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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촉즉발
동틀 무렵, 경구항 그 작은 골목집 대문이 일찌감치 열리고 빗
자루를 든 영감이 한 사람 나와서 부지런히 길거리를 쓸기 시작했
다. 낙타등처럼 꾸부정한 허리에 빗자루질하는 몸놀림도 조용하고
차분하고 구석구석 빠짐없이 아주 열심한 기색으로 청소를 해나간
다.
그러나 잠시 후, 사방 주위에서 무시무시한 기척이 들려오면서
부터 영감님은 더 이상 침착 진정할 수 없었다.
큰길거리 앞쪽 뒤쪽, 골목 어귀와 빠져나가는 뒷길에서 장검 단
도를 찬 사람들이 한꺼번에 벌떼처럼 쏟아져 몰려들었다. 무장한
이들 중에는 남자뿐만 아니라 여자도 몇몇 섞였다.
골목 어귀 어느 빈 처마 밑에는 언제부터인가 짐꾼 차림을 한
사내 둘이 담장 기둥에 기대어 서서 낮은 목소리로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부둣가에서 짐을 나르다가 보고 들은 소문을 시시콜콜 주
고받는 모양이었다.
이들은 골목쪽으로 마주 다가오는 사람이 눈에 띄자, 본능적으
로 입을 다물고 그 편을 향해 돌아섰다.
접근해 오는 사람은 모두 셋, 남자 하나와 여자가 둘이다. 짐꾼
두 사람은 사뭇 의외인 듯한 눈빛으로 이들이 다가오는 모습을 지
켜보았다.
세 사람 뒤에는 또 우람한 체구를 지닌 사내가 둘, 간편한 옷차
림에 가죽 조끼를 받쳐 입고 패도(佩刀)를 한 자루씩 차고 있었
다.
앞의 남자는 기개도 비범하신 계제운이고, 여자 쪽은 갈씨 부인
과 고명 따님 갈패옥 두 모녀다.
"갈씨 부인."
계제운이 미소를 지으면서 입을 열었다.
"저기 저 두 형씨를 알아보시겠습니가? 저 친구들은 자기네가
아무 죄도 없다는 눈빛으로 당신을 쳐다보고 있군요. 하지만 죄가
진짜 없어서 그런 게 아니라, 뭔가 꿍꿍이 수작을 품고 있어서 그
럴 겁니다."
"계씨 나으리, 저는 저 사람들을 알지 못하는데요."
갈씨 부인이 도리질을 하며 대꾸했다.
"거짓말이 아니라 사실 소첩은 저런 강호의 후배들에 대해서 별
로 아는 바가 없습니다. 한데, 혹시 저 사람들이...?"
"저 친구들은 장씨 아우님과 안 소저를 납치한 사건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 근처는 요즈음 모습을 드러낸 악당들
의 활동이 가장 빈번한 곳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추적 조사
에 중점 지역이 되기도 하지요, 납치범들이 사용한 배는 상산 부
두에서 확실히 이 선창으로 입항했으니까 말입니다."
계제운은 차분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골목 어귀로 다가서는 걸
음걸이도 쉬지 않고 옮겨 놓는다.
"어떤 실마리도 놓쳐서는 안 됩니다. 어젯밤, 저 친구들은 어떤
사람을 상대하려고 그런지는 모르나, 이곳에다 천라지망을 깔아
놓았습니다. 그래서 나도 혹시 연관되는 단서라도 좀 얻을 수 있
을까 싶어서 이 친구들의 음모를 파헤치기로 작정했습니다. 뭐라
고 단언할 수는 없지만 육감으로 여기서 실마리가 잡힐 듯 싶군
요."
"내가 저 사람들을 붙잡아서 문조해 보겠어요."
갈패옥이 한바탕 설쳐 대겠다고 팔뚝을 걷어붙인다.
"꼬마 아가씨, 안 돼요. 그 실력 가지곤 저 친구들과 상대할 수
없어."
계제운이 놀리듯 빙글빙글 웃는다.
"아마 두 분 모녀께서 한꺼번에 손을 쓰신다 하더라도, 단시간
에 처치하기는 어려울 겝니다."
"그래요? 계씨 나으리, 저 사람들이 도대체 뭐길래..."
갈씨 부인은 믿지 못하겠다는 듯이 물었다.
"공력으로 따진다면야 물론 저 친구들이 창해 유성의 절학 현천
신강을 당해 내지 못하겠습니다만, 저 친구들의 도법 배합은 신기
(神枝)에 가까울 정도로 무섭습니다. 두 분 모녀께서 현천신강으
로 바람 한 점 빗방울 하나 샐 틈 없이 철벽같은 방어막을 친다하
더라도 막아 내기 어렵습니다. 또 수비태세만 취해 가지고는 적을
굴복시키고 승리한다는 목적을 절대로 이룰 수가 없지요."
"저 두 사람이 누굽니까?"
"위명이 쟁쟁하신 <건곤쌍절도>(乾坤雙絶刀) 왕씨(王氏) 형제입
니다."
"칼을 지니고 있지 않는데요?..."
"칼은 저 멜대 속에 감추었습죠, 볼이 좁고 칼날이 곧은 특제
품, 협봉직인도(俠鋒直刃刀)가 저 형제들의 주병기입니다."
그 말을 듣자, 갈씨 부인의 얼굴빛이 싹 변했다. 미덥지 못하다
는 기색도 바람결에 휩쓸린 듯 온데 간데 없이 사라졌다. 사람은
명성을, 나무는 그림자 둘레를 보아서 그 재목감을 헤아린다 하지
않았던가? 반드시 속전 속결로 해치워야 한다. 머뭇거렸다가는 엉
뚱한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까. 쳐라!"
계제운은 등뒤로 손짓을 보내면서 분부를 내렸다.
"예엣!"
가죽 조끼의 사내 두 명이 앞으로 성큼 나서더니, 갈씨 모녀를
앞질러 좌우 양편으로 갈라섰다. 뒤미처 '쩌렁!' 하는 용음과 함
께 칼날 빛이 가을 물결처럼 맑은 안령도(雁翎刀) 두 자루가 칼집
에서 번쩍 뽑혀나왔다.
칼날이 뽑혀나오는 기세도 드높고 살기가 용솟음치는 가운데,
살벌한 도기(刀氣)에 섞여서 뿜어나오는 용음이 사람의 넋을 뒤흔
들어 놓았다.
이렇게 되니, <건곤쌍절도>는 더 이상 짐꾼 행세를 할 수가 없
다. 상대측에서 이쪽 내력을 훤히 꿰뚫어 알고 있는데다 행동 양
식까지 파악하고 있는 바에야, 딴전을 부려 봤자 공연히 모욕만
자초하기 십상이요, 어차피 좋게 끝낼 형편이 아니라면 영웅호걸
답게 나가는 것이 차라리 나을 듯 싶었다.
"귀하, 어디서 온 사람이오?"
맏이 왕건은 차분한 목소리로 물었다. 질문을 던지는 동안, 그
의 손은 멜대자루를 비틀어 그 속에 감춘 병기를 끄집어냈다. 칼
집 겉모양으로 보건대, 계씨 나으리의 말마따나 끝이 좁고 칼날이
곧게 뻗은 협봉직인도가 분명하다.
"어디서 왔는지 알 것 없네. 너희들 자백이나 받으러 왔으니
까."
"아무리 건달이라도 남의 영업은 훼방 놓지 않는 법, 당신네들
이거 관례를 무시해도 되는 거요?"
"쓸데없는 소리 ! 어서 칼이나 뽑아."
두 자루 협봉직인도가 칼집에서 뽑혀 나왔다. 한 자루는 쪽빛
광망이, 또 한 자루는 새하얀 서릿발이 번뜩이는 괴이한 칼날이
다.
이런 종류의 칼은 날끝이 유별나게 뾰쭉하고 날카롭기 짝이 없
어, 후려찍거나 베기보다는 장검 대용으로도 쓸 수 있겠다. 곧은
칼날을 쓰지 않는다면 모르거니와 일단 뽑히는 날에는 초식 따위
의 대결을 하는 것이 아니라 기어코 피를 보아야 하는 것이 건곤
쌍절도의 특징이다.
이런 칼을 쓰는 사람은 필경 쾌속한 솜씨 악랄하고도 음독하기
짝이 없는 심성의 소유자일 터, 일단 출수했다 하면 일격필중으로
끝장내기만 추구할 뿐, 겉보기에 번지르르한 초식 놀음으로 시간
이나 잡아먹는 일은 절대로 없다.
안령도 역시 협봉도와 마찬가지, 강공에 강공으로 맞서면서 흉
맹스런 뚝심으로 속전 속결을 추구할 때 쓰는 칼이다.
협봉도가 좌우로 싹 갈라지면서 각각 상단과 하단 공격자세를
취했다. 두 형제는 자신들의 발자국을 부스러뜨리듯 조금씩 보법
을 옮겨가는 품이, 대결장 일대에 괴이하고도 음산한 분위기를 가
득 자아냈다. 그것은 안령도를 쓰는 칼잡이 두 사람과 전혀 상반
된 기세였다.
"그놈들을 무 배추 썰듯 단칼에 쪼개 버려라! <건곤쌍절>이 아
니라 <건단절>(乾單絶)이나 <곤단절>(坤單絶)이 되도록 말이다."
계제운은 한곁에 뒷짐 지고 서서 소리쳤다.
"이제 봤더니, 쌍절도란 게 별 신통한 구석도 없구만. 그저 쌍
칼의 배합이 완벽할 뿐이요, 둘이 하나로 합쳐서 분진합격(分進合
擊)하는 기교에 지나지 않아. 결점 투성이고 말이지! 의표를 찌르
기만 하면 배합된 균형쯤 깡그리 격파해 버릴 수가 있어. 저런 솜
씨 가지고야 순식간에 온갖 변화를 무슨 수로 장악한단 말인가?
하하하! 그러니까 성공과 실패의 확률은 반반씩일 수밖에...."
이 말은 싸움터 현장, 적의 면전에서 가르침을 내리는 것이나
다를 바 없었다. 또 그것은 갈씨 모녀에게 무학의 박식함을 과시
하려는 의도도 없지 않았다.
칼잡이 두 사람은 상대방에게 전투태세를 갖추도록 기회를 주었
다. 그 태도는 이미 필승의 신념을 표시한 것이었다. 여유 만만한
자신감, 그리고 외형적으로 드러난 매서운 기세로 말하자면 상대
방을 압도하고 아주 무거운 심리적 위협을 안겨 주어, 이들은 투
지면에서 이미 기선을 차지하고 있었다.
"으허업 !"
침중한 기합성 한마디, 안령도 두 자루가 호쾌 용맹하게 앞으로
돌진해 들어갔다.
협봉도 두 자루 역시 전광석화처럼 칼밑을 흩뿌리더니, 상하단
양면으로부터 엇갈리듯 합쳐지다가는 급작스레 중단(中段) 수평으
로 쏴악 나뉘면서, 좌우 양 외곽으로부터 교차되어 찔러드는 안령
도를 각각 퉁겨날리는 것과 동시에 활짝 개방된 정면의 허점을 노
리고 곧바로 찔러들었다. 분산과 결합 간의 절묘한 협동에는 털끝
만한 오차도 없을 뿐만 아니라, 두 자루 가운데 어느 칼이 주공
(主攻)이요 어느 것이 양동(陽動)이며 또 어디서 결합되는 것인지
도대체 판별해 낼 수 없었다 .
