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발선이다
하늘을 쳐다보니 구름이 아직 해를 가리고 있다.
회색빛 짙은 구름사이로 아련한 음성이 들려온다.
'더 이상 발차기해서는 안됩니다. 마라톤도 삼가시구요'
몇 년전 의사선생님이 나의 관절 엑스레이를 보고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었다. 당시 나는 어렸을 적 꿈이엇던 무술 사범이 되고 싶어 저녁에 합기도를 배우던 늦깍기 수련생이었다. 나이들어 좋아서 한 운동이어서 유별나게 열심히 한 것이 발단이었다. 그토록 좋아서 시작한 운동인데. 여기서 포기해야 하나 많은 생각들이 나의 마음을 뒤흔들었다. 그러나, 고민은 또다른 고민을 낳는 법. 치료를 받아 회복하고 다시 운동해야 겠다는 마음이 들었고, 그 때 자연스레 치료 목적으로 생각해낸 운동이 수영이었다. '수영부터 다시 해보는 거야, 관절치료에도 효과가 있다고 하니 다시 격한 운동도 할 수 있겠지'
"탕, 와와, 출발이다"라는 소리에 번쩍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새 각 클럽의 철인들이 시퍼런 바다속으로 뛰어들기 시작했다. 나도 곧 뒤질세라 바다속으로 뛰어들었고, 그동안 바다수영 동호회(웅상돌핀스) 활동을 통해 갈고 닦았던 수영 실력을 뽐내기 위해 선두그룹속으로 합류했다. 수영코스 1.5km 중 300m 지점. 벌써 난 철인들의 수영 몸싸움에 밀리고 있었다. 한마디로 바닷속은 전쟁이었고, 바다에서 살아남기 위해 고군분투를 해야만 했다. 발을 잡고 늘어지는가 하면, 얼굴을 발로 차기도 하고, 심지어 뒤좇아와서 내 등을 누르고, 타고 넘어가는 것이었다. '꼬르륵, 꼬르륵' 물을 먹기 시작했고,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아올랐다. 순간 또다시 내등을 타고 넘어가는 철인을 붙잡고 "이봐요, 철인경기지만, 너무 더티하게 경기하시는 것 아닙니까?" 그러나, 본인도 치열한 바다에서 살아남기 위해 어쩔수 없었다는 듯이 나를 바라보는 미안한 눈빛에 더 이상 다그치지도 못했다. '자, 서둘러 가자' 스스로 파이팅하고 다시 난 수영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몸싸움에 너무 진이 다 빠져 750m 반환점에서 포기하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지난 밤, 감기, 몸살기에도 불구하고, 약을 챙겨먹지 못했던 탓에 컨디션은 엉망이었고, 게다가 생각지도 않았던 수영 몸싸움까지. '하지만, 여기서 물러서면 철인이 아니지' 마음을 다잡고 결국에 1.5km를 죽을 힘을 다해 완영하였다. 물밖으로 나오자마자 시간을 보니 47분. 물속에 너무 오래 있었다. 뒤에 좇아오는 사람은 불과 대 여섯명 남짓. 서둘러 사이클을 타기 위해 바꿈터로 향했다.
