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시 모음
회주에서 소가...
懷州牛喫禾 돼지 왼쪽 어깨 위에 뜸을 떠줘라
帝心 杜順(제심 두순) 선사 (557 ~ 640) 이름은 법순(法順)이다. 18세에 출가하여 인성사(因聖寺)의 위진(魏珍)에게 선업(禪業)을 받았다. 뒤에 종남산에 숨어 살며<오교지관 五敎止觀> <화엄법계관문 華嚴法界觀>을 지었고, 일대 불교를 판단하여 5문으로 나누고, 또 10현문(玄門)의 단서를 열어 화엄종의 교망(敎網)을 크게 펼치다. 당나라 태종이 지성으로 귀의, 제심존자(帝心尊者)란 호를 주었다. 항상 여러 곳으로 돌아다니면서 “아미타불”을 염하라고 권하고, 오회(五悔)란 글을 지어 정토(淨土)를 찬탄하기도 했다. 정관(貞觀) 14년 11월 84세에 입적, 후세에 그를 화엄종의 초조(初祖)라 부르다.
백척간두에 어떻게 나아갈 것인가
百尺竿頭座底人
장사 경잠(長沙 景岑 ? ~ 868) 머물렀지만, 이후에는 한 곳에는 정주하지 않고 유랑하면서 한 생을 마침. 앙산 혜적(仰山慧寂)과의 문답에서 앙산을 차서 넘어뜨릴 정도의 기용(機用)을 지니고 있어, 대호(大虎) 또는 초현(招賢) 대사, 잠대충(岑大蟲)이라고도 부름.
오도송 증 동림 총장로(悟道頌贈東林總長老)
溪聲便是廣長舌 소식(蘇軾 1036~1101) 썼다가 귀양 갔다.당송 팔대가(唐宋 八大家) 가운데 한 사람. 서예에도 조예가 깊어 宋 4대 書家 가운데 한 사람. 저서에는 <東坡集>(115권)이 있다.
감자를 쇠똥불에.... 糞火但知黃犢味 나찬선사(懶瓚禪師) 그 모습이 세속의 일에는 관심이 없고 게을렀기 때문에 懶瓚·懶殘 이라고 불리워졌다. 남악사에 있을 적에 李必이 그 절에서 은거하였는데 10년 후에 재상이 될 것을 예언하였다. 과연 이 필이 뒤에 예언한 대로 재상이 되었다. 大明禪師라고 시호를 받고 《남악나찬화상가》가 전해지고 있다.
임종게
心月孤圓 경허 성우(鏡虛 惺牛 1846~1912) 본관은 여산으로 전주출신이다. 9세에 광주(廣州) 청계사(淸溪寺) 계허(桂虛)에게 출가하고, 14세에 동학사(東鶴寺) 만화(萬化)에게 배웠다. 23세 때 동학사에서 개강하였으나, 31세 때 여역이 창궐한 마을을 지나다가 생사의 긴박함을 깨닫고 학중(學衆)들을 해산한 뒤, 문을 닫고 좌선하며 묘지(妙旨)를 크게 깨달았다. 32세에 홍성(洪城) 천장암(天藏庵)에서 용암 혜언(龍巖 慧彦)의 법을 잇고, 그 후부터 도처에서 선풍을 떨치면서 가야산(伽倻山) 해인사(海印寺), 금정산(金井山) 범어사(梵魚寺), 금강산(金剛山) 마하연(摩訶衍), 설봉산(雪峰山) 석왕사(釋王寺) 등 여러 절에 머물렀다. 59세에 강계(江界), 삼수(三水) 등지에서 자취를 감춘 후 머리를 기르고 유관(儒冠)을 쓰고 스스로 난주(蘭州)라 이름하다가, 갑산(甲山) 웅이방(熊耳坊)에서 입적하였다. 이때 세수67세, 법랍은 59세였다.
아직 사람으로
快哉渾沌身 * 혼돈(混沌) 모인 일이 가끔 있었는데 그 때마다 혼돈은 후한 대접을 하였다. 그런데 혼돈에게만 구멍이 없으니 뚫어 주는 것이 어떨까?"
