없고 또 간장의 혈액 정
화작용을 막을 수야 없지. 난 그런 일을 못해... 소패, 정말 미안
하구나. 네 어머님한테 뭐라고 변명을 해야 좋을지, 난...."
"어째서 미안하다는 거예요? 추산 오빠...."
종잇장처럼 창백한 갈패옥의 얼굴에 발그레하니 달무리가 떠올
랐다. 피곤에 지쳐 흐리멍텅하던 눈망울에도 기이한 광채가 용솟
음쳐 나왔다.
"살아도 좋고, 죽어도 좋아요. 당신하고만 같이 있으면, 나는
이만큼 살다 죽더라도 유감이 없어요. 추산 오빠, 난 지금 아주
행복해..."
"뭐라구, 행복?"
깜짝 놀란 장추산이 곤혹스레 되물었다.
꼬마 아가씨의 번들거리는 눈빛 속에서, 그는 무엇인가 발견한
것이다.
어쩌면 이 솜털도 미처 가시지 않은 소녀가 그에 대해서 단순한
오누이간의 감정만을 품고 있지 않는지도 모른다.
"그래요, 행복하단 말이에요."
꼬마 아가씨는 깜찍스럽게 한마디로 수긍했다.
"추산 오빠, 당신하고 나하고 생사환란을 함께 겪었다는 게 죽
는 것보다 더 소중하다고 생각되지 않아요? 우리가 만난 시간은
비록 짧디짧았고 또 앞으로도 몇 시진밖에 안 남았지만, 그게 무
슨 상관이에요? 길이 오래오래 사랑을 지녀야만 행복하다고 누가
그랬어요? 평생을 누리든, 하루 아침 이슬처럼 짧게 누리든, 그게
진실한 행복과 무슨 상관이 있나요?"
"피이 ! 요것이 머리통 좀 커졌다고 못하는 말이 없구나!"
가만 듣고 있던 안춘 소저가 펄쩍 뛰어 일어났다 .
"쬐꼬만 것이, 흥얼흥얼 사랑 타령이나 늘어 놓고! 창피스럽지
도 앓아? 요 빤빤한 것아. 난 너하고 달라! 숨 한 모금이라고 붙
어있는 한, 나는 절대로 희망을 버리지 않을 거야. 모진 운명 앞
에 고개 수그리는 짓은 절대로 못 해! 추산, 절망하지 말고 버티
고 있어요! 날 기다려 줘 !"
"소춘!..."
장추산은 급히 손을 내밀었다. 허나 그녀를 붙잡지는 못한다 .
"당신 어딜 가려구?..."
안춘 소저는 고개를 바짝 쳐들고 방을 나섰다. 문턱을 넘어서기
직전, 그녀는 다시 돌아서서 눈물이 글썽글썽 맺힌 눈으로 잠시
그를 바라보았다.
"날 기다려요, 추산."
결연하고도 정중한 두 마디를 남긴 채, 그녀는 다시 돌아서서
휘적휘적 걸어나갔다 .
3경 이슥한 밤, 경구역 부두 북쪽 끄트머리.
검정빛 경장 차림에 역시 검정 가죽 조끼를 입은 안춘의 모습이
나타나자, 화물 선착장 어두운 그늘 속에서도 검정 도포 차림의
사내가 흑의인 두 사람을 거느리고 불쑥 뛰쳐나왔다. 모두들 협봉
단도로 무장을 갖추었다.
그녀가 검정 도포 차림의 사내에게 먼저 인사를 올렸다. 수행한
흑포인은 그녀에게 공손히 예를 올렸다.
"너 정말 함부로 날뛸 셈이나?"
검정 도포의 사내는 댓바람에 엄한 목소리로 꾸짖었다.
"내가 뭘 함부로 날뛰었단 말예요?"
그녀는 항변했다.
"내 하는 일은 나 자신이 책임질 테니까, 당신은 참견하지 말아
요."
"하지만 큰일을 그르칠까봐 무섭다."
