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민족 사회' 코리아 리포트]국제결혼가정 2세 당당한 사회인 되려면… | ||
<4>가상 시나리오: 실패와 적응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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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이∼, 베트남!.”
중학생이 되어서 친구들은 나를 놀릴 때면 이렇게 불렀다. 소심한 데다 공부도 못하고, 생김새가 다르다는 자격지심에 잘 어울리지 못하는 나를 급우들은 그렇게 놀려댔다.(참고 1)
초등학교 시절에는 그나마 나은 편이었다. 1, 2학년 때 친구들은 말도 느리고 얌전한 나를 서로 보살펴 주려고 했다. 인기가 많은 건 아니었지만 친구들과 어울리는 데 문제가 없었다. 가끔 교육청 지시라며 국제결혼 가정 자녀를 따로 공부시키는 게 싫긴 했지만 만족스러운 학교 생활이었다.
하지만 고학년이 되면서 사정은 조금씩 달라졌다. 5학년 무렵이었다. 나와 싸우던 친구가 “베트남×아, 니네 나라로 가”라고 소리쳤다. 그때부터 학창 시절 내내 이어진 ‘친구들 눈치보기’가 시작된 것 같다. 선생님한테 일러바친다고 해결될 일도 아니었다.
부모님이 원망스러웠다. 한국에 온 지 10년이 넘었으면서도 여전히 한국말에 서툰 어머니, 친구들 아버지에 비해 훨씬 나이가 많고 가난한 아버지. 모든 게 불만스러웠다. 사회생활도 별로 다르지 않았다. 가까스로 인근 도시의 ‘삼류 대학’에 들어갔지만 1년을 채우지 못했다. 환갑을 넘긴 아버지가 돈벌이를 할 수 없게 되면서 어머니가 생계를 떠맡았으나 고작 할 수 있는 거라곤 식당일 뿐이었다. 집안 형편이 어려운 나에게 ‘사각모’는 호사스런 것이었다.(참고 2)
대학 중퇴 학력으로 번듯한 직장을 구하기란 ‘하늘의 별따기’였다. 더 좋은 조건의 사람들도 백수를 못 면하는 세상이 아닌가. 공사판을 전전하다 1년여 만에 겨우 얻은 직장은 대기업 하청업체 비정규직이었다. 아내는 그때 만났다. 2년여 연애 끝에 결혼을 약속하고 찾아간 처가에서는 예상대로 반대가 심했다. 끈질지게 설득했지만 요지부동이었다. 지금껏 처가에 가본 적이 없다.(참고 3)
나는 회사를 그만둔 뒤 고향으로 돌아왔다. 농사일을 해보려 했지만 땅이 없어 지금은 친척의 과수원에서 일을 도와주며 아버지를 여의고 홀로 남은 어머니를 모시고 있다.(참고 4) 비슷한 처지의 고향 친구들을 만나면 한숨만 나온다. 우리 아이들이 못난 아비의 삶을 그대로 이어받지 않을까 하는 게 가장 큰 걱정거리다.
엄마는 나의 외가가 필리핀에 있음을 애써 숨기지 않는다. 한번은 “너는 한국과 필리핀 모두가 모국이야”라고 얘기해 줬다. 영어를 하는 엄마는 다섯 살인 내게 영어를 가르쳐 줬다. 할머니는 내가 한국말을 깨치는 게 더뎌진다고 걱정했지만 엄마는 “남들은 돈 들여서도 시킨다”며 완강했다. 아빠는 늘 엄마 편이었다.
초등학교 시절 엄마를 따라 필리핀에 갔다 오자 친구들이 부러워했다. 우리 시골에서 국내 여행을 다녀온 친구는 많았지만 외국 여행을 갔다 온 건 아마 나하고 엄마가 베트남인인 친구뿐이었다. (참고 5) 영어도 가장 잘해 선생님 칭찬을 자주 받았다.
갈등이 없었던 건 아니다. 엄마는 시청에서 하는 한글교실을 열심히 다녀 의사소통에 문제가 없었지만 어눌했다. 몇몇 친구는 까무잡잡한 내 얼굴을 놀리기도 했다. 그럴 때면 선생님이나 부모님은 “용기 있게 이겨내라”고 격려했다. 친구들을 모아놓고 영어를 가르치는 엄마가 자랑스러울 때가 많았다.(참고 6)
내가 학창 시절을 그리 어렵지 않게 보낼 수 있었던 건 주위에 국제결혼 가정 2세들이 많아 사람들 인식이 크게 바뀐 덕이 아닌가 싶다. 고등학교 때까지 항상 한 학년에 국제결혼 가정 2세가 대여섯 명은 있었고 3명이 같은 반인 때도 있었다. 정부와 시민단체에서도 지속적으로 관심을 보여줬다. 그렇게 나는 평범하게 대학 생활까지 마무리할 수 있었다. 결혼할 때 우리 집안 내력이 걱정이 된 건 사실이다. 부모님도 시댁에서 나를 탐탁지 않게 생각할까봐 크게 걱정했다.
부모님은 넉넉한 형편이 아닌 데다가 스무 살이나 차이 나 당신들이 사돈에게 부부로 비쳐지지 않을까 걱정했다. 다행히 결혼 승낙은 받았다. 나중에야 알았지만 시부모께서도 크게 고민했으면서도 우리 앞에선 내색하지 않았다고 한다.(참고 7)
고향에 내려와 초등학교 영어교사를 맡은 지 3년이 지났다. 우리 반에도 국제결혼 가정의 자녀가 몇 명 있다. 다들 잘 지내는 편이지만 가끔 유난히 소극적이고 ‘우리말’이 서툰 아이들이 놀림을 받곤 한다. 그때마다 난 엄마가 내게 했던 말을 들려준다.
“너는 모국이 둘인 특별한 한국인이야.”
1)‘집단따돌림’ 경험이 있다는 국제결혼 가정 자녀의 20.6%, ‘부모 중 한 사람이 외국 출신이어서’라고 응답.(여성가족부 자료)
2) 전체 국제결혼 부부 941쌍 중 나이 차 10∼19살이 30%, 20살 이상이 3.7%(2005년 보건복지부 실태조사).
3)전북대 설동훈 교수, “국제결혼 가정 2세들은 낮은 학력을 보인다. 따라서 좋은 직장을 구할 수 없어 저소득층이 되는 등 빈곤의 악순환으로 소외계층이 될 가능성이 크다.”
4)한국이주여성인권센터 한국염 대표, “국제결혼 여성들이 60대가 되면 남편은 세상을 떠날 나이이고 사회 빈민층을 형성할 가능성이 크다.”
5)취재팀이 전국 4개 지역 6개 초등학교에서 만난 국제결혼 가정 2세 상당수가 ‘다녀온 나라’와 ‘가보고 싶은 나라’로 어머니 나라를 꼽음.
[다운로드]취재참고 자료
6)전북 임실 관촌초등학교 교사 조대원씨, “조선족 어머니를 둔 아이에게 ‘너는 다른 친구들이 못하는 중국어를 잘하겠구나’라고 격려해줬더니 자신감을 갖더라.”
7)결혼과 취업 등 중요한 변화를 맞는 청년기(23∼35세)에 생애 시기별 만족도가 가장 떨어짐.(국가인권위원회의 ‘2003년 혼혈인 인권실태조사’ 보고서)
첫댓글 좋은 내용 올려 주셔서 감사 합니다. 앞으로도 많은 참여 부탁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