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때는 미이라 침낭 속에서도 춥다며 엉덩이를 둘둘 말더니 아침에는 그걸 어깨에 걸쳤다.
가만히 있어도 아래턱이 덜덜 떨리는 날씨, 화장실 쪽으로 몇 걸음 걷기가 귀찮아 수분이 절대 모자라는 검불더미에서 슬쩍 해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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텐트 옆에다 인민군 따발총으로 드르륵 갈겨대고 부르르 떨면서 대충 털다 말고 들어왔을 때다.
- 요강 가져올 걸...
요강 가져올 걸 그랬다는 말은 아내가 물 한통을 긷기 위해 하루에 몇 시간을 걷는다는 이디오피아 소녀 이야기가 나오는 영어소설을 번역했을 때부터 내가 한컵의 소변을 버리기 위해 그보다 몇 십배나 많은 양의 물을 버리는 짓이 옳지 못하다는 생각을 실천에 옮긴 걸 두고 한 소리다.
- 여보 우리 집에 날아오는 독수리들 생각난다.
- 우리가 언제쯤 음식 찌꺼기 버리나 목을 빼고 기다릴까봐? 난 독수리보단 스컹크나 너구리가 더 불쌍해.
- 불상은 절마다 있지.
- 눈이 그렇게 많이 왔는데 이 겨울에 굶어죽지나 않는지 걱정이야.
- 사람 참, 걱정할 게 없으니까 별 걱정을 다 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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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지막이 밥을 해먹고 비포장 사막길을 한참 달렸다. 공주김치와 낙지젓이 다 떨어졌는데도 콧노래가 절로 나온다.
- 여보 어제부터 자꾸 흥얼거리는 그 노래, 그거 이글스지?
- 어? 아네? 맞아. 피스풀 이지 필링(Peaceful Easy Feeling)...
- 얼마전에 이글스 창립멤버 하나였던 알랜 프라이(Allen Frey가 죽었다더니 그래서 흥얼거려?
- 아니...
- 그럼 왜?
- 첫머리 가사 때문이야.
- 흥얼거리지만 말고 제대로 불러봐 그럼.
- I like the way your sparkling earring lay
Against your skins so brown (당신의 갈색 피부에 딱 어울리는 귀걸이가 반짝이는게 너무 예뻐)
And I wanna sleep with you in the desert tonight
With a billion stars all around... (수십억개의 별들이 반짝이는 사막 한가운데서 당신과 오늘밤을 보내고 싶어)
- 와~~~ 완존 시네. 사랑을 고백하는 시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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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신 텍사스라는 말은 어디서 왔는지 혹시 알아?
- 텍사스란 말의 어원은 이곳에 살던 하시나이(Hasinai) 인디언이 테하스(Tejas)라고 했던 것에 유래했다는 설이 있어.
- 멕시코 인들이 멕시코라 발음하지 않고 메히꼬라고 하는 것과 같은 이치구나. 스페인 사람들이 바람소리 나는 발음을 못해서 X를 썼겠지.
- 손성태 박사는 그 메히꼬를 '맥이가 사는 곳'이라고 하더만... 기억나지? 예족 맥족... 웅녀의 자손...
- 나다마다. 하늘의 자손임을 믿던 동아시아의 한 무리가 해 뜨는 동쪽을 향해서 여기까지 왔겠지. 우리는 반도에 정착했고...
- 그렇지. 아즈텍을 건설하고 마야와 잉카를 건설하고...
- 아즈텍을 건설한 사람들이 쓰는 언어인 나와들(Nahuatl:우리들이라는 뜻)이 우리말 구조와 완전히 일치한다며?
- 어디 그뿐인 줄 알아? 잉카인들 쓰는 케추아(Quechua)가 꽤 춥다는 우리말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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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런데 여보, 여기 정말 오지 중에 오지다 그치?
- 그러게... 유타, 캘리포니아, 애리조나, 뉴 멕시코, 네바다를 한꺼번에 보는 거 같애.
- 우리 심심한데 아메리카 대륙에 나타난 우리말 이어가기 놀이하자. 내가 먼저 할께. 우에우에태어난 곳(Huehuetenango 과테말라 지명)
- 안 갈거예요(Angangueyo 멕시코 도시)
- 오고 싶은 곳(Ocosingo 멕시코 도시)
- 따라붙고(Tarabuco 볼리비아 마을 이름)
- 굽이쳐 강(Kvichak River 알래스카 알류산 열도가 시작되는 강 이름)
- 끼여왔다고 (Kiowa 텍사스 인디언 부족)
- 집에 왔다고 (Chippewa 오대호 연안 인디언)
- 자기도 왔다고 나도왔수 (nadouessioux 수우족 원래 이름)
- 다 도와준다고 (Dadowani 나와들 언어에서 아즈텍의 왕을 칭할 때)
- 다 맞춘다고 (Damachini 아즈텍의 점쟁이나 주술사)
- 전부 시장으로 오라고 (Odawa 또는 Ottawa 캐나다 수도)
- 자꾸자꾸 만나자고 (Manitoba 캐나다의 주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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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린 근데 왜 사막을 좋아하지?
