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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바다
단혼장은 서쪽에서 동쪽을 바라보고 들어앉았다. 그래서 동하장
이 그 출입문의 역할을 맡고 있다.
서쪽으로는 장산의 또 다른 산줄기가 뻗어나가고 그 아래에 쌍
차하라는 작은 하천이 한 가닥 흐른다. 서하장은 바로 본채의 배
후를 지키는 보루로서, 그 부근에 길도 없거니와 그리로 접근하려
면 반드시 쌍차하를 건넌 다음, 가파른 산등성이 고개를 기어 넘
어야만 한다.
서하장에 설치된 전망대 초소의 파수꾼은 누군가 대나무 뗏목으
로 쌍차하를 건너오는 무리들을 발견하고, 신호용 폭죽을 터뜨려
본채에 급보를 알렸다.
영락거사측 사람들은 동하장 쪽으로 접근해 왔었다. 그렇다면
단혼장은 이제 정면과 배후 양면으로 적을 맞는 불리한 상황에 처
했다는 얘기가 되는 셈이다.
남쪽 장산 계곡에서도 한 패거리가 마른 대나무를 베어 뗏목을
엮고 다시 기다란 밧줄을 강물 위에 가로걸쳐 놓고, 뗏목에 오른
채 밧줄을 잡아끌면서 너비 10여 장이나 되는 계곡의 흐름을 건너
오고 있었다.
북하장 근처에도 정체를 알 수 없는 침입자들이 도둑고양이처럼
슬금슬금 접근해 오고 있었다.
이야말로 사면초가(四面楚歌), 단혼장은 각 방향으로부터 군웅
들의 습격을 받는 초점이 되고 말았다. 성곽 아래까지 적군이 밀
려들었으니, 일대 겁난이 코앞에 닥친 셈이다.
서하장으로부터 접근하는 패거리의 진격 속도가 제일 빨랐다.
단혼원앙의 막내 두 낭자가 방어진을 가동시키려고 부랴부랴 서
하장에 도착했을 때, 날렵한 가죽옷 경장 차림의 남녀 15명은 이
미 서하장 앞쪽 시든 단풍나무 숲까지 다다른 뒤였다.
"뎅!..."
종소리가 한 번 울리더니, 단풍나무 숲 정면의 메마른 풀섶에서
대문짝만한 나무 패 일곱 개가 장벽처럼 천천히 솟구쳐 올랐다.
그 널판에는 붉은 글씨로 커다랗게 경고문이 한 자씩 적혀 있다.
<단혼장은 금역, 함부로 들어오는 자는 죽음뿐이다.>
패거리를 이끈 침입자의 선두는 환갑의 나이를 넘긴 노인, 그는
코웃음을 한 번 치고 손을 번쩍 휘둘렀다.
신호가 떨어지자, 열다섯 남녀들은 좌우로 썩 갈라서더니 일렬
횡대로 그 자리에 엎드렸다.
잠시 후, 바짝 마른 풀섶 열다섯 군데에서 동시에 불길이 치솟
았다.
바람결은 서북풍, 단풍나무 숲도 시들고 풀섶도 메마른 터라 불
길이 닿기가 무섭게 걷잡을 수 없이 타오르기 시작하더니, 잠깐
사이에 들불처럼 맹렬한 위세를 떨치면서 거침없이 서하장 쪽으로
번져 내려갔다.
제아무리 막강한 위력을 자랑한다는 미향독진(迷香毒陣)도 닥치
는 대로 불태워 버리면서 밀려드는 들불 앞에서야 무슨 수로 배겨
낼 수 있겠는가? 배후로 침입한 자들은 이 점까지 미리 계산해서
준비를 갖추고 온 것이 분명할 터, 이들에게 그 어떤 위협의 경고
문도, 치밀한 방어진도 다 쓸데없는 헛수작이다 .
주인과 손님 양측이 객관 앞뜰에 내려가 싸울 태세를 막 갖추었
을 때, 단혼장 전역에 걸쳐 화재경보를 알리는 징 소리가 요란하
게 울려왔다.
계 낭자는 대경실색, 분노에 못 이겨 칼을 뽑아들고 전열 앞으
로 나섰다.
"영락거사, 이 비열하고도 염치 없는 늙다리 개 영감!..."
그녀는 이를 갈아붙이면서 욕설을 퍼부었다.
"내 하늘에 맹세코 네놈과 이 세상에서 양립하지 않을 테다!"
"으하하핫!..."
미치광이의 웃음소리가 쩌렁쩌렁 울리면서, <복룡나한> 담비존
자가 먼저 선장(禪杖)을 앞세워 땅바닥을 '쿵!' 찍더니, 범처럼
무서운 기세로 뛰쳐나왔다. 질풍같이 들이닥친 쇠몽둥이는 무시무
시한 기세로 휘둘리면서 다짜고짜 계 낭자의 정면부터 후려쳤다.
싸움판에서야 누구나 먼저 선수 치는 놈이 강자일 터, <횡소천
군>(橫掃千軍)의 초식에 만군의 위력이 얹힌 첫 공세는 비상하리
만큼 맹렬했다 .
그것을 신호로, 일껏 전열을 갖추고 늘어섰던 싸움터의 상황은
삽시간에 난장판으로 돌변하여 피아 쌍방이 미리부터 눈여겨 둔
상대를 찾아 무섭게 어울리기 시작했다.
느닷없이 기선을 제압당한 계 낭자는 미처 방어초식을 발출할
기회도 얻지 못한 채 반사적으로 <어룡반약>(魚龍反躍)의 초식으
로 몸뚱이를 뒤로 솟구쳐 공중제비를 돌아가면서 재빨리 물러나기
시작했다.
"으흐흥!"
<복룡나한>도 형체에 그림자 따라붙듯 바싹 뒤쫓으면서, 무지막
지스런 쇠몽둥이를 상단으로 훑어 올렸다.
그 좌측방, 그리 멀지 않은 지점에서는 <수화진인> 도제가 <신
필수사>의 판관필 공격을 받고 있었다.
<수화진인>은 곁눈길에 계 장주가 급박하게 쫓기는 광경을 발견
하고 돌연 자기 상대를 뿌리쳤다. 그리고 땅바닥에 몸뚱이가 닿도
록 찰싹 엎드린 자세로 뒹굴어 <복룡나한>의 신변 1장 남짓한 거
리까지 접근하더니, 번개 벼락 치듯 자신의 병기 수화곤(水火根)
손잡이 부분을 비틀어 꺾었다.
다음 찰나, <복룡나한> 쪽으로 볼쑥 내밀어진 곤봉 끄트머리에
서 수정처럼 맑은 물 한 줄기가 화살같이 쏘아져 날아갔다.
"으와아아!-----"
<복룡나한>의 입에서 가슴이 섬뜩하도록 처절한 비명이 터져나
왔다. 물화살이 좌반신에 닿는 순간, 옷자락이 눌어붙으면서 '푸
지직!' 살 타는 소리가 들렸다. 콧구멍이 꽉 막히도록 강렬하면서
도 지독스러운 냄새에, 사람들은 현기증을 일으키고 푸르른 연기
가 사면 팔방으로 흩날리는 가운데 <복룡나한>의 몸뚱이에서는 중
화상을 입었을 때처럼 물집이 마구 터져 나왔다 .
잠깐 사이에, 용을 굴복시킨다는 이 나한승께선 한갓 누린내 풍
기는 고기 덩어리로 변하고 말았다.
같은 순간, <신필수사>의 괴성필(魁星筆) 붓끝에서 한 가닥 전
망(電芒)이 쏘아져 나오더니 <수화진인>의 왼쪽 겨드랑이를 꿰뚫
고 들어갔다. 그 순간에 수화곤도 등뒤로 날아갔다. 후려치듯 내
던지는 힘도 놀랍기 짝이 없어, 사람들이 곤봉의 형체조차 알아보
지 못할 만큼 쾌속한 기세로 날려보낸 것이다 .
<수화진인>을 뒤쫓는 <신필수사>의 동작도 재빨랐다. 그는 중도
에서 괴성필에 장착된 강침(鋼針)을 한 대 쏘아 공격을 퍼부으면
서 추격을 계속했다.
그러나 수화곤이 뒤로 날아오는 것을 발견했을 때, 그는 미처
회피동작을 취할 여유가 없었다. 그에게 있어서는 괴성필을 급히
휘둘러 본능적으로 뿌리치는 것만이 할 수 있는 조치의 전부였다.
"콰광!"
괴성필이 곤봉 중단 부위에 격중하는 찰나, 돌연 그 앞머리 쪽
이 대폭발을 일으켰다. 폭발하는 광채에 모든 사람들은 눈이 부셔
일순 장님이 되었고, 몸을 태울 정도로 뜨거운 기류에 휩쓸렸다 .
<수화진인>이 땅바닥에 털썩 쓰러져 버둥거리는 동안, <신필수
사>의 몸뚱이는 산산조각으로 부서져 휘날리고 있었다.
무시무시한 폭발 위력은 3장 범위 안에서 악전 고투를 벌이던
여섯 사람을 2장 바깥으로 날려보내 곤두박질치게 만들었다. 이들
은 얼굴이며 머리통에 흙먼지를 흠뻑 뒤집어쓴 채 다시 일어섰으
나, 너무나도 혼비백산을 한 나머지 재격돌할 투지도 잃었고, 또
상대방도 금방 찾아낼 수가 없었다.
싸움터에서는 단 한 번의 접촉만으로 생사가 결판나게 된다. 여
기서는 너 죽기 아니면 내가 죽어야 하는 판국이다 .
영락거사는 한 자루 장검으로 <강한인도> 상조경의 육중한 망나
니 칼과 단혼장의 여제자 세 사람을 맞아 역전 분투했다. 1대 4로
맞붙은 대결에서도 그의 기세는 산악이라도 삼킬 듯 의연했다. 잠
깐 사이에 그가 두 명의 여제자를 찔러 죽이고, 사람 백정 <강한
인도>마저 목숨이 왔다갔다하는 위기로 몰아넣었다.
그러나 <단혼원앙>의 둘째 패령고가 달려와 미혼독향으로 지원
해 준 덕분에 영락거사와의 싸움판은 가까스로 안정세를 되찾게
되었다.
영락거사측은 애당초부터 만반의 대비책을 강구하고 온 터라 미
혼독향 따위는 마음에 두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섣불리 방심할 수
도 없기 때문에, 지나친 분량을 들여마시지 않으려고 조심하다 보
니, 우세를 차지하고서도 손발이 묶인 듯 거추장스런 기분을 어쩌
지 못한 채 좀처럼 결정타를 먹일 기회를 찾아볼 수 없어 조바심
에 애가 탔다.
동하장 쪽에서도 남녀 3, 40명이나 되는 용원군이 함성을 지르
면서 달려와 계 낭자측에 가담했다. 이들은 두 명이 1개 조씩 원
앙진을 결성하고 밀물처럼 공세를 퍼붓기 시작했다.
거의 때를 같이해서, 외곽으로부터 살기찬 함성이 하늘을 뒤흔
들면서 복면한 고수 20여 명이 장원 대문을 돌파하고 싸움터로 쇄
도해 들어오더니, 영락거사 패거리와 때맞춰 합류했다.
