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금산사 유람객
1리 밖에서, 똑같은 청색 옷차림을 한 복면객 아홉 명이 동료들이
발자취를 따라 현장으로 쏜살같이 달려가고 있었다. 대규모 응원군이
후속한 것이다.
"유 형, 방향은 틀림없소?"
두번째로 가던 복면 괴한이 향도역을 맡은 선두의 뒷등을 향해 소
리쳤다.
"아무렴, 틀릴 까닭이 있나? 이것 보라구, 땅바닥에 발자국이 또렷
하게 찍혀 있지 않는가 말이야!"
유 형(劉兄)이라고 불리운 선두가 대꾸를 하면서도 바쁜 걸음걸이
의 속도를 더욱 높여 치달렸다.
"그 친구들, 어째서 이쪽으로 왔을까?"
"한 놈이나 한 패거리쯤 추격 목표를 따라잡았을 거야. 우리 속도
를 높이세. 어쩌면 우리 웅원이 필요할 지도 모르니까."
"마음 놓아도 될 거요! 손 형(孫兄) 일행이 어떤 실력자들인지 유
형도 뻔히 알고 있지 않소? 소림사 <십팔나한진>(十八羅漢陣)이나 무
당파의 <해검지 칠자>(解劍池七子)라도 거뜬히 돌파할 고수들인데,
우리 협조를 바랄 까닭이 어디 있겠소? 아마 그 일곱 명은 관군 1개
부대라도 충분히 상대할 거요."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면서 달리다 보니, 대나무 숲 변두리에까지
다다랐다.
돌연, 대나무 숲 안에서 가벼운 기침 소리가 들렸다.
"에헴."
기품 있는 걸음걸이로 뚜벅뚜벅, 으젓하게 모습을 드러낸 사람은
계제운, 흡사 산천 경개 구경나온 유람객이나 된 듯 나타나서 갈 길
바쁜 사람들의 앞을 딱 가로막아 섰다.
"당신네들, 뭣하는 사람이오?"
계제운이 미소를 머금고 물었다.
복면객 아홉 명은 당장 좌우로 싹 갈라서더니, 반원형으로 포진했
다.
"너는 누구냐?"
선두가 질문을 던졌다.
"당신, 아직 내 물음에 대답도 하지 않았소."
계제운의 얼굴에는 여전히 웃음기가 맺혀 있다.
"쳇! 네깐 놈이 뭔데 우리 신분을 묻는 거냐? 네놈은...."
"개같은 놈!"
계제운의 얼굴 표정이 돌변하더니, 호랑이 눈에 위엄을 담고서 엄
한 목소리로 호통을 쳤다.
"개 잡놈들이 담보 한 번 크구나! 감히 나한테 그 따위 무례 막심
한 언사를 늘어놓다니, 네놈들이 이제 살기가 싫어진 모양이로군!"
"왕빠단(王八蛋) ! 암캐 새끼 같으니 ! 이 어르신네로 말하자
면..."
우두머리 복면 괴한이 속에서 울화가 3천 장이나 치밀어 오르는
듯, 최악의 욕설을 퍼부으면서 장검을 뽑아들었다.
"이놈들을 쳐죽여라! 한 놈만 남겨 놓고."
계제운도 노발대발, 선두 복면객을 지목하면서 고함쳤다.
"이놈 하나만 살려 두거라. 내 천천히 죽여줄 테니까! 뼈다귀를 하
나하나씩 꺾어서 발라내 주어야겠어 !"
"분부 받드오리다!"
벼락같은 응답 소리가 고막을 쩌렁 울리더니, 10여 명이나 되는 괴
한들이 함성을 질러가며 한꺼번에 와르르 쏟아져 나왔다.
대나무 숲과 엇갈린 지점, 키작은 솥 숲으로부터 뛰쳐나온 패거리
는 모두 열여섯 명, 하나같이 짙은 쪽빛 외투 차림에 허리춤에는 칼
날의 볼이 좁은 협봉도(俠鋒刀)를 차고 있다.
"쏴악!"
일제히 손 맞추어 칼을 빼어잡는 자세, 열여섯 자루 협봉단도가 한
찰나에 칼집에서 뽑혀 나왔다.
사람의 그림자가 급박하게 번뜩이더니, 열여섯 명의 칼잡이들은 눈
깜짝할 사이에 4개 조를 이루었다. 각각 네 사람, 넉 자루의 협봉도
로 편성된 공격진이 동서남북 사면으로 나뉘어 복면객 아홉명을 에워
쌌다. 철철 흘러 넘치는 기세, 무형 중에 풍겨나오는 살기만으로도
상대방이 숨 한 모금 내쉬지 못하게 위압하여, 마주 보기만 해도 식
은땀이 돋아나고 솜털이 곤두설 지경이요, 소름이 쭉 끼치게 만들었
다 .
살육의 분부가 떨어졌으니, 더 이상 혓바닥 놀릴 겨를도 없거니와
말 한마디 수작을 건넬 기회마저 사라졌다. 열여섯 명의 칼잡이들은
기합성 한마디도 내지 않고 협봉도를 휘둘러가며 곧바로 짓쳐들어갔
다. 1개 조에 네 명씩, 전면에 두 사람, 후면에 두 사람씩, 앞쪽 두
자루 칼이 상대방의 병기를 가로막아 외곽으로 흩뿌리는 순간, 후면
의 칼 두 자루가 앞질러 나와서 인정 사정 없이 상대방의 몸뚱이를
쪼개 버린다.
공방전은 극도로 기민하게 움직이면서도 흉맹스럽기는 발광한 야생
마 날뛰듯 거침없이 피아간에 밀리고 밀어붙였다. 그 기세는 산악이
라도 삼키고 바닷물이라도 토해낼 듯 무서웠다. 사람이 닥치면 칼날
이 뻗어나오고, 네 사람씩 묵계로 배합된 공격전술은 그야말로 혼연
일체, 선두 제1열의 방어자세에 뒤따른 제 2열의 초월공격, 네 자루
칼과 네 사람이 한 몸을 이루어 손톱만큼도 오차나 파탄을 일으키는
법이 없이 칼날을 후려치는 자리에 적을 거꾸려뜨려 놓고 다시 전진
해 나가곤 했다.
이윽고 4개 조로 편성된 방형진(方形陣)이 하나로 합쳐지면서 빙글
빙글 돌아가는 선회타격(旋回打擊) 전법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수비
할 때는 전후 좌우 네 모퉁이가 철벽과도 같은 방어태세를 갖추다가
도, 일단 공격으로 전환했다 하는 날이면 봇물 터진 홍수처럼 도저히
감당할 길이 없이 몰아붙였다.
최초 돌격이 엇갈리고 지나쳤을 때, 아홉 명의 복면 괴한 중에 넷
이 거꾸러졌다. 두번째 선회타격을 퍼붓고 나자, 다시 세 명이 칼날
에 찍혀 쓰러졌다.
복면객의 우두머리는 단 2검만 공격을 시도했을 뿐, 그것이 끝났을
때는 목덜미가 두 자루 협봉단도의 칼날에 교차로 제압당한 뒤였다.
수중의 장검은 아직도 맹렬하기 이를 데 없는 검기를 발출하고 있었
으나, 칼잡이들의 협봉도에서 솟구치는 도기(刀氣)는 그보다 1, 2할
남짓 더 강력했다. 이래서 우두머리의 장검은 처음부터 공격 주도권
을 상실한 채 허둥거리다가, 끝내는 제압당하고 말았던 것이다.
세번째 협봉단도의 칼날이 하반신을 훑고 지나쳤다.
"따악!..."
칼등에 얻어맞은 바른쪽 정강이뼈가 으스러지는 소리, 사람의 몸뚱
이가 미처 쓰러지기도 전에 또다시 교차로 날아든 칼등이 좌우 양 어
깨뼈를 부숴뜨려 놓고 있었다. 장검이 손아귀를 벗어나 허공으로 빙
글빙글 돌면서 날아가고, 활동력을 상실한 양 팔이 축 늘어졌다.
사람이 거꾸러지기가 무섭게 칼잡이 두 명이 억센 발바닥으로 찍어
누르고 익숙한 솜씨로 양 팔을 뒤로 꺾어 결박지웠다.
"네놈들.., 너희들은 도대체... 누구냐?"
복면객 우두머리는 땅바닥에 쳐박힌 얼굴을 돌려 뻣뻣이 세우고 물
었다. 대꾸가 없다. 결박당한 자세로 치켜들리면서 그는 발악하듯 고
함쳐 또 물었다.
"네놈들, 내가... 내가 누군지 아느냐? 날 죽이면....",
"버둥거리지 말고 가만 좀 있게, 내 지금 자네 뼈다귀를 발라낼 준
비를 하고 있으니까. 뼈마디를 훑어내면, 내가 굳이 묻지 않더라도
네 입으로 누군지 말하게 될 거야."
계제운이 능글맞은 미소를 띠고 대꾸했다. 앞서 장추산을 겁주었던
예의 함광보검이 칼집에서 '스르렁 !' 빠져나왔다.
"이 자를 대나무 숲으로 끌어다가 사지 팔 다리를 펼쳐서 묶어 놓
아라!"
"분부 받드오리다!"
칼잡이 두 명이 허리를 굽신하고 응답하더니, 복면객 우두머리를
떠메가지고 대나무 숲으로 끌고갔다.
"으아악!----- "
마지막 한 명이 참담한 외마디 비명을 지르다가 뚝 끊겼다. 두 자
루 협봉단도에 양 팔뚝이 찍혀 떨어뜨리는 동안 비명을 질렀으나, 뒤
미처 날아든 칼날에 머리통을 날려보내느라 비명소리가 끊긴 것이다.
