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산마을 그림순례] 동백꽃 지는 바람 속에

[자운영]

출처 ; 월간山

2005.06. 428호

[산마을 그림순례] 동백꽃 지는 바람 속에

남제주 월라봉 감산 마을

▲ 제주의 봄. 58X48cm.

목포발 제주행 여객선(뉴씨월드 고속훼리호 3등 객실 509호)에 드러누운 나는 지루함을 덜고 제주의 숨결에 젖고자 시진 수필집을 다시 넘긴다. ‘그 섬에 내가 있었네’의 저자 김영갑은 지금 남제주 성산읍 삼달리의 ‘김영갑갤러리 두모악’에 있다.

▲ 안덕계곡 동백. 58X96cm

뭍에서 제주로 건너가 정착, 20년 넘게 오직 사진으로 살아온 그는 지금 근육이 퇴화하는 루게릭병에 걸려 죽음을 앞두고 있다. 며칠 전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그의 사진전(‘눈, 비, 안개, 그리고 바람 환상곡, 3.23~4.5)에서 ’생(生)의 봄날을 향한 고행‘의 고백을 듣고 죽음과 맞선 한 사진작가를 떠올렸다.

‘아름다움은 발견하는 자의 몫’이라는 그 자신의 말에서 청춘을 불사른 그의 의지가 엿보인다. 그는 끝내 작가의 운명으로 순교하는가. 그리하여 제주의 빛과 바람이 그의 사진으로 살아 있음을 모두에게 일깨워 주고 떠나려는가. 제주로 가는 길에서 벌써 마음속 꽃샘바람이 인다.

3등 선실에서는 스무 명도 넘는 가족 친지들이 화투놀이에 여념 없는데, 작은 선창에는 수평선이 걸려 있다. 파도를 베고 누웠으니 하늘과 수평선이 맞닿아 돌고 도는 기분, 온 우주가 울렁거리는 느낌이다.

마을 너머로 산방산이 우뚝 솟고

선착장에 이르자마자 찾은 제주시 문예회관. 오늘이 4월3일로 마침 4.3미술제(제12회) 개막에 맞추어 주요 멤버인 강요배 선생을 만나기로 며칠 전 약속한 터다. 1948년 미군정 아래 빚어진 4.3사태는 공식 집계로만 3만 명이 희생된 제주의 슬픈 역사다. 그 사건의 57돌을 맞는 제주는 이제 ‘질곡의 세월을 넘어 평화의 대지 위로’라는 현수막을 곳곳에 내걸었다. 이를 위해 원혼위령비를 세우고 거리굿과 평화기원제, 그리고 국제회의로서 ‘4.3 평화인권 포럼’을 열고 있다.

▲ 유인고씨 산소와 동자석. 33X24.5cm

봄바람에 동백꽃이 떨어지는 거리를 지나 4.3 역사화전 ‘동백꽃 지다’(1998년)를 열었던 강요배 선생은 ‘나무’를 출품했는데, 거친 마티엘의 팽나무 한 그루가 고난의 역사와 삶을 웅변해주는 것 같다. 선생과 인사를 나누었으나 그는 이미 술이 깊은 상태다. 말짱한 정신으로 전시를 치르기엔 아직도 시절이 역겹고 마음의 응어리가 맺혀 있음인가.

제주에 올 때마다 소식을 묻고 도움을 청해온 김유정 선생(제주문화연구소 소장)에게 전화를 걸자 바로 문예회관으로 차를 몰고 왔고, 저녁 식사는 동행인 두 분과 합석했다. 마을 그림을 그리러 온 나에게 동행 중 임수병 선생(대정여고 미술고사)은 따질 것 없이 고향마을인 안덕면의 감산리를 소개하겠다며 매우 적극적이다. 김 소장 역시 현재 ‘김유정의 신탐라 순력도’(KCTV 제주방송)에 소개한 마을로 권하는 터라 이튿날 아침 바로 감산 마을로 향했다.

▲ 박수와 황개창의 바다. 66X24.5cm

아름다운 제주석상 ‘동자석’(김유정 지음)을 전해주며 차를 멈춘 곳은 안덕계곡 주변의 산소. 한 쌍의 동자석이 무덤을 지키는 곳에 다다랐다. ‘죽음의 문화란 원래 일상 속에 존재한다. 존재에 합치된 영육(靈肉)의 관계와도 같이 죽음의 문화는 항상 삶의 문화 속에서 균형을 이루기 마련이다…사실 죽음의 문화는 죽은 자의 문화가 아니다. 죽음의 문화는 단지 산자의 염원 때문에 생겨난 산자들의 비극적 문화 축제다.’

