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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쉼터 스크랩 국물은 다만 국물이 아니다. [한수산의 자작나무 아래서]
ysoo 추천 0 조회 64 13.03.28 23:20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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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수산의 자작나무 아래서]⑦

 

국물은 다만 국물이 아니다

 

 

 

 

그랬다. 언제나 그것이 문제였다. 국물, 그 놈의 국물이었다. 먼 옛날이 아니다.

내가 살았던 때, 1960년대에서 70년대로 넘어가는 그 시절 도시락을 가지고 학교를 다니던 때였다. 당시에는 국민학교라고 부르던 그 초등학교를 내 또래들은 연필이 달그락거리는 필통과 함께 책 보따리를 들고 다녔다. 그러다가 중학교를 올라가게 되면 그때 책가방을 가지는 감격을 누리게 된다.

초등학교 졸업식 날 부르던 그때의 노래는 또 얼마나 비장했던가.

 

 

“잘 있거라 아우들아. 정든 교실아. 선생님 저희들은 물러갑니다.

부지런히 더 배우고 얼른 자라서, 새 나라의 새 일꾼이 되겠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참 좋은 가사가 아닌가 싶은 이 노래를 부르고, 정들었던 교실에 남아서 펑펑 눈물을 흘리며 소리 내어 우는…. 그렇게 졸업식을 마치고 중학생이 될 때 확연하게 달라지는 것은 몇 가지 있었다.

일제강점기 잔재의 하나가 분명한 검은 교복과 모표가 달린 모자 그리고 책가방을 든다는 것이었다. 간혹 중학생이 되었다고 선물로 하모니카를 받거나 손목시계를 차게 되는 친구들이 없던 것은 아니었지만.

 

그리고 영어를 만난다. 알파벳 인쇄체와 필기체를 쓰면서 중학교 시절은 시작되는 것이다.

‘소년이여 꿈을 가져라’하는 그 낯설면서도 가슴 두근거리게 하는 말, Boys Be Ambitious!를 가슴에 몰래몰래 새겨 넣으면서.

 

그렇게 일 년이 가고 한 학년이 끝날 때가 와서야 우리는 비로소 알았다. 새 모자가 땀과 흙먼지에 찌들고 새 교복의 무르팍이 튀어나오면서 낡아갈 때, Boys Be Ambitious는 달콤했지만 잠깐의 유혹이었을 뿐, 그 무렵의 중학생이 가질만한 꿈이나 대망이란 애당초 없었다는 것을.

 

그런 한 학년이 끝날 때쯤이면 남는 것이 또 하나 있었다. 그 가방, 한 해 동안 들고 다닌 가방이었다.

새어나온 도시락 반찬국물로 찌들어 냄새가 나는 책가방이 있었다.

Boys Be Ambitious!만큼이나 찌들고 낡고 냄새마저 고약하게 풍기는 것은 가방만이 아니었다. 도시락의 반찬국물은 새 교과서와 참고서를, 차곡차곡 정리했던 대분수가 가득한 수학노트마저도 귀퉁이를 누렇고 검붉게 물들이면서 촌구석의 중학생이 품고 다듬을 꿈 따위는 애초에 없다는 것을 웅변해 주는 하나의 상징으로… 그렇게 남았다.

 

어머니들은 알고 있었을 것이다. 도시락 반찬의 국물이 새어나와 노트를 적시고 참고서 귀퉁이를 물들일 것을 몰랐을 리가 없다. 그런데도 국물을 넣어야 했던 한국인의 음식에 대한 원형질이 어머니의 마음에서도 보이는 것이다. 모든 음식에는 국물이 있어야 제 맛이 난다는 슬픈 전설이.

국물, 이것은 다만 도시락 반찬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한국음식에서 국물은 덧이자 멍에, 아니 화려한 비상이 된다.

