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강 달라진 밥상과 새로운 기호품
문화교양학과 이창언
밥이 하늘
1. 쌀, 밥의 의미
예전에 좋은 밥상이란 ‘흰 쌀밥에 소고기국’이었지만 언제부터인가 일식 중식 양식 등이 사람들의 입맛을 돋우게 되었습니다. 밥 먹고 난 뒤 숭늉을 마시던 사람들이 이제 커피를 마시게 됩니다. 그러나 세끼 밥조차 제대로 먹을 수 없었던 민중에게 진기한 음식은 먼 나라 일이었습니다. 근대의 미각은 불평등 했습니다. 그렇기는 해도 차츰 근대의 음식에 길들여지면서 근대를 몸에 익히기 시작합니다.
동학의 2대 교주였던 최시형은 밥은 곧 하늘이다고 했습니다. 그만큼 우리 민중은 쌀을 소중하게 여겼습니다. 밥이 곧 보약이고 밥 한알이 귀신 열을 쫓는다 할 만큼 밥과 쌀은 우리에게 귀하고 또 소중한 존재였습니다. 밥 그릇에 밥 한톨이라도 남길라치면 크게 야단맞아던 것은 바로 그런 까닭이겠지요.
2. 일제의 쌀 수탈
우리나라 사람들은 예부터 쌀을 귀히 여기고, 또 신성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귀한 쌀이, 1876년 개항 이전부터 일본으로 실려 나갔습니다. 일본상인은 일본 배에 수출입관세가 면세되는 혜택까지 받으면서 쌀을 거두어갔습니다. 일본 거류민은 쌀이 가장 이익이 남는다며 쌀을 투기대상으로 꼽았습니다. 일제는 쌀, 콩, 소가죽을 실어 날랐습니다. 그 대신 일제는 영국산 광목을 싼값으로 중개 무역하여 이 땅에 팔았고, 램프 거울 성냥 양산 따위를 들여왔습니다.
일제가 토지조사사업을 펼친 취지와 목표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습니다만, 기본적으로 쌀 수탈과 깊은 관계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10년 남짓 동안 토지를 조사 한다면서 농민의 경작권을 빼앗아 총독부 소유로 만들고, 이를 관리할 동양척식주식회사를 세웠습니다. 그밖에도 곳곳에 일본 지주가 농장을 열고 많은 땅을 소유하면서 지주로 군림했습니다. 그들은 왕조시대의 지주보다 높은 지대를 받아냈습니다. 이렇게 거두어들인 쌀은 모두 일본으로 가져갔다. 군산은 일제가 쌀을 수탈하는 전초기지였습니다. 최대 곡창지대였던 호남평야와 논산평야의 쌀을 군산항에 쌓아두었다가 일본으로 가져갔습니다. 일제는 1908년에 전주와 군산을 잇는 ‘전군가도’를 포장했습니다. 가을걷이 때만 되면 쌀을 가득 실은 우마차가 그 길을 메웠습니다.
굶주린 식민지 조선 민중
일제는 1920년에서 1938년 사이에 토지개량, 토지개간, 사방 공사 따위를 해서 쌀 증산운동을 했습니다. 쌀 생산량은 늘었지만, 일본으로 쌀이 빠져나가 조선 사람이 쌀밥을 먹어보기 더욱 힘들어졌습니다. 일제는 만주를 식민지로 만들어서 새로운 식량기지로 삼고, 그곳에서 ‘만주속’이라는 잡곡을 들여왔습니다. 빈민들이 풀뿌리와 점토를 먹었다지만, 그 밖의 많은 사람도 좋은 쌀을 빼앗기고 까칠한 잡곡으로 목숨을 이어가야 했습니다. 쌀밥은 잘해야 생일이나 명절에나 먹을 수 있었고, 주식은 꽁보리밥, 잡곡, 감자, 강냉이 따위로 바뀌었습니다. 그러나 농업생산구조가 주로 쌀만을 생산하는 것으로 바뀐 탓에 잡곡 생산마저 전보다 훨씬 줄어들어, 그나마 제대로 먹지 못했습니다. 민중은 주린 배를 채우려고 소나무 껍질 따위를 먹어야 했습니다.
