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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수렁에 개 싸움
유지사는 또 다시 무인상태, 부처님의 보상(勤像)만 홀로 외롭게
은둔 수도 하시는 궁벽한 황산(荒山) 야사(野寺)의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나 절간 뒤 산등성이, 눈얼음으로 덮인 나무 숲에는 푸른 옷차
림의 복면 괴한들이 반원형으로 포진하고, 시든 나뭇가지 아래 몸을
숨긴 채 조용히 잠복 대기하고 있었다. 절간 승려들이 뒷산으로 철수
했더라면 필경 이들의 포위망에 뛰어든 격이 되었을 것이다.
얼마 안 있어, 절간 문 앞에 남녀 한패거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선
두 인물은 과연 영락 공자 남문영유였다.
인원수는 그리 많지 않았다. 남자 일곱 여자 셋, 모두 열 명이 당
당한 기세로 널찍하게 트인 산문 안으로 들어서더니, 추호도 거리낌
없이 곧바로 대웅전 안마당까지 들이닥쳤다.
그중에는 영락 공자의 측근 시종 대상, 대길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
다. 또 약방의 감초격으로 따라다니던 영락 사대금강도 없었다.
<신조냉표> 진홍도 없거니와 <백독진군> 청송도사와 <백무상>은박
도 없었다. 요컨대 이들 10명의 방문객들은 영락 공자 한 사람만 제
외하고 모두 다 낯선 인풀이었던 것이다.
"절이 텅 빈 것 같군."
영락 공자 오른편, 깡마른 몸집의 늙은이가 발길을 멈추고 중얼거
렸다.
"모조리 뺑소니친 거 아니오? 남문 공자, 그 <탈혼마녀>가 정말 여
기서 비구니 노릇을 하고 있었소?"
"제 생각으로는, 이 절간에서 수도하는 게 아니라, 대방선사와 불
비마니의 비호를 받으면서 은밀히 움직이고 있던 것 같습니다."
영락 공자가 대답했다 .
"연놈들이 모두 절간 으슥한 구석에 쳐박혀 있을 겁니다. 우리가
들어서면 한꺼번에 습격하려고 말이지요. 노 선배님, 이것들이 안 나
올지도 모르니까, 최악의 방법을 써야 할 듯 싶군요."
"최악의 방법이라? 그게 뭐요?"
노 선배라고 불리운 늙은이가 물었다. 일부러 목청을 돋우는 품이,
절간 어딘가에 숨어 있을 사람들의 귀에 똑똑히 들으라고 하는 수작
같았다.
"불 지르깁죠!"
영락 공자도 목청을 돋우었다.
"어허! 이 절간에다 불을 지른다? 그건 좀 죄스러운데?"
"죄스럽기야 하겠습니다만, 낯설고 물설은데 어정어정 들어갔다가
암기로 습격을 받거나 매복기관 장치에 걸려들면 어쩝니까? 우리 편
에 사상자라도 나면 그게 더 죄스러운 노릇이 아니겠습니까?"
"흠흠, 그렇군! 보아하니 불 지르는 도리밖에 딴 길은 없겠네 그
려..."
"그렇습죠. 노 선배님, 딴 방법은 없습니다."
노 선배가 큰소리로 외쳤다.
"우선 이 대웅전부터 불태워 버리세! 이 더러운 유지사, 쓰레기 더
미를 깡그리 불살라 없애면 쥐새끼들이 기어나오지 않고 배길텐가?
이 늙은이도 매복기관에 걸려 억울하게 죽기는 싫으이."
말끝이 떨어지기도 전에, 대웅전 뒷채 쪽에서 염불 소리가 들렸다.
"나무아미타불!"
뒤이어, 승려와 비구니들이 두 줄로 늘어서서 생선 꿰미 엮듯 줄줄
이 걸어나왔다. 왁살스런 불청객 패거리가 진짜 불이라도 싸지르는
날이면 어느 구석에 머리를 쳐박고 숨어 있겠는가 말이다.
"으하하핫!... 으하하하!..."
영락 공자가 하늘을 우러러 미친 듯이 웃어댔다. 의기양양한 웃음
이었다.
"노 선배님, 제 짐작이 틀림없습지요? 도발적인 언사를 쓰지 않았
던들 이 비루 먹은 대머리들이 어디 상판을 내밀겠습니까?"
대방선사의 얼굴에 노기가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속세를 떠난 출가
승으로서 오욕칠정을 끊으라는 부처님의 계율도 깡그리 잊어버린 듯
하다.
"영락 공자, 노납도 그대가 탈혼마음을 제압할 고수들을 데리고 와
서 소란을 부릴 것은 짐작하고 있었소. 그래서 진작부터 엄한 준비태
세를 갖추고 기다리고 있던 참이오."
대방선사는 노기를 억누르면서 말을 이었다.
"그대는 이미 광망을 떨 만큼 떨었소! 천둥 벌거숭이로 날뛰는 재
롱도 신물이 나도록 보아왔고 말이오, 하지만 영락장이 부처님 계신
성지에 불을 지른다면 그 책임을 어떻게 감당할 작정이오? 또 소문이
퍼지면 강호 동도들에게 방화 행위를 무슨 말로 변명할지 모르겠구
료!"
"대머리 화상, 그 따위 말로 누굴 겁주려는 게야?"
노 선배가 버럭 호통을 쳤다.
"네놈들이 먼저 사람을 납치해다 몸값을 받아 먹으려고 하지 않았
나! 너희 같은 사마외도 무리들은 강호 협사들의 입에 오르내릴 자격
도 없을 텐데, 우리 말을 믿으면 믿었지 누가 네놈들의 말을 들어주
겠는가? 영락장의 명예와 성망은 네놈들 입방아에 깨지지도 앓으려니
와 나 <사해검객>(四海劍客) 노성균(盧成均)의 협명에도 털끝만한 손
상을 입히지 못할 것이다. 대머리 화상, 우리가 점잖게 얘기할 때 순
순히 그 계집들을 내놓아라. 혹시 살길을 한 귀퉁이 터 줄지도 모르
니까. 어떠냐? 인질만 넘겨주면 우리 협객들도 마귀의 무리를 제거하
는 일일랑 잠시 눈감아 주기로 하겠다."
"두 여시주는 당신네들이 구출해 갔는데, 뭘 또 내놓으라는 거야?
영락 공자, 노납이 한마디만 묻겠다. 무엇 때문에 또 찾아와서 우리
를 물고 늘어지는 건가? 괘씸한 놈!"
대방선사는 괴안을 부릅뜨고 말라깽이 늙은이를 돌아보았다.
"너, <사해검객>이 뭐 말라 비틀어진 뼈다귀냐? 위선자! 너희 패거
리들은 협객의 거짓 명분을 내세우고 온갖 못된 짓을 도맡아 저지르
는 후안무치(厚顔無恥)한 잡배에 지나지 않는단 말이다! 그 냄새나는
검술 솜씨 좀 지녔답시고 낯짝 두껍게 협사를 자칭하고 무슨 마귀를
처치한다고? 정말 구역질이 나게 염치 없는 놈, 못하는 짓거리가 없
구나. 이미 오래 전에 의로운 협사의 면모를 헌신짝 같이 내던져 버
린 놈, 부끄러운 줄 알라구! 자, 노납을 불러냈으니까, 어디 손을 써
보시지? 노납도 이 육장(肉棠) 한 쌍으로 네놈의 칼날을 받아 줄 테
니까!"
"대머리 중놈! 발칙하게 누구 앞에 욕설을 퍼붓는 거야?"
"에헴!..."
나이 지긋한 여인이 얕은 기침 소리를 내면서 <사해검객>을 앞질러
나왔다. 음험한 눈초리, 작달막하고도 깡마른 몸집, 오랜 해고질병에
시달린 듯 안색이 시꺼멓게 죽고, 이제 얼마 안 있으면 땅속으로 들
어갈 노파였다.
"대방선사, 그대는 <사해검객>과 목숨 가지고 놀아 볼 자격도 없
네."
음성은 무기력해 보였으나, 사뭇 강경한 말투다.
"이 늙은이는 땅속에 절반쯤 몸을 파묻은 신세니까, 그대도 이반시
체하고 몇 수 겨뤄 보는 게 어울리겠어."
노파는 비무장, 몸에 병기 같은 것은 전혀 지니지 앓았다. 체구도
어지간히 작아 대방선사와 마주 서 있노라니 마치 새끼 도깨비가 금
강역사를 올려다보듯 전혀 상대가 되지 않는다.
대방선사는 어처구니가 없어 피식 웃었다. 손을 내밀기만 하면 다
가들 필요도 없이 노파의 몸뚱이를 4척 바깥에서 움켜잡아 내던 질
판인데, 어떻게 자기와 맞서 공격하겠단 말인가?
혜과의 눈빛이 싹 변했다. 얼굴에도 경악스러움과 의아스런 기색이
피었다.
"대방 도우, 저 여자 <부시독장>(腐屍毒掌)을 조심해요! 저 노파는
이름난 마녀 <여백>(廬魄) 여강(廬姜)이에요."
혜과가 다급하게 외쳐 대방선사를 일깨웠다 .
"실종된 지 20년이나 지났는데 여길 나타나다니 !... 게다가 영락
장의 명문 자제와 어울려 다닐 줄이야!... 아아, 이제 천하에 정파
사파의 분별도 없어졌구나... 강호상에 대겁난이 닥쳐오겠어 !..."
"으하하하!..."
영락 공자가 목청 드높게 웃음보를 터뜨렸다.
"늙다리 여승, 네 말이 너무 우습구나!"
"뭐가 우습단 말인가?"
"이 영락 공자가 무림계 명문 자제란 말씀은 틀림없지. 또 무림의
명문 자제는 정파의 영웅 협객으로 자처할 만큼 낯짝이 두껍지 못해
요. 하기야 무림 명문 자제들 중에도 못된 짓을 밥먹듯 저지르는 녀
석이 수두룩하지 ! 허나 이 영락 공자는 너같은 음탕한 비구니에게
떠받들리고 싶지는 않아요. 또 나는 이분들과 별로 깊은 교분을 맺어
본 적도 없어 ! 그저 무림계 동도일 따름이지. 두 계집을 필요로 하
는 사람은 바로 이분들이야. 나는 동도의 체면을 보아서 길 안내만
해 주었을 따름이지. 흠흠! 무슨 정파고 사파고, 대겁난이고 살겁이
고 호들갑스레 늘어놓을 것 하나도 없어요. 이미 때는 늦었으니 말씀
이야. 어때, 이래도 우습지 않단 말인가?"
