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을 견디는 협곡의 시
ㅡ 곽효환 시집 『소리 없이 울다 간 사람』
김지윤 (문학평론가)
1
바람은 물결과 파도를 만들고 항해자의 항로를 인도하며, 길 없는 사막의 모래 더미에 길을 낸다. 또한 바람은 오랜 시간을 들여 바위를 깎아 절벽을 만든다.
곽효환 새 시집 소리 없이 울다 간 사람(문학과지성사, 2023)은 바람 소리로 가득하다. 산과 고원을 휘몰아 흐르는 강 위에서, 시간을 온몸으로 맞아 깎아지른 절벽 위에서, 황무지와 모래밭과 무덤들 위에서 부는 바람이다. 시인의 귀는 그 바람소리를 듣기 위해 더 예민해지고, 바람이 지나온 길의 흔적을 더듬기 위해 그의 시선은 육무(陸霧) 속을 헤맨다.
루쉰이 고향에서 쓴 유명한 말처럼, 희망이란 길과 같다. 길은 처음부터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가는 사람이 많아지면 그곳이 길이 되는 것이다. 세상에 없던 길이 생겨나려면 수많은 사람들의 발걸음이 모이고 그들의 시간과 역사가 그 위에 쌓여야 한다. 그러니 길이 만들어지는 것은 희망이 생겨나는 것과 그 과정이 다르지 않다. 희망도 본래 어디에도 없는 것이지만, 많은 사람들이 마음을 모으면 희미하게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는 것이니까.
빈 허공에 문득 바람이 일어나는 것은 하나의 경이(驚異)다. 우리는 바람이 언제 어디서 불어올지 알기 어렵다. 그러나 바람은 불어와 많은 것들을 짓고, 또 무너뜨린다. 이번 시집의 제목은 “소리 없이 울다 간 사람”인데, 이 시집을 읽고 나면 마치 협곡을 울리는 거센 바람소리를 들은 듯, 그 안에 숨어있는 무수한 사람들의 숨죽인 울음소리를 겹쳐 들은 듯 먹먹한 심정이 된다. 그들은 왜 “소리 없이 울다” 가야만 했을까?
소리 내어 울지 못하는 이유는, 무언가를 애써 견디고 있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참아내어야 하는 것이라면 그 무게 앞에서 차마 소리를 내어 울 수 없게 된다. 목 놓아 울며 슬퍼하여 이겨낼 수 있는 것이라면, 통곡할 수 있다. 그러나 잊거나 지우거나, 버릴 수 없는 슬픔이라면 뒤돌아 숨죽여 조용히 울게 된다. 그 후로도 오래 울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바람은 많은 것들을 옮긴다. 모래와 흙, 나뭇잎과 꽃씨를 옮기고 물결을 만들어 배를 옮기고, 상류에서 하류로 떠내려가는 모든 것들을 옮길 수 있다. 죽음과 삶도 그 물을 따라 흐른다. 그런 것들이 쌓여 비옥한 토양이 되고 사람들을 먹일 곡식이 자라고 지형이 바뀐다. 흐르는 것들은 이렇게 사람을 살리고 목숨이 자라나게 하고 이 땅의 형세를 바꾼다. 그러니 역사를 굽이굽이 흐르는 강물에 비유하는 것은 언제나 적절하다. 이것은 바람의 일이며 세월이 하는 일이다.
이 시집 속에는 역사의 흐름 속에 스러진 뭇사람들의 이야기가 가득하다. 특히 라즈돌노예역에서 강제로 이주하는 열차를 타야했던 고려인들과 같이 북방의 시공간에 존재했던 “그리운 무명의 사람들”(「만선열차」)의 목소리를 되살린다. 그리고 “북방의 중심 심양”(「붉은 그림자」), “눈물 많은 오로촌 마을”, “대륙의 가장 깊은 항구 헤이산터우커우안/ 드넓게 펼쳐진 초원에 몽골인의 게르만 듬성듬성 있던 무명의 촌락이었던 만저우리”(「여기서부터 만주다」)와 같은 북방공간들이 펼쳐진다.
