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제 모악산 금산사 소개 말씀 : 이협우 월명종민 (통영 미륵도용궁사 주지) 1. 금산사 개요
금산사는 전라북도 김제시 금산면 금산리 모악산(母岳山)에 위치한 대한불교 조계종 제17교구 본사이다. 여기서 산 이름이 모악(어머니 산)인 데는 금산사야말로 무수한 불자들 길러내는 ‘어머니 자궁과도 같은 산’이란 특별한 의미를 담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 조선 성종 23년(1492)에 작성된 <금산사 5층 석탑 중창기>에 의하면, 금산사는 이미 석가모니 부처님 이전의 가섭 부처님 때에 있었던 옛 절터를 다시 중창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는 금산사의 터전이 오래 전부터 부처님과 인연이 깊었던 것임을 알 수 있게 한다. 금산사는 흔히 통일신라시대 경덕왕 때 진표 율사에 의하여 창건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삼국유사』등의 기록에 의하면, 진표 율사는 금산사의 순제 법사에게 출가한 것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진표 율사 이전에 이미 금산사가 창건되어 있었음을 알게 한다. 현존하는 <금산사 사적>의 기록에 의하면, 금산사는 백제 법왕 1년인 서기 599년에 왕실 기원 사찰로 창건되었고, 크게 부각된 것은 통일신라 시기 경덕왕 때 진표 율사에 의하여 금산사가 크게 중창된 때로부터이다. 2. 진표 율사와 금산사
진표는 금산사 순제 법사에게 출가하여 명산을 찾아 두루 수행하다가 부안 변산의 부사의암에 머물면서 삼업(三業)을 수련했으며 몸을 버릴 정도로 지극한 망신참회(亡身懺悔)의 고행을 하던 중에, 미륵보살이 나타나 《점찰경》 2권과 증과(證果)의 간자 189개를 주고 이르기를 “이것으로 세상에 법을 전하여 사람을 구제하는 방편으로 삼으라” 고 하였다고 한다. 이후 진표 율사는 금산사로 돌아와 중창불사를 발원하고, 경덕왕과 왕실의 후원을 받아 6년에 걸친 대규모 공사 끝에 대가람으로 일으켜 세웠다. 연못을 숯으로 메우고 <미륵장륙상>을 모시고 그 다음에 <금당>을 지어 미륵하생신앙의 불국토를 이루려는 백제 유민의 애환을 달랬다. 이 때가 경덕왕 21년인 762년부터 혜공왕 2년인 766년에 이르는 6년의 기간이었다. 진표 율사에 의한 6년여의 중창으로 금산사가 미륵신앙의 성지로 자리 메김 하였던 것이다. 진표 율사는 백제가 멸망한 후 100년이 지난 뒤에 태어났다. 바야흐로 이 시기는 백제 유민들에 의하여 신라에 대한 항전을 하던 때로써 통일신라에 대한 원성이 높았으며 망국(亡國)의 설음에 허덕이던 백제 유민들은 미륵 하생의 간절한 희망을 품으며 자신들의 고통을 달래주고 앞으로 올 좋은 세상을 간절히 원하고 있던 때였다. 미륵신앙은 크게 2가지로, 10선법계를 닦아 미륵이 계시는 이상적인 정토세계 곧 도솔천으로 왕생하려는 미륵상생신앙과, 말세의 중생들을 건지기 위해 석가의 뒤를 이어 미륵부처님이 이 세상으로 오시는 미래 세상을 기약하는 미륵하생신앙이 있다. 진표 율사에 의해 개설된 금산사 미륵전은 <용화 3회>의 《미륵하생경》을 상징한 것인 데 비하여 고려 때 혜덕왕사에 의해 조성된 미륵전의 '방등계단'은《미륵상생경》의 내용을 표현하고 있다. 방등계단이란 미륵전의 오른쪽 높은 지대(地代)에 고려시대의 석탑을 대표하는 5층 석탑과 함께 자리하고 있는 석종 모양의 부도를 말한다. 방등계단은 2개의 기단으로 되어 있고, 그 기단을 두르고 있는 난간은 도솔천과 그 아래 세계를 구분 짓고 있으며, 사천왕상은 도솔천 아래에 있는 사천왕의 세계를 나타내고 있다.