공출제도
일제는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을 치르면서 식민지 경영을 전시통제경제로 개편했습니다. 군인과 군수공장으로 끌고 온 노동자, 그리고 식민지에 들어온 일본인들이 먹을 쌀이 있어야 했습니다. 일제가 이들에게 쌀을 공급하려고 새로 꾀를 낸 것이 공출제도였습니다. 일제는 농촌을 들쑤셔 벼를 모두 실어갔습니다. 일제는 ‘부락’을 단위로 책임생산량을 할당해 쌀을 가져갔습니다. 공출한 식량에 ‘공정가격’을 매길 때에도 이름뿐이지 생산비에도 미치지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나마 ‘공정가격’도 주지 않고 허울뿐인 저금통장만을 내주어 쌀을 강탈하다시피 했습니다.
애국반상회와 쌀 절약운동
일제는 내선일체를 위한 수단으로 쌀배급을 활용했습니다. 일제는 달마다 ‘애국반상회’를 열어 주민을 통제했습니다. 일제는 배급 매출표에 애국반상회 반장의 도장을 받아야 식량을 살 수 있도록 했습니다. 일제는 조선인의 쌀 소비를 억제하려고 ‘애국반상회’ 등을 통해 쌀 절약운동을 했습니다. “하루에 두끼만 먹자”/ “쌀밥을 많이 먹으면 머리가 나빠지고 음식을 많이 먹으면 건강에 해롭다. 나무뿌리나 나물을 쌀보다 비타민이 풍부하다”는 괴상한 논리를 선전했습니다.
그 결과 조선인들은 까칠한 잡곡으로 죽을 쑤어 먹는 일은 그래도 나은 편이었고, 소나무 껍질이나 풀뿌리 도토리로 연명하고 있다는 신문기사 등이 아주 흔합니다. 1940년대에 이르러서는 술찌기 등으로 배를 채워야 했다. 그나마 나중에는 그마저도 구하기 힘들었습니다.
밀려오는 낯선 먹을거리
개화기 무렵 우리나라에 세워진 최초의 근대식 레스토랑을 화면으로 만나보셨는데요. 손탁호텔, 청목당, 백화점을 디딤돌 삼아 이 땅에 외국음식점들이 물들 듯이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1. 중국 음식점
일본음식점 보다 먼저 등장한 것이 중국음식점 이었다. 중국음식 하면 먼저 자장면이야기부터 말씀드려야하겠군요. 1882년 임오군란 때 군인들과 함께 중국 상인들이 들어오면서 중국 음식점도 따라 들어왔다. 인천에 차이나타운이 형성되면서 1899년 무렵 화교가 자장면을 기본으로 한 음식을 팔기 시작했다. 중국 음식점은 중국인이 많이 사는 서울 북창동 일대를 비롯해서 인천과 평양 같은 곳에 많이 들어섰다. 일제 말기 조선에 사는 화교가 6만 5천 명이었고, 중국 음식점은 300개 남짓했다.
짜장면과 호떡
본디 자장면은 중국 산동지방의 전통음식이었습니다. 그곳 자장면은 향채를 듬뿍 넣고 시큼시큼한 맛을 내는 것이 특징입니다. 그런데 조선 사람은 향채 냄새를 싫어하고 시큼한 맛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중국 요리사들은 자장면에 마늘 고춧가루 감자와 야채를 써서 조선 사람 입맛에 맞추었습니다. 중국인들은 이곳저곳에 ‘호국수집’을 열었습니다. 사람들은 여기서 만든 자장면 호국수 짬뽕 등을 맛볼 수 있었고 잡채 탕수육 라조기 난자완스 같은 중국요리도 알게 되었습니다.
“호떡 집에 불났다”는 말이 유행할 만큼 식민지 시대에 호떡이 가난한 사람들과 학생들에게 큰 인기가 있었다고 하는데 호떡도 중국에서 건너온 음식입니다. 중국 민간인들은 밀가루 반죽 속에 검은 설탕을 넣어서 구운 호병(호떡)을 즐겨 먹었습니다. 우리나라 서민들에게도 친근한 음식이 되었습니다. 전쟁이 막바지에 들어섰을 때는 밀가루와 설탕을 구하기 힘들어 호떡 장사가 문을 닫는 일도 생겼습니다. 당면은 중국인이 1919년 처음 사리원에 공장을 세워 기계로 만든 뒤 차츰 늘어납니다. 본디 잡채에 여러 채소을 섞어 먹던 것인데 이때부터 잡채에 당면 들어갑니다.
