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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 글쓰기 스크랩 백석 시인- 그리고 자야님과의 사랑이야기
물소리 추천 0 조회 271 14.01.02 17:30 댓글 6
게시글 본문내용

     백석 시인

법정스님과 길상사와 시인백석과 김영한의 인연

백석 시인의 사랑 이야기 [영화 제작 구상?]

백석 시인- 그리고 김자야님과의 사랑이야기

백석 시인과 기생 진향(眞香)과의 애절한 사랑

백석 시인은 그가 사랑했던 한 여인 때문에 더욱 유명해진 인물이다.

백석 시인 연보

참고문헌 (시인 백석의)

시인 백석은?

그 사람을 사랑한 이유 ?- 이생진

시인 백석(白石), 그녀 가슴속에 지워지지 않는 이름

길상사

순수한 서정 시인 ? 백석

백석과 자야(김영한) 그리고 길상사

길상사, 백석과 자야의 못 다한 사랑

보석같이 아름다운 사랑이 숨 쉬는 절, 길상사

 

     

 

 

 길상사에 얽힌 전 대연각 주인인 자야여사가 시인 백석을 애절하게 사랑한 이야기는 많은 분들이 글로 올려 주셔서 잘 알려진 이야기다.

 

 

아래에 옮긴 글은 최근(3/18)에 올려진

백석 시인에 관련된 자료이다.

 

 

 

 

 

 

 

 청산학원 3학년 시절의 백석

 

  함흥 영생 여고 교사시절-백석

 

 

 

 18세 때의 김영한 (자야 김진향)


 

 젊은 시절의 김진향(김영한)

 

 

 

 

 

 

 

 

 

 

 

 
 
백석(白石) Paek Sok  
저자 소개
 

본명은 기행.
1912년 평북 정주 출생으로 1929년 오산고보를 졸업하고 토오꾜오 아오야마

(東京靑山) 학원에서 영문학을 공부.
1934년부터 조선일보 기자로 있었으며, 1930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소설

「그 母와 아들」이, 1935년에 시 「定州城」이 각각 당선되면서 문단에 나옴.
1936년 시집 『사슴』을 간행하고, 그 해 함흥 영생고보 교원으로 전직,

1938년 다시 서울로 돌아왔다가 1939년 만주로 이주.
1948년 「南新義州 柳洞 朴時逢方」을 『學風』창간호에 발표하면서 남쪽에

알려진 작품활동을 끝을 맺게 되며, 1987년 창작과비평사에서 『白石詩全集』

(이동순 편)이 간행되면서 분단의 엄혹한 현실 속에 가려져왔던 그의 문학이

일반에 널리 알려짐.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아 소주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를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디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마가리: 오막살이

고조곤히: 고요히, 소리없이

 ........................

 


 시대가 어려울수록 문학은 꽃 피기 마련인지 일제의 식민지 수탈이 가장 심했던 1930년대에는 유난히 큰 시인이 많이 나왔다.

김기림 김영랑 이육사 유치환 서정주 윤동주…. 그 별들 가운데 시인 백석이 있다. 백석은 1912년 7월 1일 평북 정주군 갈산면

에서 태어났다.

백석(白石 또는 白奭)은 필명이고 본명은 백기행(白夔行)이다. 18세 되던 1930년 단편소설성 ‘그 모(母)와 아들’이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됐다.

신문사의 후원으로 일본 아오야마(靑山)학원 영어사범과에 입학한 그는 1934년 귀국 이후 출판부 기자, 영어교사로 각각 2년

씩 일하다 만주로 유랑을 떠난다. ‘자유’를 위해 생계를 버린 것이다.

뛰어난 기억력과 영어 실력을 가졌던 ‘모던보이’ 백석은 온갖 밑바닥 일을 전전하다 광복과 함께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후 분단과 함께 남쪽에서는 잊혀진 사람이 되었다. 모호했던 그의 행적은 최근에야 1995년 83세에 사망한 것으로 전해졌다.

김일성대학 강사를 했다는 소문도 있었지만 농사를 지으며 살다가 사망했다고 한다.

그의 삶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게 김영한(金英韓·1916∼1999) 여사와의 러브 스토리다. 그녀는 자신이 운영했던 서울 성북구

성북동의 요정 대원각을 보시해 길상사를 만들게 한 주인공이다.

