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파랑길 고흥 75코스 제2부
신촌마을-송강마을-남양마을-동편삼거리-금곡마을 입구-운교마을-장전마을-우도 입구-남양마을
20220608
제1부에서 이어짐
1.서운당(瑞雲堂)의 꿈은 사라져가고
고흥군 대서면 송강리 신촌마을 입구에서 남파랑길 75코스를 역방향으로 계속 이어간다. 내륙으로 들어와서 내륙을 빙 돌아간다. 송강리 신촌마을 농로를 따라 고흥만 송강리 해안 가까운 곳으로 나가지만, 남파랑길은 고흥만 해안으로 나가지 않고 해안 방향과 반대로 오히려 내륙 방향으로 이어간다. 해안 방조제 갈림목에서 남파랑길을 벗어나 고흥만 송강리 신촌마을 방조제 앞으로 나아가 보았다.
방조제에서는 우도와 각도섬, 상구룡도, 중구룡도, 하구룡도 등의 섬들이 분명히 조망된다. 방조제에서 고흥만 오른쪽 북서 해안을 따라가면 대서면 송림리의 구모골해안, 모시개골해안, 장사해안, 뒤숙간해안, 송림해안, 송림방조제, 신기해안을 거쳐 남파랑길 75코스 끝지점인 신기수문동 선착장에 이어지는 해안선이 가늠된다. 그런데 전체 해안길이 조성되지 않아 군데군데서 이어지지 않는 것 같다.
또한 우도 뒤 남쪽과 동쪽의 고흥만 해안은 두원면 예회리와 용산리, 용반리 해안을 거쳐, 노일방조제와 그 왼쪽 과역면 노일리 해안과 도천리 해안, 남양면 남양리와 중산리 해안으로 둥글게 이어진다. 송강리 신촌마을 간척농토 앞 방조제에서는 대서면 안남리 신기수문동 선착장과 두원면 대전리 용등산 사이의 열린 바다를 가운데 두고 양쪽으로 펼쳐지는 고흥만 해안선 전체를 가늠해 볼 수 있다. 그리고 대서면 안남리 신기수문동 선착장과 두원면 대전리 용등산 사이의 열린 바다 뒤쪽으로 보성군 득량만의 오봉산 산줄기를 흐릿하게 잡을 수 있다. 가장 감동적인 것은 고흥만 동남쪽 너머로 고흥의 명산 팔영산이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며 기묘한 암봉들을 살며시 보여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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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촌마을 앞 방조제에서 고흥만 해안길이 송강리 해안과 상남리 해안으로 이어지지 않아서인지 남파랑길은 내륙으로 들어가서 길게 돌아 상남리 해안으로 되돌아나온다. 송강마을 입구를 거치면 흥모재 입구, 그곳에 여산(礪山) 송씨 충양공(忠襄公) 송순례(宋純禮) 신도비가 세워져 있다. 이번 남파랑길 고흥 구간을 걸으면서 고흥 지역에서 여산 송씨가 특별히 번성하고 있는 것을 느꼈다. 여산 송씨의 여러 비석들과 재실 등이 곳곳에서 눈길을 끌었다. 이 지역에 여산 송씨 세거지가 생겨난 뒤, 여산 송씨는 주로 무신 계급으로 공훈을 세우는데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 고흥 여산 송씨의 공적이 많으며 이 공적으로 고흥 지역의 권세가가 되었을 것이라고 추정해 본다.