 

맛이 있느냐 없느냐의 잣대로, 국물은 모든 한국음식의 기본이 되는 첫걸음이자 한국음식의 본질을 좌우하는 핵심이 되어 왔다. ‘국이나 찌개 따위의 음식에서 건더기를 제외한 물’이라고 사전에서는 정의하는 국물은 유사한 외국어를 찾기 힘들다는 데서도 그 본질이 쉽게 이해가 된다.

 

내 짧은 외국어를 탓해야 할 일이겠지만, 영어나 일본어에는 우리가 국이나 찌개 혹은 김치에서 말하는 국물이라는 의미의 말이 없다. 국물을 대체로 Soup이라고 번역하는데 이건 본질적으로 우리 음식의 국물이 아니다. ‘김치 국물이 흥건하다’를 영어로 표현하자면 Kimchi Has Too Much Juice가 되어 버린다.

한식의 국물은 아예 Kukmul이라고 쓰든가, 국물이라는 의미의 영어가 없다고 보는 게 옳다. 예를 들어 어린애들이 쓰는 ‘너 한 번만 더 걸리면 국물도 없을 줄 알아!’의 국물을 의역을 하지 않는 한 어떻게 번역을 하겠는가. 문제는 이 국물이 건더기를 넘어서서 우리 음식에서는 그 요리 자체의 질을 결정한다는 데 있다. 건더기가 문제가 아니다.

 

국물은 찌개나 국에서만 중요한 것이 아니다. 냉면 같은 국수류에 이르면 국물은 객체가 아니라 주체가 된다. 그것만이 아니다. 김치에는 김치국물, 깍두기에는 깍두기국물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해장국집에서 뜨거운 국물을 후룩후룩 마시면서 ‘어 시원하다’를 내뱉고, 설렁탕이나 곰탕집에서 ‘여기 깍두기국물 좀 더 주세요!’ 하는 말이 우렁차게 퍼지는 것이다. 어디 그뿐인가. 염장식품에조차 국물은 중요하다. 그래서 쇠고기 장조림에도 장조림국물은 필요하고 간장게장에도 게장국물이 제대로 된 맛을 내야 게 껍질에 밥을 비벼서 먹어야 제 맛이 되지 않던가.

합리적으로 생각하자면 염장식품에는 국물이 없어야 하는데도 그렇다. 왜 우리의 입맛은 이렇게 국물에 집착하는 것일까.

 

이름만 들어서는 지극히 폭력적인 묵사발이라는 음식이 있다.

밥 위에 묵을 썰어서 올리고 거기에 송송 썬 김치를 얹어 물에 말아 먹는 음식이다. 팔당호수 기슭에는 이 묵사발을 먹으려는 사람들이 언제나 줄을 서서 기다리는 식당까지 있다. 이 집 묵사발도 맛의 비결은 묵이 아니라 말아 먹는 물, 바로 그 국물에 있다는 걸 찾는 손님들은 안다.

 

국물과 함께 우리 식문화를 버티고 있는 또 하나는 뜨거움이 아닌가 싶다. 뜨거움조차도 한국인에게는 맛이 된다. 다 먹을 때쯤에야 식는 것 그것이 한국의 뚝배기 음식의 특징이다. 혀를 댈 수 없이 펄펄 끓는 음식을 내오는 찌개를 앞접시에 덜어서 식혀가며 먹는 게 우리들의 식습관이 아니던가.

들일을 하러 나가면서 도시락을 싸가지고 가지 않는 게 한국인이었다. 점심을 먹어야 하는데도 왜 밭일을 나가면서 한국인은 도시락을 싸가지고 나가지 않은 걸까. 그건 바로 국물과 뜨거움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 사람 요즘 어디 있어? 하고 물으면 별 볼일 없는 한직으로 쫓겨 가 있는 친구를 두고 우리는 ‘으응 그 친구 요즘 찬밥신세야’하고 말하지 않는가. 찬밥은 밥도 아닌 것이다. 따끈따끈해야 한국인에게는 음식이다. 찬 것은 음식이 아닐 지경이다.