다시 기세를 떨친 습격자들은 가슴이 떨리도록 무서운 역공세를
재개하여, 단혼장 사람들을 무차별로 박살내기 시작했다. 죽어가
는 자의 비명 소리와 신음성이 여기저기서 꼬리를 물었으나, 공격
측의 기세는 뇌정 만균(雷霆萬鈞), 전체 국면을 완전히 장악할 때
까지 쉬지 않고 계속되었다.
침입자들의 실력은 주인측을 훨씬 능가할 만큼 굳세고 막강했
다. 최초 격돌에서, 단혼장측은 단 한 차례 정예병을 투입하고서
상당한 전과를 올렸으나, 얼마 안 있어 통제력을 완전히 상실하는
국면으로 몰리지 않으면 안 되었다.
계 낭자는 마침내 동서남북 네 보루를 포기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결단을 내리자, 그녀는 자기네 사람들을 본채 안으로 퇴
각시켜 지하동굴 통로를 이용해서 재차 반격을 시도하려 했다. 그
러나 강적이 앞뒤에서 퍼붓는 협공을 막아낼 수도 없거니와, 본채
마저 불바다에 휩쓸려 도저히 수습할 방도가 없었다. 제아무리 교
묘하게 설치된 매복기관이라 하더라도 불길 앞에서는 맥을 쓰지
못하게 된 것이다.
이윽고 단혼장 사람들은 적의 추격을 뿌리치면서 모두 지하로
잠복했다.
영락거사 패거리는 고수들을 두 패로 나누어 단혼장 외곽에 포
위망을 깔아 놓고 불구덩이 속에서 탈출해 나오는 사람을 차단,
격살하기로 작전을 변경시켰다.
그러나 이들은 실망하고 말았다. 단혼장 본채가 불바다 속에 완
전히 타서 무너질 때까지 기다렸어도 탈출해 나오는 사람이 하나
도 없었던 것이다.
영락거사는 그것으로 단념치 않았다. 그는 전체 병력을 다섯 패
로 나누어 단혼장 부근 10여 리 일대의 산악지대와 숲속을 샅샅이
수색하도록 풀어보냈다. 그는 단혼장의 씨를 철두철미하게 섬멸하
여 후환을 없애기로 맹세했다. 그리고 또 장추산을 잡아 내지 않
는 한 물러나지 않겠노라고 단단히 맹세했다.
은화 5만 냥의 행방이 이놈의 한 몸에 달렸는데, 어찌 그냥 내
버려 둘소냐?
그는 울분에 못 이겨 야수처럼 으르렁거리면서 자기 자신도 측
근 호위대 여섯 명을 직접 거느리고 온 산악 들판을 헤매가며 이
잡듯 샅샅이 뒤져나가기 시작했다.
사람이 일단 흩어지면 이것을 다시 모아들이기란 좀처럼 쉽지
않은 법이다. 산악지대는 아득하니 넓기만 한데다, 동쪽으로는 계
곡의 하천 수십 갈래가 종횡무진으로 흐르고 있다. 뿐만 아니라
나무숲이 시야를 가리우기 때문에 서로 위급 상황에 호응하기도
여간 곤란한 것이 아니다.
얼마 안 있어서, 영락거사의 다섯 패거리는 자기네가 도대체 어
느 곳에 위치해 있는지, 동료들이 어디쯤 있는지조차 모르는 상황
이 되고 말았다. 수색을 하기는커녕 그저 미치광이 야수떼처럼 우
왕좌왕 산등성이 계곡을 헤매고 있을 따름이었다.
땅 밑 세상은 지옥이 아니라 또 다른 별천지였다 .
단혼장을 10여 년 동안 경영하면서 다섯 원앙들은 지하세계를
쉴새없이 개척하고 확장하고 시설도 끊임없이 개선하여, 지하 통
로망은 거미줄처럼 깔렸을 뿐만 아니라, 방벽도 중첩첩(重疊疊),
문호도 겹겹으로 설치해 놓았다. 곳곳마다 거실이 있는가 하면 동
굴도 숱하게 뚫렸고 어느 곳에 발을 들여 놓든 미혼매복진이 설치
되어, 물정 모르는 사람이 함부로 침입했다가는 평생 죽도록 그
안에 갇혀 지내야 할 판이다.
계 낭자의 신변에는 겨우 패령고와 셋째 화 낭자가 남았을 뿐이
었다. 다섯 자매 가운데 둘을 잃어버린 것이다.
그녀의 호위병 중에는 <강한인도> 상조경와 인상 고약스레 생긴
꺽다리 <남천산소> 요평이 남았다. 그밖에 객경으로 머물고 있는
네 명과 여제자 다섯, 남자 시종 세 명이 있을 따름이다.
귀빈실에 남아 있던 여제자 다섯 명도 급보를 받자, 장추산과
안춘을 부축해 데리고 장주와 합류하기 위해 땅굴 속으로 뛰어 들
어갔다. 이들 포로 두 사람은 경맥을 제압당한데다, 등쪽에도 생
선의 가시침으로 근육활동이 제한을 받기 때문에 보통 다리 걸음
으로 움직이기에는 별 어려움이 없지만 촉박하게 뛰어야 할 때는
다른 사람의 도움이 필요했다.
단혼장 전체 인원 1백20여 남녀 가운데, 죽지 않은 사람들이 속
속 지하 땅굴로 도망쳐 들어왔다. 살길을 찾아서 딴 데로 내뛴 자
도 적지 않았다.
계 낭자 일행 10여 명은 캄캄한 어둠 속 지하 통로를 급하게 치
달린 지 얼마 안 있어, 우측방으로 접어들어 제법 널찍한 밀실에
당도했다. 시종들이 등불을 밝혀 놓는 동안, 여제자들은 부근 통
로를 조심스럽게 수색했다.
장추산과 안춘은 벽 모서리에 앉히고, 두 명의 여제자가 곁에
서서 감시를 맡았다.
밀실 안에는 목제 침대와 탁자가 마련되었을 뿐만 아니라, 안칸
에는 물과 식량까지 저장되어 있고, 부엌과 세면실, 뒷간도 갖추
어져 있는 것이 비상시에 은신처로 사용할 수 있도록 꾸며진 곳임
이 분명했다.
놀란 분위기가 진정되자, 예서 제서 의견이 구구하게 쏟아져 나
오기 시작했다. 낙천적인 의견도 나오는가 하면, 비관적인 견해도
상당했다. 하지만 어느 것 하나 대세를 만회하기에는 아무 짝에도
소용이 없는 것이었다.
"영락거사가 이토록 헛된 명성만 날린 잡놈일 줄야 정말 생각도
못했어 !"
<강한인도> 상조경이 어금니를 으스러져라고 소리나게 갈아붙이
면서 투덜거렸다.
"저런 야비하고 염치 없는 짓을 저지르다니, 이래 가지고 어떻
게 강호 무림계의 영도자 노릇을 해왔다는 거야?"
"상 형. 당신이 생각 못할 일이 어디 이것뿐이겠소? 아직도 수
두룩하지 !"
<남천산소> 요평이 구리방울 눈을 부릅뜨고 빈정거렸다. 말투에
는 세상을 조롱하는 기미가 짙게 서려 있다 .
"그게 바로 영락거사가 성공한 밑천이외다. 야비하고 염치 없고
마음씨 독하고 손속 매섭고... 이게 모두 패왕 재사들이 성공하는
필수 조건이지. 당신이나 나처럼 마음 모질고 손속이나 매운 사람
들은 고작 이류급, 세상 물을 더럽히고 사는 저질밖에 안 된다 그
런 말이오."
"당신들, 이제 두고 보시구려 !"
객경 중의 한 사람, <관락일도>(關洛一刀) 동원(童遠)이 갈증이
난 듯 찻잔을 단숨에 비워 버리고서 한마디 끼어들었다.
"그 잡놈은 낯짝 두껍게도 강호상에 이렇게 선포할 거요, 무림
의 도의를 어떻게 지켰다느니, 천하의 협사들을 어째서 소집했으
며 또 <단혼원앙>을 어떻게 뿌리째 뽑았다느니, 단혼장을 불태워
서 인신매매로 이 세상에 재앙을 끼친 무리들을 어떻게 제거했다
느니, 그런 영웅 행적들을 줄줄이 엮어 댈 거외다. 그들이 어떤
비열한 수단으로 습격했든 아무도 개의치 않고 또 추궁할 사람도
없을 테니, 그놈은 여전히 명분과 이익을 한 손에 거머쥔 대영웅
이요, 강호 사람들은 성공한 사실만 받아들일 것이오. 잡담일랑
그만 지껄이고 우리 실제적인 문제부터 따집시다. 계 장주, 이번
사건의 화근은 장가 놈인데 어떻게 처치하실 작정이오?"
"맏언니, 정말 선견지명이 있어야 했어 ! 이토록 참담하게 실패
할 줄 알았더라면 저놈을 남문 늙은이한테 넘겨줘야 옳았어요!"
<단혼원앙>의 셋째 화 낭자가 원망에 가득찬 눈길로 장추산을
흘겨보다가 바락 소리쳤다.
"우리 단혼장이 어째서 이토록 궤멸적인 최후를 맞아야 하는 거
야? 모두가 저놈 때문 아니야?"
"셋째야, 엉뚱한 사람에게 화풀이하면 못 쓴다."
계 낭자는 도리질을 하면서 꾸짖었다 .
"길흉 화복에는 문이 없는 법, 모두 사람이 자초하는 것이란다.
우리가 이번 거래를 맡았을 때는 의당 위험 부담도 함께 떠맡고
이사람을 잡아온 것이 아니더냐? 탓할 일이 있다면, 우리가 이 거
래를 받아들인 것이 잘못이지, 붙잡혀 온 포로를 탓해서야 되겠
니?"
"맏언니, 그럼... 저자를 어떻게 하실 참이에요?"
"물주와 약속한 기한이 이틀 남았으니 기다릴밖에. 그때까지 안
나타나면 죽여 없애기로 하겠다. 그럼 되겠지?"
"이런 판국에 물주가 올 리 없어요. 단혼장은 이미...."
"옳으신 말씀! 물주 어른께서 올 가능성은 전혀 없소, 여러분!"
장추산이 유들유들하게 끼어들었다. 말투에는 중기(中氣)가 철
철 배었다.
"당신네들 어쩌자고 이토록 멍청하시오? 물주가 만약 영락거사
와 아무런 관련도 없다면 영락거사는 과연 어디서 이 정보를 얻었
겠소? 내 짐작이 틀림없다면 물주는 필경 영락 공자가 표면에 내
세운 허수아비, 암암리에 그 사주를 받아 움직이는 놈일 거외다.
영락 공자는 기한 내에 잔금을 마련하지 못하게 되니까, 어쩔 수
없이 체면 불구하고 제 아비더러 나서서 억지로 빼앗아 달라고 간
청했을 것이오."
"흥! 영락거사가 네깟 녀석 하나 때문에 강호 위신을 더럽힐 사
람이냐?"
<강한인도> 상조경이 코웃음치고 비웃었다 .
"천만의 말씀! 그자는 당신네를 뿌리째 뽑아버려서 명분과 이득
을 한 손에 넣을 뿐만 아니라, 당신네 이 단혼장의 영업 허가증도
넘겨받을 수가 있소. 또 당신네들이 10여 년 간 피땀 흘려 모아들
인 돈과 재물도 몽땅 파내어 챙길 테니, 이야말로 일석삼조가 아
니고 뭐요? 그것도 모르고 있다니, 당신네들 머리통은 참말 꽉 막
혔구료. 오호라 슬프다! 이 정도이니 억울할 게 하나도 없소이
다."