그러나 이들은 오늘 진짜 노련한 전문가와 맞닥뜨렸다.
왕씨 형제가 전력을 쏟아부어 안령도의 공세를 외곽으로 퉁겨내
고 다시 합쳐 공격으로 전환하는 바로 그 찰나, 무섭게 후려찍어
오던 칼바람이 질풍 같은 속도로 물러나면서 간일발의 차이로 협
봉도의 위력적인 공격권에서 벗어났다. 칼잡이 두 사람의 배합도
하나로 뭉쳐진 듯, 털끝만한 간극(間隙)도 없다.
물러나는 순간, 두 칼잡이의 왼손이 동시에 번쩍 쳐들리더니 연
달아 허공을 휘둘러 쳤다. 섬전과도 같은 광망(光茫)이 두 개, 세
개씩 무리를 지어 광풍 노도처럼 협봉도의 도막(刀幕) 안으로 쏟
아져 들어갔다.
헤아리지 못할 공격 변화 앞에서 <건곤쌍절도>의 자구책은 오직
하나, 제각기 공세를 중단하고 먼저 자신부터 보호해야 했다.
"이엽!-----"
무거운 질타성과 더불어, 왕씨 형제의 협봉도는 그 즉시 정면에
교차로 방어막을 형성했다. 곧게 뻗은 칼날이 '휘리릭!' 엇갈리면
서 삽시간에 부채살같이 퍼져나갔다.
"쨍그렁, 쨍! 쨍!"
해맑은 쇳소리가 귀청을 때리는 동안, 여섯 자루의 비도는 파도
처럼 겹겹이 펼쳐진 방어막에 부닥쳐 급선회하고 부서지고 꺾여
바람결에 흩날려갔다.
칼잡이들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두 자루 안령도가 후퇴동
작에서 재빨리 공세로 바뀌더니, 사람과 칼날이 혼연일체를 이루
어 정면 중앙으로부터 무섭게 돌입했다.
"우르르!---- 쏴악!-----"
느닷없이 터져나온 풍뢰(風雷)소리, 뒤미처 협봉도의 칼빛 무지
개가 중간에서 쩍 갈라지면서 적에게 돌파구를 열어 주었다.
안령도 두 자루는 좌우 양 측방에서 거적말이하듯 중앙으로 휩
쓸어 들어갔다. 사람의 그림자가 싹 나뉘어 서는 동안, 바람도 뚝
그치고 우레소리도 잠잠해졌다. 단 한 번의 교차 돌격으로 죽음의
판결을 내린 것이다.
맏이 왕건은 우측방으로 2장 거리나 퉁겨 날아가서 무릎 한 짝
을 꿇고 엎어졌다. 아가리를 쩍 벌린 왼쪽 갈빗대 틈서리로 핏물
이 샘처럼 솟구치고 내장 한 끝이 삐죽 빠져 나왔다.
둘째 왕곤은 좌측방으로 퉁겼다. 가까스로 말타기 자세를 굳힌
그는 즉석에서 도약해 도망치려 했으나, 반대로 두 다리가 툭 꺾
이면서 앞으로 거꾸러지고 말았다.
"으아아!..."
외마디 비명을 지르자, 등쪽 늑골 부위가 쩍 갈라지면서 1척 남
짓한 피보라를 뿜어냈다. 출혈과 더불어 그의 공력도 산산히 흩어
져, 몸뚱이는 허수아비 넘어가듯 그 자리에 쓰러졌다.
<쌍절도> 형제가 몸부림쳐 볼 기회도 주지 앓고, 호랑이처럼 덮
쳐온 두 칼잡이는 우선 팔꿈치 뼈부터 짓밟아 으스러뜨린 다음,
익숙한 솜씨로 양 손목과 발목을 한 덩어리로 결박지웠다.
"끌고 가자! 자백을 받으려면 산 입이 필요하니까, 약 좀 발라
주어라"
계제운의 냉혹한 지시가 떨어졌다.
"자살하지 못하도록 조심해서 다루어야 한다."
한곁에서 갈씨 부인은 가슴속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안령
도를 주무기로 쓰는 두 칼잡이의 도법이 웅혼하고도 사나울 뿐만
아니라, 물 샐 틈조차 없을 만큼 절묘한 <건곤쌍절도>의 방어막을
비도 몇 자루로 여지없이 격파해 버리고 강호 무림계에 위명이 자
자한 <쌍절도> 형제를 단판에 중상을 입혀 사로잡은 솜씨야 말로
경탄해 마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토록 놀라운 무공을 지닌 두 사내는 도대체 어떤 인물이란 말
인가?
눈치를 보아하니, 이들 칼잡이의 주인은 계제운이 분명하다. 하
인들의 무공이 경세적(驚世的)일 바에야, 그 주인의 솜씨는 더욱
고명할 것이 아닌가?
그녀는 속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자기네 두 모녀가 협동으로 공
격을 가했을 때, 과연 1백 초 안에 <건곤쌍절도>를 처치할 수 있
었을까? 그럴 확률은 거의 없다고 보아야 한다. 설령 1백 초를 넘
기더라도, 승리는 제대로 낙관하지 못할 것이다 .
"다른 쪽 놈들을 처치하고 나서 한꺼번에 끌어다가 문초하기로
하지요."
계제운의 목소리가 다시 겸손해졌다.
"우리는 계획대로 행동합니다. 자! 드실까요? 갈씨 부인."
골목에 들어서자, 이따금씩 꾸짖는 고함 소리와 병기가 맞부딪
는 금속성이 들려왔다. 다른 방향으로 밀고 들어오는 패거리도 모
두 계획에 따라서 목표한 인물들을 생포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문제의 골목집에 다가섰을 때, 맞은편 쪽에서도 일행이 벌써 20
보 거리까지 접근해 오고 있었다.
안춘 소저의 하녀 감대랑과 몸종 소도, 그리고 갈씨 부인의 동
생 양벽아, 유모 방씨가 그들이었다.
칼잡이 두 사람이 앞장서서 길을 인도했다. 어깨에는 부상자가
한 명씩 떠메어져 있다.
"노인장, 미안하지만 댁을 좀 빌려 쓸까 하는데요."
계제운이 대문 앞을 쓸고 있는 노인에게 부드러운 어조로 말을
건넸다.
"부득이한 일이라 폐를 끼치게 되었으니, 잠시만 비워 주시지
않겠습니까?"
"폐를 안 끼칠 수는 없겠소?"
문지기 노인이 울컥하는 성미를 눌러참고 퉁명스레 쏘아붙였다.
"그렇소이다, 노인장."
계제운은 얼굴에 허물어질 듯 환한 웃음을 지었다.
"자꾸 이러면, 우리 동네 방장(坊長)을 불러오겠소!"
"좋습니다. 방장 어른을 불러다가 일을 처리하는 것도 합법적이
겠군요."
계제운의 말투는 여전히 부드럽고 화기애애하다.
"노인장 댁 근처에서 흉기를 지닌 놈들을 적지 않게 붙잡았습니
다. 아마 살인 강도들이 댁에 불을 지르고 약탈하러 숨었던 게 틀
림없습니다. 그러니 이 구역 방장도 와서 조사를 해야겠지만, 이
댁 역시 책임 규명을 하기 위해 가택수색을 받아야 할 듯 싶군요.
수고스럽지만 노인장께서 냉큼 가셔서 방장 수좌(首座)를 모셔오
도록 하시지요."
"당신네들, 도대체...."
"방장 수좌를 모셔오면 다 알게 될 겁니다."
"에이, 모르겠수! 당신네들 마음대로 하시오."
늙은 문지기는 엄포가 먹혀들어가지 않는 것을 깨닫고 순순히
대문을 열어 이들 불청객을 집안으로 들였다.
계제운이 데리고 온 칼잡이 부하는 일곱 명, 이들은 남자 여섯
여자 둘, 도합 8명의 혐의자를 사로잡아 끌고 왔다.
집주인은 중년 나이에 이름이 이복(李福), 아내 주씨(周氏)와
체구가 헌걸찬 두 아들 이룡(李龍), 이호(李虎)를 데리고 나와서
손님을 맞아들였다. 이복은 화물선 한 척을 소유한 선주이자 자신
이 선장직을 겸하고 있노라고 했다.
집안 식구라야 문지기 노인 오씨(吳氏)까지 포함해서 단촐하게
모두 다섯이다. 이들도 전부 심문장이 된 대청으로 끌려나왔다 .
계제운은 진짜 심문관이라도 된 듯, 주인 댁 상석에 높지거니
올라앉았다.
어느덧 그의 태도에는 뭇 사람을 누르고도 남을 만한 위엄이 서
려 있다.
"왕건을 끌어내라!"
그는 얼굴 표정을 굳히면서 무겁게 명령을 내렸다.
"예에 !"
칼잡이 둘이서 냉큼 응답하더니, 목숨이 절반밖에 붙어 있지 않
은 왕건을 탁상 앞에 끌어내다가 발길질로 걷어찼다.
오금을 걷어채였으니 <건곤쌍절도>의 맏이 왕건은 어쩔 수 없이
무릎을 꿇어야 했다.
"누가 너희들을 보내 감시하라고 했느냐?"
계제운의 음침한 목소리로 첫 질문을 던졌다.
"망녕되이 속일 생각은 말아라! 네 몸뚱이도 무쇠로 두드려 만
들지는 않았을 테니까. 설령 무쇠 몸뚱이를 지녔다손 치더라도,
나는 용광로 속에 쳐박아 녹여 버릴 수도 있어. 알겠나? 좀 똑똑
하게 굴어 이실직고(以實直告)를 해야만 제 목숨이 살아날 수 있
단 말이다. 자, 바른대로 대라!"
"귀하는... 귀하는 도대체... 누구야?"
왕건도 강호 무뢰배답게 뻣뻣한 태도로 되물었다.
"다시 한 번 경고한다!"
계제운의 목소리가 더욱 무거워졌다.
"묻는 것은 이쪽이니까, 너는 대답만 해야 한다! 이게 마지막
경고다. 대라! 누가 널 보냈지?"
"흥! 이 왕 아무개도 오기로 똘똘 뭉쳐진 통뼈야. 네놈들이 무
슨 수단을 다 부려 들볶아도, 난 무섭지 않단 말이다. 영웅 호걸
은 죽음을 받을 망정 모욕은 받지 않는 법이다. 네놈도 그런 줄
알고 사람을 잘 봐가면서 엄포를 때리지 그래? 흐흐흐! 목숨이 필
요하냐? 그럼 가져가려무나! 하지만 내 입에서 자백을 받겠단 생
각일랑 일찌감치 거두어야 할 게다!"
"흐흐! 네 몸뚱이가 통뼈라구?"
계제운이 사뭇 감탄한 듯 실눈을 가늘게 떴다.
"이 왕 아무개도 한때를 풍미한 강호 영웅이었다는 사실을 알아
야지 !"
"통뼈라... 흐흠! 그 말씀을 못 믿겠는 걸? 난 원래 내 눈으로
직접 봐야만 믿는 성질이야.... 얘들아, 준비되었거든 저놈의 오
른손 가운데 손가락부터 뽑아내라!"
"분부 받드오리다!"