"그만 됐어요! 여태껏 내가 설쳐 대지 않았던들 당신이 무슨 성
과를 올렸겠어요? 양주에서도 그렇죠, 내가 소동을 벌이지 않았더
라면 거기 잠복해 있던 그 숱한 불순분자들을 당신이 어떻게 색출
해 낼 수 있었단 말이에요? 흥, 그날이 와서 일이라도 삐끗했다가
는 당신 목이 열 두 개라도 안 떨어질 듯 싶어요? 그러니까 여기
서도 마찬가지, 내 하는 일에 간섭은 말아요!"
"모든 정세는 내 손아귀에 장악되어 있어 ! 그 따위 엄포로 사
람 놀라게 하지 않았으면 좋겠군. 여기 녀석들은 정말 무능해서
탈이야...."
"정말이에요? 좋아요, 모든 정세를 손아귀에 쥐고 계시단 말씀
은 당신 입으로 분명히 하셨죠? 그럼 나도 한 가지 묻겠어요. 그
능가 놈은 지금 어디 있죠? 손바닥을 펴보시면 금방 아실 텐데
요?"
"그건..."
검정 도포의 목소리가 누그러졌다
"하면, <신조냉표> 진가 놈은요?"
"그놈의 행방쯤이야 이내 파악할 수 있지. 오래 숨어 있지 못할
테니까, 네가 원한다면...."
"영락거사는요? 그 작자도 주무를 수 있나요?"
"그 친구는 여길 지나가고 있던 참이었어. 그러니까 지금 우리
가 손 댈 필요성은 전혀 없지. 날이 어두워지기 무섭게 배를 타고
강녕부 쪽으로 내뺐으니까, 애당초 건드릴 대상이 아니었어. 그런
인물한테 공연히 손을 댔다가는 평지풍파나 일으키기 딱 알맞을테
니 말이야. 잡을 능력이야 왜 없겠는가마는 명분이 있어야 말이
지. 자칫하다간 강호의 벌집이나 건드려서 시러배 잡놈들의 반감
이나 불러일으키기 십상 아닌가? 그럼 우리 일만 더 어렵게 될 테
고, 그래서 나도 이치를 따져서 손 볼 놈과 안 볼 놈을 가리는 거
야."
"난 당신하고 사리 같은 걸 따질 생각은 없어요. 당신 뱃속은
안봐도 뻔하니까."
그녀는 막무가내로 뻗대었다.
"내 일에는 절대로 간섭하지 말아요. 안 그랬단 내 성질대로 막
나갈 테니까, 그 때 가서 원망하지 말고 말이에요!"
"알았어, 좋아! 좋아!"
검정 도포는 항복의 표시로 손을 내저으면서 씁쓰레하니 웃었
다.
"요 꼬마 뉴뉴 아가씨, 정말 지독스럽군! 원하는 대로 다 해드
릴 데니, 제발 그놈의 성미 좀 죽이라구. 하지만 내 책임도 중대
한 거야. 네가 위계질서를 크게 어지럽히면, 나도 지금처럼 점잖
게 대하지는 않을 거야!"
"내 언제 당신한테 걷잡을 수 없을 만큼 골머리를 썩여 드린 적
이 있어요? 일을 너무 급박하게 서두르지 마세요. 아직은 시간이
많잖아요? 급작스레 불온한 패거리들을 숱하게 소굴에서 끌어내니
까, 당신의 경각심을 높이기 딱 좋잖아요? 예방책도 미리 세워 놓
을 수 있고 말이죠. 그런 면에서는 나한테 고맙다고나 하셔야 해
요. 그래, 제가 부탁한 일은 어떻게 되었어요?"
"정확한 자백은 받아 놓았어. 바깥쪽에서 온 놈들은 지금 모산
도원(芽山道院)으로 숨으러 몰려갔지. 거기 <독낭군>이나 <백독진
군>, <단장화> 같은 연놈들이 함께 있는지 없는지, 그건 확실히
단정내릴 수 없고 말이야."
"진가 놈의 저택에서 부하 몇 놈을 붙잡았습니다."
흑의인 한 명이 그녀에게 허리를 굽신하고 말을 이었다.