김 소장의 글은 명쾌했다. 따라서 무덤의 동자석을 박제된 유물이 아닌 존속의 대상으로 마주하고 붓을 든다. 울창한 솔밭과 야자수에 둘린 산소, 그 돌무더기 울타리엔 영원히 이승과 저승이 오가는 작은 문이 나 있다.

감산리 마을 전경을 살피러 군산(軍山)을 오르니 정상을 향해 갈수록 바다가 넓어지고 바람이 거세다. 마침내 산정에서 돌아보는 일망무제의 산, 마을, 바다. 마을 너머로 산방산이 우뚝 솟고 군산 아래로 마을을 감싸는 월라봉이 미끄러지며 쪽빛 바다가 펼쳐진다. 마라도와 형제섬이 한눈에 들어오는 장면. 몇 해 전 김정희 선생의 유허지 대정(大靜)에 머물며 화첩을 펼쳤던 기억도 스쳐간다. 그 산방산 주위로 물결치듯 흘러가는 오름들. 그 능선을 따라가면 한라산으로 오르게 되는 풍경이다.

감산 마을은 이 너른 시야 속에서 살펴진다. 행정구역상 남제주군 안덕면에 속하며 남쪽은 바다에 접하고, 북쪽은 상창리, 서쪽은 화순리, 동쪽은 창천리와 대평리에 인접해 있다. 관광지로 유명한 안덕계곡이 마을 앞을 감싸고 흐르며, 동남쪽으로 군산(335m)과 월라봉(201m)이 마을 앞을 막아 실제 바다와 인접해 있으나 산촌처럼 느껴지는 마을이다.

감동의 양춘선씨 인생 여정

▲ 팽나무 길목. 21X30cm

임수병 선생을 길라잡이로 찾은 월라봉 기슭을 따라 내려간 안덕계곡 하류에 비경이 기다린다. 해송이 울창한 박수에서 보니 벼랑이 절경인 황개창이 바다 위에 떠 있다. 또 점심을 신세지고 이제 머물 곳을 부탁하자 마을에서 양춘선씨 春先·62세)가 운영하는 완민박에 여장을 풀게 한다. 남편인 오승완씨(吳昇完·63)의 이름 끝자리를 딴 상호다. 한편 듣기로 양씨의 딸이 그림을 그린다 하므로 궁금한 차에 인사를 나누니 뒤늦게 제주대 동양화과를 나온 오영혜다. 그녀는 초면인 나의 그림책을 읽었노라며 반기니 번지수를 제대로 짚은 셈이다.

안방엔 무슨 사연이 그리도 많았는지 양씨가 탄 온갖 상패와 감사장들이 가득한데, 남편은 어째 거동이 불편한 모습이다. TV 옆의 상패는 남제주군 군민의 날 효행 부분 으뜸 군민상(2004년)의 수상자로 그녀의 이름이 선명하다. 그것은 시부모를 모시며 위기의 남편을 수발하며 고난의 세월을 이겨낸 훈장에 다름 아니었다.

‘1964년 나는 위아래 동네 갑돌이와 갑순이로 남편과 만나 결혼했다. 당시 교육 공무원인 남편을 따라 4~5년 외지에서 보내고 고향에 정착해서는 밭농사와 감귤과수원을 일구며 5남매를 낳고 키우며 살아왔다. 남편의 이해 아래 여러 여성단체에 참여, 사회봉사와 배우는 보람의 있었으므로 도시를 동경하던 미련을 버린 채 행복한 결혼생활에 젖어 있던 중 크나큰 시련이 닥쳐왔다. 1988년 2월4일, 남편이 출근중 교통사고를 당한 것이다. 교감선생님 발령을 두고 일어난 사고였으므로 더욱 망연자실했다.

식물인간이 된 남편을 병원에서 식도 수술집행 15일 후 음식을 먹여도 된다는 의사의 지시에 따라 나는 최선을 다했다. 3시간 간격으로 신선한 과일을 갈아 하루 여덟 번 인삼, 마늘, 대추, 생선과 쇠고기를 번갈아가며 좁쌀에 끓여 투여했더니 40일만에 기적처럼 의식이 살아났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사고 당시의 산소공급 부족으로 얻은 병명은 뇌치매증. 식구들도 알아보지 못하는 남편의 손을 잡고 10여 년동안 서울을 오르내리며 물리치료, 약물치료를 병행한 결과 지금은 회복기에 들어 예전의 남편, 아이들의 아버지로 살고 있으니 마냥 기쁘고 감사한 마음뿐이다’(<농촌 사랑 글짓기 공고> ‘흙과 더불어 살아온 내 반생’ 중에서).