"아무렴, 그래야 간악한 진면목이 유감없이 드러나지 !"
혜과는 감회 어린 말투로 비웃었다.
"빈니가 사마외도라는 것을 부인하지는 않겠어. 허나, 내 본성이
악하다는 사실을 인정할 만큼 용기도 지니고 있어 ! 너같은 놈은 입
으로만 의리를 찾고 뱃속에는 더럽고 간악한 탐욕이...."
"이 음탕한 년, 누구 험담을 늘어놓는 게냐? 이것이나 맞아랏!"
노루 머리에 쥐방울 눈을 가진 중년인이 호통을 치더니, 끝마디가
떨어지기도 전에 다짜고짜 손을 휘둘러 쳤다.
쌍방의 거리는 5장 남짓, 한 가닥 은빛 광망이 공기를 가르면서 혜
과를 노리고 쏜살같이 날아갔다. 암기는 신속하기 짝이 없는 속도로
발사되었으나 겨냥은 혜과의 얼굴 부위, 그것도 입을 노리고 있었다.
실로 광망스럽기 짝이 없는 대담한 공격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얼굴 부위라면 가장 격중시키기 어려운 표적이다. 사람이라면 누구
나 얼굴 쪽으로 이물질이 날아들면 본능적으로 피하는 법이니까. 그
것도 5장 바깥 멀리서 얼굴을 겨냥했다면 귀중한 암기만 낭비할 뿐
명중시킬 가능성이라곤 애당초 없다고 보아야 한다. 설령 기습적인
공격이라 할지라도 명중하기란 하늘의 별따기나 다를 바 없다.
은빛 표창은 확실히 혜과의 얼굴을 겨냥했다. 겉으로 보아선 평범
하기만 할 뿐 유별난 구석이라곤 전혀 없었다. 표적이 된 혜과의 눈
에만 또렷이 보였을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의 눈에도 발사 물체를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은빛 표창이 날아가면서 긋는 포물선은 높이가
겨우 1척, 그것은 암기를 발사한 사람의 공력이 별로 강하지 못하다
는 것을 나타냈다.
하필이면 주둥이를 노리다니 !... 혜과 대사가 분노한 것은 당연하
다.
"방자하구나, 쥐새끼 같은 놈!"
그녀는 냉랭하게 쏘아붙이면서 신경질적으로 불진을 휘둘렀다. 그
녀 역시 암기를 정면으로 막아 낼 자신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먼
지떨이개가 막 암기를 얽어잡았을 때였다.
"팍!"
겉모양으로 금속제 표창처럼 보였던 암기가 돌연 중도에서 산산조
각으로 터지면서 톱밥 같은 미세한 분말로 변하더니, 사면팔방으로
은빛 가루를 쏟아내는 것이 아닌가!
암기는 강철이나 순은제가 아니라, 다른 물체와 닿기만 해도 부서
지는 분말을 뭉쳐 만든 것이었다.
"으아----- 악!..."
혜과의 입에서 처절한 비명이 터졌다. 암기 가루가 얼굴에 닿는 순
간, 그녀는 두 눈에 극심한 고통을 느꼈다. 바늘로 찌르는 듯한 아
픔, 뒤미처 눈물 콧물이 한꺼번에 쏟아져나와, 그녀는 저도 모르게
불진을 펭개치고 쌍수로 눈을 비볐다. 그것도 한 순간, 혜과는 얼굴
을 감싸쥔 채 후딱 돌아서더니 발광한 사람같이 대웅전 뒷문으로 도
망쳐갔다.
"흐흠, <탈혼마녀>도 이 정도밖에 안 되는군!"
노루 머리 쥐방울 눈을 가진 중년인이 오만하게 중얼거렸다. 그 손
아귀에는 또 한 자루의 암기가 자랑스레 번뜩이고 있었다.
"자아, 또 누구 없소? 원하는 분에게는 얼마든지 이 당군호(唐君
豪)가 시원한 맛을 보여 드릴 테니까!"
"지독한 암기로군! 어디 빈니가 맛 좀 보기로 하지."
원한에 가득찬 목소리, 불비마니가 경계태세를 갖추고 성큼 앞으로
나섰다.
다른 쪽에선 대방선사가 <여백> 여강과 팽팽히 맞선 채, 문호의 수
비를 단단히 굳히고 일격필도(一擊必倒)의 공력을 끌어올리고 있다.
"이야압!----- "
마침내 대방선사의 입에서 우레 같은 기합성이 터졌다. 한 발짝 성
큼 내딛는 발걸음, 뒤이어 10성의 대력금강장을 얹은 <현룡장>(現龍
掌)이 선제 기습으로 터져나갔다 .
<여백> 여강은 애당초 몸집이 왜소하면서도 어엿이 쌍수를 쳐들어
맞받아치기로 나왔다. 새매의 발톱과도 같은 앙상한 손가락, 잿빛을
띤 다섯 손가락이 소맷자락에서 불쑥 뻗어 나오더니, 똑같은 <현룡
장> 초식으로 맞받아쳤다.
그것은 가장 어리석은 수법이었다. 한마디로 하룻강아지가 두 앞발
로 산사태와 맞서는 격이나 다를 바 없는 짓이었다.
"꽈당!..."
쌍장이 정면으로 맞부딪는 순간, 팽팽하게 부푼 공기주머니를 터뜨
리듯 무시무시한 폭음이 뭇 사람들의 고막을 울렸다. 뒤미처 비바람
끝에 사라지는 천둥처럼 은은한 풍뢰성이 메아리쳤다. 초인적 기세를
자부하던 금강장력은 더 이상 밀어붙이지 못하고 봇물 터지듯 위 아
래로 쏟아져 흘러나갔다.
구역질이 나도록 비릿한 바람결, 시체가 썩는 <부시독장>의 방어막
도 더는 지탱하지 못하고 사면팔방으로 흩어졌다.
실력은 어슷비슷, 공력도 피장파장, 그러나 <부시독장>의 유연한
잠력은 강맹하기 짝이 없는 대력금강장의 무서운 힘을 정면으로 받아
쳐서 보기 좋게 흩어 버리고 말았다.
"으흐흐흐!..."
음충맞은 냉소성, <여백> 여강이 용기를 떨쳐 반격에 나섰다. 첫수
에 공격을 와해시키는 데 성공하자, 쌍장은 추호도 거리낌 없이 번갈
아가며 밀어치고 후려때리고 연속 일곱 차례의 공격을 퍼부어 나갔
다. 기세등등한 장력이 쏟아질 때마다 바람 소리 벼락치는 소리가 한
꺼번에 울리고, 바람결에 풍기는 비릿한 냄새가 역겹다 못해 구토증
을 일으켰다. 대방선사는 눈코 뜰 새 없이 쳐들어오는 공세에 밀려
다섯 차례나 방위를 바꾸고도 모자라 2장 남짓한 거리를 후퇴하지 않
을 수 없었다. 들이켜고 내쉬는 호흡이 고르지 못하고 질식 현상을
일으키는 것을 보건대, 이미 <부시독장>을 들이마시고 현기증에 시달
리고 있음이 분명했다.
살기등등하게 공격해 나가던 대력금강장도 어느덧 수세로 바뀌었
다. 그나마도 적의 공격을 깨끗이 봉쇄하지 못하고 일장을 쳐낼 때마
다 공력이 점점 쇠약해져서 반격으로 나설 기회는 완전히 잃어버린
상태였다.
"여러분. 밤이 길면 꿈도 많아지는 법, 우리 속전속결로 나갑시
다!"
영락 공자가 뒷짐진 채 느긋이 소리쳤다.
"음탕한 비구니 혜과도 달아났으니, 탈혼마음을 겁낼 필요가 어디
있소? 자, 우리 한꺼번에 작살내자구요!"
"이놈들을 깡그리 죽여 없앱시다!"
<사해검객> 노성균이 칼을 뽑아쥐고 명령을 내렸다.
"삐이익 !-----"
길게 울리는 휘파람 소리, 그것을 신호로 나머지 사람들이 장검을
휘두르면서 승려와 비구니들의 진영으로 한꺼번에 돌진해 들어갔다.
싸움터 바깥 구경꾼은 영락 공자 한 사람, 그 나머지 아홉 명은 일
제히 함성을 지르고 칼춤을 추어가면서 밀물같이 호랑이가 양떼에 뛰
어든 격, 남녀 아홉 명은 하나같이 초일류급 고수다. 수적으로는 유
지사 승려와 비구니 쪽이 두 배 이상으로 단연 우세였으나, 이 피에
굶주린 호랑이떼를 무슨 재주로 막아 낼수 있단 말인가?
최초 돌격 직후, 피아 쌍방이 뒤죽박죽 엇갈린 가운데 피보라를 흩
뿌리고 토막난 사지 육신이 가로세로 퉁겨날았다. 참담한 비명 소리
가 여기저기 꼬리를 물고, 부처님이 굽어보시는 유지사 대웅보전 앞
마당은 끔찍스런 피바다 도살장을 이루었다.
절간 우측방 1백여 보쯤 떨어진 산등성이에서, 장추산은 커다란 나
무 그늘 밑에 앉아서 아래 세계에서 벌어지는 대도살극을 주시하고
있었다. 높직한데서 하계를 굽어보니 실감도 나고 흥분도 되련만, 그
는 연신 도리질을 하면서 쓰디쓴 웃음을 금치 못했다.
유지사 승려와 비구니들은 그의 권고대로 철수하지 않았다. 사람
백정이 몰려오는 판에 그대로 주저앉아서 죽음을 기다리다니, 어리석
어도 한창 어리석은 짓이 아닐 수 없다. 하기야 그 역시 이런 결과를
짐작 못한 것은 아니나 막상 눈앞에서 벌어지는 대도살극을 바라보자
니 천만 가지 감회가 솟아나오고 오로지 강한 자만 이기고 살아남는
다는 비정한 결과에 실로 비탄을 금할 수 없는 것이다.
