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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07, 25. 강릉지역 답사(문화재 두레단)
1. 언 제 : 2013년 7월 25일(목요일) 06:30 - 22:00 2. 어디로 : 강원도 강릉시(오죽헌-선교장-허난설헌 생가터-강릉향교-임영관 삼문 -신복사지-굴산사지) 3. 누구와 ; 포항시 문화재 두레단
오늘도 더위는 풀이 꺽이지 않고 더욱 기승을 부릴 것 같은 날씨인데 두레단 답사일정에 맞추어 일찍 집을 나섰고, 버스는 6시40분경 문화원을 출발하여 7번 국도를 따라서 달리는데 동해중부선 철도건설과 동해안 고속도로 건설구간과 함께 동해의 푸른 바다에 눈을 담가본다. 영덕 휴게소(07:40)에서 휴식을 취하고는 동해에서 동해안 고속도로에 접어들고 옥계휴게소에서 쉬면서 목을 축이고 강릉 나들목을 빠져나와서(09:20) 강릉시가지를 통과하여 오죽헌에 도착(09:50)하니 해설사가 우리를 기다리고 계셨다.
오죽헌[烏竹軒 : 보물 제165호] 소재지 : 강원도 강릉시 죽헌동 이 건물은 1452년(문종 2)에 등제하여 대사헌까지 지낸 최응현(崔應賢)의 고택에 딸린 별당으로, 1536년(중종 31) 이이가 태어난 유서 깊은 곳이다. 평면구조는 앞면 3칸, 옆면 2칸으로 된 일(一)자집이며 대청·온돌방·툇마루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이가 태어난 방은 몽룡실(夢龍室)이라고 한다. 커다란 장대석으로 쌓은 단층 기단 위에 막돌초석을 놓고 네모기둥을 세워 기둥 윗몸을 창방으로 결구했으며, 기둥 위에 주두(柱頭)를 놓고 익공(翼工)으로 처리한 이익공(二翼工)집이다. 앞면에는 띠살창호를, 옆면에는 골판문을 달았으며 지붕은 팔작지붕이다. 이 건물은 한국 주택사에서 현존하는 유구(遺構)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으로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방과 대청으로만 구성된 별당만 남아 있고, 본채가 없어 조선 초기의 주택 구조를 알 수 없는 것이 유감이다
강릉선교장(江陵船橋莊 : 중요민속문화재 제5호) 소재지 : 강원도 강릉시 운정동 431. 효령대군의 11대손인 가선대부 무경 이내번에 의해 처음 지어졌으며 10대에 이르도록 증축되어 오늘날에 이르렀다. 예전엔 경포호수를 가로질러 배로 다리를 만들어 건너 다녔다 하여 선교장이라 명명되었다. 선교장 터는 하늘이 족제비 떼를 통하여 점지했다는 명당이다. 2000년 한국 방송공사에서 20세기 한국 TOP 10을 선정할 때 한국 전통가옥 분야에서 한국 최고의 전통가옥으로 선정 되었다. 300년동안 원형이 잘 보존되어 한국의 유형 문화재로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고, 경포 호수권의 중심적인 역할을 담당한다. 경포대와 더불어 강릉문화를 대표하는 경포 호수권의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고 있으며 강릉시의 중요한 문화 관광 자원이다 연지 안에 날아갈 듯 자리 잡은 아름다운 건물의 이름은 활래정(活來亭)이다. 소나무 숲을 뒷배경으로 하고 연못 가운데도 멋들어진 소나무를 거느린 활래정은 선교장에 딸린 외별당인데 이곳은 연못과 함께 경포호수의 경관을 바라보며 관동팔경을 유람하던 조선의 선비와 풍류들의 안식처가 되었다. 