"자백을 받아보니, <백독진군>이란 놈은 확실히 <신조냉표>를
따라서 모산도원으로 갔다고 합니다. 가는 도중 딴 일이 생겨서
헤어졌는지의 여부는 알 수 없습니다만..."
"여기에 산 놈을 셋 남겨 두었습니다. 하온데, 그놈들은 아무
것도 모른다고 뻗대기만 하는군요."
또 다른 흑의인이 말을 보탰다.
"이 세 놈은 능가의 부하들입니다만, 제법 뼈대가 강해서. 아무
리 얼르고 위협해도 전혀 협조를 하려 들지 않습니다."
"난 독물을 쓴 놈이 누군지 꼭 알아내야겠어 !"
그녀는 이를 악물었다 .
"정확한 은신처가 어딘지, 내가 직접 문초할 데니, 안내하라!"
"예, 이쪽으로...."
흑의인이 손으로 바른쪽 선창 건물을 가리켰다.
그 건물은 조운선 화물을 저장하는 창고였다. 연말이 가까워진
만큼, 조운선도 잠정적으로 운항을 중단했기 때문에 창고 안에는
쌀 가마니가 산더미처럼 쌓여서 발을 들여 놓자마자 구수한 쌀 냄
새가 코를 찔렀다.
창고 한 귀퉁이에 운반도구를 쌓아 놓은 자그만 방이 하나 있
고, 그 안에는 몸집이 우람한 사내 셋이 양 손목을 묶인 채 두 발
끝만 겨우 지면에 닿을 정도로 대들보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감시꾼도 흑의인 세 명, 하나같이 두건으로 얼굴을 가리우고 칼
자루에 손을 얹고 지켜 서 있다가, 검정 도포의 사내가 손짓 신호
를 보내자 한 곁으로 조용히 물러나더니 초롱불을 높직히 치켜들
어 주변을 밝혀 주었다.
안춘 소저는 첫번째 포로 앞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한참 동안
그 얼굴을 뚫어져라 노려보았다.
"내가 알고 싶은 것은 세 사람의 행방이야. <독낭군>과 <백독진
군>, <단장화>, 이 세 연놈이 어디 숨었는지 확실한 장소를 알아
야겠어 !"
쌀 창고 안에 그녀의 목소리가 음침하게 울렸다.
"너부터 말해봐! 확실하다고 인정되면 네 한 목숨을 살려 주
지."
"소인은 모르오!"
포로가 완강하게 뻗대었다 .
"정말 모르는 거냐, 아니면 말을 않겠다는 거냐?"
"좋으실 대로 생각하구료."
"그럼 목숨과 바꾸고 싶지 않다, 그 말씀인가?"
"그것도 당신 마음대로요."
"흠흠, 이것으로 네놈은 쓸모가 없어진 셈이로군!"
"흥!"
"칼을!"
그녀는 손을 뒤로 내밀었다. 감시꾼 한 명이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허리를 굽신하더니 칼집에서 협봉단도를 쓰윽 뽑아 두 손으로
갖다 바쳤다.
"철썩 !"
둔탁한 음향이 메아리쳤다.
그녀는 냉혹하게 단칼에 포로의 왼쪽 다리를 후려쳐 끊더니, 되
돌아오는 손길 그대로 다시 한 번 휘둘러 바른쪽 다리마저 썽둥
잘라 버렸다.
"으와아!-----"
섬뜩하도록 처참한 비명소리, 창고 안이 들썩거리면서 대들보의
먼지가 푸수수 떨어졌다.
칼빛이 연달아 번뜩였다.
역겨운 피비린내가 코를 찌르는 동안, 포로의 양 팔목과 머리통
이 한꺼번에 끊겨나갔다. 대들보에 묶인 밧줄에는 두 손목만 대롱
대롱 매달렸을 뿐, 머리와 몸통은 땅바닥에 툭 떨어졌다.
"너! 너도 모르는가?"