단 1각도 못 되는 잠깐 사이에, 복면 괴한 아홉 가운데 여덟 명이
죽었다. 칼잡이 열여섯 가운데 부상자는 고작 두 명. 그것도 하잘것
없는 경상이다.
낡은 양가죽 외투를 입은 사내 둘이서 맞은편 4, 50보쯤 떨어진 산
비탈 소나무 숲 속에 엎드린 자세로 이 광풍 폭우와도 같은 살육전이
시작할 때부터 마무리 될 때까지 낱낱이 지켜보고 있었다. 목격자들
은 포복한 자세 그대로 손가락 한 개 움직이지도 않고 숨 한모금을
크게 내쉬지도 못한 채 입만 딱 벌리고 얼어붙은 듯 싶었다.
계제운이 복면객의 우두머리에게 혹독한 고문을 가하고 자백을 받
아내기 직전, 목격자들 중에 나이 좀 지긋한 중년인이 동료의 소맷자
락을 잡아당겼다.
"가세!"
그는 거의 기다시피 살금살금 뒷걸음질쳐 빠른 속도로 물러났다.
"이 형, 저놈들이 도대체 누굴까요?"
동료가 두려운 기색으로 물었다.
"정말 무시무시한 도진(刀陣)입디다. 손이 다섯 개 달리지 않고서
는 저놈들의 넉 자루 칼날을 감당해낼 꿈도 꾸지 말아야 할 것 같군
요. 공격속도나 공력도 한결 같아서 어느 쪽부터 막아야 좋을지....
어이구, 맙소사!..."
"큰 소리 내지 말게 !"
이 형(李兄)이라고 불리운 중년인이 황급히 말을 막았다.
"자네 목숨이 필요 없나? 놈들의 귀에 들렸다가는 자네하고 나하고
그 무서운 도진에 복면객 꼴이 되고 말 걸세. 내년 오늘 제삿밥을 먹
고 싶지 않거든 조용하라구."
"저놈들이 도대체...."
"향도처(嚮導處) 소속이야. 지휘하던 놈은 나도 잘 아네."
"맙소사! 향도처?"
"틀림없네, 향도처 소속원들일세."
"어서 뜁시다!"
이번에는 동료가 먼저 쏜살같이 내뛰기 시작했다. 두 다리 사이에
서 방울소리가 날 정도로 뛰는 것을 보아하니, 향도처란 데가 귀신보
다 더 무서운 조직임을 알 만하다.
"옳으이, 멀리 더 멀리 내될수록 좋아! 머지 않아 이 강남 일대 여
우 새끼 쥐새끼들은 머리통 싸매고 멀찌감치 도망쳐야 할 거야. 자칫
하면 억울한 목숨을 날려보내기 십상이니까. 자, 우리도 빨리 돌아가
세!"
장추산은 대나무를 깎아 들것을 만들었다. 한 개를 엮는데도 무척
이나 힘들고 애를 먹었다.
"뭘 하는 거예요?"
정신이 맑아졌는지, 안춘이 눈을 부시시 뜨고 물었다.
"들것을 만들고 있지."
그는 가지런히 늘어놓은 대나무 네 줄기를 칡넝쿨로 마디마디 엮으
면서 대답했다 .
"환자가 두 사람이니, 이 정도는 길어야겠군."
"추산, 내 손발... 병신이 됐어 !..."
그녀는 눈물이 글썽글썽, 떨리는 목소리로 울먹였다.
"난... 난 이제 아무 짝에도 쓸모 없는...."
"쓸데없는 소릴! 내 당신 혈맥을 눌러 놓았기 때문에, 피가 마음대
로 흐르지 못하고 있을 뿐이야."
"그럼... 나는...?"
"데리고 돌아가서 행낭을 찾아가지고 치료하면 돼요. 이런 장독쯤
은 거뜬히 풀어 줄 수 있으니까. 그리고 <소경복맥술>(疏經復脈術)로
회복시켜 줄 수 있어. 그러니 엉뚱한 생각일랑 말아요. 알겠어?"
"추산 오빠! 나는... 나는요?"
갈패옥도 사뭇 가련한 목소리로 궁상을 떤다.
"네 독상은 덧나지 않았어. 아마 어렸을 적부터 기막힌 약물이나
보약을 먹은 모양이지? 그래서 독이 쉽사리 퍼지지 않은 거야. 또 해
독약을 먹지 않아도 한 사나흘 지나면 독의 효력이 저절로 없어지니
까, 걱정 안 해도 돼."
"그거 정말?"
"요런 깜찍한 도깨비 ! 날 못 믿어?"
"믿어요, 믿어 ! 내 평생토록 당신을... 믿어 왔잖아?"
갈패옥의 목소리가 떨려나왔다.
"앞으로 죽을 때까지라도...."
"믿으면 됐지, 뭘 그리 우거지상을 하고 있나? 이제는 기죽을 것도
없고 무서워하지 않아도 돼요, 소패."
그는 부드럽게 달랬다.
"사람은 누구든지 살겠다는 의지와 신념이 있어야 해. 그것만이 생
사 존망을 판가름내는 원천이니까. 두 사람 모두 안심해도 괜찮아요.
스스로 독을 치료할 수 있는 저항력이 생기도록 앞으로는 좋은 것만
생각하라구. 또 한 가지 당부할 게 있어. 두 말썽꾸러기들, 이제는
제발 내 골치 좀 그만 썩여 주었으면 좋겠어! 난 지금 이런 데 신경
쓸 처지가 아니야. 빨리 가니 일을 꾸미고 시간을 벌어야 한단 말이
다. 알겠어? 요 악다구니 아가씨들아!"
얼마 안 있어, 그는 들것을 들고 떠나기 시작했다.
들것의 길이는 3장, 대나무 끝에 두터운 받침을 대고 흔들리지 않
도록 단단히 고정시켰다.
수풀을 헤쳐 나가자니, 면적이 그리 너르지 못해서 두 환자를 나란
히 눕힌 상태로 데려나갈 수가 없다. 그래서 궁리 끝에 길이로 뉘어
끌고 나가기로 했다. 갈패옥은 몸집이 작고 가늘기 때문에 윗단에 눕
히고 양 다리를 벌여서 아랫단에 누운 안춘의 어깨에 걸쳐 놓게 안배
한 것이다.
그는 급조한 멜빵을 어깨에 걸치고 양 손으로 들것 머리를 붙잡아
끌고 나갔다. 양 어깨 힘과 두 손으로 잡아끌면서, 그는 눈앞에 걸리
적대는 댓가지와 잎새를 연신 헤쳐내야 했다.
"얼마 전에 어디선가 고함치는 소리가 들리던데...."
그는 출발하기 앞서 두 처녀에게 당부했다.
"아직 다른 놈들이 숲 속을 뒤지고 있을지 모르니까 조심들 해요.
무슨 일이 벌어지더라도 입 꼭 다물고 손끝 하나 움직이면 안돼. 모
든 건 나한테 다 맡기고 말야. 알겠지?"
"추산 오빠, 또 우리를 죽이려는 놈이 있단 말이에요?"
갈패옥이 물었다. 다정한 목소리, 친근감이 뚝뚝 듣는 말씨가 아주
자연스럽기만 하다 .
그녀의 속셈은 빤하다. 일부러 다정하게 부르고 친밀한 태도를 보
인 것은 안춘 소저에게 과시하기 위한 약아빠진 수작이다.
"그럴 가능성도 물론 있겠지. 하지만 내게도 충분히 상대할 자신이
있으니까, 마음 놓으라구."
안춘도 민감한 처녀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봉목(鳳目)을 떼구르르
굴려가며 입가에 자신만만한 웃음기를 떠올릴 뿐, 조롱은 한마디도
건네지 않았다.
일이 공교롭게 되느라고, 하필이면 지나치는 곳이 앞서 계제운의
칼잡이가 복면객 아홉을 몰살한 대나무 숲 변두리였다.
현장에 접근하기도 전, 멀찌감치서부터 피비린내가 코를 찌르고 가
까워질수록 그 역겨운 냄새도 짙게 풍겼다 .
대나무 숲을 벗어나자, 시체들이 갈기갈기 찢겨 흩어진 현장이 나
타났다.
그것은 차마 눈뜨고 바로 보지 못할 만큼 참혹스럽고도 무서운 싸
움터였다.
"이크! 여기 이놈들도 복면을 했군! 똑같은 일당인 모양이야."
장추산이 뜨악한 기색으로 들것을 내려놓으면서 중얼거렸다.
"정말 참혹하게 죽었구먼! 누구 손에 이 꼴을 당했을까?"
몸뚱이에서 떨어져 나온 머리통이 몇 개, 그러나 복면 두건은 아직
도 씌워진 채다. 옷차림새나 빛깔로 보건대, 앞서 네 명과 한패거리
임을 알 만하다.
"어떤 놈들이에요?"
안춘이 들것에 누워서 물어왔다.
"너희를 추격하던 놈들과 같은 일당이야."
장추산은 한마디 덧붙였다.
"돌아보지 마. 시체가 토막나서 아주 끔찍스러우니까."
"칼로 죽였나요?"
"맞아, 단도(單刀)에 찍혀 죽은 자국이야. 이놈들이 여기서 죽음을
당하지 않았더라면 우리를 쫓아왔을 게 틀림없어."
장추산은 복면객 다섯 명과 악전고투를 벌이던 광경이 떠올라 저도
모르게 쓴웃음을 지으면서 고개를 내저었다.
"누군지 모르나, 이놈들을 죽인 사람은 우리 목숨을 구해준 셈이
되었군. 단숨에 이 숱한 놈들을 쳐죽이다니, 정말 이 세상이 필적할
상대가 없는 무공을 지녔다고 하겠어. 한데 이상한 일이야...."
"뭐가요?"
