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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스터 영화 <메종 드 히미코> 포스터 |
ⓒ (주)스폰지이엔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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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알고 있던 것이 전부가 아니었다는 깨달음,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라는 깨우침, 이런 것들을 경험하면서 나는 어른이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페인트 회사 직원인 스물네 살 '사오리'. 게이였던 아버지는 오래 전 어머니와 자신을 버렸고, 3년 전 암으로 세상 떠난 어머니의 입원비며 수술비로 진 빚때문에 밤에는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하며 쪼들리는 생활을 하고 있다. 고단한 생활로 인해 늘 심술이 좀 나있는 얼굴이다.
어느 날 젊고 잘 생긴 청년 '하루히코'가 찾아온다. 양로원에서 살고 있는 아버지의 병세가 심각하다는 소식을 가지고 온 그는 아버지의 연인. 사오리에게 일주일에 한 번 양로원에 와 일을 도와달라고 한다. 물론 만만찮은 보수를 제시한다.
갈등하던 사오리는 아버지의 유산을 기대하고 양로원 <메종 드 히미코>로 간다. '메종 드 히미코'는 '히미코의 집'이란 뜻으로, '히미코'는 아버지 테루오의 또 다른 이름.
아름다운 해변에 세워진, 열 명 남짓한 게이 노인들을 위한 집. 그러니까 '메종 드 히미코'는 가정과 직장을 모두 버리고 게이 바의 마담을 선택한 히미코의 필생의 과업과도 같은 것이었다.
돈을 대주는 후원자 없이는 양로원을 유지하기는 어렵고, 이웃들의 멸시와 거부감을 고스란히 감당하면서도 자기들끼리 모여 사는 게이 할아버지들은 그들만의 안락함과 평화를 누리며 노년을 보내는 것 같다.
그러나 낯선 세계에 발을 들여놓은 사오리는 그들의 생각과 행동과 기분을 받아들일 수도 이해할 수도 없다. 겉모습은 할아버지인데 꽃무늬 옷에 화장, 말투며 몸놀림은 완전 여자다. 거기다가 이미 남이 된 지 오래인 아버지는 사오리에게 그저 미움의 대상이며 원망스러운 존재일 뿐이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에게 손가락질 받으며, 또 사랑하는 가족과 연락을 끊은 채 살아가야만 하는 사오리 아버지와 다른 할아버지들의 속마음도 겉모습만큼 마냥 편안하고 넉넉하기만 할까.
선택에는 언제나 책임이 따르는 법. 게이 할아버지들은 살아오면서 어느 시점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인정하고 그에 적합한 삶의 방식을 택했기에 많은 것을 잃어버릴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선택한 길이 보통 사람들과 달랐기에.
시간이 흐르면서 사오리는 양로원 할아버지들과 마음으로 가까워지고, 아버지의 연인인 꽃미남 하루히코와의 사이에도 무언가 모를 감정이 오가는 것을 느낀다. 그러면서 그들이 다른 많은 사람들과 성(性) 정체성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겪어야 하는 부당한 모욕에 자기도 모르게 그 누구보다 더 화를 내고 가슴 아파한다.
영화 속 게이 할아버지들은 가족들에게만은 숨겼을지 몰라도 어쨌든 자신의 성(性) 정체성을 스스로 인정하고 밝힌 사람들이다. 만일 그들이 끝까지 드러내지 않고 살았더라면 어땠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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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메종 드 히미코(히미코의 집)> 전경 게이 양로원인 '메종 드 히미코'의 전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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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그랬다면 자신이 누구인지를 밝힘으로써 잃은 많은 것들을 어쩜 그대로 지니고 살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자신을 끝까지 속이며 살아야 하는 삶은 또 얼마나 많은 것을 잃는 것일까.
사실 게이와 같은 성(性) 정체성의 문제가 아니더라도 가장 가까운 배우자나 자식마저 등 돌린 노년의 삶이 우리 옆에는 셀 수 없이 많다. '등 돌림'이 반드시 경제적인 것만은 아니다. 심리적, 심정적, 정서적인 것까지 포함한다면 우리는 서로 엄청난 거리감을 느끼며 등 돌린 채 살아가고 있다.
영화 <메종 드 히미코>는 나와는 다른 것, 그러나 틀린 것은 아닌, 그런 다름에 대해 이야기하며 그 사이에서 가능한 소통을 이야기하고 있다. 진정한 소통이 반드시 같음에서 오는 것은 아닐 테니까.
한 가지 덤으로 얻은 것이 있다. 앞으로는 종교적인 배경이 같은 사람들이 모여 사는 양로원에다가, 채식 주의자를 위한 양로원, 모두가 애완동물을 기르는 양로원도 생길 거라는 이야기를 많이 했었는데 '게이 양로원'도 얼마든지 가능하겠다는 것(물론 외국에는 이미 실제로 있다고 하지만).
미처 알지 못했던 다양한 노년의 삶을 보는 일은 늘 새롭다. 알아야 이해할 수 있고, 소통할 수 있으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