"충양공 송순례(宋純禮) 역시 조선시대 이산군수, 제주목사, 전라도방어사 등을 역임한 무신이다. 본관은 여산(礪山). 자는 문백(文伯). 송간(宋侃)의 현손이다. 선조 때 무과에 급제하였고, 1583년(선조 16) 아산진(阿山鎭)을 지킬 때 여진인이 쳐들어오자 이를 격퇴하여 동방의 비장군(飛將軍)이라 불렸다. 이 해에 니탕개(尼湯介)의 침입을 물리쳐 그 공으로 선조로부터 악비(岳飛, 중국 남송의 충신)의 『정충록(精忠錄)』을 하사받고 이산군수가 되었다. 1588년 탐오하다 하여 군수직에서 파직되었으나, 그 뒤 다시 제주 목사와 전라도 방어사(全羅道防禦使)를 역임했으며 그의 손자 송홍연(宋弘淵)은 임진왜란 때 공을 세워 무명(武名)을 떨쳤다. 흥양(興陽)의 세충사(世忠祠)에 제향되고 병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충양(忠襄)이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봉두로를 건너면 대서면 송강리에서 상남리로 넘어가게 된다. 송강 버스정류장에서 늦은 점심을 먹고 상남리 남양마을 앞으로 나갔다. 초서체의 서운당(瑞雲堂) 표석이 멋지게 세워져 있다. 상서로운 구름의 집 서운당(瑞雲堂)은, 와토스코리아(주)의 송공석 사장이 고향인 고흥 대서면 상남리에 자립형 노인복지시설을 건립해 2004년 12월에 남양마을회에 기증했다고 한다. 이 시설은 부지 400여평에 건평 70평 규모로 숙소와 식당, 남녀 목욕시설, 체력 단련시설 등을 갖추고, 입주 노인들이 시설에 딸린 텃밭을 가꾸고 닭과 돼지 등 가축을 길러 시설유지비를 충당함과 동시에 입주 노인들의 건강도 챙길 수 있는 자립형 복지시설로 꾸며졌다고 한다.
그런데 어찌된 일일까? 남양마을회에서는 최근 이 노인복지시설을 노인복지시설 용도로 사용하지 않고 내버려 두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고흥FC U-15 축구단 대서중학교 축구팀에 1년을 임대하여 임대료를 받아 이 대금을 서운당 운영에 사용하지 않았다고 한다. 무엇이 문제였을까? 남양마을회에서 서운당 운영의 경비가 부족하다면 경비를 마련하는 대책을 세워서 기증자의 뜻을 잘 살려 노인복지시설을 활용하여야 할 것이다. 상서로운 구름이 불길한 먹구름으로 변하게 되는 것일까? 남양마을 노인들이 아름다운 노후생활을 가꾸는 상서로운 구름이 부활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남파랑길은 내륙의 상남리 남양마을과 동편마을을 지나서 해안으로 나가는 긴 농로를 따라간다. 길게 이어지는 농로에서 봉두로의 금곡마을 입구를 거쳐 대서면 상남리 해안 방조제로 나와 헤어졌던 고흥만 해안과 재회한다. 이곳에서도 송강리 신촌마을 앞 방조제에서 조망하는 풍경과 유사하다. 다만 목적지의 증표가 되는 남양리 산성의 정상부가 가까이서 손짓하고 있어 마음이 놓인다. 남파랑길은 방조제를 건너 드디어 남양면 중산리로 넘어간다.
중산리로 넘어와 중산리 해안으로 나가는 길도 간단하지가 않다. 해안과 멀찍이 떨어져 있는 들길과 언덕을 넘어 중산리 운교마을, 다시 들길과 언덕을 넘어 중산리 장전마을, 이제 장전마을에서 농로를 따라 해안으로 다가간다. 드디어 보고 싶은 섬, 가까이 더 가까이 다가가고 싶은 섬, 우도를 갈대습지 너머로 본다. 대전방조제에서 너를 가까운 듯 바라보았지만 너무 멀게만 느껴졌지. 대서면 안남리 신기해변에서 너를 잡을 수 있다는 생각에 가슴이 뛰었지. 이제 눈짓하는 내 모습을 볼 수 있는 거리의 네가 나를 부른다. 그러나 아직도 네게 걸어갈 수 없다. 네게 걸어갈 수 있는 길, 바닷길이 열리는 그 길에 이르기 위해서는 중산리 중산마을 앞을 거쳐야 한다.