시인은 영어교사 시절 기방에서 그녀를 만났고 일본에서 공부까지 한 신여성이던 그녀와 사랑에 빠졌다. 부모의 강권으로 다른

처녀와 두 차례나 결혼식을 올렸지만 그때마다 며칠을 못 채우고 애인에게로 돌아왔다고 한다.
그는 식민지 시민의 자의식을 표현하는 유일한 방편으로 모국어와 방언에 집착했다. ‘토속적이면서도 친근하고, 감각적인 시

세계’라는 게 그의 작품에 대한 평가다.

올해 5월 내로라하는 시인들은 그의 첫 시집 ‘사슴’(1936년)을 한국 현대시 100년사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시집으로 꼽았다.

오랫동안 역사에 대한 가책과 회의, 고향에 대한 상실감의 토로로 읽혀졌던 백석의 시는 바야흐로 탈(脫)이념시대를 맞아 인간

삶을 관통하는 허무와 상실, 삶의 쓸쓸함을 노래한 것으로 읽히고 있다. ‘나 취했노라/나 오래된 스코틀랜드의 술에 취했노라

/나 슬픔에 취했노라/나 행복해진다는 생각에 또한 불행해진다는 생각에 취했노라/나 이 밤의 허무한 인생에 취했노라/

(‘나 취했노라-노리다케 가스오(則武三雄)에게’ 전문)

....................... 

 

 

 

  

백석시인과 김자야님의 사랑이야기

2006.09.09 18:24

 http://blog.daum.net/woo-yeon/9704462

출처 :우연과 시가 있는 마을   글쓴이 : 우연

 

 

 

 

 

 

 

세상에서 가장 진부하면서도 가장 아름다운 단어 ‘사랑’에 대해서 이야기하려 한다.

사랑은 맛도 없고, 냄새도 없고,형체도 없지만 우리를 늘 몸살나도록 갈구하게 만든다.

[나와 나타샤와 당나귀]의 시인으로 알려진

백석과 그의 애인 김자야와의 눈물나는 기막힌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그 둘의 사랑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는

우선 김자야님의 이야기를 먼저 하지 않을 수 없다.

김자야.1916(89) 서울 관철동에서 출생.

백석 1912년 평북 정주출생(93).

김자야님은 일찍 부친을 병으로 잃고 할머니와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1910년대에 성장했으니까 그때 당시 일제가 강점하고 있던 시기이고

조선 사람들은 어떤 사업에도 손을 댈 수가 없었지만

유일하게 몰두 할 수 있는 길이라곤 금광업 밖에는 없었다.

1918년 당시 금광 채굴이 일대 센세이션을 불러 일으켰다.

그 미칠광자 광산가의 바람은 결국 김자야님의 집에도 불어닥쳐

 

할머니의 친척분이 찾아와 사정하는 바람에 집문서를 빌려주어 가정이 파산되었다.

그 전 까지는 훈장선생님을 두고 살 정도로 여유로웠지만

친척으로 인해 집이 불탄 집처럼 망해버리자 김자야님도 중학교를 중단하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날 둘째언니의 동창(여창 가곡의 명인)수정 언니를 만난다.

그 언니는 집이 가난해서 일찍부터 기생의 길로 나가고 있었던 차

그 뒤로 집안도 넉넉해지고 부모님도 편안하게 모시는 걸 본 자야님은

수정언니를 졸라 따라가게 된다. 그리고 금하 하규일 선생님의 수제자가 된다.

그때 나이 16세이다.

 

가난을 벗어보려고 찾아갔던 그곳은

기생으로서 갖추어야할 예의와 무가,,맵시등의 호된 훈련으로

바가지가 마치 설움을 받아내는 도구인냥 눈물을 담아 마시기도 했다고 한다.

자야님은 남다르게 맵시나 창솜씨가 뛰어나 금하선생님의 사랑을 듬뿍 받았으나

조금도 즐겁지 않았고 오직 가슴속에는 어떻게 공부를 더 할 수 있을까하는 일념뿐이었다.

한때 중학교를 중단하고 이모를 따라 안동여고에 입학해서 학업을 계속할 때

뛰어난 실력으로 조선어연구회에서 관심을 보였는데

그후 해관 신윤국선생님의 도움으로 기생을 그만두고 일본유학을 가게된다.

 

그때 나이20.

