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주시 경현동
금계리에 살았던 옛 집에 화재가 나서 1630년 석호공은 석현리에 (석호정사)를
남간공은 월정봉에 (남간정사)를 지어 살았다고 한다.
"남간정사와 금계리 본 집과의 거리는 길게 보면 500여m 쯤이다".
南磵精舍 上樑文(남간정사 상량문)를 보면 ...
"抛樑西(포량서)/들보를 서쪽으로 던지면
月井參差入眼低(월정참차입안저)/월정봉이 들쭉날쭉 눈 아래 들어오고
抛樑北(포량북)/들보를 북쪽으로 던지면
圍坐錦峰高崱屴(위좌금봉고즉력)/둘러앉은 금성산 까마득히 높고 "
제가 답사를 한답치고 많은 사적지.유적지를 돌아보았지만 나주시내처럼 석류나무가 있는곳은 처음이다.
금학헌에서 자고 새벽 불빛에 보인 석류열매들!!
유난히 금계리쪽,특히 월정봉산록에 올라가보니 남간공이 장유선생님께 보냈던
빨간열매들!!!
월정봉 산록에 열린 석류열매가 어찌나 크고 탐스럽던지!!!
남간공이 장유선생님께 보냈던 그석류가 이처럼 크지 않았을까!!!
계간수창에서,, 남간공이 돌아가시기 2년전인 1636년작품!! 이 월정봉에서
4)摘石榴寄谿谷(적석류기계곡)/석류를 따서 谿谷에게 보내다
庭有二株石榴所結凡七顆幷摘寄呈(정유이주석류소결범칠과병적기정)/마당에 두 그루의 석류나무에서 맺은 7개의 열매를 모두 따서 보냈다.
글/南磵 羅海鳳
재벌번역/羅千洙
<제1수>
題詩慙呂翁(제시참여옹)/呂翁같은 그대 앞에서 詩를 지으려니 부끄럽지만
作賦憶張公(작부억장공)/張 谿谷님을 생각하며 글을 짓노라.
幸是根株異(행시근주이)/다행히 뿌리는 서로 다르지만
全緣臭味同(전연취미동)/전연 향과 맛은 같구나.
金滋成酒美(금자성주미)/맛있는 금 알갱이로는 아름다운 술을 만드는데
多子罅房紅(다자하방홍)/씨가 많아서 벌어진 석류 속이 붉구나.
可惜投桃意(가석투도의)/그대가 몹시 귀한 복숭아를 선물한 뜻은
無非永好中(무비영호중)/모두가 오래도록 좋게 지내자는 뜻이라오.
羅應瑞寄石榴有詩次韻以謝(나응서기석류유시차운이사)/나응서가 석류와 함께 시를 부쳐 왔기에 차운하여 사례하다
-계곡집 제29권/ 오언율(五言律)
글/谿谷張維
재벌번역/羅千洙
<제1수>
重橘輕榴實(중귤경류실)/유자는 귀중하고 석류는 그 보다 낮다는
常嫌論未公(상혐논미공)/공평하지 못한 말에 늘 불만스러웠소.
鬪香雖或遜(투향수혹손)/향기를 다툰다면 혹 뒤떨어지지만
言味略相同(언미약상동)/맛으로 말하면 얼추 서로 같다오.
況有穠葩艷(황유농파염)/하물며 농염한 꽃의 무성함이 있고
兼憐老殼紅(겸련노각홍)/노숙해질수록 껍질이 붉어지니 아울러 사랑스럽다오.
珍苞隨遠信(진포수원신)/진귀한 꾸러미가 멀리서 서신과 함께 와서
一嚼解消中(일작해소중)/한 번 깨물자 석류에 대한 불신이 풀렸다오.
시서유고집에 남간공께 보낸 50여편의 시문속에 계정의 주변을 글로 읊었던
그자리란 생각이 든다.
26. 溪亭小吟
- 계정에서 짧게 읊다 원문/시서 김선
번역/나천수(나주목 향토문화원 부회장)
小兒驅黃犢(소아구황독)/어린애가 누런 송아지를 몰아
來飼溪上草(래사계상초)/와서 溪亭의 주변 풀을 뜯게 하네.
莫傷滿溪花(막상만계화)/溪亭에 가득한 꽃은 다치게 하지마라.
傷花翁必怒(상화옹필로)/꽃이 다치면 늙은이 필히 화를 내리라.
25. 憶南磵 溪亭
- 남간의 계정을 추억하며
溪柳參差嫩欲齋(계류참치눈욕재)/溪亭의 버들은 들쭉날쭉 예쁘게 가지런한데
海棠巢外竹高低(해당소외죽고저)/해당화 핀 집 밖으로 대나무가 옹망졸망하네.