▲ 노을의 감산 마을. 66X24.5cm

여성의 힘은 위대하다. 아니 제주 여인의 강인함과 지순함, 헌신과 희생의 향기로운 삶을 양씨의 모습에서 느낀다. 외동딸로 자라 시집온 탓에 밥 지을 줄도 몰랐다는 그녀가 병든 남편의 수발과 함께 5남매의 교육, 그리고 3천 평의 과수원을 홀로 가꾸며 살아왔다는 사실-. 더구나 제초제를 쓰지 않는 친환경농법으로 귤 농사를 지어 3년째 저농약 품질인증을 받아 수입을 창출하고 있다. 또 손두부와 콩나물, 된장, 청국장은 물론 감식초, 감귤식초도 직접 만들어 보급한다. 이로 인해 KBS '생노병사‘에 출연(2004년 8월3일), 감귤 에센스와 감귤식초를 소개하기도 했단다.

필자 아내에게 선물한다며 내놓은 두 병의 화장수는 손수 만들어 사용하는 것으로, 전혀 부작용이 없다며 열을 올리는 그녀의 얼굴은 환갑을 넘긴 나이가 무색하게 잔주름이 없고 피부도 곱다.

그녀의 저력을 보여주는 증거로 40여 년 동안 꾸준하게 써온 일기, 가계부, 농사일지를 빼놓을 수 없다. ‘가치있는 일의 지속’은 고난의 세월을 넘어서는 법. 내가 그녀의 뜻과 실천을 높이 사자 얼굴을 붉히며 부끄러워하면서도 임자를 만난 듯 자신이 써온 글과 수도 없는 약초, 민간요법에 대한 글들의 스크랩을 펼쳐 보인다. 남제주군 향토음식 연구회를 이끌면서 문학동호인(수필)으로도 활동하니, 실로 그녀의 생활반경은 한계가 없다. 남편의 건강을 위해 근교의 배드민튼장까지 함께 걷고, 자신은 아침마다 젊은이들과 땀을 흘리며 운동한다.

동백꽃 어우러진 절경 계곡

양씨의 깊은 사연으로 밤을 지새운 이튿날 아침, 뜨락엔 백목련, 자목련의 등불을 켜고 모란꽃이 봉오리를 열고 있다. 양씨는 어김없이 귤나무 전정(가지치기)을 위해 밭으로 가고 딸 영혜에게 마을 사생을 권하니 기뻐하여 함께 길을 나선다. 나그네는 선선히 그녀가 살아온 고향의 추억과 인상 깊은 곳을 살펴 주도록 원하였다.

영혜는 먼저 거대한 소나무 한 그루가 서 있는 언덕으로 갔다. 어릴 적부터 보아온 나무로 외로울 때면 이 소나무를 찾는다고 한다. 아버지와 함께 자주 왔다는 안덕계곡의 지류인 임금내. 그리고 온갖 약초와 나물을 뜯었다는 추억이 여문 길목에서 바라보는 거대한 소나무. 그 깎아지른 언덕 위로 마침내 노을이 붉어왔다.

▲ 바위와 봄꽃. 24X17cm

이튿날은 이곳의 명소인 안덕계곡을 찾기로 하고 화첩을 꾸렸다. 한창인 유채와 돌담의 민들레, 그리고 냉이와 광대나물 꽃이 화사해 작은 화첩에 옮기는데 꼬마녀석 둘이 자꾸 따라 붙는다. 알고 보니 무슨 사연인지 둘 다 어미 없이 할머니들 품에서 자라는 아이들이나 그 표정은 의외로 쾌활하다. 오늘은 이 꼬마들을 앞세워 안덕계곡에 이른다. 계곡 비경은 동백꽃과 어우러진 절경이다. 모가지째 통꽃으로 떨어지며 흐르는 낙화수류(洛花水流)의 시간이다.  언젠가 인사동 초당의 시인 최정해(崔靜海)님이 지은 ‘안덕계곡 동백꽃’이 생각난다.

님이여
벼랑이어요
제 손을
제 발을
꼭 잡아 주셔요
눈보라
낭떠러지면 어때요
제 핏빛 심장은
참 숯불

…

동백꽃 지는 바람 속에 화구를 펴고 붓을 든 사이 아이들은 벼랑 위로 기어오르고 계곡을 뛰어다니며 장난친다. 그런데 어린 꼬마가 그만 웅덩이에 빠지고 말았다. 순간 울음보를 터뜨리며 통곡하듯 할머니를 불러대니 이 난감함을 어쩌나. 결국 큰 애가 온통 물에 젖은 꼬마를 껴안고 집으로 데려간다.