두 번째 시집 지도에 없는 집(문학과지성사, 2010)에서 북방이라는 공간을 탐색하고 “칠흑의 길을 앞서 간 이들을 따라/ 바다를 닮은 호수를 품은 내륙 도시를 지”나며 “먼저 이 길을 간 사람들의 삶”(「앞서 간 사람들의 길」)을 생각했던 시인은 세 번째 시집 슬픔의 뼈대(문학과지성사, 2014)에서는 “상처투성이의 북방 침엽수림에서 나를 본다”(「숲에 드니 상처가 보인다」)고 쓰며 시베리아 평원, 고비 사막, 바이칼 호숫가를 시의 원류(源流)로 그려보았고, 바로 이전 시집 너는(문학과지성사, 2018)에서는 만주, 몽골, 백두산과 중앙아시아를 넘나드는 대륙적 상상력을 보여주었다. 김동환, 백석, 이용악의 시에 나타난 북방공간의 의미를 밝히기도 했던 그는 그간 북방의식에 대한 폭넓은 성찰을 연구와 창작에 담아왔다. 그리고 이번 시집에서는 더욱 깊어진 의미를 ‘북방’의 공간에 담으며, ‘사람’에 좀 더 주목한다. “하늘 아래 가장 광활한 평원 시베리아/녹슨 철로에 몸을 실은 사람들/그 붉은 이름들이 흘러간다”고 쓰며 시인은 “징용이었을까 독립이었을까 혹은 혁명이었을까”(「시베리아 횡단열차2」)라는 무거운 질문을 던져본다.
시집 전체를 관통하는 색채 이미지를 말해보자면 붉은 색이라 해야 할 것이다. 붉은 얼굴들, 붉은 벌판처럼 붉은 색이 덧입혀진 이미지들이 자주 등장한다. “가도 가도 붉은 땅”(19쪽), “붉은 빛 스러진”(24쪽), “붉은 꽃” “붉은 강” (26쪽), “붉은 여인” (30쪽), “붉게 흐려지는 그림자” (40쪽) 등 붉은 색이 가득하다. 물론 북방과 고원의 적토, 핏빛 역사, 혁명을 뜻하는 색으로 사용되기도 했지만 단지 그것만은 아니다. 붉은 색은 피의 색이고 불의 색이다. 생명의 색인 것이다. 불교에서는 창조, 광명, 열의, 힘 등의 긍정적인 가치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지옥을 표현할 때 붉은색을 사용하여 죽음, 괴로움, 고난의 부정적 함의도 갖는다. 시작과 끝, 생과 사, 열정과 고통이 한 몸이다. 이 붉은 색은 나에게 인생 그 자체로 다가온다.
이 시집을 여는 시 「시베리아 횡단열차3」를 보자. 시베리아를 횡단하는 열차에 앉아 시인은 “기구한 삶을 이어나가기 위해/ 가족을 위해 더러는/ 독립과 민족과 자유를 위해/ 강을 건너고 산을 넘어/ 다시 더 멀고 더 깊은 대륙 저편으로/ 갔다가 돌아온 혹은 끝내 돌아오지 못한/ 그을린 붉은 얼굴들”을 그려보고 시간을 거슬러 올라 그들의 마음자리를 헤아린다. 시인이 호명해낸 그 이름 모를 이들의 얼굴들은 그에게 “먹먹한 슬픔과 울음으로 삼키는 잠들지 못하는 밤”을 선사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 끝에 “멀리서부터 아침이 온다”는 사실이다. 불면의 밤의 끝에 아침은 오고 있다. 어둠의 세상에서 희망은 비록 희박한 것에 불과하겠지만, 모든 아침의 시작은 다 그렇게 희미한 여명이다.
거센 바람이 불지 않는다면 높은 파도는 치지 않는다. 바람을 몰고 온 사람들은 과연 누구였을까. 시인이 되살려낸 처절한 옛 사람들의 이야기는 이 시집 속에서 장구한 강물처럼 흐른다. 그들은 세계의 비극 앞에서 꿋꿋이 버티고, 때로는 현실의 부정성에 저항하고 응전하며 강풍과 격랑을 온몸으로 맞아 가파른 벼랑으로 깎여나가면서도, 물의 흐름을 만들어 세상에 없던 길을 내려 하던 사람들이다.