선교장(船橋莊)이라는 명칭은 예전에 지금의 경포호와 연결된 수로가 있어 배를 대는 선교(船橋)가 집 앞에 있어 이런 이름이 붙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경포호와 선교장사이에 논밭이 들어서서 선교장 앞에까지 배가 들어오던 예전 모습을 상상하기 어려운 것이 아쉬운 부분이다. 하늘이 족제비 무리를 통해 점지 했다는 명당터인 선교장은 300여년전에 안채 주옥을 시작으로 동별당, 서별당, 연지당, 외별당, 사랑채, 중사랑, 행랑채, 사당들이 지어졌고 큰 대문을 비롯한 12대문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서 대장원을 연상케 한다. 원래는 아흔 아홉 간이었다는 선교장은 일부가 화재로 소실되어 지금은 안채 주옥, 열화당, 활래정, 서별당, 행랑채 등 84간이 현존하고 있다고 한다. 열화당은 남자 주인이 전용하는 사랑채로 1815년(순조15년)에 이후가 건립한 건물이다. 열화당(悅話堂)이라는 당호는 도연명의'귀거래사(野去來離)'의 구절에서 연유한 이름으로 '일가친척이 이곳에서 정담과 기쁨을 함께 나누자’라는 뜻으로 지어진 이름이다. 열화당 툇마루 앞에는 이렇게 서양식의 테라스가 덧대어져 있는 것이 이채롭다. 다른 양반 살림집에서는 보기 힘든 구조물인 이 서양식 테라스는 조선말기 러시아공사관 직원들이 영동지방 여행을 왔다가 선교장에 장시간 머무르다 간 후 그 답례로 러시아 공사가 러시아에서 구리판을 들여오고 목재와 목수를 보내 지어준 것이라고 한다. 러시아 테라스는 문화재적인 가치보다는 역사적인 가치가 큰 구조물이어서 지금까지 잘 보존되고 있다. 서별당은 이씨가의 서고 겸 공부방으로 사용되었고 살림을 맏며느리에게 물려준 할머니의 거처로도 사용되었다. 안채의 오른쪽으로 연결이 되어있는 주인전용의 별당건물인 동별당은 이근우가 1920년에 지은 'ㄱ'자형 건물이다. 동별당은 집안의 잔치나 손님 맞이에 주로 사용되었고 방과 마루의 모든 벽페가 문으로 되어 있어서 활달하고 개방적인 선교장 가족들의 성품과 면모를 보여준다. 안채는 1748년 처음 배다리를 전주이씨 가의 삶의 터전으로 삼을 때에 건립된 건물로서 이씨가의 큰 살림을 맡은 여인들의 거처이다. 안채, 별당, 사랑채를 이어주는 대문들이 한 줄로 늘어선 모습이 멋스러운데 선교장에는 이런 대문이 모두 12개가 있다. 한국 전통가옥 분야에서 수상하기도 한 명실상부한 <한국 최고의 전통가옥>이다.
허난설헌 생가 터(강원도 문화재 자료 59호) 소재지 : 강원도 강릉시 초당동 475-3 강릉 이광로가옥이라고도 한다. 이 가옥에서 조선시대의 시인 허난설헌이 태어난 집터로 알려져 있으나 정확한 사실과 건립 연대는 알 수가 없다. 안채와 사랑채, 곳간채가 'ㅁ'자 배치를 하고 있으며 외부를 둘러싼 담이 있다. 남녀의 구분이 엄격하여 남자들은 솟을대문으로, 여자들은 우물간과 방앗간 옆의 협문으로 출입하였다. 또한 사랑마당과 구분하는 내외 담을 사랑채 옆에 쌓아서 출입 시선을 차단하고 있다. 사랑채는 넓은 대청과 방들로 구성되며 전면에 툇간마루가 놓여 있다. 팔작기와지붕의 높은 처마를 갖춘 장여에 소로 받침이 있는 구조로 전면 기둥은 둥글게 되어 있다. 안채는 정면 5간, 측면 2간의 겹집으로 넓은 부엌과 방, 대청마루가 있다. 사랑마당, 행랑마당, 뒷마당을 담으로 넓게 나누어 놓아 한국의 아름다운 조경을 볼 수 있게 하였다. 허난설헌은 조선중기 문신으로 동과 서로 사림들이 붕당 된 후 동인의 영수가 된 허엽의 딸로 태어났다. 본관은 양천(陽川). 본명은 초희(楚姬). 자는 경번(景樊), 호는 난설헌. 엽(曄)의 딸이고, 봉(?)의 여동생이며, 균(筠)의 누나이다. 문한가(文翰家)로 유명한 명문 집안에서 태어나, 용모가 아름답고 천품이 뛰어났다 한다. 