"무림계에 이 정도로 칼 잘 쓰는 인물이 있단 소문을 내 어째 못들
었을까?"
그리 멀지 않은 곳, 키 작은 소나무 숲 속에서 계제운의 신형이 솟
아올랐다.
"장씨 아우님, 칭찬이 지나치시군! 핫핫핫!..."
계제운은 껄껄 웃으면서 소나무 가지를 헤치고 걸어나왔다.
"내가 죽였지! 정말 공교로운 장소에서 또 맞닥뜨렸군 그래. 어떤
가, 우리 진짜로 한 번 겨뤄보지 않겠나?"
"내 일찌감치 굴복하리다. 계 형."
장추산은 씁쓰레하니 웃었다.
"난 겨우 다섯 놈을 쓰러뜨리다가 기공이 몽땅 흩어질 뻔했으니까
말이외다. 한데, 당신은 이렇게 많은 숫자를...."
"모두 아홉, 하나같이 초일류급 무림 고수들이었지!"
"부끄럽소이다."
"난 이놈들의 정체를 모르겠소. 모두가 흉악스럽고 잔인하고 무례
한 놈들이길래 나도 부득불 죽여 없앨 수밖에... 장씨 아우님은 강호
상을 10년씩이나 떠돌았으니, 혹시 몇 놈쯤은 이름이나 별명을 알아
낼 수 있을 듯 싶은데 한 번 뒤져보시구료. 정말 미친 개처럼 날뛰고
설쳐대더군! 어떤 야심 많은 잡놈이 이토록 무서운 고수들을 숱하게
끌어모았는지, 아무래도 이놈들의 정체 내력을 단단히 캐보아야겠는
걸!"
"자백을 받아내지 못하셨소?"
"난 손발 다 들었어 ! 아무리 쥐어짜고 비틀어도 입을 열어야 말이
지. 어떤 특수한 훈련을 받은 것이 분명해. 죽음 따위는 눈꼽만큼도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더군, 살점을 저미고 뼈다귀를 추려내고, 하다
못해 팔다리를 끊어냈어도 외눈 하나 깜짝하지 않으니 어쩌겠나? 자
백은커녕 신음소리 한마디도 받아내지 못했네 그려!"
계제운은 설레설레 도리질을 해가며 쓰디쓴 웃음을 지었다.
"세상 천하에 죽기를 제 집 돌아가듯 하는 녀석이 있다고는 하지
만, 바로 이것들을 가리키는 말일 걸세. 진짜 이놈들이 난동을 부렸
다간 천하에 두루두루 재앙을 안겨줄 마왕이 될 거야. 아주 무서운
놈들일세, 생각만 해도 소름이 쪽쪽 끼친다니까... 게 누구야? 자네
여자 친구..."
계제운이 들것을 내려다보고 깜짝 놀란다 .
"한 사람은 독표창에 맞았고, 또 하나는 독을 바른 장력에 중독되
었소. 다행히도 억제시켜 놓았으니까...."
장추산이 대답했다.
"지금 이 아가씨들을 의원한테 치료받으러 데리고 가는 길이오."
"내가 좀 볼까? 나한테 기독(奇毒)을 전문으로 풀어주는 해독약이
몇 가지 있는데, 어쩌면 치료가 될지도 모르겠어."
계제운은 말을 하면서 허리춤에 차고 있던 주머니를 풀었다. 염낭
이라고 보기에는 좀 커다란 주머니, 정교한 수를 놓은 비단 주머니
안에 지름이 한 치 두 푼쯤 되는 옥병 다섯 개가 들어 있었다.
병 겉면에는 붉은 물감으로 단약의 이름이 적혀 있고 말이다.
전문가의 손이 나가면, 치료할 수 있는지 없는지 금방 안다. 계제
운은 증세를 물어볼 것도 없이 곧바로 환자들의 눈꺼풀을 뒤집어보고
상처 자국의 형태와 빛깔만을 흘끗 살펴보더니, 긴장된 표정이 금세
풀어졌다.
안춘 소저의 기색은, 계제운이 나타난 이후부터 불안감은 아침 이
슬 녹듯 사라지고 오히려 반가운 웃음기마저 떠올랐다.
갈패옥은 정반대, 두 눈망울에 의혹의 구름이 잔뜩 깔리고 계제운
을 바라보는 눈초리에 고도의 경계심이 떠오르는가 하면 심지어 적대
감마저 드러냈다.
"계씨 아저씨야, 적이 아니고 친구니까."
그는 미소를 머금고 갈패옥에게 해명했다.
"이분을 믿으라구, 어디 '큰아저씨!' 하고 불러봐."
"오라버니도 이분을 아저씨라고 불러요?"
갈패옥이 생각하는 뜻은 그의 견해와 전혀 딴 데 있다. 오라버
니가 '계 형' 이라고 부르는 데 날더러는 어째서 '아저씨...' 라
고 부르라는 거난 말이다. 사랑하는 사람과 항렬이 틀려서야 어디
될 법이나 한 노릇인가?
"나는... '계 형' 이라고 부르지. 허나 이건 농담이야. 이분은
나이로 보나 인생 경험으로 보나 우리보다 훨씬 높은 선배님이니
까. 너도 아저씨라고 불러야 해."
"표창에 바른 독은 마균(魔菌)이라고 부르는 일종의 독버섯 가
루요. 독성이 아주 극렬하지."
계제운은 갈패옥에게서 적의(敵意)를 느끼면서도 개의치 않고
우연히 깨달은 듯 말을 건냈다 .
"한데, 이 꼬마 아가씨는 이상하군. 이 극독을 맞고서도 지금껏
버티다니, 또 상처도 덧나지 앓고 말이야. 정말 기특한데?"
"난 어렸을 적부터 영지초하고 산삼을 먹었단 말이에요! 그것도
진품으로만 골라서 먹었으니까...."
"허어, 그랬나? 어쩐지 이상하다 싶더군."
"괜찮을까요. 큰아저씨?"
"녹두알만한 크기로 소환단(小還丹) 한 알이면, 아가씨의 독상
쯤은 즉각 풀어지지 !"
계제운이 사뭇 자신 있는지 오만스럽게 장담했다.
"별것 아니니까 걱정 말아요. 사실 말이지, 한 사나흘 지나면
꼬마 아가씨 혼자서라도 치료할 수 있는데, 내 귀중한 소환단을
낭비할 필요도 없어."
"고마워요, 큰아저씨 !"
앙큼스런 새끼 여우 갈패옥은 사흘 나흘씩 기다리고 싶은 생각
이 눈꼽만큼도 없다. 그래서 '큰아저씨' 의 말꼬리를 교묘하게 물
고 늘어졌다.
"저도 큰아저씨께서 주실 소환단 효력을 믿고 말고요!"
"호오! 요런 깜찍한 아가씨 봤나? 아주 영리한 꼬마일세 그려!"
계제운은 너털웃음이 나왔다. 꼼짝도 못하고 귀중한 소환단 한
알을 빼앗기게 된 것이다. 그는 싱글싱글 웃으면서 장추산에게 돌
아섰다.
"장씨 아우님, 여자 친구 또 한 분은 흑살독장(黑煞毒掌)에 맞
았는데, 상처 부위에 경맥이 좀 비뚤어져서 상당히 골치 아프겠
소."
"독성만 풀린다면 제가 경맥을 복원시킬 자신이 있습니다."
장추산은 딱 부러지게 자신감을 보였다.
"제가 알기로는 독성이 발작할 시간이 별로 길지 않은데..."
"열두 시진일세."
"그럼 됐습니다. 생각보다 극독은 아니로군요."
"하지만 일단 독성이 발작하면 구할 방도가 없네."
"발작할 때까지 놓아둘 생각은 없습니다."
"내 <삼로단>(參露丹)을 드림세. 아주 잘 듣는 약이야."
"고맙습니다. 계 형 !"
장추산은 충심으로 감사의 뜻을 보였다 .
허나 마음속으로는 씁쓸한 감을 금치 못한다. 계제운에게 벌써
두번째나 마음빚을 지게 된 것이다.
경구항 근처 대저택 안에서는 서북쪽으로 강물을 끼고 맞은편
대안의 금산이 아련하게 내다보인다. <호풍환우> 능유광과 <신조
냉표> 진홍은 으슥한 밀실에 들어앉아 명다(銘茶)의 맛을 음미하
면서도 너나 할 것 없이 근심 걱정에 우울한 표정으로 심기가 사
뭇 편치 못하다.
명분상으로는 두 사람 모두 강남 일대를 주름잡는 두 마리의 용
(龍)이지만, 명성과 인망에 있어선 <호풍환우>가 협의도 문하 출
신이라는 광채를 배경삼아 목소리가 좀 큰 편이다.
그러나 실력으로 따진다면, <신조냉표> 쪽이 오히려 막강한데
다, 인의 대협으로 자처하는 만큼 교분을 나누는 사람들의 인품도
복잡해서 삼교 구류(三敎九流)의 온갖 잡배 친구들도 많거니와 흑
백 양도는 물론이요 심지어 흉악스런 마도 인물과도 형님 아우로
부르면서 왕래하고 있다.
영락 공자가 진강부에 와서 삼산원에 거처를 잡고 일을 벌이다
보니, <신조냉표>까지 공공연히 얼굴을 내밀게 만들었을 뿐만 아
니라, 동원할 수 있는 인재라면 깡그리 출동시켜 온갖 수단 방법
을 가리지 않고 거리낌 없이 사고를 저지르게 만들었다. 계도구명
(鷄盜狗嗚)의 좀도적들만 출동시켰으면 말할 거리도 안 되겠으나,
저지르고 싶은 일을 다 저지르다 보니, 이제는 진강부 일대에서
제법 논다 하는 여우 떼, 쥐새끼들까지 몽땅 풀어놓아서, 결국 엄
청난 세력이 진강 일대를 들썩이게 되었던 것이다.