몸 가까이에 돌연 한 사람이 더 늘어났다. 나이는 50대 남짓, 우락
부락한 생김새의 위엄을 갖춘 영기 발랄한 중년인, 가죽 저고리는 공
작색 쪽빛이 찬연하게 빛나고, 허리춤에 찬 협봉도(俠鐸刀)는 칼집과
손잡이에 보석을 아로새겨 놓은 것으로 보아 상당히 희귀한 명도(名
刀)임에 분명하다.
"내려가서 도와줄 생각은 않고 뭘 구경만 하는 거요?"
중년인이 미소를 머금은 채 물어왔다. 그가 유지사 스님들과 안면
이 있다는 사실을 뻔히 알고 묻는 투였다.
"내가 어째서 저 사람들을 도와 주어야 한단 말이오?"
그는 되물었다. 앉은 자세 그대로 움쭉달싹도 앓는 것이, 접근자에
게 적의(敵意)가 없다는 것을 미리부터 알고 있는 듯했다 .
"아까 보니, 당신이 저 절간에서 나오던데? 그래서 저 스님들과 교
분이 있는 줄 알았지."
"교분이라? 흐흠, 있다면 주먹다짐으로 생긴 교분일 거요."
"그게 무슨 말씀이신가?"
"저 녀석들은 내 여자 친구를 납치했었소, 죽이지 않은 것만으로도
의리와 인정은 충분히 베푼 셈이지, 더구나 나는 저 사람들에게 잠시
피해 있으라고 경고까지 해주었소, 그걸 듣지 않았으니, 난들 어쩌란
말이오?"
"어허, 그러셨구먼! 한데 여기서 뭘 기다리고 있소?"
"기회 !"
"무슨 기회?"
"영락 공자를 잡을 기회 말이오."
"내려가서 스님들을 도와 주면 기회가 더 많아지지 않겠소?"
"하하, 당신이 나를 아주 바보 멍텅구리로 아는 모양이로군!"
그는 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
"영락 공자 패거리는 하나같이 초일류급, 고수 중에서도 고수로 손
꼽히는 놈들이오. 더구나 절간 뒷동산에도 무시무시한 놈들이 32명이
나 매복해 있지 않소? 이런 살얼음판에 내가 얼굴을 내밀어 봤자 목
숨 하나만 더 날려보낼 따름인데, 날더러 뭘 가서 도와주고 자시고
하란 말이오?"
장추산은 그제서야 고개를 돌려 중년인의 모습을 훑어보았다.
눈빛에 돌연 의혹의 구름장이 솟구쳐 나왔다.
"귀하, 내 정체를 아시오?"
그는 물었다 .
"양주 진강부의 풍운아, <뇌신> 장추산을 누가 모르겠소?"
중년인은 엄지 손가락을 곧추세워 보였다.
"대단해, 정말 대단한 남자야!"
"과찬의 말씀을!... 귀하, 존함은 어찌 되시오?"
"성은 계씨(桂氏), 이름은 제운(齊雲)이오. 당신처럼 세상 천하를
내 집으로 여기는 강호 떠돌이지."
"정말이오?"
장추산이 믿는 둥 마는 둥, 얄궂게 소리쳤다.
"강호 떠돌이라?... 흐홈, 당신 그 수달피 가죽 외투만 하더라도
내 오운표 여우털 저고리보다 열 배는 더 값이 나갈 텐데, 그런 으리
으리한 옷차림으로 강호 떠돌이 흉내를 내서야 어디 쓰겠소? 별명은
뭐요?"
"그런 건 없소. 그저 계 형이라고만 불러 주시구료. 별명을 가져봤
자 <뇌신>의 명성보다 더 쩌렁쩌렁 울리겠소?"
"흐흠, 계 형이라고 불러 달라? 그럼 그럽시다! <뇌신>이란 별명도
뭐 그리 대단한 것은 아니외다. 뇌신이라고 해야 하늘에서 옥황상제
님의 벼락이나 간수하는 잡역 도깨비에 지나지 않으니까 말이오. 닭
주둥이에 오리발, 데룩데룩 원숭이 눈알을 가진 추접스런 상판이 뭐
그리 대단하겠소? 이름만 들어도 비위가 뒤집힐 판인데."
"하하, <뇌신>이 하늘에서 잔심부름꾼 도깨비라곤 해도, 신권(神
權)과 정의를 대표하는 건 틀림없지 않소? 하느님을 대신해서 천하의
공도(公道)를 주재하고 간악한 무리를 징벌하니 말이외다."
"아이구 어지럽소! 작작 부추기시오, 하하하! 나 같은 위인의 어느
구석에 천하 공도를 주재하고 간악한 무리를 징벌할 능력이 있겠소?
내 젊은 혈기에 못 이겨서 엄벙덤벙 날뛰기나 하고 뭐가 희고 뭐가
검은지 분간도 못하는 주제인데, 공도와 정의를 어떻게 안단 말이오?
그게 다 농담이지 !"
"우리는 당신 같은 인재가 필요하오."
그 말에 장추산이 펄적 뛰어 일어났다. 험상궂은 눈초리, 경계심이
잔뜩 서린 눈초리가 상대방의 눈길을 빨아들일 듯 무섭게 노려보면
서, 얼음장보다 더 차가운 냉소를 실실 흘렸다.
"이제야 알겠군, 당신 정체를!"
그는 자신감 있게 쏘아붙였다.
"귀하, 당신네들 아직도 미련을 못 버리셨소? 찰거머리보다 더 끈
덕진 사람들이로군!"
"무슨 말을 하는 거요?"
계 형이 의아스레 물어왔다.
"당신, 천지회 사람이지?"
그는 한마디로 단정을 내렸다.
"경고하겠는데, 나한데서 저만큼 멀찌감치 떨어지시오. 당신네들에
게 보복을 안 한 것만으로도 내 인정을 충분히 베푼 셈이니까, 다시
는 귀찮게 굴지 말았으면 좋겠소. 또 성미를 건드리면 나도 당신네가
영원히 후회하도록 만들어 드릴 테니 잘 생각하시오. 건청방이 좋은
거울이 될 거요. 나는 내게 해를 끼친 사람한테는 두 배로 보답하는
원칙을 가지고 있소. 귀하, 내 말 충분히 알아 들으셨소?"
"흥, 천지회의 어디가 나쁘다고 그러나? 우리는...."
"됐소, 그만 떠드시오! 귀하, 나는 천지회가 나쁘다곤 하지 않았
소. 다만 서로 길이 다르니, 아무 일도 함께 하지 못하겠단 말이오."
"양심 있고 피가 끓는 사람이라면...."
"양심 있고 피가 끓는 사람이라면 당신네 사업을 위해서 자기 목을
날리고 뜨거운 피를 뿌려야 한단 말이오?"
"좀 냉정할 수는 없겠소?"
"난 이미 냉정을 충분히 지키고 있소, 귀하."
그는 숨 한 모금 길게 내쉬었다. 말씨도 되도록이면 부드럽게 내려
고 애를 쓰고 있다 .
"당신네들은 필부지용(匹夫之勇)만 가진 사람들을 앞잡이로 내세워
폭력을 쓰고 있소. 또 낡아빠진 유세 방법으로 무리들을 충동질해서
부려먹고 있소. 그게 다 뭣하는 수작들이오? 계획성도 없고 멀리 내
다보는 안목도 없는 폭민(暴民)이라면 무슨 일을 벌이든지 모조리 실
패하고, 숱한 정영(精英)들만 억울하게 죽이고, 남
의 손에 낱낱이 분쇄되고 섬멸당할 뿐이외다. 전조(前朝) 외로운
신하의 눈물도 이제 다 말라붙었고, 남은 원로들도 시든 나뭇잎처럼
몰락했소. 몰락은 하지 않았다 치더라도 속세를 버리고 은둔한 채 나
날이 괴로운 여생을 보내고 있는 상황인데, 우리 같은 어리석은 백성
들에게 무얼 호소할 능력이 있겠소?"
"그래도 몇몇 사람은..."
"없소이다. 귀하, 물론 고정림(顧亭林), 이이곡(李三曲), 부청주
(傳靑主) 같은 사람들이 아직 이 세상에 살아 있기는 하오만, 아무짝
에도 쓸모 없는 무능력자들이오. 더구나 무덤에 들어갈 날도 머지 않
았소. 요 몇 년 전, 당신네들이 계주( 州) 땅으로 고정림을 찾아갔
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소. 그 결과가 뭐요? 그의 고향 곤산(崑山)
집과 누이가 시집간 서씨(徐氏) 일문은 지금 과거 시험장이 되었다는
천추만대 아름다운 이야기거리를 만들었소. 그것만 보아도 현실이 어
떻게 돌아가는지 뻔하지 않소? 그는 명나라의 원로 유신이지만, 그
누님의 세 아들은 지금 조정에서도 황제의 총애를 한 몸에 받는 중신
들이오. 이런 판국에 당신네들이 찾아갔다니 웃음거리밖에 더 되겠
소? 당신네들이 그가 한때 제남(濟南)에 투옥되었을 때 탈출계획을
세운 적이 있단 소문을 들었소. 하지만 그 친구들이 얼마나 참담한
악운에 봉착했는지 생각 좀 해보셔야겠소. 제발 부탁이니, 나를 그런
시궁창에 끌어넣을 망상일랑 걷어치우시오, 귀하."
"당신 견해로는, '반청복명' (反淸復明)의 대계획을 어떻게 추진하
면 좋다고 생각하시오?"
"반청복명이라? 대낮에 개꿈일랑 작작 꾸시오!"
그는 저도 모르게 큰소리로 외쳤다.
"난 당신네들 하는 일에 입맛이 싹 떨어진 사람이오. 냄새 풍기지
말고 제발 멀찌감치 떨어지시구료."
"장씨 아우님...."
"흥!"
그는 코방귀를 한 번 뀌더니, 산비탈 아래쪽으로 쏜살같이 뛰어 내
려갔다.
계제운은 그의 뒷모습에 눈길을 못 박은 채, 뭐가 그리도 통쾌한지
목젖이 드러나도록 웃음보를 터뜨리기 시작했다.
"으하하하!... 으하하하!..."
초일류급 고수 아홉이서 아직 일류급 축에도 들지 못하는 승려 비
구니 3, 40명을 요리했으니, 그 결과는 묻지 앓아도 뻔할 터다.