"요 풋내기 녀석 하는 말이 제법 일리가 있네 그려 ! 식견이 대
단한 걸?"
<강한인도>가 쓰디쓴 웃음을 머금고 중얼거렸다.
"계 장주, 우리가 별로 억울하게 실패한 셈은 아니구려."
"내 말에 일리가 있는 건 당연하지 ! 나 <뇌신>은 오늘날까지
10여 년 동안을 천하에 명성 떨치고 실패라곤 전혀 해 본 적이 없
는데, 그게 다 무슨 덕분인 줄 아시오? 사리가 분명한 탓이었지
!"
"당신, 큰소리 치지 마! 이번에는 실패했으니까...."
계 낭자가 조롱 섞어 면박을 주었다.
"정말 그럴까요?"
장추산은 빙글빙글 웃어가며 고개를 갸우뚱해 보였다.
"아직도 패배를 인정 못하겠다는 거예요?"
계 낭자의 얼굴에 웃음기가 사라졌다.
"패배라니, 내가 뭘 졌다는 거요?"
"물주가 안 나타나면, 당신 목숨이 붙어 있을 듯 싶어요?"
"아무렴, 붙어 있고 말고!"
"그것 참 기묘한 발상이로군! 우리 단혼장의 규칙쯤은 알 만한
분일 텐데?"
"무슨 규칙?"
"물주가 약속을 어기면 선금 6할도 몰수, 또 거래 물건도 우리
마음대로 처분한다는 규칙이에요. 어떻게 처분하느냐? 시체를 갈
갈이 찢어서 후환이 없도록 흔적을 없애 버린다 그 말이죠!"
"계 낭자! 당신, 참말로 날 죽이고 시체를 갈갈이 찢어서 흔적
도 없이 파묻어 버릴 작정이오?"
"산채로 파묻을지 불태워 없앨지 모르지만, 반드시 죽이기는 할
거예요."
계 낭자는 못 박듯 끊어 대꾸했다.
"그래서 당신네들한테 이로울 게 뭐 있소?"
"이건 규칙이니까, 당신도 운명을 받아들여야 해요! 사실 말이
지, 나는 당신을 존경해요."
"날 좋아하기도 하고 말이지, 안 그렇소?"
장추산은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세웠다. 얼굴에는 괴상 야릇한 웃
음기가 배어나오기 시작한다.
"나도 그 점은 부인하지 않겠어요."
계 낭자는 얼굴 하나 붉히지 않고 대답했다.
"좋아하는 사람을 죽이다니, 쯧쯧!... 당신이 어디 차마 손댈
수 있겠소?"
"내 손으로 직접 죽이지는 않겠어요."
계 낭자는 암울한 기색으로 말했다.
"내가 말했죠? 우리가 너무 늦게 만난 것이 안타깝다고 말이에
요."
"늦다니, 그게 무슨 망발의 말씀이신가! 난 아직도 당신 침대에
올라타고 싶은 마음을 버리지 않았는데?"
장추산의 말투는 갈수록 엉망진창이다.
"늦었어요. 내 스스로 정한 규칙을 난 이제껏 깨뜨려 본 적이
없거든요. 하지만 장 형, 어찌 되든 간에 나는 마음속으로 당신을
기억하고 있을 겁니다. 오늘밤, 당신이 정부와 즐거운 하룻밤을
보낼 수 있게 해드리겠어요. 그리고 내일 아침... 내일 아침에는
당신네 두 사람을 처형하기로...."
"하하! 그것 참 인정미가 뚝뚝 떨어지는 말씀이로군. 그럼 나도
그 호의에 답례하는 셈 치고 당신이 우리한테 가한 모욕과 폭행을
잊어 드리기로 하겠소. 그래야 오가는 맛이 있지 !"
장추산은 손을 뻗쳐 안춘을 잡아끌어 일으키면서 다시 몇 마디
보탰다.
"이제 여기서는 우리도 별 볼일이 없겠군. 이봐요, 소춘. 우리
길을 찾아 나가기로 합시다! 나는 영락거사를 꼭 한번 만나봐야
쓰겠어. 덩어리로 뭉쳐진 의혹을 확실하게 풀고 싶단 말씀이야."
"좋아요, 추산 오라버니! 나도 이 여자들이 한 짓을 눈감아 주
기로 하겠어요. 자, 떠나죠!"
안춘은 아주 흐뭇한 표정으로 그의 팔짱을 다정스레 바짝 끼었
다. '추산 오라버니' 라고 부르기는 처음이지만, 어떻게 입에서
그토록 쉽게 술술 나오는지 자신도 놀라울 만큼 자연스럽고 친밀
하기 짝이 없다.
"무슨 말을 하는거야? 당신들 미쳤어? 죽는지 사는지도 모르고
천둥벌거숭이처럼 날뛰다가 무슨 꼴을 당하고 싶어서 그래?"
계 낭자가 버럭 고함을 질러 댔다.
"지금 뭣들 하는 거야?"
"뭘 하다니, 보면 모르겠소? 계 낭자, 우리는 지금 여길 떠나는
거요. 핫핫핫!"장추산은 껄껄 웃음보를 터뜨렸다.
"당신, 내가 이런 땅굴 속에서 멍텅구리들을 모시고 마냥 처박
혀 있을 겁쟁이로 여겼소? 얼마 못 가서 영락거사 패거리가 들쑤
셔 끌어내다 몰살해 버릴 텐데, 그때까지 가만 죽치고 앉아서 기
다리란 말이오? 어림없는 수작."
"뭐라고? 에잇 !..."
계 낭자가 불끈 성을 내고 덮쳐가려 하자, <강한인도> 상조경이
냉큼 손을 뻗어 도로 눌러앉혔다. 제지하는 수법이 고수 중의 고
수로서 부끄러움이 없을 정도로 민첩하다.
"계 장주, 요 녀석 하는 말투가 미치광이 같지는 않소."
<강한인도>는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당신들, 이 두 연놈의 경맥을 제압해 놓지 않았구료?"
"웃기지 말아요! 상숙."
패령고가 장추산 쪽으로 걸어가면서 빈정댔다.
"천하 무쌍의 <절경이혈 신마수>(截經移穴神魔手)로 이 사람들
을 제압하지 않더라도 등에 꽂아 놓은 <분경찬맥어망자>(分經鑽脈
魚芒刺) 일곱 대만 가지고도 이 사람들을 폐인으로 만들 수가 있
죠. 자 보세요! 이 사람 꼭 불구자 같지 않아요?"
패령고는 자신만만하게 오른손으로 장추산의 목젖을 떠받쳐 들
고 턱을 위로 아래로 꺼떡거려 보였다. 장추산은 바보나 된 듯,
그녀의 손짓에 따라서 턱을 꺼떡거렸다 .
허나 안춘 소저가 그런 꼴을 보고만 있을 리 만무하다. 그녀는
'휙!' 하고 손바닥을 번쩍 들더니, 패령고의 뺨따귀를 '찰싹!' 소
리가 나도록 힘껏 후려 갈겼다 .
"그 여우 발톱, 못 치우겠어?"
안춘은 버들눈썹을 곤두세우고 독오른 암펌처럼 으르렁댔다.
패령고는 방심하고 있다가 미처 막아 볼 여지도 없이 혹되게 얻
어맞고 세 걸음이나 털썩털썩 뒤로 밀려갔다. 눈앞에서 별똥별이
하늘 가득하도록 번쩍이는가 하면, 뺨따귀는 불에라도 덴 듯 화끈
거렸다.
한곁에 지켜 서 있던 두 여제자가 기절초풍을 해 가지고 본능적
으로 안춘을 붙잡으려 덮쳐들었다.
"철썩 ! 철썩!..."
폭음과도 같은 귀쌈 두 대가 고막을 쩌렁쩌렁 울렸다.
"아야... 앗!..."
두 여제자는 하늘을 우러른 채, 뒤로 넘어가려는 몸뚱이를 바로
잡으려고 휘청휘청 물러났다. 따귀 두 대에 하마터면 네 활개를
볼성 사납게 벌리고 쓰러질 뻔한 것을 가까스로 모면한 것이다.
"이잇?"
"이크, 저런!..."
모든 사람들이 동시에 놀라운 실성을 터뜨렸다. 경맥을 제압당
한 암펌이 이토록 위세를 떨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한 모양이다
.
울화통이 3천 발이나 치솟은 패령고, 댓바람에 달려들면서 검지
와 중지 두 손가락으로 안춘의 가슴팍 칠감대혈(七攻大穴)을 찌르
려 했다.
이때, 측방에서 큼지막한 손바닥이 불쑥 나오더니, 잽싸게 그녀
의 맥문을 움켜 올렸다. 그것은 장추산의 손바닥이었다. 빠르기도
번개 같고 기막힐 정도로 겨냥이 정확하다.
"아얏!... 아이고 아파!..."
패령고는 경악에 찬 비명을 질러 댔다. 손목이 비틀린 채 손바
닥 위로 꺾여 갔으니, 팔뚝 전체가 벼락에라도 맞은 듯 찌릿하고
온 몸뚱이의 맥이 가 나른하게 풀릴 수밖에 더 있겠는가?
"옛소! <분경찬맥어망자>인가 뭔가 하는 생선가시 두 사람분,
열네 대를 돌려 드릴 테니 주인께서 잘 세어 받으시구료. 나는 원
래 남의 물건을 꿀꺽 삼키는 도둑이 아니니까 말이오."
장추산은 한 손에 감추어 두고 있던 생선가시를 패령고의 섬섬
옥수에 한 개 한 개씩 놓았다.
"이놈의 가시가 등에 박혀 있으니까 정말 사람 못 견디겠더군!
몽땅 뽑아내고 나서 그 시원하기란 하늘에라도 훨훨 날아오를 듯
싶었어. 이것들을 뽑아내느라고 꼬박 이틀이나 걸렸지만, 보람이
야 있고 말고! 자아, 물건은 원주인에게 돌아가야 하는 법이니,
잘 세어 보구려. 나처럼 찔리지 않도록 조심해서 말이오. 흠흠!"
그가 손을 푸는 순간, 잔뜩 버티고 있던 패령고의 몸뚱이는 제
힘에 겨워서 뒤로 1장 가웃이나 퉁겨날더니 시중꾼의 가슴팍을 들
이받고 한꺼번에 나가 떨어졌다 .
나이 반백을 넘긴 객경 한 사람이 순간적으로 공격 기회를 포착
하고 번개 벼락치듯 덮쳐나왔다. 솥뚜껑 같은 손바닥이 죽은 잿빛
을 띤 채 구름 속의 용이 발톱 내뻗듯 불쑥 내밀어지면서 <운룡현
조>(雲龍現爪)의 일초로 급박하게 장추산의 가슴 어깨를 움키려
들었다. 단번에 적을 제압할 속셈이었다.
장추산은 왼쪽 어깨를 추켜 세우고 일조(一爪)의 공격을 억지로
맞받았다. 일부러 상대방으로 하여금 목표를 단단히 움켜잡게 만
들면서 순간적으로 의지력을 집중시켜 공격받는 부위를 약간 비켜
가게 만든 것이다.