요즈음 농촌에서 쉽게 만나게 되는 것에 논둑길 밭둑길을 누비며 음식을 파는 소형 탑차가 있다. 이동식 식당이다. 따끈따끈하든 차갑든 일단 ‘국물’을 준비하고 비닐하우스가 대부분인 밭길을 누비면서 스피커를 울려댄다.

 

‘따끈따끈한 커피가 있어요. 시원한 냉면이 있어요.’

 

지난 날 한국의 농촌에서는 논밭이 멀지 않으니 집에 들어와 점심을 먹었고, 자빠진 김에 쉬어 간다고 아예 낮잠까지 자고 나가던 것이 우리의 농촌 일꾼들이었다. 많은 일꾼들이 밭에 나간 경우에는 여자들이 함지에 점심을 담아 날랐었다. 밥과 반찬을 인 여인이 앞장을 서면 그 뒤를 뜨끈한 국이 따라나서고 맨 뒤에는 치렁치렁하게 머리를 땋은 딸아이가 막걸리 주전자를 들고 간다.

그 행렬을 앞서거니 뒤서거니 푼수 없이 껑충거리며 누런 강아지가 따라간다.

한여름 복날이면 없어질 게 뻔한 강아지 위를 노랑나비 한 마리가 너울거리다가 어디론가 사라지고. 뜨거운 음식과 국물의 조화는 그렇게 아지랑이 아롱거리는 봄날을 수놓던 우리들 봄날의 풍경이었다.

 

이제는 잃어버린 또 하나의 고향이었다.

 

 

 

 

 

 

 

[한수산칼럼]

 

인생이여, 고마워요

 

막가는 세태, 인간성 메마른 탓

서로 보듬고 걱정해주는 사회 오길

 

 

 

 

남한강 가에 있는 작업실로 내려가면서 오랜만에 메르세데스 소사의 노래를 들었다.

‘인생이여, 고마워요’ 하는 노래였다.

언제 들어도 눈물겨운, 우리들 삶에 대한 경외감이 가슴에 젖어드는 노래다.

 

이 길에는 간판만 봐도 싫은 음식점이 하나 있다. 막국수를 파는 집인데 이름이 ‘3대 막국수’다.

아마 식당의 연륜을 내세우며 3대째 가게를 이어오고 있다는 뜻에서 붙인 이름인가 보다. 그런데 나는 그 간판을 볼 때마다 생각이 좀 다르다. 얼마나 재주가 없는 사람이면 대를 이어 3대나 국수를 만들어 왔으면서도 아직도 ‘아무렇게나 막 만드는’ 막국수인가 싶은 것이다.

 

물론 막국수란 겉껍질만 벗겨 낸 거친 메밀가루로 굵게 뽑은 국수로 김칫국물에 말아먹는 강원도 향토 음식의 하나이다. 그 이름에 ‘막 부서져서 막 먹는 국수’라는 뜻이 있다니 얼마나 정 깊고 만만한 음식이름인가. 막국수는 김칫국물이나 육수에 말아먹는 구수하고 담백한 맛이어야 하기 때문에 요즈음 팔리는 막국수라는 이름의 국수는 본래의 맛은 아니다.

색깔도 거무튀튀한 데다 동치미 국물만 부어 내오는 게 전부인 막국수, 고명 같은 건 아예 없는 게 진짜 막국수였다. 단순의 극치, 맛을 내려고 꾸미지 않는다. 그래서 막국수를 두고 ‘단순하다 못해 고객 모독이다’라고 쓴 어느 기자의 절묘한 글이 기억에 남는다.

 

문제는 마구라는 말의 준말인 막이라는 부사다. 막에는 세 가지 뜻이 중첩된다. ‘마구, 세차게’라는 뜻, ‘아무렇게나, 함부로’라는 뜻, 그리고 ‘바로 지금’의 뜻으로도 쓰인다. 슬퍼서 막 울었다고 하면 ‘세차게’의 뜻이 되고, 막 짓밟았다고 하면 ‘아무렇게나, 함부로’이며 막 출발했다고 하면 ‘지금, 바로 그때’가 된다.