절반 수가 죽어 자빠졌을 때, 나머지 승려 비구니들은 대세가 기울
었음을 깨닫고 두 다리에 비파 소리가 나도록 사면팔방으로 뿔뿔이
희어져 도망치기 시작했다.
몇몇은 헐레벌떡 대웅전 안으로 뛰어들어가 건물 지형을 의탁해서
완강하게 저항을 계속했다.
초일류급 고수 아홉 명은 고작 두 사람이 가벼운 상처를 입었을
뿐, 인명 피해는 전혀 없었다. 싸움터가 와해되자, 이들 가운데 절반
수는 대웅전 안으로 뒤쫓아 들어가 은신자들을 닥치는 대로 찾아내어
쳐죽였다.
대방선사와 불비마니도 대웅전 뒤채로 도망쳐 들어갔다. 이들 역시
모두 깊은 상처를 입은 몸이었다.
일방적인 도살극이 거의 끝나갈 무렵, 대웅보전 앞마당에서 영락
공자는 결말이 나기만 기다리면서 천연덕스레 웃고만 있었다.
"당신들도 들어가서 <탈혼마녀>를 찾아내 오시오, 반드시 산 채로
잡아야 하오. 나는 산 목숨이 필요하니까."
그는 자기 곁에 호위를 서고 있던 두 남녀에게 명령을 내렸다.
"찾아내지 못하거든 불이라도 질러서 끌어 내오도록 하시오."
"안심하십쇼, 남문 공자. <사해검객> 일행이 뒤쫓아 들어갔으니까
잘 처리할 것입니다."
키가 후리후리하고 반백의 나이를 넘긴 중년인이 구환대도(九環大
刀)를 쓰다듬으면서 응답했다.
"소인은 영존 천풍거사로부터 당신을 보호해 달라는 당부를 받았습
니다. 그래서 신변을 떠나지 못하는 걸 양해해 주십쇼. <탈혼마녀>
우한빙이 무섭다고는 하지만 눈먼 장님이 된 계집쯤은 우리 가운데
아무나 상대해도 너끈할 겁니다. 아마 지금 형편으로는 <탈혼마음>도
쓰지 못할 텐데, 두려울 게 뭐 있습니까? 걱정말고 느긋하게 기다리
기나 하십쇼."
"죽일 사람도 거의 다 죽었으니까, 절간에 불 지를 필요는 없을거
요."
얼굴이 음침한 <여백> 여강이 한마디 끼어들었다 .
"이래뵈도 유지사는 진강부의 4대 명찰(名刹) 가운데 하나요, 불
태워 없엔다면 아깝지 앓겠소이까?"
바로 그때, 대웅전 어귀에 사람의 그림자 하나가 불쑥 나타났다.
빙글빙글 야릇한 미소를 머금은 채 앞마당 한가운데로 성큼성큼 내딛
어 오는 장추산, 그의 손아귀에는 땅바닥에서 주운 계도(戒刀) 한 자
루가 들려 있다. 계도라면 행각승(行脚僧)이 산길을 나다닐 때 나뭇
가지, 덤불숲을 헤치고 지팡이 삼아 쓰는 병기요, 장작패는 데 쓰는
평두시도(平頭柴刀)와 절반쯤 닮아서 날끝이 민둥민둥하지만, 칼등은
두툼하고 날이 얇은 것이 무게도 제법 묵직하다.
"여시주, 말씀 한번 잘 하셨소. 보살님께서 그 말씀 한마디를 들으
시고 당신 죄는 용서해 주실 거요."
장추산은 일부러 목소리를 얄궂게 꾸며 조롱하면서 세 사람 앞으로
한 걸음 한 걸음씩 다가왔다.
"부처님 말씀에, '백정이 칼을 내려놓으면 그 자리에서 부처가 된
다 (放下屠刀, 立地成佛) 하시지 않았소? 그러니까 당신네들도 과거
에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죽였는지 모르나, 1천 명도 좋고 1만명도 좋
으니까, 이 자리에 그 흉기를 내려놓으면 부처님이 될 수 있을 거요.
왕년의 살인마 이자성(李自成)은 수천만의 생명을 죽였으면서도, 막
판에 가서는 죽은 것처럼 가장하고 상덕부(常德府) 산중 절간으로 출
가승이 되어 부처님 노릇을 하며 여생을 고이 보냈다니까, 좋은 선례
를 남긴 셈이지."
"네놈이 아직... 죽지 않았나?"
영락 공자가 귀신이라도 마주친 듯 곤혹스레 물었다.
"악담 저주에 고사를 지내 보려무나, 그럴수록 난 안 죽는단 말이
다."
장추산은 음험하게 웃어보였다.
"혜과 노니가 발설을 말아야 했었어. 네놈이 광릉원에 출몰한 사실
이 들통났으니, 마음에 켕겨서 이런 여우 너구리 떼를 몰고 쳐들어와
절간의 승려들을 몰살해 버리는 거지? 하하하! 그렇게 해서라도 입막
음을 해야 하다니, 정말 가련한 신세로군! 정말 가련한 신세로군! 허
나 입막음을 하기에는 그 일을 아는 사람이너무 많다는 걸 알아두셔
야겠어."
"적어도 네놈의 입 하나만은 봉해 버릴 수 있지 !"
<여백> 여강이 징그러운 웃음을 띠고서 천천히 다가왔다.
"네놈은 벌써 이 늙은이의 절대 공격권 안에 들어 있어! 죽기에 꼭
알맞은 범위 안에 말이다."
"정말이오?"
장추산이 싱긋 웃어가며 물었다.
"금방 알게 될 거다!"
말끝이 떨어지는 것과 동시에 사람의 그림자는 정면으로 바짝
덮치고 있다. 쌍장이 상하로 엇갈리면서 비릿한 냄새와 노호(怒
號)를 동반하고 한꺼번에 들이닥쳤다. 1장 이내에서 상대를 쳐 죽
일 수도 있거니와 장독이 신체 부위 어느 곳에나 닿기만 하면 그
목숨을 구할 도리가 없는 쌍장이 상단과 하단에서 일제히 쾌속 절
륜한 속도로 육박해 오는 것이다.
허나 장추산은 그 자리에서 꿈쩍도 하지 않았다.
"팟!..."
여강의 장력은 몸뚱이에 닿기가 무섭게 안개처럼 흩어졌다. 부
시독(腐屍毒)도 그의 호체기공에 아무런 손상을 끼치지 못했다.
역겨운 비린내도 호흡을 멈춘 사람은 중독시켜 거꾸러뜨릴 수 없
었다.
칼빛이 번뜩 빛났다. 날이 무뎌빠진 둔도(鈍刀)가 아주 빠르
게....
"아으!..."
<여백> 여강이 째지듯 외마디 비명을 지르더니, 질풍같은 속도
로 1장 가웃 물러났다. 물러난 땅바닥에는 바른손 팔꿈치 아래쪽
이 소맷자락과 함께 뭉텅 끊겨 떨어져 있었다.
"업보로다, 업보야!"
장추산이 피가 뚝뚝 떨어지는 칼날을 흔들어 보이면서 중얼거렸
다.
"대웅전 부처님이 앉아 계신 보좌 앞에서 피보라를 일으키다니,
그 죄가 실로 막중하구료."
키다리 중년인이 유령처럼 소리 소문도 없이 장추산의 배후로
사납게 덮쳐 왔다. 칼등에 매달린 쇠고리 아홉 개가 요란한 소리
를 낼 법도 한데, 금속성은커녕 바람 가르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
는다.
볼이 넙적하고 등이 두터운 구환대도의 육중한 칼날이 번개같이
정수리 위로부터 쪼개 내려쳤다. 이걸 정통으로 얻어맞는 날이면,
사람은 그 자리에 선 채 두 조각이 날 판이다.
장추산은 등에도 눈이 달렸는지, 신형을 좌측방으로 1보 옮겨놓
는 것과 동시에 손길 나가는대로 계도를 휘둘러쳤다.
"땅!"
구환대도가 지면에 깔아 놓은 벽돌바닥을 내리찍으면서 그제야
아홉 개의 쇠고리가 처음으로 '와장창!' 요란한 소리를 냈다. 같
은 찰나, 불똥이 돌가루와 함께 사면팔방으로 흩날렸다.
"어흑!..."
숨 막히는 소리, 중년인의 몸뚱이가 뒤를 향해 벌렁 나가떨어졌
다.
계도는 그 복부에 남아 있었다. 아래쪽에서 위쪽으로 배를 가르
고 올라간 듯, 칼자루는 가슴팍 흉벽(胸壁)에 멈춘 상태로....
"이 양반, <철포삼>(鐵布衫)의 화후가 모자라군!"
장추산은 빈 손을 탁탁 털면서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사나운 눈
초리는 이내 영락 공자의 신상에 못박혔다.
"저렇게 날도 없는 무딘 칼도 막지 못하는 주제에 어떻게 자네
경호원 노릇을 하겠다는지 모르겠군. 내공 수준도 한참 떨어지고
말이야."
"네놈이... 네놈이 요술을 부렸구나!..."
"요술이라? 미안하지만 소인은 그런 걸 배운 적이 없네."
"그럼..."
"칼이나 뽑아들게!"
"장, 장 형... 우리 좋게 말로 합시다!..."
"옳거니, 좋게 말로 해보자구."
장추산은 싱글벙글 웃어가며 그 말을 받았다.
"그날밤, 내가 광릉원을 불태웠을 때, 노형께서도 쥐새끼처럼
그곳을 드나들었지, 안 그렇소?"
"그, 그건...."
"복면으로 얼굴을 가리우고 말씀이야."
"허튼 소리 !"
"혜과가 그러더군"
"그 계집이 엉터리로 지껄인 거야!"
"자네가 패거리를 끌고 와서 그녀를 죽여 입 봉하려고 한 짓은
그녀의 말이 진실이란 것을 증명한 셈이야. 자네가 부인하려 해도
손바닥으로 하늘 가리우기나 매일반이지!"
"내가 찾아온 목적은 당신 여자 친구들을 구출하려고...."
"그 냄새나는 주둥이 좀 다물어. 개자식! 헛된 명성만 자자하게
퍼뜨렸지 뼈대라곤 하나도 없는 무골충이로구나!"
"네가 날...."
"그때 동료가 또 한 놈 있었지? 그게 누구냐?"
장추산의 물음이 급작스레 높아졌다.