“모든 일체중생이 존귀하고 평등하다”라는 평등사상을 표현하고 있는 방등계단은 인간이 계법을 수지하고 10선행을 닦는다면 누구나 미륵보살이 있는 도솔천에서 왕생할 수 있으며 미륵보살이 이 세상으로 하생하여 용화수 아래에서 태어나실 때 같이 태어나 깨달음의 길로 인도받을 수 있다는 《미륵상생경》의 내용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고 하겠다. 3. 혜덕왕사와 금산사 진표 율사에 의해 대가람으로 변모한 모악산 금산사는 고려시대 혜덕 왕사 이전까지는 미륵전을 중심으로 하는 단일형 도량으로 존재하여 오다가, 고려 시대에 혜덕 왕사에 의해 화엄사상 등 불교의 여러 사상이 종합된 불교 총합적 성격의 대가람으로 다시 중창되게 된다.
화엄사상은 7세기경에 신라뿐만 아니라 동아시아 전체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 불교사상으로서 의상 대사에 의해 전국에 보급되었음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화엄사상이 가진 논리적 체계와 세계관은, 고려시대에 법상종과 함께 교종의 주도적 종파로 화엄종으로 정착되어갔다. 가. 화엄사상의 개요 화엄사상에 대해 간략히 살펴보면 다음 5가지로 말할 수 있다. 1) 첫째, 화엄사상은 법신불 사상이다. 법신불(法身佛)이란 “진리의 붓다”라는 뜻이다. 이것을 화엄경에서는 비로자나불(vairocana)이라고 한다. 2) 둘째, 화엄사상은 보살 사상이다. 보살사상은 어떻게 하면 부처님이 될 수 있는가에 대해 문수, 보현, 관음보살 등에 의해 6바라밀 등 다양한 보살행에 대해 설해지고 있다. 3) 셋째, 화엄사상은 유심사상이다.
불교는 만물의 주체가 신이라고 하는 神本主義的 宗敎인 기독교와 달리, 마음이 바로 우주의 주인임을 밝히는 心本主義的 宗敎이다. 마음(心)이란 초월의 절대적인 유심(唯心)이 아니라, 연(緣)하여 생(生)하면서 동시에 멸(滅)해 가고, 멸하면서 동시에 생하는 연기의 작용, 그 자체임을 설하고 있다. 4) 넷째, 화엄사상은 법계 연기사상이다. 만물은 어떤 관계로 존재하는가에 대해 설하고 있으며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절대평등을 그 기반으로 하고 있다고 설한다. 이 법계연기사상은 수직사관(垂直史觀)이 아니라 수평사관(水平史觀)이다. 5) 다섯째, 화엄사상은 정토사상이다. 정토란 청정한 불국토라는 뜻으로서, 특히 화엄에서는 연화장 장엄세계(蓮華藏莊嚴世界)를 가리키며, 연화장세계 혹은 화장세계에 대해 설하고 있는 사상이 정토사상이다.
혜덕왕사는 금산사를 86개의 전각을 가진 대규모 가람으로 중창하였다. 또한 화엄사상을 받아들여 `대웅대광명전', `문수전'을 건립하였으며, 아미타신앙과 약사신앙, 법화사상, 지장신앙, 관음신앙, 마지막으로 시왕신앙도 받아들여져 많은 전각이 세워졌다. 나. 금산사 내에 조성된 전각에 관련된 신앙 그 때 당시 조성되었던 전각과 표현되는 신앙은 다음과 같다. 1) 彌勒信仰= 三層丈六殿, 彌勒受戒殿 2) 華嚴信仰= 大雄大光明殿, 文殊殿 3) 阿彌陀信仰= 極樂殿 4) 藥師信仰= 藥師殿 5) 法花信仰= 靈山殿, 能仁殿, 普賢殿, 羅漢殿 6) 地藏信仰= 地藏受戒殿 7) 觀音信仰= 圓通殿 8) 十王信仰= 十王殿 이를 통하여 살펴보면 금산사는 미륵신앙, 화엄신앙, 미타신앙, 약사신앙, 관음신앙, 지장신앙, 시왕신앙 등을 수용하는 대승불교의 특징을 나타내는 종합사찰로서, 혜덕왕사에 의해 이러한 총체적 불교신앙의 공간으로서 재 탄생되었음을 알 수 있다. 4. 수문대사와 금산사 조선초기에는 왕실이나 사대부 및 그들의 부인들을 중심으로 불교가 신봉되어지기도 하였으나 조선 역사 전체로 봤을 때는 불교는 탄압과 쇠퇴의 길을 걸었던 숭유억불의 시대이었다.