 

꽤 오래전, 조직폭력배 ‘막가파’를 검거했을 때 나는 엉뚱하게도 그 이름이 참 절묘하다고 생각했다. 조폭이 패거리 이름을 지으며 ‘우리는 막 나가는, 막가파다’ 라고 했다니 혀를 내두를 ‘이름짓기’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제오늘 우리 사회를 바라보고 있자면 마치 전 국민의 ‘막가파화’에 가깝다. 인터넷에는 공공장소에서 막말을 해대는 폭언과 폭행 동영상이 넘치는 요즈음이다.

 

지하철 안에서 막말을 하는 여자에게 어른이 타이른다.

 ‘아가씨. 집에 부모 있어, 없어.’ 그러자 이 젊은 여자 승객이 내뱉는다. ‘아, 없어. 너 같은 부모 없어.’

중년의 택시기사가 길을 헤매자 젊은 여자 손님이 냅다 반말로 소리친다. ‘택시 어떻게 해먹으려고. 운전 못하면서 운전기사를 왜 해.’

이런 현상을 두고 각박한 세상살이, 화를 참지 못하는 사회적 병리현상이라는 해석이 나오지만, 이건 한마디로 인간성의 상실이다. 그리고 이런 상실이 다만 지하철 등의 공공장소에만 널려 있는 게 아니라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2009년 가을 세상을 떠나자 아르헨티나가 성대한 국장으로 추모했던 가수 메르세데스 소사, 라틴아메리카를 대표하던 가수로 힘없는 자들의 가슴을 노래했던 그녀를 우리는 ‘파차마마(대지의 어머니)’라고 불렀다.

 

‘인생이여 고마워, 이렇게 많은 것들을 베풀어주어서/ 나에게 소리와 글자를 주어서/ 내가 생각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전할 수 있는 언어를 주어서/ 어머니 친구 형제, 그리고 내가 사랑하고 있는 사람의 영혼의 길을 비춰줄/ 빛을 주어서.’

 

‘인생이여 고마워요’ 하는 그 정성스러움, 소박함과 진정으로 왜 우리는 살지 못하는가 싶다.

살아가는 일의 아름다움을 그 소중함을 두 손으로 정성들여 퍼 올리며 인생이여 고마워요 하며 이웃을 보듬고 세상살이를 서로 걱정할 수는 없는 것일까.

 

한수산 작가  / 세계일보 

 

 

 

 

Mercedes Sosa - Gracias A La Vida

 

 

 

 

내게 그토록 많은 것을 준 삶에 감사합니다
삶은 눈을 뜨면 흑과 백을 완벽하게 구별할 수 있는
두 샛별을 내게 주었습니다
그리고 높은 하늘에는 빛나는 별을,
많은 사람들 중에는 내 사랑하는 이를 주었습니다

 

내게 그토록 많은 것을 준 삶에 감사합니다
삶은 밤과 낮에 귀뚜라미와 카나리아 소리를 들려주고
망치 소리, 터빈 소리, 개 짖는 소리, 빗소리
그리고 내가 가장 사랑하는 이의 그토록 부드러운 목소리를
녹음해 넣을 수 있는 넓은 귀도 주었답니다

 

내게 그토록 많은 것을 준 삶에 감사합니다
삶은 생각하고 그 생각을 주장할 수 있는 언어와
소리와 알파벳을 선사하고
어머니와 친구와 형제들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이의
영혼의 길을 밝혀주는 빛도 주었고요

 

내게 그토록 많은 것을 준 삶에 감사합니다
삶은 피곤한 발로 진군할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나는 그 피곤한 발을 이끌고 도시와 늪지
해변과 사막, 산과 평야
당신의 집과 거리, 그리고 당신의 정원을 거닐었습니다

