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주시사 인물편 1차 교정본
선성 김(宣城 金)씨
◇ 入鄕하자 크게 번성 잇달아 輩出◇
선성 김씨가 이 고장에 자리 잡아 살기는 조선 초에 영유현령(永柔縣令)을 지낸 김소량(金小良)에서 비롯된다. 소량은 영주에 사는 황유정(黃有定: 본관 평해, 공조전서 지냄)의 사위로 예안(禮安)에서 옮겨와, 처가마을인 성밑(귀성공원남쪽기슭)에 살았다.
소량은 그 장인으로부터 가장(家庄)을 물려받아 살았는데, 그 집이 바로 유명한 삼판서 고택(三判書古宅)이다.
삼판서고택 : 고려말에 형부상서(刑部尙書)를 지낸 정운경(鄭云敬)이 살던 집으로, 정운경이 그 사위 황유정(黃有定)에게 물려주었고, 공조전서(工曹典書)를 지낸 황유정이 그 집을 그의 사위 소량에게 물려주었는데, 소량의 아들 담(淡)이 이조판서에 임명되었기에 내리 판서 세 명이 살았다 하여 삼판서 고택이라 일컬었던 것이다. 그 집은 소량의 21대손까지 오백년을 세거하다가 조선말기 주인이 바뀌었으며, 1961년 큰 수해 뒤에 도시 확장으로 헐려 버렸다. 2008년 제민루 밑에 복원하였다.
그 선계(先系)는 고려 중기 예안 호장(禮安 戶長) 김상(金尙)을 시조로 하여 선성(宣城)에 살았다. 「선성(宣城)」은 예안의 옛 지명이다.
제 4세(希寶)까지 예안의 호장이었고, 5세 성세(成世)가 밀직사상호군(密直使上護軍), 6세 뉴(鈕)가 비순위 대호군(備巡衛 大護軍), 7세 방식(方軾)이 비순위 정용호군(備巡衛精勇護軍)으로, 증손 담(淡)의 귀로 이조참의(吏曹參議)에 증직되었으며, 8세 노(輅)가 좌우위보승낭장(左右衛保勝郎將)으로, 손자 담(淡)의 귀로 호조참판(戶曹參判)에 증직되었으니, 이가 바로 영주(榮州)에 입향(入鄕)한 소량의 아버지다(輅가 영주에 입향 했다는 설도 있다. 노(輅)의 묘소는 영주에 있다.)
선성 김씨는 영주에 입향하자, 인물이 번성하고 과환(科宦)이 잇달아, 이 고장 명문으로의 지체를 다졌다.
소량의 두 아들 증(曾)과 담(淡)이 함께 세종 때 문과 중시(重試)에 올랐다. 증은 집현전(集賢殿)에서 성삼문(成三問)등과 함께 <홍무정운(洪武正韻)>을 번역하여, <역대병요(歷代兵要)>를 편찬했으며, 담이 또한 집현전에서 여러 책을 편찬했고, 한글 창제에도 참여하였다. 천문(天文), 역상(曆象), 산학(算學)에 정통하여, 표준역법(曆法)을 제정하는 등 세종 문운에 크게 이바지했으며, 수양대군이 집권하자 외직에 있다가 물러와, 세조의 이조판서(吏曹判書)임명을 끝내 사양했다.
그 후손이 영주에서 크게 번성, 선조 때 명신(名臣)으로 다난한 국사에 크게 기여한 백암(栢巖 - 이름은 늑(功), 시호 민절(敏節))을 전후하여 많은 과한(科宦) 문행이 잇달아 배출되었다.
영주의 선성 김씨는 문수면 황조동(黃鳥洞), 무섬(水島里), 이산면 우금(友琴), 영주 귀대(龜坮:귀학정), 이산면 번계(樊溪:석포리), 장수면 갈미(葛山), 부석면 도탄(上石里), 봉화 문단, 봉화 물야면 너다리(板橋)등에 세거하고 있다.
문절공(文節公) 담(淡)의 사손(祀孫)은 문수면 황조골(赤東里)에 세거하며, 문절공의 사당도 그곳에 있다.
▶김소량(金小良)
1384년(우왕 10)~미상. 증참판(贈參判) 노(輅)의 아들이다. 여러 벼슬을 거쳐, 영유현량(永柔賢良)을 지내고, 자헌대부(資憲大夫) 병조판서(兵曹判書)에 증직되다.
본향(本鄕) 예안(禮安)으로부터 영주의 성밑(城底:지금 귀성공원 동쪽)에 옮겨 살았으니, 판서(判書) 황유정(黃有定)의 사위로, 황판서의 가장(家庄)을 물려받았다. 바로 뒷사람들이 삼판서고택(三判書古宅)이라 일컫는 그 집이다.
▶김숙량(金叔良)
생몰년 미상. 현령(縣令) 소량(小良)의 아우. 현감(縣監)을 지내다. 호조참판에 추증되었으며, 문재도(文載道)의 딸에게 장가 들었으며, 두서(斗西)에 거주하다가 충청도 공주(公州)에 옮겨 살다.
▶김증(金曾)
현령(縣令) 소량(小良)의 아들이며, 문절공(文節公) 담(淡)의 형이다. 어머니는 평해 황씨로 판서(判書)유정(有定)의 딸이다.
1435년(세종 17) 식년(式年) 문과에 급제, 집현전(集賢殿)에 뽑히고, 여러 벼슬을 거쳐 홍문관교리(弘文館校理)로, 문과중시(重試)에 뽑혔다.
일찍 서장관(書壯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예조좌랑(禮曹佐郞)으로, 박팽년(朴彭年), 신숙주(申叔舟)와 함께 <홍무정운(洪武正韻)>을 번역했고, 병조정랑(兵曹正郞)으로<역대병요(歷代兵要)> 편찬에 참여했다.
문과와 문과중시(重試)에 다 그 아우 담(淡)과 동방(同榜)으로 뽑혔으며, 형제가 함께 국사에 크게 이바지하니, 세상이 금곤옥계(金昆玉季)라 일컬었다.
외직(外職)을 구하여 금산군수(金山郡守)가 되어, 재임 중 죽으니, 고을의 아전이며 백성이 부모를 잃은 듯 슬퍼했다고 하며, 고을 사람들이 광모사(廣慕祠)를 세워 제사했다.
▶김담(金淡)
1416년(태종 16)~1464년(세조 10). 영주 귀성(龜城) 동쪽 그 외가였던 황판서 옛집(뒤에 삼판서고택)에서 태어났다. 자는 거원(巨源), 호는 무송헌(撫松軒)이다. 현령(縣令) 소량(小良)의 아들, 어머니는 평해 황씨로 판서(判書) 유정(有定)의 딸이다.
어려서부터 글 읽기를 좋아했으며, 총명이 뛰어나 한번 눈을 거친 글은 잊는 법이 없었다.
1435년(세종 17) 이십 세로, 정시(庭試) 문과에 그 형 증(曾)과 함께 나란히 급제, 곧 집현전정자(集賢殿正字)겸 경연사경(經筵司經)에 제수되었다.
동 19년 집현전박사(博士)에 올랐다. 그때 세종이 문치에 힘써, 집현전을 설치하고 경연(經筵)에서 강론(講論)을 맡게 하고자 문학에 밝은 선비 각각 열 명씩을 뽑을 때, 그 형 증(曾)과 함께 뽑히자, 모두 영화로이 여겼다.
이 해(1437)에 통사랑(通仕郞에 올라, 집현전저작랑(集賢殿著作郞)이 되고, 이듬해 왕명으로 당나라의 문장가 류종원(柳宗元)․ 한유(韓愈)의 글을 풀이한 <유한문주석(柳韓文註釋)>을 편찬하여 바쳤다.
1439년(세종 21) 불사(佛事)를 금지하기를 청하는 소(疏)를 올렸다.
비상한 재능에 해박한 학식을 갖추었던 그는 세종 문운(文運)에 이바지함이 컸다. 특히 천문, 역상(曆象)이며 산학(算學)에 깊고 정밀한 연구를 지녔던 그의 업적으로는 먼저 역법(曆法)과 토지측량(測量)을 들어야 할 것이다.
1434년(세종 16) 임금이 천문을 관측하는 시설로 간의대(簡儀臺)를 설치하고, 이순지(李純之)로 하여금 맡아보게 했는데, 이순지가 친상을 당하여 떠나게 되므로, 임금이 승정원(承政院)에 명하여 대신할 사람을 천거하게 하자, 정원에서 「집현전정자(正字) 김담은 연소하나 총명이 뛰어나므로, 그 일을 담당할 만합니다.」
라고 추천 한 바 되어, 그는 약관 23세로 간의대판사(簡儀臺判事)에 임명되었다.
1439년 그는 왕명을 받들어, 이순지와 더불어 역법(曆法)을 바로잡아, 우리나라 역학(曆學)의 기본이 되는 <칠정산외편(七政算外篇)> 다섯 권을 엮어 바쳤다.