오후엔 마을회관 옥상에 올라가 주변 전경을 사생했다. 저 멀리 아스라이 한라산이 너른 두 팔을 드리우고 돌아보면 산방산이 우뚝하다. 마을로 통하는 길 우측으로 군산과 월라봉이 마을을 바라보는데, 그 사이의 안덕계곡은 동백꽃을 띄운 채 흐르고 있을 것이다.

안타까운 4.3사태의 희생자들

이장 강경수씨(姜京秀·48)를 만나 <감산향토지>를 얻고 보니 마을의 내력과 오늘의 현실을 살피게 된다. 현재 308가구(946명)에 이르는 큰 마을은 주로 감귤, 화훼(절엽류) 농사가 중심이며, 해안에 처했지만 중산간 지역으로 불린다고 한다.

그의 소개로 전 이장과 노인회장을 지낸 김창석(85) 할아버지를 뵈오니 4.3사태(당시 27세) 때 곤욕을 치르신 분이다. 무려 다섯 번이나 경찰에 잡혀가 매질을 당해 갈비뼈와 팔이 부러지고 뇌경색이 왔다고 한다. 어혈이 든 몸은 개똥을 구워 물에 타 마시며 겨우 회생했다는 할아버지. 그는 당시 일을 상기하며 솟구치는 분노를 진정하느라 입술을 바르르 떤다. 향토지의 기록 상 당시의 마을 희생자(2001년 집계)가 98명이나 점차 피해신고가 늘어나고 있는 추세다.

▲ 하귤. 33X24.5cm

옛 비석을 4.3사태 때 돌담으로 사용하는 등 문화유산마저 훼손된 사정을 안타까워하는 할아버지는 고재일(高在一·78) 할머니를 맞아 12남매를 낳았단다. 아니, 도대체 무슨 기운으로 살아올 수 있었는지 궁금하기 짝이 없는데, 증손까지 합치면 직계가족만 무려 70명에 이른다고 했다.

마을에 와서는 외식을 거부하는 내 철칙을 간파한 양춘선 아주머니의 배려는 따뜻했다. 때마다 독상을 차려주는 정성으로 상을 물린 사흘째 아침. 이장을 따라 신산오름으로 오른다. 오름이라고 하나 낮은 언덕을 오르는 기분인데, 진주강씨(신산악파) 입향조를 모신 산소를 가로지른다. 그런데 눈에 들어오는 두 쌍의 동자석이 반갑기 그지없다.

▲ 한라산이 보이는 감산 마을.

한성부판관유향좌수강공지묘(漢城付判官留鄕座首姜公之墓)와 유향별감강공유인김해김씨지묘(留鄕別監姜公孺人金海金氏之墓)의 동자석이다. 세월이 빚은 검버섯의 안산암은 주변 산방산의 석질로 독특한 형상과 해학의 이미지를 풍긴다.

주변 돌담엔 송악이 열매를 달고 엉켜 있는데, 이는 돌담을 무너지지 않게 하는 역할을 한단다. 한편 이곳에도 저승을 오가는 문이 뚫려 있으며, 동자상은 남녀처럼 느껴지는 두 쌍이 놓여 있다. 그리고 세 분의 옛 비를 한 켠에 따로 모시고 새 비문을 새겨놓았다.

마침내 해묵은 억새가 나부끼는 숲속에서 드러나는 감산 마을의 지형. 산방산 아래로 단산과 모슬봉이 흘러가고, 그 대지는 수평선으로 연결되는 바다다. 그리고 군산에서 내려뻗은 골짝 뒤의 월나봉이 선명하다. 그 아래로 흐르는 안덕계곡은 상상속의 그림이다. 그러나 이 아름다운 정경도 곧 위기에 처해 있다. 인근 마을 화순리에 해군항을 건설한다는 발표(2014년까지 건설)가 공식화되었으니 말이다. 이래저래 마을의 역사가 환경 침해와 함께 오염되지 않을까 염려된다.

그 날 저녁엔 때 아닌 비가 뿌렸다. 사생이 어려운 탓에 12남매를 낳고 길렀다는 할머니가 궁금해 수소문하자 마을회관에 계신다는 정보다. 연신 담배를 피우시는 고재일 할머니의 손은 80년 인생의 나이테요, 굵은 주름은 풍진 세월을 흘러온 강줄기, 그 실핏줄처럼 보인다.

▲ 신산오름에서 본 감산 마을.