반면, <호풍환우>는 공개적으로 얼굴을 내밀 수가 없다. 그저
암암리에 병력을 끌어모으고 필요한 대로 장수(將帥)를 내보낼 따
름이다. 그래야만 자신의 명성과 인망에 영향을 끼치지 않기 때문
이다.
삼산원이 칼잡이들의 습격을 받고 닭 한 마리 강아지 새끼 한마
리 남김없이 철저하게 짓부숴진 다음부터 <호풍환우>는 꿀먹은 벙
어리, 무슨 고충이 있어도 목소리를 낼 처지가 못 되었다. 그저
속으로 끙끙 앓아가면서 원한을 씹고는 있지만, 역시 공공연히 팔
뚝 걷어붙이고 나서지 못한 채 암암리에 적극적으로 음모를 꾸미
고 안배하고 있으면서, 표면상으로만 겁장이처럼 머리통을 움츠리
고 있는 것이다 .
"진 형, 우선 계획을 꾸민 다음에 움직여야 할 게 아니오?"
<호풍환우>가 심각하게 물었다.
"당신, 이처럼 병력을 이곳저곳 분산시켜 놓고 소문이 들리기가
무섭게 동분서주 내뛰기만 하니, 이래서야 뜻밖의 사태에 어떻게
대처할 작정이오?"
"이게 다 어쩔 도리가 없어서 그런 것이지, 난들 어디 이러고
싶겠소, 능 형?"
<신조냉표>가 씁쓰레하니 웃었다.
"시간을 벌기 위해서, 정세를 장악하려고 미확인 소문에라도 급
박하게 출동할 수밖에 없는 거요. 장추산 일당은 떠돌이 귀신이나
다를 바 없어서 출몰이 무상한데, 언제 계획을 꾸미고 어떻게 움
직여서 일을 처리한단 말이오?"
"당신네 병력 손실이 많습디다."
"그렇소. 엄청나게 무거운 재난을 당했으니, 내가 진 셈이지 !"
"문제는 강변 쪽 놈들인데, 내력을 좀 알아내셨소?"
"어림도 없소, 능 형."
<신조냉표>는 생각만 해도 간담이 서늘한 듯, 부르르 몸서리를
쳤다.
"쓸만한 녀석들을 골라서 내보냈는데, 아예 접근할 길조차 없었
소, 그야말로 고기덩어리로 사냥개 아가리를 두들겨 패는 격이라,
돌격한 놈은 있어도 살아서 돌아온 자는 하나도 없었소. 게다가
하필이면 건청방 녀석들도 간담인 뚝 떨어진 쥐새끼처럼 장추산이
여기 나타났단 소문만 듣고도 염병이나 옮을 것처럼 부랴부랴 분
당을 철수시키고 분타마저 쥐도 새도 모르게 이동시켰소. 모두 다
삼십육계 줄행랑을 쳤으니, 그 친구들을 불러다 강변 쪽 놈들을
처치할 방도가 없는 거요. 이러니 골치만 지끈거릴 수밖에...."
"그 일은 나도 귀신에 홀린 듯하구료. 이치대로 따진다면, 건청
방 양주 분방에서 그토록 많은 사람이 죽었으니 장가 놈을 불공대
천지 원수로 여겨서 전체 병력을 몽땅 동원해서라도 형제들의 복
수를 해 주어야 마땅한 노릇이 아니겠소? 그런데 거꾸로 분당 분
타를 옮기고 꼬리 도사리고 도망쳐 숨어버리다니, 이런 기막힌 노
릇이 세상에 또 어디 있단 말이오?"
"사실 그 사람들만 탓할 것도 아닙디다. 장가 놈의 사람 죽이는
수단이 너무나도 끔찍스러워, 건청방으로서도 억울한 줄 뻔히 알
면서도 꾹 참고 있는 거외다. 그쪽 형제들은 모두 가업(家業)을
지니고 또 식구들도 거느리고 있는데, 여기에 누를 끼쳐서야 되겠
소? 자칫하다간, 그 사람 백정놈이 가족들에게 두 번째 세 번째
돌아다니며 대도살극을 연거푸 벌인다면, 그 참담한 결과를 누가
무슨 수로 감당할 수 있겠소? 그 신비의 칼잡이... 다시 말해서
강변에 배를 정박시키고 있는 칼잡이들은 장가 놈보다 더욱 잔인
하고 무서운 놈들이외다, 능 형, 제발 수수방관(袖手傍觀)하지는
말아주시오!"
<신조냉표>는 결국 <호풍환우>에게 지원을 요청한 셈이 되었다.
"난들 어찌 소매 떨치고 구경만 하고 있겠소? 나도 이번 사태에
깊숙히 말려들어가 있는 셈인데 말이오. 또 남문 현질의 일을 내
가 어떻게 모른 척할 수 있소? 진 형, 너무 염려 마시오. 내쪽에
서도 이미 조사에 착수했고, 또 적지 않은 친구들을 출동시켜 놓
았으니까."
<호풍환우>는 자신있게 말했다.
"남문거사께서 떠나기에 앞서 아드님을 도와달라고 거듭 요청했
소. 나도 의리상 받아들이지 않을 수가 없었고 말이오. 이 능유광
은 삼산원의 파괴를 헛되이 보아넘기지는 앓을 거요. 절대로!..."
"조사 결과는 어땠소이까?"
"그 칼잡이들은 안춘이란 계집과 무슨 관련이 있는 듯 싶소."
"그럴 리가 있나? 장가 놈과 두 계집이 양주에서 소동을 벌였을
때, 그 칼잡이 패거리는 바로 이 진강부에 머물고 있었단 말요.
놈들의 선박은 지난달 초순에 나타나서 줄곧 정박하고 있었으니
까."
"하지만...."
"게다가 그 안춘이란 계집은 동행자가 겨우 셋, 그 계집의 가문
내력도 벌써 확실하게 캐냈고, 행적도 내 손금 들여다보듯 훤히
알고 있소이다."
"가문 내력이 어떻소?"
"북경성 대부호 가문에서 귀염만 받고 버릇없이 자란 딸년입디
다. 그래서 양주 <능소객> 방 형도 그 계집을 붙잡아다가 길상암
에 쳐넣어 물건을 만들겠다고 훈련을 시키려 했던 거요. 만약 신
비의 칼잡이들이 그 계집과 관련을 맺고 있다면, 유지사 승려 비
구니들이 어떻게 그리 손쉽게 납치했겠소? 칼잡이 패거리들은 말
도 꺼내지 마시오. 그놈들은 바깥 일에 참견도 하지 않을 뿐더러,
자기네 소굴을 침범한 사람들조차도 추궁할 기색이 아닙디다. 지
금 형편으로 제일 걱정되는 것은 장가 놈이오. 그 일이 몹시 애를
먹이고 있소."
"무력으로 안 되면 계략으로 바꿔야 되지 앓겠소?"
"계략으로?"
"그렇소! 방침을 싹 바꿔 버리는 거요. 아직 기회는 있으니까,
나도 두 번씩이나 실패하고 싶은 생각은 없소이다."
"계략이라니... 그게 어떤 거요?"
"진 형 대신 내가 계획을 꾸며도 되겠소? 바둑 두는 당사자보다
훈수꾼이 대국을 더 똑똑히 내다볼 수 있으니까, 틀림없을 거요."
"아이구, 옳으신 말씀! 능 형, 이 아우가 부탁 드리겠소!"
<신조냉표>는 어쩔 수 없이 권한을 양보했다.
"좋습니다. 그럼 말씀 드리지 ! 앞으로 이렇게 하면...."
쥐새끼 여우 떼가 하나둘씩 자취를 감추고 숨어 버렸다. 개똥도
약에 쓸려면 없다는 격으로, 인구 1백만에 가까운 진강부에서 그
흔해 빠진 시정 잡배 건달 부랑자 녀석을 찾아보기란 정말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게 되었다.
하루, 이틀, 사흘... 먹구름장만 가득 깔리고 좀처럼 비는 내리
지 않았다.
각 방면에서 모두들 암암리에 준비만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누가
먼저 인내심을 팽개치고 머리통을 내미는지 마냥 두고 볼 작정이
다.
진강부와 속현의 치안요원들은 쥐새끼 여우 때가 자취를 감추었
다고 해서 경계심을 늦추지 않았다. 반대로 평상시보다 더욱 설쳐
대면서 단속의 고삐를 바짝 죄어들었다. 야간통행 위반자에 대한
단속도 한결 엄격해졌다.
그 해도 저물고 세밑이 가까워진 만큼, 치안을 강화시키는 거야
누가 뭐래도 극히 정상적인 일이다.
창해 유성 갈씨댁 모녀 네 사람은 이미 진강부 남쪽 교외 협산
(夾山) 아래 한적한 시골집으로 거처를 옮겨왔다, 그곳은 진강부
4대 총림(叢林) 가운데 하나인 죽림사(竹林寺)에서 그리 멀지 않
은 곳으로, 임시 거처로 제법 깔끔한 농가 한 채를 빌려 들 수 있
었던 것이다.
실상 이곳은 장추산의 또 다른 은신처이기도 했다. 토끼란 놈은
워낙 교활해서 구멍을 세 군데쯤은 파 놓고 산다. 신비스런 행동
을 유지하려는 사람도 반드시 거점을 여러 군데 분산시켜 마련해
둔다. 그가 <뇌신>으로 분장할 때 쓰는 도구와 병기는 바로 이곳
에 감추어 놓고 필요할 때마다 은밀히 찾아와서 꺼내쓰곤 했다.