유학중에 연희전문 최순주교수님이 찾아와

‘해관선생님과 우리 몇 사람이 자야님을 하와이로 유학을 보내어서 

장차 조선의 여성 일꾼을 만들고자 의논중이라며 이곳에서 공부는 잘 되는지’ 답습까지 올 정도라면 감히 자야님의 학문도 높이 칭송할 정도가 아닌가.

 

그런데 그 무렵

서울에서 소식이 단절되자 귀국하게 된다.

조선어학회 회원들이 일본인에 의해 구속되었으며

해관선생님과의 면회마져 중단되자 선생님을 만나기위해 학업을 중단하고 다시 기생이된다. 

 

왜냐하면 기생이 되어야 커다란 연회에 참석 할 수 있었고

또한 함흥 법조계의 유력한 인사를 만나서 특별 면회를 부탁 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후 해관선생님은 만나지 못했다고 한다.

 

함흥관을 나가게 된 첫날밤.

서울에서 함흥 땅으로 부임해와 있는 멋쟁이 시인 총각을 만나게 된다.

영생고보의 어느 교사 송별회이다.

단 한번 부딪힌 한순간의 섬광이 바로 두사람의 영원한 사랑의 시작이다.

 

백석님은 첫 대면에 자기 옆으로 와서 앉으라고했고,

마신 술잔을 건네면서 손목을 잡고

‘오늘부터 당신은 나의 마누라야.죽기전에 우리 사이에 이별은 없어요.

그는 다시 손을 잡으며 ‘마누라,마누라.’라고 불렀으며 밤이 지날세라

‘오늘부터 마누라 뜻대로 내몸을 맡아 주어야 해요.

자야님은 그날밤 파격적인 충격과 애원에 깊은 늪속으로 빠져들었다고 한다.

 

그때 나이22.

그때 백석님은26세였고 동경에서 영문과를 졸업한 준재였고,

이미 [사슴]이라는 시집을 발간한 신인 시인이었고,

19세에 이미 단편소설[그 모와 아들]로 당선되어 문단에 데뷔했으며

[조선일보]기자로, 잡지[여성]의 편집장으로 있었다.

 

학교의 축구교사를 전담할 만큼 스포츠에 능했으며

이국적인 곱슬머리에 미목이 수려하며,그야말로 ‘모던보이’로 불리우는 청년신사였다.

자야는 백석 시인이 지어준 아호였으며 22세의 어여쁜 기생이었다.

 

그때의 기생이란 가무를 갖추고, 예의범절 행실이 단정하여,

사교계에서 이른바 ‘해어화’ 즉 ‘말귀를 잘 알아듣는 꽃’이라고까지 할 정도로

재능이 뛰어날 뿐만 아니라 대화도 능숙하고, 예능까지 갖추었다 하여

세상에서 그렇게 칭했던 것이다.

 

그 무렵 자야님은 파인 김동환으로부터 수필제의를 받아 [눈오는 밤]이라는 수필을 썼고

그해 친정 어머니는 결핵으로 사망한다.

이렇게 문학 기생으로 세인들의 주목을 받는 특이한 존재가 되었다.

 

둘은 함흥의 같은 마을에서 각각 하숙을 하며 깊은 사랑에 빠진다.

영생고보에 재임하시던 백석님은 5만밖에 안되는 함흥에서는 좀처럼 보기드문 멋쟁이셨고,

학생들은 그를 ‘모던보이’라고 불렀다.

2학년 담임을 맡은 3일후 출석부없이 50명을 호명하여

학생들은 신기한 존재에 선생님의 포로가 되었다고한다.

영어는 반드시 외어오게 하여 뒷날 꼭 시험을 보았다.

학교 축구부 지도를 맡았고 공차는 실력은 수준급이었다.

러시아인과의 대화도 거뜬히 해냈다고 월간[현대시]에 나와 있다.

 

백석은 자야를 바다같이 생각하고,

바다처럼 넓고도 깊은 마음으로 사랑했다.

겨울방학이 되자 고향에서 오라는 아버지의 전갈을 받고 기차를 타고 가다가

다시 자야품으로 돌아올만큼 애지중지 여겼으며

고향에 내려가서는 신문이 배달되 듯 편지는 자야님의 문간에 화살처럼 꽂혔다.

백석님은 고향에서 부모님이 정해준 여자와 첫날밤을 보냈으나

손 한번 잡지 않고 도망쳐와 만주로 도피성 이주를 간다.