이 무렵까지 우리나라에서는, 고려 충선왕(忠宣王)때 원나라에서 들여온 수시력(授時曆)을 준용해 왔는데, 전문가들도 다만 그 역서(曆書)를 만드는 법이나 알았을 뿐, 일식-월식(日-月食)이며, 별의 분도(分度)등의 법칙을 미처 알아내지 못한 상태였다.
이에 세종이 정흠지(鄭欽之), 정초(鄭招), 정인지(鄭麟趾) 등에 명하여 여러 역서를 참고 연구하여 비로소 석연히 알아내게 되었다. 또 달과 태양의 궤도를 중국과 같이 했는데, 그 잘못됨을 바로잡아, 칠정산내편(七政算內篇)을 만들었으며, 또 회회역법(回回曆法)을 얻어, 이순지와 그(金淡)에게 그것을 연구하게 하여, 중국 역관(曆官)들의 잘못된 부분을 알아내어 바로잡아, 칠정산외편(外篇)을 만들게 함으로써, 비로소 역법이 옳게 이루어지게 되었으니, 이것이 우리나라를 기준으로 한 최초의 역법이다. 그가 역법에 이바지한 공헌은 실로 지대하다 하겠다.
그 이듬해(세종 22년) 그는 왕명으로, 집현전동료들과 더불어 우리말과 음의(音義)를 보정(補正)하여 바쳤으니, 그는 우리 민족의 가장 위대한 빛인 한글창제에도 한몫을 담당했음을 알게 한다.
32세 되는 1447년 그는 왕명으로, 전부(田賦:토지에 대한 조세)의 법을 찬정(撰定)했으니, 우리나라에서는 이때에 비로소 토지의 품질을 따라 육 등급으로 나누고, 등급에 따라 양척(量尺:면적)을 달리하는 수등이척법(隨等異尺法)을 써서 조세(租稅)의 기준을 마련한 것이다. 이 전부(田賦)법은 오래 표준이 되어 왔으니, 실로 그의 크나큰 업적의 하나라 할 것이다.
관력은 26세 되는 1441년 가을에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 이듬해 통례원봉례(通禮院奉禮)․사재감주부(司宰監主簿)이며, 후에 호조-이조좌랑(戶曹-吏曹佐郞), 1446년에 훈련주부(訓練主簿), 승문원부교리(承文院副校理)를 거쳐 그 이듬해에 사간원헌납(司諫院獻納)겸 지제교(知製敎), 성균관직강(成均館直講)을 거쳤다.
김담의 글씨로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 찬시 5절이 있다.
1447년(세종 29) 8월, 그는 이조좌랑(吏曹佐郞)으로, 문과 중시(重試)에서 을과 일등 셋 가운데 둘째로 뽑혔으니, 첫째가 성삼문(成三問), 셋째가 이개(李塏)였다. 이등은 신숙주(申叔舟), 최항(崔恒), 박팽년(朴彭年), 이석형(李石亨), 송처관(宋處寬), 유성원(柳誠源), 이담(李湛)등 칠 명이었고, 삼등에는 정종소(鄭從韶), 이승소(李承召), 조변륭(曺變隆), 이예(李芮), 김증(金曾: 淡의 형), 이극효(李克孝), 정창손(鄭昌孫), 김예몽(金禮蒙), 김통(金統)등 구 명이었으니, 모두 당대의 쟁쟁한 명류(名流)들이었다.
중시(重試)합격이 발표된 이튿날 세종은 합격자 19명 가운데서 성삼문과 김담 등 우등 8명으로 하여금 어제팔준도(御題 八駿圖)로 재시(再試)를 치르게 했는데, 여기서도 성삼문이 첫째, 김담이 둘째, 이개가 셋째였다.
이듬해 통덕랑(通德郞)에 특진되어, 부지승문원사(副知承文院事)에 지제교를 거쳐, 조봉대부(朝奉大夫)에 올라, 서운부정(書雲副正)겸 지제교로, 전라도에 출사했다.
1449년 그 모친 병환으로 휴가를 얻어, 호남으로부터 향리로 돌아올 때, 미처 당도하기 전에 부친상을 당하여, 그는 장례 뒤 무덤 곁에 여막(廬幕)을 얽고 삼년을 시묘(侍墓)했다. 부모 상사(喪)에 복을 벗기까지는 벼슬도 그만두고 여막을 지킴이 사부의 예였는데, 특별한 경우(왕명으로) 상제로서 벼슬에 나아감을 기복(起服)이라 하는데, 임금은 그에게 기복을 명하여 상경케 하고 쌀 과 콩 열섬, 목단령(木團領)․흰모시 철릭(帖裏) 한 벌씩, 사슴가죽신 한 켤레, 외막(外幕) 한 벌, 검은 조아(條兒?) 한 벌을 함께 하사, 내전(內殿)에서 인견(引見)하고, 역법(曆法)을 연구하도록 명하였다. 그는 일곱 차례나 상소로 사양했으나 모두 윤허되지 않았다.
1452년 문종이 승하하고 단종이 즉위했다. 이 해 가을 그는 전농시윤(典農寺尹)이 되었다가 집현전직제학(集賢殿直提學) 겸 지제교(知製敎)에 옮겼고, 그 겨울에는 외직을 구하여 충주목사(忠州牧使)가 되었으며, 그 이듬해인 1453에(단종 1년)<역대병요> 13권을 완성하여 바치고, 중직대부(中直大夫)에, 그 가을엔 통훈대부(通訓大夫)에 올랐다.
단종 3년 여름에는 충청감사(忠淸監司) 함우치(咸禹治)가 「충주목사 김담은 청렴 공직하고 다스림이 밝아, 관원과 아전들이 잘 복종하고 백성이 편안하여 칭송이 높다.」고 나라에 알려, 특명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렸다.
단종이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오르자, 고명사은사(誥命謝恩使)로 명나라에 다녀온 수양대군(首陽)의 불측한 야심을 감지(感知)했음이니, 과연 그가 충주목사로 부임한지 몇 달에 수양은 왕위를 빼앗기 위한 정지작업으로 단종을 보필하는 영의정(領議政) 황보인(皇甫仁)과 좌의정(左議政) 김종서(金宗瑞)등을 역적으로 몰아 죽이고, 스스로 영의정이 되어 정권을 움켰던 것이다.
그로부터 내내 외직으로만 돌았다. 41세 되는 세조 2년에는 안동대도호부사(安東大都護府使)에 옮겼으며, 동4년에는 예조참의(禮曹參議)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고, 그 해 유월 상주목사(尙州牧使)에 임명되어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랐으며, 칠월에는 경주부윤(慶州府尹)이 되었다. 동 칠년에 자헌대부(資憲大夫)에 올랐다. 그 때 경주고을 백성에 처제(妻弟)를 강제로 능욕하려다가 이루지 못한 앙심으로 처제를 불태워 죽인 자가 있었는데, 어찌된 영문에서인지 감사(監司) 김순(金淳)이 그 죄인을 석방하려 했으나, 그는 죽이기를 주장하며 기어코 처형했다. 앞서 충주에서는 억울한 죄인을 죽음에서 구원하기도 했다. 그는 그만큼 시비 형벌을 분명히 했던 것이다.
그는 경주관아(官衙)의 청사를 지으면서 전혀 백성에게 부담이 미치지 않게 하는 등 백성을 아끼고 돌보아 칭송이 있었다.
경주에 있은 지 6년째 되는 동9년 8월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임명되어 거듭 사양했으나 왕의 허락을 받지 못하자 그는 병을 이유로 상소를 올려 사양했음에도 세조는 윤허하지 않고 날마다 중사(中使)를 보내어 문병했다.
1464년 중추원사(中樞院事)에 임명되고, 이해 7월 9일 49세로 생애를 마쳤다.
부음을 듣고 나라에서 진도(震悼)하여, 이틀 동안 조정(朝政)을 폐하고 예관(禮官)을 보내어 조제(吊祭)했으며, 부의(賻儀)를 후하게 내리고, 시호(諡)를 문절(文節 : 勤學好文曰文, 好廉自克曰節라)이라 했다.
1615년(광해군 7) 사림에서 영주 귀성(龜城) 고택 동쪽에 향현사(鄕賢祠)를 세워 제사했으며, 1620년(광해군 12) 향현사에서 소고(嘯皐) 박승임(朴承任), 문절공의 현손 백암(栢巖) 김늑(金玏)을 배향(配享)하고, 뒤에 향현사를 귀강서원(龜江書院)으로 승격시켰다.
또 1618년(광해군 10) 문단 옛 마을에 문계서당(文溪書堂)을 창설, 문절공을 제사했으며, 1712년(숙종 38) 이를 단계서원(丹溪書院)으로 승격했다. 1719년(숙종 4) 나라에서 신설된 서원들을 훼철시킬 때에, 단계서원도 포함되었으나, 사림의 반대로 면했으며, 1735년(영조 11) 도내 유생(儒生) 42명이 감사(監司) 김재로(金在魯)에게, 또 순흥 유생 92명이 안태사(安胎使) 송인명(宋寅明)에게 각각 사액(賜額)을 청하기를 진정했다.
저서로 『무송헌일고(撫松軒逸稿)』가 있다.