허엽은 동인 중에서도 북인계에 가까운 인물로 북인들은 대개 그 사상적 기저가 성리학 이념 하나에만 고착되지 않고 여러 분야에 비교적 열려 있는 세계관을 가지고 있었다. 허엽 가문의 학문에 대한 열린 가풍은 딸 허난설헌에게 남자와 똑같은 교육기회를 주었으며, 아들들에게는 자유로운 사상을 가질 기회를 마련해주었다. 당대 뛰어난 문인으로 평가받은 허성, 허봉이 허난설헌의 오빠이며 [홍길동전]으로 유명한 허균이 허난설헌의 남동생이다. 허균, 허난설헌 오누이와 아버지 허엽, 장남 허성 그리고 허봉을 허씨 5문장가로 일컽는다. 매천 황현은 그 중 허봉,허균, 난설헌을 "초당가문에 세그루 보매로운 나무"라 칭송하였고 그 중에서도 난설헌의 글재주가 가장 돋보였다고 하였다. 허난설헌은 15세에 김성립과 결혼했다. 김성립은 안동 김씨로 그녀보다 한 살이 많았다. 김성립은 5대가 계속 문과에 급제한 명문 가문의 자제였다. 당시 사림들이 동인과 서인으로 붕당된 상황에서 동인은 또다시 북인과 남인으로 분리되기 시작하였는데 김성립은 남인계에 속한 인물이었다. 당시 남인은 북인보다 사상적으로 성리학에 더 고착되어 있었고 보수적이었다. 자유로운 가풍을 가진 친정에서 가부장적인 가문으로 시집 온 허난설헌은 시집살이에 잘 적응하지 못했다.
푸른 바닷물이 구슬 바다에 스며들고 碧海浸瑤海 푸른 난새는 채색 난새에게 기대었구나. 靑鸞倚彩鸞 부용꽃 스물일곱 송이가 붉게 떨어지니 芙蓉三九朶 달빛 서리 위에서 차갑기만 해라. 紅墮月霜寒
그 예언은 적중해 허난설헌은 부용꽃 스물일곱 송이가 지듯이 27세의 나이로 목숨을 거두었다. 그녀의 남편 김성립은 허난설헌 사후 남양 홍씨와 재혼하였지만 곧이어 터진 임진왜란에서 의병으로 싸우다 전사하였다.
강릉 임영관 삼문 (江陵 臨瀛館 三門 : 국보 제51호) 소재지 : 강원도 강릉시 용강동 58-1 객사란 고려와 조선시대에 각 고을에 두었던 관사를 말한다. 조선시대에는 정전에 국왕의 전패(殿牌)를 모시어 두고 초하루와 보름에 향궐망배(向闕望拜>하였으며 왕이 파견한 중앙관리가 오면 여기서 유숙하게 하였다. 이 객사는 고려 태조19년(936) 본부객사로 총 83칸의 건물을 창건하고 임영관(臨瀛館)이라 하였으며 공민왕 15년(1366) 왕이 낙산사로 행차 도중 현액을 친필로 썼다고 전한다. 그후 수차 중수< 重修 >되어 오다가 1929년 일제< 日帝 >시 강릉공립보통학교(후에 강릉국민학교가 됨) 시설로 이용되었고 동교< 同校 >가 헐린 뒤에는 공지< 空地 >로 남게 되었다. 1967년 12월 여기에 강릉경찰서 청사가 세워지게 되었으며 이 문만이 남게 되었다. 남산의 오성정(五星亭), 금산의 월화정(月花亭), 경포의 방해정(放海亭) 등은 객사의 일부이었던 것을 옮긴 것이라 한다. 이 문은 간결하고 소박하고 주심포계의 형식을 취하고 있는 맞배지붕의 삼문(三門)이다. 기둥의 배흘림은 현존해 있는 목조건축 유구(遺構) 중 가장 크고 주두(柱頭)와 소로(小累)의 굽은 곡을 이루고 굽 받침을 두었으며 단장 혀(短長舌)로 외목도리(外目道理)를 받게 하였다. 또한 쇠서(牛舌), 첨차 화반(花盤), 보(樑) 등의 세련된 조각 솜씨는 고려시대건축양식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무더운 날씨기는 하였으나 강원도의 관광명소 강릉에서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을 눈과 가슴에 담았기에 뜻 깊은 하루였고 무더운 날씨에도 우리에게 열정적 해설을 해주신 강릉의 해설사님들과 답사를 원활하게 진행해 주시고 뒤풀이 자리까지 마련해 주신 임원진 여러분의 수고에 감사드리며, 다음 답사를 기다려 봅니다.