들길과 숲길을 걷고 걸어서 고흥만 해안을 돌고 돌아서 드디어 우도 들어가는 길 앞에 이르렀다. 찌푸렸던 오후 날씨가 맑은 웃음을 띄며 우도섬을 환하게 비춘다. 그러나 바닷길이 닫히고 있다. 2022년 6월 8일의 바닷물이 갈라지는 시간은 07:36~14:13, 지금 시각이 오후 3시 27분, 물이 갈라졌다가 다시 물이 차오르기 시작한다. 다음 물이 갈라지는 시간은 19:17~01:46. 우도마을 입구에서 먼 그리움에 잠긴다. 너를 그리기에는 내 가슴이 뜨겁지 않은 것일까? 언제 너의 품에 안길 수 있을까? 너에게 갈 수 있는 그 날이 아득하게 그려진다. 네게 안겨 보아야 네 사랑을 느낄 수 있고 너 또한 나를 품어 보아야 내 사랑의 깊이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뜨거운 마음을 바람으로 우도에게 보내며 우도마을 가는 길에서 뒤돌아섰다.
제1부에서 이어짐
2.걸은 과정
동북쪽 신촌마을 입구에 세워져 있다. 6km를 걸었고, 15km가 남아 있다. 남파랑길은 송림로 서남쪽 신촌마을로 이어진다.
농로를 따라가다가 왼쪽 언덕을 넘어 넓은 간척농토를 가로지른다.
대서면 송강리 신촌마을은 지명이 없다가 1948년경 하남마을에서 분리되면서 마을 앞에 덕골이라는 골짜기가 있어 신덕이라 불러오다가 그후 새로 생긴 마을이라 하여 “신촌”이라 불렀다.(고흥군청)
농로를 가로질러 중앙 뒤쪽 언덕에서 언덕을 넘어간다.
신촌마을 입구에서 이곳으로 걸어왔다.
고개를 넘어 내려왔다. 오른쪽 농로를 따라가다가 왼쪽으로 꺾어 수로 옆 농로를 따라가다가 오른쪽으로 꺾어 오른다.
이 농로 끝 지점에서 왼쪽으로 꺾어 수로 옆 농로를 따라가야 하는데, 끝 지점에서 오른쪽으로 꺾어 방조제로 나가서 고흥만을 살피고 되돌아온다.
오른쪽에 각도섬, 그 왼쪽에 우도가 있다. 바다 건너편은 보성군 득량만으로 오봉산이 흐릿하게 들어온다. 오른쪽 해안을 따라가면 송림리의 구모골해안, 모시개골해안, 장사해안, 뒤숙간해안, 송림해안, 송림방조제, 신기해안을 거쳐 남파랑길 75코스 끝지점인 신기수문동선착장에 이어진다. 그런데 해안길이 조성되지 않은 것 같다.
우도 앞에 중구룡도와 하구룡도(오른쪽), 우도 오른쪽에 각도섬이 보인다. 우도 뒤쪽 고흥만 해안은 두원면 예회리와 용산리, 용반리 해안을 거쳐, 중구룡도 뒤 노일방조제와 왼쪽 과역면 노일리 해안으로 이어진다.
왼쪽 움푹 파인 곳 두 번째 정상부에 남양리 산성이 있다. 그 아래 고흥만의 남양면 중산리와 남양리 해안이 펼쳐져 있다. 중앙 맨 뒤에 고흥의 명산 팔영산이 흐릿하지만 분명히 보인다. 바다에는 상구룡도와 그 오른쪽에 중구룡도, 그 뒤에 우도가 보인다. 목적지 75코스 시작지점인 남양마을 버스정류소는 남양리 산성 뒤 아래에 위치한다.
신촌마을 입구에서 농로를 따라 걸어오다가 중앙의 언덕을 넘어 이곳으로 와서 방조제로 나갔다가 되돌아왔다.