권용(權鎔)이 행장(行狀)을 짓고,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이 신도비명(神道碑銘)을 지었다.
▶김만석(金萬石)
생몰년 미상. 문절공(文節公) 담(淡)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감천 문(文)씨로 성균직강(成均直講) 헌(獻)의 딸이다.
1460년(세조 6) 무과에 급제, 권지훈련녹사(權知訓練錄事)를 지내다.
▶김만균(金萬勻)
생몰년 미상. 자는 국병(國秉)으로 문절공 담(淡)의 아들이다.
1457년(세조 3) 진사시에 합격하다. 단성현감(丹城縣監)에 재임 중 치화가 크게 이루어졌으며, 관사에서 죽었다.
▶김만칭(金萬秤)
생몰년 미상. 문절공 담(淡)의 아들이다.
1469년(예종 1) 생원시에 합격하다.
▶김좌(金佐)
생몰년 미상. 자는 백필(伯弼), 생원 만칭(萬秤)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옥천 전(全)씨로, 호군(護軍) 희철(希哲)의 딸이다.
참봉(參奉)으로 어모장군(禦侮將軍)을 지내다.
▶김우(金佑)
1475년(성종 6)~1553년(명종 8). 자는 중필(仲弼)이며, 좌(佐)의 동생이다. 부인은 안동권씨 진사 숙균(叔均)의 딸이다. 승정원좌승지(承政院左承旨)에 증직되다.
▶김사희(金士熙)
1508년(중종 3)~1560년(명종 15). 자는 지경(止卿)이다. 아버지는 증 승정원좌승지(承政院左承旨) 우(佑)이다.
▶김택민(金澤民)
생몰년 미상. 자는 치군(致君)이며, 호는 소암(素岩)이다. 생원 좌(佐)의 아들이다.
출세에 욕심이 없었던 담박(澹泊)한 선비로, 그는 청년시절 상경했던 길에 파주(坡州)에 가서 학자 성수침(成守琛 : 호 청송(聽松). 조광조(趙光祖)의 문인. 시호 문정(文貞), 증좌의정(贈左議政)을 방문했다.
성수침은 기묘사화(己卯士禍)로 스승 조광조가 처형되고 많은 선비가 화를 입자 출세를 단념하고 파산(坡山)아래 숨어 학문에 전심하였으며, 자주 벼슬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양했다.
파산(坡山) 아래 숨어 사는 성수침을 만나 시로써 흉금(胸襟)을 나누면서, 그가 주인에 화답한 一절 ― 山容新沐 源頭活水 迺漱迺濯 幽貞葆眞 何喜何憂 秋月寒江 將與子遊.
그가 돌아올 때 성수침은 시를 주어 전별했다.
음보로 참봉에 제수되고, 사섬시첨정(司贍寺僉正)에 증직되다.
▶김부민 (金富民)
생몰년 미상. 자는 덕린(德隣)이며, 첨정(僉正) 택민(澤民)의 아우이다.
군자감참봉(軍資監參奉)을 지내고 공조참의(工曹參議)에 증직되다. 돈후(敦厚)한 성품에 효행이 있었다. (文丹파)
▶김윤함(金允諴)
1527년(중종 22) ~미상. 자는 경순(景純)이며, 참봉 택민(澤民)의 아들이다.
소고(嘯皐) 박승임(朴承任)의 문인으로 1569년(선조 2) 생원시에 합격하다.
그 아들 수백(壽栢)이 안촌(安村) 배응경(裵應褧)의 사위로 무과에 급제하여 주부(主簿)를 지내다. 단양(丹陽)에 옮겨 살았다.
▶김수백(金壽柏)
생몰년 미상. 1594년(선조 27) 무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주부(主簿)에 이르렀다.
▶김우인 (金友仁)
1568년(선조 1)~1616년(광해 8). 자는 자보(子輔), 첨정(僉正) 윤의(允誼)의 아들이다.
유일재(唯一齋) 김언기(金彦璣) 문인이다. 선산교수(善山敎授)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했다. 김응조(金應祖)가 갈명을 지었다.
▶김초(金鍫)
1602년(선조 35)~1645년(인조 23). 자는 시용(時用)이며, 호는 일초당(逸草堂)이다. 우인의 아들이다. 『초당유고(草堂遺稿)』일책이 있다.
▶김시열 (金始烈)
1702년(숙종 28)~미상. 자는 형칙(亨則), 호는 국헌(菊軒)이다. 문절공(文節公) 담(淡)의 9대손이다.
1753년(영조 29) 생원시 합격하다, 학행으로 천거되어 벼슬이 현감(縣監)에 이르다.
저서 『국헌유고(菊軒遺稿)』 두 책이 있다.
참판(參判) 김굉(金宏)이 묘명(墓銘)을 지었다.
▶김호(金琥)
1732년(영조 8)~미상. 자는 안보(安甫)이며, 호는 애헌(艾軒)이다. 현감(縣監) 시열(始烈)의 아들이다.
1777년(정조 1) 생원시 합격하다.
저서로 『애헌유고(艾軒遺稿)』 한 책이 있다.
무섬(水島里) 선성 김(宣城 金)씨
무섬은 지금 행정구역으로 문수면 수도리(水島里), 옛날엔 진혈면(辰穴面) 무섬이었고, 일제강점기 이래로 평은면에 소속되어 오다가 1983년부터 문수면으로 되었다.
본래 반남 박씨의 터전이었던 무섬마을에 선성 김씨가 들어와 살기는 영조 말 무렵 선비 김대(金臺)에서 비롯된다. 대는 이 고장 선성 김씨의 장파(長派)로, 영주의 집경루(集敬樓 : 三判書古宅)에서 생장하였다. 약관시절 과거보러 상경했다가, 「과거를 보면 출세는 확실하겠으나, 반면 가운(家運)에는 불리하겠으니, 만일 출세의 뜻을 버리면 가운이 크게 열려, 자손이 창성하고 복이 많으리라.」는 어느 유명한 관상가의 말을 듣고, 과거를 포기하고 돌아왔다. 초야에 묻혀 수신제가(修身齊家)에 충실하기로 뜻을 굳히고, 그 처가 마을인 무섬으로 옮겨 살았다.
무섬은 안동의 조골산(照骨山 : 鳥雲山 인 듯) 줄기가 북으로 삼 십리를 거슬러 들어와 도사려 마무린 수려한 구릉(丘陵)에 안겨, 남향으로 자리한 마을인데, 동남쪽 한부분만 이어졌을 뿐, 사면이 온통 강줄기로 에워싸여 있어, 이름 그대로 섬마을이다. 산과 물이 마치 태극모양으로 서로 안고 휘감아 돌아 「작은 하회」로 불리며 산수의 경치도 절묘하다.
이 마을의 서쪽 물 건너 동네 「머럼(遠岩)」에서 환학암(喚鶴菴) 박경언(朴景顔)의 아들 박수(朴檖)가 처음 여기 들어와 나무숲을 쳐내고 집을 지어 터전을 개척했으니, 대개 숙종 말 ― 영조 초(18세기 전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선성 김씨가 들어오자 반남 박씨는 그 외손인 선성 김씨와 함께 세거하는데, 선성 김씨는 들어오자 번성하기 시작하여, 삼대쯤 지나서는 천석군이 십여 집을 헤아려 인물과 재산이 함께 울성(蔚盛)했다.
한때 군내에서 가장 부자마을이었던 무섬은 지금도 큼직한 옛 기와집이 가장 많이 보존되고 있는 마을이다.
▶김대 (金 臺)
1732년(영조 8)~1809년(순조 9). 자는 준원(俊遠)이며, 호는 학계(鶴溪)이다. 언열(彦烈)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슬기와 기량(器量)이 있어 노는 모습도 남다른 데가 있었다.
장맛비가 개인 어느 날 또래들끼리 집(三判書古宅)앞 동귀대(東龜臺) 아래서 멱을 감다가 시내언덕 나무뿌리에 감실(龕室 : 신주를 모시는 장)이 걸려있음을 보고, 언짢게 여겨 종이를 가져다가 잘 싸서 정결한 땅에 묻었다.
어버이 뜻을 좇아 과거보러 상경했던 길에 어느 점치는 사람이 「이번에 과거를 보면 크게 출세는 하겠으나, 복은 많이 감손되겠으니, 만일 과거를 포기하고 초야에서 지내면 가운이 떨치고 자손이 창성하리라.」하자, 그는 “심성을 길러, 도리를 다하면 족한 것을, 구차히 영달이 무엇이랴.” 하고, 그길로 돌아와 문을 닫고 임천(林泉)에 뜻을 붙여 수신제가(修身齊家)에 힘썼다.
그는 효성이 지극했으며, 어려운 이를 도움에 아낌이 없었다. 추위에 헐벗은 이를 만나면 솜옷을 벗어주었으며, 매번 나들이 할 때면 돈을 넉넉히 지니고 다녔으니, 딱한 처지의 사람을 만나면 돌보기 위함이었다.