지금에 와서 그는 더 이상 신비스런 행적을 유지할 필요성이 없
어졌다. 오히려 <뇌신>이 바로 장추산이란 사실을 아는 사람이 너
무 많아져서 탈이었다. 이번 사건을 마무리 짓기 전에는, 그는 또
다른 면모로 자신을 가리워 엄호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이곳은 진강부에서 겨우 4, 5리, 성내를 드나들거나 행동하기에
아주 편리한 거점이었다.
안춘 소저의 주종(主從) 세 사람도 회룡산 정사로부터 옮겨와서
장추산과 같은 집에 머물렀다. 갈씨댁 모녀의 거처와 이웃한 농가
였다. 회룡산의 정사는 부성에서 10리 이상 떨어져 있기 때문에
활동하기가 이곳처럼 편리하지 못한 점이 많았다.
그 동안, 장추산은 혼자서 진강 부성을 여러 차례 다녀왔다. 부
성 안팎의 동정을 살펴보기 위해서였다.
그는 강호 친구들의 입을 통해 필요한 소식을 알아내는 데 능숙
했다. 강호의 문턱을 넘나드는 데도 정통할 뿐만 아니라 삼교 구
류의 인물과 두루 사귀고 주무르는 솜씨도 뛰어났다. 대범한 성
격, 풍부한 경험을 바탕으로 그는 세상 물정에 닳고 닳은 사람이
라, 여기저기 깔아놓은 소식통도 매우 정통했다.
<철금강>(鐵金剛) 곽대괴로 말하자면 강호상에서 명성을 제법
떨치는 뜨내기였다. 장추산은 진강부에 오자마자 <철금강>의 도움
을 한껏 받았다.
그 이전까지 <철금강>은 장추산이 <뇌신>이라는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던 것은 물론이다.
진강부를 몇 차례 드나들고 나서, 그는 적지 않게 실망했다. 일
반적인 소식이나 동정은 제법 얻어들었지만, 정작 필요한 정보는
손에 넣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진강 일대의 토박이 여우 떼와 쥐
새끼들은 모조리 자취를 감추었다. 진강부의 양대 거물 <호풍환
우>와 <신조냉표>는 더더구나 깊숙히 숨어 버렸다. 그것은 소식통
을 차단 봉쇄하는 데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었다. 사람이 모두 안
보이는데야 어디서 어떻게 동정을 알아낸단 말인가?
이 날 아침 일찍이, 그는 갈패옥을 데리고 안춘 소저가 묵고 있
는 방문 앞에 나타났다.
안춘은 오늘 남장을 싹 걷어치우고 화려한 겉저고리와 통이 긴
치마 차림으로 갈아입고 있었다. 성숙한 여인의 모습이 완연한 품
이, 소매 짧은 저고리에 허름한 바지를 걸친 말괄량이 갈패옥에
비해 진짜 눈이 번쩍 뜨이도록 절세가인의 풍모와 재기가 훨씬 돋
보였다.
"허어 ! 대단한 차림새로군."
장추산의 입에서 저절로 찬탄의 말이 튀어나왔다.
"정말 눈부시게 아름다워, 채봉(彩鳳)을 보는 것 같구료!"
"본래 모습으로 돌아갔으니 물론 그럴 테죠."
안춘은 일부러 갈패옥에게 여보라는 듯이 활짝 웃어보였다.
"소패도 훗날 자라서 긴 치마 저고리를 입게 되면 봉황새처럼
아름다울 거야."
"흥! 나도 집에 있을 때는 긴치마를 입고 있었어."
갈패옥이 야멸차게 쏘아붙였다.
"그리고 난 지금 다 자랐으니까, 내 앞에서 그 시덥지 않은 어
른 흉내 좀 그만 내라구!"
"됐어, 됐어 ! 너희 둘은 어째서 만나기만 하면 고양이하고 강
아지처럼 아옹다옹이냐? 지겹지도 않아?"
장추산은 정말 넌덜머리가 날 지경이라, 즉석에서 재빨리 두 처
녀의 입씨름을 뜯어말렸다.
"소춘, 난 지금 소패하고 금산에 놀러가는데, 당신 안 갈 데
요?"
"금산 유람이라? 그럼 금산 강천사(江天寺)에 참배하러 가시는
거예요?"
안춘이 찔끔 놀라 묻는다.
"내 사부님은 현문(玄門: 도교) 제자시오."
"옳아, 그렇군요! 불교와 도교는 서로 틀리니까 참배를 앓겠네
요."
"하하! 난 그렇게 속 좁은 사람은 아니오."
"그럼 갈 필요가 없겠군요."
"어째서?"
"부처님깨 향을 올리러 가지 않는다면, 필경 옥대교(玉滯喬) 근
처에 있는 생쥐 굴 뱀 구멍을 들쑤셔 보려고 가시는 거 아니예
요?"
"그건... 어홈!..."
장추산이 헛기침을 얼버무렸다.
"<호풍환우>는 확실히 거기에다 비밀 소굴을 만들어 놓았어요.
하지만 벌써 오래 전에 텅 빈 걸요. 추산, <호풍환우>가 누군지
잘 아시잖아요? 이 진강부에서도 협명 높은 토호(土豪)예요. 그
사람은 강 건너 양주에서 일어난 사건과는 아무 관련도 없어요.
그런 사람을 찾아서...."
"난 <호풍환우>를 찾으려는 생각은 전혀 없소. 그자는 남이 명
령하는 대로 움직이기만 하는 꼭두각시에 지나지 않는데, 그런 일
에 신경 쓸 여유는 없단 말이오."
"그럼 뭣하러...?"
"영락 공자를 찾아서 확인해 볼 것이 좀 있소."
"옳거니! 당신은 그가 양주의 악패 <능소객> 방세광이란 놈과
관련이 있으리라고 생각했군요?"
"그렇소. 유지사 비구니 혜과는 왕년에 악명 높던 <탈혼마녀>우
한빙이오. 그런 거물은 입에서 나오는 대로 책임없이 아무렇게나
주워섬기는 사람이 아니란 말이오. 그녀는 내가 광릉원을 습격하
던 날 밤 복면을 하고 혼란통에 쥐새끼처럼 들락거린 놈이 영락공
자였다고 분명히 지목했소. 혜과의 증언은 절대로 거짓말일 리가
없소."
"어쩌면 강남일지홍 때문에 숨어 들어갔는지도 모르죠."
"강남일지홍 때문에?..."
장추산은 뭔가 딱 짚이는 것이 있다. 그렇구나, 바로 그거
야!...
그날밤, 장추산은 분명히 강남일지홍을 구출했었다. 구출한 즉
시 돌연히 나타난 복면객에게 무서운 장력으로 습격을 받았고, 잠
깐 어우러져 싸우는 동안 또 한 명의 복면객이 강남일지홍을 채뜨
려 달아났다. 현재 강남일지홍은 누구와 함께 있는가? 영락 공자
남문영유!...
복면객이 쓴 그 공포와 장력은 구유대진력과 아주 흡사했다. 그
것은 <잠교지마> 황등교의 절학, 오두막집에서 한 번 맛을 보았기
때문에 그로서는 전혀 낯선 것이 아니다.
그러나 당사자가 <잠교지마>인지 아닌지, 그는 사실을 증명할
방도가 없다. 어쨌든 두 마귀의 무공이 공통된 점은 많았다. 그렇
기 때문에 <잠교지마>의 신상에서 <비룡천마>의 행방을 추적해 나
가기로 결심한 것이다.
안춘의 짐작대로 영락 공자가 강남일지홍을 구출하기 위해 광릉
원에 드나들었다면, 그것은 사리에 맞을 수도 있다. 또 영락 공자
가 <능소객>과 아무런 결탁을 하지 앓았다는 증거도 된다. 아울러
<능소객>이 차지하려던 은화 5만냥에도 영락 공자는 전혀 눈독을
들이지 않았다는 얘기가 되는 셈이다.
그가 소도회의 둘째 수령 윤소소를 도와 5만 냥의 은화를 탈취
한 목적은 삼차하 사건에서 순절(殉節)한 천지회 소도회 인사들의
죽음에 미력하나마 경의를 표하고 싶어서였다. 그 참사에는 <능소
객>이 관련되어 있다.
그런데 영락 공자가 <능소객>과 대립하고 있다면, 그는 영락 공
자를 <능소객>의 일에 끌어다 넣어서 소도회 사람들에게 알려줄
필요가 전혀 없는 셈이다.
<뇌신> 장추산, 그가 어디 소문만 듣고 남한테 함부로 죄를 지
을 만큼 귀가 여린 사람인가?
"나는 그 친구와 강남일지홍 사이에 끼어들고 싶은 생각이 없
소."
그는 <비룡천마>와의 관계를 털어놓기가 뭣한 입장이라, 안춘이
한 말에 일부러 핵심을 피하고 별것 아닌 쪽으로 화제를 유도했
다.
"다른 일 때문에 그 친구를 꼭 찾아서 확인하려는 거요."
"자기 아버지를 따라서 완산 영락장으로 돌아갔을지도 모르죠."
"그럴 리는 없소, 영락 공자가 누구요? 무림 4대 공자 가운데
한사람이오. 이 야심만만한 청년이 아직도 자기 아버지 날개 밑에
보호를 받아가며 천추만세에 길이 명성을 떨치려 하겠소? 그 친구
는 자기 자신의 능력만으로 강호 무림계에서 독보적인 지위와 명
성을 세우려고 애쓰고 있소. 그자는 아직 이 진강부에 남아 있소.
날 찾기 위해서라도 말이오. 또 머지 않아 반드시 나를 찾아오기
도 할 거요."
"금산에 가면 영락 공자의 단서를 찾아낼 수 있을까요?"
"나아 참! 안춘 언니는 어째서 늘 생각하는 게 서로 치고받고
사람 때려죽이는 일밖에 없어? 제발 그런 피비린내 풍기는 음모
계략일랑 좀 잊어버릴 수 없어?"
