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문은 왜 세로 쓰기를 중심으로 발전하였을까?
- KJ일보 문화기획 - 우리 문화를 찾아서 1편
한문을 우리 순수한 문화로 규정하기에는 틀림없이 무리가 있지만 워낙 오랜 세월동안 우리 문화에 녹아 있었으므로 인해 한문을 우리 문화와 도외시해서 생각하는 것도 역시 어렵다는 생각이다.
그런데 우리가 한글은 가로 쓰기를 하는데 비해 한문은 아직도 세로 쓰기를 하는 것을 쉽게 볼 수 있는데 왜 이렇게 한문은 세로 쓰기를 하는 것으로 발전하고 또 이렇게 쓰야하는 것이 이른바 폼이 나는 것일까?
한문이 세로 쓰기가 된 것은 종이가 없던 시대에 한자가 만들어졌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소위 동양권에서는 한나라의 채륜이 종이를 발명하기 이전에는 얇은 나무를 쪼개서 길죽하게 잘라 붙인 나무판이나 대나무를 쪼개어 잘라서 역어붙인 나무판이 사용되었는데 -이런 곳에 문서를 기록한 것을 목간 또는 죽간이라고 함- 이런 목간이나 죽간을 맞대어 이여 붙여서 각종 문서를 보관하고 사용했지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 가장 일반적인 이유로 전해졌다.
이런 목간이나 죽간을 여러 편 둘둘 말아 놓은 것이 책(冊)인데 이 책이란 글자도 목간이나 죽간을 맞대어놓은 모습의 상형문자임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볼때 목간끼리 엮인 책을 펴놓고 글자를 쓸 때 필연적으로 한줄씩 세로로 쓰는 것이 쉬웠을 것이고 죽간이나 묵간을 한쪽씩을 펼쳐서 쓰다가 보니 우에서 좌로, 위에서 아래로 쓰는 것이 편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펴서 읽을 때도 왼손으로 책을 잡고 오른손으로 펴서 읽어내는 것이 편했을 것이다. 그리고 후에 비단이나 종이가 발전되었을 때도 두루마리씩 서찰이나 문건을 사용할 때는 이러한 습성이 그대로 전성되어 자연스럽게 세로 쓰기로 굳어 졌을 가능성이 많다.
목간 이야기가 나온 걸음에 이와 관련하여 재미있는 이야기 하나는 '공자'가 남자는 모름지기 다섯수래의 책을 읽어야 한다(男兒須讀五車書)고 했는데 공자가 활약하였을 당시에도 책이란 것이 종이로 쓰여진 것이 아니고 죽간이나 목간이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요즘시대의 책 한권이 당시의 분량으로는 책 한 수래가 족히 넘고도 남았다는 계산이 나온다. 그렇다면 공자는 책 5권만 읽으면 남자의 자격이 된다고 하였던 것일까...? 책이 워낙 귀한 시대였으니 이런 상상도 전혀 근거가 없지는 않을 것 같다. 그리고 이연걸 주연의 '영웅'이란 영화를 보면 나무로 만들어진 두루마리가 사방을 둘러싼 곳에서 대결을 하는 멋있는 장면이 나오는데 사실 이 장면이 책 속에서의 비무란 것을 알아차린 사람이 흔하지는 않을 것이다.
한편 우리 한글도 전체적으로 가로 쓰기로 발전한 것은 최근의 일인데 해방 이후까지 출판된 여러가지 출판물이 대부분 세로 쓰기였고 신문 역시 세로 쓰기가 일반적이었다. 그러던 것이 최현배 선생 등 한글학회의 오랜 노력이 조금씩 결실을 맺으면서 국정교과서를 가로쓰기로 사용하게 되었고 이후 점차적으로 가로 쓰기가 일반적이 되었다. 참고로 우리나라 언론 출판물중 가장 먼저 한글 전용 및 가로쓰기를 실시한 곳은 도깨비기자가 몸담았던 세종대학교 학보였는데 이는 당시 한글학회 이사장이었던 허웅 박사와 세종대학 교수진 및 학보사 기자들의 노력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도깨비 기자
지령 제 94호
첫댓글 일등으로 잘 읽꼬 감니다.지식하나 추가요!!!!!!!!
이번주에는 신문 더이상 안나오나?.... 일주일 동안 어째 기달리노?
월요일은 문화기획이고 동기 소식 한 번 더 나갈 끼다....조은 일 있으믄 무시로 나갈 것이고...!
그렇게 깊은 뜻이....
모르면 적어야한다.ㅋㅋㅋ도깨비님,쮸라기님,박..님 만나고 싶다.푸~~하하하하
최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