"저리 가시오, 당신한데 볼일은 없으니까!"
장추산은 능글맞게 중얼거리면서 다리를 번쩍 치켜들어 상대방
의 왼쪽 무릎 뒤 오금을 힘껏 걷어찼다.
"어이쿠!..."
객경 나으리께선 외마디 비명을 지르더니, 하반신부터 바깥쪽으
로 '붕!' 떠 날았다. 그러나 상체는 오른손으로 장추산의 팔뚝을
단단히 움켜잡고 있는 자세라, 미처 손을 풀지 못하고 상반신부터
땅바닥에 거꾸로 떨어지는 형국이 되고 말았다.
"털썩!"
단단한 돌바닥에 머리통을 처박혔으니, 두개골이 으스러지는 줄
알았을 것이다. 객경은 장추산의 발치 앞에서 엉금엉금 기어 몸뚱
이를 추슬러야 했다.
고수 중에 고수로 손꼽히는 어른께서 이런 낭패막심한 몰골을
보이자, 나머지 사람들은 펄쩍 뛸듯이 놀라서 얼굴빛마저 핼쓱하
게 질리고 말았다.
일거수 일투족으로 단혼원앙의 이름난 호위무사를 반항할 힘조
차 없게 고양이 쥐새끼 놀리듯 제마음대로 주물러 터뜨렸다면, 장
추산의 무공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알고도 남았을 것이다.
"이얍!"
계 낭자는 더 생각해 볼 것도 없이 야무진 기합성을 터뜨리면서
독오른 살쾡이처럼 장추산에게 덮쳐들었다. 옥권분퇴(玉拳粉眼),
양 주먹 두 다리가 한꺼번에 날아가더니 눈 깜짝할 순간에 미치광
이처럼 5권, 3장, 7퇴나 되는 연속 공격을 퍼부었다. 그야말로 광
풍폭우 휘몰아치듯, 송곳니 어금니에 앞뒤 발톱까지 몽땅 써서 먹
이를 덮치는 암펌을 연상시켰다.
장추산은 그 자리에 산악처럼 우뚝 선 채, 유유자적 쌍수만 가
볍게 휘둘렀다. 상대방의 권격(卷擊), 장공(掌攻)이 날아들 때마
다 몸에 닿기 직전에야 완맥을 뿌리치거나 움켜잡는 동작을 보여
계낭자로 하여금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공격초식을 거두어들이게
만드는 것이 두 다리는 돌바닥에 뿌리박듯 움쭉달싹도 않고 양손
만 가지고 펼쳐내는 방어초식이 신기(神技)에 가까울 정도요, 이
것은 싸움이 아니라 숫제 스승이 제자에게 초식을 가르쳐 주는 대
련이나 다를 바 없이 태산처럼 안정된 기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계 장주, 물러나시오!"
<강한인도>가 호통을 치더니, 칼집에서 육중한 망나니 칼을 뽑
아들었다.
"내 저놈을 열 토막 스무 토막으로 쪼개 버릴 테니 곁에서 구경
이나 하시오."
하지만 계 낭자는 물러설 마음이 눈꼽만큼도 없다. 마지막으로
열 번째 발길질을 날려 보낸다고 다리를 번쩍 치켜든 것까지야 좋
았는데, 종아리 안쪽 오금이 그만 장추산의 억센 손아귀에 붙잡혀
거꾸로 쳐들리는 몰골이 되고 말았다.
가랑이를 상대방의 양 어깨에 나누어 걸린 채 상채가 매달리는
순간, 장추산은 그 허리를 덥석 껴안아 버렸다. 옥처럼 부드럽고
따뜻한 젖가슴이 사내의 우람한 가슴팍에 찰싹 달라붙고 치렁치렁
늘어뜨린 머리칼은 돌바닥에 늘어뜨렸으니, 세상 천지에 이런 포
옹 자세가 또 어디 있으랴? 실로 상상을 뛰어넘는 형국이었으나,
보는 사람의 눈에 따라서는 절묘하기 이를 데 없는 애정의 표현으
로 비칠 수밖에 없었다.
"아이구머나!... 당신, 이게....",
계 낭자는 전신에 맥이 쭉 풀려 나른하니 퍼진 채, 송곳처럼 날
카로운 비명을 지르면서 가망 없는 몸부림만 쳐댈 따름이다.
"좀 얌전하게 굴라구! 요 사람 홀리는 귀염둥이 요물아, 다음
번에 또 이랬다가는 옷을 홀랑 벗겨 버리고 말 데니까. 알았어?"
장추산은 얄궂게 웃어가며 그녀의 허리춤에서 장검을 뚝 떼더
니, 몸뚱이는 한곁으로 휙 밀어던졌다.
단혼장에 붙잡혀 온 이래로 안춘 소저도 장난질이 곧잘 늘었다.
계 낭자의 몸뚱이가 자기 앞으로 날아오자, 그녀는 냉큼 손을
내밀어 솜씨 좋게 받아 챙겼다. 그리고 계 낭자의 봉긋 솟은 품안
에 손을 집어넣고 마구 주물러 대기 시작했다. 뭇 사람들이 눈을
휘둥그레 뜨고 바라보는데도, 그녀는 전혀 거리낌 없이 손장난을
즐기는 것이다.
"가만 있으라구! 내가 얌전하게 만들어 줄 테니까. 히히히!..."
안춘은 괴상야릇한 웃음까지 쳐가며 손아귀에 힘을 바짝 주었
다. 손길이 팔꿈치까지 푹 파묻히는 걸 보면, 이제는 젖무덤뿐이
아니라 그 아랫배 쪽 건드려선 안 되는 부위로 슬금슬금 기어 내
려가는 것이 분명했다.
"아이구머니, 안 돼!... 이 손 빼라고!... 너 이년!... 아이
구!..."
계 낭자는 놀랍고 당황한 나머지 몸을 움츠려 반격할 것도 잊은
채, 목청이 째지도록 비명만 질러댔다. 수치심과 다급함에 두려움
까지 겹치니, 이분 <단혼원앙>의 우두머리는 자신이 초진발속(超
屢拔俗)한 무공을 지닌 여걸이라는 사실조차 까맣게 잊어 버렸다.
<강한인도>가 묵직한 칼자루를 치켜들고 막 돌진하려 했을 때,
장추산도 마침 장검을 뽑아잡고 빈 칼집을 내던졌다.
"너, 이 잡놈! 별명을 '사람 백정' 이라고 붙인 것을 보아하니,
세상에 남겨 둬서 좋을 물건은 아닌 모양이로구나."
칼끝을 앞으로 쑥 내밀자, 검신(劍身)에서 '스르렁!' 하고 용음
이 울렸다.
"내 본디 네 놈의 죄상을 뚜렷이 모르니 만큼, 널 죽여서 이 세
상의 해악을 제거할 명분은 없다. 하나 네가 그 망나니 칼을 내
앞에 한 번만이라도 내밀었다가는 반드시 네 멱줄기를 끊어 죽이
고야 말테다!"
"흥! 이 상 아무개를 뭘로 보는 거야? 나로 말하자면...."
<강한인도>가 고함을 질렀다.
"네가 도대체 뭐냐? 강호 시궁창에나 굴러먹던 쓰레기, 이제 곧
죽을 고깃덩어리밖에 더 되겠는가?"
장추산은 상대방의 말끝을 끊었다.
"영락거사 부자 둘이서 손을 합쳤어도, 내 뇌정일격을 받아내지
못했다는 소문도 못 들었느냐? 몇 근 안 되는 뚝심 가지고 내 앞
에서 감히 사람 행세를 하려 들다니!"
"너 이놈!... 허풍 작작 떨어라!..."
<강한인도>의 무섭던 얼굴 표정이 안으로 쑥 들어갔다.
그는 조금 전 4대 1의 우세로 영락거사와 악전 고투를 벌였던
경험이 있다. 결과는 어땠는가? 아군 두 명만 영락거사의 칼날에
죽어 넘어졌을 뿐더러 자기 자신도 한 목숨 겨우 건져 도망치지
않았던가? 만약 1대 1로 단독 대결을 벌인다면, 자기 실력은 영락
거사의 발치 밑에도 못따라 붙을 게 분명하다. 그런데 지금 이놈
은 영락거사 부자를 격파하여 보기 좋게 패배시킨 장본인이 아니
냔 말이다.
<강한인도>는 입으로 버렸으나 속마음에는 공포감이 가득 서리
고 상대방의 말을 믿지 않을 수가 없었다.
"사람 백정, 그대는 자신을 대단한 사람으로 생각하는가?"
"그야 물론... 대단하지 !..."
"그 망나니 칼의 무게가 얼마나 되나?"
"32근!... 모자라지도 넘치지도 않게 꼭 32근이다."
"굉장히 무겁군. 어디 그 칼로 내 장검을 치켜들 수 있을까? 만
약 그렇게만 한다면 당신을 놓아 주지 !"
"흥! 풋내기 녀석이...."
말끝도 미처 다 떨어지기 전에, 장검이 먼저 앞으로 쑥 내찔러
나갔다. 아주 빠르게, 섬전이 번뜩이는 것보다 더 빠르게 찔러나
간 칼끝은 벌써 <강한인도>의 가슴팍 구미대혈(鳩尾大穴) 앞에 도
달하여 가죽 옷자락을 찢어낼 듯 찰싹 달라붙어 있었다.
<강한인도>는 반사적으로 칼날을 치켜들어 다급하게 봉쇄동작을
취했다. 그것은 본능에서 나온 반응일 뿐, 어느 방향으로도 회피
할 기회는 없었다.
만약 사람을 죽이기로 작심했더라면, 칼끝은 진작에 가슴팍을
꿰뚫고 등 쪽으로 빠져 나왔을 터였다.
"쩡!"
올려친 망나니의 칼등이 검과 접촉했다.
상리대로 따진다면, 장검의 칼끝은 그저 찌르는 힘만 있을 뿐이
요, 반대로 대도(大刀)의 칼날에는 강공으로 맞서 후려치는 힘이
들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장검 따위는 단칼에 퉁겨 날리거나 토
막내 버릴 수 있다는 것은 삼척동자라도 훤히 아는 사실이다.
그런데 괴이한 일이 벌어졌다. 무거운 망나니 칼이 장검을 쳐들
지 못한 것이다. 사람 백정은 칼자루를 두 손으로 고쳐 잡고, 있
는 힘껏 치켜들었으나 장검의 칼끝을 한 푼이 아니라 반 푼도 쳐
들어 올릴 길이 없었다.
쌍방은 모두 난생 써보지 앓았던 내공력을 몽땅 끌어올리고 평
생 배운 절학을 다 펼쳐가며, 한 쪽은 찍어 누르고 한 쪽은 치켜
올리고 있다.
이제는 어느 쪽의 기공이 먼저 흩어지느냐에 따라 승패가 결정
되고 존망이 판가름나는 것이다. 물론 어느 한 쪽이 패배를 자인
하고 용서를 구한다면 얘기는 달라지겠으나, 그렇지 못할 경우에
는 이 대결에서 오직 한 사람만 남게 된다. 강자는 살아 남고, 약
자는 죽어 없어지게 마련이니까.