갈패옥이 더는 참지 못하고 불쑥 끼어들었다.
"추산 오빠는 지금 언니더러 금산 강천사에 구경이나 가자고 초
대했잖아? 사람이 어떻게 허구헌날 치고받고 죽이는 일에만 매달
리면서 살 수가 있어? 언니는 진짜 속물이야! 어떻게 할래? 가고
싶지 않거든 그만 둬요, 나하고 추산 오빠하고 둘이서만 갔다 올
테니까."
"아이구, 요 깜찍스런 것! 제법 고상한 척하시네?"
안춘은 픽 웃어가며 핀잔을 주었다.
웃기는 했는데, 꼬마의 말을 가만 새겨보자니 사뭇 기분이 언잖
고 속이 부글부글 끓는다.
"소패, 네 손에는 피비린내가 안 묻었냐? 싸움만 벌어졌다 하면
자기 먼저 신바람나게 천둥벌거숭이로 날뛰는 것이 뭐 잘났다고
얌전을 떠는 거야? 네가 <능소객>이란 놈을 물고 늘어지는 줄, 내
모를 듯 싶으냐? 나한테도 정확한 소식통이 있단 말이다. 그 방가
란 개놈은 강 건너 여기 분명히 와 있어! 그렇기 때문에 네가 추
산을 부추겨서 이리로 끌고 왔지. 추산은 너 대신 방가놈에게 분
풀이 할 생각이 없었다면 벌써 진작에 소주로 떠났을 거다. 추산,
어때요! 내 말이 틀렸나요?"
"아니오, 소패는 날더러 <능소객>에게 앙갚음을 해달라고 요구
하지 않았소."
장추산은 솔직히 입장을 밝혔다.
"나도 억지로 그 일에 나서고 싶은 마음이 없고 말이오. 소주에
가는 일은 그리 급하지 않소. 이제 곧 설날이 올 텐데, 벼슬아치
나으리께서 유막(遊幕) 따위를 채용하려고 일부러 만나주기나 하
겠소? 아마 지금쯤 관인(官印)일랑 문갑에 집어넣고 봉해 버렸을
거요. 소춘, 정말 안 갈 테요? 강천사는 진강 일대에서 으뜸가는
명찰(名刹)이오. 치고받고 사람 죽인 다음에 부처님을 찾아가서
참회하고 업장(業障)을 씻어버리는 데 안성맞춤이라니까. 어쩌겠
소? 갈 테요, 안 갈 테요?"
연적 갈패옥이 동행한다는데야 그녀라고 어이 빠질쏜가? 요 꼬
마 악다구니는 그녀에게 있어서 가장 위협적인 존재다. 장추산과
으슥한 곳에 호젓이 놓아두곤 도무지 마음이 놓이지 않는 강적이
아닌가? 오냐, 나도 바짝 따라나서자! 어디서든지 둘이만 있을 기
회를 빼앗아 버리는 게 최상책이다!...
"좋아요, 같이 가죠!"
그녀는 혼쾌히 승락했다.
"호신용으로 병기를 가지고 갈까요?"
"그럴 필요는 없소."
장추산은 도리질을 하려다가 이맛살을 잔뜩 찌푸렸다.
"어찌 된 셈인가 모르겠군. 이 진강부 일대에 전염병이라도 나
도는지, 토박이 왈패 건달 녀석들이 몽땅 도망쳐 버렸으니 말이
오. 모두가 두더지처럼 땅굴을 파고 들어앉은 모양인데, 도대체
장터 길바닥에는 그림자 하나 얼씬거리지 않으니, 주먹질 칼부림
을 하고 싶어도 어디 상대가 있나?"
반 시진 후, 이들이 세낸 쪽배가 금산 부두에 닻을 내렸다.
보기 드물게 추운 날씨라, 부처님을 뵈오러 오는 참배객도 산천
경개 구경나온 유람객도 거의 없다.
이 무렵은 금산이 아직 육지와 연결되지 않았기 때문에 오갈 때
는 반드시 배를 세내어 타고 다녀야만 했다.
금산은 <진강 3산> 중의 하나로 일컫지만, 실상은 강물 한가운
데 겨우 10여장 높이로 언덕처럼 우뚝 솟은 아담한 섬이다. 그래
서 '산' 이라는 명칭을 붙이기에도 좀 낯뜨거운 점이 없지 않다.
오죽하면 명나라 때 위대한 선비 왕양명(王陽明)도 열한 살 때
지은 <금산사부>(金山寺賦) 첫 구절에, '금산은 내 주먹만 하구
나!' 하고 썼을까?
정상에 자리잡은 금산사 둘레는 확실히 일대 총림으로 절경을
이루고 있다. 14년 전 강회황제가 첫번째로 강남땅을 순시했을
때, 이곳을 찾아보고 흥에 겨운 나머지 진강 3산 3대 명찰의 이름
을 모조리 바꾸어 놓았다.
송나라 당시만 해도 보제사(普濟寺)라고 일컫던 초산의 초산사
(焦山寺)는 정혜사(定慧寺)로 이름을 고쳤다. 원나라 이전에 택심
사(澤心寺), 용유사(龍遊寺)로 불리우던 금산사는 강천사(江天寺)
로 바뀌었다. 북고산(北固山)의 감로사(甘露寺)도 초안사(超岸寺)
로 개명했다.
나라가 바뀌고 황실이 교체될 때마다 지명이나 사찰 이름쯤 고
치는 것이야 아주 흔하디 흔한 일이다.
홋날 건륭황제도 강남땅에 내려왔다가 왕양명의 주먹만한 이 금
산을 너무 사랑해서 이곳에다 문종각(文宗閣)을 한 채 세우고, 천
하에 네 벌밖에 없는 <사고전서>(四庫全書) 가운데 한 질을 여기
다 수장(收藏)시켰다.
나중에 가서 태평천국(太平天國)의 반란이 일어나자, 금산은 횃
불 한 무더기에 잿더미로 화하고, 천하의 소중한 <사고전서>도 깡
그리 불타 없어졌다.
장추산은 스승이 현문의 도사요, 또 갈패옥의 무공도 그 연원이
도교에 바탕을 두고 있는 터라, 금산사에 도착해서도 절간 이곳저
곳을 기웃거리고 구경만 했을 뿐, 시줏돈도 바치지 않고 부처님
앞에 참배도 하지 않았다.
안춘 소저는 달랐다. 그녀는 부처님 제단 앞에 공손히 무릎 꿇
고 향을 피워 정성스럽게 예배를 올렸다. 더구나 부취루(浮翠樓)
앞에 가서는 옷깃을 가다듬고 정례(頂禮)까지 올렸다.
부취루에는 사실 불상을 모셔 놓지도 않았다. 이 건물은 역대
황제 폐하께서 여기 들렸다가 흥에 겨워 지으신 시부(詩賦)와 먹
이나 붓 연적 따위의 문방사보(文房四寶)를 받들어 모신 곳이다.
그중에는 물론 강희대제(康熙大帝)가 물빛과 하늘빛이 똑같은
것을 보고 감탄해서 붓을 휘두른 '강천일색' (江天一色)의 진적
(眞跡)네 글자와 강천사 비문, 그리고 편액 두 개의 원고가 들어
있다.
또 황금갑 속에는 강희대제의 <금산사시>(金山寺詩) 한 권이 담
겨 탁자 위에 공손히 모셔 있었다.
장추산은 아무리 들여다보아도 맹물이다. 그런데 이 안 소저께
서는 어째서 역대 황제님들이 내리신 묵보(墨寶)에 이토록 흥미를
느끼고 있는 것일까? 심지어는 유별나게 향불마저 사르고 이마 조
아려 예를 올리다니, 그것 참 사람을 곤혹스럽게 만드는 행동이
다.
그는 물어보기도 뭣하고 해서 모른 척했다. 갈패옥은 더더욱 그
쪽을 거들떠 보지도 않았다.
사회적으로 신분이 있는 유람객, 그중에서도 관원이나 향신이라
면 얘기가 다르다. 이들은 먼저 부취루 앞에 가서 법식대로 예를
올린 다음에야 부처님께 참배하고 구경을 시작하는 것이 관례였
다.
누가 절을 하든 말든, 황제의 묵보 앞에서 꼭 예의를 차려야 하
는 것인지 아닌지, 갈패옥 소저는 눈꼽만큼도 개의치 않는다. 장
추산이 절을 안 하니까, 그녀도 절을 하지 않아도 되는 것으로 치
부해 버리는 것이다 .
약 한 시진쯤 걸려서 이들은 금산사 경내의 이름난 전당(殿堂)
몇 군데를 구경한 것으로 유람을 거의 다 마쳤다.
진짜 마음 다져먹고 전당 누각을 꼼꼼히 살펴보면서 한 군데 빠
뜨리지 않고 두루 다닌다 해도 기껏해야 하루 한 나절밖에 더 걸
리지 않을 터였다.
마지막으로 이들은 묘고봉(妙高峰) 정상에 있는 유운정(留雲亭)
에 올랐다.
일곱 층짜리 자수탑(慈壽塔)은 절벽에 기대어 세워졌는데, 금산
사 경치 가운데 제일 웅장하고 아름다운 곳이다. 탑마루에 올라서
서 바라보면 동쪽으로 초산이 보이고, 서쪽으로는 금릉부(金陵府)
성곽이 굽어보인다. 북쪽으로는 과주진, 남쪽으로는 철옹성(鐵甕
城)이다.
탑 오른쪽에는 공벽정(空碧亭), 탄해정(呑海亭)이 자리잡았고,
묘고대 왼쪽에는 유옥정(留玉亭)이 있다 .