그녀의 칼끝이 두번째 포로에게 돌아갔다. 묻는 목소리에 피비
린내와 함께 얼음장보다 더 차가운 냉혹스러움이 짙게 깔렸다.
외눈 하나 깜짝하는 법 없이 태연스럽게 휘두르는 칼부림에 감
정이라곤 손톱 만큼도 섞이지 앓았다. 단숨에 살아 있는 인간의
사지 육신을 여섯 토막으로 찍어 죽이는 솜씨가 끔찍스럽기 이를
데 없는 것이, 흡사 그녀의 혈관에 도는 피가 뱀의 그것처럼 차디
찬 듯, 아리따운 얼굴과 건강미 넘치는 완숙한 몸뚱이에서도 인간
다운 맛이라곤 한 가닥도 비쳐나오지 않았다.
동료가 삽시간에 처참한 몰골로 죽는 광경을 바라보고서, 나머
지 포로 두 명은 혼백이 구만리 하늘 바깥으로 날아가고 말았다.
이토록 꽃처럼 아리따운 처녀를 본 적도 없는데다 또 이처럼 냉
혹비정하게 칼을 휘둘러 산 사람의 몸뚱이를 토막내는 손속도 처
음 본 것이다.
이들의 눈에 안춘의 모습은 전설 가운데 전해 내리는 모야차(母
夜叉), 인간의 피와 살을 뜯어먹고 혼백을 빨아마신다는 구자귀모
(九子鬼母)라고밖에 보이지 않았다 .
"난... 나는...."
지목을 받은 두번째 포로의 목소리가 얼어붙어 무슨 소린지 알
아들을 수가 없다. 이제 곧 삼혼 칠백(三魂七魄)이 막 증발되기
직전의 상태에 빠진 모양이다.
"안단 말이냐, 모른단 말이냐?"
칼빛이 번뜩, 사람의 넋을 잡아뽑는다.
"알아요!... 난 안단 말이오!..."
포로는 목이 터져라고 악을 썼다. 마침내 굴복한 것이다.
"어디 숨었지?"
그녀는 물었다. 칼끝이 포로의 왼쪽 넙적다리에 닿아서 멈추었
다.
"나는... <단장화>... 동애고가 있는 곳밖에 모르오... 지금 그
여자의 애인 집에서... 재미보고 있을 거요!"
"그곳이 어딘가?"
"성내 유림리(儒林里), 삼산서원(三山書院) 서쪽 거리에서 일곱
번째 집 ...."
"날 그리로 안내해."
그녀는 싸느랗게 명령했다.
칼빛이 또 한 차례 번뜩이더니, 손목을 달아매어 놓은 밧줄을
정확하게 끊었다.
포로의 몸뚱이가 바닥에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몸과 마음이 모
두 기진맥진, 좀처럼 일어날 힘조차 없는 듯 싶었다.
"모산도원 쪽 일은 당신이 수고 좀 해 주세요."
그녀는 검정 도포의 사내를 돌아보고 당부했다 .
"산 채로 잡아야 해요. 독물을 쓰는 놈이라면 하나도 놓치지 말
고 생포하세요. 난 다 필요하니까!"
"알았어 ! 내가 직접 다녀오기로 하지."
검정 도포의 사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모산도원이라면 진강 부성 서쪽 4, 5리 떨어진 보개산(寶蓋山)
에 있다. 같은 도교 사원이지만 금단현(金壇懸)의 모산궁관(芽山
宮觀)이 아니다 .
성 안에 숨어 있는 것이 성 바깥보다 안전할 수가 있다. 그래서
동업자에게 읽기거나 관헌의 수배를 받게 된 무법자나 건달 패거
리들은 곧잘 성 안 으슥한 구석에 머리 쳐박고 추살(追殺)을 모면
하기도 한다.
유림리는 주택가 지역이라, 한겨울철의 날이 어두워지기가 무섭
게 길거리가 썰렁하게 비어 버린다.