2. 일본음식점
일본 사람이 늘면서 일본 고유 음식과 식품으로 우동, 단팥죽, 일본 과자, 다꾸앙, 어묵, 초밥 등이 들어와서 널리 퍼졌습니다. 그러나 식민지 이전에도 일본 음식이 소개되었습니다. 일본 요리집은 갑신정변이 일어난 뒤인 1895년 300명 남짓한 일본 사람이 살던 진고개에 처음 생겼습니다. 진고개란 충무로 명동 일대를 일컫습니다.
국수, 왜간장, 김밥
공장에서 국수를 만드는 법이 일본에서 들어오면서 경성, 대구, 부산, 평양 같은 곳에 국수공장이 들어섰습니다. 공장에서 가는 국수, 우동국수, 메밀국수 등을 만들어 팔았습니다. 주부들도 집에서 만드는 것보다 편리하여 국수를 사다가 간편하게 조리할 수 있었습니다. 일본 사람이 들어오면서 그 뒤 일본 음식은 차츰 조선 사람에게 익숙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이 무렵 공장에서 만든 ‘왜간장’이 나타나면서 요리에 쓰기 시작했습니다.
김밥도 일본 음식 김초밥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김밥은 가정에서 손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로 만들고 따로 반찬 없이 먹을 수 있어서 빨리 뿌리를 내린 듯합니다. 그러나 하루아침에 입맛이 바뀔 수는 없어서 한국인들은 오랫동안 밥, 김치, 국과 찌개를 기본으로 나물이나 생선 그리고 장아찌나 젓갈 같은 반찬을 곁들여 식사를 했습니다.
화학 조미료
한때 “아지노모도 원료는 뱀이다”는 헛소문이 돌만큼 화학조미료는 뭇 사람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습니다. 아지노모도사는 1910년 말에 서울의 쓰지모토 상점, 부산의 복영상회를 특약점으로 삼아 상품을 팔기 시작했습니다. 아지노모도사는 1920~1930년대에 식민지 조선뿐만 아니라 동아시아 전체를 시장권으로 삼는 ‘맛의 제국주의’를 성립시켰습니다.
아지모도는 광고계의 큰 손이었습니다. 수없이 많은 광고를 신문 잡지등의 매체에 싣고 한국의 취향에 맞추어 여러 기법을 동원하여 조선인의 혀를 길들였습니다.
혀에 녹아드는 별난 음식, 특별한 서양 맛
커피
혀끝으로 서양을 느끼게 하던 커피는 외교 사절이 이 땅에 들어오면서 알려지기 시작했T습니다. 공식 문헌에 나타난 기록으로는 1896년 아관파천 때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에서 커피를 처음 맛보았다 합니다. 그 뒤 커피는 왕족과 귀족들 사이의 기호품으로 자리잡아갔습니다. 이름도 영어 발음을 따서 ‘가배차’ 또는 ‘가비차’로 불렀습니다. 서민들은 커피를 ‘양탕국’으로 불렀다. 이는 커피 색이 검고 쓴맛이 나서 마치 한약 탕국과 같다고 해서 붙인 이름입니다. 커피는 한때 ‘독아편’이라는 누명을 쓰기도 했다. 따끈한 양탕국에 아편이 들어 있다는 둥, 갖가지 헛소문이 퍼지기도 했습니다.
다방
커피가 유행하면서 작은 도쿄라는 명동에는 다방이 등장하게되는데요, 다방은 1910년대 들어서 신문광고에 모습을 드러내었고, 1920년대 후반 들어 이곳저곳에서 생겨났습니다.
그때 다방은 요즈음과는 사뭇 달랐습니다. 재즈, 클래식 음악이 있고 일간신문과 시사지, 여성지, 영화지 등 여러 잡지가 있는 문화공간이었습니다. 대부분의 손님은 문화예술계 인사들이었다. 문사, 배우, 신문기자, 화가, 음악가 같은 인텔리 층이 많았습니다. 그 바람에 개인 전람회, 영화 개봉 축하회, 출판 기념회, 세계적 문호 기념제, 레코드 음악회 등이 심심찮게 열리기도 했습니다. 커피는 비싸서 아무나 먹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지만, 유행을 앞장서 이끌던 ‘모던 보이’, ‘모던 걸’은 커피를 ‘근대화의 상징’처럼 여겼습니다. 물론, 시간이 흐르면서 사람들이 다방을 많이 찾고 분위기도 바뀌었습니다.940년 무렵에는 많은 사람이 다방을 찾은 듯 합니다. 다방이 옛 정취가 없고 어중이 떠중이가 들어온다는 불평이 있는 것을 보면 그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1941년 들어 태평양전쟁으로 설탕과 커피를 수입하는 길이 막혀 전쟁 막바지에는 거의 모든 다방이 문을 닫았습니다.