그러기에 조선 중기 이후로는 중, 하층민이 신봉하는 민중불교가 되어 민중에 의해 받들어졌다. 이러한 때에 민간신앙으로 전해지던 불교신앙은 숭유억불정책에 의한 극렬한 불교의 탄압으로, 혹은 변란을 당하는 과정에서 사찰과 불상 그리고 많은 불교문화재가 많이 소실되었지만 백성들과는 더욱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며 신봉되어졌다. 특히 임진왜란 당시 금산사 주지로 계시던 뇌묵처영 대사가 금산사에 승병 훈련소를 설치하여 왜군들에게 조직적으로 대항하였다. 그러나 정유재란 때에 왜군들이 금산사에 들이닥쳐 신라 혜공왕 때 세워진 미륵전과, 혜덕 왕사에 의해 크게 중창되었던 86채의 전각들을 모두 불태우는 만행을 저질러, 금산사는 진표 율사가 봉안한 미륵장륙상 철제 대좌를 빼고는 모두 소실되었다. 그 후 조선 인조 때 <수문대사>에 의해 35년 동안 금산사는 새롭게 태어나게 된다. 수문대사에 의해 2개의 불전형(佛典形)으로 다시 중창 되었는데 대적광전을 중심으로 한 <화엄신앙>이 그 하나이고, 삼층 미륵전을 중심으로 하는 <미륵신앙>이 그것이다. 이 두 개의 불전은 남과 북. 그리고 동과 서를 가르며 교차되게 건립되어졌다.
‘삼층장육전’ ‘미륵수계전’ 등은 미륵전이라는 삼층 건물로 통합하여 만들어졌으나 1930년도에 이교도(기독교인)들의 방화에 의해 미륵장륙상이 크게 훼손되었고 이를 1937년도에 다시 복원하였고, 그 후 1993년에 이르러 완전 해체하여 보수공사를 완료하였다. 그리고 수문대사에 의해 화엄신앙과 아미타신앙, 약사신앙, 나한신앙이 한곳에 모여 ‘대적광전’이라는 명칭 아래, 하나의 법당으로 건립되어졌으나 1986년 원인 모를 화재(기독교도의 방화로 의심)에 소실되고 태공 월주스님에 의해 대적광전과 나한전으로 따로 재건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대적광전을 중심으로 금강문과 나한전을 남북으로 잇는 중심축과 미륵전과 대장전을 동서로 잇는 중심축이 교차하는 이러한 도량배치는 금산사가 불타의 진리를 깨우치기 위해서 어느 하나의 사상이나 종파에 치우침이 없이, 선과 교가 공존하며 모든 사상과 내용을 포용하고 있는 대승불교의 신앙체계를 모두 갖춘 종합사찰 임을 표현하고 있다.