천태 한산(天台寒山) 조당집(祖當集) 16과 송고승전(宋高僧傳) 2에는 위산 영우(?山靈祐)를 천태산(天台山) 에서 만난 것이 기록되어 있고, 고존숙어록(古尊宿語綠) 14와 지남(志南)의 천태산 국청선사삼은집기(天台山國淸禪寺三隱集記) 에는 조주 종심(趙州從?)과 만나 문답한 것이 기록되어 있음. 또 당말(唐末) 5대(代)의 도사(道士) 두광정(杜光庭)의 불전습유(佛傳拾遺)에는 한산이 대력(大歷) 연간(766~779)에 천태산에 은거했던 일과, 그의 시를 서영부(徐靈府)가 3권으로 편집하고 서문을 썼다고 기술함. 또 관휴(貫休)의 선월집(禪月集)에도 한산을 경묘하는 시를 싣고 있어, 9세기에는 이미 한산의 전설이 확립되어 있었던 것으로 추측됨.
한 표주박 술을
위응물(韋應物, 737~790?) 생활을 하다가, 현종이 돌아가자 느끼는 바 있어 교유를 끊고 글을 배웠으며, 시를 짓기는 쉰이 넘어서였다. 성품이 고결하고 욕심이 적었으며, 앉는 곳에 향을 피우고 땅을 쓸었다 한다. 자기 집을 정사(精舍)라 부르며 탈속한 생활을 했고, 벼슬은 소주자사(蘇州刺史)에 이르렀다. 사람이 한가로우니
人閒桂花落
사람이 한가로우니 월계수 꽃이 뚝뚝 떨어지고 왕유(王維 699~762?) 서(書)와 음곡(音曲)에도 재주가 뛰어났다. 아우인 진(縉)과 함께 일찍부터 문명(文名)이 높 았으며, 특히 기왕(岐王)의 사랑을 받아 731년 진사에 합격, 태악승(太樂丞)이 되었다. 또한 왕유는 육조시대(六朝時代)의 궁정시인의 전통을 계승한 시인이라 하여 장안(長安) 귀족사회에서는 칭찬이 자자하였고 존경도 받았다. 그의 시는 산수ㆍ자연의 청아한 정취를 노래한 것으로 수작(秀作)이 많은데, 특히 남전(藍田:陝西省 長安 동남의 縣)의 별장 망천장(輞川莊)에서의 일련의 작품이 유명하다. 맹호연(孟浩然)ㆍ위응물(韋應物)ㆍ유종원(柳宗元)과 함께 왕맹위유(王孟韋柳)로 병칭되어 당대 자연시인의 대표로 일컬어진다. 또 그는 경건한 불교도이기도 해서, 그의 시 속에는 불교사상의 영향을 찾아볼 수 있는 것도 하나의 특색이다. 《왕우승집》(28권) 등이 현존한다. 그림은 산수화에 뛰어나, 수묵(水墨)을 주체로 하였는데, 금벽휘영화(金碧輝映畵)에도 손을 대고 있어 화풍 또한 다양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순정ㆍ고결한 성격의 소유자로, 탁세(濁世)를 멀리하고 자연을 즐기는 태도 등은 남송문인화의 시조로 받들어지는 원인이 되었다. 송나라의 소동파(蘇東坡)는 “시 속에 그림이 있고, 그림 속에 시가 있다”고 평하였다. 당시는 장안(長安)에 있는 건축의 장벽산수화(牆壁山水畵)나 《창주도(滄州圖)》 《망천도(輞川圖)》 등이 알려져 있었으나 확실한 유품은 전하여진 것이 없다.
與黃師是(여황사시)
簾捲穿窓戶不?
강촌
淸江一曲抱村流
두보 (杜甫, 712~770) 일컫는다. 《여인행(麗人行)》 등이 있고, 그 밖에도 북송(北宋) 왕수(王洙)의 《두공부집(杜工部集)》 20권과 1,400여 편의 시, 그리고 소수의 산문이 전해진다.
최잔고목이 찬 수풀에
崔殘枯木倚寒林 대매 법상 선사(大梅 法常, 741-808,752-839)
사대는 나의 존재가 아니며
四大非我有 승조법사(338~414)
절이 흰구름 가운데
寺在白雲中 서산대사 휴정(1520~1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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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선 바 위 원문보기 글쓴이: 선바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