권련과 새 술에 ‘근대’가 깃들다
커피 뿐만 아니라 단맛의 유혹에 빠뜨렸던 캐러멜, 초콜릿, 사탕 껌 등이 근대를 시작으로 지금 우리 삶 속에 들어왔습니다. 하지만 사탕보다 더욱 강력한 유혹의 식품이 있죠. 바로, 담배와 술입니다.
담배
담배는 임진왜란 뒤에 일본에서 전래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하멜 표류기에 보면 “어린 아이들이 이미 네 다섯 살에 담배를 배우기기 시작하여, 남녀 모두 피우지 않는 사람이 아주 드물다”고 기록할 만큼, 담배는 조선 사람이 빼놓을 수 없는 기호품이 되었습니다. 담배 농사를 생업으로 삼는 사람도 늘었습니다. 담배는 중요한 상품작물이 되어 조선 후기 사회경제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개항이 되면서 외국 상인이 궐련초 따위의 제조연초를 수입하기 시작했습니다.
한복을 벗고 양복을 입는 속도만큼 궐련이 예전의 장죽을 밀어냈습니다. 긴 담뱃대가 미개의 상징으로 밀리고 낯선 이름의 새로운 궐련이 문명과 개화의 상징으로 자리잡아갔습니다. 영미연초회사등은 ‘활동사진’, 다시 말하면 영화를 담배 판매에 이용했습니다. 이 회사는 빈 담배 갑 열 개 또는 스무 개를 가져오면 영화 보는 값을 받지 않고 거저 입장시킨다며 판촉활동을 했습니다. 또 아직 널리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이미 1910년대부터 자전거를 비롯한 일상용품을 경품으로 내걸고 권련 판촉활동에 이용했고, 그때로서는 눈이 휘둥그레질만한 네온 사인을 써서 광고를 했습니다.
술
이 땅에서도 삼국시대 이전부터 빼어난 술을 빚었지만, 일제 강점기에 들어서면서 우리 술이 침몰했습니다. 일제 통감부가 1909년에 ‘주세법’을 공포하여 누구든 술을 만들려면 허가를 받고 세금을 내도록 했기 때문입니다. 마침내 1934년에 일제는 자기 집에서 술을 빚는 것을 모두 막아버렸습니다. 또 주류 판매를 전매사업으로 돌려 정부의 수익사업으로 만들었으며, 집집마다 뒤져 밀주를 단속했습니다. 이로써 집에서 만들어 먹던 가양주들은 큰 위기를 맞이했습니다.
술 공급에 변화가 생겨 청주 수입이 크게 늘었습니다. 청주를 흔히 일본 술로 잘못 알고 있으나 그 뿌리는 우리 것이었습니다. 또 청주를 ‘정종’이라는 이름으로도 부르지만, 정종은 일본에 있는 청주 양조장의 상표일 따름입니다. 일본 업자들은 청주를 일본에서 수입하는 것보다 조선에 공장을 두어 만드는 것이 이익이 많이 남는다고 보아 큰 도시마다 공장을 세워 청주를 공급했습니다.
양주도 수입되었습니다. 독립신문 같은 곳에 심심찮게 광고가 실렸습니다. 일부 특수층에서 카페 등에서 양주를 마시는 사람이 생겼고 “양주 맛을 모르면 첨단인이 아니다”고 여기는 무리까지 생겼고, 양주에 맥주를 타서 마시는 폭탄주도 있었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일부 사람들의 이야기지요. 어디 식민지 일반 민중이야 선술집에서 탁주 몇 사발을 들이킬 수 밖에 없었습니다.
3강 정리
일제의 쌀 수탈뿐만 아니라 화학조미료를 통해서 혀를 길들이는 ‘맛의 제국주의’를 살펴보았습니다. 또 술 담패 커피 같은 기호품을 살펴보면서 어떻게 ‘미각의 근대’가 태어났는지도 보았습니다. 그러나 식탁 위의 근대는 참으로 불평등 했습니다.
첫댓글 소중한 유래의역사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