칼잡이 둘이서 동시에 대답했다. 이들은 왕건을 자빠뜨려 똑바
로 눕혀 놓고 무릎으로 가슴을 찍어누른 다음 자그만 비도 한 자
루를 꺼내더니, 왕건의 바른쪽 손바닥을 짓밟은 채 가운데 손가락
의 살을 발라내기 시작했다.
손톱이 빠지고 뼈가 드러나자, 그들은 셋째 관절을 비틀어 꺾어
피가 뚝뚝 떨어지는 대로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마디 뼈를 뽑아
내는 동안, 그들은 이맛살 하나 찌푸리지 않았다.
"그 다음!"
계제운의 명령이 떨어졌다.
왕건은 처음에는 이를 악물고 아픔을 참았다. 그러나 두번째 뼈
마디가 비틀려 뽑힐 때부터는 마침내 고통을 참지 못하고 신음 소
리를 내기 시작했다.
"흐흠, 통뼈라더니 보통 사람 것과 똑같기만 하군!"
계제운의 냉혹한 목소리가 고막을 울렸다.
"아무리 들여다보아도 오기가 어디 똘똘 뭉쳤는지 안 보이는데?
아무래도 다른 뼈다귀 속에 들어 있는 모양이야!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네놈의 오기를 꼭 보고야 말 테다. 얘들아, 준비 됐느냐?
되었거든 나머지 네 손가락뼈를 모조리 뽑아내라. 반드시 관절을
하나씩 차례차례 뽑아내야 한다. 시작!"
먼저 새끼손가락, 그 다음에는 무명지, 검지, 엄지....
손가락을 부러뜨리거나 찍어서 끊는 고문이야 보통 흔하다. 칼
도 날카롭고 빠르게 베어내기 때문에 고통도 별로 느끼지 않는다
.
그러나 지금처럼 손가락살을 낱낱이 발라내고 천천히 뼈마디를
하나하나씩 비틀어 꺾으면서 당겨 뽑는다면, 쇳덩어리로 두드려
만든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 완만한 속도로 증가되는 극통(極痛)에
는 배겨낼 도리가 없다.
처음에는 어금니를 악물고 신음성만 내던 왕건도 잠시 후에는
신음소리가 아우성으로 변하더니 나중에 가서는 목청이 터지도록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
피아 쌍방을 막론하고 그 참혹스런 광경을 지켜보던 사람들은
모두 가슴이 떨려서 견딜 수 없을 지경이었다.
"안 돼 ! 너무 잔인해!... 그런 짓으로 형님을 괴롭히지 마라!"
둘째 왕곤이 경악과 공포에 질린 목소리로 고함쳤다.
"좀 기다리게. 자네 차례도 금방 올 테니까!"
계제운의 음산한 목소리가 울렸다.
"내게는 사람의 의지를 무너뜨리는 수단이 1천 가지나 있어. 모
두가 네놈들 같은 영웅호걸을 전문적으로 닥달하는 데 쓰는 것이
지. 내가 장담하지만, 바른대로 불지 않으면 네놈들의 몸뚱이를
갈기갈기 찢어서 걸레쪽으로 만들어 주겠다. 뼈마디 하나씩, 또
살껍질은 한 치 한 치씩 벗겨내고 근육을 한 가닥씩 찢어낼 거야.
미덥지 않거든 눈이나 잘 씻고 기다리라구. 나도 네놈들이 몸뚱이
의 뼈다귀가 몽땅 뽑혀 나오고 갈갈이 찢기면서까지 자백을 않는
철혈영웅(鐵血英雄)들이라곤 생각되지 않아. <쌍절도> 형제분들,
우리 내기할까? 다음은 왼손 차례다. 시작!"
왕곤은 이미 고통에 못 이겨 까무라쳤다. 그저 칼잡이 둘이서
요리하는 대로 몸뚱이를 맡겨 놓은 채, 이제는 신음성 비명소리도
내지 않는다.
"소금물을 가져다 끼얹어라! 정신 차리거든 다시 시작하고."
"형님을 놓아 줘 ! 내가 자백할 테다...."
둘째 왕곤이 형님보다 앞서 무너졌다.
"그렇게는 안 되지 ! 꼭 이 친구한데 받아내야겠어."
계제운의 목소리는 이미 사람의 것이 아니다 .
"이놈들아, 하늘이 무섭지도 않느냐! 미치광이 놈들, 사람을 일
부러 그토록 포악하게 죽여야만 직성이 풀린단 말이냐?"
왕곤이 발광한 사람처럼 악을 썼다.
"네놈들은 자백을 받으려는 게 아니라, 샅인욕을 채우고 있는
악마들이야!"
"좋아, 정 소원이라면 너한테 자백을 받아 주지 !"
계제운이 싸늘하게 웃었다.
"한마디라도 거짓이 섞였다가는 네놈을 산 채로 뼈와 근육을 몽
땅 가려내서 두 군데다 쌓아 주겠어. 이건 내가 보장함세! 자아,
바른대로 대라. 도대체 누가 보냈느냐?"
"영락거사... 남문존신...."
왕곤은 순순히 실토하고 말았다.
"뭣이? 영락거사?"
계제운이 벌떡 일어나려다가 도로 주저앉았다. 놀라기는 갈씨
모녀도 마찬가지, 두 여인은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터무니없는 소리 마라!"
계제운이 버럭 노성을 질렀다.
"감히 본좌(本座)를 우롱하다니! 영락거사가 무슨 음모를 꾸미
는지 모르나, 현재 너구리 여우떼를 거느리고 양주 과주진 일대에
출몰한다는 것은 나도 들어 알고 있다. 네놈이 영락 공자 이름을
댄다면 혹시 믿어 줄 사람이 있겠다만, 그 애비를 끌어대어 액땜
을 하려 들다니, 네놈은 본좌가 영락거사 이름만 들어도 벌벌 떨
고 놀라 자빠질 사람으로 보는 게냐? 이 죽일 놈!"
"아이구, 하느님 맙소사! 내가 뭣 때문에 터무니없는 소릴 한단
말이오?"
왕곤은 공포에 질려 애원하다시피 부르짖었다.
"영락거사의 측근 심복들이 강북에 남아서 은화 5만 냥의 행방
을 추적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오. 그러나 장본인 영락거사는 강북
에 며칠쯤 머물다가 아무런 실마리를 찾지 못하니까, 다시 남몰래
이 진강부로 숨어 들어온 지 벌써 이틀이나 지났단 말이오. 그 사
람은 주모자가 이 강남에 은신해 있을 것으로 의심을 품고 사람을
풀어 은밀히 정탐을 진행시키고 있소!"
"그렇다면, 너는 그자하고 어떤 관계냐?"
"우리 형제는 영락거사의 외곽 경호를 맡아왔소, 사실대로 말하
자면 벌써 6년째요. 하지만 우리 형제는 천풍곡 영락장에는 가보
지도 못했소. 그 장원이 모나게 생겼는지 둥글게 생겼는지, 애당
초 본 적도 없소. 이날 이때껏 우리는 강호상에만 바쁘게 뛰어다
니면서 그 사람이 시키는 일을 해 왔을 뿐이었소. 그러니까 영락
거사신변에 함께 있는 경우도 거의 없었소. 그 사람은 모든 지시
를 측근 심복과 세력 있는 친구들을 통해서 남몰래 우리에게 지령
을 전달해 온 거요."
"어허, 영락거사의 실력이 그 정도로 막강한 줄은 몰랐군! 내가
예상한 것보다 10배는 더 강한 모양이야. 으음, 이 작자 아주 무
서운 놈인 걸!"
계제운이 음험하게 미소지었다.
"그렇소, 우리는 벌써 한 달 전부터 이곳에 잠복해 있었소. 그
리고 닷새 전에야 장주의 지시를 받고 신분을 드러내어 활동하기
시작했소."
"그 지시가 이 댁을 감시하라는 것이었나?"
"그렇소, 어제 신시(申時: 오후 세 시) 초에 지령을 받고 왔
소."
"뭘 감시하라더냐?"
"이씨 댁을 드나드는 사람을 감시하라는 거였소. 대문을 나서서
어디로 가며 또 누구와 접선하는지 파악해 두었다가 명령이 떨어
지면 붙잡아서 문초하라는 지시였소."
"문초 내용은 무엇인가?"
"그건 나도 모르오. 우리 형제는 그저 명령만 받들어 시행할 뿐
이니까."
왕곤은 여전히 두려움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말을 이었다 .
"네 말은 모두 사실이오. 함부로 말한다고 생각하지는 말아 주
시오. 지령을 전달한 사람의 말을 들어 보니, 목표한 사람을 잡으
면 즉각 백룡강(白龍岡)에 있는 연락참으로 보내, 다른 사람이 문
초를 맡기로 되어 있다고 그랬소."
"흠흠!... 이번에는 당신이 말해 보시오. 이자들이 어째서 당신
네 집을 감시하러 보냈을까?"
계제운은 돌연 집주인 이복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야 전들 어찌 알겠소이까?"
"바른대로 말해!"
계제운의 목소리가 급작스레 엄하게 바뀌었다.
"소인은 정말 모릅니다요!"
이복도 안색이 싹 변해 가지고 찔끔 자라목을 움츠리면서 대꾸
했다.
"모르신다? 흐흐흐!..."
"어쩌면... 어쩌면...."
"어쩌면이라니, 그게 뭐냐?"
"나으리, 소인이 비록 개인 화물선 한 척을 놓아 장사하고 있습
니다만, 사실 돈은 몇 푼 벌지 못했습니다요. 그런데 어제 해질
무렵, 어떤 낯선 사람이 하나 찾아와서... 떼를 쓰지 않겠습니까?
강제로 돈을...."
"강제로 돈을 어쨌단 말인가?"
"소인더러 오늘 안으로 은화 4천 냥을 마련해 놓으라는 것입니
다. 준비되면 사람을 보내 가져가겠다고 하고 말입죠. 아이구, 하
느님도 무심하시지 ! 소인네 재산이라곤 집에다 배 한 척까지 다
저당잡혀도 겨우 5백 냥어치도 안될 텐데, 무슨 수로 4천 냥씩이
나 내놓으라는 겁니까? 이번에도 강녕부까지 빈 배로 돌아왔습니
다. 화물선도 설 쇠고 나서 물에다 끌어올려 대수리를 해야 할 형
편인데, 섣달 그믐 때 사방 천지에 손을 내밀어 봤자 누가 돈을
빌려 주기나 한답니까? 소인은 처음 그 사람이 장난으로 그런 줄
알고 전혀 마음에 쓰지도 않았습니다요. 그런데 이런 끔찍한 일이
생길 줄이야...."
"그자 성은 뭐며, 이름은 뭐라던가? 또 생김새는 어떻고?"
"얼핏 보기에 가난뱅이 건달 같았습죠, 두건으로 입과 코를 가
려서 얼굴 생김새는 알 수 없었습니다. 성도 이름도 대지 않았고
요.... 겉모습으로 보아서도 별로 흉악스런 기색이 아니었습니다
. 그저 자기 할 말만 남기고 훌쩍 가버렸습죠. 뚝심이 얼마나 센
지 손을 한 번 뿌리치니까, 우리 집 오 영감이 곤두박질쳐서 고꾸
라졌습니다요."
"나도 소문을 좀 들어 아는 것이 있소."
막다른 골목 쪽에서 붙잡혀 온 중년인 하나가 상처 입은 몸뚱이
를 추스르면서 한마디 끼어들었다.