그는 분가하여 고을 남쪽 무섬(文殊面 水島里)에 자리 잡아 살았다. 무섬은 산수 풍광이 그림처럼 아름답고, 외지고 조용하기도 하며, 무섬은 그 처가(후부인 박씨)마을이기도 했다.
무섬에 터전을 열자, 아들 다섯에 손자 열넷으로, 자손이 크게 번성했고 문한(文翰)이 대대로 이었으며 살림도 넉넉했다.
그가 거처하던 치류정(峙流亭)이 있다. 시문에 능하고, 글씨도 웅경(雄勁)하여 일가를 이루었다. 진사 박승진(朴勝振)이 행장(行狀)을 지었다.
▶김기(金夔)
1734년(영조 10) ~ 미상. 자는 요경(堯卿)이며, 호는 귀암(龜庵)이다. 대(臺)의 아우이다.
1763년(영조 39) 생원시에 합격하다.
▶김준련(金駿鍊)
1756년(영조 32)~미상. 자는 유백(有伯)이며, 호는 한와(閑窩)이다. 생원 호(琥)의 아들이다.
1792년(정조 16) 생원시 합격하다.
▶김영종(金永琮)
1791 년(정조 15)~미상. 자는 응정(應正)이다. 대(臺)의 손자이다.
가감역(假監役)을 지내다.
▶김낙운(金樂澐)
1811년(순조 2)~미상. 자는 중빈(仲賓)이며, 영종(永琮)의 아들이다.
1855년(철종 6) 진사시에 합격하다.
▶김낙풍(金樂灃)
1825년(순조 25)~ 미상. 자는 성발(聖潑)이며, 호는 해우당(海遇堂) 또는 대은(大隱)이며, 진사 낙운(樂澐)의 아우이다.
청수한 풍채에 기국(器局)이 뛰어나, 초연히 티끌세상을 벗어난 듯한 기상이 있었다. 평생을 거의 서울서 지냈으나 벼슬을 구하지 않았으며, 사귄 이들이 모두 명류(名流)들이었다. 김낙풍은 흥선대원군이 정권을 잡기 이전부터 막역지우로 지내면서 두터운 우정을 나누었고, 대원군이 집권한 후에는 정치적 조언자 역할을 했다. 또 나이 60이 넘어서야 의금부 도사에 오를 정도로 평생 동안 벼슬을 구하지 않고 당대의 명류들과 사귀는 것을 즐거움으로 삼았다. 지역에서도 이산서원 원장을 지내는 등 추앙을 받았다.
저서로 유고(遺稿) 두 책 있다.
그의 유적으로 해우당(海遇堂 : 참판(參判) 강진규(姜晉奎) 기문) 고택과 대은정(大隱亭 : 이중균(李中均)의 기문과 대원군(大院君)의 편액)이 있다.
▶김낙인 (金樂仁)
1823년(순조 23)~ 미상. 자는 순도(舜道), 증이조참판(贈吏曹參判) 영경(永敬)의 아들이다.
1885년(고종 22) 진사시 합격하다.
▶김휘준 (金輝濬)
1820년(순조 20)~미상. 자는 문숙(文叔)이며, 호는 희재(希齋)이다. 낙숭(樂崇)의 아들로 어머니는 진성 이씨 생원 태순(太淳)의 딸이다. 귀성(龜城) 아래 집경루(集敬樓)에서 태어나다.
7세에 당숙 낙규(樂奎)에게 취학하였다. 총명이 뛰어나 이미 문리(文理)를 깨달았고, 재주를 자부하여 독서에 근실하지 않자, 그 당숙이 일부러 평일보다 갑절이나 많은 독서량을 주었으나, 힘들여 읽지 않고도 이튿날 한 글자도 어긋남이 없이 외어 바쳤다. 13, 4세에는 경사(經史)에 통달하여 하루 수 천자씩을 외우며 탐구(探究)에 분발했다.
15세에 모친상을 당하고 가세가 기울어 문단(文丹)에 옮겨 살면서 아버지를 봉양하며, 문장공부에 힘써, 한―당(漢唐)이래 명(明)나라 대가에 이르기까지 모조리 익혀 글 솜씨가 진전되었다. 이휘녕(李彙寧), 강헌규(姜獻奎), 이만각(李晩慤) 같은 문사들이 그의 시문을 못내 칭찬하며, 영남에서 짝 할 만한 사람이 드물 것이라고 했다.
어느 날 참다운 공부는 마음을 닦고 성품을 기름에 있음을 깨닫고는 사장(詞章)을 버리고 심학(心學)에 전심하여, 사서를 기본으로, <심경(心經)>․<근사록(近思錄)>등 이퇴계의 성리서(性理書)를 탐구하기에 분발했다.
1849년(헌종 15) 풍기 금고(錦皐)에 옮겨 살며, 경암(敬庵) 이한응(李漢膺)을 찾아 학문의 요체(要諦)를 듣고, 서소(書巢) 김종휴(金宗烋)에게도 물었다.
1857년(철종 8) 호서―관동지방 일대를 두루 유람하고, 가솔을 데리고 적벽산(赤壁山(?))중에 옮겨 살 때에는 원근에서 많은 문도가 모여들었다.
1873년(고종 10) 4월에 영남 선비들이 황조(黃鳥(?))에서 강회(講會)를 열자, 그를 청하여 장석(丈席)을 삼았으며, 그 이듬해 모임에서도 그리했다.
1881년(고종 18) 감사(監司)의 천거로 선공가감역(繕工假監役)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그는 일찍 젊어서 한번 과장(科場)에 발을 들였다가 과거보는 선비들의 풍조가 못마땅하여 시권(試卷 : 답안)을 바치지 않고 물러나고 말았다.
그는 굳세고 단정한 성품으로, 아무런 권세 앞에서도 굽힘이 없고, 영합(迎合)을 싫어하여, 가끔 비방과 꺼림을 받기도 했다.
고을 수령(守令)이 부임하면, 먼저 기별하고 나서 그를 방문했고, 그를 초대하기도 했으나 그는 일체 응하지 않았고, 혹 쌀과 고기를 보내와도 그는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어버이를 섬김에 날마다 일찍 일어나, 의관을 갖추고 어버이 처소에 나아가 기침하기를 기다려, 손수 이부자리를 치우고 방을 청소하고 물러왔으며, 어버이 처리한 일이 크게 잘못됨이 아니면, 뜻을 굽혀 따랐으며, 물 건너 십리상거에 사는 그 형을 격일로 찾아가 문안했다
저서로 『희재집(希齋集)』 네 책이 있다.
▶김낙호 (金樂灝)
1829년(순조 29)~ 미상. 자는 명언(明彦)이며, 대(臺)의 증손이다.
선공가감역(繕工假監役)을 지내다.
▶김휘익(金輝翊)
1846년(헌종 12)~1894년(고종 31). 자가 경흠(景欽)이고, 낙풍의 아들이다. 통덕랑을 지냈다.
▶김휘철 (金輝轍)
1842년(헌종 8)~1898년(고종 35). 자는 응유(應由)이며, 호는 수산(睡山) 또는 졸수(拙修)이다. 낙광(樂洸)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청주정씨(淸州鄭氏)로 재석(在石)의 딸이다. 십여 세에 이미 글재주가 뛰어나, 붓을 들면 사람을 놀라게 했다. 그 아버지가 초롱(燭籠)을 가리키며, 「비(飛)」자를 운(韻)으로 하여 글을 지으라고 명하니,
春草軟葉藏花密, 봄풀 여린 잎은 꽃을 감추어 촘촘하고,
霽後纖雲挾月飛. 비개인 엷은 구름이 달을 끼고 날으네.
15세에 향교에 유학할 때에는 그보다 앞선 자가 없으니, 선비 나선기(羅善基)가 그 재주를 사랑하여 사위를 삼았다.
1862년(철종 13) 사계서원(泗溪書院)에서 독서할 때에는 관복재(觀卜齋) 김기헌(金騏獻)이 주석(主席)이 되어 부용대(芙蓉臺)에 모임을 열고는 36운(韻)의 장시(長詩)를 짓게 했는데, 관복재가 그의 시를 매우 칭찬하고, “이 사람은 과거 공부를 중지하리라.” 했다.
1876년(고종 13) 향시에 장원하고, 1882년(고종 19) 상경했다가, 금위병(禁衛兵)의 난리(壬午軍亂)를 보고, “시국이 이러하니, 어찌 선비가 영달을 구할 때인가?” 하고는 과거를 포기하였다. 향리에서 퇴폐된 선비의 기풍을 바로잡고자, 향중(鄕中)의 뜻있는 선비들과 더불어 기금을 모아 습례소(習禮所)를 설치하고 초하루마다 강회(講會)를 열어 읍양(揖讓)의 예를 익히게 했다.
1894년(고종 31) 북성산(北城山) 에 방수(方水) 서당을 세워 생도들이 머물며 공부하게 하고, 그 왼편에 넓은 뜰에 단을 만들어 소나무와 국화를 늘어 심고, 방수산장(方水山莊)이라 이름하고, 문을 닫고 독서에 전심하며 천석(泉石)으로 즐기니, 문도(門徒)가 날로 늘었다.