- 사막을 좋아하는 게 아니라 사람들이 많이 안가는 델 좋아하는 거겠지.
- 당신 혹시 키카푸라는 인디언 알아?
- 키카푸? 처음 듣는데... 여기 살았던 사람들이야? 텍사스에는 고구려의 활쏘기 전통을 고스란히 간직한 케도가 살았고, 코만치와 나중에 온 아파치가 유명했던 걸로 아는데... 키카푸도 그중 하난가?
- 아니... 원래는 오대호 근방에 살았던 사람들인데 이런저런 이유로 켄자스로 쫒겨나게 됐어. 가만있자, 그때가 언제냐...1839년인가 또 추방명령이 떨어졌지. 오래동안 떠돌면서 남으로 남으로 내려오다가 여기서도 잠깐 살았다지. 일부는 떠돌다가 주변에 있는 인디언들과 섞였는데 나머지 일부가 계속 쫒기다가 리오 그란데를 건너 멕시코까지 갔지. 집은 멕시코에 있지만 일년 중 대부분은 미국에서 철새노동자 생활을 하는데...
- 아하, 철새 노동자들이 그 사람들이구나.
- 다는 아니지만 키카푸 인디언들이 많아. 암튼 1983년에 양국 정부가 이 사람들에게 국적을 주자는 법을 통과시켜서 이중국적자가 됐다지.
- 그런 사연이 있었구나.
- 그런데 고집 세기로 유명한 그 키카푸 사람들은 옛날부터 내려온 조상들의 전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나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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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막은 서두르는 자를 용서하지 않는다.
낮에는 태양열로 말라죽이고 밤에는 추위로 얼어죽인다.
사막에 들어오는 자는 죽음 앞에 모두 공평하다. 더 가진 자도 없고 덜 가진 자도 없다.
사막은 밖에서 가지고 들어온 것들이 모두 거추장스러운 사치품이라는 사실을 깨우쳐준다.
사막에 들어오는 사람들이 겸손해지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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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우 싼타 엘레나 케년에 들어섰다. 잔뜩 기대를 했는데 역시나 협곡 입구부터 심상치 않다.
리오 그란데 강을 사이에 두고 왼쪽이 멕시코 오른쪽이 미국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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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숙히 들어가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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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서는 더 들어갈 수 없는 막바지...
우린 왜 여기까지 왔는가...
우린 왜 이러고 사는가...
잠시 팔짱을 끼고 멕시코 쪽 절벽을 바라본다. 아주 먼 옛날 우리 조상들을 떠올려본다. 조상들이 압록강과 두만강에서 지금은 중국과 러시아의 영토가 되어버린 곳을 누비는 상상을 해본다.
압록강 두만강 상류도 꼭 저 강처럼 작은 시냇물이겠지...
대륙을 호령하던 기상은 드넓은 땅을 고스란히 내어준 그날부터 초라한 반도의 운명으로 전락했겠지...
그것으로도 모자라 반으로 잘리고 또 남쪽은 동서로 나뉘어 티격태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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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e et Impera! (분할하여 통치하라)
강대국 제국주의 침략자들이 바라마지않는...
아, 자랑스런 배달의 자손...
드넓은 대륙을 고스란히 갖다바친 걸 두고 통일이라고 가르쳤으니...
분할하여 통치하라!
갑자기 로마제국 시저의 목소리를 듣는 듯하다.
조선의 마지막 총독 아베 노부유키가 했다는 끔찍한 예언이 귀를 후빈다.
...
장담하건대,
조선인들이 제정신을 차리고
찬란하고 위대했던 옛 조상들의 영광을 되찾으려면
100년은 더 걸릴 것이다
우리 일본은 조선인들에게 총과 대포보다 더 무서운 식민교육을 심어놓았다
너희들은 결국 서로를 이간질하며 노예 같은 삶을 살게 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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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 놈 참, 신선놀음이 따로 없네.
돌아오는 길에 한 사내가 웃통을 벗은 채 카약을 타고 있다. 아내도 한 수 거든다.
- 한뼘 차이로 멕시코와 미국 국경을 왔다리갔다리 하니까 불법체류자가 됐다가 합법체류자가 됐다가...
국경이란 무엇인가. 경계란 무엇인가. 사람들은 여기저기 선을 긋고 여기는 내 땅 거기가 네 땅이라고 한다.
그리고 도장 찍힌 쯩이 없이 그어놓은 선을 넘으면 불법체류자라고 한다.
- 저 친구 몸 왼쪽은 불법이고 오른쪽은 합법이야.
영양가 없는 농담 쌈치기는 못 먹는 감 찔러나 보자는 수작이다.
부러운 장면을 보면 깎아내리기부터 해야 열등감이 가려진다고 믿는 초라한 자기변명이자 본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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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에 아내가 자신의 블로그에서 번역을 끝냈다.
체코 출신의 홀러코스트 생존자가 쓴 폴란드 아우슈비츠 수용소 이야기다.