"그래? 어디 말해 보시게!"
계제운이 부하에게 눈짓을 보내자, 칼잡이는 자기 포로를 앞으
로 밀쳐냈다.
"소문에, <신조냉표> 측 사람들이 은화를 대량으로 마련하느라
뛰어다닌다고 하더군요. 기일 안에 어떤 사람을 사야 한다고 하면
서 말입니다."
"사람을 산다고?"
"그렇소이다. 자기네들한데 꼭 필요한 사람이기 때문에... 하지
만 액수가 엄청나고 또 시간이 아주 촉박한 모양이더군요."
"어떤 사람인지 아시오?"
계제운이 사뭇 구미가 당겼는지, 말투를 바꾸었다 .
"모르겠소이다. 그저 <신조냉표> 쪽에선 도저히 상대하지 못할
벅찬 강적이라는 얘기만 들었소."
이때, 칼잡이 한 사람이 먼저 손짓을 지어보이더니, 당상으로
올라와 계제운의 귓가에 다가왔다. 그리고는 잠시 귓속말로 몇 마
디 건넨 다음 물러났다.
계제운의 얼굴빛이 싹 변했다. 그는 바로 곁 감대랑에게 손짓으
로 무엇인가 남모르는 의사를 전했다.
"감대랑, 모르겠나? <단혼원앙>에 관한 얘기를...."
그는 다시 입을 열어 채근했다.
"그 계집들 짓이란 말입니까?"
감대랑도 긍정적으로 고개를 끄덕거리면서, 확인이라도 하듯 되
물었다.
"인신매매를 하는 자는 그 계집들밖에 없지. 또 거리상으로도
여기서 아주 가깝고 말이야."
계제운은 딱 부러지게 단정을 내렸다. 그리고는 갈패옥을 돌아
보았다.
"갈 소저, 혹시 기억나오? 물에 떨어지기 직전 정신이 흐리멍텅
해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는지...?"
"아, 그렇군요!"
감대랑이 뒤따라 소리쳤다.
"그 계집들의 수법과 아주 닮았습니다. 그래서 장씨 아우님도
재빨리 눈치채고... 갈 소저, 우리 다시 한 번 상황을 맞춰 볼
까?"
계제운이 물었다.
"맞아요, 강물 속에 떨어지기 전에 어지러운 느낌이 들었어요.
차가운 물에 금방 정신을 차리긴 했지만요."
"감대랑!..."
계제운은 다시 감대랑 쪽으로 눈길을 던졌다.
"우선 그 계집들부터 찾기로 하시죠. 틀림없습니다."
감대랑이 벌떡 일어나면서 말했다.
"나도 그 계집들의 내력은 좀 알고 있지. 그럼 곧 떠날 차비를
차려야겠군. 얘들아!"
계제운은 부하들에게 손짓을 보냈다. 철수하자는 신호였다. 그
리고 중년인을 맡은 부하에게 별도 지시를 내렸다.
"이 사람은 잘 대우해 주어라. 일을 끝낸 뒤에 석방해 줄 테니
까. 만약 우리가 성공하면, 저 친구가 관련된 사건 기록은 모두
없애버리도록! 알겠나? 나는 우리에게 성의를 베풀고 협력해 준
사람에게는 그에 걸맞는 대가를 지불하고, 절대로 푸대접하지 않
는 성미야."
그들이 철수한 지 얼마 안 있어, 이 댁 주인 일가족 남녀 노소
들도 뒷골목으로 통하는 비밀문을 살그머니 빠져나가더니 어디론
가 뿔뿔이 흩어졌다. 제 집에서 나가면서도, 이들의 기색은 마치
낚시바늘을 벗어난 물고기와도 같이 촉박한 동작으로 재빨리 사라
져 갔다.
이리하여, 천지회의 중요 연락참 한 군데는 흔적도 없이 철거되
고 말았다.
천지회 연락참을 감시하던 패거리가 온데 간데 없이 증발된 직
후, 주모자는 자신의 통제력이 상실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천추교 다리 서쪽 끄트머리에서 은화 4천 냥의 돈이 오기를 기
다릴 필요성도 없어진 것은 물론이다.
그러나 사시(巳時: 오전 열 시) 정각까지 다리 부근에 잠복해서
목이 빠지도록 기다린 사람도 있었다. 혹시나 기적이라도 일어나
지 않을까 하고 바라는 요행심이 죄라면 죄였다.
감시자들은 진시(辰時: 오전 아홉 시) 초에 실종되었고, 전군이
복멸(複滅)을 당했는데 어떻게 기적이 일어날 수 있겠는가?
돈은 없지만, 그렇다고 해야 할 일을 중도에서 포기할 수는 없
는 노릇이다. 계략으로 안 되면 어쩌겠나? 무력으로 모험이라도
걸어볼 수밖에 !
진시도 거의 다 지날 무렵, 두 척의 쾌속선이 남쪽으로 뱃머리
를 잡고 강물을 거슬러 급하게 치닫기 시작했다. 방향은 단양현
(丹陽縣) 쪽이다.
그 해도 다 저물고 세밑이 되었어도, 운하에는 여전히 오가는
선박들이 그치지 않았다. 따라서 상류로 거슬러 올라가든 하류로
떠내려 오든, 오락가락하는 선박들의 내력을 일일이 눈여겨볼 만
큼 얼빠진 사람도 물론 없었다 .
먼저 떠난 쾌속선의 뒤편 4, 5리쯤 거리를 떼고 또 다른 선박
두척이 역류를 거슬러 오르고 있었다. 배는 소형 객선이지만, 강
추위 탓인지 선실 창문을 단단히 걸어닫아 그 안에 어떤 승객들이
타고 있는지 알아볼 수가 없다.
갈씨 부인 일가족 넷은 감대랑, 소도와 함께 두번째 객선에 타
고 있었다. 각자 병기로 단단히 무장도 했고, 또 옷차림도 행동하
기에 편리한 경장(勁裝)으로 바꿔 입었다.
진강부성에서 단양현까지 뱃길로는 80여 리, 역류를 거슬러 올
라야 하기 때문에 아무리 빠른 쾌속선이라도 네 시진 이상 시간을
잡아먹는다.
운수 좋게 때마침 순풍이라, 운하의 물길은 비록 좁아도 돛을
펼치고 달릴 수 있는데다 뱃꾼들도 하나같이 노련한 경험자라서,
잘만 하면 한 시진쯤은 단축할 가능성이 많아졌다.
발 빠른 사람은 육로로 달리는 것이 낫다. 남쪽으로 곧게 뻗은
관도가 물길보다 10여 리는 가까우니 말이다. 또 다리 힘 좋은 준
마를 치달리면, 한 시진에 40리쯤 뛰기는 여반장이다. 결국 강남
일지홍은 4천 냥 은화를 마련하지 못한 탓으로, 엄청난 풍파를 불
러일으키고 말았다.
계제운이 받아낸 자백은 정확했다. 영락거사는 벌써부터 발길을
되돌려 진강부에 잠입해 있었다. 그는 진강부에 은밀히 박아 두었
던 앞잡이들을 몽땅 풀어 이끌고 암암리에 빈번한 활약을 해 왔던
것이다.
그는 측근 심복들을 거느리고 선두 쾌속선에 타고 있다. 동반자
는 쾌속선의 선주 <호풍환우> 능유광이었다.
쾌속선 두 척은 돛을 한껏 부풀리고 급하게 치달리면서 앞선 배
들을 끊임없이 추월해 나아갔다.
갑판 중앙의 선실문이 단단히 닫히고, 그 안에는 수뇌급 인물
10여 명이 둘러앉아 찻잔을 훌쩍거리면서 엄숙한 표정으로 이제
눈앞에 닥칠 정세와 행동계획을 토의하고 있었다.
"남문 형, 정말 꼭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소?"
<호풍환우>가 불안한 기색으로 물었다.
"내가 알기로는 <단혼원앙>은 자부심이 대단한 조직이오. 이날
이때껏 어떤 사람에게도 잘못을 저질러 본 일이 없었소. 그 여자
들이 범상치 않은 실력과 밑천을 가지고 있는 것도 확실하오. 그
렇기 때문에 거래를 튼 이상, 누구한테든지 두말없이 실천해 보였
던 거요. 이제 우리가 무턱대고 찾아가서 사람을 내놓으라고 윽박
지른다면, 그녀들의 금기를 범하는 짓이 아니겠소? 나로서는 그게
아무래도...."
"능 형, 나도 그 계집들에 대해서 당신보다 좀 더 알고 있는 편
이외다."
영락거사가 덤덤하니 웃으면서 그의 말을 막았다 .
"우리 영락장의 명성과 영예, 실력, 밑천이 얼마나 된다고 생각
하오? 아마 <단혼원앙>보다 백 배는 강할 거요. 나는 그들에게 오
늘날 이 강호 무림계에서 누가 어른인지 분명히 가르쳐 주겠소."
"그건 좀... 남문 형이 아시는지 모르나, 단혼장은 장산 깊숙히
숨겨져 있소. 또 물길도 수십 갈래나 되어서 외부 사람은 헤아리
지 못하는 곳이오. 그렇기 때문에 단혼장은 지키기는 쉬워도 공격
하기 어려운 철옹성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오. 누구든지 10
리 이내에 접근했을 때는, 그녀들도 기습에 대응할 준비태세를 완
전히 갖춰 놓고 기다리는 형편이오. 그런데 우리는 지금 출동 인
원수에 한도가 있지 않소?"
"나도 지금 방문하러 가는 길이외다. 내 생각으로도 정면 공격
이나 기습할 계획은 필요 없을 거요."
"저... 이 아우는 아무래도 불안하기만 하구료. 남문 형, 우리
이렇게 합시다! 단양현에 내 친구가 몇몇 있는데, 은화 4천 냥쯤
은 손바닥 뒤집기보다 더 쉽사리 마련해 줄 거요, 그 정도 변변치
못한 돈 때문에 쌍방이 안면 몰수하고 잔인하게 살육전을 벌일 필
요가 뭐 있겠소? 이제 와서 말이지만, 사실 나도 진강부에서 그만
한 금액은 마련할 수가 있었소. 한데 어인 일인지, 아드님께서 단
호히 거절했소. 꼭 6천 냥만 필요하다고 하면서...."
"이 일은 돈하고 전혀 상관이 없소."
영락거사가 빙그레 웃었다.
"이것은 책략이오, 능 형. 더구나 이 영락거사가 모처럼 낯을
내미는데, 우리 영락장의 명예가 남한테 업신여김을 받도록 용납
해서야 되겠소? 나도 강호 도의를 무시하려는 게 아니오. 그 계집
들한테도 충분히 체면을 세워 줄 작정이오. 먼저 예의를 갖춰 협
상한 다음, 정녕 일이 안 될 때에 무력을 쓸 참이오. 그 계집들도
제법 머리가 잘 돌아갈 테니까, 위험까지 무릅쓰고 우리 영락장의
위엄과 명성에 도전하지는 않을 거외다."
"하지만 이 아우는 아직도 이해를 못하겠소. 별 볼 것 없는 떠
돌이 장추산 하나 때문에 큰 병력을 동원해서 싸우다니...."
"능 형, 장추산과 내 못난 아들 사이에 은원이 걸린 문제라면,
그것은 우리 영락장의 위엄과 명예를 다투는 일이라고 보아야 하
오. 이런 막중한 관계에 전력을 쏟아 대처할 값어치가 없다고 보
시오? 하물며 그놈은 <능소객> 방 형의 기업을 결단낸 원수외다.