삼산원의 딸각발이 샌님과 학동들은 야반 삼경이 되도록 등잔불
밝혀 놓고 글을 읽는 경우가 드물다. 더구나 5경 새벽 닭이 울 때
까지 서당에 불을 밝혀 놓는 법은 아예 없다. 아무리 형설지공(螢
雪之功)을 쌓는 선비라 할지라도 이처럼 추운 겨울밤에는 일찌감
치 포근한 이부자리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등잔불 밝혀 놓고 궁상
맞게 덜덜 떠는 짓거리보다 훨씬 의미가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이 너르디너른 서원에는 싸늘한 냉기와 정적만 감돌뿐,
인기척이라곤 한 점도 비치지 앓았다. 이런 밤 이런 시각이라면
계도구명(鷄盜狗嗚)의 양상군자(梁上君子)께서 어엿이 스며 들어
와 세간살림을 훑어가더라도 주인에게 발각될 염려는 하지 않아도
좋을 지경이다.
삼경이 다 저물 녘인데, 이 댁 안채에는 여전히 등잔불 빛이 바
깥으로 새어 나오고 있다.
안춘 소저는 전신이 검정빛 경장차림 일색, 그녀를 바짝 뒤따르
는 중년 하녀는 더욱 시커먼 차림새로 담장머리를 가볍게 뛰어넘
더니, 안들 한가운데 거위 깃털처럼 사뿐 내려섰다. 그리고는 자
신이 앞장서서 안채 현관문에 다가서기가 무섭게 거침없이 발길질
을 날려 문짝을 걷어차 열었다. 대청으로 썩 들어서는 품이 흡사
제집에 돌아오는 것처럼 위세당당하다.
공자님 위패를 모셔 놓은 탁자 위에 촛불을 밝혀들고 복도를 따
라서 뒤채 아담한 침실로 다가가자 두 여인의 귀에 비로소 인기척
이 들려왔다.
"꽈당!"
침실 문짝이 왁살스런 발길질에 굉음을 울리면서 안쪽으로 넘어
갔다.
중년 하녀의 신형이 번뜩 움직였는가 싶었을 때는 벌써 귀신처
럼 방 한가운데 들이닥치고 있었다.
안춘 소저는 창문 틀에 장명등(長明燈)을 내려 놓았다. 그 손에
는 어느덧 협봉단도 한 자루가 뽑혀 들려 있다.
침상 위에는 이부자리도 덮지 않은 벌거숭이 남녀가 한덩어리로
뒤얽혀 있다가 뜻밖의 소동에 깜짝 놀라 옷가지를 찾으려고 허겁
지겁 손을 뻗쳤다.
중년 하녀의 갈고리 같은 왼손아귀가 먼저 움직였다.
침상 한 귀퉁이에 어지러이 널려 있던 속옷 겉옷 나부랑이가 돌
개바람에 휩쓸리듯 한꺼번에 날아 흩어지고 침상의 장막도 갈갈이
찢겨 넝마쪼가리로 화해 흩날렸다.
두 남녀는 침입자의 그림자조차 똑바로 보지 못했으나, 중년 하
녀는 벌써 침대머리까지 들이닥쳐 갈고리처럼 구부린 다섯 손가락
으로 알몸뚱이 여인의 젖가슴을 움켜잡고 있었다.
벌거숭이 여인도 솜씨가 제법이어서, 누운 자세 그대로 다급하
게 발길질을 날려 상대방의 손목을 가로휩쓸어 쳤다.
다섯 손가락이 밑으로 축 처지더니 번개 벼락치듯 벌거숭이 여
인의 오른쪽 발목을 움켰다.
"여업!"
날카로운 기합성 한마디에 거꾸로 번쩍 치켜들린 벌거숭이 여
인, 양팔과 한쪽 다리를 바람 속에 낙엽 흩날리듯 몰골 사납게 마
구 휘저어가며 발버둥치기 시작했다 .
중년 하녀는 그 몸뚱이를 태질쳐 버렸다. 공교롭게도 그 지점은
안춘 소저의 발치 밑, 기다리고 있던 발바닥이 인정 사정없이 아
랫배를 콱 짓밟았다.