마침 2층의 민속관 마을유물을 살피기 위해 할머니를 모시고 가자 그야말로 만물박사다. 백여 가지가 넘는 농기구, 생활용구, 그리고 옛 물건들의 쓰임새, 그리고 제주도 방언의 옛이름을 신이 나서 상세히 일러준다. 물구덕, 고소리, 등들평, 허벅, 말치, 마깨, 도꾸마리, 남자, 논일팡….

“오늘 선상노릇 마이 했으니 담배값은 냈수까?”

“네, 할머니. 담배뿐입니까. 할아버지 모시고 나오셔서 저녁을 함께 하시지요.”

어쩌다 마을에서의 외식금기를 깨고 맞이한 노부부와의 저녁식사. 마을기행에 있어 모처럼 의미 깊은 추억을 가질 수 있었던 행운이었다. 주름진 노부부의 모습 속에서 인생의 여정을, 신산한 제주의 바람을 느낄 수 있었으니.

그림·글 이호신 한국화가

2005.08. 430호

 

[산마을 그림순례] 야생화에 취하고 계곡에 발을 씻다

양구 백석산 송현마을

한반도 국토의 정중앙지역이라는 양구(楊口). 내 마음 속의 스승 박수근 화백의 고향이자 군사분계선, 비무장지대(DMZ)라는 기억속의 땅을 근래 세 번이나 더 찾게 되었다.

박수근미술관 개관(2002.10.25) 때 첫 발을 딛고서 이듬해 ‘박수근을 기리는 작가들’(2003.3~6)에 출품한 당시에는 사정이 허락치 않았다. 그런데 근래 양구가 고향인 한 지인과의 인연으로 다시 두 차례, 한 주간이나 양구에 머물렀다.

▲ 계곡과 돌단풍(33 X 24.5cm)

오늘은 금강산 가던 옛길을 따라가는 DMZ 두타연 트레킹과 제8회 도솔산전적문화제 행사에 참가(2005.6.19)하기 위해 떠나는 날. 모처럼 아내와 함께 채비했으니 참으로 특별한 여정이다. 동행은 차편과 기사를 자청함은 물론 양구가 고향임을 자긍으로 살아가는 장영록(張永錄) 박사(인천대학교 물리학과 교수), 그리고 동료교수인 최순옥 박사(철학 전공)를 합해 네 명이다.

한 달 전 나의 화실을 방문한 장 박사의 전격 제안으로 계획에 두었던 생태우수마을(방산면 송현리) 탐방이 앞당겨졌다. 진정으로 달려오는 인연을 어찌 망설이랴. 그 후 이미 2주 전 닷새나 송현 마을순례를 다녀온 후 또 떠나는 마음은 지난 만남이 한껏 그리움으로 살아 오른 탓이다.

장 박사는 길손을 위한 배려로 춘천 소양강 부두에 세 사람을 내려주고 육로로 차를 몰아갔다. 은빛 물결 호수의 물을 가르는 낭만과 더불어 추곡약수터에 이르러 안내방송에 귀가 쏠린다.

“여러분이 보시는 좌측의 추정리는 한국에서 제일 작은 마을로 두 가구가 살고 있답니다. 그래서 한 분은 이장님이고 또 한 분은 반장님이십니다.”
배는 반시간 만에 38도선을 경유, 양구 선착장에 닿았고 일행은 육로로 온 장 박사 차에 합류했다. 먼저 박수근 미술관을  찾아 ‘다시 봄이 오다’를 관람하고, 한 작가의 영혼을 지키는 권성아 학예연구원에게 감사의 뜻을 전했다. 이어 폐교와 소담한 도촌초등학교도 둘러보았다.

두타연에서 탄성 속 행운의 순간 만끽

이튿날 아침(6.19), 트레킹 때문에 동면 월운리 비득고개 군연병장에 집결하기 위해 차를 바꿔타야 했는데, 방산면장(김창진)의 배려가 그새 지난 날의 정으로 새록하다. 그런데 중도에 합류한 이가 있었으니 서울에서 새벽차를 타고 서둘러 달려 온 이윤희(李潤熙) 교수(인천대 사회학)다. 순간의 선택, 찰라는 영원으로 가는 추억의 가로등이다. 벽암록(碧巖錄)은 말한다. ‘내 삶에서 가장 절정의 날은 언제입니까? 바로 오늘입니다’라고.

트레킹은 비득고개를 출발, 금강산 가는 길목을 경유, 두타연

▲ 두타연(頭陀淵)에서 (24.5 X 66cm)

에서 도시락을 풀고 백석산 전투기념관으로 내려가는 코스다. 길은 생각보다 넓고 평탄했다. 무엇보다 금강산 가던 옛길을 아내와 밟아보는 감회는 벅차고 설레었다. 밝은 햇살과 싱그러운 바람, 계곡물 소리에 빛나는 야생화들. 꿀풀, 초롱꽃. 찔레, 엉겅퀴, 매발톱, 애기똥풀, 함박꽃(산목련), 말나리, 산괴불주머니, 싸리꽃들이 눈부시다. 부디 평시에도 육로가 개방되어 배낭 매고 금강산을 오갈 수 있기를….