더구나 은화 5만 냥의 행방까지 걸렸으니, 나로서는 절대로 물러
서지 못할 일이오."
"은화 5만 냥이라니, 그건 또 뭐며, 어째서 장추산과 관련이 있
단 말이오?"
"나는 벌써 양주에서 모든 실마리를 낱낱이 조사해 보았소. 그
리고 방 형이 강을 건너 이리로 왔다는 확증도 잡았소. 강을 건너
왔으면, 그 사람은 내게 의당 연락을 취해야 할 텐데, 어찌 된 셈
인지 이날 이때껏 사람 하나 보내지 않고 있소. 여기에는 딱 한
가지 가능성밖에 없소. 방 형은 이미 장추산의 손아귀에 떨어졌을
것이라는 가능성 말이오."
"하면, 그 5만 냥은?..."
"의진현 부두에서 은화 궤짝이 실종된 괴사건은 오로지 방 형만
이 그 내막을 자세히 알고 있을 거요. 솔직히 말해서, 은화 5만
냥이라면 누가 생각하더라도 놀랄 만큼 엄청난 액수가 아니겠소?
이런 주인 없는 재물을 두고 내 마음이 동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사람 속이는 우스개 소리밖에 안 될 거외다. 그래서 나는 장추산
이 은화 5만 냥의 열쇠를 쥔 인물로 단정을 내렸고, 또 그렇기 때
문에 그놈을 반드시 내 수중에 넣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거요."
"남문 형, 도대체 그 5만 냥은 어떻게 된 돈이오?"
<호풍환우>도 마음이 동했는지 관심 깊게 물었다 .
"내가 조사해 본 결과, 그 돈은 양주부 관고(官庫)에서 강녕부
의 어느 벼슬 높은 분에게 교부되는 공금이었소. 우리가 알지 못
할 특수활동 비용으로 지출된 비밀 자금이란 말이오. 그러니까 돈
을 잃어버리고 발표도 못하고 공개적으로 수사도 못하는 거요. 이
런 돈이라면 수중에 챙겨넣더라도 무슨 뒤탈이 생기겠소? 능 형,
일만 잘 되면 이 아우도 옛 친구의 호의는 잊지 않을 테니까 마음
푹 놓고 기다려보시오, 핫핫핫!"
자신감에 찬 호탕한 웃음소리, 의기양양한 웃음소리가 한바탕
선실 안을 뒤흔들었으나, <호풍환우>의 얼굴은 마치 떫은 감 씹은
표정이다.
누가 제 집 안마당에서 떼돈을 벌겠다고 설쳐 댄다면, 그걸 좋
게 여길 터줏대감이 과연 이 세상 천지 어디에 있겠는가?
"흐흠, 일이 그랬었군요!"
<호풍환우>는 건성 메마른 웃음소리만 냈을 뿐, 얼굴 근육은 잔
뜩 굳어져 있다.
"어쩐지 아드님께서 1만 냥이나 되는 거금을 들여 사람을 사는
가 했더니, 그런 사연이 있었구료. 그렇다면 빌려드린 돈도 고스
란히 되받을 수 있겠군요. 아버님이나 그 아드님이나, 두 분 모두
웅재 대략(雄才大略)을 깊이 품으신 영걸이외다. 하하하! 이 못난
아우는 정말 탄복해 마지 않소!"
"강호상에 굴러먹다 보면 부득이한 경우도 있구료, 능 형, 이해
하시오."
영락거사는 흡족한 미소를 띠어가며 말을 이었다.
"속담에, '장강의 뒷물결이 앞물결을 밀어내고, 세상에는 새로
운 인재가 낡은 세대와 바뀌는 법' 이라 하지 않았소? 강호의 패
자로 위엄과 명성을 떨치기는 어렵고 험난하고, 파산하거나 도태
당하기는 아주 쉬운 일이지. 우리는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한발 한발씩 조심스럽게 발전시켜 나가는 길밖에 딴 도리는
없소. 명성과 이익은 불가분의 관계, 이걸 따로 떼어놓고는 아무
일도 생각할 수 없소. 재산과 세력, 이것만이 강호 실력의 뿌리요
바탕이 되지 앓겠소? 가령 이 아우가 땡전 한푼도 없는 떠돌이라
면, 능 형께서 과연 위신을 낮추고 나와 마주 앉아서 형님 아우님
이라고 부르겠소?"
"하하하! 그거야 무슨 문제가 된다고 그러시오?"
<호풍환우>는 억지 웃음을 터뜨렸다.
"당신과 나는 벌써 20여 년이나 교분을 맺어 온 사이인데, 우정
으로 보나 의리상으로 보나 내 어찌 남문 형을 외부 사람처럼 대
한단 말이오?"
사실 그 말뜻은 이렇다. 내가 널 외부 사람처럼 대우하지 않았
는데, 네놈은 내 세력권 안에서 음모나 꾸미고 떼돈을 챙겨가려고
하다니, 이래서 되겠느냐고 꾸짖는 말씀이다. 감히 맞대놓고 면박
을 줄 수야 없겠지만, 언중유골(言中有骨)로 자신의 불만을 드러
내 보인 것이다.
"그 점은 이 아우도 깊이 감사하고 있소이다."
영락거사도 그 속마음을 모르는 바 아닌 터라, 인사치레로 받아
넘겼다.
쾌속선은 돛폭이 찢어질 듯 순풍을 가득 안고서 날듯이 치달렸
다. 이제 배도 단양현 지경에 거의 접어들고 있는 시각이다.
점심상도 아주 푸짐한 것이, <단혼원앙> 다섯 자매는 모두 미식
전문가인 모양이다 .
다섯 자매는 한 상에 자리잡고 앉았으나, 안춘의 식탁만큼은 왼
쪽 객석에 멀찌감치 떼어서 독상을 차려 놓았다. 주인들이 마음
단단히 먹고 그녀를 고립시키려는 의도가 분명하다.
안춘 소저도 눈치 빠르고 영리한 터라, 좌석 배치를 보자마자
이내 그 까닭을 알 수 있었다.
오냐, 날더러 겸상을 받지 못하게 한다면 좋다! 나 혼자서 허리
띠 끌러 놓고 마음껏 먹고 마셔 주지. 주인 쪽이 속 좁게 굴면 손
님 쪽에서 대범한 태도를 보여주기로 하자꾸나....
그녀는 자리에 앉기 전부터 얼굴에 웃음빛을 활짝 피웠다. 어젯
밤의 노기 등등하던 모습과는 전혀 반대였다.
계 낭자는 장추산과 나란히 자리 잡았다. 의자에 앉아서도 그녀
는 이따금씩 한쪽 곁에 좌정한 변태 아가씨에게 경계 섞인 눈길을
던지곤 했다.
술은 어제와 마찬가지로 여아홍, 얇은 도자기 잔에 술이 가득
찰 때마다 장미처럼 고운 호박색이 눈부시게 남실대었다.
"이것 정말 멋진데! 날마다 향그러운 술잔에 꽃같이 아리따운
아가씨들과 선경을헤매다니, 이런 복이 또 어디 있을꼬?"
장추산이 의자에 앉으면서 손길 가는 대로 계 낭자의 목덜미를
감아 안았다.
"하하! 여기서 이러고 있으니까, 너무도 즐거워서 집에 돌아가
고 싶은 생각은 눈꼽만큼도 안 나네 그려 !"
"죽일 것 ! 어디 진정으로 기분 좋아서 그런지 두고 볼 테야! "
계 낭자는 눈을 하얗게 흘겨가며 종알거렸다.
"일부러 꾸며 댄다고 내가 모를 줄 알구?"
"또 농담하시는군, 계씨 누님."
그는 시녀가 따라 올리는 술잔을 받아가지고 한 모금에 비워 버
렸다.
"하하, 세상 참 좋구나! 내 시 한 수 읊을 테니 들어 보라구. '
오늘 아침 마실 술이 있으면 오늘 취하고, 내일 닥칠 근심일랑 내
일 당하세!' (今朝有酒今朝醉, 明日愁來明曰當)... 어떻소, 사람
이 도를 닦으려면 이 정도 경지에는 들어야 할 게 아닌가? 이 장
추산은 어느 날이든 항상 기분이 후련하지. 내일 죽는다고 오늘
걱정해서 뭣 하겠어? 난 바보같이 없는 기분을 꾸미고 사는 사람
이 아니란 말씀이야!"
"당신, 정말 죽음이 안 무서워요?"
"계씨 누님, 어제 한 말 또 시킬 거요? 내 한 가지 물어봅시다.
사람은 누구나 한 번쯤 꼭 죽는 거 아니겠소? 장생불사 불로초 먹
은 사람 봤소?"
"못 봤죠. 사람은 반드시 죽게 마련이니까요."
"바로 그거야! 당신이나 나나 어차피 죽을 몸인데, 일찍 죽거나
늦게 죽거나 마찬가지 아니겠소?"
"그야 다르죠...."
"또 한 가지 물읍시다. 가령 내가 당신 앞에 무릎 꿇고 이마 콩
콩 짓찔어가며 애걸복걸한다면, 당신이 내 목숨을 살려 주겠소?"
"안 되죠! 그건 물주가 결정할 일이니까."
"그럼 됐소, 기왕에 살지 못한다는 걸 아는 바에야, 내가 언제
죽을지 걱정해서 뭣에 쓰겠나? 또 하루 종일 벌벌 떤다고 천지개
벽을 해서 뒤바뀔 일도 아니니, 다 쓸데없는 수작이지 !"
"계 언니, 그 사람하고 입씨름해서 이기지 못할 거예요."
안춘 소저가 실눈을 간드러지게 뜨고 웃어가며 그녀를 향해 술
잔을 높이 들더니, 살글살금 자리를 옮겨와서 팔뚝을 썩 내밀어
계낭자의 가늘고 잘룩한 허리를 휘감았다.
"언니, 그 사람에게 매달려 봤자 김만 빠지고 헛일이야. 자, 이
리 와서 나하고 놀아요. 내가 언니를 위해 건배할께. 우리 합환주
나눠 마실까?"
"그 손 치우지 못해? 날 건드리지 말아!"
계 낭자가 빽 소리치면서 안춘의 손길을 뿌리쳤다. 마치 징그러
운 송충이라도 떨쳐버리듯, 그녀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정말 구역질나서 못 참겠네! 너 어쩌자고 그런 못된 습관에 물
들었니?"
"이런! 내가 어디서 무얼 했는지 모르시나?"
"네가 뭘 어쨌다고...."
"양주 교외 길상암 알지?"
안춘은 일부러 눈을 동그랗게 뜨고 젠 체해 보였다.
"물론 알지. 거긴 <능소객>의 매음굴... 이잇? 그럼 네가...?"
"나도 길상암 출신이야. <능소객>이 친절하게 날 훈련시켜서 남
자하고나 여자하고나 못 하는 재주가 없게 만들어 줬거든. 그래서
뭇 계집들 중에 화괴(花魁)로 뽑혔지 ! 이만하면 알겠어?"
"아이구 맙소사! 내가 졌다. 졌어 ! 정말 끔찍스럽다, 끔직해!"
계 낭자는 어마 뜨거라, 재빨리 자리를 옮겨 장추산하고 바꿔앉
았다.