칼날과 칼등이 맞붙은 곳에서 번갯불 같은 화광이 번뜩번뜩 비
치는가 하면, 사람의 넋을 잡아뽑을 듯한 금속의 신음성마저 울려
나오고 있다.
잠깐 사이에, <강한인도>의 숨결이 급격하게 거칠어졌다. 뿐만
아니라 구리방울처럼 떡 부릅뜬 눈망울도 튀어나올 듯 불거지고
칼자루를 움켜 쥔 두 손목도 후둘후둘 떨리기 시작했다.
장추산은 기마자세를 착실히 유지한 채, 하늘에서 내려온 천신
과도 같이 우뚝 버텨 서 있다. 칼자루를 움킨 손아귀는 마치 쇳물
로 부어 만든 것처럼 끄덕없이 안정되었고, 입술 언저리에는 한
가닥 차가운 미소가 맺혔다.
"졌어, 졌어 ! 상 형, 패배를 인정하시구료!"
곁에서 관전하던 <남천샨산> 요평이 버럭 소리쳤다. 우락부락한
목소리에는 어딘지 모르게 처량한 기색이 감돌았다.
"사람은 불복하는 것만이 장땡은 아니지, 당신 그 솜씨는 너무
뒤떨어져 있어. 상 형! 장씨 아우님이 손속에 인정을 두지 않았다
면, 당신은 진작에 지옥 문턱을 넘어섰을 거야."
"놓아 줘 !... 날 좀 놓아 줘 !..."
<강한인도>가 숨결을 헐떡거리면서 나지막하게 외쳐댔다. 얼굴
에는 식은땀이 비오듯 쏟아져 내리고, 양쪽 무릎도 주저앉을 듯이
후둘거리기 시작했다.
"푸우!..."
장추산이 숨 한 모금을 토해내더니, 장검을 거두어 들였다.
"땡그렁 !"
망나니의 칼이 손아귀를 벗어나 돌바닥에 떨어졌다.
<강한인도>는 탈진한 사람처럼 여린 신음성을 뱉으면서 그 자리
에 털썩 주저앉았다. 잠시도 쉬지 않고 가쁜 숨을 몰아쉬는 것을
보건대, 기력이 완전히 고갈된 모양이다.
장추산은 칼집을 주워들고 장검을 꽂아넣었다. 그리고는 아무말
없이 안춘의 바쁜 손목을 잡아당겼다.
그러나 안춘 소저는 매정하게 그의 손길을 뿌리쳤다. 그녀는 바
야흐로 계 낭자의 껍질을 벗기느라 한참 신바람이 나 있던 판이었
던 것이다.
계 낭자의 몰골은 차마 눈뜨고 보지 못할 지경이다. 저고리를
벗기워 볼록한 젖무덤이 몽땅 드러나고 이제는 바지 속곳마저 벗
기우는 참이라, 뭇 사내들 눈앞에서 알몸뚱이를 그대로 보여 주어
야 할 판국이다. 하지만 나른하게 퍼진 몸뚱이는 아무리 발버둥치
고 몸부림쳐도 안춘의 독살맞은 손길을 멈출 도리가 없다. 이제
그녀는 다급하다 못해 발광 직전의 상태가 되고 말았다.
"소춘, 그만하고 떠나자구!"
장추산이 손목을 다시 붙잡고 채근했다. 그리고 계 낭자를 떼어
놓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계 낭자, 다음 번에 날 찾으려거든 먼저 물주의 내력부터 조사
하고 값어치나 있나 없나 저울질해서, 밑지거나 본전 들어먹는 일
일랑 하지 말구려."
그는 계 낭자의 손에 장검을 쥐어주고 나서 경망스럽게도 매끄
러운 두 뺨을 한 차례씩 꼬집어 주더니, 심술궂은 웃음을 던졌다.
"수고스럽지만, 우리를 바깥으로 내보내 줄 수 없겠소? 나는 영
락거사가 의기 양양하게 내뛰는 꼴을 보고 싶단 말이오."
"아이구 맙소사! 당신, 호랑이를 잡아먹을 작정이에요?"
계 낭자는 다급한 기색으로 소리치더니 그의 우람한 가슴팍을
마구 두들겼다.
"난 미워 !... 당신, 밉단 말이야!... 당신이...."
"히히히 ! 난 저 사람을 미워해도 괜찮아. 나만 좋으면 되니!"
안춘은 곁에서 비아냥거리며 약을 바짝 올렸다.
"너, 이 사람을 사랑하나? 그럼 우리 둘 중에 하나는 없어질 줄
알라구!"
"하하! 여자들 사랑다툼하는 꼴이라니 !"
상판이 험악스레 생긴 <남천산소>가 고개를 절레절레 내두르면
서 웃었다. 키다리에 추접스럽고 포악하게 생겨먹은 사람이 웃는
모습은 보기에 역겨울 정도가 아니라, 심장 약한 여인네는 까무라
칠 정도로 징그럽다.
"흥! 너무 으시대지 말라구."
계 낭자가 흐트러진 옷깃을 여미면서 안춘에게 소리쳤다.
"언젠가는... 내 꼭 이 남자를... 내 사람으로 만들 테니까!"
"나도 널 내 사람으로 만들어 주지 !"
안춘이 손을 내뻗어 다시 움켜잡으려 했다.
"이크l 내 몸 건드리지 말아!"
계 낭자는 펄쩍 뛰어 도망쳤다 .
"좋아. 내가 직접 당신들을 데리고 나가지! 남문거사, 그 개 같
은 놈의 면전에 모셔다 주면 되겠죠!"
"그놈은 우리가 찾아도 되니까 계씨 누님은 여기 남아서 부상자
를 돌봐 주고 뒤처리나 잘 하구료."
장추산은 그녀의 어깨를 탁탁 쳐주었다.
"이것은 내 일이니까 말이오. 한 사람이라도 목숨을 보전해야지
단혼장의 원기를 회복시킬 수 있지 않겠소? 당신네들이 바깥으로
쫓아나가 봤자, 애꿎은 목숨만 적지 않게 날려보낼 거요."
"알았어요.... 당신 말씀대로 할께."
계 낭자의 어투가 원망인 듯 순종인 듯, 가늘게 떨려나왔다.
"아무렴, 그래야 착하지 !"
"내 이름은... 계추화(計秋華)예요."
"하하, 그 이름 한번 아름답군! 나는 추산(秋山), 당신은 추화
라, 이것 참말로 천생배필 아닌가?"
"언젠가는... 당신을 찾아갈 날이... 있을 거예요."
"또 나를 잡아다가 값을 매길려구?"
"아이 참! 당신도... 그런 말을...."
계추화의 얼굴에 수줍음이 가득 서렸다.
"제까짓 게 어딜 감히 추산 오빠를 넘봐?"
안춘이 버럭 심통을 터뜨렸다.
"내가 널 어떻게 요리할지 두고 볼 테야? 흥! 추산 오라버님한
테 가려면 우선 이 안춘이란 난관부터 넘어야 할 걸? 내 앞에 얼
씬 거렸다가는 너를 죽지도 살지도 못하게 만들어 놓고야 말겠다.
오늘 이후 나하고 맞닥뜨리지 않는 게 신상에 이로울 줄 알아!"
"됐어, 됐으니까 이만 떠나자구!"
장추산이 그녀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좋아요. 내가 당신네를 데리고 나가죠!"
패령고가 사태를 원만하게 수습하러 나섰다.
"당신네는 모르겠지만, 여기서 아무 데나 마구 쑤시고 설쳐 댔
다가는 한평생이 걸려도 살아서 나갈 생각은 말아야 해요. 지하
통로가 그물처럼 깔린데다 기관 장치로 봉쇄되어 있어서, 당신네
한테 날고 기는 재주가 있더라도 영원히 오락가락 맴돌다가 지쳐
죽을 거예요."
"그래야 내 사람이지 ! 패 낭자. 고맙소."
패령고가 앞장 서자, 장추산은 안춘의 허리를 부여잡고 바깥으
로 끌어나갔다. 문턱을 넘어서기 전, 그는 단혼장 사람들에게 마
지막 인사를 건넸다.
"여러분, 후에 또 만납시다. 그 날까지 모두 살아 있으시기를
빌겠소."
"당신, 아무래도 헤어지기 싫은 모양이로군요?"
안춘이 질투를 못 참고 버럭 고함쳤다.
"훗날 안 만나는 것이 좋을 줄 알라구! 마주쳤다가는 너희들 여
우 이리떼를 산 채로 껍질 벗겨 놓을 테니까!"
<호풍환우> 능유광은 정말 운수대통했다. 허나 애석하게도 대통
한 것이 악운이라 유감이다.
그는 자기 측근 호위 두 명만 거느리고 영락거사의 친구 넷을
뒤따라 남하장 방면으로 한 발 한 발씩 수색해 나아갔다. 어떻게
해서든지 땅굴로 드나드는 문호를 찾아내고야 말겠다는 희망을 품
고서, 그는 땅바닥을 한 치 한 치 재어가며 샅샅이 뒤졌으나 털끝
만한 소득도 얻지 못했다.
영락거사가 데려온 네 분 친구는 모두 나이 50줄에 접어든 중년
객, 하나같이 비범한 기백을 지녀서 자부심과 오만한 표정이 바깥
에 흐르고 있었다. 한마디로 불가일세(不可一世)의 호기스런 맛을
풍기는 영걸임에 분명했다.
평소 그들은 입에 자물쇠라도 채워 놓은 듯 허튼 말 한마디 지
껄이는 법이 없었다. 이따금씩 <호풍환우>와도 필요한 대화를 나
누었으나 말투가 무뚝뚝하기 짝이 없어, <호풍환우> 따위는 안중
에도 두지 않고 아예 사람 취급조차 하지 않는 기색을 역력하게
드러냈다.
네 사람 가운데, 그는 키다리에 매부리코를 지닌 사람이 위천형
(衛天衡)이라고 불리운다는 것만 알아냈을 뿐, 그 정체가 뭔지,
어디서 왔는지 전혀 아는 바가 없었다.
한 지방의 호걸이라면, 천하에 명성 높은 호걸 면전에서는 스스
로 비굴한 느낌을 받게 마련이다. 또한 마음 한 구석에 불복하는
점도 없지 않아 있고, 상대방에게 교분 좀 나누자고 아첨 떨기도
어색한 판국이요, 측근들이 뒤에 따라오고 있는데 공연한 수작을
걸었다가 무안이나 당하면 어쩔까 싶어 <호풍환우>는 아예 입 꼭
봉하고 재미 적은 꼴을 자초하지 않기로 작심했다.
키 작은 관목 숲을 다 뒤지고 나서 변두리로 나오자, <호풍환
우>일행은 건너편 메마른 수풀 언덕비탈에서 남녀 한 패거리가 벌
떼처럼 쏟아져 나오는 것을 발견했다.
제일 먼저 기겁을 한 사람은 <호풍환우>였다. 첫 눈길에 갈씨
모녀와 감대랑을 알아보았던 것이다.
그는 계제운이 누군지 모른다. 기색이 장엄하면서도 사납게 생
긴 이 사내를 전혀 본 적이 없는 것이다.
계제운 일행은 발바닥을 거의 땅에 붙이지도 않고 날듯이 달려
오고 있었다. 이들의 표정은 한결같이 냉정을 잃고 있었다.
눈앞에는 대화재가 일어나 불길이 하늘을 찌를 듯 치솟고 있다.