드디어 ‘용의 머리에서 폭포수가 떨어지는 것 같고 주변을 둘러싼 기암괴석은 마치 병풍을 연상케 한다(龍頭直落瀑 怪巖屛風造)’는 두타연에 이르러 김밥을 먹는 시간. 서둘러 폭포 아래로 내려가니 모두들 탄성 속에 행운의 순간을 만끽한다. 너나 할 것 없이 양말을 벗고 발을 담그다 슬슬 물속으로 들어가자 열목어(천연기념물)가 살살 종아리를 비껴간다. 모래무지도, 때깔이 신비한 쉬리도 지천이다. 바위에는 가을이면 붉은 빛을 토할 바우나리(돌단풍)가 하늘거린다. 2주 전 방산면의 협조로 군사지역을 둘러보고, 두타연에서 화첩을 펼치며 탁족(濯足)을 즐겼던 나그네의 행운이 새삼스럽다.

두타연이란 이름은 천 년 전 연못 위에 두타사(頭陀寺)란 절이 있었음에 연유한다는데, 물 떨어지는 높이가 10m, 연못은 지름 20m나 되며 바위병풍을 두른 듯하다. 동쪽 암벽에 큰 굴이 있고 수심은 12m나 된다고 한다. 금강산에서 흘러내리는 수입천(水入川) 물줄기를 따라 31번 국도(총 18km)에 이르는 곳에 위치한다. 이곳은 6.25전쟁 이후 50년이 넘도록 통제되었다가 두 해 전(2003.6.1)부터 군부대의 허가를 받아 출입이 가능하게 되었다(<양구문화> 2004년).

두타연이 흐르는 수입천. 그 계곡물로 농사를 짓고 살아가는 마을 중의 하나가 지난 시간 산마을 순례로 닷새를 보낸 방산면 백석산(白石山?1,142m) 송현리(松峴里)다. 마을에서 묵은 다음날은 마침 현충일(60회) 위령제 날이었다. 동면교회 뒷산 위령탑에서 추도기념행사로 조총을 발사하고, 방산초등학생들의 현충일 노래가 이어졌다. 분단의 비극이 남달랐던 현장으로 군부대가 생활에 큰 영향을 미쳐온 양구땅은 경제발전이 더딘 대신 생태계와 자연환경이 남한 최고인 터전이다. 빛과 그림자의 양면은 세상사의 이치인가.

그러나 아주 먼 시간부터 양구의 물길은 샘이 깊은 푸른 물이었고 풍광은 아름다웠나 보다. 퇴계(退溪) 선생이 1562년 가을에 어사로 양구에 왔을 때 읊은 ‘양구(楊口)’가전해 온다.

‘옥돌 금모래 깔린 가을 물은 맑고
돌 밑의 반석(盤石)은 푸른 병풍 같구려
수레를 세우고도 저무는지 몰랐고
기구(埼嶇)한 백리노정(百里路程)도 잊어 버렸네

우리 시대에 보기 드문 정경들

▲ 방산 소나무(24.5 X 33cm)

송현 마을은 수입천을 좌우로 두고 백석산을 바라보며 생겨난 마을이다. 백석산은 흰 돌이 채석되어 불려진 이름으로, 중동부전선에서 최전방 국토방위 요충지로 북한과 대치하고 있다. 맑은 날에는 금강산 비로봉이 정상에서 보인다는, 통일의 그날을 부르는 산이다. 산 아래의 백석아파트는 군인가족을 위해 지은 것인데, 옥상에 올라 둘러보면 마을 전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분명 소나무가 많았을 송현리(松峴里)는 현재 참나무의 강세로 천이현상이 두드러져 솔밭을 찾기 어려운 상태다. 이 아쉬움은 이튿날 수입천의 하류인 파서탕 가는 길목에서 만난 장대한 금강송 한 그루로 위안이 되었다. 주변엔 사람들이 돌탑을 쌓아 신목(神木)의 위상을 기린 흔적이 보이고, 아기 소나무 한 그루가 내일을 기약하고 있었다.
오로지 마을 사업과 주민살림에 헌신하는 이경수(李景洙) 이장 부부는 진정한 마을 머슴이었다. 수입천의 정화사업과 꽃길 조성, 친환경농법(무농약오리농법, 자연퇴비 사용), 폐기물을 이용한 쓰레기 수거시설 등을 통해 생태우수마을(환경부 지정)을 만든 일꾼이다.