‘마누라, 이 연약한 손으로 그토록 추운 만주땅에 가서

어떻게 나의 와이셔츠를 빨고 고생하지?’하며 깊은 포옹을 했다고 한다.

그 당시 구태의연한 관습에 젖은 부모님은 자유결혼을 완강히 반대할뿐아니라

더군다나 기생출신으로서는 결혼도 할 수 없었다.

 

자야님은 미천한 여자로서 그의 입신과 출세를 가로막고 흠집을 남길까 두려워

몰래 서울로 도망쳐 홀로서기를 결심한다.

그리고 새처럼 훌쩍 떠나온 그 녀 앞에 백석은 다시 우뚝 나타나 변함없는 미소로,

도량으로그 녀를 감격시킨다.그 녀를 데리고 함흥으로 가는 기차안에서 흰 봉투를 건네준다.

 

그 속에는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가 적혀있다.

그 둘의 사랑을 다시한번 실감하기 위해 읽어본다.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는 사랑을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마가리;오두막

 

눈이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사랑하고

나타샤가 아니올리 없다

언제 벌서 내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같은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그야말로 백석님은 연애 철학자이다.

아무도 없는 깊은 산속 오두막에서 세상의 더러운 신분같은 건 다 버리고

오두막에서 둘만이 살고자햇던 사랑은 우리들의 마음을 새암나게 한다.

이렇게 서울에 와 있는 자야를 잃을까봐 영생고보를 그만두고 자야품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조선일보사에 근무한다.

그리고 서울 청진동 뒷골목에 살림을 차리고 그녀와 살던집에 의미부여를 하여 시를 짓고,

 

그녀가 사다준 넥타이에 의미부여를 하여 시를 짓고

백석님은 그녀 앞에서는 익살꾼이었고, 젠틀맨이었고,사랑의 열정가였다.

 

또한 푸줏간을 자나갈때면 시뻘건 날고기 덩어리들을 쳐다볼 수 없어 돌아 다녔으며,

친구와 악수만해도 손을 씻고

손님이 왔다가면 문고리를 잡고 나서도 손을 씻을만큼 결백증이 심했다.

자야님이 화를 낼때면 깊은 포옹으로 늘 진한 키스를 퍼부어 대화를 대신하며

그것이 서로의 의사전달이라고..

그것이 통하지 않는 부부는 둔한 센스요.벽창호라고 백석님은 말한다.

 

그의 성격은 남을 비평,결함에 대해서는 입에 담지도 않고

그야말로 관대함이 큰 장점이었다.

술을 좋아는 했으나 마구 마시는 경음가는 아니었고 오히려 조금 마시는 애주가였다.

항상 손에서 책을 놓는 법이 없었고.

 

책을 읽을때는 자야님의 손을 꼭 잡고 읽었으며

잠이들면 팔을 괴어 2,3시간 저린 팔을 참았다고 한다.

목소리는 부드럽고 다정하며 개방적이며 넉넉함과 따뜻함으로 늘 관대했다.

어떤 경우에라도 화를 내지 않았고 책망도 하지 않았고 우스게소리로 스스로 깨닫게 했다.

둘이 산책을 다녔으며 영화를 보았으며,한강변의 낙조를 함께 보았다.

 

그가 즐겨 읽었던 책은 모리악의[예수전] 변윤의[오불이전]을 즐겨 읽었다.

그 당시 세 벗이 있었는데 소설가 허준, 의사이며 수필가인 정근양, 극작가 함태훈

 

그리고 방정환, 영화감독 박기채들로 청진동을 드나들었다.

자야와 사는 동안 백석은 부모님의 만류에 3번이나 결혼을 했으나

3번다 식만 올리고 도망쳐와

 

‘여보,당신 생각으로 여자들의 손은 단 한번도 잡지 않았어.’라고 실토하고 있다.

그 당시 자야님은 백석님의 부모님으로부터 시달려서 방황을 하고

백석 또한 봉건적인 관습 때문에 고민하며 무언의 반항을 보이기 위해

머나먼 이국땅 북만주 황야로 떠나기로 결심한다.

 

백석은 함게 가기를 애원하지만

자야님은 작전상 지혜를 짜 떨어져 있는 동안 잡음도 가라앉고,

노여운 부모님으로부터 잠시 무관심해 질때까지 홀로 지내다가 다시 만나 가정을 이루고자 했다.

 

그러나 남과 북의 땅덩이는 허리가 잘려 두 사람을 마치 갈라놓기라도 할것처럼

소식조차 확인할 수 없는 38선이 생기고 말았다.