그것은 자기네들이 한 발 늦어 단혼장에 뜻밖의 변고가 발생하
였다는 증거였다. 그 안에 갇힌 사람들도 살아나오기는커녕 필경
흉한 꼴을 당했음이 분명할 터, 그러니 계제운 일행의 걱정스런
마음도 불 붙듯이 다급할밖에 더 있겠는가?
쌍방이 맞닥뜨린 지점은 피차 50보 거리도 안 되는 곳이었다.
"앗, 저 개같은 놈이 ! 엄마, <호풍환우> 능가 놈이에요!"
갈패옥이 비명을 지르듯 날카롭게 외치더니, 다짜고짜 돌진하려
들었다.
"얘야. 설쳐 대지 말아라!"
갈씨 부인은 재빠른 손길로 딸의 소맷자락을 잡아당겼다.
"계씨 나으리께서 주재하실 테니까, 함부로 날뛰면 안 돼요."
<호풍환우>측 일곱 사람도 촉박한 동작으로 싸울 태새를 갖추고
늘어섰다. 상대방의 인원수가 두 배를 넘으니, 단혼장에서처럼 돌
발적인 기습을 가할 도리가 없게 되었다.
"능 형, 저것들도 단혼장 사람이오?"
위천형이라는 중년객이 고개를 돌리고 <호풍환우>에게 물었다.
"아니외다."
<호풍환우>가 대답했다.
"장추산 쪽 사람이라고 해야 옳을 거요."
"어허 ! 마침 잘 만났군."
위천형이 오만스레 중얼거렸다.
계제운은 측근 호위 네 사람만 거느리고 3장 바깥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너희들도 잘 왔구나."
계제운은 얼음장 같은 눈초리로 상대방을 하나하나씩 뚫어보면
서 질문을 던졌다.
"너희들, 장추산을 건네받으러 온 패거리지? 그 사람들은 지금
어디 있나?"
"불바다 속에서 네놈들마저 기다리고 있을 거야."
"불바다 속에서?"
"우리가 단혼장을 습격했지. 세상에 해악을 끼치는 마귀의 무리
를 제거하고 정도를 지킨 행위니까, 우리 한 일에 탓할 것은 하나
도 없어 !"
"장추산도 마귀에 속한단 말인가?"
"그놈이 바로 괴수지 ! 너희들은 그놈과 한 패거리냐?"
"틀림없네."
"그럼 너희들도 다 죽어 줘야겠군!"
위천형은 오만한 동작으로 장검을 뽑으면서 말을 이었다.
"너희들이 결정해라. 강호 규칙에 따라서 한 놈 한 놈씩 목숨을
바칠 테냐, 아니면 다수를 믿고 한꺼번에 덤빌 테냐? 소원대로 들
어 주마!"
"흐흠, 자부심이 대단한 녀석이로군! 이름을 밝히시지."
"알려드리지 못할 것도 없겠지. <신룡검객>(神龍劍客) 위천형이
다!"
그러자 계제운은 뒤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누군가를 손짓해 불러
냈다.
"우로(禹老), 저 <신룡검객> 위씨란 분과 인사 좀 나누시지요."
그의 뒤편 10여 보 거리 밖에서 청색 장포를 입은 환갑 나이의
노인이 움직였다 .
계제운은 자기 곁으로 다가온 노인에게 한마디 덧붙였다.
"산채로 잡아야 하오."
"반드시 생포해 드리리다."
우씨라고 불리운 노인이 패검을 풀더니, 허리춤에 푹 꽂아넣고
응답했다. 허나 쑥스러운 듯 덤덤하니 미소 지으면서 조건을 하나
덧붙였다.
"하지만 노부도 늙은 몸이라, 저 친구를 온전한 몸뚱이로 생포
할 수 있을지 없을지 장담을 못하겠소. 나이가 들면 마음은 여유
가 있어도 힘에 부칠 때가 꽤 많아서 실수할 가능성도 혹 있을지
모르겠구려."
"우로께서 최선만 다하시면 됩니다."
"물론 최선을 다해서 흠집 하나 없이 잡도록 힘쓰리다."
두 사람이 농담을 주고받듯 얘기를 나누는 품이, 마치 <신룡검
객>을 절반쯤 죽은 사람 취급을 하고 있다. 이러니, <신룡검객>
나으리도 화가 머리끝까지 뻗쳐 제풀에 까무라칠 지경이 될 수밖
에 더 있으랴?
"네놈이 도대체 뭐 말라 비틀어진 개 뼈다귀냐? 흥!"
<신룡검객>의 어투가 조잡하고 광망스러운 것이, 일류급 검객다
운 풍채라곤 한 점도 비치지 않는다.
"노부가 깡마르기는 하지만, 개 뼈다귀는 아닐세."
우로는 상당히 풍도를 갖추고 미소지어 가며 천천히 장검을 뽑
아내기 시작했다.
"그저 성이 우씨라는 늙다리 영감으로 불러 주면 고맙겠소."
"흥! 너도 장검을 쓸 줄 아나?"
우로의 장검이 칼집에서 다 뽑혀나왔을 때, 모든 사람들은 실소
를 금할 수 없었다. 도대체 얼마나 오랜 세월 갈지도 않고 다듬지
도 않았는지, 칼날은 온통 쇳녹 자국으로 얼룩져 있고 칼끝도 벼
리지 않아 무디기만 한 것이, 어느 한 군데 별난 점이라곤 하나도
보이지 않는 평범하기 짝이 없는 장검이었던 것이다. 이런 칼이라
면 어느 병기포에서나 단돈 너댓 냥이면 손쉽게 구할 수 있을 것
이다.
"조금 쓸 줄 알지."
"목숨을 바치러 나서기에는 너무 늙지 않았나?"
"늙다니, 천만의 말씀을! 자네 위씨 영웅보다 몇 살쯤 더 먹었
을 뿐인데, 날더러 늙었대서야 될 말인가? 이보게, 위씨. 자네 거
기서서 나하고 입씨름이나 할 작정인가? 내 병기는 이미 칼집에서
뽑혀 나왔는데 말씀이야. 이 칼은 볼품이 별로 없지만, 일단 칼집
에서 나온 후에는 피를 보지 않고선 다시 들어가는 법이 없다네.
자네가 무릎 꿇고 목숨을 빌더라도 이젠 글렀네. 꼭 한 칼 먹여서
내 관례를 지킬 테니 말일세."
"이런 괘씸한 영감! 에잇!..."
<신룡검객>의 손아귀에서 '우르릉'하는 용음이 울리는가 싶더
니, 검광 한 줄기가 칼집에서 빠져나오기가 무섭게 번개 벼락치듯
뻗쳐 날았다. 칼뽑기와 보법내딛기, 공격초식을 발출하는 동작이
숨 한 모금 내쉬는 찰나에 한꺼번에 이루어졌다. 쾌속하기로는 전
광석화보다 빠르게, 유성이 달 쫓듯 <비성축월>(飛星逐月)의 공격
초식이 정면으로 토해졌다.
강자가 되기 위해서는 선수를 쳐야 하는 법, 검객다운 긍지나
풍도라곤 털끝만큼도 없다.
"쨍그렁 ! 챙!... 챙!"
쌍검의 쇠울음이 연달아 고막을 때렸다. 우로의 수중에 들린 장
검은 날렵하게 휘둘리면서 연속 삼검의 공격을 깨끗이 받아내고는
<비성축월>의 날카로운 공세를 와해시켰다.
갑자기 쇳녹 자국으로 얼룩진 칼빛 그림자가 적의 틈서리를 노
리고 질풍노도처럼 곧바로 중궁(中宮)을 겨누어 돌입했다.
"이크!..."
<신룡검객>은 대경실색, 엉겹결에 칼끝을 밀어내면서 재빨리 뒤
로 물러섰다. 그는 유령에게 홀린 듯 멍청해졌다. 상대방의 칼끝
이 어떻게 간극(間隙)을 뚫고 들어왔는지 똑똑히 보지도 못했으
니, 불가사의한 노릇일 수밖에 !...
밀어내기의 방어동작이 허공을 빗나간 그 찰나, 녹슨 칼끝이 수
평으로부터 상승하면서 비스듬히 일검을 토해냈다.
"으왝!"
돌연, <신룡검객>이 경악성을 터뜨리더니, 몸뚱이를 부르르 떨
었다.
우로의 칼끝은 정확하게 바른쪽 어깨를 꿰뚫고 들어갔다. 그것
은 정면 대결에서 상대방이 외면한 채 전혀 방어하지 않는다면 모
르거니와, 맞선 방향에서는 거의 불가능할 정도로 가장 격중시키
기 어려운 목표였다.
"흐흠!"
우로는 싸느랗게 웃어가며 칼날을 절반쯤 비틀어 돌렸다. 칼끝
을 돌려댈수록 상처 구멍이 넘어지니 그 고통이야말로 사람을 까
무라치게 만들 터, <신룡검객>은 아픔을 견디지 못하고 비명이 터
져 나왔다.
빠른 속도로 찌르면 고통을 별로 느끼지 앓지만, 찌른 채로 칼
끝을 후벼 돌리면 쇳덩어리로 두드려 만든 사람이라도 전신의 기
력이 몽땅 빠지도록 고통을 받아야 한다.
우로가 빈 손을 내밀더니, <신룡검객>의 상처난 팔뚝을 덥썩 움
켰다.
"으아아!..."
<신룡검객>은 미친 사람처럼 비명을 질렀다 .
"다행히도 명령을 욕되게 하지 않았소이다."
우로는 뒤편을 향해 겸손을 보이면서 <신룡검객>의 육중한 몸뚱
이를 거뜬히 쳐들어 머리 뒤로 내던졌다.
포로의 몸뚱이가 땅바닥에 곤두박질 치기 직전, 계제운을 수행
하던 호위 무사가 그것을 냉큼 받아서 안아 내리더니, 양 어깨 관
절을 당겨 뽑아내고 두 무릎뼈를 걷어차 으스러뜨렸다.
"사람... 살려!..."
<신룡검객>이 공포에 질려 비명을 질러 댔다.
"철썩 ! 철썩 !... 철썩 ! 철썩 !"
응답이라곤 따귀 네 대가 안겨졌을 뿐이었다.
스스로 비범하다고 자부하던 <신룡검객>이 겨우 삼 검의 공격만
시도하고 오히려 단 일 검의 반격조차 받아내지 못한 채 사로 잡
혔으니, <호풍환우>를 비롯한 나머지 여섯 동료가 펄쩍 뛰도록 놀
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어디 또 누구 없소? 이 늙은이하고 단독 대결을 벌일 분은 없
으신가?"
우로의 목소리는 차분하기 이를 데 없다.
"다음 분도 잘 모셔 드릴 테니, 어서 나오시오."
이런 판국에 어떤 놈이 미쳤다고 감히 단독 대결을 하겠노라 나
서겠는가? <호풍환우>의 머리 속에 제일 먼저 찾아든 것은 바로
뺑소니를 쳐야겠다는 생각이다. 그는 측근 경호원에게 손짓을 보
인 다음, 잽싸게 돌아서자마자 미친 듯이 내뛰기 시작했다.
그러나 헛수고였다. 사람의 그림자가 양 측방으로부터 번개같이
앞질러 나가더니, 단 두세 차례 도약으로 즉각 포위망을 형성했
다.