문도들이 장석(丈席)을 차지하기를 청했으나. 그는 “이름을 좇아 실을 폐함은 군자가 부끄러이 여길 부분이다. 중요한 것은 이치를 궁구하여 실천 하는데에 있으니, 각기 반성 분발해야 할 것이다.”라고 하며 사양하였다.
1895년 왜적에게 명성황후가 시해되자, 선비들이 의병(義兵)을 일으켰다. 왕명으로 의병을 해산하라는 효유사(曉諭使)가 영남에 이르자, 일을 주관하던 사람이 어찌할 바를 몰라 하였다. 그가 왕명에 답하기를, 서두에 복수의 대의를 밝히고, “하루 군사(의병)를 해산하면 하루 원수를 잊을 것이요, 이틀 군사를 해산하면 이틀 원수를 잊을 것이나, 원수는 본래 잊을 수 없으므로, 군사 또한 해산해서는 안 될 것이다.”고 했다. 그러나 그의 의병활동은 보람을 거두지 못하여, 아는 사람들이 안타깝게 여겼다.
1898년 영남학맥(學脈)의 마지막 거봉(巨峰)으로 일컫는 서산(西山) 김흥락(金興洛)을 방문하여, 마음을 다스리고 진리를 밝히는 방법에 대하여 물었는데, 서로 합치 되는 바 많았다. 서산은 그를 오랜 벗으로 대접하였고, 그 해박한 학식과 단아한 인품을 칭찬했다.
그는 평소에 날마다 새벽에 일어나 사당에 참배했으며, 제사에는 반드시 목욕재계하고 정성을 다했다. 밖에서 과일을 만나도 조상께 천신하지 않은 것이면 입에 대지 않았다.
사람들의 행실에 풍속을 두텁게 하는데 보탬이 될 만한 좋은 행실이 있으면 그는 반드시 드러내어 널리 알게 했으며 재물을 내어 돕기도 했다.
그는 예학(禮學)에도 밝았다. 박종교(朴宗喬)의 『상례찬요(喪禮纂要)』가 미처 완성이 못된 채 있었는데, 이재(頤齋) 권연하(權璉夏)가 그에게 교감(校勘)을 위촉했으니 당시 선배들이 그의 학문적 위치를 그만큼 중히 여겼던 것이다.
만년에 더욱 성리학에 깊게 빠져들어, 묵묵히 자득(自得)에 힘쓸 뿐 나타내지를 않았다.
어느 해에 호서(湖西)의 선비 김영주(金永冑)라는 자가 와서, 퇴계와 율곡의 다른 점을 글로써 변란(辨難)하며 은근히 퇴계의 학설을 기롱하고 헐뜯음이 있었다. 그(輝轍)는 서화담(徐花潭)․ 율곡․ 한원진(韓元震)등의 학설을 비판, 그 부당함을 일일이 지적하여 천언(千言)으로 변석(辨釋)했다.
그의 시문은 청건간엄(淸健簡嚴)하여 세상에 정평이 있었으나 그는 자부하지 않았다.
저서에 『수산집(睡山集)』세 책이 있다.
김사진(金思鎭)이 행장(行狀)을 짓고, 권상익(權相翊)이 묘명(墓銘)을 지었다.
▶김휘성(金輝聖)
1835년(헌종 1)~1898년(고종 35). 자는 문언(文彦)이며, 호는 도암(棹庵)이며이다. 낙홍(樂洪)의 아들로서, 낙순(樂淳)에 출계(出系)하였다.
과거에 불리하여, 위기(爲己)의 학문에 침잠하여 실천에 힘썼다. 그의 학문은 사서를 구경(究竟)의 공부로 삼았으며, 더욱 『중용(中庸)』과『대학(大學)』을 즐겨 읽었다.
석호(石湖) 유도성(柳道性), 전원(田園) 유도헌(柳道獻), 초산(楚山) 이만기(李晩耆)등과 학문을 강마(講磨)하였으며 도의로 사귀었다.
90의 어버이를 모실 때에도, 그 또한 늙은 몸으로 종일토록 곁에서 어린아이 시늉으로 어버이를 즐겁게 받들었으며, 새벽마다 냇물에 나가 고기를 잡아다가 공궤(供饋)했다. 모두 그의 효성에 감복하여 그 낚시터에는 고기잡이꾼들이 가까이하지 않았다.
저서에 『도암유고(棹庵遺稿)』두 책이 있다.
청하(廳荷) 박승진(朴勝振)이 묘지(墓誌)를 짓고, 회봉(晦峰) 하겸진(河謙鎭)이 갈명(碣銘)을 지었다.
▶김휘숙(金輝璹)
1840년(헌종 6)~1870년(고종 7). 자는 탁여(琢汝)이며, 진사 낙인(樂仁)의 아들이다.
생원시에 합격하다.
▶김휘병(金輝柄)
1854년(철종 25)~1915년. 자는 사균(士勻)이며, 영종(永宗)의 손자이다.
1888년(고종 25) 문과 급제하여, 승문원정자(承文院正字)를 지내다.
▶김휘택(金輝澤)
1855년(철종 6)~1935년. 자는 한경(漢卿), 호는 동계(東溪)이다. 낙하(樂夏)의 아들로 낙교(樂喬)에 출계(出系)하였다.
1879년(고종 16) 생원시에 합격하여 성균관(成均館)에 유학하다가. 차츰 세상이 날로 어수선해지자, 출세를 단념하고는 문을 닫고 독서 실천에 힘썼다.
왜적의 침략으로 국세가 자못 창망하던 1906년(고종 42)엔 진사 김광룡(金光龍), 윤대현(尹大鉉)등과 더불어 선현(先賢)의 유적을 두루 순례하고, 면우(俛宇) 곽종석(郭鍾錫)을 만나 심금(心襟)을 나누기도 했다.
나라가 무너지자 가속을 이끌고 호남 대둔산(大屯山) 길평(吉坪)에 숨어 살 때에는 배우러 찾아오는 선비들이 많았다.
기상이 활달하고 격조가 높아 꾸밈이 없었으며 대체(大軆)에 힘쓰고 소절(小節)에 구애되지 않았다. 학식이 깊고 시문에 능했다. 초야에 묻혀 곤궁히 지내면서도 나라와 겨레를 걱정하여, 「겨울이 지나면 반드시 봄이 올 것이요, 한번 어지러우면 한번 평화가 있음이 천리라」고 했다.
저서로 『동계유고(東溪遺稿)』 두 책 있다.
김승학(金承學)이 행장(行狀)을 짓다.
▶김동규(金東奎)
1855년(철종 6)~1885년(고종 22). 자는 진경(震卿)이며, 영종(永宗)의 증손이다.
진사시에 합격하다.
▶김홍규(金洪奎)
1858년(철종 9)~1888년(고종 25). 자는 순경(舜卿)이며, 동규(東奎)의 아우이다.
진사시에 합격하다.
▶김위규(金緯奎)
1865년(고종 2)~1885년(고종 22). 자는 기숙(紀叔)이며, 생원 준련(駿鍊)의 증손이다.
생원시에 합격하다.
▶김광규(金光奎)
1865년(고종 2)~ 미상. 자는 순여(舜汝)이며, 호는 일계(逸溪)이다. 대(臺)의 오대손이다.
구한말에 혜민원주사(惠民院主事)를 지내다. 6품 승훈랑(承訓郞)에 오르다.
▶김휘돈(金輝敦)
1876(고종 13)~미상. 자는 충경(忠卿)이며, 낙풍(樂灃)의 아들이다.
구한말 궁내부주사(宮內部主事)를 지내다.
▶김재규(金在奎)
1876년(고종 13)~미상. 자는 보일(輔日)이며, 호는 외헌(畏軒)이다. 낙하(樂夏)의 아들이다.
구한말 상공부주사(商工部主事)를 지내다.
▶김명진(金明鎭)
1876년(고종 13)~미상. 자는 이회(而晦)이며, 호는 가산(稼山)이다. 주사 광규(光奎)의 아들이며, 성암(誠庵) 김세영(金世榮)의 문인으로 문행이 있었다.
저서로 『가산유고(稼山遺稿)』두 책이 있다. 서산(曙山) 이회춘(李會春)이 갈명(碣銘)을 짓다.
▶김화진(金華鎭)
1904년 ~ 1946년. 해우당 출신으로 14세에 일본에 건너가 ‘동경조선청년동맹’에서 활동하였다. 귀국 후 1928년 2월 영주청년동맹(榮州靑年同盟) 및 신간회(新幹會)영주지회의 집행위원으로 활약했다. 평소 사회주의 사상을 깊게 공부하던 그는 식민지 현실의 모순을 직시하면서 항일투쟁을 전개했다.
1929년 3월에는 영주농민조합(榮州農民組合)의 집행위원으로 활약했다. 영주군에서 친일 어용청년회인 순흥청년회(順興靑年會)가 조직되자 이를 해체시키기 위하여 노력하다 일경에 잡혔다. 1930년 7월 9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위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 위반으로 징역 6월에 집행유예 3년을 받아, 항소하였으나 9월 11일 대구복심법원에서 기각되어 형이 확정되었다.