제일 웅장한 건물은 신훈정(宸訓亭)과 규장정(奎章亭)으로, 여
기에는 강희대제의 어필을 모셔두고 늙은 승려 두 분이 문을 지키
면서 일반 유람객의 출입을 일체 금한다.
산마루에 올라서니, 텅 빈 하늘뿐 사람은 하나도 보이지 않고
세찬 강바람만 모질게 불고 있는데, 절벽 아래를 굽어보니 10여리
가 넘는 강물 수면에 탁한 물결만 하늘을 뒤덮을 듯 길길이 날뛰
는 속에 온갖 크고 작은 배들이 거센 파도를 헤쳐가며 날으듯이
항행하고 있다.
이런 날씨에는 진강부와 과주진을 왕래하는 대형 선박들도 뜻하
지 않은 돌개바람에 휩쓸려 전복당할 위험이 많고 또 일단 뱃길을
벗어나면 소용돌이 급류에 휩쓸리기 쉽다고 한다.
하계를 굽어보던 갈패옥은 저도 모르게 몸서리를 치면서 주춤주
춤 물러나 추산 오빠의 품안에 기대어 안기는 형국이 되었다.
"소패, 왜 그래?"
장추산이 뜨아한 기색으로 속삭여 물었다.
"어디 거북스런 데라도 있어? 어깨 뒤 상처는 별일 없지?"
마음속이 흐뭇하고 행복감으로 가득찼으니 온몸에 이상한 변화
가 일어날 밖에, 요 앙큼스런 꼬마 처녀는 춥기는 커녕 오히려 후
끈한 열기와 더불어 가슴속 심장 고동이 두 배나 빨라졌다.
그녀는 장추산에게서 정겨운 말을 들었으면 하고 얼마나 바랐는
지 모른다. 그런데 이제 그 상냥한 목소리를 들었으니, 봄날 우레
치는 소리보다 더 큰 충격을 받았던 것이다.
흘끗 왼쪽을 바라보니, 멍터구리 안춘 언니는 3장 바깥 멀찌감
치 떨어져서 정자 곁 비석에 새겨진 글씨를 읽느라고 정신이 팔려
있다.
비문을 판독하다니 ! 제법 글줄깨나 터득한 듯 전문가인 척한다
만, 추산 오빠는 지금 나를 품어 주고 있단 말씀이다!...
"아니, 아픈 데 없어요!"
그녀는 될 수 있는 한 자신의 반응을 숨기려고 애썼다.
"풍파가 정말 사람 무섭게 만드네요. 큰 바다에 물결도 이보다
더 사납지는 않을 거예요. 강물에서 이는 풍랑은 방향이 고르지
않아서 큰 바다보다 더 위험하다죠?"
"그러니까, 속담에도 뱃길이 말 타고 가는 것보다 더 위태롭다
고 했지 !"
"그날밤, 우리 타고 갔던 배도 굉장히 작았는데, 아무 일도 일
어나지 않아서 다행이었어요...."
"쉬잇! 그날 강 건너갔던 얘기는 들추지 말아, 소패."
장추산이 정색하고 입막음을 했다.
"어라? 그게 무슨 말씀이에요?"
"더욱 주의할 것은, 절대로 남한테 알려선 안 된다는 거야. 너
하고 나하고 비수회 사람들의 일에 간여를 했으니까."
"안 언니한테는...."
"누구나 다 마찬가지, 아무한테도 말하면 안 돼 !"
장추산은 딱 부러지게 못을 박았다.
"아이구, 좋아라!"
그녀는 정말 뭐가 그리도 좋은지 눈썹까지 씰룩여가며 기뻐했
다. 부리부리한 눈망울이 대담하게 장추산의 눈길을 잡아 이끈다.
"뭣이 그렇게 좋으냐?"
미련하게도 장추산은 뜨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당신하고 나하고 둘이서만 비밀을 간직한 것이 기쁘단 말이에
요."
그녀는 장추산에게 짐짓 눈을 샐쭉하니 흘겨 보이면서 얼굴을
붉혔다.
"난 이걸 제삼자한테 나눠주지 않을래요."
"무슨 뜻이야? 그게..."
"말 안 할 테야!"
그녀는 얼굴을 싹 돌렸다. 온 몸뚱이가 그저 포근한 느낌, 뼛속
까지 시린 강바람도 차가운 공기도 그녀에게는 이미 존재하지 않
는다 .
"난 지금 네 안전을 생각해서 하는 말이야, 소패."
장추산은 어안이 벙벙해서, 말투가 깎아 놓은 말뚝보다 더 뻣뻣
하다.
"실날만큼이라도 소문이 새어나갔다가는 엉뚱한 재앙이 닥칠거
야. 오늘 당장 이름 바꾸고 성도 바꾸고 집안에 꼭 쳐박혀 있더라
도 그 횡액을 벗어나기 힘들지. 강호 유람 따위는 두 번 다시 꿈
도 못 꾸고 말이다. 소패, 알겠어?"
"얼마나 더 오래 떠돌이로 지낼 거예요?"
"그야 누가 아나?"
"내 말뜻은 정상적인 생활로 돌아간다면 말이에요."
"하하! 강호의 방랑객치고 정상적이란 말을 입에 담는 사람은
없지. 이 금산사 1천여 명이나 되는 스님들의 생활도 정상적이라
고 말할 수 없으니까."
"뭣 때문에 강호를 떠돌아 다녀요? 당신은 명리를 꿈꾸는 분 같
지도 않은데 말이죠."
"흐흠, 요 철부지 아가씨야! 세상에 명예나 이익을 바라지 않고
분주다사하게 뛰어다니는 사람이 몇이나 있겠어?"
"괜히 얼렁뚱땅 넘기려고 하지 말아요! 추산 오빠, 난 지금 진
정으로 묻는 거예요."
장추산은 속이 뜨끔해졌다. 그녀의 목소리가 좀 색다르게 변한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
그는 갈패옥의 자그만 몸뚱이를 바로 세워 놓았다. 그리고 두
눈에 촉촉히 젖은 물기를 보았다.
"너... 너, 어떻게 된 거야?"
장추산의 웃음기가 굳어졌다.
"당신... 나한테 관심을 가져본 적이 없죠? 친구로서... 다정한
태도를 보여 주지도 않았고...."
목메인 목소리, 거기에는 원망이 가득 담겨 있었다. 떨어지려는
눈물을 억지로 참으면서 갈패옥은 말을 이었다.
"나도 내 나이가 아직 어리다는 것쯤 알아요. 당신한데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하고...."
"그런 말 말아요, 소패."
장추산은 어린애 달래듯 그녀의 뺨을 톡톡 쳐주었다.
"내가 만약 너를 지기지우(知己之友)로 여기지 않았다면 아주
그럴듯한 거짓말로 널 기분좋게 속였을 거다. 너도 잘 알 거야.
일에 따라서는 친구한데도 털어놓을 수 없는 비밀이 있다는 것을
말이다."
"예를 들면 어떤 거죠?"
"아주 흉악한 위험을 무릅써야 하는 일 같은 것."
"그럼 ! 당신은...."
기쁨 때문인가. 그녀는 펄쩍 뛰면서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흥분하면 못써. 나도 네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다 아니까. 좋
은 친구라면 복도 함께 누리고 난관이 닥칠 때는 함께 당하는 법
이지."
"누가 아니래요?"
그녀는 거의 악쓰다시피 대꾸를 했다.
목청이 크다 보니, 한참 정신없이 비문을 읽던 안춘의 주목을
끌고 말았다.
"아니면...."
장추산의 말투가 냉정하게 바뀌었다.
"아니면, 그것은 친구를 불의에 빠뜨리는 관념이고, 공명심과
이득만을 생각하게 만드는 잘못된 의리가 되지 !"
"당신네들, 뭐가 그렇게도 재미있어서 쏙닥거리는 거예요?"
안춘 소저가 슬금슬금 다가오면서 물었다. 잠시 방심하는 동안
에 무슨 음모라도 꾸민 것이 아닌가 싶어, 흡사 도둑놈 문초하듯
의심스런 눈초리로 두 사람의 기색을 살핀다.
"아주 심각한 일인가요? 추산, 나도 당신의 걱정거리를 나누어
질 수 있다는 것쯤 잘 아시잖아요?"
"뭐 대수로운 게 아니오."
장추산은 쑥스런 웃음을 짓고 변명했다.
"나하고 소패하고 사람 보는 눈이나 일을 처리하는 방법에 차이
가 나서 그런 거지 뭐. 어떻소. 당신은 이런 경치를 구경하는 데
별로 흥미가 없는 모양이구료? 경치보다는 금석문(金石文)이 더
흥미 진진한 걸 보니..."
"저 비석에 새겨진 글자를 보고 있었어요. 금상 황제의 어필로
쓴 진적인지 아닌지..."
안춘은 입에서 나오는 대로 아무렇게나 대답했다.
"추산, 당신들 진짜 아무 얘기도 안 했어요?"
"언니가 무슨 상관이야?"
갈패옥의 목소리가 또 난폭해졌다.
안춘은 못 들은 척 무시해 버리고 장추산의 얼굴만 똑바로 쳐다
보았다.
"저것이 황제의 어필 친서라곤 해도, 당신은 그 진위를 알 까닭
이 없지 않소? 혹시 예전에 황제가 손수 쓴 필적을 보지 않은 바
에야 말이오."
장추산은 되도록이면 두 처녀의 긴장된 분위기를 완화시키려고
일부러 화제를 엉뚱한 데로 길게 끌어갔다.
"내가 아는 바로는, 일조암(日照巖)에 새겨진 '솔과 바람과 바
위' (松風石) 석 자와, 조양동(朝陽洞)의 '운봉' (雲峰) 두 글자
는 황제의 어필로 쓴 것이 확실합디다. 또 산문 편액의 '강천일람
' (江天一覽) 넉 자도 어필 진적으로 새긴 것이고 말이오."