5. 그렇다면 미륵신앙이란 어떤 신앙인가? 미륵이라 하면 미래에 오실 부처님이라는 것은 누구나가 아는 사실이다. 여러 경전을 통해 전해진 미륵신앙은 삼국의 불교인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인물들에게 영향을 준 신앙이었다. 물론 어지러운 시대에 혹세무민(惑世誣民)하는 자들이 미륵을 자처해 민중들에게 정신적 혼란을 초래케 하는 일도 있었다. 그러나 진실된 미륵신앙은 사람들에게 희망과 안락을 주는 신앙이다. 미륵이란 범어 'Maitreya'를 음역한 것으로 이것은 ‘자비의 구세주’ 라는 뜻이다. 자비란 인류의 모든 기쁨과 슬픔을 자신의 그것과 동일시한다는 말로서 적극적인 종교적 실천 의지를 내포하고 있다. 가. 미륵신앙의 2가지 일반적으로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미륵신앙은 크게 두 가지로 구분되어진다. 하나는 미륵상생신앙이고 또 다른 하나는 미륵하생신앙이다. 1) 미륵 상생신앙 미륵 상생신앙이란 아직 보살의 신분인 미륵이 수행하고 있는 도솔천을 이상세계로 보고 죽은 후에 도솔천에 다시 태어나기를 바라는 신앙형태로 도솔천에 왕생하기 위해서는 십선도를 일심으로 열심히 닦아 죄업을 참회 수행하여야 한다는 신앙이다. 도솔천에 태어난 후 미륵불 옆에 있다 이윽고 미륵이 하생할 때 미륵을 따라 지상으로 내려와 삼회의 설법을 들어 깨달음의 길로 인도 받는다는 신앙이다.
2) 미륵 하생신앙 미륵 하생신앙은 중생이 핍박받고 괴로움에 처했을 때 미륵부처님이 나타나 사회의 개조와 인간개조를 통해 중생을 구제하고 사회를 변혁하는 후천개벽적인 내용이 아니다. 미륵부처님이 하생하여 오시는 세계는 모든 중생이 자비심을 가지고 십선을 많이 행하고 있는 대자 대비한 세계다. 혼탁하고 어지러운 세계에 오셔서 고통 받는 중생을 구원 하신다는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하면, 모든 중생들이 십선을 열심히 닦아 자비와 평화의 불국토를 만들어 대자대비의 세상이 되었을 때 미륵부처님이 오셔서 미처 깨닫지 못하는 중생들에게 3회의 설법으로 오랜 업장을 소멸하게하고 위없는 깨달음의 길로 인도한다는 것이 미륵 하생신앙이다. 그래서 미륵신앙은 열심히 십선의 도를 닦아 자신의 억겁을 참회함으로써 불국토를 열어 모두 다 같이 성불하자는 기도와 참회의 신앙이다. 그런데 이러한 미륵신앙이 신라시대에는 미륵이 화랑으로 화하여 세상에 현신해 줄 것을 기원하는 화랑도와 결합되어 정치적으로 이용되기도 하였고 후고구려의 궁예에 의해 본래의 신앙에서 벗어나 혹세무민하는 경지 까지 이르게 되었다. 그 후 고려 말 <우왕> 때 <니금>이라는 사람이 미륵불을 자칭하고 나타나 민중들을 우롱하다 처형당하였고, 조선시대 숙종 때 승려 <여환>이 석가모니의 시대는 가고 미륵이 세상을 다스린다는 미륵의 시대가 열리고 있다는 미륵재림신앙을 퍼뜨려 왕권을 도모하다 처형당하기도 했다. 조선말기와 일제시대를 거치면서 암울한 시기에 굶주림과 억압의 고통에서 허덕이다 사회변혁을 꿈꾸는 민중들에게 이상사회의 실현을 약속하는 민중신앙과 결합하여 미륵신앙이 민중들에게 희망을 안겨주기도 하였다.