"어쩐지, 풍류 탕아 영락 공자도 널 마다하길래, 난 또 웬 일인
가 싶었더니...."
"그럼 물주는 영락 공자가 확실하군?"
장추산이 기회 놓칠세라 냉큼 말끝을 잡고 늘어졌다.
"아니죠!"
계 낭자는 딱 단호하게 부인했다.
"내 한번은 그 작자하고 거래할 일이 있어 사람을 보낸 적이 있
어요. 마땅한 물건이 생겼길래 천 냥에 팔아 넘기려고 말이죠. 그
랬더니 한마디로 거절하지 앓겠어요? 아무리 값을 낮춰도 다 싫다
는 거예요. 우리 같은 사람하고 거래하면 체면이 깎인다나요? 쳇,
재수 옴 붙은 녀석 같으니 !"
이때였다. 여제자 한 명이 총총 걸음으로 들어와서 계 낭자에게
귓속말로 몇 마디 쏙닥거렸다.
속삭임이 끝나기도 전에, 계 낭자의 얼굴빛이 싹 달라지더니,
눈에 흉광이 번뜩 비쳐나왔다.
"막내야, 너 가서 준비해라!"
그녀는 다섯째 화 낭자를 돌아보고 지시를 내렸다.
"쌍차하 부근에 웬 낯선 자들이 다가오고 있단다. 의도는 모르
겠으나, 우리 단혼장에 쳐들어왔을 가능성이 많으니까, 뜻밖의 일
을 당하지 않도록 미리 막아 놓아야겠다."
"알았어요. 내 곧 서하장(西下莊)으로 내려가서 준비하죠."
다섯째는 급히 자리를 떴다.
"보아하니, 이 댁에 골칫거리가 생긴 모양이로군."
장추산은 고소하다는 듯, 불난 집에 부채질을 했다.
"흥! 우리 단혼장이 뭘 겁내는 줄 알아요?"
계 낭자는 오만스레 쏘아붙였다.
"단혼원앙진을 펼쳐 놓으면, 관군 1천 명, 강호 고수 1백 명쯤
기어들어 오더라도 너끈히 막아 낼 수 있단 말이에요. 쳐들어와
봤자, 호랑이 아가리에 양떼 몰아넣기나 매일반이지 ! 우리 단혼
장이 헛된 명성만 날렸다면, 이 강호상에 진작 남아나지 못했을
걸?"
"오래 전, 백료산장(百了山莊)의 번 장주(樊莊主)도 똑같이 호
언장담을 했지만, 지금은 어디 있소? <삼호사걸>(三豪四傑) 일곱
고수의 손에 백료산장은 잿더미와 연기로 날아가 버렸지 않소? 대
천성채(大天星塞)의 <천왕>(天王) 호 채주(胡寒主)도 그런 큰소리
를 떠벌렸다가 무슨 꼴을 당했소? <쌍요>(雙妖)와 <오사>(五邪)가
단 한 번 공격으로 대천성채를 이 세상에서 말살해 버렸소. 나
<뇌신>도 일세의 영웅이라 자부하고 강호 10대 신비 인물의 반열
에 올라 그 명성을 천하에 떨쳤지만, 지금의 결과는 어떻소? 당신
네들은 고작 뱃꾼 두 녀석을 내보내고, 또 한 녀석을 시켜서 물
속으로 원앙 보자기 두 쪽을 건네주기만 하고도 진강의 군웅들이
손도 못 대던 나를 누워서 떡먹기로 챙겨오지 않았느난 말이오?
그야말로 손바닥에 침뱉기나 다를 바 없이 쉬운 노릇이지 !"
"김 새는 소리만 골라서 하는군요?"
계 낭자가 사뭇 언짢은 기색으로 소리쳤다.
"좋아, 그럼 말 안 하리다."
장추산은 껄껄 웃었다.
"병에 잘 듣는 약은 입에 쓰고 좋은 충고는 귀에 거슬린다고 했
나? 계씨 누님, 진실된 말은 사람의 반감을 불러일으키는 게 보통
이지. 잘못하면 제 몸 다치기 쉽고 말이오. 어이, 패 낭자! 이거
잔등이 가려워서 못 견디겠는데. 이 괴상 야릇한 바늘 좀 뽑아 줄
수 없겠소? 기문혈도 패 낭자의 절묘한 독문수법으로 꽉 제압당했
으니, 도망칠 염려도 없지 않소? 제발 부탁이니 뽑아 주시구료,
모두 일곱 대야. 어떻소, 선심 좀 베풀면 안 좋겠소?"
"안 뽑아요!"
패령고가 딱 부러지게 거절했다.
"기문혈은 제압당했어도, 기본 무공은 여전히 살아 있짢아요?
등쪽 경맥 다섯 군데에 박힌 침은 힘을 써야만 고통이 생겨요. 일
단 발작했다 하는 날에는 온몸이 탈진상태가 되도록 견디기 어려
운 고통을 받아야 해요. 그것에 비하면 가려움증이야 너끈히 참을
수 있으니까, 괜히 엉뚱한 생각일랑 안 하는 게 신상에 이로울 거
예요."
"안 좋다면 됐소, 됐어 ! 우리 술이나 같이 마시자구, 패 낭자.
당신 그 괴상한 바늘은 정말 지독스럽기 짝이 없구료. 길이도 짧
고 가는데다 부드러우면서도 질긴 모양인데, 도대체 이게 무슨 장
난감이오? 천하 제일가는 침공(針工)이라도 이렇게 가늘고 탄력
좋은 바늘을 만들지는 못할 거요, 이거 당신 손으로 직접 갈아 만
든거요? 정말 그 솜씨는 탄복했다니까! 으하하하!"
"그 바늘은 쇠로 만든 게 아니라, 바다에서 사는 어떤 물고기의
가시예요."
패령고는 의기 양양해져서 대꾸했다.
"나도 그 이상한 물고기를 우연히 발견했지만, 정말 쓸모가 대
단한 것이더군요, 살 속에 들어가서 피를 묻히고 나면 근육을 갈
라내도 좀처럼 발견하기 어려워요. 더구나 상처가 아물어 버리면
다시 살 속 깊숙히 파고 들어가죠. 이걸 만약 경맥에 박아넣으면
근육을 쪼개내도 안 돼요. 그렇다고 가시 뽑겠다고 경맥에 칼날을
댈 멍텅구리는 없겠죠? 확실히 지독스럽기 짝이 없는 암기라고 할
수 있어요."
"하하, 당신, 내 목숨 결딴내기로 작심했구먼!"
"어차피 죽을 목숨 아닌가요?"
"이건 눈엣가시나 살 속에 가시나 사람 못 살게 구는 장난감이
기는 마찬가질세 그려! 당신, 이러다가 천벌을 받을 수도 있어.
자아, 이리 오라구! 날벼락 맞아 뒈질 미인한테 건배나 올려 드리
지. 오늘밤에 당신 침대에 올라가고 싶은데 괜찮겠지? 혹시 또 누
가 아나, 당신을 아주 즐겁게 눌러드리면 이 가시를 뽑아 줄지도
몰라, 안 그렇소? 자, 건배!"
"내 침대에 기어 올라와도, 가시는 안 뽑아 줄 거예요. 히히히!
그 욕심일랑 일찌감치 죽이는 게 좋을 걸? 우리 대영웅 나으리!"
패령고는 얼굴 하나 붉히지 않고 응수했다.
"하느님도 나 같은 악녀한테는 벼락을 안 때릴 거예요. 천벌이
누구한테 내리는지 아세요? 바로 정인군자입네 하고 거드름을 부
리는 족속들이죠. 왜냐하면 하늘의 옥황상제나 부처님이나 모두가
시세대로 붙좇는 귀신들이거든요. 그분들은 영원히 악당 편에 서
왔어요."
"또 음탕한 계집 편에도 서 계시겠지. 핫핫핫!"
그는 목청이 터져라고 웃었다. 그리고는 계 낭자의 목덜미를 부
여안은 채 술잔을 들어부었다.
"당신, 어젯밤 내 침대에 올라오려고 기어들어왔지? 그래, 오라
구! 오늘밤에만큼은 나도 요 귀여운 탕녀를 흐물흐물 녹아버리도
록 실컷 즐겨 줘야겠어."
또 한바탕 뒤얽혀 어수선하게 나뒹굴고, 이리저리 주무르고 입
맞춰가며 방탕스런 소동이 벌어졌다.
대청 문 밖에 시녀 한 사람이 나타났다. 손에는 큼지막한 붉은
봉투가 하나 들려 있다. 방문객이 명함을 건네온 것이다.
"영락장의 장주 천풍거사 남문존신이 배첩(拜帖)을 올려 왔사옵
니다."
시녀가 목청을 돋우어 아뢰었다.
"사부님께서 지시를 내리십시오."
좌중의 모든 사람이 깜짝 놀랐다.
"이리 들여라!"
계 낭자도 의아스레 손짓을 보냈다.
배첩을 꺼내 읽으면서, 계 낭자의 얼굴 표정이 차츰 심상치 않
게 바뀌었다.
"이걸 어디서 건네 주더냐?"
그녀는 들뜬 목소리로 물었다.
"아뢰옵니다. 제일루(第一樓) 산문 바깥에서였습니다."
"그럴 수가 있나? 동하장(東下莊) 연놈들은 어째서 이들을 발견
하지 못하고 통과시켰단 말인가? 연도에 고정 매복초소 놈들도 다
죽었단 말이냐?"
"제자는 모르옵니다."
"몇 사람이나 왔더냐?"
"두 분이옵니다."
"명함에는 일곱 사람의 이름이 적혔는데, 그럼 나머지 다섯은?"
"전령의 말로는, 사부님께서 접견을 허락하시면 나머지 분들도
현신(現身)할 것이라고 합니다."
"좋다, 객관으로 모셔 들여라! 거기서 만나보겠다."
"분부 받드오리다."
"어째서 영락장주가 나타났을까? 그 사람, 완산으로 돌아가지
않았나?"
"허어, <단혼원앙>의 소식통이 먹통일세 그려 !"
장추산이 중얼거렸다.
"귀신도 모르게 중추 심장부까지 기어 들어왔다면, 그 친구는
위세를 과시하러 온 거야. 참말로 속담에 '오는 놈치고 착한 놈
없고, 착한 놈은 얼씬도 않는다' 더니, 그 말이 과연 정답일세.
여봐요, 계 낭자! 당신네는 벌써 한 수 지고 들어갔어. 그 명함을
안 받을 수도, 받을 수도 없게 되었지 뭐야? 이거 참말 골치 때리
게 생겼군 그래!"
"흥! 일곱 명쯤이야 뭐 대단하다고 골치를 썩여? 당신, 영락거
사를 너무 추켜세우지 말라구요!"
계 낭자는 식탁을 밀쳐내고 일어섰다.
"동생들, 손님 맞이할 준비를 갖춰! 우리도 상대방에게 약한 꼴
을 보일 수 없으니까."
"당신네들 다 나가시구료, 난 아직도 배 좀 더 채워야겠어 !"
장추산은 식탁 앞으로 바짝 붙어 앉더니, 곁에 사람이 있으나
없으나 염치 불고하고 아귀적아귀적 고기 뼈다귀에 붙은 살점을
뜯기 시작한다.
시녀 둘만 남아서 포로들을 감시할 뿐, 대청 안은 조용해졌다.