남파랑길을 벗어나 방조제로 나가서 고흥만을 살핀 뒤 다시 이 갈림목으로 되돌아와 남파랑길을 이어간다.
방조제 갈림목에서 수로 옆 농로를 따라 남파랑길을 이어왔다.
남파랑길은 앞 전봇대에서 오른쪽으로 꺾어 언덕으로 올라간다.
남파랑길은 언덕을 올라서 언덕에서 왼쪽으로 꺾어 이어진다.
수로 옆 농로를 따라오다가 오른쪽으로 꺾어 다리를 건너 언덕길로 올라왔다.
언덕길을 올라와 언덕에서 왼쪽으로 꺾어 이곳으로 올라왔다.
대서면 송강리 송강마을은 마을 형성 당시 마을의 산에 푸른 소나무가 울창하고 마을 앞에 아름다운 바다가 펼쳐져 마을 이름을 송강이라 하였다.(고흥군청)
오른쪽 송강마을에서 이어지는 송강1길을 따라 봉두로로 나간다.
오른쪽 언덕길을 따라 내려왔다. 송강마을을 통과하여 가면 고흥만 해안에 이른다. 남파랑길은 송강마을 해안으로 나가지 않고 송강마을과 반대편 내륙 방향의 상남리 남양마을 방향으로 이어간다.
봉두로로 나가는 송강1길, 비석은 여산 송씨 송순례씨의 신도비, 오른쪽으로 들어가면 묘소와 재실 흥모재가 있는 듯.
송순례(宋純禮)는 조선시대 이산군수, 제주목사, 전라도방어사 등을 역임한 무신.
본관은 여산(礪山). 자는 문백(文伯). 송간(宋侃)의 현손이다. 선조 때 무과에 급제하였고, 1583년(선조 16) 아산진(阿山鎭)을 지킬 때 여진인이 쳐들어오자 이를 격퇴하여 동방의 비장군(飛將軍)이라 불렸다. 이 해 니탕개(尼湯介)의 침입을 물리쳐 그 공으로 선조로부터 악비(岳飛, 중국 남송의 충신)의 『정충록(精忠錄)』을 하사받고 이산군수가 되었다. 1588년 탐오하다 하여 군수직에서 파직되었으나, 그 뒤 다시 제주 목사와 전라도 방어사(全羅道防禦使)를 역임했으며 그의 손자 송홍연(宋弘淵)은 임진왜란 때 공을 세워 무명(武名)을 떨쳤다. 흥양(興陽)의 세충사(世忠祠)에 제향되고 병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충양(忠襄)이다.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송순례(宋純禮))]
오른쪽 여산 송씨 가족묘를 지나 국도77번 봉두로를 건너 송강리에서 상남리 남양마을로 넘어간다.
'송강마을' 안내 표석 두 개와 충양공 송순례와 그 후손의 재실인 '흥모재' 안내 표석 등 표석 세 개가 세워져 있다.
위쪽에 대서면 상남리 교차로, 버스정류소 뒤쪽에 풍천저수지가 보인다. 남양마을은 예전에 풍천마을로도 불렸다고 한다.
봉두로를 건너 봉두로335→1를 따라 대서면 상남리 남양마을 방향으로 진행한다.
다음 버스정류소는 남양인데 금곡이라 적혀 있다. 버스정류소에서 간식을 먹고서 출발한다.
남양은 소가 질매를 벗고 누워있는 것 같아 와우형인데, 마을이 생길 당시 이곳을 지나가던 노승이 마을의 위치나 기후가 중국의 제갈공명이 밭을 갈던 남양과 같다고 하여 남양이라고 불렀다는 설과 고려말경 남양 방씨가 설촌했다고 남양이라고 했다는 설이 전한다. 한때는 물이 많다고 하여 풍천이라고 부르기도 했다.(고흥군청)
남양마을 설촌자인 방정승(房政丞)이 고려말 1080년경에 심었다고 전하는 느티나무 세 그루가 있는 방정자(房亭子)가 언덕 왼쪽에 보인다.