"금상 황제의 서법을 어떻게 보세요?"
뜻밖에도 안춘 소저는 이런 무미 건조한 얘기거리에 흥미를 바
짝 드러냈다. 방금 갈패옥에게서 받은 불쾌감도 모두 잊어버린 듯
하다.
"괜찮은 편입디다."
장추산은 되는대로 대꾸했다.
"고작 괜찮다는 말뿐이에요?"
안춘이 다시 물었다.
"당신은 유막 생활로 이 풍진 세상을 희롱하면서 떠돌아 다니고
있지 않아요? 유막 노릇을 제대로 하자면 기금서화(棋琴書畵)에도
유별난 조예가 있어야죠. 그렇지 않고선 누가 당신을 막객이나 스
승으로 초빙하겠어요? 그렇기 때문에 당신도 안목이 아주 높은 분
같아요."
"안목이 높고 낮은 것하곤 아무런 상관도 없소. 내 한마디 하리
까? 왕우군(王右軍) 안진경(顔眞卿)이 불후의 명필가라곤 하지만,
제대로 쓴 게 하나도 없다고 혹평하는 사람도 있다는 걸 알아두시
오."
"나도 알아요, 선비들끼리 서로 경멸하고 헐뜯는 일이야 늘 있
죠."
"안다니 됐구료. 당신 집이 북경성에 있다고 그랬지?"
"그래요, 아주 쬐끄만 완평(宛平)..."
"맙소사! 완평이 작은 고을이라니? 천자님 발치 밑, 황제의 도
성 안에 있는 땅을... 어쩐지 당신이 서울 물정에 훤하다 싶었더
니만, 그랬었군."
"대충은 좀 알죠. 추산, 북경성에 가보신 적이 있으세요?"
"몇 번 좋이 가봤소. 머무른 날짜가 짧긴 했어도 말이오. 대국
적인 견지에서 공평하게 따진다면, 금상 황제에게는 확실히 탄복
할 만한 점이 있소."
"어떤 점에서 말인가요?"
"학문의 재능과 무공 면에서요."
장추산은 솔직히 자기 속마음을 거리낌없이 털어 보였다.
"그가 학문에 열중하는 점은 정말 감동적이라 하겠소. 날마다
밤이 이슥하도록 책을 읽고, 또 공부를 하다가 각혈(喀血)까지 했
다는 소문도 들었소. 지난 번 그 사람이 강남땅에 놀러왔을 때만
하더라도...."
"강남 순행(巡幸)이라고 해야 옳죠. 지난 번이라면 9년 전의 일
이에요. 첫번째 순행은 벌써 14년이나 지났구요."
"맞소, 9년 전의 일이구료. 그때 황제는 큼지막한 책 상자를 두
개씩이나 곁에 따라다니게 하면서 배를 타고 유람하는 동안에도
줄곧 손에 책을 내려놓은 적이 없다고 그랬었소."
"무공은 어떻고요?"
"무공 면에서도 내외가(內外家) 공력 기반을 아주 착실하게 다
졌다고 들었소. 열여섯 살 때, 간악한 권신(權臣) 우바이를 잡아
죽였던 젊은 태감(太監)들도 바로 그 사람이 직접 훈련시켰다고
하니, 어리디 어린 나이에 실로 일대 종사(一代宗師)의 기백을 지
녔다고 할 만하오."
"지금 황제에겐 정실 아들만 열 셋이 있어요. 이들은 여섯 살만
되면 곧바로 학문에 들어가요. 동시에 무공 기초도 쌓기 시작하고
말이죠. 그중 제일 뛰어난 사람은 넷째 아게(阿哥)인 듯 싶어요.
학문과 무공 어느 면에서나 아게소(阿哥所)의 우두머리로 일컫는
다죠."
"어? 당신이 그걸 어떻게 알아?"
장추산이 깜짝 놀랐다.
"아게소, 황실 종친들만이 아게소란 곳이 있다는 것을 알 텐
데?..."
아게소는 황제의 정실 아들만이 공부하는 학교다. 여기에는 친
왕(親王)의 왕자들도 얼씬하지 못한다. 또 금상 황제의 아들 중에
서도 재능이 있다고 인정을 받아야만 입학할 수 있다. 황제에게
외아들 하나뿐이라면, 이 엄청난 규모의 아게소에는 학생이 하나
만 존재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황실 종친을 빼놓고는 이 아게소에서 가르치는
교육내용이 무엇인지 아무도 모른다. 심지어 외척(外戚)이나 대신
들은 도대체 이런 비밀 교육기관이 존재한다는 사실조차도 알지
못하고 있다.
"우리 집이 북경성에 있다는 걸 잊지 말아요."
안춘은 다급하게 해명을 했다.
"자금성 안에서 일어나는 일을, 시골뜨기 당신이 북경 본토내기
인 나보다 더 잘 알겠어요? 북경 사람이라면 금상 황제께서 어릴
적부터 학문을 좋아하고 무공에 힘쓴다는 사실을 누구나 다 알죠.
그러니까 나도..."
"옳소, 그는 학문을 사랑하오. 역대 전적(典籍) 가운데서 제일
효과 있고 실질적이며 제일 실행 가능한 수단만을 가려뽑아 우리
한족을 통치하는 데 쓰고 있소. 그 사람은 학문 속에서 이런 수단
을 찾아냈을 뿐더러 또 아주 성공적으로 실천하고 있소."
"통치자라면 으레 그런 거 아니예요?"
"그 사람은 옛 명나라 시대의 원로 유신들을 눈엣가시처럼 보았
소. 그렇기 때문에 유능한 문무관을 지방 각처로 보내 이들을 숙
청하고 주씨 황실의 자손을 남김 없이 죽여 없앴소. 그리고 해마
다 과거시험장을 크게 열어 우리 한족 사람을 대거 등용하여 민심
을 사고, 한족 사대부 계층의 방어심과 저항감을 철저하게 끊어
놓았소. 하류계층 사회에 두루 깔아놓은 끄나풀을 이용하고, 강호
무림계 사람들에게 건청방과 같은 친정부 방회를 지지하도록 교묘
히 설득해서 강호의 동정을 손아귀에 단단히 장악하고 이로써 평
민백성의 움직임을 효과적으로 통제하고 있는 실정이오. 두 번에
걸친 강남 순행은 천하 사람들에게 자신의 명성과 위엄을 과시하
기 위한 것이었소. 그것은 정말 대단한 효과를 보인 시위가 틀림
없소. 옛날 진시황도 천하를 순행하지 않았던들, 무슨 수로 갈갈
이 찢긴 전국시대 천하를 하나로 통일할 수 있겠소?"
"추산, 당신... 당신 말투가 어째 그래요? 비분 강개한 것
이...."
갑자기 안춘의 얼굴빛이 달라졌다.
"오해 말아요, 소춘."
장추산은 싱긋 웃어 보였다.
"나는 사리대로 따졌을 뿐이오. 내가 무슨 우국지사라고 비분강
개한단 말이오? 지금 태평성대가 바로 민심이 쏠린다는 가장 좋은
증거가 아니겠소? 나야 내 마음대로 살면 그뿐, 무엇이 모자라서
비분 강개를 하겠소?"
"추산 오빠, 언니. ! 당신들 꼭 이런 얘기를 해야만 되겠어요?
그건 법으로 금지된 말이에요!"
갈패옥이 정말 더는 못 참겠는지 버럭 악을 썼다.
"시덥지 않은 소릴랑 그만 떠벌이고 어서 가요! 여기서 남쪽 법
해동(法海洞)에 가면 고승 천보(天寶) 스님의 육신을 모셔 놓았다
는데, 그게 진짜인지 가짜인지 가서 보자구요."
"하하! 눈으로 봐서 어떻게 아나? 무엄하게 고승의 금신(金身)
을 깨뜨려 놓고 뒤적거려 볼 참이냐?"
장추산은 껄껄껄 웃었다. 웃음 소리와 함께 국법으로 금지된 불
온한 화제 거리도 시원스레 내던졌다.
"전설을 들어보니까, 흰뱀의 정령(精靈) 백낭자(白娘子)가 강물
로 이 금산을 가라앉히려 했다던데, 그건 정말 지혜롭지 못한 짓
이었어. 금산사는 온통 나무로 지어진 건물이 아닌가? 불 한 번
확 싸지르면 저 수백 칸이나 되는 전당을 단숨에 불태워, 강물 속
에 잠기게 하는 것보다 훨씬 힘이 덜 들 텐데 말이야. 자, 가자
구! 시간이 다 되었어."
"무슨 시간이 다 되었다는 거예요?"
갈패옥이 뜨아하게 물었다.
"저거 옥대교 근처, <호풍환우>의 비밀 소굴을 찾아야지 !"
장추산은 산밑을 가리켜보였다.
"영락 공자의 대표 나으리가 바로 저기서 나하고 담판을 하게될
거야."
"아니, 그럼 영락 공자가 참말 이 진강부에 아직도 있단 말이에
요?"
안춘이 뜻밖이라는 듯, 곤혹스런 표정을 지었다.
"있고 말고, 아주 깊숙히 들어앉아 있지 !"
"어쩌면 담판이 안 좋게 벌어질 수도 있겠는데..."
"청천 백일 환한 대낮에, 어떤 놈이 창칼 내밀고 장난질을 치겠
나? 어서 내려가기나 하자구!"
장추산은 자신만만하게 큰소리를 치면서 두 처녀의 손목을 잡아
끌었다.
세찬 강바람이 두 여인의 머리카락을 마구 흐뜨려 놓고 옷자락
이 찢어지도록 사납게 펄럭였다.
제3권 끝
첫댓글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