2
“소리 없이 울고 간 사람”들은 모두 무언가를 애도했으며, 우리는 또한 그들을 애도한다. 나라를 잃고, 꿈을 잃고, 목숨을 잃은 사람들과 남겨진 이들의 울음과 울분은 역설적이게도 삶을 지속할 수 있는, 상실에 저항할 수 있는 힘이 되기도 한다. 박탈되고 상실된 것과 결핍된 것이 무엇인지를 상기시키기 때문이다.
이 시집에 가득한 ‘울음’이 ‘망각’에 저항하기 위한 것이라고 할 수도 있지 않을까. 우리가 그들의 울음을 기억하고, 그들을 위해 계속 울 수 있도록. 그리고 더 나아가 우리도 우리만의 울음을 울 수 있게 말이다. 협곡이 바람을 견디며 결국 바람을 품게 되듯, 고통을 삭이며 슬픔을 품어 힘이 되게 하는 울음이다.
페터 바이스가 소설 『저항의 미학』에서 “피카소의 찌그러지고 터진 몸뚱이들, 일그러진 얼굴들은 그 시대에 대한 증언이기도 했다. 그림은 고함을 지르고 있었다. 그것은 지나간 억압의 시대들에 대한 기억이었다.”라고 썼던 것처럼, 곽효환의 시 속에서도 수많은 사람들의 한숨과 신음, 한탄과 눈물이 섞인 기억이 있다.
이 시집은 그 기억에 대한 수많은 사람들의 구체적이고 생생한 목소리를 담아낸다. 이것을 ‘증언’이라 불러도 좋을 것이다. 시인은 그 증언을 듣고, 꺼져가는 작은 목소리라도 놓치지 않으려고 귀를 세운다.
그 어느 길목에 지친 다리를 부리고 숨 고르다
금강산 기슭에서 발원하여
휴전선 품은 화천 어디에서 마침내
북한강이 된다는 금강천 줄기 찾아
두고 온 그의 옛사람들 안부 물어야겠다
무청 도려낸 무들 촘촘히 박혀 있는 겨울 들판과
시래기 주렁주렁 매단 지붕 낮은 집 처마 밑으로
무수히 들고 난 바람이 실어 온 말들과
들풀처럼 무성한 소문 또한 전해주어야겠다
수많은 내와 천과 강의 지류들
흐르고 합수하고 다시 흘러
마침내 큰 강이 되는 물머리에서
실어 온 이야기들에 귀 기울여야겠다
-「양구에서」 부분
시인은 “옛사람들 안부”를 묻기 위해 “수많은 내와 천과 강의 지류들/ 흐르고 합수하고 다시 흘러/ 마침내 큰 강이 되는 물머리”에 서서 실려오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바람이 실어 온 말들과 들풀처럼 무성한 소문”을 전하려 한다.
그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꼬리를 물고 있”(「시베리아 횡단열차 4」)는 시간 속에서 옛사람들의 마음에 자신의 마음을 겹쳐보며 함께한다. 시공간의 차이를 떠나 그들은 겹쳐진다. 시인은 “안개같은 어둠에 싸인 장춘역”에서 “옛사람을 찾아가는 북방의 길”(「만선열차」)을 떠나고, “검푸르고 시림 어둠을 헤치고 하얼빈 가는 길”에서 “이 강을 건너오고 건너간/ 어질지만 시름 많은 사람들의 흔적을 더듬”(「시베리아 횡단열차」)으며 그들의 여로를 추체험한다.
여전히 ‘북방’이 그의 공간적 상상력에 큰 면적을 차지하고는 있지만, 그가 만나는 옛사람들은 동서양을 넘나든다. 1863년 최초로 러시아로 이주한 조선인이자 지신허 마을을 개척한 최운보(「지신허 마을에서 최운보를 만나다」)의 목소리를 선명하게 들려주고 있는 것처럼 조선 후기 한국과 중국을 여행했던 이사벨라 버드 비숍(「장강에서 버드 비숍을 만나다」)도 만나보고, 아폴로 11호 탑승자 중 유일하게 달의 표면을 밟지 못했던 마이클 콜린스(「넘버 스리」)의 토로도 담아내고 있기 때문이다.