상서로운 구름의 집 서운당(瑞雲堂)은, 와토스코리아(주)의 송공석 사장이 고향인 고흥 대서면 상남리에 자립형 노인복지시설을 건립해 2004년 12월에 남양마을회에 기증했다고 한다.
"자수성가한 50대 사업가가 고향 발전을 위해 물심양면으로 도움을 주고 있어 칭송이 자자하다. 화제의 주인공은 인천에서 양변기 부속을 전문으로 생산하는 와토스코리아(주)의 송공석(52) 사장(사진). 송 사장은 고향인 고흥 대서면 상남리(서운당)에 자립형 노인복지시설을 건립해 11일 준공식과 함께 기증식을 갖는다. 이날 기증식에는 신중식^송영길 국회의원과 진종근 고흥군수, 고흥군 군의원 등이 참석할 예정이다.
지난 4월 기공식을 가진 뒤 8개월만에 완공된 이 시설은 부지 400여평에 건평 70평 규모로 숙소와 식당, 남녀 목욕시설, 체력 단련시설 등을 갖춘 초현대식 건물로 지어졌다. 특히 외부 지원에 의존해 단순한 숙식만을 제공하는 기존의 복지시설과 달리 입주 노인들이 시설에 딸린 텃밭을 가꾸고 닭과 돼지 등 가축을 길러 시설유지비를 충당함과 동시에 입주 노인들의 건강도 챙길 수 있는 자립형 복지시설로 꾸며져 다른 시설들의 새로운 운영 모델로 주목받고 있다.
이 시설이 완공되기까지 어려움도 많았다. 가장 큰 사고는 공사가 한창이던 지난 10월 송 사장의 친형이 현장에서 안전사고로 숨졌을 때, 송 사장은 그 때만 생각하면 목이 메여 말을 잇지 못한다. “모든 것을 덮어버리고 원점으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소외된 노인들의 몸과 마음을 달래기 위해서는 먼저 내가 마음을 굳게 먹어야 겠더라고요”
고흥 대서면에서 태어난 송 사장은 16세에 단신 상경해 갖은 어려움을 겪은 끝에 지금은 연매출 150억원을 올리는 견실한 중소기업을 운영하는 사업가로 변신했다. 어려운 가정형편 때문에 초등학교 졸업이 학력의 전부인 그는 주경야독으로 검정고시를 거쳐 올해 고려대 수시입학에 지원 92대 1의 경쟁률을 뚫고 합격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또 지금까지 모두 7명의 심장병환자를 지원했고 장학금^수재의연금 등 사회복지사업에도 남다른 열정을 보이고 있다."(인터넷 기사 고흥 국종선 기자. 2004.12)
그런데 남양마을회에서는 이 노인복지시설을 노인복지시설 용도로 사용하지 않고 내버려 두다가, 고흥FC U-15 축구단 대서중학교 축구팀에 1년을 임대하여 임대료를 받았다고 한다. 남양마을회에서 서운당 운영의 경비가 부족하다면 경비를 마련하는 대책을 세워서 기증자의 뜻을 살려 노인복지시설을 잘 활용하여야 할 것이다.
이 효행비 뒤로도 2기의 효열비가 세워져 있다.
서운당을 기증한 송공석씨가 이 표석도 기증했다.
환난상휼(患難相恤) 인보상조(隣保相助), 어려운 일을 당하면 이웃끼리 서로 도와 주어야 한다. 적선지가(積善之家) 필유여경(必有餘慶), 선을 쌓은 집안에는 반드시 남는 경사가 있다. 좋은 일을 많이 하면 후손들에게까지 복이 미친다.
남양마을 입구의 표석들을 살피고 남양복지센터 앞을 거쳐 봉두로를 따라 고개로 오른다.