"무슨 말인지, 난... 그게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영락 공자는 얼굴빛이 하얗게 질려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다 .
"말을 안 하겠다면, 네놈도 이것들처럼 갈갈이 찢어 핏떡으로
만들어 주고야 말 테다! 바른대로 대라, 그 복면한 놈이 누구였
지?"
장추산은 으르렁거리면서 한 발 한 발씩 다가들었다.
이때, 편전에서 중년인 하나가 뛰쳐나왔다. 오른손에는 핏자국
으로 얼룩진 장검 한 자루, 왼손으로는 비구니 혜과의 멱살을 움
켜 죽은 개 끌듯 질질 끌고 나오고 있었다.
"빨리 !... 영락 공자를 도와 줘 !"
팔뚝 끓긴 상처를 억누르면서 <여백> 여강이 목이 터져라 고함
쳤다.
중년인은 거반 죽다시피 한 비구니를 내던지고 노성 한마디에
장검을 휘둘러가며 미친 듯이 돌진해왔다. 첫 공격은 <사성일홍>
(射星逸虹), 별떨기를 쏘아 맞추려듯 예리한 칼끝이 장추산의 바
른 쪽 겨드랑이를 찍으려고 덮쳐왔다 .
장추산이 이동하는 모습을 본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이동속도
가 너무나 빨라, 사람들로 하여금 시선에 착각을 일으키게 만들었
다.
일격이 빗나가면서 칼끝은 장추산의 가슴 앞을 미끄러지듯 흘러
갔다.
"저리 꺼져랏!"
장추산이 무겁게 호통쳤다. 왼손아귀가 중년인의 칼자루 쥔 손
등을 움키는 동안 번개 벼락치듯 뻗어나간 오른손이 그 콧날을 정
통으로 쥐어박았다. 중년인의 콧마루가 구덩이 파이듯 움푹 꺼지
면서 양 눈알이 불쑥 튀어나왔다. 그것도 일순, 눈언저리에 선혈
이 용솟음치는가 싶더니, 마침내 눈알 두 개가 터지듯이 쏟아져
나오더니 뺨 언저리에 데룽데룽 매달렸다.
"으아악!..."
사람의 몸뚱이가 벌렁 누운 자세로 날아가서 '꽈당!' 소리를 내
며 곤두박질쳤다. 그리고 얼굴을 감싸 쥔 채 무섭게 버둥거리기
시작했다.
장검의 주인이 바뀌고, 장추산의 눈매에는 살기가 솟구쳤다.
"저놈 죽여라!"
영락 공자가 공포에 질린 기색으로 미친 듯이 고함쳤다 .
대웅전 뒷문으로부터 남녀 한 쌍이 쫓아나왔다. 천둥에 놀란 벼
락 때리듯 쌍검이 무서운 기세를 싣고 나란히 내찔러들었다.
"타앗!-----"
얼음장보다 더 차가운 기합성 한마디, 그의 수중에 들린 장검이
뇌성 벽력같이 움직였다. 칼빛이 쌍검의 중간 틈서리로 '휙 !' 뚫
고 들어가더니 좌우 수평으로 번쩍 빛났다. 여인의 두 다리가 무
릎뼈 아래부터 한꺼번에 썽둥 끊겨 날았다.
검광이 재차 번뜩이더니, 인정 사정없이 남자의 뒷목덜미를 훑
어갔다.
머리통이 허공으로 '붕!' 날아 오르는 동안, 시체는 목 떨어진
줄도 모르고 여전히 앞으로 돌진했다.
영락 공자의 모습이 사라졌다. 쌍방이 격돌하는 순간을 틈타 잽
싸게 뺑소니친 것이다.
"비겁한 놈! 어디 도망칠 수 있을 듯 싶으냐?"
장추산이 노성을 지르면서 대웅전 안으로 뒤돌아 몸을 날렸다.
영락 공자는 벌써 온 데 간 데 없다. 대웅전 뒷문으로 빠져 동서
남북 어디론가 사라진 것이다 .
절간 뒷산 언덕 비탈에서, 장추산은 풀리지 않는 의문의 수수께
끼와 씨름을 하고 있다.
앞서 이 부근에 분명히 30여 명이나 되는 고수들이 잠복해 있었
는데, 어째서 그림자 하나 보이지 않느냔 말이다.
근처 여기저기에는 확실히 맞싸운 흔적이 남아 있다. 핏자국도
여러 군데 무더기로 엉겨붙은 것을 보건대. 누군가 죽음을 당한
증거가 뚜렷하다. 누구냐? 이리로 도망쳐나온 승려와 비구니들이
피살된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시체는?
매복자들이 영락 공자의 응원군이라면 어째서 달려 내려와 자기
를 공격하지 않았을까?
이곳저곳을 살펴보던 그는 갑자기 맹렬한 기세로 돌아섰다. 수
중의 장검은 벌써 공격태세를 갖추었다. 실로 초진 발속(超踐拔
俗)의 무서운 반응이다.
"뭘 찾는 거요?"
등뒤의 사내가 빙글빙글 웃어가며 물었다.
'계 형' 이라고 불러 달라던 중년인, 계제운이 천연덕스립게 의
젓한 자세로 뒷짐지고 서 있다.
"남이야 뭘 찾든, 그게 무슨 상관이오?"
그는 목청 큰 싸움꾼처럼 버럭 악을 썼다.
"여기 엎드려 있던 패거리를 찾으시나? 그건 내가 다 두들겨 쫓
아보냈지 !"
계제운은 미소를 잃지 않는다.
"하나같이 이류급밖에 안 되더군. 장씨 아우님, 생각보다 그리
고명한 솜씨를 지니지 않았어. 하기야 그물에서 빠져나온 패잔병
을 처치하는 데 초일류급 고수 명숙을 매복시킬 필요가 없겠지.
안 그렇소?"
"흥, 계 형 솜씨가 고명하셨겠지 !"
"어디 자네하고야 비교가 되겠는가? 하하하! 이렇게 해보세. 우
리 몇 수 겨뤄 근육 좀 풀어보는 게 어때?"
"하하, 소인은 그런 심심풀이 장난은 해본 적이 없소이다."
그는 웃으면서 이때껏 들고 있던 장검을 발밑에 내던졌다.
"두려워서 그런가?"
계제운은 일부러 압력을 가해온다 .
"두려움을 느껴야 정상적인 사람이지! 병기란 것은 흉기요, 싸
움은 위태로운 장난이 아니겠소? 칼날에 눈이 안 달렸으니, 두렵
지 않다는 말은 자기 자신과 남을 다 속이는 헛소리외다."
"가령 내가 윽박지른다면?"
"그럼 얘기는 또 달라지겠지 !"
"좋아, 그럼 내가 자네를 윽박지르면 되겠군!"
'스르렁 !' 하는 용음이 울리더니, 칼집에서 빠져나온 장검이
눈부시게 찬란한 보광을 쏟아낸다. 검신(劍身)은 가을 물결보다
더 차갑고 거울처럼 깨끗한 것이, 사람의 모습마저 비칠 정도다.
"허어 ! 기막힌 명검일세 그려."
장추산이 저도 모르게 탄성을 발했다.
"진짜 좋은 칼이지. 무쇠 벽 바윗돌을 두부 쪼개듯 꿰뚫고 들어
가니까 말이야. 사람의 옷만 쳐도 그 주인 몸뚱이에서 피가 나온
다는 명검이라네."
"호오, 그래요?..."
"칼의 이름은 함광검(含光劍), 은(般)나라 시대 삼보(三寶) 중
의 하나인 함광검이라곤 하지만 아마 허풍을 떠느라 갖다붙인 이
름일거야. 그래도 명검은 명검이니까 호랑이한데 날개가 달린 셈
이지. 어떤가, 무섭지 않나?"
장추산이 발치 밑 장검을 도로 집어들고 묵묵히 운공을 시작했
다.
"어디 시험해 봅시다, 계 형 !"
그는 버럭 고함을 치기가 무섭게 손아귀의 장검을 날려보냈다.
"이크!"
계제운이 깜짝 놀라 실성을 터뜨렸다. 칼날의 중심을 뒤로 뺀
상태에서 직선비행으로 날려보낸다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하다. 제
아무리 흉맹스런 공력이 실렸더라도 기껏해야 칼자루가 앞으로 칼
끝은 뒤로 쳐뜨린 자세가 되기 때문에, 손잡이 끝으로 목표에 타
격을 하는 형국이 되는 것이다.
"쩡 !... 챙그렁 !"
계제운은 연속 2검을 떨쳤다. 최초 일격이 이제 막 들이닥치는
칼날의 중심 부위를 때려 꺾어 놓자, 비검(飛劍)은 급격하게 방향
을 바꾸더니 손잡이 쪽을 여전히 앞으로 향한 채 날아들었다. 두
번째 일격이 칼받이 호수구(護手口)를 후려쳐서야, 날아들던 비검
의 절반쪽이 훌러덩 뒤집히면서 3장 거리 밖으로 멀찌감치 날려보
낼 수가 있었다.
"어기검술(馭氣劍術) 같은데..."
계제운은 등줄기에 식은땀을 흘리면서 중얼거렸다.
"요 풋내기 녀석이 벌써 그 불가능의 경지까지 연마했단 말인
가? 그럴 수가 있나?"
장추산은 이미 자취를 감추고 없다. 불가사의할 정도로 재빠른
뺑소니 솜씨다.
요행으로 목숨을 건진 승려와 비구니들이 절간 한 곁 야트막한
산비탈에서 휴식을 취하고 상처를 치료하고 있다 .
대방선사는 오른쪽 늑골과 왼쪽 어깻죽지 뒤에 날카로운 기물에
베인 상처를 끔찍스럽게 드러내고 있었다. 그가 중상을 입은 것만
보더라도 상대방의 내공력 수준이 얼마나 깊고 두터운지 알 만했
다. 반탄력의 충격에 외압(外壓)까지 곁들인 공력이 도검을 두려
워하지 않는 금강선공을 여보라는 듯이 격파하고 심각한 상처를
안겨준 것이다.
내공과 내공의 대결에서는 공력이 깊은 쪽이 승리하게 마련이
다. 무림계 인물이라고 해서 모두들 금종조 철포삼(鐵布衫)을 연
마하여 찍고 후려치는 도검의 공격 앞에 거리낌없이 육신을 내세
울 수 있는 철인(鐵人)이 될 수 없으니 말씀이다.