벌거숭이 남자는 솜씨가 여자만도 훨씬 못한 듯, 침상 다리가
무너져서 내려앉는 바람에 몸뚱이의 중심도 못 잡고 떼구르르 침
대 아래 쪽으로 굴러가다가 8척 거리 바깥 멀찌감치서 후려친 중
년 하녀의 벽공장력을 정통으로 얻어 맞고 말았다.
"우왝!..."
사내는 숨통 막힌 외마디 소리만 지르고 팔다리가 축 늘어졌다.
그리고는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실로 재빠르기 이를 데 없는 행동, 사람을 놀라 까무라치게 만
드는 기세로 남의 집에 들이닥쳐 문짝을 때려부수고 강공으로 주
인네를 제압한 이들 침입자의 동작은 삽시간에 마무리되었다. 그
야말로 번갯불에 콩 구워먹듯 쾌속한 타격 아래, 벌거숭이 남녀는
손 한 번 써보지도 못한 채 고스란히 당하고 말았던 것이다.
"네가 누구지?"
안춘 소저는 웃음을 머금고서 물었다. 미소 띤 얼굴이 성난 기
색이라곤 털끝만큼도 비치지 앓고 귀엽기만 한 것이, 원수를 찾아
왔다기보다 무심결에 재미있는 구경거리와 마주쳐서 지나가는 말
로 흥미롭게 묻는 듯한 태도였다 .
하지만 그녀의 손에 들린 협봉단도는 귀엽지만 않은 것이, 칼끝
을 알몸뚱이의 풍만하게 봉긋 솟은 왼쪽 유방에 닿은 채, 금방이
라도 암홍색 젖꼭지를 똑 따버릴 듯이 찍어누르고 있는 것이다.
"나, 나는...."
벌거숭이 여인은 온몸이 굳어져서 대꾸를 못한다. 너무 놀란 나
머지 혓바닥이 얼어붙었을 것이다.
"거짓말을 하면 알지? 내 이 칼로 네년의 몸뚱아리를 갈기갈기
찢어서 핏떡으로 만들어 놓고야 말 테야."
안춘은 여전히 웃고 있다. 그러나 말투에는 살기가 그득 서렸
다.
"대답을 안 할 텐가? 그럼 먼저 요 사내 홀리는 젖꼭지부터 떼
어 놓지 !"
"아앗! 안 돼 !..."
벌거숭이 여인은 공포에 질려 비명을 질러 댔다.
"당신... 당신네들은... 누구...."
"우리가 누군지 알 것 없어. 내 물음에 대답하고 싶지 않은 모
양이로군?"
"아냐, 아냐! 대답할께... 내 성은 동(董)...."
"알아듣기 좋게 말해! 동 뭐라구?"
"동애... 고!..."
"아하! 이제 알아듣겠군. 네가 강호상에서 독물을 잘 주무르기
로 제법 이름 날리는 갈보년일세! 별명이 뭐랬더라? 옳지, <단장
화>라고 했겠다? 단장독산을 잘 쓰기로 유명하다고... 맞나 틀렸
나?"
안춘 소저의 목소리가 조금 풀렸다. 장본인을 찾아내서 안심이
되었는지, 얼굴의 웃음기는 더욱 달콤하고 사랑스럽게 활짝 피어
났다.
"그래, 맞아요! 당신네는... 여자 강도인가요?"
"강도라? 아니야, 우리는 이 집 주인을 찾아왔어. 이름은 왕군
달(江君達), 그 녀석한테 묵은 빚 좀 받으러 왔어."
이 말에, 중년 하녀는 벌거숭이 사내의 몸뚱이를 끌어다가 여인
곁에 내던져 주었다.
"아마 이놈이 바로 왕군달일 겁니다."
그리고 무표정하게 해설을 달았다.
안춘 소저는 이제 17, 8세 나이의 명문 규수, 이런 처녀가 자기
눈앞에 추접스런 꼬락서니를 구석구석 남김없이 드러낸 알몸뚱이
의 남녀를 보면서도 눈쌀만 찌푸렸을 뿐, 얼굴빛 하나 붉히지 않
은 채 그저 태연자약 무시해 버렸다.