근래에 와서는 본래의 미륵신앙에서 벗어나 자신들의 교리 속에 미륵신앙을 자의적인 해석과 절충을 통하여 후천 개벽적인 신흥종교로 발전한 경우도 더러 있었다. 이상과 같이 역사적으로 보면 미륵신앙은 때로는 본래의 미륵신앙에서 한참 벗어나 정치적 목적으로 이용되기도 하였고 자칭 미륵의 화신이라는 자들이 나타나 후천개벽을 이야기하며 민중을 기만하는 행위도 나타기도 하였고 때로는 이 땅을 살아가는 민초들에게 희망을 안겨주는 정신적인 의지처가 되기도 하였다. 나. 미륵신앙에서 가르치치고 있는 실천 덕목인 10선도 身業으로서의 殺生 偸盜 邪淫과 業으로서의 妄語 兩舌 惡語 綺語, 意業으로 서의 貪心 疑心 癡心 등의 10惡을 여의고 열 가지 善行을 닦아 行을 하는 것으로 자세한 것은 다음과 같다. 1) 불살생(不殺生) : 살아 있는 것을 죽여서는 안 된다. 2) 불투도(不偸盜) : 도둑질해서는 안 된다. 3) 불사음(不邪淫) : 남녀의 도를 문란케 해서는 안 된다. 4) 불망어(不妄語) :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된다. 5) 불기어(不綺語) : 꾸미는 말을 해서는 안 된다. 6) 불악구(不惡口) : 폭언욕설을 해서는 안 된다. 7) 불양설(不兩舌) : 이간질을 해서는 안 된다. 8) 불탐욕(不貪欲) : 탐욕스러운 짓을 해서는 안 된다. 9) 부진에(不瞋恚) : 화를 내서는 안 된다. 10) 불사견(不邪見) : 그릇된 견해를 가져서는 안 된다. 결론적으로, 금산사를 중심으로 불교사상적인 접근을 해보면 우선, 통일신라시대의 <진표 율사>에 의한 금산사의 중창과 미륵전의 건립은 이 지역이 미륵신앙의 중심지가 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였으며, 그 후 고려 문종 때 <혜덕 왕사>에 의해 86동 43개 암자의 대가람으로 중수되었고, 조선시대에 <수문 대사>에 의해 대승불교의 대표적인 부처님과 보살님들을 모두 수용한 대적광전을 세우게 되고 한국불교의 특징인 통 불교적 경향을 반영하기 시작하였다. 금산사는 대적광전에 화엄의 법신불인 비로자나불을 주불로 좌우에 노사나불과 석가모니불의 삼신불을 봉안하여 정토사상의 연화장세계를 그리고 있다. 또한 금산사는 청정한 불국토에 가기위해서 자기완성과 이웃구제의 원을 세워 끊임없이 정진하는 보살도의 실천을 강조하고 있는 사찰이며, 1700년대에는 환성지안스님에 의해 수천명의 신도가 참여한 화엄대법회가 열리기도 하였다. 사회가 안정되었을 경우에는 십선을 닦아 도솔천에 오르려는 미륵상생신앙이 발전하였고 사회가 불안정하면 미륵보살에 의해 구원을 기원하는 미륵하생신앙이 발전하게 된다. 일제시대가 되면서 우리 민족은 그 어느 때보다도 전면적인 위기에 처해 있었다. 민중에 의한 미륵신앙은 하생신앙을 토대로 한 새로운 종교가 일어나게 되었으며 일제치하에서 우리 민족에게 애환을 달래주고 희망을 심어주는 구심점 역할도 했었지만, 순수한 미륵신앙에서 벗어난 혹세무민하는 종교활동으로 변질되어 나타나 사회에 많은 물의를 일으키기도 하였다. 1960년대 태공월주스님에 의해 미륵사상과는 거리가 먼 의사 미륵신앙이 번성하여 사회적 폐단이 이는 것을 보고 불교 본래의 자세로 되돌아갈 필요성이 제기되어 1966년 `미륵정심회'를 조직하였다. 태공월주스님이 그의 제자인 도영, 도법, 평상, 원행스님 등과 함께 10선행을 권장하며 “미륵 바르게 알기운동”을 펼치고 있지만 미륵신앙을 표방한 몇몇 신흥종교들이 정통의 미륵신앙에서 벗어나 있는 현실을 보면 심히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6. 