何時共把妙理酒(하시공파묘리주)/언제 함께 술 속의 묘한 이치를 잡고
醉待月峯峯日西(취대월봉봉일서)/월정봉의 봉우리에 해가 지기까지 취하고 싶구나.
草沒蕭蕭逕(초몰소소경)/풀은 쓸쓸한 소로 길을 덮고
烟埋寂寂庵(연매적적암)/안개는 적적한 초막을 덮었네.
鶯驚朝雨岸(앵경조우안)/꾀꼬리는 아침 비 내리는 언덕에서 놀라고
魚沫夕陽潭(어말석양담)/물고기는 석양의 연못에서 거품을 내네.
尊酒何千十(존주하천십)/술 동이의 술은 어찌 그리도 많은데
朋儔秪二三(붕주지이삼)/짝꿍 친구들은 다만 두 셋에 불과한가.
坐耽花百日(좌탐화백일)/앉아서 백일 피는 꽃을 탐하고 있는데
爛熳丙丁岩(난만병정암)/병자호란 정묘호란 때 바위에 뿌린 피 꽃이 문드러지게 피었네.
爛熳丙丁岩(난만병정암) (丙丁)이 2개만 보고도 병자호란과 정묘호란인줄을 아시다니....
다음자료는 나주 금계리 아제가 2010년도에 (남간공의 탯자리)를 제공한 사진들입니다.(본메뉴 남간문학관 31번자료중에서...
"600여년 직장공파 가기터 필자의 집 담이다.
옛담의 흔적이 이제는 조금 남아 있다."
"앞면에 보이는 기와집이 원래 필자가 살았던 집이다.
지금은 뒤쪽에 지은 2층집에서 살고 있다."
이 주변이 (남간공의 탯자리)라고 합니다.
가족중에 현정부 요직에 계셔서인지 여기까지만 공개했네요....
이처럼 나주나씨가 대대로 이어온 가기터인 금계리가.
오직! 우편배달, 택배의 효율성때문에 묻혀지는 새주소 때문에 선대들의 가기터인 탯자리(금계리)를 지키려는 나주향토사님의 볼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자.
"
새주소, 도로명을 史觀의 눈으로 볼 수 있는 부서가 동참했어야 한다.
그런데, 그러한 동참 없이 일방적으로 거의 모든 새주소, 도로명을 작성해 놓고, 이제 하루빨리 새주소로 바꿔치기하려고만 노력하고 있다.
필자는 두 가지 사항만을 문제점 내지는 시사점으로 행안부에 건의하고자 한다.
첫째, 주소의 동리명은 어떤 것은 거의 1천년을 지켜온 지명이다.
필자가 사는 동네명은 나주시 錦溪洞이다.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보면 조선조 태종 때부터 이곳에 터를 잡아 살았다는 역사 기록이 있고, 이 터의 지명이 錦溪里 지명이었다는 기록은 조선 인조 조 때의 필자의 中祖 行錄의 기록부터 발견할 수 있다.
이와 같이 과거의 지명이나 주소의 洞里名은 역사성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새 주소의 지명은 과거의 역사성을 부정하고 새로운 지명 주소로 바꾸려고 한 것이다.
새로운 주소나 도로명이 대부분 행정동명이 편리하게 붙여진 것 같다.
역사성을 갖는 법정동명은 없어지고 편리성 때문에 행정동명이 새로운 주소명, 도로명으로 탄생한 것이다.
이것은 빙산의 일각인 하나의 사례이다.
과연 이러한 새주소 지명이 잘된 정책인가.
두 번째 시사점은 반드시 정부가 고려해야할 부분이다"
첫댓글 자료 올리는중
종친님들 남간공 탯자리 보셨지요 감사 합니다.
월정봉 석류 열매가 어찌나 크던지요
촉박한 일정때문에 들리지 못 했던 다보사는 11월 초 이천리 선산 시제때 답사 할것이며
가을 옷으로 갈아입은 월정봉과, 장원봉도 다시 들릴 예정임...
1636년 장유 선생님이 복숭아를 한양에서 나주까지 보내오자 남간공도 마당가운데 열린석류 7개를 모조리 따서 장유선생님께 보냈는데...
아! 월정봉에 열린 석류 맛을 나도 꼭! 맛 보아야 되는데 그때까지 있으려나...
시서유교집에 실린 50 여편의 시문들이 남간공이 사셨던 월정봉 남간정사 주변을 왕궁처럼 묘사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