"아이구 맙소사! 난... 난 당신들이 누군지도 모르는데... 무슨
빚이 있다고 받으로 왔단 말이야?"
벌거숭이 사내는 미친 사람처럼 고래고래 악을 썼다. 그러나 입
만 살았을 뿐 온 몸뚱이는 중풍에라도 걸린 듯 옴쭉달싹도 못한
다.
"네 별호가 <일지화>(一枝花), 틀림없지?"
안춘이 물었다.
"그, 그렇소!..."
"그럼 사람을 제대로 찾아냈군."
"하지만, 나는... 당신들을 알지 못하는데...."
"네가 누군지 알기만 하면 되는 거야. 네놈이 과거에 저지른 일
을 생각해 보라구. 마음속에 짚히는 게 있을 텐데? 안 그런가?"
"내가 무슨 일을 저질렀다구...."
"너는 채화음적(採花淫賊)이야! 피해자가 나한테 간청을 해왔
어. 네놈의 목을 떼어서 빚을 갚아 달라고 말이다!"
"안 돼 !... 안 돼 !..."
두 마디째 비명을 질렀을 때, 칼빛이 번뜩 날으더니 <일지화>의
머리통은 어깨 위에서 댕겅 날아가고, 그 대신에 핏물이 분수처럼
쏟아져 나왔다.
"으아악!..."
<단장화> 동애고가 목청이 터져라 비명을 질러 댔다.
사내의 몸뚱이에서 뿜어나온 뜨거운 핏물이 얼굴과 젖가슴을 흥
건하게 적시웠으니, 혼백이 몸뚱이에 붙어 있을 리 없다.
"흠흠, 이제 묵은 빚은 받아낸 셈이로군..."
안춘 소저는 중얼거리면서 이번에는 동애고 쪽으로 눈길을 돌렸
다.
"이런 쓰레기 녀석하고 붙어 있는 걸 보니, 너도 착한 년은 못
되겠어."
칼끝이 동애고의 젖꼭지를 바짝 찍어눌렀다. 힘이 조금만 들어
가는 날에는 꼭지 도려낸 참외 신세가 될 판이다.
"아냐!... 아이구, 난 억울해!"
동애고는 발광한 사람처럼 마구 외쳤다 .
"난... 난 이 사람하고 그저 눈이 맞아서... 어쩌다가 눈이 맞
아서 좋도록 즐기고 있었을 뿐이야! 이 사람이 무슨 짓을 저질렀
는지... 난 전혀 알지도 못하고 물어본 적도 없단 말이야!
난...."
"이 계집의 옷가지를 가져와요. 백보낭도 침상 베갯머리에 있을
테니까, 찾아서 가져오고."
안춘은 중년 하녀에게 분부를 내렸다.
물건이 탁자 위에 다 갖추어져 놓였다. 동애고의 백보낭은 여느
사람이 쓰는 것보다 두 배는 큰 것이었다.
"소문을 듣자니까, 네년의 독물 쓰는 솜씨가 비상하다며? 한데
난 별로 미덥지 않군 그래."
안춘이 동애고를 내려다보고 말했다.
"어디 시험삼아 네 몸뚱이에 독물을 써보기로 할까? 너는 어차
피 전문가일 테니 말씀이야."
초저녁 벌거숭이 몸뚱이로 침상에 올랐으니, 몸에 지니고 있던
물건들은 깡그리 풀어 놓았을 터, 팔뚝에 토시처럼 차고 있던 분
무관(噴霧管) 장치도 제거한 것은 물론이다.
안춘 소저가 손짓을 보내자, 중년 하녀는 그 분무관을 집어들고
요모조모 살펴보았다 .
용수철 장치를 교묘하게 갖추고 누름쇠까지 달린 발사통, 그것
은 독가루를 뿜어내는 병기임에 틀림없다.
"이 안에 무슨 독약을 담아 두었나?"
안춘은 분무관을 가리키면서 물었다.
"그, 그건... 거기엔 아무것도..."