금산사에서 꼭 봐야 할 문화재 4가지 금산사에는 석조유물로는 노주(보물 제22호), 혜덕왕사 진응탑비(慧德王師眞應塔碑 : 보물 제24호), 5층석탑(보물 제25호), 석종(石鐘 : 보물 제26호), 6각다층석탑(보물 제27호), 당간지주(幢竿支柱 : 보물 제28호) 등이 있다. 또한 미륵전(국보 제62호), 대적광전이 있었고, 그밖에 대장전, 명부전(冥府殿), 나한전(羅漢殿), 일주문, 금강문, 보제루(普濟樓), 종각, 중향각, 칠성각 등의 건물과 수계(受戒)의식을 행하는 방등계단(方等戒壇) 등이 있다 이러한 금산사의 유형 문화재 가운데 특히 우리가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미륵불이 솥처럼 생긴 철제 연화좌대 위에 계시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진표 대사가 김제에 금산사를 세울 때 거대한 솥(甑 : 시루)처럼 생긴 철제 연화좌대를 조성하고 그 위에 미륵불상을 세웠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진표 대사는 어찌하여 미륵불을 솥처럼 생긴 연화좌대 위에 세웠는가 하는 점입니다. 여러분이 직접 답을 골똘히 생각보고, 어째서 미륵불이 솥처럼 생긴 연화좌대 위에 서 계실까에 대한 답을 찾아보시길 바란다. 직접 생각해 보려니 골치가 아프다면 스님을 통해 답을 듣기 바란다. 이 해답은 솥처럼 생긴 연화좌대가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달려있다. 솥에 찌는 떡을 시루떡이라고 하는데서 알 수 있듯이 솥을 다른 말로 시루라고 한다. 예로부터 봉긋 솟은 큰 산을 <시루산> 혹은 <시루봉>이라 불러 왔다. 동방의 조종산인 백두산도 일명 시루산이라 불러왔고, 대전의 보문산의 경우도 가장 높은 봉을 시루봉이라 하여 왔다. 그밖에도 시루봉이라는 이름을 가진 산은 전국에 셀 수도 없을 정도로 많다. 인류 구원을 완성하신다는 미륵불이 솥 즉 시루처럼 생긴 연화좌대 위에 계시는 모습은 바로 미륵불이 이 우주에서 가장 높으신 지존의 보좌에 계시는 분이며, 이 분은 천지의 모든 중생을 구제하실 분이란 뜻이 이러한 모습 속에 담겨 있다. 한편으로, 동북아 문화권에서는 솥이란 현재의 세계를 말한다고 했다. 그래서 중국이나 고대 한국에서는 왕조를 열거나 집을 지을 때 반드시 제사 터를 만들었는데, 그 때 반드시 솥을 걸었다. 솥에는 이러한 관념이 숨어 있기에, 동양에서는 솥을 바꾼다고 할 때는 현재의 정치, 혹은 현재의 세계를 바꾼다는 의미로 이해된다. 그래서 정치인이 솥을 바꾼다고 할 때는 혁명을 뜻하거나 현재의 왕조를 바꾸고 새 나라를 건설한다는 의미로 해석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솥처럼 생긴 연화좌대 위에 서 계시는 미륵불의 의미는, 솥이란 현재를 뜻하니 이 현재의 세계를 딛고 미래의 새 시대 - 개벽의 세상을 열어가는 부처님이 바로 미륵불이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고도 하겠다. 7. 금산사의 포교활동 금산사는 신도들의 신앙생활을 이끌어주기 위한 매월 정기법회는 물론, 신자 교육기관인 [전주화엄불교대학] [익산불교대학] [남원불교대학] 등을 설립, 강력한 신자 교육 통해 전북불교에 새바람을 일으키고 있는 사찰이기도 하다. 8. 금산사 인근 불교 유적지 소개 : 금산사에서 1시간 정도 서해안 쪽으로 이동하면 신라시대 부설거사라는 도인이 살았던 바라볼 望에, 바다 海를 쓰는 <망해사>라는 유명한 절이 있기도 하다. 부설거사의 발자취를 보려면 꼭 망해사를 찾기 바란다. 설법일지 : (1) 2009-10-25(일) 통영 미륵도용궁사 가을 방생&삼사순례 참배사찰 해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