방정자(房亭子)는 사람이 아니라 정자를 이른다. 고려조 1080년대 남양 방씨 방정승(房政丞)이 마을에 들어와 설촌할 당시 언덕에 세 그루의 느티나무를 심었는데 이 느티나무 그늘이 쉼터정자 역할을 하여 방정자(房亭子)라고 불렀다고 한다. 방정자(房亭子)는 느티나무 그늘이요, 느티나무요, 방정승(房政丞)과 일체가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봉두로를 따라가면 왼쪽 들판 너머로 동편마을이 활짝 펼쳐져 있다. 바로 아래 전봇대 왼쪽에 여산 송주석씨 부인 진원 박씨 효열비가 세워져 있으며, 그 아래 오른쪽 언덕에는 어느 문중의 재실이 있다.
남양마을에 속해 있을 때는 새마을이라고 부르다가 1937년 일제강점기 당시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남양으로부터 분리되면서 남양마을 동편에 위치한다 하여 동편이라 고쳐 불렀다.(고흥군청)
어느 문중의 재실인데 솟을대문 현판에 흥경문이라 적혀 있다.
왼쪽은 동강 방향, 오른쪽은 고흥읍과 나로도 방향이다.
남파랑길은 오른쪽 봉두로 큰길로 가지 않고 오른쪽 아래 농로를 따라 이어진다.
남파랑길은 봉두로 지하통로를 통과하여 봉두로 서쪽 아래의 농로를 따라 진행한다.
동편삼거리에서 농로를 따라 봉두로 지하통로 입구로 왔다.
이 농로를 따라 금곡마을 입구까지 내려간다.
남파랑길은 이 농로를 따라 고흥만의 대서면 상남리 방조제까지 이어진다.
남파랑길은 봉두로 아래 서쪽 농로를 따라가다가 해안 방향으로 나아간다.
대서면 상남리 금곡마을은 마을 앞에 가야금처럼 생긴 동산이 있고 ‘밤이면 가야금 소리가 들렸다’고 하여 개골이라 칭하였으나 1930년경 가야로 불렀다가 1948년 금곡으로 고쳐 불렀다.(고흥군청)
봉두로 아래 서쪽 농로를 따라가는데 이 농로는 봉두로와 헤어져 해안 방향으로 나아간다.
왼쪽 뒤 금곡마을 갈림목에서 농로를 따라 올라왔다. 남파랑길은 앞 봉두로 입구에서 봉두로와 헤어져 해안으로 나아간다.
간척농토의 농로를 따라 대서면 상남리 해안의 방조제로 나아간다.
뒤쪽 움푹 파인 곳 오른쪽 두 번째 산봉 정상부에 남양리 산성이 있으며 그 뒤 아래 남양마을 버스정류소가 남파랑길 75코스 시작지점으로 목적지이다. 앞쪽에 보이는 고흥만 상남리 방조제로 올라간다.
우도 옆쪽의 섬들은 왼쪽부터 하구룡도, 중구룡도, 상구룡도 등이다.
맨 뒤 오른쪽 산봉이 남양리 산성, 해안은 남양면 중산리 해안이다.
봉두로 서쪽 농로 갈림목에서 해안으로 나오는 농로를 따라 태양광발전소 옆으로 걸어 방조제로 나왔다.
방조제 건너편 해안은 오른쪽부터 대서면 송강리 해안(송강, 신촌), 그 왼쪽은 송림리 해안(구모골)이라고 가늠한다.
우도 뒤쪽에 각도섬, 오른쪽에 하구룡도, 중구룡도, 상구룡도 등이 가늠된다.
방조제 건너편 해안은 맨 왼쪽 쑥 튀어나온 대서면 안남리 신기수문동 선착장부터 신기해안, 송림리 해안(송림, 뒤숙간, 장사, 모시개골, 구모골), 송강리 해안(신촌, 송강)으로 이어지는 고흥만 해안을 가늠한다.