"그 개 같은 늙은이가 뭣 때문에 왔을까요?"
안춘이 잔뜩 긴장해 가지고 속삭여 물었다.
"우리 때문에 왔지. 틀림없을 거요."
장추산은 단정적으로 대꾸했다.
"우리 처지가 더 위험해진 거 아니에요?"
"어쩔 수 없는 노릇이지."
"우리 도망쳐요!"
안춘이 귀에 입술을 찰싹 붙이고 소근거렸다 .
"난 영락거사를 만나 봐야겠어. 도대체 무슨 의도로 왔는지 알
아내고 싶어. 당신 먼저 떠나구려. 내가 그려준 지형도를 기억하
고 있소?"
"당신이 안 가면 나도 안 떠나요."
안춘은 정색을 하고 말했다.
"나는 죽어도 당신하고 같이 죽는다는 것을 기억해 줬으면 좋겠
어요."
"소춘, 그러면 안 돼 !..."
"난 이미 다른 사람들한테 당신의 정부(情婦)로 찍힌 몸이에요.
그러니까 함께 죽는 거야 당연하잖아요? 난 당신 의견을 더 이상
안 들을래요. 이건 내 진정으로 하는 말이에요!"
단혼장은 길다란 산등성이에 자리 잡고 있다. 이 산비탈은 장산
(長山) 계곡과 마림(馬林) 계곡을 좌우로 끼고 너비 3리 남짓 펼
쳐졌는데. 그 동쪽으로는 연호(練湖)의 상호수와 7, 8리 거리를
두고 위치했기 때문에 꽉 막힌 절지(絶地)는 아닌 셈이다.
이 지역은 나무숲이 울창하고 풀섶도 아주 우거진데다 탁 트인
아래 세상을 훤히 내려다 볼 수 있어서, 침입자가 어떤 방향으로
접근하든 간에 일찌감치 매복초소의 감시에 걸려들게 되는 지형을
이루었다.
이런 천험(天險)의 수비 지역은 또 인공 건축으로 보완되어서,
단혼장을 중심으로 동서남북 사면 1리 밖에 장원을 한 채씩 세워
상호 지원할 수 있는 태세를 갖추었을 뿐더러 그 아래쪽에 지하
통로를 적지 않게 뚫어 놓고 매복 기관장치를 광범위하게 설치해
서 방어망의 부족을 메꾸어 놓았다.
강호상에 소문이 자자한 <단혼원앙진>(斷魂鴛鴦陣)은 바로 이러
한 매복 기관장치를 위주로 하고 여기에 병력을 곁들여서 장원 안
팎의 전체적인 방어망을 구축해 놓은 것이었다. 매복기관이 일단
작동되면, 미혼독향이 전 지역에 안개처럼 깔려 사람이 직접 나서
서 막을 필요도 없고, 단지 몇몇 졸개만 미끼로 출동시켜서 침입
자를 그 지역에 끌어들이면 충분했다.
그렇기 때문에, 최근 10여 년 이래 단혼장은 침입자들의 습격을
숱하게 받고 적지 않은 교란에 시달렸으면서도 시종 무사태평할
수 있었고, 장산 일각에 우뚝 서서 강호 친구들의 마음속에 신비
절경으로 자리잡고, 그 이후로는 감히 단혼장을 넘보거나 생트집
을 잡으러 나타나는 사람이 갈수록 줄어들었던 것이다.
드나드는 통로라곤 작은 오솔길이 한 가닥, 그것도 반드시 동하
장을 거쳐야 한다. 그러니까 동하장은 네 군데 전진초소 중에서도
<단혼원앙>의 소굴을 출입하는 필수적인 문호가 되는 샘이다.
호숫가에는 부두가 설치되어, 소형 선박이 호수 동북안 육로상
으로 오는 손님을 인계 받아 모셔올 때 이용한다. 배는 모두 내호
(內湖)에서만 운항하는 대보선(代步船)일 뿐, 호수 바깥 수로에
나가는 법이 없다. 물길은 모두 갑문의 관제를 받기 때문에 통행
하지도 못하려니와, 또 운하를 거슬러오는 선박들도 상호에 직접
들어 오지도 못하게 되어 있다.
헌데 단혼장을 방문한 영락거사 일행 7명은 무슨 재주를 피웠는
지 동하장의 관문을 거치지 않고 직접 제일루 산문까지 들어와서
명함을 건넸다. 그리고 주요한 인물 다섯 명은 어디 숨었는지 얼
굴도 내밀지 않았다.
가령 단혼장 측에서 명함을 받아들이지 앓고 일껏 찾아온 손님
에게 접견을 거절할 경우, 강호상에서의 명성이나 항렬, 영예로
보아서 <단혼원앙> 다섯 자매보다 훨씬 높은 영락거사의 위신과
체면을 한꺼번에 떨어뜨리는 수작이 되는 셈이다. 그러길래 방문
객 일행이 노출을 삼가고 이쪽 반응을 보아 행동하려 한 것이다 .
동시에 그것은 위세를 과시하는 태도이기도 했다. 다시 말해서,
만약 접견이 허락되지 않을 경우, 그쪽도 어디에서든지 불쑥 나타
나서 기습하겠다는 위협적인 압력을 보인 것이다.
계 낭자는 일개 장원의 주인, 현재 상황은 그녀로 하여금 접견
을 거부하지 못하도록 만들고 있다. 위세 강한 손님이 주인을 억
압하듯 지금 영락거사가 보이는 경고성 시위에 대해, 그녀는 손님
의 도전을 받아 주지 앓으면 안 될 처지에 몰렸다.
객관(客館)이라고 하면 귀한 손님을 모시는 곳이다. 주인은 장
원 규칙에 따라 객관에서 손님과 회견하지 않고, 반드시 중간 안
내자가 나와서 손님을 장원 안채 대청으로 인도하여 주인과 만나
게 하는 절차를 밟는다.
허나 오늘만큼은 예외였다. 계 낭자는 이리떼를 집안 깊숙히 끌
어들일 의사가 없는 터라, 장원의 주요 인물 도합 5남 3녀를 거느
리고 직접 객관으로 나가서 손님을 맞이했다. 어떻게 보면 손님을
융숭하게 맞아들이는 것 같지만 실상은 손님의 방문을 달갑게 환
영하고 싶지 않다는 의사 표시도 되었다 .
이래서 양측의 도박귀신들은 피차 승부 패를 감추고 대면했다.
숨어 있던 영락거사 측의 다섯 명도 어느 새 어디선가 모습을
드러냈다.
객관의 분위기는 화창했으니, 그 뒷면에선 화약 냄새가 짙게 풍
겨나오고 있음을 알 만했다.
피아간에 먼저 인사를 나누고 각각 일행을 소개하는 단계에서부
터 주객 쌍방은 모두 속으로 찔끔 놀랐다.
영락거사 측은, <석파>(石破) 정호(鄭虎)와 <경천>(驚天) 양표
(楊彪)라 일컫는 그의 측근 시종 두 사람을 제외하고, 나머지 네
명의 정체는 이러했다.
<지기자>(知機子) 현현연기사(玄玄煉氣士), 이 분은 무림계에서
도 명망이 자못 높으신 행각도인(行脚道人)이시다.
<복룡나한>(伏龍羅漢) 담비존자(曇非尊者), 오래 전부터 친구들
의 존경을 한몸에 받아온 불문 고승으로서, 일찍이 오대산을 크게
뒤엎었던 <취나한>(醉羅漢) 제마대사(提魔大師)와 더불어 <우내
쌍나한>으로 일컫는 분이다.
그러나 흑도 친구들은 이 두 나한에 대해서 뼈에 사무치도록 원
한을 품고 있다. 왜냐? 두 행각승은 발길 닿는 곳마다 흑도 친구
들만 전문적으로 골라서 공갈 때리거나 사기 쳐서 금품을 빼앗고
목적이 미수에 그칠 때는 가차없이 독수를 써서 이른바 '복마제악
' (伏魔除惡)이란 명분을 내세워 뿌리째 제거해 버리기 일쑤였다.
그 결과, 진정한 의협 영웅들은 이 두 스님과 왕래하는 것을 부끄
럽게 여기곤 했다.
<신필수사> (神筆秀士) 남사해(藍四海), 이 선비께선 천하 4대
신필 가운데 한 분이시다 .
천하 4대 신필이라면, 붓처럼 생긴 병기를 써서 강호 무림계의
영웅으로 일컫는 풍운아 네 사람을 일컫는다. 하지만 이들 모두
정파나 사파의 기분을 적지 않게 건드리는 이른바 '미치광이 선비
' 들이라, 성미도 급하고 변덕이 심해 희노애락이 죽 끓듯 뒤바뀌
는 괴물로 평판이 나 있다.
<광풍검객>(狂風劍客) 민검홍(閔劍虹), 이 사람은 관중(關中)에
서도 으뜸가는 검술의 명가다. 한 번은, 스스로 문파를 세우고 제
자들을 모아 들여 건방지게 '신검문' (神劍門)이란 간판을 내건
적이 있었다. 그런데 20년 전, 황산(黃山)에서 왔다는 <강남낭
객>(江南浪客) 서백공(舒百空)이 신검문에 찾아와서 목숨을 걸고
검술 대련을 하자고 도전, 그가 자랑하는 신검문 제자 12명을 깡
그리 때려눕히고 그의 왼뺨에 일검을 그어서 평생토록 지워지지
못할 상처 자국을 남겨 놓고 떠났다. 이로부터 신검문을 간판을
내리고 안개 구름처럼 스러지고 말았던 것이다 .
이들 네 사람으로 말하자면, 무림계에서 혁혁한 명성을 떨치는
선배 명숙이요. 또한 정(正)과 사(邪)를 가려내기 힘든 무서운 미
치광이들이라, 단혼장주 계 낭자가 속으로 놀라는 것도 무리는 아
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패거리들을 상대하기에는 실로 꺼림
칙한 느낌을 지워 버릴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럼 계 낭자 측 진영은 어떤가? 우선 <단혼원앙>의 우두머리인
그녀 자신과 둘째 두목 패령고, 넷째 두목 완 낭자가 있다.
뒷줄에 위치한 다섯 남자는 모두가 반백의 나이를 넘긴 나이였
으나, 그들 역시 영락거사 측의 가슴을 철렁하게 만들고도 남을
만한 고수들이었다. 사실 영락거사도 <단혼원앙>이란 신비스런 여
인의 조직에 이토록 굳세고 강한 진용을 보유하고 있을 줄은 상상
조차 못한 터였다.
이들 다섯은 강호상에서 사마외도(邪魔外道)로 지목받거나 떠돌
이 들귀신으로 악명을 떨치면서, 강호 친구들의 가슴을 설레게 만
들고 영웅 호한들도 그 이름만 들으면 얼굴빛이 싹 변하고 심장
고동을 두근거리게 만드는 악당 패거리요, 흉조(凶烏)로 평판이
자자했다.
첫번째 인물은 강남의 사람 백정이라는 <강한인도>(江漢人屠)
상조경(常兆慶)이다. 둘째는 <음살>(陰煞) 기업(祁業), 셋째는
<규목랑>(奎木娘) 항량(項梁), 넷째는 <수화진인>(水火眞人) 도제
(道濟), 마지막으로 <남천산소>(南天山 ) 요평(饒平)이 있다.