그 후 1931년 9월경 영주에서 김봉호(金鳳浩) 등과 함께 농민운동 및 반제운동(反帝運動)을 위한 비밀결사 조직을 준비하다가 1932년 4월 농민조합(農民組合) 및 반제운동을 설립하기 위한 비밀 협의체를 조직하는 한편 농민조합 담당자로 활동하면서 동지 포섭 등 조직 확대에 크게 힘을 쏟았다. 그러던 중 이 일이 발각되어 1933년 12월 22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2년 6월을 선고 받고 옥고를 치렀다.
그 후 1942년 중국 길림에 은거하며 활동하다가 1945년 7월 북 길림에서 일제에 체포되어 연행된 후 독립을 맞이했으나 일제에 의한 고문후유증으로 1946년 타계하였다. 김화진은 42년의 짧은 생애 중 옥고 6년(기소 20회, 예비검속 30개월), 도피 5년 등 전 생애를 독립운동에 몸을 바쳤다.
▶김승학(金承學)
1894년(고종 31)~미상. 자는 자경(子敬)이며, 호는 수촌(水村) 또는 위당(爲堂)이다. 호진(灝鎭)의 아들이다.
성암(誠庵) 김세영(金世榮), 정산(貞山) 김동진(金東鎭)의 문인으로, 문예와 행실을 갖추어 사림에서 칭송하였다. 저서로 『수촌집(水村集)』 세 책이 있다.
유동수(柳東銖)가 행장(行狀)을 짓고, 이가원(李家源)이 갈명(碣銘)을 지었다.
▶열부(烈婦) 안동 권(權)씨
1861년(철종 12)~1896년(고종 33). 권희호(權羲浩)의 딸로, 김휘형(金輝泂)의 아들인 회규(會奎)의 아내다.
단정하면서 온화 유순한 성품으로, 남편이 본래 허약한 몸으로, 과거공부에 너무 열중하여, 몸을 상할까 늘 걱정했는데, 1896년(고종 33) 2월 마침내 남편이 병으로 죽었다. 부인은 곧 남편을 따르려 뜻을 결단했으나, 늙은 시부모를 생각하여 애통함을 억눌러 절제하고, 조용히 수 십 일을 기다렸다.
집안의 슬픔이 어느 정도 진정되자, 하루는 가만히 대문을 나서 앞 냇가로 나가 깊은 물에 몸을 던졌다. 이윽고 온 집안이 알고 놀라 부근에 두루 뒤져 비로소 찾았으나. 숨이 이미 끊인 뒤였다. 3월 상순이었으니, 남편이 죽은 지 한 달 엿새만이었다. 남편과 합장(合葬)으로 장사했다. 관가에 알려, 그 절행을 표창해야 한다는 의논이 있었으나,「아름다움이 있어도 나타내지 않음이 종래의 가법(家法)이니라 하여 문중 문노들이 막았다.」
김승학(金承學)이 묘명(墓銘)을 지었다.
이산 우금(友琴) 선성김씨(宣城金氏)
우금(友琴)은 지금 행정구역으로 이산면 신암리(新岩里)다. 남북으로 길게 열린 이산평야의 동편기슭은 야산구릉(丘陵)을 배경으로, 예로부터 사족(士族)의 터전으로 알려진 마을들이 띄엄띄엄 자리 잡고 있다.
시원스레 펼쳐진 기름진 들녘 한복판을 맑은 내성천(乃城川)이 사시장철 흘러내려, 풍광도 수려한데다가 생활조건이 좋은 때문이다.
광해 초에 문과에 올라 황해 도사(黃海都事), 한성부 서윤(漢城府庶尹)을 지낸 김우익(金友益)이 비로소 우금에 터전을 열어 세거하면서, 대를 이어 많은 인물을 내었다.
우익은 문절공 김담(金淡)의 현손인 윤의(允誼)의 둘째 아들로, 영주 시내 종가(三判書古宅)에서 분가하여 우금에 자리 잡은 것인데, 우금에서 사마(司馬) 30여장에 문과 8장(다른파로 출계한 이들 포함)을 내는 등 많은 과환(科宦)과 문행을 배출했다.
우금에서 야산기슭을 따라 조금 들어가면, 연안 김씨 마을인 「머름」이 있고, 또 좀 더 들어가면 함창 김씨가 세거하던「신내(新川)」마을이 있다.
구가세족(舊家世族)의 터전인 이들 마을은 과거-벼슬에, 행실 있고 글 잘하는 선비가 많아,「우금, 신내는 반서울」이라 일컬었다.
▶김우익(金友益)
1571년(선조 4)~1639년(인조 17). 자는 택지(擇之)이며, 호는 두암(斗巖)이다. 증좌승지(贈左承旨)의 윤의(允誼)의 아들로 문절공(文節公) 담(淡)의 오대손이며, 어머니는 한양 조(趙)씨로 충의위 양의 딸이다. 십 여세에 송소(松巢) 권우(權宇: 세자 시전(世子師傳)을 지냄)에게 경서(經書)를 배우고 뒤에 유연당(悠然堂) 김대현(金大賢)에게 배웠다.
21세에 임진왜란을 만났다. 처참한 난리로 굶주림이 극심하여, 난민들이 재물을 빼앗고 살인 방화를 예사로 하였다. 그 아버지가 실림이 넉넉하여, 자주 난민의 습격을 받았으나 늘 소년 우익의 슬기로 화를 면하게 되어, 그 부친이「너는 장차 우리 가문을 부지하리라」고 칭찬했다.
이듬해 여름 그 부친이 역질을 만나 위독하자, 그는 변을 맛보아 증세를 가늠하며 하늘께 빌었으나 마침내 상사를 당하였다. 처절한 난리에 무서운 전염병인지라 친척들조차 서로 막혀, 그는 형제와 함께 손수 장사지내고, 십리가 넘는 길에 3년 동안 날마다 성묘를 다녔다.
칠년에 걸친 난리에 종들도 모두 흩어지고 살림이 흩어졌다. 그는 난리가 평정되자, 몇 해를 분발하여 살림을 일으키고는 가사를 부인에게 맡기고, 다시 글공부에 전심하여 1612년(광해 4) 문과에 병과 제 2인으로 급제하여, 성균관 학유(學諭)에 보임되고, 학록(學錄), 학정(學正), 박사(博士)를 거쳐, 거산도 찰방(居山道察訪)이 되었으며, 동 8년 황해도사 겸 춘추관기주관(黃海都事 겸 春秋舘記注官), 이듬해 영원(寧遠)군수에 부임, 1620년에 물러났다가, 동 14년 형조(刑曹)-병조정랑(兵曹正郞), 그 이듬해 진주(晉州), 안동의 제독(提督:교육감독관)이 되었다.
1620년(인조 2) 이괄(李适)의 반란에 의병대장(疑兵大將)에 추대되어, 왕이 피란해 있는 공주(公州)를 향해 행군을 서둘던 중 난리가 평정되자, 군사에 쓰려던 곡식과 포목(布木)을 고스란히 나라에 바쳤다.
그로부터 10여년을 행리에 있으면서, 선조를 위한 사업으로, 문절공(文節公) 담(淡)의 신도비(神道碑: 글은 장현광(張顯光) 와 그 아래 4대의 묘표(墓表)도 세웠다.
1638년(인조 16) 봄 봉상시주부(奉常寺主簿), 여름에 한성부 서윤(漢城付庶尹)에 옮겼으며, 가을엔 해미 현감(海美縣監)이 되었다가 곧 물러났다.
이듬해 6월 가벼운 병으로 눕자 집안사람들이 약을 바쳤으나 「우리 선대 어른께선 다 60세를 넘기지 못하였는데, 나는 이미 70이 다되었으니 약은 먹어 무엇 하겠느냐.」하고 물리쳤다. 67세로 생을 마쳤다.
그는 효성과 우애가 돈독하여, 그 형이 죽자 형수를 어머니처럼 섬겼고, 조카들을 친자식처럼 돌보았으며, 난리에 어버이를 잃은 생질들도 모두 거두어 길러 성취시켰다.
그는 두 고을 수령을 역임했는데, 다 부임한지 몇 달이 안 되어 칭송이 있었다.
영원(寧遠)은 관북과 관서의 틈에 끼어 있어 땅이 구석지고 백성이 적었다. 유민(流民)이 들어와 사는 것을 “입작(入作)”이라 하는데, 그들은 잘 보살피면 안주하여 생업에 힘쓰고, 그렇지 않으면 흩어지곤 하는데, 광해 때 정사가 어지러워, 연달아 무변(武弁)이 수령으로 와서 탐학(貪虐)이 심했기에 사민들도 차츰 흩어지고, 유민은 자취가 끊겨 마을들이 온통 황폐해 있었다.
그가 군수로 부임하자 가구가 겨우 30호에, 관에 비축된 곡식이 보름 정도 지탱할 정도였고, 창고는 관에서 부정하게 축낸 것(逋欠)이 수 천석에 이르고 있었다.