"이 분무관을 네 아가리에 쑤셔박고 쏘아 볼까? 백보낭은 내가
챙겨갈 데고 말씀이야!"
"아, 안 돼 !..."
"그러니까 바른대로 말하란 거 아닌가? 우선 이 분무관 속의 독
약이 뭐고 해독약은 어떤 것인지 말씀해 봐요, 그걸 알아야만 네
독을 풀어 줄 수 있지 않겠어?... 어허! 입을 꼭 봉하고 계시군.
그렇다면 자신의 독약을 먹고 죽겠다 이 말씀인가? 하기야 인과응
보(因果應報)이니까 그것도 괜찮겠지 !"
"그건... 단장독... 가루야."
"얼마나 있으면 발작하지?"
"한 시각쯤."
"해독약이 담긴 병은 어느 거야?"
중년 하녀는 벌써 백보낭을 열고 약병들을 모조리 꺼내 놓았다.
약병은 도합 다섯 개, 하나같이 자기(磁器)로 만든 호리병인데
생김새나 키가 여섯 치 남짓한 것이 똑같은 모양이라 어느 병에
해독약을 담아 두었는지 도대체 가려 낼 도리가 없다.
다른 점이 있다면 주둥이를 막은 나무 마개가 붉은 빛, 쪽빛,
자주빛, 흰색, 검정색으로 나뉘어졌다는 것뿐이다 .
중년 하녀의 손길이 호리병 다섯 개를 하나하나 훑어 가다가,
붉은 빛 병마개에 가서 멈추었다.
"검정 마개... 검정 마개야."
<단장화> 동애고는 다급하게 말했다.
중년 하녀는 검정 마개를 뽑고서 그 호리병을 <단장화>의 입술
언저리에 갖다 대었다. 그리고 엄한 목소리로 물었다.
"분량은 얼마?"
"한 푼이면... 넉넉해."
<단장화>는 고분고분 토설했다.
"좋아, 그럼 네 아가리에 한 푼만 넣어 주겠어. 그것으로 중독
을 모면할 수 있기만 바라겠다. 자, 주둥이를 벌려 !"
약방 의원도 아니니 천칭(天秤) 같은 정밀한 저울이 있을 리 만
무할 터, 중년 하녀는 대충 어림잡아 동애고의 입술에 약가루를
쏟아냈다. 옅은 자주빛이 도는 분말이다.
"자, 그만하면 됐지? 아가리를 벌려 !"
중년 하녀는 냉큼 병마개를 닫으면서 엄하게 호통쳤다.
안춘이 분무통을 집어들고 <단장화>의 얼굴을 겨누었다 그리고
손가락으로 누름쇠를 잡고 막 당기려는 시늉을 보였다.
"안 돼, 모자라! 한 푼이...."
<단장화>가 기겁을 해서 째질 듯이 비명을 질러 댔다 .
"제발... 당신네들, 제발 조금만 더 쏟아 줘! 해독약을...."
그 말에 응답이라도 하듯 칼바람이 연거푸 번뜩였다, 백보냥이
산산조각나고, 속옷과 치마 저고리가 갈갈이 찢겨져 흩날렸다.
"살려 줘 ! 날 좀 살려...."
<단장화>는 발광하듯 마구 악을 써가며 애걸복걸했다. 안춘이
꼭 자기를 죽이려고 칼부림을 하는 줄로만 알았으니, 간담이 뚝
떨어지고 넋이 육신에 붙어 있을 리 있겠는가?
"널 데려가야겠다."
안춘은 칼을 거두어들이면서 냉랭하게 쏘아붙였다. 해독약이 어
떤 것인지 알았으니 별 일이야 있겠는가마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서 장본인까지 끌고 가기로 작정한 것이다.
"날 좀 놓아 줘 ! 제발... 어흑...."
중년 하녀가 일장에 <단장화>를 혼절시켜 입을 다물게 만들었
다. 그리고는 이불 자락으로 알몸뚱이를 둘둘 말아 어깨에 걸머지
고서 휘적휘적 침실 밖으로 걸어나갔다.
첫댓글 즐감했습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