이들 강호상에서 악명 높은 흉조들은 명분상으로 이 단혼장의
객경(客卿)이지만, 실상은 까다로운 도전자들을 전문적으로 처치
하는 호위병이라고 해야 알맞은 인물이다 .
따라서 영락거사의 명성이 너무 크고 높기 때문에 이들도 깡그
리 전면에 나서게 되었고, 기세 면으로 쌍방이 막상 막하의 형국
을 이룬 것이다.
이리하여 주인이나 손님, 어느 쪽도 과거 명성을 앞세워 상대방
의 기를 꺾어볼 여지도 없이 실력으로 맞서게 되었던 것이다 .
쌍방이 객투로 어수선하게 인사치레를 나누고 반잔의 차를 마시
고 났을 때, 객관 분위기는 점점 더 긴장감이 감돌고 화약 냄새도
갈수록 짙어졌다.
"속담에, '죄 없는 중생은 절간 부처님을 찾아뵙지 않는다' 했
소이다만...."
드디어 영락거사가 본론을 끄집어냈다. 말투에는 무림 호걸다운
위엄이 잔뜩 배어 있다.
"노부가 귀장을 방문한 것이 너무 창황중에 경솔한 일인 줄 잘
아오만, 부득이해서 그랬으니 아무쪼록 계 장주께서 널리 양해하
시기 바라오."
"좋으신 말씀!"
계 낭자도 무림계 사람다운 말투로 응수했다.
"영락거사로 말씀드리자면 강호상에서 항렬 높으신 선배요, 혁
혁한 무림세가(武株世家)로서 군웅들을 영도하시는 분이신데, 이
렇게 왕림하시다니 우리 단혼장으로선 실로 영광스런 일이 아닐
수 없소이다."
"계 장주, 과찬의 말씀을!..."
낙문 장주님께서 어렵게 왕림하셨는데 무슨 가르침을 내리실지
모르온즉, 용건을 밝혀 주시기 바랍니다. 소첩의 능력으로 되는
일이라면 태만하지 않고 받들어 모시고자 합니다."
"하하! 노부의 무례함을 받아 주신 점부터 감사를 드려야겠소이
다. 폐를 끼칠 일이 있어 찾아뵈었으니, 계 장주는 노부의 요청을
이뤄 주시기 바라오."
"소첩, 귀를 씻고 경청하겠사오니, 분부 내리시지요."
"나흘 전 귀 단혼장에 거래를 트러 온 사람이 있었지요? 혹시
노부가 잘못 알았는지 모르겠소만...."
"아니올시다. 분명히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의 목숨을 사겠다고?..."
"그렇습니다."
대답을 하면서도, 계 낭자는 속으로 깜짝 놀랐다. 과연 장추산
의 예측이 맞아떨어진 것이다.
"장추산?"
"바로 맞추셨습니다. <뇌신> 장추산이었습지요."
"놈이 내 못난 아들 영락 공자와 풀지 못할 원수라는 것도 알고
계시오?"
"확실히 그런 일이 있었군요. 하지만 소첩이 알기로는, 아드님
께서 장추산과 원한을 맺게 된 동기가 별로 떳떳치 못한 것이 아
닌가 합니다. 사실 장추산은 강남일지홍에 대해서 은원이라고 할
만한 감정도 지니고 있지 않았는데, 아드님께선 그녀를 핑계삼아
표면에 나서서 도발한 것이 아닙니까? 명분이 올바르지 못하면 그
말도 이치에 합당하지 못하다 했거늘, 남문 장주께서 아드님을 대
신해서 참견하러 나서시다니, 소첩이 생각하기로는 선뜻 수긍이가
지 앓는 일인 줄 아옵니다."
"계 장주, 애들 싸움이 어른 싸움 된다는 걸 모르시나? 아들 녀
석이 남한테 얻어터지면 자연 그 애비가 팔뚝 걷어붙이고 나설 수
밖에 !"
<강한인도> 상조경이 냉랭하게 쏘아붙였다.
"다음 말이야 들어보나마나 아니겠소? 계 장주."
그 말을 듣고 영락거사 측의 음원군 <지기자> 현현연기사가 좀
이 쑤셨는지 한마디 끼어들었다.
"네놈이 뭔데 참견이냐? 흥! 아니꼬운 것!"
이러니, 쌍방의 허례허식은 삽시간에 뚜렷한 적개심으로 돌변하
고 말았다.
<지기자>의 면박에 <강한인도>가 탁자를 내리치면서 벌떡 일어
났다. 마침내 도화선에 불을 당긴 것이다.
"상숙(常叔), 참으세요."
계 낭자가 재빨리 <강한인도>의 발작을 제지하고 나섰다.
"어차피 우리는 주인이니까 참을성 있게 손님 쪽 말씀을 끝까지
다 들어 봐야 하지 않습니까? 남문 장주님, 방문하신 용건을 간단
명료하게 일러 주실 수 없겠습니까?"
"좋소, 노부도 솔직하게 단도직입으로 얘기하는 걸 좋아하니까,
그럼 한마디로 요구를 제기하리다. 그 장가 놈을 내게 넘겨 주시
오. 노부가 데려가서 쓸데가 있으니 말이오."
"어허, 바로 그 얘기로군요!"
계 낭자는 조금도 놀라거나 당혹스러운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
이것이 바로 강자의 뻔뻔스런 말투요 상판대기, 영락거사가 바
로 무림계에서 최강자로 손꼽히는 인물이니 만큼 당연한 일이 아
니겠는가 말이다.
"사소한 요구니까, 계 장주도 별로 곤란하게 여기지 않으시리라
생각되는데, 어떻소?"
"곤란이 없다고는 할 수 없지요. 크나 작으나 곤란하기는 마찬
가지니까. 남문 장주는 일대 호협이실 터, 우리 단혼장의 규칙쯤
은 알고 계시겠군요?"
"알고 있소, 우리는 같은 길을 걷는 사람이니까."
"같은 길을 걷는다?"
"귀하의 단혼장은 사람을 잡아다가 값을 매겨서 팔아먹지 않소?
노부도 같은 영업을 한다고 볼 수 있지. 다른 점이 있다면, 거래
하는 물건이 똑같지 않다는 것뿐이외다."
"옳으신 말씀! 남문 장주께서도 전문가다운 말씀을 하시는군요.
어느 한 개인이나 조직에서 명분과 이익을 한꺼번에 얻기 위해서
는 반드시 어떤 희생이라도 지불할 필요가 있겠지요. 천하 만사가
복잡다단하게 얽혔다고는 하지만, 실상을 말하자면 간단하기 짝이
없습니다. 우리 강호 사람들이 시체로 산을 쌓고 핏물로 강을 이
루는 목적은 오직 한 가지, 아주 단순히 명분과 이익을 위해서 아
닙니까? 그렇기 때문에 소첩은 남문 장주께서도 우리와 똑같은 길
을 걷은 분이라는 사실을 믿습니다. 인신을 매매하는 수단과 방식
에서 약간 차이가 날 뿐이겠지요. 그렇다면 남문 장주께서는 이토
록 어려운 걸음을 하지 마셔야 옳았습니다. 더구나 이처럼 규칙을
깨뜨리는 거북스런 요구도 제기하지 말아야 하겠고 말씀입니다."
"어떠한 행동 규칙에도 모두 예외라는 것을 두는 법이오."
영락거사는 음침하게 웃어가며 응수했다.
"계 장주, 안 그렇소?"
"단혼장에는 예외를 두어 본 적이 없거니와, 또 어떤 경우에도
예외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남문 장주께서도 장추산이 물주가 정
해진 거래 상품이라는 사실을 알고 계실 텐데요?"
"들어 알고는 있소."
"우리 단혼장은 물주에게 선금조로 벌써 은화 6천 냥을 받았습
니다. 이제 물주가 잔금을 가져오면 물건을 내주어야 합니다. 남
문장주, 입장을 바꿔 놓고 생각해 보십시오. 이럴 경우, 장주께선
어떻게 일을 처리하시겠습니까? 이 거래는 단혼장의 신의와 명예
가 걸렸을 뿐더러 명분과 이익이 한꺼번에 관련된 극히 심각한 일
이란 말씀입니다."
"그것은 당신네 문제요."
영락거사가 무거운 목소리로 선언했다.
"또 이 늙은이의 신의와 명예도 걸려 있을 뿐더러 이 늙은이의
명분과 이익에도 관련되는 일이라는 사실도 알아 주셔야겠소!"
"그러시다면 더 좋은 말로 얘기할 건덕지도 없겠습니다 그려."
계 낭자의 음성도 침중해졌다.
"계 장주는 지금 노부의 요구를 거절하는 거요?"
"단연코 거절하겠습니다!"
"그대가 노부를 극단적으로 몰아가는구료."
"천만의 말씀! 정반대올시다. 지금 귀하께선 우리 단혼장을 극
단으로 치닫게 몰아붙이고 계십니다. 이제 유일한 해결책은 강호
규칙에 따라서 결판내는 길밖에 없습니다. 지금부터 단혼장은 사
흘 동안 여러분을 기다리겠습니다. 시간이 지났으니 더 모시고 있
을 수 없겠군요. 동생들, 손님을 배웅해라!"
"잠깐!"
영락거사가 탁자를 밀어내고 일어섰다. 호통치는 소리와 기색이
매섭게 바뀌었다.
"노부는 사흘씩이나 기다리고 싶지 않소!"
"아하! 그러시다면 이게 방문이 아니라 곧바로 쳐들어오신 것이
로군요?"
계 낭자는 싸늘하게 웃어가면서 문 바깥쪽으로 손을 내밀어 보
였다.
"남문 장주, 왜 진작 그렇다고 말씀을 안 해주셨습니까? 객관
앞뜰이 제법 널찍하니, 여러 명가문의 솜씨를 보이시기에 충분하
겠군요. 자, 그럼 우리 뜨락으로 내려서서 뵙기로 할까요? 손님들
부터 어서!"
쳐들어왔다 해도 이것은 산문까지 들쑤시고 기어든 이리떼들이
다. 이제는 남의 집 안방까지 들어온 몸이니, 주인이나 손님측이
나 모두 각자 신통력을 발휘해서 너 죽기 아니면 나 죽기로 싸워
야 결판이 날 형편이 되었다.
강호 무림계의 어떤 문파든 간에, 이렇듯 방문을 핑계삼아 산문
안쪽 깊숙히 쳐들어 오는 못된 손님을 뼈저리게 미워한다. 또한
불청객이 악의를 품은 줄 뻔히 알면서도 주인측으로 하여금 거절
하지 못하게 만들어 심장부까지 기어들어 왔다면, 이 못된 손님
하나하나가 산문을 송두리째 두려뽑을 만한 막강한 실력의 소유자
일 터, 그 문파는 씨암탉 한 마리 강아지 한 마리 온전하게 남아
있지 못하고 푸드득 컹컹, 날고 뛰어 도망치지 않을 수 없게 된
다.
이런 경우는 한마디로 두 눈 멀거니 뜨고 도적을 집안에 끌어들
인 격이나 마찬가지, 그 다음부터는 안방에서 강도와 목숨 걸고
싸우는 길밖에 없다, 강도들이 최후에 이기든 다시 쫓겨나든 간
에, 무엇보다 집안 식구들과 세간 살림이 엄청난 재앙을 당할 것
은 두말할 나위도 없을 것이다.
첫댓글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