이래서는 누구도 달아날 수 없게 되었다.
"멈춰 서라!"
날쌔고도 포악스레 생긴 장한이 살기 등등하게 <호풍환우>의 면
전을 딱 가로막아 서더니 협봉단도를 불쑥 내질렀다.
<호풍환우>로서는 달리 선택할 길이 없다. 돌진하던 기세도 찰
나간에 멈춰지지도 않는다.
"이여업 !----"
침중한 기합성 한마디와 더불어, 그는 신검합일로 맞부닥쳐 들
어갔다. 이야말로 저돌맹진, 멧돼지의 돌격전법이다.
"쩡 !"
장검이 협봉도의 차단을 뿌리쳤다.
칼이 퉁겨나가자, 장한의 몸뚱이도 그 뒤를 따라 이동하면서 상
대방에게 탈출로를 열어 주었다. 협봉도가 돌아가는 대로 주인의
몸뚱이도 빙그르르 돌아가며 대선회 동작을 취했다. 한 바퀴를 완
전히 돌고 나자, 칼잡이는 절묘하게도 다시 일도(一刀)의 추격을
재개할 수 있게 되었다. 신법도 이루 말할 수 없이 민첩하고 칼을
뻗어내는 시기도 조금의 오자를 보이지 않는 것이, 이미 심신합일
(心身合一), 인도일체(人刀一體)의 상승 경지에 올라 있다.
질풍 같은 멧돼지 전법을 시도한 <호풍환우>, 그는 자신이 포위
망을 돌파한 것으로 여기고 이제부터는 탄탄대로를 곧바로 빠져나
갈 수 있으리라 오인했다.
그러나 훤히 열린 포위망을 스쳐 지나가는 찰나, 그는 오른쪽
무릎 오금에 이상한 충격을 받았다. 제2보를 내딛었을 때, 갑작스
레 오른쪽 다리가 허전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고통보다 먼저 몸의
균형이 허물어졌다. 중심 잃은 상체가 앞으로 기울어지면서 그는
땅바닥에 털썩 꺼꾸러졌다.
"으왓, 내 다리 !..."
미친 듯이 아우성을 지르는 동안, 장검이 손아귀에서 벗어나 앞
으로 쭉 미끄러져 나갔다.
그가 엉금엉금 기어서 칼자루를 붙잡으려는 순간, '퍽' 소리가
나면서 왼편 어깻죽지에 무거운 타격이 떨어졌다. 칼등으로 내려
친 것이다.
칼잡이는 한 발로 그를 찍어누른 채 익숙한 솜씨로 반대편 어깻
죽지에 마저 일장을 후려쳤다. 이래서 <호풍환우>의 양팔은 활동
능력을 잃어버렸다.
그는 바로 곁에서 측근호위 두 사람의 비명을 들을 수가 있었
다. 또 영락거사의 친구 세 분의 고함 소리와 질타성도 들려왔다.
허나 그를 혼비백산하도록 만든 것은 동료들의 고함 소리나 아
우성이 아니라, 계제운의 위엄있고 냉혹한 목소리가 귀청에 울렸
을 때였다.
"더 이상 산 놈은 필요없다. 모두 죽여라!..."
도살령이 떨어진 지점은 바로 등뒤 그리 멀지 않은 곳이라, <호
풍환우>는 자신을 지목한 것으로 직감할 수밖에 없었다.
"아아, 끝장났구나!..."
그는 속으로 절망에 가득찬 비명을 질러댔다.
허나 그는 행운을 잡았다. 계제운의 부하는 그에게 마무리로 한
칼을 먹이지 않았다. 그는 살려야 할 대상의 하나로 선택된 것이
다. 그러나 장차 어떤 결과가 닥칠까?... 그는 목숨이 붙어 있다
는 안도감보다 앞으로 닥칠 불확실한 운명에 생각이 미치면서 저
도 모르게 소름이 쭉 끼쳤다.
우로가 <신룡검객> 위천형의 견정혈을 일검으로 찔러 거꾸러뜨
렸을 때, 그리 멀지 않은 부근에서 싸움을 지켜보던 갈씨 부인은
가슴속에 퍼뜩 짚이는 것이 있어 몸서리를 쳤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유모 방씨에게 눈길을 던졌다. 그것은 놀라
움과 당혹스러움, 그리고 무엇인가 물어보려는 듯 착잡한 기색이
담긴 눈빛이었다.
유모 방씨의 얼굴에도 경악과 의아스런 기색이 흐르고 있었다.
그녀는 갈씨 부인에게 두세 차례 고개를 끄덕이면서 알았다는
듯이 손짓을 지어 보였다 .
<호풍환우> 일당 여섯이 내뛰었으니, 계제운의 패거리도 일제히
뒤쫓아 나갈 수밖에 없다. 갈씨 부인은 딸의 손목을 붙잡고 자기
네도 추격하는 듯한 동작을 취하면서 식구들에게 은밀히 측방 관
목숲을 가리켰다. 꼴찌로 뒤처져 뛰는 동안, 그녀는 기회를 틈타
계제운의 패거리에서 이탈하자는 손짓을 보였다. 그리고 자신부터
우측 후방 키 작은 관목 숲으로 뛰어들었다 .
갈패옥이 무슨 의사표시를 하려 했으니, 그녀는 아무 말 없이
무작정 끌고 숲 속으로 깊숙히 파고 들어가기만 했다.
네 여인이 정신 놓고 급박하게 내뛰다 보니, 방향은 오던 길을
되돌아가고 있었다.
3리 남짓 멀찌감치 빠져나오자, 어느덧 단혼장 구역을 한참이나
벗어난 뒤였다.
"엄마, 이래도 되는 거야?"
갈패옥이 손목 잡힌 채 내뛰면서 항의했다.
"추산 오빠가 불바다 속에 빠졌다는데, 그 사람을 구하러 온 우
리가 왜 반대로 도망치는 거야?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고놈의 주둥아리 닥치지 못하겠니?"
갈씨 부인이 엄하게 꾸짖었다. 내처 뛰던 발걸음도 늦춰졌다.
"하나 묻겠다. 장추산이 계씨 성을 가진 사람하고 한 편이냐,
아니냐?"
"아니에요!"
갈패옥은 부인하면서 깜짝 놀랐다. 어머니의 얼굴 표정이 여느
때와 전혀 딴판으로 변한 것이다.
"계제운이란 사람은 아주 신비스런 인물이에요. 거의 언제나 중
요한 고비에만 나타나서 추산 오빠를 도와 주곤 했어요. 추산 오
빠도 그 사람한테는 줄곧 경계심을 품고, 나이 차이가 많은데도
선배라고 부르는 대신 꼭 '계 형' 이라고만 불렀어요. 그 사람이
차고 있는 함광검은 천하 4대 명검 중에 하나래요. 한데 엄마는
무슨 일이 있길래...?"
"네 젖엄마한테 물어보려무나."
갈씨 부인은 유모 방씨를 가리켰다 .
"나하고 어머님은 그 우로라는 늙은이가 누군지 알고 있어요."
유모 방씨가 입을 열었다.
"벌써 10년이 지난 일이로군요. 당시 태산 관일대(觀日疊)에서
<북검>(北劍)과 <남도>(南刀)가 두번째로 대결을 벌인 적이 있었
지요. 피차 원한을 씻겠다고 양측에서 많은 친구들을 증인으로 초
대해 놓고 결투를 벌인 거예요. 그 소문이 퍼지자, 천하 군웅들이
흥미진진한 구경거리를 놓치지 않으려고 적지 않게 찾아 왔지요.
나하고 어머님도 때마침 부근을 지나던 중이라 기회가 좋길래 관
중틈에 끼어서 구경을 할 수 있었어요."
"유모, 그게 우리가 도망치는 것하고 무신 상관이에요?"
"좀 더 들어봐요, 아기씨. <북검>과 <남도>가 아직 결투를 시작
하기도 전에, 그 자리에 모인 쌍방 친구들은 서로 원수를 찾아서
혼전을 벌이기 시작했어요. 흥미진진한 구경거리를 찾아 온 사람
들도 가만 보니 자기네와 원한을 맺은 사람이 있는 터라, 모두들
눈에 핏발을 세우고 덤벼들기 시작했어요. 한참 뒤얽혀 싸움을 벌
이고 있는 판국에, 언제 나타났는지 아까 그 우씨 성을 가진 사람
이 장검을 휘두르면서 <북검> 유옥승(劉玉升)에게 덤벼들지 않겠
어요? 그 늙은이는 세번째 일검으로 <북검>의 왼쪽 갈비뼈를 으스
러뜨리고, 다시 앞길을 가로막는 군웅 열세 명을 모조리 베어 거
꾸러뜨린 다음, 유유히 관일대의 결투 현장을 떠나 버렸어요. 후
에 누군가 그 인물을 알아보고 얘기하던데, 그 사람은 마도의 검
객으로 이름난 <지존마검>(至尊魔劍) 우무극(禹無極)이라고 하더
군요."
"관일대 사건이 있은 지 몇 년 후, 그 마검은 돌연 종적을 감추
고 사라졌단다. 그러다가 <북검>의 친구 한 사람이 우연히 마검의
행방을 알아내게 되었지. 얘야. 그 자가 어디 숨었는지 아느냐?"
갈씨 부인이 몇 마디 덧붙이고나서 딸에게 물었다.
"몰라요."
"바로 경사(京師), 북경 황궁 서산에 있는 자운대원(紫雲大院)
이란다. 자운대원은 서산 비마암(秘鹿岩) 부근에 있지. 그곳은 낭
위(郞衛)들이 무학을 연구하는 도량이다. 황궁 자금성을 지키는
시위(侍衝)에는 세 종류가 있다. 어전시위(御前侍衛), 건청문 시
위(乾淸門侍衝), 낭위 이렇게 세 등급으로 나뉘었는데, 그 중에서
낭위 직급은 만주 3기(旗) 출신의 귀족 자제들로 이루어져 있다.
세등급 가운데 지위는 제일 낮지만, 시위가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 할 단계란다. 여기 설치된 무학사(武學舍)가 바로 시위의
재목감을 기르는 양성소다."
"그럼 우무극이란 늙은이도 무학사 출신이란 말인가요?"
"계속 듣기만 해라. 무학 교두(敎頭)는 천하에서 기이한 재능을
갖춘 인재를 가려뽑아서 임명한다. 학생은 여섯 살 때 입학해서
스무살이 되기 전까지 바툴(巳圖魯: 용사)의 자격을 따지 못하면
어김없이 도태당한다. 퇴학생은 모두 황궁 바깥으로 쫓겨나서 어
림군(御林軍)의 관직을 받게 된다. 낭위의 임기는 3년, 그 동안에
근무성적이 우수한 인재라야 건청문 시위로 승진한다. 또 어느 때
어전시위로 올라가는지, 그것은 건청문 시위로 근무하는 동안에
성적을 평가해서 결정된다."
이때, 유모 방씨가 말을 받았다.
"아기씨, <지존마검> 우무극은 바로 낭위 무학사의 교두로 있었
어요. 그렇다면 자칭 계제운이란 인물은 어전시위...."
"하느님 맙소사!..."
말끝도 맺기 전에, 이모 양벽아가 깜짝 놀라 소리쳤다.
"어전시위 !"