가령 쌍방이 똑같은 형식의 내공을 연마했을 경우에는 화후가
깊고 정순한 쪽이 상대방의 몸뚱이를 두 토막으로 쪼개 버릴 수가
있다.
쌍방의 공력이 엇비슷한 상태에서 맞겨룬다면, 일반 무림 고수
들의 싸움이나 별로 다를 게 없어서, 똑같이 근접공격을 펼치고
육박전을 벌이다가 결국은 공격이 착실한 쪽에서 상대방에게 상처
를 입히게 마련이다.
불비마니도 가볍지 않은 상처를 입었다. 그녀는 바른쪽 넓적다
리에 길이 다섯 치가 넘는 칼자국이 났을 뿐더러 칼끝이 뼛속 깊
이 파고들어 하루 이틀 안에 의원을 찾아가 치료를 받지 못할 경
우 평생토록 절름발이 신세를 면치 못할 것이고, 두 번 다시 강호
(强豪)의 명성을 뽐내지 못하게 될 처지다.
혜과대사의 형편이 가장 참담했다. 두 눈이 멀어 장님 신세가
되었으니까.
장추산은 대방선사를 도와 상처에 약을 바르고 붕대로 감아주면
서, 마음 한 구석에 일말의 슬픔 같은 것을 느꼈다. 유지사 절간
의 40여 명이나 되던 승려와 비구니들이 30명 남짓 참살당했을 뿐
더러 그 나머지도 모두 부상을 입어 몸 성한 사람이라곤 하나도
없는 것이다. 상대방의 악랄함에 생각이 미치자, 그는 속으로 치
를 떨었다. 실로 소름이 오싹 끼치도록 잔혹한 살육, 애당초부터
영락 공자 일당은 절간에 산 목숨 하나 남겨 두지 않을 작정으로
공격을 퍼부은 것이 분명할 터, 인간 백정치고는 정말 너무도 지
나친 행위가 아닐 수 없는 것이다 .
"여러분이 절간으로 돌아가시더라도 뒷마무리를 잘 하셔야 할
겁니다. 놈들이 다시 쳐들어올지 모르니까 단단히 조심하시고."
장추산은 상처를 싸매던 손으로 대방선사의 어깨를 탁탁 쳐 주
고 일어나면서 간곡하게 일러 주었다.
"걸을 수 있는 분은 아무래도 일찌감치 맞바람 피해 멀리 도망
치는 게 좋겠군요. 하기야 그놈들도 여러분을 쉽사리 놓아보내지
않겠지만 말입니다."
"요놈의 주둥이가 화근이었어! 모두 내 잘못이야!"
혜과대사는 통한에 못이겨 뼈저리게 외치면서 두 주먹으로 나무
등걸을 마구 후려쳤다 .
"영락 공자 그놈의 새끼, 얼굴을 가리우고 광릉원에 드나든 것
이 무슨 큰 비밀이 된다고 이토록 급박하게 쳐들어와서 미친 개떼
처럼 우리를 몰살해 버리는 거야? 내 한 목숨 붙어 있는 한, 그놈
을 결코 놓치지 앓겠다! 우리 마도의 동료들을 설득시켜서 그놈의
영락장으로 쳐들어가 이 핏빛을 반드시 받아내고야 말겠어 !"
"혜과 도우, 어쩌면 그놈도 은화 5만 냥 때문에 <능소객> 방세
광을 찾느라고 그런지 모르겠소."
대방선사가 어깨를 추스르면서 입을 열었다.
"그 짐승 놈의 지위나 신분으로 보아서, 재물 때문에 방세광의
가문에 공공연히 도발한다는 것은 극히 껄끄러운 일이었을 거요.
나중에 가서 무림계 동도들에게 변명할 말이 없을 테니까... 그놈
은 또 그래서 혜과 도우를 죽여 입막음을 하고 자신의 죄상을 은
폐하려고 그랬을 거외다."
"제가 알기에도 <능소객>이 은화 5만 냥짜리 음모에 손을 댄 것
은 확실합니다. 다만 그놈 역시 중간자에 지나지 않습지요."
장추산이 거들고 나섰다.
"앞뒤에서 일을 주재하는 놈은 따로 있습니다. 얼마 안 있으면
그놈의 정체와 진상이 밝혀지겠습니다만... 소도회나 천지회에서
추적 조사하는 사람들이 대강(大江) 남북을 바쁘게 뛰고 있으니
까, <능소객>도 오래 숨어 있지는 못할 테고 말이지요. 혜과대사,
저는 당신 사매에 대해서 미안하다는 말씀밖에 드릴 것이 없습니
다."
"장 시주, 그것은 당신 탓만으로 볼 수는 없소."
혜과는 한숨을 길게 내쉬면서 회한에 찬 목소리로 대꾸했다 .
"빈니도 그날 도망쳐 나온 문하제자의 입을 통해서 그간의 사정
이 어떻게 되었는지 자세히 알고 있소. 사매가 죽음을 당한 것도
자업자득이라고 말할 수 있을 거요, 오늘 만약에 장 시주가 나서
서 그놈들을 쫓아 버리지 않았던들 이 유지사는 전멸당했을 터,
이나마 요행으로 목숨을 건진 사람은 하나도 없었을 거요. 장 시
주, 빈니가 비록 마도에 속한 위인이기는 하나, 그래도 은원을 분
명히 밝히는 무림계 사람의 기질은 지니고 있소. 그대와 나 사이
에 은원관계는 이것으로 깨끗이 없어진 셈 치겠소."
"고맙습니다."
장추산은 겸손히 사례했다.
"이제 대방 스님의 말씀대로, 영락 공자는 은화 5만 냥에 눈독
을 들여서 복면을 하고 <능소객>을 찾아갔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하오나 또 다른 가능성은 없을까요?"
"장 시주는 또 다른 가능성이 있다고 보시오?"
대방선사가 되물었다.
"영락 공자와 <능소객>, 이들은 한패거리니까 말입니다."
"그래요? 허나...."
"영락거사가 <능소객>과 왕래를 했으니까, 그들이 무슨 음모를
함께 꾀했을 가능성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건 좀 무리한 추측이외다. 강호 친구들이 아는 바로는, 영락
거사는 정파 군자의 기백을 잃지 않은 인물이오. 또 그 사람이
<능소객>과 무슨 관련을 맺었다는 소문도 듣지 못했고 말이외다.
하기야 피차 교분을 맺었을 가능성도 물론 있기는 하오만, 무림계
영웅 호걸들의 교분이나 왕래는 워낙 복잡하니까, 두, 사람도 통
상적인 한도 내에서 왕래를 유지했을 거요."
"저는 그들이 암암리에 결탁했을 가능성을 말씀드리는 겁니다."
"장 시주, 빈승도 딱 부러지게 단정을 내릴 수는 없소만, 이것
하나는 말씀드리겠소. 세상 만사란 천백 가지로 기괴하게 돌아가
는 만큼, 어떤 일이든지 일어날 가능성은 항상 존재한다 그거요."
대방선사의 말투에는 어느덧 고승다운 기색과 철리(哲理)가 제
법 담겨 있다.
"그렇다면 <천마> <지마> <인마> 세 놈들과도 암중 결탁했을 가
능성도 포함해서 말입니까?"
"물론이오."
대방선사의 말을 듣고서, 불비마니가 싸늘하게 웃더니 흐트러진
옷자락을 가다듬고 일어섰다 .
"영락거사도 본디 착한 놈은 못 된답니다."
누구한데 들으라고 하는 말은 아니지만, 냉랭하면서도 확신에
가득찬 목소리다 .
"그자는 무림 명문의 깃발을 내걸고서 정사 양파의 사람들과 똑
같이 우정을 맺고 강호상에 출몰이 무상한 위인이외다. 그러니 누
가 그자의 속마음을 알겠소? 이번에도 그는 진강부에 돌연 나타났
소. 두 부자가 무슨 일을 꾸미는지 모르나, 겉으로는 따로 노는
듯 하면서도 내면적으로 무슨 음모를 추진시키고 있는 게 분명하
오."
"그들 부자는 동시에 나타난 적도 있습니다."
장추산은 간략하게나마 앞서 관도상에서 그들 부자와 한꺼번에
충돌했던 경위를 일러주었다 .
"어쩐지 그 아들놈 신변에 생각지도 못하게 그 많은 고수 명숙
이 따라붙었는가 했더니만, 다 까닭이 있었군 그래 !"
대방선사는 증오에 못이겨 이를 갈아붙였다.
"오늘 여기 쳐들어온 놈들도 하나같이 못된 개 잡놈이었소. <사
해검객> 노성균은 뭇 사람들에게 저주와 악담을 듣는 잔혹스런 살
인마요. 그리고 쉬독표창을 쓰던 <추혼사자> 당군호는 더욱 뭇 사
람들이 치를 떨게 만드는 악독한 백정이외다. 이런 놈들이 따라붙
었다면, 영락거사가 <천마> <지마> <인마>들과 암암리에 왕래할
수도 있을 테고, 또 <능소객>과 내밀히 결탁했다는 것도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닐 거외다."
"저도 한 치 두 치씩 그자들의 뿌리를 파들어가고 있습니다."
장추산은 이를 악물었다.
"저는 확신 못할 일을 가지고 남에게 해를 끼치지는 않습니다.
그들 부자도 손바닥 하나로 하늘을 가리지는 못할 데지요. 제2의
인물이 누군지 모르나 세상에 끝까지 감출 비밀은 없을 겁니다.
자, 여러분, 속히 이 위험한 곳을 떠나도록 하십쇼. 부디 몸조심
하고 훗날 다시 만나뵙기를 바랍니다."
푸른 옷차림의 다섯 복면객은 추격의 명수였으나, 갈패옥도 그
못지 않게 도망치는데 전문가다. 그녀는 우선 재빠른 동작으로 현
장을 벗어난 다음, 대나무 숲 속 은밀한 구석에 은신처를 하나 다
시 찾아 놓고 여기저기 도망친 흔적을 남겨 놓아 추격대의 방향을
정신 못 차리게 흐뜨렸다.
