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사리
제주의 봄은 억새밭에서 시작한다. 마른 억새 줄기 사이에서 굵고 통통한 고사리 싹이 힘차게 돋아난다. 한라에서부터 백두까지 이 땅 어디든 고사리가 자라지 않는 곳이 없다. 양지에서 잘 자라는 특성이 있어서 묘지의 잔디밭에서도 쉽게 눈에 띈다. 특히 제주도의 고사리는 고려 때부터 유명하여 대량 채취한 것을 육지까지 보내기도 했다. 제주 민요 오돌또기에도 고사리 맛이 좋다고 노래하고 있다.
고사리는 먹는 나물이다. 예로부터 우리 선조들은 고사리를 채취하여 데쳐서 말려두고 연중 나물로 먹었다. 특히 가장 정성스럽게 차리는 제사상에서 빠져서는 안 되는 나물이 바로 고사리나물이다. 붉은색 고사리는 제사상에서도 가장 윗자리에 올리는 정갈하고 귀한 식품이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고사리도 국내산 보다는 중국에서 수입되고 있어 조상께 올리는 제수도 수입농산물로 차리는 때가 되었다. 고사리는 독초로 분류하지만 우리 선조들은 그 독성을 제거하는 방법을 잘 알고 있었다. 고사리는 날로 먹으면 중독되어 설사를 일으킨다. 반드시 데쳐서 찬 물에 많이 우려내고 요리를 해야 한다.
우리 동포들이 미국의 공원에 갔더니 고사리가 너무나 많더라는 것이다. 하도 푸짐하고 탐스러워 갖고 간 쇼핑백에 꺾어 갖고 오는데 현지 미국인이 뭣 하려 고사리를 뜯느냐고 묻기에 나물로 먹을 거라 했더니 깜짝 놀라더라는 것이다. 그 고사리는 독성이 강해서 먹으면 죽는다고 했다. 버리자니 아까워 맛이라도 보자며 고국에서 했던 것처럼 데쳐서 참기름에 볶았더니 그렇게 맛이 좋을 수가 없더라는 거였다. 혹시나 하고 식구들은 먹지 못하게 하고 혼자 맛있게 먹었는데 배탈은 커녕 소화도 잘 되었다. 다음에는 더 많은 고사리를 꺾어 교포들이 하는 한인교회 바자회에 갖고 갔더니 그곳에서 가장 먼저 동이 난 것이 바로 고사리나물이었음은 물론이다. 독성이 있는 고사리여서 처음 먹는 사람은 설사를 하지만 늘 먹으면 면역이 생겨 아무 관계없다.
고사리나물이 들어가야 맛을 내는 요리가 바로 비빔밥이다. 비빔밥은 제상에 오른 여러 가지 나물을 한데 모아 비벼 먹으면서 발전한 요리라는 설이 있다. 철따라 나는 갖가지 나물을 얹어 비벼먹는 비빔밥. 이제는 한국의 대표적인 요리가 된지 오래이다. 아무리 여러 가지 나물을 쓴다고 해도 빠져서는 안 되는 것이 고사리, 도라지, 콩나물이다. 특히 고사리가 빠진 비빔밥은 생각할 수도 없다.
대표적인 한식이 바로 육개장. 개장은 원래 개고기에 고사리, 토란줄기, 시래기 말린 것을 넣고 토장국에 끓여낸 전통음식이다. 여기서 개고기를 싫어하는 사람을 위해 닭고기를 쓴 것이 닭개장이고, 쇠고기를 쓰면 육개장이 된다. 식당에서 닭계장 또는 육계장이라고 쓴 차림표가 있는데 말의 어원을 잘 모르고 쓰기 때문에 오류를 범한다.
개장이든 육개장 또는 닭개장이든 고사리나물이 없으면 맛을 낼 수 없다. 푹 끓인 국물에 고추기름으로 볶은 고사리, 토란줄기, 숙주나물 따위를 넣고 여기에 당면 사리까지 넣으면 얼큰한 육개장이 된다. 우리의 맛을 이 고사리 없이 어떻게 찾을 수 있겠는가.
백이 숙제도 고사리를 먹지 않고 다른 나물을 먹었더라면 더 오래 살았을지 모른다. 우리의 전통의서에서도 고사리가 양기를 떨어뜨린다고 적고 있다. 그래서 ‘시앗 시샘에 고사리 죽 먹인다’는 속담이 생겼는지 모른다. 첩에게 빠진 남편한테는 고사리 죽만 먹여 양기를 약하게 하겠다는 본처의 질투심을 읽을 수 있다.
아기의 예쁜 손을 고사리손이라 하듯 봄철 돋아나는 고사리 싹은 굵고 탐스럽다. 산지에서 잎이 채 벌어지기 전 부드러운 것을 꺾어 집으로 가지고 오면 먼저 끓는 물에 데쳐야 한다. 충분히 익혔으면 발이나 멍석에 늘어 말린다. 손으로 뒤집어 가면서 완전히 마른 고사리나물은 한 주먹씩 뭉쳐서 짚으로 납작한 공처럼 묶는다. 이것을 하나씩 염주알처럼 연결하여 볕이 들지 않고 바람이 잘 통하는 처마 같은데 매달아 둔다. 겨울에 먹을 때는 하나씩 떼어내 다시 삶으면 부드러워 먹을 만하다.
고사리나물은 이제 차례상에 올라 구색이나 맞추는 신세로 전락했다. 끝내 우리의 밥상에서 사라질지도 모른다. 우리는 또 하나 우리 것을 잃어버리고도 그 재산의 가치마저 까맣게 잊고 지낼 때가 있다. 우리의 민속식을 살려야 한다.- 오병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