강릉향교(江陵鄕校 :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99) 소재지 : 강원도 강릉시 교동 233번지[명륜로 29] 강릉 향교는 옛 성현께 제사를 드리고 학문을 갈고 닦는 곳으로 성균관을 제외한 지방 향교로는 규모가 가장 크다. 1313년(고려 충선왕 5) 강릉 존무사(江陵 存撫使; 종2품, 지금의 도지사)였던 김승인(金承印)이 세웠다. 1411년(태종 11)에 불에 타 2년 뒤 강릉 도호부(江陵都護府) 판관(判官; 종5품) 이맹상(李孟常)의 건의로 다시 세웠고 몇 차례에 걸쳐 수리를 하였다. 제사를 지내는 공간의 중심 건물인 대성전은 1411년(태종 11)에 불타버린 것을 1413년 강릉대도판관(大都判官) 이맹상(李孟常)이 강릉의 유지 68명과 함께 발의하여 중건하였으며, 그 후 여러 차례에 걸쳐서 중수하였다. 1909년에는 강릉향교 안의 명륜당(明倫堂)에 화산학교(花山學校)를 건립하였으며 1910년에 폐교되었다. 1919년에는 수선강습소(首善講習所)를 설립하였다. 또한 1928년에 강릉농업공립학교, 그 후 강릉공립상업학교·강릉공립여학교·옥천(玉川)국민학교·명륜 중고등학교 등이 명륜당에서 개교하였다. 강릉향교는 교육 기능과 제사 기능을 함께 하기 위하여 문묘와 명륜당을 두고 있다. 문묘는 공자를 비롯한 성현에 대하여, 그 양측의 동·서무는 선현에 대한 제사 의식을 행하였다. 명륜당은 유학을 공부하는 곳으로 그 좌우 양편의 동서재실은 유생과 재관들이 머물거나 선현을 봉안하기도 하는 곳이다. 동서로 길게 명륜당이 놓여 있고 북쪽 내정에는 좌우로 동·서재가 남북으로 길게 있으며 북쪽에는 대성전을 오르는 계단이 있다. 이 계단은 동서로 놓인 회랑과 연결되며 북쪽으로 대성전이 있고 그 좌우에 동·서무가 남북으로 길게 놓여 있다, 또 서남 외곽에는 제방이 있고 동쪽에는 관리사가 있다. 명륜당은 정면 11칸, 측면 2칸의 누마루 형식의 맞배지붕 홑처마 형식의 건축물로 내부에는 통칸의 대들보가 건너가고 바닥은 마루이며 동쪽 끝은 방으로 꾸몄다. 건물 전후의 외벽은 변형된 완자살창을 달았고 내부는 대성전과 같이 연등천정 형식이다. 공포는 초익공을 두고 포간에는 화반을 두고 익공과 첨차 보아지 등을 두고 있어 조선 중기 이후의 건물로 판단하고 있다. 강릉향교 大成殿(보물 214호) 소재지; 강원도 강릉시 교동 233(문묘) 강릉 향교 대성전의 규모는 정면 5칸・측면 3칸이며, 지붕은 측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 단층집이다. 지붕 무게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간결하게 짜은 구조가 기둥 위에만 있는 주심포 양식이다. 건물 안쪽은 바닥에 판석을 깔았고 천장은 뼈대가 보이는 연등천장으로 꾸몄다. 건물의 앞면은 기둥 사이를 개방하여 툇간으로 하고 제2 주열(柱列)에 고주(高柱)를 배열하여 벽을 쳤는데 그 가운데 3칸에 각각 빗살문짝의 출입문이 있다. 대들보는 이 고주에서 둘로 이어졌으며, 내부에 걸쳐 있는 긴 대들보 위에 세운 접시받침을 가진 대공(臺工; 들보 위에 세워 마룻보를 받치는 짧은 기둥)이 고주와 함께 종량(宗樑; 두 겹으로 얹는 보에서 마룻대가 되는 보)을 받들고 있다. 공포(栱包)는 기둥머리에 첨차(檐遮; 초제공・이제공 따위의 가운데에 어긋나게 맞추어 짬)를 하나 꽂고 있다. 내부에는 판석을 깔고 주위 기단 위에는 벽돌을 깔았다. 좌우 옆면의 박공(牔栱; 합각머리나 맞배지붕의 양쪽 끝머리에 여덟 팔(八)자 모양으로 붙인 두꺼운 널) 머리에는 방풍판이 있으나 원래의 것은 아닌 것 같으며, 처마는 홑처마로 부연(附椽; 탑 기단의 갑석 하부에 두른 쇠시리)이 없다.