서울 구로구 ‘바르게 살기운동 개봉2동 위원회’와 자매결연(2005.5.20)을 맺은 마을은 이장과 함께 새농촌건설 마을총무 박기수(52), 청년회장 권돈찬씨(49)가 주축이 되어 이끌고 있었다. 당면한 공동사업은 수입천 주변을 매립한 터전에 초가정자각을 짓고 넓은 마당을 이용해 각종 축제와 관광시설을 유치하는 일이다. 이미 솔모루정, 금강정, 백석정, 송현정, 디딜방앗간은 지었고, 수입천이 내려다뵈는 경치 좋은 자리에 좀더 큰 초가정자를 세우기 위해 마을주민들이 이장 주재로 땡볕에 모여 이엉을 엮고 있다. 광장 입구는 온갖 야생화를 심었고, 물레방아 아래 어족관에는 물고기가 노닌다.

▲ 김용손 노인회장.

운동장가엔 조롱박터널을 마련했으니 늦가을 박이 조롱조롱 열린 터널로 걸어가 보는 날을 기약하고 싶다. 아직은 빈약하지만 한 켠의 초가에 농기구를 모아 박물관 흉내를 낸 것 또한 마을의 희망이다.

“아, 요즘 시상 오뉴월 땡볕에 이엉 엮는 데가 또 어디 있는가?”
“여기 있지, 어디 있소.”
“참 오래 살고 볼 일이제. 어이 화가 양반, 총무 부부만 그리시우. 저어기 아무나 할망구 하나 꿰차고 와, 그림에 나오게.”
“아니야, 모델비를 우리가 받아야 하제.”

김용손(70) 노인회장을 비롯해 주민들이 모여 볏단을 헤쳐 이엉을 엮는 순박한 모습들. 우리 시대에 보기 드문 정경 앞에 나는 화첩을 펴고 말없이 함께 땀을 흘려야 했다. 그리고 한 바가지 물로 땀을 씻어내고 초가정자에 올라 새참으로 자장면을 먹는 모습에선 잃어버린 ‘두레’의 모습이 찡하다. 벗어놓은 신발만 보아도 남녀노소의 그림자가 아른거리고, 노동의 숨결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실로 땀의 진실은 거룩하다.

방산면 직연폭포는 양구팔경 중 하나

마을이장과 짱구네식당에서 따로 점심을 먹는데 권돈찬, 박기수씨가 함께 자리했다. 그런데 식당주인 서창용씨(46)는 어제 본 소나무 앞의 탑을 수년간 쌓은 이라고 한다. 권돈찬씨는 어젯밤에 찾아뵙고 그린 조계화 할머니(86)의 사위다. 권씨는 부인 김현옥과 동갑나기로 마을에서 소꿉동무로 자라 스물한 살에 결혼, 오남매(1남4녀)를 두었다. 권씨는 나와 동갑이어서 “어이, 권형. 무엇이 그리 급했소, 참 대단해” 하자 권씨는 매우 쑥스러워 하며 “거시기 내가 손이 귀한 집의 맏이라서…” 한다. 금세 말을 트고 받는 사이에 옆자리의 박기수씨가 한 마디 건넨다.

“듣기로 우리 마을을 그린다는데, 제대로 보기나 한 거요?”
몇 마디 던진 그의 질문에 머뭇거리는 나를 보고 “그러면 안 되지요, 내일 내가 시간을 낼테니 잘 살펴보고 가시오” 한다. 참으로 고마운 일이다. 박씨는 마을에서 태어나 군생활 외에 마을을 떠나본 적이 없고, 또 문화원에서 근무했다고 하니 금상첨화가 아닌가.

▲ 백석산 송현 마을(111 X 41cm)

이튿날 대한민국 특전동지회 마크가 선명한 박씨의 차에 올라 사연을 묻자, 그는 실제 특전사 출신으로 특전동지회 강원도지부를 맡고 있다고 한다. 우리는 먼저 방산면의 명소인 직연폭포(直淵瀑布)에 이르렀다. 양구팔경의 하나로, ‘폭포수가 떨어지는 굉음은 지축을 울리고 저녁노을에는 이슬이 마치 저녁연기와 같더라(怪音地軸嗚 落照露煉似)’는 표현을 직연정(直淵亭)에 올라 되뇌어 본다. 산마을의 지형 중 특히 용의 머리에 해당되는 용맥 아래서 마을제(음력 3월3일과 9월9일)를 올리는데, 농촌체험마을 개발로 주변 암벽에 인공폭포를 설치할 예정이란다.