그가 부임한지 두 어 달에 어진 다스림(善政)을 듣고 백성이 사방에서 모여들어, 온 고을이 안심하고 부지런히 살림을 가꾸었으며, 민생에도 걱정이 없고, 검소 절약으로 관용(官用)도 넉넉해졌다. 얼마 아니하여, 해묵은 포흠(逋欠)을 모두 채워 메우자 감사(監司)가 그 치적(治績)을 조정에 알렸다.
그 중에도 그의 특필할 공적은 그곳에 처음으로 논농사를 개발시킴이었다. 그때까지 그곳 사람들은 밭농사만을 알뿐 물을 대어 논을 만들 줄을 몰랐던 것이다. 그가 비로소 낮은 땅에 물을 끌어 벼를 심게 했으니, 3년이 지나자 곡식이 창고에 넘칠 지경이었다.
그리고, 해미(海美: 지금 瑞山)에서는 1년도 채우지 못하고 떠나왔으나, 백성들이 깊이 우러렀다. 해미는 충청도 해변의 초라한 고을로 땅이 좁고 백성이 가난하여, 예로부터 다스리기 어렵기로 알려진 곳이었다.
그가 부임하여 피폐한 민생의 안정을 위하여 베푼 시책이 상사(上司)에 거슬려, 얼마 되지 않아 체직되어 떠나올 때는 온 백성들이 울었으며, 한평군(韓平君) 이경전이 그때 예산(禮山) 별업(別業)에 머물고 있었는데, 해미는 예산에서 한나절 길이라, 그의 치성(治聲)을 익히 들어 알았기 때문이었다.
우익이 황해도사(黃海都事)로 부임했을 때는 최기(崔沂 : 해주목사로, 李爾瞻의 미움을 받아 부관참시(剖棺斬屍)되고, 인조반정으로 신원(伸寃)의 옥사(獄事)를 겪은 직후여서, 그곳 황해도지방에 귀양살이하는 인사들은 모두 최기의 일파로 지목 된데다가 황해감사 백대형(白大珩)이 부추겨, 그 지방에 유배되어 있는 인사들은 일망타진(一網打盡)으로 불측한 화를 당할 뻔 했는데, 그가 남모르게 주선하여, 피화(被禍)에 직면된 많은 사람들을 구원했다.
그로부터 20여년이 지난 뒤, 판서(判書) 남이공(南以恭)이 비로소 그런 사실을 알고, 중요한 자리에 천거하려던 중, 부음을 듣고 여러 대신들과 함께 못내 애석히 여겼다. 그는 중년에 우금(友琴)에 옮겨 터전을 열었다.
아들 찬(鑽)이 행장(行狀)을 짓고, 김응조(金應祖)가 묘명(墓銘)을 지었다.
▶김종호(金宗灝)
생몰년 미상. 자는 심원(深源)이며, 호는 함집당(咸集堂)이다. 서윤(庶尹) 우익(友益)의 손자이다.
외조부 학사(鶴沙) 김응조(金應祖)에게 배웠다.
1660년(현종 1) 진사시에 합격했다.
▶김가주(金可柱)
생몰년 미상. 자는 백능(伯能). 서윤(庶尹) 우익(友益)의 증손이다.
1681년(숙종 7) 그의 두 아우와 함께 생원시에 합격. 온화한 성품에 효성과 우애가 두터웠으며, 베풀기를 좋아하여 남의 딱한 사정을 알면 도움을 아끼지 않았다. 노봉(蘆峰) 김정(金亻+政), 청대(靑臺) 권상일(權相一)의 제문(祭文)에 그의 인품성행이 잘 서술되어 있다.
▶김만주(金萬柱)
생몰년 미상. 자는 중능(仲能). 생원 가주(可柱)의 아우이다.
1681년(숙종 7)그 형제와 함께 생원시에 합격하다. 1690년 문과에 급제하여 병조정랑(兵曹正郞), 승문원교리(承文院郊理),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 강원도사(江原都事)등을 역임하다.
▶김한주(金漢柱)
1664년(현종 5)~1735년(영조 2). 자는 천지(天支)이며, 호는 운학재(雲鶴齋)이다. 종급(宗汲)의 아들로 어머니는 의성 김씨 표은(飄隱) 김시온(金是榲)의 딸이다.
청수한 생김새와 조용한 성품이며, 수리(數理)에 특별한 재주를 타고나, 겨우 5, 6세에 사환미(社還米)를 계산하는데, 그가 옆에서 유심히 보고 있다가 그 총계를 알아맞히니, 아전들이 크게 놀랐다 한다.
7세에 그 외숙 김방걸(金邦杰 : 대사간 지냄)에게 취학, 자라서는 과거공부에 힘쓰지 않고 성현의 학문에 전심하여, 경전(經傳)에 통달하고, 천문(天文), 역상(曆象)등 음양서(陰陽書)를 두루 읽어 그 묘리를 모두 깨닫기에 이르렀으며, 경세제민(經世濟民)의 실학(實學)에 깊은 연구를 쌓았으나, 나타내기를 꺼려하여, 그의 재식(才識)을 아는 이가 적었는데, 그와 가장 절친했던 강좌(江左) 권만(權萬), 김백남(金白南)등은 당대 인물로 그(김한주)를 첫손에 꼽았다 한다.
장암(丈岩) 정호(鄭澔: 영조 초에 영의정 지냄)가 그의 이름을 듣고 조정에 천거하고자 그의 아들 희하(羲河)를 시켜 한주에게 글월을 보내 그의 이름을 알아보았으나 그는 웃으면서 사양하여 물리쳤다.
그는 어머니 상사를 당하여 무덤 곁에 여막(廬幕)을 얽고 삼년을 시묘(侍墓)하고 나서, 집을 산 아래 운곡리(雲谷里)에 옮기고, 그 곁에 서재를 지어 거처, 세념(世念)을 끊고 서책과 자연을 벗하여 유연자적(悠然自適)했다. 그러면서도 시국을 근심하고 세태를 개탄하기도 했음을 그의 저서<임하쇄언(林下𤨏言)>에서 엿 볼 수 있다.
이인좌(李麟佐)가 여러 번 그를 찾았으나. 그는 이미 이인좌가 상서롭지 못한 위인임을 알았기에 피하고 만나지 않았다. 1728년(영조 4) 이인좌(李麟佐)반란이 일어나자, 그는 이미 연로하여, 자제들을 의병(義兵)에 참여케 했으며, 난리가 평정된 뒤에 영남이 무사했음에는 그의 힘이 컸다고 한다.
그 집 가승(家乘)에는 다음과 같은 사연이 전한다.
그(한주)는 비범한 재질, 해박한 학식에 경세구시(經世救時)의 경륜을 지녔으나, 세상에 나서기를 꺼려하여 그는 안동 조골산(照骨山 : 천등산 뒤편)속에 숨어 살았는데, 방금 무신란(李麟佐반란)이 일어날 조짐으로, 세상이 몹시 뒤숭숭하고 인심이 물 끓듯 할 무렵 1728년 이른 봄 어느 날 암행어사 박문수(朴文秀)가 김한주의 명성을 듣고 찾아와 봉정사(鳳停寺)에서 만났다.
박문수는 신분을 숨겨, 헤어지고 남루한 의관에 초라한 선비행색이었을 것은 물론이다. 온갖 유언비어가 떠도는데다가, 반란이 일어나자, 난군의 세력이 심상치 않아, 시국의 향방을 가늠하기가 어려웠고, 실제로 영남지방에는 반란에 호응하는 사대부들도 적지 않은 상황이었다.
박어사는 넌지시 은사(隱士) 한주의 의중(意中)을 짚어보려 했던 것인데, 그는 다만 다음 시 한 절을 읊어, 대답에 대신 했던 것이다.
官漏沈沈燭影殘, 風聲鶴淚總疑山.
天門告變休遲晩, 禍福安危在此間.
지체 말고 임금께 반역을 고발하란 뜻이었다. 그와 박어사와의 이야기를 설창문답(雪窓問答)이라 한다. 권상규(權相圭)가 갈명(碣銘)을 지었다.
▶김세열(金世烈)
생몰년 미상. 자는 성칙(成則)이다. 서윤(庶尹) 우익(友益)의 현손이다.
1723년(경종 1) 생원시 합격. 도백(道伯)이 벼슬에 천거했으나 사양했다.
▶김정렬(金鼎烈)
생몰년 미상. 자는 명칙(銘則)이며, 생원 만주(萬柱)의 아들이다.
1733년(영조 9) 생원시 합격. 우애가 도타와 평생토록 그 형과 거처를 함께 했다.
▶김방(金埅)
1706년(숙종 32)~1778년(정조 2). 자는 거경(巨卿)이며, 호는 쌍암(雙巖)이다. 홍렬(弘烈)의 아들이며, 서윤(庶尹) 우익(友益)의 증손이다. 어머니는 의성 김씨로, 월탄(月灘) 창석(昌錫)의 딸이다.
태어난 해에 아버지를 여의고, 이듬해에 형이 죽어, 5대 주손인 그는 홀어머니 아래서 외롭게 자랐다.