- 당신 블로그 얼굴 바꿀 때도 됐으니까 여기서 한장 찍자. 그동안 번역하느라고 수고 많았어.
나는 아내에게 굳이 홀러코스트와 폴란드는 이제 그만 내려놓으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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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가 역사교과서 국정화 이야기까지 나왔다.
- 여보, 역사책 얘기가 나와서 하는 얘긴데 독일에서는 역사책을 쓸 때 주변의 국가들과 상의해서 쓴대.
- 금시초문인데, 그게 사실이야?
- 그뿐이 아니야. 독일이라는 나라가 이 지구에서 멸망해서 아주 사라질 때까지 독일은 주변 국가에게 사죄하고 용서를 구할 거라고...
- 우와~~~
나도 대강은 알고 있는 내용이지만 내가 조금 오바해서 감탄사를 터뜨리자 아내는 더욱 신이 나서
- 이런 일이 있었대. 예전에 한국 어느 대통령이 서독에 갔는데 독일의 통일에 대해서 얘기가 나왔나봐.
- 그래서...
- 그때 한국 대통령이 뭐랬는지 알아?
- 뭐랬는대?
- 북한이 동독만 같아도... 그랬대.
- 얼씨구! 그래서?
- 옆에 있던 독일 총리가 가만히 듣고만 있다가 "남한이 서독만 같으면 오죽 좋을까요...." 했다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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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글 이미지)
직접 가 본 우리야 감이 잡히지만 눈팅만해야 하는 분들을 위해서 한장 퍼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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싼타 엘레나 케년에서 나와 보끼야스 케년으로 간다.
강 폭이 더욱 좁아지더니 종아리가 젖을까 말까한 시냇물이다.
빅 벤드라는 이름에 걸맞게 엄청 구불구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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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쯤일까...
서부영화의 거장 존 포드 감독이 영화 리오 그란데에서 존 웨인에게 모린 오하라와 멋진 키스 장면을 연출하게 한 곳이...
아니면,
모든 인디언들의 영웅, 아파치 추장 제로니모가 배수의 진을 치고 기병대와 끝까지 싸운 곳이...
그 제로니모를 오사마 빈라덴을 죽이라는 암호명으로 썼다니...
아베 노부유키와 그들이 한 짓은 무엇이 다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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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마침 멕시코 쪽에서 한 사람이 말을 몰고 오는 모습이 보인다.
달리는 폼을 보니까 장사치는 아닌 것 같고 국경을 점검하는 순찰요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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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볕이 무척 따갑다. 목이 마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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꾹 참고 보끼야스 협곡을 가르는 강가를 걷는다.
어릴 때 본 서부영화의 여러가지 장면들이 겹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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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덕 위에 서있자니 멕시코 쪽에서 불어온 상큼한 바람이 땀을 씻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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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막은 옳고 그름을 판단하지 않는다. 침묵을 가르칠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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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선가 노래소리가 흘러 나온다.
강 너머 멕시코 쪽에서 바람따라 흘러오는 노래 꽌따라메라...
...
난 진실한 사람이야
야자수 밑에서 나는 자랐지 내가 죽더라도 내 영혼에게 고하노니
난 진실한 사람이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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멕시코 사람들이 몰래 강을 건너서 이런 수공예품을 놓고 갔다. 제각기 가격을 붙여놓았는데 값이 모두 다르다.
맘에 들면 하나 집으시고 양심껏 돈을 놓고 가라는 시스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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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뼉을 치며 노래를 부르는 두 아미고...
![](https://t1.daumcdn.net/cfile/blog/2422D84C56C7D70E14)
노래 들은 값을 내라는 돈통이다
8달러 내면 쪽배를 타고 멕시코 땅을 밟을 수 있다는데 여권이 있어야 한단다.
국내선은 여권이 필요 없어서 운전면허증만 가지고 비행기를 탔다. 제길...
5주 넘게 두번이나 멕시코를 다녀왔으면서도 못내 서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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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영감님과 악수를 나누며 어디서 뭐하다 이제서야 겨우 나타났냐며 치고박고 했으면 오죽 좋으련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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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막 한가운데 버려진 온천이 있다기에 아찔한 곡예운전 끝에 찾아간 곳...
사람이 살았던 흔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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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상하게 뼈대만 남은 집터, 지붕은 날아가 흔적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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멕시코 아빠와 일본 엄마 사이에 테어난 후안 이치로...
장남 존이라는 뜻이겠는데, 딸 이름은 모르겠다.
수영복을 준비하지 못해서 빤쓰바람이다.
정신없이 벗고 있는 젊은이들은 오스틴에서 온 대학생들...
우리더러 텍사스에 왔으면 당연히 오스틴을 들러야 텍사스에 왔단 소리를 듣는단다.
![](https://t1.daumcdn.net/cfile/blog/26368E4D56B8332B08)
야영장으로 돌아가는 길에 이글스 노래를 줄곧 흥얼거린다.
...
평화롭고 느긋한 이 기분,
당신은 날 어쩌지 못해
왜냐면 난 이미 당당하게 이 땅에 서 있으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