다시 개울로 나와 물속을 가리키며 그는 “열목어, 어름치, 꺽지, 동자개, 퉁가리,  모래무지, 쉬리, 돌마자, 피라미…”를 연발하니 실로 다종의 어류들이 살고 있는 청정지역이다. 푸른 논둑엔 흰 백로가 날갯짓하고 원경의 숲에는 오종종 백로 둥지가 보인다. 잠시 논물을 트고 가자고 하여 논두렁 아래 머물렀는데 무당개구리가 수십 마리 떼거리로 엉켜 있다. 제초제를  쓰지 않는 탓에 보는 상생의 현장이다.

논둑엔 노오란 고들빼기 꽃이 불을 밝히고 숲가엔 노랑붓꽃, 엉겅퀴, 찔레, 금낭화, 매발톱, 기린초, 산목련, 솔붓꽃, 백작약, 아기똥풀, 초롱꽃이 지천이다. 이곳 특산인 금강초롱을 보지 못한 아쉬움은 있지만, 예전 수년간 야생화 탐사 때 화첩에 옮겼던 꽃들이 고스란히 대지에 피어나 있다. 야생화의 천국! 박씨는 어릴 적부터 늘상 보던 것이라 나의 반색을 의아해 하면서도 초롱꽃 하나를 따 뒤집으며 말을 잇는다.

“어릴 때 물가에서 놀다가 초롱꽃에 샘물을 담아 마시던 기억이 납니다. 꽃을 물에 띄워 보내면 그 다음 사람이 또 주워 꽃에 물을 담아 마시곤 했지요.”

이성계 발원문 백자발을 만든 방산가마터

▲ 새참(39.5 X 53cm)

한편 쓰디쓴 소태나무 잎과 곰취, 온갖 산나물을 살피다가 눈길을 돌리자 고라니 한 쌍이 멀리서 열애 중이다. 아침나절이면 짝을 이룬 원앙이 떼를 지어 논둑에 가득하다고 한다. 겨울철에 날아오는 검은독수리 모이주기 행사는 특별히 볼 만하다고 덧붙인다.

그는 다시 군부대 가까운 곳의 계곡  당소를 보여주었고, 익사사고가 자주 나서 ‘귀신바위’로 불린다는 곳에 차를 멈추었다. 실제 바위의 형상 또한 기괴하여 이름에 걸맞는 계곡 건널목은 소나무다리에서 출렁다리로, 그리고 새마을 운동 때 콘크리트로 바뀐 역사를 알려준다. 언제나 봄이면 물철쭉으로 수입천 수면이 꽃밭을 이룬다는 계곡은 한여름의 수입천물놀이축제(7월30~31일)로 승화시킨다고 한다.

이제 끝으로 백석산 줄기 칼봉 아래 도자기터를 찾으니 그 유명한 방산가마터다. 고려시대 백자가마이자 금강산에서 출토된 이성계 발원문 백자발을 만든 곳으로 알려졌다. 또 조선 중기 때는 전국 지방 가마의 원조가 되어 백자 생산에 큰 영향을 끼쳤다. 나는 방산 지역의 40여 기 가마 중 겨우 한 곳을 찾았을 뿐이다.

그 동안 박씨의 안내에 크게 감사하며 길 떠나기 전 마을분들께 인사를 드리려 마을회관으로 향했다. 이장을 비롯해 그동안 낯익은 얼굴들이 모두 형제, 누이 같고 어버이 같다. 부녀회원들이 마련한 식탁은 마을 땅에서 마을사람이 지은 쌀과 채소, 그리고 하천의 물고기로 장만했으니 어찌 맛과 감회가 다르지 않으랴.

그리고 두 주간이 지난 오늘(6.19), 마침내 두타연 트레킹을 끝내고 돌아가는 시간. 일행은 나중에 합류한 이윤희 교수를 위해 또 박수근미술관을 찾아야했다. 이토록 내 마음의 스승은 주변의 인연을 더욱 도타워지게 하는가 보다. 미술관 지붕으로 통하는 길을 따라 언덕 입구 선생의 비문 앞에 두 손 모두고 잠시 묵상했다.

그 동안 선생의 작품들과 함께 만난 양구의 산천과 얼굴들. 그들을 떠올리자 평소 선생이 실천하고 남긴 예술혼이 그리워진다. 그리고 그 감회는 나에게 다시금 화두로 다가왔다.

“나는 인간의 선함과 진실함을 그려야 한다는 평범한 견해를 가지고 있다.”(박수근)

그림·글 이호신 한국화가 lhs1957@lyco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