 

이것이 백석님과의 짧은 사랑이자 긴 이별입니다.

해방후 백석과 함께 북만주에서 하숙을 같이한

송지영씨를 통해 들은 백석의 행적은 신경에서 무슨 관청을 다니다

창씨개명을 하라는 일본인의 말에 사표를내고 그 후 많은 고생을 겪었을 것이라 한다.

 

인편에 한복 바지 저고리와 검정두루마기 한 벌을 보냈는데

송지영씨 말에 의하면 그 옷만 입고 다녔다고 한다.

 

자야님은 늘 꿈속에서 백석님을 만난다.

‘평양에서 나를 찾으니 가서 일을 보고 오리다.

북조선에서 나를 스파이로 몰아서 체포령이 떨어졌으니

나를 어디든 좋으니 안전한 곳에 좀 숨겨주오. 당신 옆에 누가 혹시 없소?

여보,나 지금 배가 몹시 고프니 아무거나 먹을 것을 좀 빨리 주어요.

이거 어디 허기가져서 사람이 살 수가 있나,

 

늘 꿈속에서 굶주려하는 모습으로 왔다가 살며시 가 버리는 백석 시인

자야님은 시집이라도 안아보고 싶은 생각에 국립도서관까지 갔으나

대출이 금지된 시집이라 시집만 안고 통곡했다고 한다.

한때 월북시인이라 하여 사회적 비난도 받았으나 당치도 않은 말이다.

 

[중앙일보] 문학평론가 백철 선생은 재북시인임을 피력하고 있다.

분단의 혼란속에서 북의 이념을 선택하여 올라간 시인이 월북 시인이다.

 

그러나 백석은 만주에서 살다가 해방이 되자 고향인 평안도 정주로 내려와 살게 되었을 뿐이다.

 

1991년 음력 71,백석의 80세 생신날 아침.

 

당신의 나이26,

내 나이 22

우리들의 청춘은 이제 뜨거운 눈물에 젖어 푹푹 한숨되어 나린다.

연연한 사랑만은 영원하건만 신의 질투인가.

이별이 찾아와 우리는 어이없는 남과북으로 나뉘어

26세의 사진만을 놓고 갖가지 원한으로 말없이 타오르는 한 자루의 향심만이

저 혼자서 쇠리 쇠리 꺼져갑니다.

이제 머지않아 빈손으로 돌아갈 때

당신의 순정이 그대로 서려있는 정열의 시 한 수 들고 저승길 갈 날 기다립니다.

흰 당나귀타고 당신곁으로 떠나가는 자야

영광스럽기만 합니다.

 

김자야님은 3년 전에 사망했다고 합니다.

시인이란 글을 잘 쓰는것도 중요하지만,

마음이 고운 시인이 진정 아름다운 시인이 아니겠는가. 

 

 

 

 

김수철 - 한 (아쟁) - Han | 음악을 들으려면 원본보기를 클릭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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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4.01.02 19:42

    첫댓글 법정스님이 남기신 책은 거의 보았는데.. 길상사, 대연각과 백석시인이 또 그렇게 연결이 되는군요..
    애절하고 아름다운 사랑이네요..
    사람들의 가슴을 울리는 사랑얘기는 어째 다 해피엔딩이 안되는건지?? 그래서 심금을 울리는 것이겄지만서도~~

  • 작성자 14.01.02 21:08

    아주 예전에 백석과 자야와의 사랑 이야기를 책을 통해 알게 되었어요.
    그래서 언제 길상사를 가보려고 했는데 기회가 닿지 않았고
    이번 1월 중에 길상사를 돌아보려고 해요.

  • 14.01.02 21:13

    @물소리 길상사 오실적에 연락하세요.
    시간이 맞으면 가이드해 드릴께요.
    그런데 그 쪽은 눈이 많아서 제 차가 들어 갈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님 걸어서 가죠, 뭐,
    걸어 다니는데는 도사니까요.

  • 14.01.02 21:28

    길상사가 진주 있나? 서울인걸로 아는데~~

  • 작성자 14.01.02 21:40

    예, 맞아요. 서울에 있어요~

  • 14.01.03 09:23

    @물소리 이런, 이런.......
    길상사라고 읽으면서 무의식중에 지리산의 사찰을 생각하고 있었네요..
    재송합니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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