흰 곤포 사일리지 뒤에서 오른쪽으로 꺾어 언덕길로 나아간다.
흰 곤포 사일리지 사이로 꺾어 언덕길로 올라왔다.
언덕을 넘으면 남양면 중산리 운교마을이다.
운교약천길을 따라 운교마을을 지나서, 오른쪽으로 꺾어 창고 옆을 통과하여 남양면 중산리 고흥만 해안으로 나간다.
언덕을 넘어 운교약천길을 따라 운교마을을 지나 오른쪽으로 꺾어 해안으로 이어지는 농로에서 뒤돌아 보았다.
이 마을은 옛날부터 구전에 의하면 약 300여년 전 조선 숙종 연간으로 추정되는데 그 당시 선인들이 마을 이름을 “두루실(주곡, 周谷)”이라 불렀으며, 구한말(舊韓末)까지 약200여 년간 불러오다가 일제강점기 1914년 지방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구름다리(운교, 雲橋)”라 개칭(改稱)하게 된 것이다. “두루실”이라 함은 마을 안이 두루 골짜기라 하여 “두루실(주곡, 周谷)”이라고 한 것이며, “구름다리(운교, 雲橋)”라 함은 그 당시의 지방 명물이었던 구름다리의 다리 이름을 따서 마을 이름을 “운교(雲橋)”라 고쳐 불러 현재에 이르고 있다.(고흥군청)
운교마을을 지나와서 푸른 색 창고 앞에서 오른쪽으로 꺾어 해안으로 이어지는 농로를 따라왔다.
남파랑길은 이곳에서 해안으로 나가지 않고 왼쪽 농로를 따라 언덕의 상전마을로 오른다.
상전마을을 내려가서 고흥만 해안으로 다가간다.
우도 오른쪽의 각도섬, 그 오른쪽으로 구룡도 섬들이 펼쳐져 있고, 맨 뒤에는 보성군 득량만의 오봉산 능선이 펼쳐진다.
중산리 상전마을을 내려오면 고흥만 해안에 바짝 다가가게 된다.
우도와 그 오른쪽 각도섬, 그 오른쪽에 구룡도 섬들이 있고, 오른쪽 뒤에 보성군 득량만의 오봉산이 들어온다.
맨 왼쪽에 각도섬, 그 오른쪽에 하구룡도, 중구룡도, 상구룡도가 있으며, 왼쪽 뒤에는 보성군 득량만의 오봉산 산줄기, 오른쪽에는 고흥만의 산줄기들이 파노라마로 펼쳐져 있다.
오른쪽 섬은 지섬인 듯. 건너편은 대서면 안남리 해안에서 오른쪽 송림리와 송강리 해안으로 고흥만이 이어지고 있다.
중산일몰전망대가 어디일까? 정면 중앙에 정자가 있는 곳일까? 오른쪽 산봉 정상부에는 남양리 산성이 있다.
고흥만 남쪽 해안이 동쪽으로 원을 그리며 이어진다. 두원면의 예회리, 용산리, 용반리, 과역면의 노일리 해안으로 이어진다.
남양면 중산리 중산마을은 남양산성을 주봉으로 하여 마을 뒤는 청산(靑山)이 둘러있고 좌측 산맥은 청룡등(靑龍嶝)을 이루고 우측 산맥은 백호등(白虎嶝)을 이루어 마을을 옹호(擁護)하며 득량만의 창해(滄海)를 바라보고 있어 마을 안이 마치 소쿠리테 안과 같아서 마을 안에 들어서면 이웃마을의 개 짖고 닭 우는 소리도 들리지 않는 산중과 같은 지형을 살려서 산중(山中)을 중산(中山)으로 바꾸어 마을 이름을 “중산(中山)”이라 불러 현재에 이르고 있다.(고흥군청)
중앙에서 왼쪽 뒤에 마복산이 가늠되고, 중앙에서 오른쪽 뒤에 천등산이 가늠된다. 오른쪽 두원면 예회리 해안에서 맨 왼쪽 과역면 도천리 해안까지 고흥만이 둘러싸고 있다. 남파랑길은 왼쪽 끝에 보이는 중산2길을 돌아 우도 가는 길로 이어진다.