 

내게 그토록 많은 것을 준 삶에 감사합니다
인간의 정신이 열매를 거두는 것을 볼 때
악에서 멀리 떠난 선함을 볼 때
그리고 당신의 맑은 눈의 깊은 곳을 응시할 때
삶은 내게 그 틀을 뒤흔드는 마음을 선사했습니다

 

내게 그토록 많은 것을 준 삶에 감사합니다
삶은 내게 웃음과 눈물을 주어
슬픔과 행복을 구별할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그 슬픔과 행복은 내 노래와 당신들의 노래를 이루었습니다
이 노래가 바로 그것입니다. 그것은 우리 모두의 노래입니다
모든 노래가 그러하듯 내게 그토록 많은 것을 준 삶에 감사합니다

 

Translate to English:

Mercedes Sosa - Thanks to life or Thanks Giving (Violeta Parra)

Thanks (Thanks Giving) to life , which has given me so much.
It gave me two beams of light (my eyes), that when opened,
Can perfectly distinguish black from white
And in the sky above, her starry backdrop,
And from within the multitude
The one that I love.

Thanks to life, which has given me so much.
It gave me an ear that, in all of its width
Records? night and day?crickets and canaries,
Hammers and turbines and bricks and storms,
And the tender voice of my beloved.

Thanks to life, which has given me so much.
It gave me sound and the alphabet.
With them the words that I think and declare:
"Mother," "Friend," "Brother" and the light shining.
The route of the soul from which comes love.

Thanks to life, which has given me so much.
It gave me the ability to walk with my tired feet.
With them I have traversed cities and puddles
Valleys and deserts, mountains and plains.
And your house, your street and your patio.

Thanks to life, which has given me so much.
It gave me a heart, that causes my frame to shudder,
When I see the fruit of the human brain,
When I see good so far from bad,
When I see within the clarity of your eyes...

Thanks to life, which has given me so much.
It gave me laughter and it gave me longing.
With them I distinguish happiness and pain?
The two materials from which my songs are formed,
And your song, as well, which is the same song.
And everyone's song, which is my very song.

Thanks to life (Thanks Giving)
Thanks to life
Thanks to life
Thanks to life

 

 

...

 

 

 

 

이런 사건 기억하십니까?

모진고문과 박해를 받았던 분인데 너무 밝고 좋은 글을 쓰시니 절로 머리가 숙여집니다. 

 

 

한수산 필화 사건

 

한수산 필화 사건(韓水山筆禍事件)은 1981년 5월 《중앙일보》에 1년간 연재 중이던 소설가 한수산의 장편소설 〈욕망의 거리〉로 인해 관련자들이 연행되어 고초를 치른 사건이다. 욕망의 거리 필화 사건이라고도 한다.

 

〈욕망의 거리〉는 1970년대를 배경으로 남녀 간의 만남과 사랑을 통속적으로 묘사한 전형적인 대중 소설이었다. 군데군데 등장하는 군인이나 베트남 전쟁 참전 용사에 대한 묘사가 대통령 전두환을 비롯한 당시 제5공화국의 최고위층을 모독하는 동시에 군부 정권에 대한 비판 의식을 담고 있다는 혐의를 받고, 작가 한수산과 문화부장 정규웅 등 중앙일보사의 관계자들, 한수산의 문단 동료인 시인 박정만이 국군보안사령부(사령관 노태우)에 연행되어 고문을 받았다. 국내에서의 창작 작업에 회의를 느낀 한수산은 이후 일본으로 떠나 수년간 머물렀고, 박정만은 고문 후유증에 시달리다 1988년 사망했다.

 

이 사건은 당대에는 언론 통제로 인하여 외부로 알려지지 않았으며, 연재 중인 소설의 극히 일부분에 불과한 지엽적 표현을 독재 정권의 자격지심 때문에 억지로 문제 삼아 비인간적 결과를 낳은 필화 사건으로 평가받고 있다.

 

/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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