바꿈터에는 그 많던 사이클들이 몇 대만 덩그러니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속히 내 애마로 달려가서 준비를 마치고 40km 길을 가기위해 애마위에 탔다. 사이클 코스는 3바퀴를 돌아야 한다. 먼저 앞서갔던 철인들이 보이기 시작했고, 같은 클럽소속 회원인 나인(아이디명)도 보였다. 나인은 사이클 타는 폼이 너무 멋지다. 이번 대회 베스트포즈상의 후보에도 올랐다. 나도 다리가 길면 후보에 오를텐데 ㅋㅋ. 어째든 철인들이 다시 보여 안심이 된다. 그러나, 마음속과는 달리 반대편에서 철인들이 지나가면 먼저 주먹을 불끈 쥐고, "파이팅, 끝까지 가는거야" 힘찬 목소리로 격려해준다. 낄낄, 격려를 받아야할 사람은 뒤쳐져 있는 낸대 ㅎㅎ. 어째든 철인대회는 앞에 들어오는 사람, 뒤에 들어오는 사람 모두 박수를 받는다. 앞서가든, 뒤처지든 모두 힘들기 때문이다. 거리에서 기분좋게 환영해주는 사람들에게 멋진 브이자 포즈도 취해본다. 여유만만이다. 조금전까지 수영에서, 전쟁터에서 살아돌아온 패잔병의 모습은 사라지고, 기분좋게 경치까지 구경하면서 나의 빨간 애마와 함께 약간 추운듯한 바람을 즐긴다. 2바퀴를 도는 순간, 자원봉사자들이 "직진입니다"고 한다. '흥, 난 아직 한 바퀴남았는데...' 기분이 다운된다. 그래도 끝까지 포기는 없다. 마지막 바퀴를 돌고 있을 때 갑작스레 응급차 사이렌 소리가 들린다. 코스중에 도로로 파도가 넘어오던 곳이 있었는데, 위험해보였다. 혹시, 그곳에서 사고가... 궁금도 하고, 나도 조심스레 그곳에 진입할려던 순간, 아니나 다를까 철인 한사람이 도로 바닥에 누워있고, 응급원들은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누워있는 철인은 눈을 감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다행히 심하게 다치진 않은 것 같은데, 완주하지 못한 것에 대한 자책을 하고 있는 걸까' ' 그래도, 당신은 최선을 다했어요, 용기 잊지 마세요' 마음속으로 누워 있는 철인에게 격려를 보낸다. 이런 저런 생각에 어느새 나는 마지막 바퀴 반환점을 돌고 있었다. 그러나, 앞에도 철인들은 보이지 않고, 뒤에 좇아오는 철인들도 없다. ' 내가 꼴찌인가 보다, 철인은 꼴찌가 더 박수를 받는거지' 스스로 위로해보며 더욱 애마와 달렸다. 한참뒤 사이클 완주 지점이 보이고, 어느새 내 뒤에도 대 여섯명이 뒤좇아온다. 사이클 기록은 1시간 43분.
멀리서 같은 클럽 소속인 아이언맨님이 카메라를 들고 마중나온다. "지구인(본인 아이디명) 파이팅, 힘내라, 힘!" 고맙다. 이번 대회에서 선수가 아닌 스텝으로 왔는데, 선수들 뒷바라지에 여념이 없다. 회원들이 집중해서 경기할 수 있는 건 뒤에서 말없이 도와주는 스텝들의 힘이다. 곧 바꿈터에서 운동화로 바꾸어 신고, 물 한모금 마시고, 마지막 코스인 마라톤 10km를 달리기 위해 길위로 내달렸다. 마라톤을 할때면 인생이란 것이 결국 혼자 가야할 길이란 생각이 든다. 같이 의지해서 달리면 덜 외롭지만, 그래도 길은 자기가 가야할 몫, 힘들더라도 남자답게, 담대하게 가는 게 필요하다.