신복사지(神福寺趾) 강원도 강릉시 내곡동에 위치하고 있는 신복사 터. 신복사는 통일신라 문성왕 12년(850년)에 범일국사가 창건한 것으로 전해 내려오나 명확하지는 않다. 발굴조사는 총 2차례에 걸쳐 실시되었으며, 지난 1990년 강릉원주대학교 박물관과 2005년 강원문화재연구소에 의하여 조사되었다. 1990년 6월부터 동년 8월까지 삼층석탑의 주변호보책 설치에 앞서 강릉대학교 박물관에서 시굴조사를 실시하여 건물지 2개소와 배수로 등을 확인하였다. 가람배치는 탑을 중심으로 탑의 북쪽에 금당지가 위치하고 탑의 좌·우측에 회랑지가 위치한 것으로 판단된다. 이 가람배치는 삼층석탑 뒤에 금당지, 탑 양쪽에 회랑지가 있는 전형적인 고려시대 형식이며, 또한 신복사지의 방향이 북서향을 하고 있어 자연지형을 그대로 이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신복사지의 가람배치나 출토유물로 보았을 때 신복사지는 고려시대의 사찰로 추정되며, 폐사는 조선시대 중기로 판단된다 신복사지 석조보살좌상(江陵 神福寺址 石造菩薩坐像 : 보물 제84호 ) 소 재 지 강원 강릉시 내곡동 403-2 . 강릉 신복사지 삼층석탑(보물 제87호)을 향하여 공양하고 있는 모습의 보살상을 표현하였는데, 왼쪽 다리를 세우고 오른쪽 다리를 꿇어앉은 자세를 하고 있으며 두 손은 가슴에 모아 무엇인가를 잡고 있는 모습이다. 원통형의 높다란 관(冠)을 쓰고 있는 얼굴은 풍만한데다가 만면에 웃음을 띠고 있어 복스럽게 보인다. 관 밑으로 드러난 머리카락은 어깨너머로 길게 늘어져 있으며, 양 어깨에서부터 걸쳐 내져진 옷자락은 몸의 굴곡을 따라 자연스럽게 표현되어 보살상의 사실성을 더해준다. 팔찌, 목걸이, 옷주름은 굵은 띠처럼 묘사되었으며 전체적으로 둥글고 둔중한 조각수법을 보인다. 이러한 자세나 조각 솜씨는 평창 월정사 팔각 구층석탑(국보 제48호)앞의 공양보살상과 유사한 것으로 같은 지방 계열의 특징으로 여겨진다. 보살이 앉아있는 대좌(臺座)는 윗면을 둥글게 하여 보살이 들어앉을 수 있도록 하였으며, 바깥쪽에는 큼직큼직하게 2겹의 연꽃잎을 조각하였다. 규칙적인 간격의 옷주름과 단순해진 장신구, 대좌의 조각수법 등에서 화려한 신라적 요소가 사라지고 고려 초기의 둔화된 표현 양식이 나타나고 있다. 탑을 향해서 공양(供養)하는 모습의 보살상으로 고려(高麗) 초기(初期), 즉 10세기 후반기에 제작된 것이다. 신복사지 삼층석탑(江陵 神福寺址 三層石塔 : 보물 제87호) 소 재 지 강원 강릉시 내곡동 403-2 강릉 신복사지 삼층석탑에 대한 설명입니다. 신복사의 옛 터에 남아있는 탑이다. 신복사는 통일신라 때 범일국사(梵日國師)가 창건한 절로, 창건과 관련된 설화가 전해지고 있다. 즉 신라의 한 처녀가 우물에 비친 햇빛을 보고 그 물을 마셨는데 곧 아이를 배어 낳게 되었다. 집안사람들이 아이를 내다버렸으나, 아이의 주위로 빛이 맴돌아 괴이하게 여겨 다시 데려와 길렀는데, 그 이름을 범(梵)이라 하였다. 범이 출가하여 승려가 된 후 고향에 돌아와 신복사와 굴산사(掘山寺)를 창건하였다고 한다. 창건 이후의 기록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이 탑은 2층의 기단(基壇)을 쌓고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것으로, 각 부분의 모습들이 특이하다. 바닥돌의 윗면에는 연꽃이 엎드려 있는 듯한 모양의 조각을 하여 둘렀고, 아래층 기단의 4면에는 안상(眼象)을 3개씩 새겨 넣었다. 탑신 각 층의 몸돌과 지붕돌은 각각 하나의 돌로 새겨 얹어 놓았다. 탑신에는 부처의 사리나 불경 등을 모셔두는데, 1층의 몸돌에 이를 안치하는 방인 감실(龕室)모양의 조각이 있다. 1층의 몸돌에 비해 2·3층은 갑자기 그 크기가 줄어들어 매우 얇다. 지붕돌 역시 얇아서 귀퉁이끝은 치켜올림이 희미하며, 지붕돌 밑면의 받침수는 3단이다. 꼭대기에는 드물게 머리장식이 온전히 남아있는데, 각 부분의 높이에 비해 폭이 넓어 안정감을 준다.