갈패옥도 기급을 했다.
"얘야, 요 몇 년 사이에 자금성 시위들이 지방 각처에 나타났을
때마다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아니? 그 사람들은 여느 때 북경 황
성에서 한 발짝도 떠나 본 적이 없단다."
갈씨 부인이 여기서 말을 끊고 일행을 돌아보았다.
"대만을 평정한 이후부터 황궁 시위들이 천하 각 지방에서 나타
나기 시작했는데, 몇 번쯤 되고 무슨 일을 벌였는지, 누구 알면
대답해 봐요."
"첫번째는 갑자년(강희 23년. 1684), 바로 대만을 평정한 이듬
해죠. 두번째는 기사년(강희 28년. 1689)이었구요. 두 차례 모두
청나라 금상 황제가 소위 '남순' (南巡)이라고 해서 이 강남 땅에
내려왔을 때였지요."
유모 방씨가 기억을 더듬어 대답하더니, 갈패옥을 돌아보았다.
"아기씨, 잘 생각해 봐요. 황제가 남순할 때마다 어전시위 중에
서 선발대로 절반이 뽑혀 먼저 내려오는데, 그 조직을 대외적으로
뭐라고 부르지요?"
"향도처(嚮導處) !"
갈패옥이 저도 모르게 고함을 질렀다.
"맞아요. 향도처죠. 이 조직은 어딜 가든지 고위 벼슬아치를 마
음대로 부릴 수도 있고, 만천하 백성들의 생사 대권을 쥐고 흔들
지요. 또 가는 곳마다 필요한 병력과 재물을 늑탈하고 관청 곳간
의 공금도 자기 마음대로 꺼내 쓸 수 있는 권한을 지녔어요. 장추
산이 만약 그들과 한패라면, 우리는 양자강 물 속에 뛰어들어도
창해 유성 사람들이 매국노와 사귀었다는 더러운 누명을 다 씻어
내지 못할 겁니다."
유모 방씨는 원망에 가득찬 어조로 말끝을 맺었다.
"아이구 맙소사! 난 못 믿겠어요."
갈패옥이 샛된 목소리로 악을 썼다 .
"추산 오빠는 절대로 그 사람들과 한패가 아니에요! 절대로, 그
럴 리가 없어요!... 절대로...."
"가만 있거라... 이런, 맙소사! 삼차하 사건... 천지회와 소도
회가 결맹한다는 비밀을 팔아먹은 게 설마 장추산?..."
갈씨 부인은 두 손에 얼굴을 파묻었다.
"의진현에서 탈취한 은화 5만 냥... 그렇다면 윤소소도 가짜였
단 말인가?"
"부인, 섣부른 의심일랑 마십시오. 아직 모든 내막을 다 알지
못했으니까요."
유모 방씨가 정중하게 말했다.
"저는 장추산이 결코 매국노가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확증을
잡기 전에는 우리는 남에게 함부로 죄를 씌울 수는 없습니다. 우
리 창해 유성이 천지회 사람들처럼 '반청복명' 운동에 가담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매국노의 수치스런 오명을 써서도 안 됩니다.
소패 아기씨, 우리는 이제부터 매국노와 분명히 선을 긋고 처신해
야 합니다. 장추산의 신분이 확실히 밝혀지기 전에는 아기씨도 그
사람과 거리를 두고 멀찌감치 떠나 계시는 게 좋을 듯 싶군요."
"......."
"얘야! 너 들었니, 못 들었니?"
갈씨 부인이 엄하게 다그쳤다.
"엄마!..."
갈패옥의 얼굴은 어느덧 눈물로 뒤범벅이 되었다.
"제발 이러지 말아요...."
"얘야, 나도 그 사람이 매국노라고 꼭 짚어 말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우리 먼저 행적을 감추고 은밀히 움직이기로 하자, 표면에 나
서기보다 그늘에 숨어서 냉정한 눈으로 지켜보면 알 수 있을 게
다. 나는 믿는다, 얼마 안 있어 모든 진상이 백일하에 드러나는
날이 오리라는 것을!"
창해 유성 일가족 네 사람은 조용히 북쪽을 향해 떠났다. 그리
고 황막한 산야로 자취를 감추었다 .
영락거사도 운수대통하기는 마찬가지, 그는 과연 목적했던 대로
장추산을 찾아낼 수 있었다.
이들 일곱 사람은 서하장의 불길이 아직 남은 서북쪽 산비탈을
따라서 맞은편 산등성이로 급히 올라가던 중이었다. 이 일대에는
지하 통로의 출입구가 있을 리 만무할 터, 단혼장 불구덩이로부터
거리가 너무 떨어졌기 때문에 일단 산등성이로 올라간 다음 다시
돌아 내려오면서 수색하기로 작정한 것이다.
장산 일대에는 낮은 산으로 이루어진 은폐처가 수두룩하게 많
다. 작은 봉우리도 실상은 산이라고 부르기조차 어색하고 차라리
구릉지대로 일컫는 것이 적당할 듯 싶었다. 이 작은 산줄기도 사
실 서북쪽으로부터 동남쪽으로 길게 뻗어내린 언덕 비탈이요, 그
끄트머리가 바로 북하장과 서하장 사이에 내려앉아 시든 잡목과
대
나무 숲이 뒤섞인 계곡을 이루고 있었다. 이곳 마른 풀섶은 사
람의 키만큼이나 무성하고 빽빽하게 들어찼을 뿐, 길이라곤 한 가
닥도 뚫려 있지 않는 외통수였다.
하지만 산등성이를 따라서 내려가면, 군데군데 키작은 소나무
숲만이 흩어져 있어 시야도 탁 트이고 장애물도 별로 없다. 소나
무도 해묵은 고목이 아니라 겨우 5, 6년 생, 산불이 크게 난 뒤에
새로 자란 야송(野松)이라, 키도 들쭉날쭉 고르지 못하다.
영락거사 일행은 너나 할 것 없이 지하 통로의 출입구를 찾아낼
염두는 진작부터 포기하고 있었다. 그저 탈출해 나온 녀석들이나
운수 졸게 발견했으면 하고 바라는 것이 전부였다.
텅 빈 산은 주인 없이 적막하기만 한데, 귀신의 그림자조차 보
이지 않는다. 적지 않은 시간을 허비해가며 이 넓디 넓은 산림을
샅샅이 뒤져 보았으나, 소득이라곤 눈꼽만큼도 없다. 그러니 처음
의 긴장감이나 경계심도 차츰 풀어지기 시작했다.
영락거사의 측근 호위 두 사람은 <석파> 정호와 <천경> 양표다.
외부 사람은 이들이 어떤 내력을 지닌 고수인지 전혀 알지 못한
다. 그 별호와 이름조차도 날조되었을 가능성이 다분하다. '석파
천경'....
옛날 당나라 때 시인 이하(李賀)가 악공의 연주를 듣고 너무 신
통하고 놀라와서 '하늘을 핀 돌이 쪼개졌노라' 는 시구(詩句)를
지은 데서 따왔으니, 누구나 기억하기 쉬운 것이다.
평소에도 영락거사를 수행하는 측근 호위가 따로 몇몇 있기는
하다. 그러나 위험한 일에 출동할 경우에 한해서, 그의 곁에는 반
드시 <석파>와 <천경> 두 사람이 따라붙는다.
영락거사는 이번 계획을 제안한 주재자요, 또 진두에 서서 단혼
장 공격작전을 손수 지휘하는 수뇌급 주장이기도 하다. 그렇기 때
문에 행군할 때도 뒤에 처져 가고, 뚝심 좋은 부하 겸 친구 네 명
이 전방을 경계 수색하면서 길잡이 역할을 맡았다. 물론 상황이
발생하면 영락거사가 앞으로 나서는 것은 당연한 말씀이다.
<석파>와 <천경> 두 사람은 충성심이 유별난 터라, 꼴찌로 따라
붙으면서 후방의 안전을 철저히 경계했다. 그러나 오랜 시간을 걷
다 보니 주의력과 경계심이 차츰 옅어져서, 그저 이따금씩 생각난
듯 한 사람이 후딱 고개 돌려 뒤를 살펴보는 것이 고작이었다.
앞쪽에서 수색을 담당한 네 사람은 모두 고수 중의 고수요, 무
림계에서도 원로 명숙으로 손꼽히는 강호의 풍운아로서, 무공 수
준이나 경험 면에서 하나같이 일류급에 속한다. 이 네 사람의 솜
씨라면 강호상에서 위명이 쟁쟁하다는 고수쯤은 너끈히 요리하고
도 남을 만큼 막강하다.
이들이 산마루턱에 올라섰을 때였다. 전방 4, 5장 거리를 두고
키 작은 소나무 너댓 그루가 몰려 서 있는 한가운데서 느닷없이
안춘 소저의 맵씨있는 자태가 불쑥 솟구쳐 나왔다. 그 얼굴 표정
도 유별난 것이, 누굴 보고 그리도 좋은지 계속 방글방글 웃어가
며 소나무 줄기에 비스듬히 기대어 섰는데, 이거야말로 하늘의 선
녀가 속세에 내려온 듯, 눈부시게 아리따운 광채를 온몸으로 쏟아
내고 있지 않는가!
"이크!"
최선두에서 길을 열어가던 중년인이 깜짝 놀라 소리쳤다.
"안가란 계집이다!"
그 한마디의 외침이 뒤따르던 사람들의 경계심과 주의력을 깡그
리 앞쪽으로 빨아들이고 말았다.
"옳거니, 그 계집이다! 산 채로 잡아라!"
동료 한 사람이 맞장구를 쳤다.
안춘 소저는 까르르 웃더니, 돌연 몸을 솟구쳐 1장 남짓한 높이
로 훌쩍 날아 올랐다.
바로 그 순간, 후미 쪽에서 <석파>와 <천경>이 부르짖는 고함
소리가 들렸다.
이제 막 앞으로 뛰쳐나가려던 영락거사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느낌을 받고 다급한 발길을 멈추기가 무섭게 뒤돌아보았다. 그리
고는 차가운 숨 한 모금 들이킨 채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앗, 이게!..."
바야흐로 <석파> 정호는 허공 높이 내던져진 채, 팔다리를 허우
적거리면서 우측방 10여 척 바깥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목소리가
더 나오지 않는 것으로 보건대, 이미 죽었거나 기절한 상태인 듯
싶었다.
<천경> 양표는 이제 누군가의 쌍권(雙拳)을 얻어맞고 있다. 무
쇠 주먹 한 쌍이 번갈아가며 통렬한 타격을 퍼붓고 있는데, 영락
거사의 두 눈이 휘둥그래지는 순간에 하늘도 놀라게 만든다는 이
표범 녀석은 도합 7, 8권이나 얻어터지고 있었다.
<천경> 양표는 주먹 한 대를 얻어맞을 때마다 한 걸음씩 뒤로
밀려났다. 기마자세를 굳힐 겨를도 회피동작을 취할 방법도 없이,
그저 두 손바닥을 마구잡이로 휘둘러 아무 짝에도 소용없는 절망
적인 방어동작만 되풀이했다. 그 사이에도 상대방의 쌍철권이 아
랫배, 가슴, 겨드랑이, 목덜미에 연주포(連珠砲) 터뜨리듯 요란한
타격음을 내면서 무차별로 들어박히고 있었다.
첫댓글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