신속히 현장을 이탈한 것은 아주 효과적인 조치여서, 추격대를
느림보 굼뱅이로 만들어서 뒤쫓게 했다. 아무리 다리 걸음이 좋다
하더라도 추격하는 쪽에선 빨리 뛸 수가 없다. 무작정 빠르게 뒤
쫓다가는 자칫 방향을 잃어버릴 수도 있거니와, 일단 방향을 잘못
잡으면 원점으로 되돌아가서 다시 흔적을 더듬어야 하기 때문이다
.
드디어 댓가지 흔들리는 소리가 점차 가까워졌다.
복면객 다섯 명은 한 발 옮겨 딛을 때마다 경각심을 한껏 높이
고 아주 조심스럽게 대나무 숲 속 깊숙히 들어와, 마침내는 두 처
녀가 몸을 숨긴 장소로 차츰차츰 좁혀들었다.
두 처녀는 모두 중독당한 신세였다 .
안춘은 독장에 맞았고, 갈패옥은 독표창에 얻어맞았다. 천만 다
행히 독성이 극렬한 것이 아니었고 또 두 처녀의 체질과 내공 바
탕이 단단하게 갖추어진 덕분으로 아직껏은 버틸 만했다.
두 사람은 묵묵히 운기행공으로 조식했다. 그것으로 기독(奇毒)
의 침투 속도는 일단 완화시킬 수 있었으나, 지금 형편에서는 기
적이 일어나기만 바랄밖에 딴 도리가 없다.
안춘이 바라는 기적은, 자기네 사람들이 때늦지 않게 달려와 주
었으면 하는 것이었다.
갈패옥이 바라는 기적은, 장추산이 이 근처를 지나가다가 혹시
흔적을 찾아서 이곳까지 달려오지 않을까 하는 것이었다 .
대나무 가지를 헤치는 기척이 점점 가까워오자, 두 사람은 몸이
굳어졌다.
"언니, 좀 더 싸울 수 있겠어?"
갈패옥이 조바심을 이기지 목하고 속삭여 물었다.
"안 돼, 난... 손발이 마비되었어...."
안춘은 풀이 잔뜩 죽어서 대꾸했다. 얼굴에도 어느덧 잿빛 기운
이 넓게 번져가고 있었다.
"어쩌면 좋지?"
"어떻게 하면 좋겠어?"
"내가 저쪽으로 옮겨가서 놈들을 딴 데로 유인해 볼테야."
갈패옥은 오른쪽 방향을 가리켰다. 자신 없는 손가락질이다.
"난 억지로나마 걸을 수 있어. 잘만 되면 시간을 좀 벌 수 있겠
지. 언니는 이 자리에 가만 숨어 있어요. 발각되거든 죽기살기로
싸우고 말이야. 혼자 죽어서야 되겠어? 몇 놈 데리고 지옥 행차를
하면 분풀이도 하는 셈이지."
"너... 혼자서라도... 떠나...."
"혼자서 못 가, 언니."
"그럼 너는...?"
"시간을 좀 벌어야 해."
"하지만 그게 무슨 소용이 있어?"
"나는 추산 오빠를 단단히 믿어요. 두고 보라구, 그 사람은 반
드시 우리 종적을 찾아내서 쫓아올 테니까!"
갈패옥은 그것이 으레 당연하다는 투로 고개까지 끄덕여 보였
다.
"난 믿어, 믿고 말고! 추산 오빠가 쫓아올 때까지 시간을 끌 수
있어 ! 꽁꽁 숨어 있어야 해, 언니. 난 갈 데야!"
"소패!..."
안춘은 감히 큰소리로 부르지 못한다. 갈패옥은 못 들은 척, 비
틀걸음으로 그 자리를 떠났다.
한참 있으려니, 우측 방향 멀리서 '와수수, 와수수!' 마른 댓가
지 흔들리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다.
"저쪽이다. 빨리 쫓아라!"
누군가 다급하게 외쳤다.
마음이 놓여서인가, 안춘은 심신이 몽땅 풀어지는 것을 느꼈다.
몸뚱이에 기운이라곤 한 방울도 남아 있지 않은 듯 싶다. 갈패
옥을 걱정하는 마음도 크지만 혼자 외롭게 떨어졌다는 고독감이
더 무섭게 엄습해왔다.
사실 그녀는 갈패옥이 떠날 때만 하더라도 별로 기대를 걸지 않
았다. 앙큼스런 것이 공연히 핑계를 대고 살짝 뺑소니쳤으리라는
생각이 앞섰다. 괘씸하게도 나 혼자 팽개치고 도망쳤다는 야속한
생각이 드는 것을 어쩌지 못했다.
허나 그 야속한 마음은 이내 놀라움으로 바뀌고 말았다.
잠시 후, 그녀는 어렴풋이 먼 데서 날카로운 비명이 울리는 것
을 들었다.
뒤미처 의기양양한 사내들의 웃음소리가 장공(長空)에 쩌렁쩌렁
울려왔다.
"소패야!..."
그녀는 발광한 사람처럼 악을 썼다. 어디 그런 기력이 남았었는
지, 양 손 두 다리가 마비되었다는 사실도 잊어버리고 자신에게
싸울 능력이 없다는 것마저 깡그리 잊은 채, 그녀는 손발을 마구
헤집어가며 비명이 울리는 방향으로 기어가기 시작했다 .
그것은 갈패옥의 비명 소리였다. 잘못 들었을 리는 전혀 없다 .
그녀는 소패가 자신의 연적이란 사실도 잊었다. 그저 생각나는
것이라곤 소패와 함께 죽어야 한다는 일념뿐이다. 소패를 혼자 죽
게 내버려 두면 그것은 자신의 책임이다.
이 모든 풍파와 뜻밖의 사태가 벌어진 원인은 모두 그녀 자신이
일으킨 것이다. 하물며 소패는 자기를 구해 준 사람이요, 또 지금
도 자기를 구하기 위해서 적의 추격을 따돌리다가 붙잡히지 않았
는가?
갑자기 그녀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누군가 상공으로 쏜살같이 날아오는 소리, 대나무 가지와 잎새
가 급격하게 갈라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앗!..."
놀라움에 가득찬 한마디가 그녀를 흥분에 겨워 온 몸의 피가 들
끓어 오르게 만들었다 .
"소춘!... 당신이... 당신이 !..."
경악에 가득찬 목소리, 그것은 장추산의 당혹스런 코에 익은 체
취, 손끝에 와서 닿는 그 익숙한 체온, 강력한 힘을 지닌 팔뚝이
그녀의 몸뚱이를 덥석 끌어안았다 .
"빨리!... 빨리 소패를... 구해줘요!"
그녀는 기쁨에 겨워 저도 모르게 흐느꼈다.
"그 아이가... 하느님!..."
멀리서 또 미친 듯한 괴인들의 웃음소리가 또 한 차례 들려와
그녀의 말끝을 끊어 놓았다.
"으하하하!..."
귓결에 '휙휙!' 스치는 바람소리, 가슴속 고동은 또 한 번 철렁
내려앉았다간 솟구쳤다. 몸뚱이가 안개 구름을 탄 듯 두둥실 떠오
르더니, 눈앞에 나타나는 것이라곤 모두 대나무 가지 잎새, 그러
나 미처 눈여겨 볼 틈도 없이 급격하게 뒤쪽으로 넘어갔다.
바야흐로 장추산은 그녀를 품에 안은 채, 생전 듣도 보도 못한
놀라운 경공신법으로 3장 높이나 되는 대나무 초리 끝을 딛어가며
쏜살같이 날아가고 있었다 .
유연한 대나무의 반탄력까지 빌렸으니 경공신법에는 놀라울 정
도로 엄청난 속도가 붙었다.
푸른 옷차림의 복면객 다섯 명은 동서 남북과 동북쪽 다섯 방향
으로 나뉘어 목표물을 포위했다. 이제는 단 한 걸음조차 옮기기도
어려워 신발을 질질 끌어가며 뒷걸음질 치는 갈패옥 소저, 창백하
게 질린 얼굴빛, 땀이 겉옷 바깥에 배어나오도록 흠뻑 젖은 채 꼬
마 아가씨는 다섯 마리 삵괭이에게 둘러싸여 놀림을 당하는 생쥐
새끼나 다를 바 없다.
삵괭이들은 생쥐를 붙잡으려고 서두르지 않았다. 그저 생쥐가
도망치려고 펄쩍 뛸 때마다 일장씩 후려치거나 걷어차서 제자리로
돌려 놓기만 했다. 궁지에 몰린 쥐새끼를 얼르고 놀리는 재미란,
붙잡아 놓고 주물러 터뜨리는 것보다 훨씬 더 기막히니까 말이다.
"으하하핫!..."
정면의 복면 괴한이 또 한 차례 미친 듯이 웃음을 터뜨렸다.
"창해 유성이 우내(宇內) 3대 비경(秘境)의 하나요, 독보적인
무공의 일가를 이루었노라고 떠들더니, 어쩌자고 요런 쥐새끼를
길러냈을꼬? 하하핫!"
"허풍 작작 떨어라, 이놈아!"
갈패옥이 뿌드득 소리가 나도록 이를 갈아붙였다.
"네놈들은 연약한 여자한테 다수의 힘만 믿고 또 극독 암기까지
써가며 비겁하게 습격하지 않았더냐? 그것만으로도 네놈들 스스로
염치 없는 하류잡배라는 걸 드러냈어 ! 우리 창해 유성의 권법검
술과 정정 당당하게 겨뤄볼 엄두는 내지 못하고 비열한 수단으로
암습하다니, 만약 내가 독암기에 맞지 앓았던들, 네깐 놈들이 어
디 그 주둥아리로 허풍이나 떨 듯 싶더냐?"
"조그만 게 귀염을 다 떠는군. 요 잡것!"
복면 괴한이 으르렁거렸다.
"네 창해 유성의 보잘 것 없는 솜씨 가지고야 처음부터 우리한
테 명함도 못 내밀어 ! 떼거리로 공격하거나 암기로 습격한 것은
애당초부터 우리 규칙이니까, 비겁하다고 말할 것도 아냐. 목숨
걸고 대결하는 판국에 쓸데없이 시간을 끄는 것보다 가능한 한 속
전속결로 빨리 끝내는 것이 좋지 앓는가? 공공연히 명성과 영예를
걸고 다투는 마당이 아닌 바에야, 저마다 영웅이랍시고 뽐내가며
도전하고 결투하는 것은 용납이 안 되지 ! 사실 너희네 창해 유성
의 무공처럼 사람 보는 앞에 내놓기 부끄러운 솜씨는 말할 나위도
없고 무림의 태산 북두로 일컫는 소림 무당의 권법 검법조차도 우
리 손아귀 아래에서는 맥도 못춘다, 이 말씀이다!"