굴산사지(堀山寺址 : 강원도 기념물 제11호) 소재지 강원도 강릉시 구정면 학산리 당나라에서 참선 공부를 하고 847년(신라 문성왕 9)에 귀국한 범일(梵日)이 851년에 창건한 절이라 알려져 있으나, 이 해에 명주도독(溟州都督) 김공(金公)이 범일에게 굴산사에 머물도록 요청한 것으로 보아 그 전에 절이 있었으리라 여겨진다. 범일은 왕경(王京)의 귀족으로서 15세에 출가하여 831년(흥덕왕 6)에 왕자 김의종(金義琮)과 함께 당나라로 갔다. 범일의 법맥은 개청(開淸)·행적(行寂) 등에게 이어져, 이른바 신라 선문구산(禪門九山) 중의 굴산사파를 형성하였다. 폐사된 연대는 확실치 않으나 성터에서 출토되는 기와나 청자 조각으로 보아 고려 중기까지는 존속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이 일대는 일찍이 농경지로 변하여 절의 위치나 가람배치 등에 대해 정확히 알 수 없었는데, 1949년(己丑年)의 대홍수로 경작지에 뭍혀 있는 초석(礎石)이 노출됨으로써 절의 규모가 비로소 확인되었다. 1983년의 발굴조사에서 ‘五臺山’이 새겨진 기와조각이 나옴으로써, 굴산사는 오대산 성지(聖地)의 권역(圈域)에 속함을 확인하였고, 이러한 사실은 범일의 문인(門人) 신의(信義)가 오대산 월정사에 살았다는 ≪삼국유사≫의 기록을 보아도 알 수 있다. 또 출토된 명문기와의 ‘屈山寺’와는 달리 문헌에서는 ‘掘山寺·堀山寺·崛山寺’ 등으로 표기되어 있는데, ‘굴산’은 곧 사굴산(闍屈山)의 약칭이다. 현재 이 절에 남아 있는 석조유물로는 범일국사의 부도라고 전해지는 굴산사지부도(보물 제85호)와 우리 나라에서 가장 큰 당간지주인 굴산사지당간지주(보물 제86호)가 있다. 이 밖에도 4구(驅)의 석조(石造) 비로자나불좌상이 있다. 하나는 높이 1.5m로 당간지주에서 동남쪽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 얼굴과 오른팔 일부가 떨어져 나간 것으로서 보호각 안에 있다. 두·세번째 것은 당간지주에서 서북쪽으로 100m 떨어진 암자(현재의 굴산사)에 마멸이 심한 채로 모셔져 있는데, 본존(本尊)은 높이가 1m가 채 안 된다. 나머지 하나는 석천(石泉)이라 불리는 마을 우물가의 8각 중대석 위에 올려져 있는데, 목과 얼굴이 결실되었다. 마을 북쪽 소나무 숲에는‘학바위’가 있는데, 위의 석천과 함께 범일의 탄생 전설에 등장하는 곳이다. 즉 이 마을 처녀가 석천에서 해가 떠 있는 물을 마시고 잉태하여 아기를 낳자 학바위에 버렸는데, 그 뒤 학들이 날개로 아기를 감싸고 키우는 것을 보고 집으로 데려와 기른 아이가 바로 범일이라는 이야기이다. 이렇듯 범일은 강릉 지역 민간신앙의 대상이 되어, 강릉단오제 때 모시는 대관령국사성황당신(大關嶺國師城隍堂神)이 곧 범일국사라고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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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7월 26일 산나그네(박춘덕) 적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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