남양면 남양리 우도는 이름을 맨 처음에 “소섬” 혹은 “쇠섬”이라 불렀는데, 이는 섬에 가로 13m, 세로 8m 가량되는 우두형(牛頭形) 암석(岩石)이 있어 소섬, 혹은 쇠섬이라 하였으며, 이를 음차하여 우도(牛島)라고 했다. 또는 이 섬에 자생 한 대(竹)가 많으므로 황씨(黃氏)들은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이 대나무로 화살을 만들어 국가에 바쳐 그 화살로 대승(大勝)을 거두었다고 하며 따라서 마을 이름도 우죽도(牛竹島)라고 고쳤다. 이후 대나무 밭이 없어지면서 황씨(黃氏)들도 사라지고, 이씨(李氏)들이 들어와서 살면서 우죽도(牛竹島)라는 이름에서 죽(竹)자를 빼고 우도(牛島)라 다시 부르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지금으로부터 약400여 년 전에 과역면 백일도에 사는 밀양 박씨 한 분이 대제학을 지낼 때에 우도를 국가로부터 녹지로 받았다가 뒤에 딸을 대서면 화산리 여산 송씨 가문으로 출가시키면서 예물(禮物)로 준 우도라고 전해지기도 한다.(고흥군청)
중산마을 앞을 거쳐 중산2길을 따라오다가 뒤돌아보았다. 상구룡도 뒤쪽으로 고흥만 해안이 서북쪽을 두르고 있다.
2022년 6월 8일 바닷물이 갈라지는 시간 07:36~14:13, 지금 시각 오후 3시 27분 물이 갈라졌다가 다시 물이 차오르기 시작한다. 이제 오후 19:17~01:46 동안에 바닷물이 갈라져서 우도마을을 걸어서 왕복할 수 있다.
왼쪽 뒤에 천등산일 것이라 가늠한다.
중앙 뒤쪽에 마복산, 오른쪽에 천등산일 것이라 가늠한다.
남파랑길은 해안과 작별하고 왼쪽 고흥로를 따라 올라간다. 75코스 시점까지 1.2km가 남았다.
앞 오른쪽의 남양마을 하수처리시설 앞을 거쳐 우주항공로 남양교 지하통로를 통과하여 이어간다.
우주항공로 남양교 지하통로 방향으로 이어간다.
위쪽으로는 중산일몰전망대 방향이고, 남파랑길은 오른쪽 남양면사무소 방향으로 꺾어 나간다.
지하통로를 통과하여 남양면사무소 방향으로 이어간다.
왼쪽 남양마을 버스정류소 옆에 남파랑길 75코스 시작점 표지물과 안내도가 설치되어 있다.
남양마을은 옛날에 마을 강변에 버드나무가 많이 있다 하여 버들내 또는 버드내라 불렀는데 이를 음차하여 버들 양(楊)자와 물 강(江)자를 써서 “양강(楊江)”이라 불렀다고 한다. 이와 같이 버들내니 버드내 혹은 양강등(楊江等)으로 부르기 시작한 것은 역원(驛院)이 설치되기 이전부터가 아닌가 생각한다. 이와 같이 “버들내”, “버드내” 또는 “양강등(楊江等)”으로 조선 말기까지 불러오다가 일제강점기인 1914년에 실시된 지방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남양(南陽)”이라 고쳐 불렀는데, 이는 고려 때부터의 남양현의 고현지(古縣地)라 하여 남양(南陽)으로 고쳐 현재에 이르고 있다.(고흥군청)
남파랑길을 따라오면 소개된 세 곳을 모두 들르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