'아, 참 파워젤을 안먹고 왔네' 파워젤은 마라톤 경기뿐만이 아니라 철인경기를 위해선 필수 영양식인데... 정신없이 수영하고, 사이클을 타다보니 물 세모금 밖에 먹지 못했다. 걱정이다. 난 달리는 도중 음식을 섭취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들에 비해 기운이 많이 빠진다. 완주를 하지 못할까 걱정이 앞선다. 시간은 벌써 2시간 30분대를 지나고 있다. 4시간 안에 들어올 수 있을까? 다리는 천근만근, 후들후들 떨린다. 마라톤 코스는 4바퀴. 같은 코스를 몇회씩 달리는 것은 1회 달리는 것보다도 더 지겹고 힘들다. 그래도 첫바퀴는 가뿐히 돌았다. 달리는 철인들의 풍경은 다들 제각각이다. 웃는 사람, 지쳐보이는 사람, 고통스러워 보이는 사람, 걷는 사람, 먹는다고 정신없는 사람, 고함지르는 사람... 인생의 축소판처럼 보인다. 그래도, 삶을 즐기는 사람에게 이길 수는 없다. 삶이 때론 힘들더라도 웃으면서 한판의 축제 마당처럼 즐겨야 한다. 반환점을 돌아 2바퀴째에 접어드니 같은 클럽 홍일점 회원이 마지막 질주를 하고 있다. " 장군(아이디명) 아, 파이팅 !!!" 이번 양산 마라톤 하프 코스에서 우승한 여자 회원이다. 운동이 힘들더라도 결코 포기하지 않고, 생각하고, 즐기면서 하는 항상 본받을 점이 많은 동생이다. 아, 이제야 3바퀴째 반환점이 눈에 들어온다. 그러나, 갑작스레 몸이 고꾸라진다. 파워젤을 먹지 못한 후유증이 지금에야 나타나기 시작한다. 4시간 안에 완주를 못하는 것은 아닐까? 완주메달은 받아야 하는데... 별별 생각이 다 든다. 하지만, 내 사전에 포기란 없다. 다리에 서서히 마비가 오지만, 서다가 걷다가를 반복, 결국 골인 지점이 저만치에 보였다. 또다시 달린다. 마지막 힘을 다해본다. 하늘은 어느새 따스한 햇살을 내리고 있고, 마음과 몸은 날아갈 것 같은 흥분에 젓는다. 아나운서가 "255번 철인 주자 들어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당신은 해내셨습니다." 환영의 멘트를 날려준다. 5..4..3..2..1. 드디어 골인. 완주시간 3시간 35분 24초. 가슴이 뭉클하다. 해냈다는 성취감. 철인경기 첫 완주.
다리 무릎 관절이 좋지않아 배웠던 수영에서부터 시작하여 철인에 이르기까지 그동안 쉴새없는 도전이 있었다. 나이 40대에 접어들면서 삶의 재미가 시들해졌던 적이 있었다. 그럴 때 나를 일으켜줬던 것은 다름아닌 뭔가에 대한 도전들이었다. 삶에 도전이 없으면, 그 인생은 소금 안탄 국이나 다름없다. 도전을 통해 우리는 성장한다. 나에게 있어 철인 도전은 하나의 배움이고 성장이었다. 이제 나는 또다른 도전을 꿈꾼다. 내년 있을 제주도 철인3종 대회 아이언맨코스 (수영:3.9km 사이클: 180.2km 마라톤: 42.195km)에 도전할 생각이다. 그리고 내후년 사이판의 철인 하프코스까지... 내 삶이 끝나는 그 날까지 나의 삶의 도전기는 계속될 것이며, 그러한 도전은 내 인생만큼이나 아름다울 것이다.
첫댓글 수고하셨습니다...힘
이제 자전거도 샀으니, 열수하고 열사하고 열마해야 것지 ㅎㅎ
파워젤 안먹고 완주하셨으니 대단해요^^
파워젤 5개나 있었는데, 까먹고 못먹었지 ㅋㅋ
마라톤할때는 귀마개도 끼고 뛰었다니까 , 얼마나 정신없었스면 ㅎㅎ
수고많았다.
몸관리 잘하구..
고맙네, 친구 ^^
뭐든 열심히 하는 모습이 보기좋고 아름다우이 ^^
역시 글에서도 행님의 열정은 2시간에 들어 오는 울진대회 1등보다
더 멋집니다.앞으로도 파이팅!!!!!
나인아, 내년 통영대회때도 재미나게 같이 수영하고, 타고, 뛰어야제 ^^
열심히 준비하삼 ㅎㅎ
멋집니다... 정말.... 라토르도 따라 나서겠습니다..ㅎㅎ
빨리 따라 나서거라 라토르야 ㅋㅋ ^^
넵........ 얼마 안 남았습니다.ㅋㅋ
지구인답게 장하십니다 꼭 담에있는대회 연습잘하셔서 성공하시길
고맙습니다. 누님 ^^
누님 보면서 많은 것을 배웁니다.~~ 그 중에서도 삶의 열정을 ~~
항상 건강하시고 행복하세요 ^^
도전하는 지구인님 너무 아름답습니다. 보냅니다. 짝짝짝
그 열정에 힘찬
안드로메다 철인대회는 없나? 수고했네~ 친구!!! 더욱더 높은 이상을 향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