최운보의 말은 마치 그와 얼굴을 마주하고 바로 앞에서 듣는 것처럼 실제 같은 느낌을 준다. “나는 조선에서 건너온 첫 번째 아라사 먹킹이요. 굶주림과 호위를 피해 두만갠을 건넜지만 나와 아바이와 큰 아바이의 고향은 북관이고 내 가슴엔 여전히 고된 조선의 피가 뜨겁게 흐르오만 목숨을 걸고 다시 뿌리내린 이곳이 나의 새로운 고향이오. 이제 내가 살던 집과 마랑은 사라지고 그 흔적마저 아숭쿠레하지만 나는 떠날 수 없소.”(「지신허 마을에서 최운보를 만나다」)라는 최운보의 고백은 우리와 그 사이에 놓인 두꺼운 시간의 벽을 걷어낸다.
시인은 옛사람들을 끝없이 애도한다. 시인은 전태일을 기리며 “바람 찬 이른 아침, 인적 드문/ 모전교와 광통교 사이 어디에서/ 그림자처럼 떨어지지 않는 빈자리”(「청계천」)에 눈길을 주고, “무명의 노동자 143명에 대한 죽음의 기록”(「아무도 쓰지 않은 부고」)을 읽고, 아사 탈북 모자를 추모(「죽음을 건너 죽음으로」)한다. 신문을 펼치며 “기계공장에서 발전소에서 공사 현장과 산업 현장 곳곳에서 날마다 사람이 죽고 죽어간다”는 사실을 생각하고 “상복 입은 사람들과 살아남은 그러나 머지않아 죽음의 명단에 오를 사람들”이 “죽은 사람과 뒤엉켜 광장을 맴”돌며 우는 소리를 듣는다. (「날마다 사람이 죽는다」)
1910년대 시베리아에서 활동했던 여성 혁명가 김 알렉산드라 페트로브나(「김알렉산드라 소전小傳」), 인도차이나 독립운동가 응우엔신꿍(「아무것도 갖지 않음으로써 모든 것을 얻은 사람」), 미국에서 경찰의 과잉진압으로 사망한 흑인 남성 조지 플로이드(「8분46초」) 등 수많은 사람들이 이 시집에 등장한다. 유명인, 역사에 기록된 인물 뿐 아니라 이름 없는 사람의 목소리도 전한다. 한국전쟁의 비극 속에서 작은 두 집성촌 마을에 일어났던 “죽음과 죽음의 현장”에 대한 기억을 털어놓는 “평생 마을을 지킨 구순이 멀지 않은 아재”(「그해 가을, 달 없는 며칠 동안」)의 고백은 40대 우르과이 대통령인 그라시아스 페페(「그라시아스 페페)의 목소리와 다름없이 비중 있게 다루어진다.
등장하는 인물들은 서로 다른 시간과 공간 속에 있던 이들이지만 이 시집 속에서 “고원을 가르고 붉은 물이 격류하는 협곡/ 고원과 고원을 잇는 다리” (「밧줄 다리」)가 그들 사이에 놓인다. 지난한 삶과 역사의 격랑을 헤치고 갔던 사람들이다. 그들의 시간과 공간은 시인의 마음을 통해 이어진다. “물과 길의 영혼”(「장강너머」)을 통해 그들은 서로 공명한다. 그리고 “사람이 그리고 사랑만이 기적이다.” (「늦은 졸업식」) 라는 깨우침에 도달한다.
이성혁 평론가는 시인들이 어떤 사태의 기저에 또는 너머에 있는 그 무엇을 포착하고 그러한 사태에서 잊지 말아야 하는 그 무엇을 말하고자 하며, 망각에 저항하고 감추어진 의미를 사유하고 독자에게 제시하려 한다면서, 그것을 ‘시적 증언’이라고 불렀다. 그런 의미에서 직접 겪은 일을 말하는 것이 아니어도 잊지 말아야 할 어떤 의미를 이야기한다는 점에서 ‘증언’이라 부를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시집의 고백들은 생생한 증언이다.
3
오래 걸리는 일은 인내와 기다림을 수반한다. 신동엽 시인이 「좋은 언어」에서 “때는 와요/ 우리들이 조용히/ 눈으로만 이야기할 때//하지만/ 그때까진/ 좋은 언어로 이 세상을/ 채워야 해요”라고 썼던 것처럼 시를 쓰는 이는 자신의 언어로 세상을 채우며 “때”를 기다리고 있다.