복면객이 제멋에 겨워 한창 사설을 늘어놓는 찰나, 갈패옥은 잽
싸게 몸을 측방으로 내던져 가장귀가 잔뜩 우거진 대나무 숲으로
뚫고 들어가려 했다.
대나무는 성질이 탄력도 센 데다 곧기로 이름났다. 또 대 숲은
소나무 숲과 비슷한 성질이 많아서 뿌리를 내린 지면에 다른 풀과
나무가 자라도록 용납치 않는다. 그저 극소수의 들풀만 억지로 붙
어 살아가는 게 고작이다.
이것은 햇볕과도 관계가 있을 뿐더러 또 대나무 자체가 분출하
는 일종의 독액(毒液)이 다른 초목을 자라지 못하도록 만든다. 그
렇기 때문에 대나무 아래에서는 아주 먼 거리까지 시야가 미치고
다른 나무와 풀섶에 시선을 가리우는 경우가 극히 드물다.
복면 괴한들은 물론 갈패옥조차도 대나무 위쪽은 무심코 흘려보
냈다.
나무 숲 아래쪽으로는 1백 보 이내에 접근자가 있을 경우 다섯
쌍의 예리한 시야에서 절대로 벗어날 수 없다.
"퍽!"
둔탁한 음향, 복면객 한 사람이 때를 놓치지 않고 들이닥쳐 그
녀의 도주로를 막아버리더니, 거센 발길질로 등줄기를 걷어차 제
자리로 떼구르르 굴려보냈다. 얼마나 억센 발길질이었는지, 독상
으로 마비된 어깨 상처에 고통이 되살아나고 어찔어찔 현기증을
일으켜 발버둥쳐 일어나기에도 힘들 지경이다 .
"핫핫핫!..."
복면객이 광소를 터뜨렸다 .
"네년의 기력이 몽땅 빠져나가거든, 그 다음에 우리가 흐뭇하게
품어줄 테니 그 기막힌 맛이나 기대해 보려무나. 자, 이제 협상
좀 할까? 또 한 계집년은 어디 숨었지? 얌전하게 바른대로 불어
라."
"네 할애비 무덤 위에 타고 앉았을 거다."
악다구니가 버둥버둥 일어나 앉으면서 악을 썼다.
"무덤을 파헤치고 바로 네 할애비 머리통을 깔고 앉았을 거란
말이다!"
"요 발칙한 것, 누구 조상을 욕보여? 오냐, 좋다. 네년을 죽지
도 살지도 못하게 만들어 주마!"
복면객이 불끈 성을 내더니, 노성을 지르면서 질풍같이 덮쳐들
었다.
하늘로부터 뚝 떨어지는 사람의 그림자가 땅바닥에 비쳤다. 대
나무 초리 끝이 휘청휘청 흔들리는 것을 보았을 때 착지동작을 취
하는 소리, 하강하는 사람의 그림자가 눈길에 얼핏 잡혔을 때는
그 장본인이 정수리 위에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탁!"
가벼운 충격음, 악다구니 쥐새끼 정면 8척 거리까지 돌진해 들
어가던 복면객은 난데없이 허공으로부터 뚝 떨어져 내린 발길질에
정확히 머리통을 걷어채였다.
두개골이 부채살처럼 터지면서 불그죽죽한 선혈과 뇌수를 흩뿌
리는 동안, 그 몸뚱이는 돌진하던 기세가 뚝 끊기더니 그 자리에
털썩 거꾸러졌다.
"추... 산... 오빠!..."
갈패옥이 기쁜 나머지 발광하며 고함을 질렀다. 일순간, 용수철
퉁기듯 벌떡 일어나기는 했으나 바로 서지 못하고 도로 주저앉았
다.
장추산은 땅바닥에 안춘을 내려놓고 잽싸게 복면 괴한의 시체에
서 장검을 뽑아들었다. 그리고는 호랑이 눈을 부릅뜨고 나머지 괴
한을 흘겨보았다. 번쩍 치켜들린 장검에서 용음이 '스르릉!' 울려
나왔다.
"나는 두 마디 하는 법이 없어 ! 지금부터 네놈들을 짓이겨 핏
떡으로 만들어 줄 테니, 각오들 해라!"
호통치는 목소리가 흐린 날 천둥치듯 낮게 울렸다. 넉 자루 장
검에 사면으로 포위되었으나, 추호도 수그러드는 기색없이 위풍
당당하다.
"나 <뇌신>은 오늘 이후 너희같은 잡종들을 처치하는 데 절대로
사정을 두지 않을 것이다. 한 칼 한 칼에 인간의 정을 끊어버려서
너희들이 두 번 다시 남을 해치지 못하도록 섬멸해 버릴 것이다!"
상황은 그에게 극히 나쁜 열세를 안겨 주고 있었다. 빽빽이 들
어찬 대나무 숲 한가운데서 솜씨를 최대한으로 발휘하기도 어려운
데다, 땅바닥에는 또 보호해야 할 두 처녀가 있다. 넉 자루 장검
의 주인들도 하나같이 만만히 얕잡아 보지 못할 초일류급 고수다.
<뇌신>의 위엄과 명성도 이들 초일류급 고수를 놀라 자빠뜨리게
하지는 못한다.
"개 잡녀석 ! 우리도 네놈의 사지를 갈기갈기 찢어 버리려 찾아
헤매던 참이자!"
복면 괴한 하나가 매섭게 호통을 쳤다.
"네놈이 내 아우를 암습해 죽여? 목숨으로 갚아랏!"
넉 자루 장검이 사방으로부터 일제히 찔러들었다.
돌연, 풍뢰(風雷)가 한꺼번에 터져 나오더니 장추산의 어렴풋한
신형이 급격하게 사라졌다가 나타나고, 반대 방향에 윤곽을 드러
냈다 싶었을 때는 또다시 자취를 감추었다. 1장 남짓 비좁은 공간
안에서 흡사 7, 8명의 장추산이 동시에 출몰하듯, 도처에서 번뜩
이는 형체를 똑똑히 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는 평생 익힌 절학에 전력을 아낌없이 쏟아부어 펼쳐냈다. 이
미 화경에 도달한 <이형환위>(移形換位)의 신법도 끌어내고 <대라
천절검>(大羅天絶劍)의 무시무시한 살초도 끌어냈는가 하면, 혼신
의 공력을 다 기울인 <호천신강>도 유감없이 쏟아냈다.
필사의 시간이었으나, 결과는 단 하나뿐일 것이다.
초일류급 고수 네 명도 이미 전신 공력을 다 끌어모아 공격 검
초를 전개했다.
칼끝에서 발출된 검기가 사람의 넋을 뒤흔들면서 그를 구심점으
로 삼아 공격력이 응집되었다. 검기가 응집되는 순간, 돌개바람과
같은 기류가 연속으로 터지면서 침울한 뇌성 벽력이 끊이지 않고
고막을 울렸다.
번뜩이는 검기의 광채가 수십 수백 가닥 섬전(閃電)으로 변해
무지개와 같은 검막을 펼치면서 쉴새없이 눈부시게 빛났다.
"우르릉!... 쿵쾅!"
뇌성 벽력이 연속 너댓 차례 울리는 가운데, 한덩어리로 뭉쳐졌
던 검광과 인영(人影)이 돌연 번뜩이는가 싶다가 쓰러졌다.
"와수수, 와수수!"
싸움터 사면 둘레에 서 있던 2, 30그루, 한 아름짜리 거대한 대
나무 줄기가 밑둥부터 산산이 끊겨 갈라지고 윗등이 한꺼번에 아
래로 주저앉았다.
울창한 숲, 대나무 줄기는 쓰러지지 못하고 서로 기댄 채 밑으
로 가라앉았다.
상공에는 한무더기의 대나무 숲이 갑작스레 키가 2장 남짓 줄어
든 것처럼 보였다.
대나무 줄기가 가라앉기는 했어도 여전히 대나무 숲, 그 대신
한결 빽빽하게 들어찬 가지와 잎새 때문에 부근의 시야가 막혀 버
렸다.
잠시 동안, 죽음과도 같은 정적이 감돌았다.
거대한 대나무가 도합 네 그루, 장추산의 신변을 사방으로 에워
싼 채 땅바닥에 새삼 뿌리박혀 있었다.
그의 장검은 무기력하게 지면을 버티고, 얼굴빛은 핏기 한 점없
이 종잇장처럼 창백하다. 두 눈에 번뜩이던 신광도 스러지고 피곤
한 기색만 드러났다. 두 다리도 후둘후둘, 수전증 환자의 증세를
보이는 품이 한 순간에 평생을 늙어 버린 듯, 기력이 고갈된 현상
을 여실히 나타내고 있다.
혼신의 일격, 그는 죽음과 삶을 바로 이 뇌정 일격에 걸었다.
일순간을 영겁으로 삼느라 그는 너무 많은 정력을 지불한 것이다.
땅바닥에는, 벌써 오래 전부터 두 처녀가 기절한 상태로 쓰러져
있다.
사방 둘레에는 조각조각 떨어진 사람의 뼈다귀와 팔 다리가 낭
자하게 널려있고, 피비린내만이 코를 찔렀다.
네 사람의 복면 괴한 가운데 온전한 몸뚱이를 지닌 시체는 단
하나도 없다.
넉 자루 장검은 마디마디 끊겨 사면팔방으로 날아가 버리고 시
체들의 손아귀에는 칼자루만 앙상하게 남았다. 그의 장검 역시 톱
날처럼 온통 이가 빠지고 무더졌다.
잠시 후, 마침내 그는 고철이 되어 버린 칼을 내던지고 흐늘흐
늘 땅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깊고도 긴 토납(吐納)으로 운기
조식을 하면서 전신의 근육을 풀어놓기 시작했다.
만약 이때에 3류쯤 되는 고수 한 분께서 다가오거나, 일개 나무
꾼이라고 지나가다가 장난삼아 주먹으로 슬쩍 건드리기만 했던들,
그는 주먹질 한 번에 머리통이 박살났을 것이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