곽효환 시인은 무엇을 기다리나. 그의 시 「미륵을 기다리며」를 읽으며 시인이 바라는 ‘언젠가’를 그려본다.
“타박타박 지친 걸음으로/ 미륵전에 들었다/ 언젠가는 올 것이나 당대에는 결코 오지 않을/ 미륵을 기다리고 기다리며/ 한 시대를 건너고 한 생을 건넜을/ 뭇사람들의 그림자/ 키 큰 미륵불을 모신 삼층 법당에 어른거린다/ 그 검은 그림자들 사이에서/ 오기로 했고 올 것이고 오고야 말/ 그러나 아직 오지 않은/ 어쩌면 끝내 오지 않을/ 너를 기다리는/ 산사에 봄눈 분분히 흩날린다/ 기다린다는 것은 비워두는 것이고/ 비워둔다는 것은 기다린다는 것일진대/ 담박하게 너른 마당을 홀로 지켜온/ 늙은 산사나무가 기다리는 이는 누구일까/ 눈 수북이 쌓인 가지마다/ 맑은 눈물 똑똑 흘리면서”(「미륵을 기다리며」 전문)
그는 “언젠가는 올 것이나 당대에는 결코 오지 않을/ 미륵을 기다리고 기다리며/ 한 시대를 건너고 한 생을 건넜을/ 뭇사람들의 그림자”를 찾고, 그들의 기다림을 이어받는 사람이다.
곽효환은 한 인터뷰에서 한 법당의 미륵전이 준 경험을 “법당에 들어가는 순간, 문득 미륵을 희망이라고 생각하게 됐다. 지금은 희망이 없지만 언젠가는 희망이 올 것이라는 바람, 아직 오지 않았고 어쩌면 끝내 오지도 않을, 그럼에도 기다릴 수밖에 없는 게 우리 삶 아닌가. 안 왔고, 안 올 것이고, 끝끝내 안 오겠지만, 그래도 미륵을 기다리는 게 우리 의지일 것”이라고 설명하며 그것이 자신의 시적 가치관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물길이 “흐르고 합수하고 다시 흘러 / 마침내 큰 강이 되”려면 오랜 시간이 걸린다. 시인은 이렇게 오래 걸리는 것들, 시간으로 인해 깊어지는 것들에 관심을 갖는다. 우리가 무언가를 오랫동안 기억할 수 있으려면 세월을 견디는 힘과 무언가를 오래 머금어둘 수 있는 깊이가 필요하다. 곽효환의 시는 오래 흘러와 쌓인 것들이 만드는 퇴적지형을 닮았다. 퇴적되어 층층이 쌓이고, 바람과 물살에 깎인 협곡처럼 시간의 편력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살아있다는 것은 굽이치며/ 흐르는 것이라고/ 흘러야 비로소 강이 되는 것이라고 (「다시 흐르는 강」) 시인은 쓴다. 세월의 풍파를 견디려면 “모래톱을 넘어 바람이 수없이 실어 오고 실어간/ 혹한과 혹서”를 지나 “견딤과 절제”를 배우고 “세찬 파도와 바람을 가로막아/ 흘러내리는 사구(砂丘)를 단단히 붙잡고/ 산자락 다랑밭에 청보리 파란 싹을/ 밀어 올리는 힘”(「바람을 견디는 힘」)이 필요하다.
“검은 돌담장 위로 혹은/ 돌담 사이로 붉은 꽃이 오”르고 그 핏빛 꽃들이 “해안 마을 어귀까지/ 피를 토하듯 가득할 때”(제주 동백) 비로소 봄이 온다고 시인은 쓴다. 그는 봄갯벌을 보며 “붉게 검붉게 혹은 금빛으로 물드는/ 가장 깊은 곳에 감춰둔 적막을 본다.” 그리고 “매화향기 남은 자리에/ 벚꽃 분분히 날린 다음/ 모가지를 떨군 동백꽃/ 흥건히 잠겨 흘러가는 실개울/ 수척한 빈산 노거수 그늘에 들어/ 소리 없이 울다 간 사람을 더듬는다,”(「소리없이 울다 간 사람」) 그렇게 “둔하고 어리석고 미련한 사람들”(「노둔한 사람들」)에 대한 지워졌던 기억이 복원된다.
그는 그들의 울음을 다시 운다. “국경의 강안에서 나는/ 차마 눈감지 못하는 사내를 본다/ 목숨을 건 삶들이 건너가고 건너왔을/ 지금도 계속되는 시름 많은 시대의 강가에서/ 터지는 울음을 애써 삼키는 북관의 사내를 보며/ 나도 운다”(「국경에서 용악을 만나다」)는 것이다.
그리고 시인은 “오늘 밤 곰솔 한 그루 베어 작은 배 한 척 만들고/ 송진으로 틈새를 촘촘히 메우고 덧칠할 것이다/ 그리고 제 몸에서 토해낸 슬픔이 다 마른 날/ 먼바다로 천천히 나아갈 것이다”(「바람을 견디는 힘」)라고 말하는, 그런 희망을 품는다.
걸음이 쌓여 길이 생기듯, 함께 하는 마음을 통해 희망은 만들어진다. 주디스 버틀러가 말했던 ‘동맹’이다. “동맹은 바로 그곳, 아직 장소가 아닌 곳, 아직은 아닌 불가능한 장소였고 지금도 그런 곳, 지금 일어나고 있는 장소에서 발견”되는 것이다. 시인은 “‘사람이 먼저’인 세상이/ 오고 있는 것인지/ 아니 언젠가 마침내/ 미륵처럼 오기는 오는 것인지”(「아무도 쓰지 않은 부고」) 회의하면서도, 기다림을 거두지 못한다.
함께 기억하고, 애도하고, 울면서 ‘동맹’의 가능성을 찾아나갈 수 있을 것이라 믿어보는 것이다. 주디스 버틀러의 말처럼, 설사 불가능해보이는 목표일지라도 그것을 아무도 사유하지 않는 세계란 끔찍하지 않은가? 그러니 우리는 그것을 끈질기게 계속 사유해야 한다.
이것은 협곡의 시다. 이 시인이 추구하는 시심은 협곡을 닮았다. 협곡은 산지나 고원을 흐르는 강가에 나타나며 길고 유구한 물길이 곡저 깊이 파고든다. 도저한 강물이 끝없이 흐르고, 물결은 멈출 수 없다. 시인은 “가장 긴 강이 발원하고 흐르는/ 고원의 협곡 어느 지점에 서서/ 질경이 같은 아득한 삶”(「밧줄 다리」)을 떠올린다. 그리고 “거대한 물줄기를 거슬러” “여기저기 흐르고 사라지고/ 다시 솟고 흐르고 사라지는 작은 물줄기들”((「장강 너머」)의 미세한 소리까지 놓치지 않으려 한다. 시인은 “강이 실어오는 전언에 귀 기울”이며 “넘치고 무너뜨리고 범람하는/ 거대한 물줄기를 온전히 품어 안아/ 새 물길을 내고 또 흘려보낸 이곳의 옛사람들을 생각한다.”(「사람들 사이를 흐르는 강」)
강물이 “더 크게 굽이치고 더 크게 사행하며 그렇게/ 더 멀리 새 길을 낼 것”(「호야 협곡」)이라는 시인의 꿈속에는 옛사람들의 무수한 꿈들이 섞여들어 옛 물결과 새 물결이 한 몸이 된 채 힘차게 흐른다. 존 버거는 이렇게 말했다. “시는 부상당한 이를 돌보면서, 또 승자와 환희와 두려움에 떠는 패자의 낮은 독백에 귀를 기울이면서, 싸움터를 가로지르며 간다”고.
곽효환의 시는 승풍파랑(乘風破浪)의 꿈이 “힘없고 나약하지만 순간순간 울음을 삼키면서 버텨내고 이겨낸 사람들”에 의해 계승되어 왔음을 기억하라고 간곡히 말하는 듯하다. 역사는 다름 아닌 그 ‘약한 자’들의 손에 의해 밧줄다리처럼 이어져온 것이다. 시인의 마음이 되어 기도의 말처럼 중얼거려본다. 바라건대 우리가 그들을 정녕 잊지 않기를.
▷김지윤
약력: 2006년 『문학사상』 신인상(시)과 2016년 『서울신문』 신춘문예(평론) 당선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함.
2012년 시와시학상 수상. 현재 상명대학교 한국언어문화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