「대개의 귀한 아기들이 질병이 많음은 너무 보호하기 때문」이라 하여, 그이 어머니 김씨 부인은 옷에는 일부러 낡은 솜을 두어 입혔고, 음식도 기름진 것을 먹이지 않았다.
7세에 <십구사략(十九史略)>을 배웠으며, 자라서는 자잘한 소주(小註)라도 한 두 장쯤은 한번 눈을 거치면 책을 덮고 한 글자도 틀림없이 암송하는 재주였다.
1729년(영조 5) 봄 생원시에 합격하니 24세였다.
앞서, 그 부친이 강원도사(江原都事)로 있는 금강산을 장인 김창석(金昌錫)을 따라 유람하고, 양양부(襄陽府)에 이르러 병을 만나 여관에 누웠으나, 돌볼 사람이 없었다. 부사의 아들 정언섭(鄭彦燮)이 힘껏 간호하다가 마침내 장사를 당하니, 정언섭이 손수 염습하여 반장(返葬)을 도왔음을 알고, 자라서 그(埅)는 은혜를 못 잊고, 매양 상경하면 반드시 정언섭을 방문했다.
정언섭은 그때 참판(參判)에 올라 있었다. 생원에 오르고 인사차로 방문한 그에게 정언섭은 「군의 재능은 반드시 장차 크게 진취할 것이나, 지금 어머니가 계시니, 봉양이 급할지라, 내가 군을 위해 참봉(參奉)자리를 알아봄세.」라고 했다.
그는 사양하기를 「전날에 베풀어주신 지중한 은혜를 생각하여 제가 문하에 왕래하는 바이온데, 만일 그러신다면 저는 이제부터는 찾아뵙지 않겠습니다.」하니, 정은 그 뜻에 감탄하여 더는 말하지 않았다.
그 뒤에도 정은 어느 찰방(察訪)자리가 비어있다 하여 그에게 권하기를
「찰방이 청선(淸選)은 못되나, 괜찮을 듯 하니 사양하지 말게.」
「제가 그 과분한 자리를 어찌 사양하오리까. 다만 저는 아직 젊으니, 조급한 진출을 원하지 않사옵니다. 저의 이웃고을에 매우 마땅한 선배가 있사온데 아직 벼슬에 보임되지 못하고 있사오니, 원하건대 그 사람을 시키시옵소서.」
정언섭은 그 의리를 갸륵히 여겨 그대로 들어주었다.
1738년(영조 14) 문과에 급제, 승문원(承文院)벼슬에 보임되고, 동 19년 명릉 별검(明陵別檢)을 거쳐 이듬해 성균 전적(成均典籍), 예조좌랑(禮曹佐郞)을 지냈다. 동 21년 영희전령(永禧殿令), 그 겨울에 예조정랑(禮曹正郞)에 오르고, 1746년 병조좌랑(兵曹佐郞)이 되어, 그때 서울에 두역(痘疫)이 퍼져 사직하고 향리에 물러왔다.
선전관(宣傳官), 성균 사예(成均司藝)에, 동 29년엔 강원 도사(江原道事)에 연달아 임명되었으나 다 나가지 않았고, 동 30년 함경 도사(咸鏡都事)에 임명되어 사은(謝恩)하고 물러왔으며, 1757년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으로 불려, 곧 사임, 무릇 십 여년 동안을 향리에서 지냈다.
1759년 자인 현감(慈仁縣監)에 임명되었다.
부임하자, 그는 그 고을의 병폐(病弊)가 무엇이며, 민생을 괴롭히는 소지가 어디에 있는가를 정확히 파악하여 그것을 하나하나 바로잡아, 피폐해 있는 민력을 기르기에 먼저 힘을 기울였다.
한편, 그때 나라에서는 교화정책으로, 모든 고을에 신칙하여, 소년들에게 인격양성―행신범절의 규범적인 교재로 <소학(小學)>을 가르치도록 했다. 대부분의 고을에선 대개 형식만을 취할 뿐, 실효를 거두지 못하는 실정이었는데, 그는 고을 북쪽 신지(新池)언덕에 새로 소학정(小學亭)을 짓고, 배필신(裵必新)이란 선비를 훈장(訓長)으로, 관내의 소년들을 모아 격려하자, 이웃고을 소년선비들도 소문을 듣고 배우러 오는 이가 많았다.
그는 송사(訟)사건을 처결하는데도 남다른 재능을 가져, 아무리 복잡한 사건이라도 밝고 공정(公正)한 판결이 물 흐르듯 하여, 원근이 탄복을 마지않았다.
그 무렵 청도(淸道)에서, 이웃집 방앗간에서 목을 매어죽인 살인사건이 있었는데, 그 고을에서 해결을 못하여, 그에게 처결을 의뢰해 왔다. 그가 나서 조사하여 진범을 밝혀내고, 방앗간 주인의 억울한 혐의를 벗겨 주었다.
뒤에 그가 일본 사신을 마중하는 접위왜사(接慰倭使)로, 청도 땅을 지나는데, 어느 험준한 고개 밑에 다다르자, 사람의 무리가 산골짝을 메우고 있었다. 그가 까닭을 묻자, 「저희들은 앞서, 사또께서 처결해 주신 그 사건의 방앗간마을 사람들입니다. 그때 사또께서 밝게 처결해 주셨을 뿐더러, 그 사건을 트집으로 저희 마을사람들을 괴롭히지 못하도록 고을의 구실아치들을 엄히 단속해 주신 덕분으로, 저희들 탈 없이 지낼 수 있게 해주신 은혜를 못 잊어 하던 터에, 이번 사또께서 이 고개를 지나신다는 말은 듣고, 저희들이 보교를 메어 모시기를 원함이옵니다.」그들이 다투어 보교를 메고 옹위하여 고개를 넘겨주었다.
1762년(영조 38) 흉년이 들었는데, 하도(下道)지역이 더욱 심했다. 그는 굶주림을 구제하기에 성력을 다하면서, 사환미(社還米) 회수를 보류하도록 감영(監營)에 요청했던 바, 감영에서는 듣지 않고 수납을 독촉하게 했다. 그는「내가 상관에 거슬려 징계를 받을지언정, 어찌 차마 죽어가는 백성들에게 형벌을 씌울것인가.」하고, 스스로 사환미 수납을 후년으로 미루게 했다. 그 해에 다른 고을에는 굶어죽는 참사가 많았으나, 자인고을은 심한 곤란을 면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 일로 경상감사의 노여움을 사서 성적고과(考課)에 중(中)을 맞았다.
그 이듬해에 갈라진 보리이삭(麥穗兩岐)이 생기고(상서로운 징조라 함), 꿩이 관청 문안에 날아드는 등 밝은 조짐이 연달아 나타났다.
고을 백성들이 그의 치적(治積)을 포상하도록 감사(監司)에 진정했으나, 감사는 끝내 조정에 보고하지 않았다. 그는 그 해 5월에 벼슬을 버리고 물러났다.
그 해 섣달 어머니 상사를 당하여, 그는 60이 가까웠으나 슬픔이 극진하여 사흘 동안이나 울기를 그치지 않았고, 성복 뒤엔 진혼곡을 하루도 폐하지 않았다.
그가 19세 때 어느 날 꿈에 어딘가를 갔더니 궁전이었다. 다음은 당상에 앉은 면류관 쓴 이와 그와의 문답이다.
「너의 효성을 기특히 여겨, 너와 네 어미의 수명을 다 80세로 하리라.」
「저는 일찍 아비를 잃고 어미뿐인데, 어머니의 수명을 좀 더 늘려 주시옵소서.」
「수명은 이미 정해졌으니, 다시 더 보탤 수는 없느니라.」
「그러시면 저의 목숨을 덜어서 어머니께 더해 주시옵소서.」
「너의 정성이 그러하니, 특별히 네 청을 들어, 너의 명을 줄이고 어미에게 십년을 더 해주리라.」
그런 꿈이 있었는데, 그 어머니가 82세 때다. 어머니는 뒷머리에 심한 종저(瘇疽)가 나서 몹시 위독한 지경이었다. 그 어머니는 손자에게, 「회복될 가망은 없다마는 전날 네 아비의 꿈을 생각하면 아직 내 명이 8년이나 남았으니, 어쩌면 이번에 죽지는 않으리라」고 했다.
그 어머니는 과연 달포 만에 회복되어, 90세를 채웠던 것이다.
그(埅)는 은퇴하여 여년을 자적(自適)하다가 1778년(정조 2) 6월 73세로 마쳤다.
그의 행장(行狀)에 의하면, 그는 자신을 단속함에 엄격했고 남을 대함엔 너그럽고 정성되었으며, 지론(持論)에는 과격함이 없었고, 마음가짐은 한 결 같이 공평했다. 시비에 있어서는 남들이 결단하지 못하는 일에 그는 일도양단(一刀兩斷)격으로 과감 명쾌하게 판단을 내렸으며, 평소엔 온화했으나 옳다고 믿는 일에는 주저하거나 굽힘이 없었다.
승지(承旨) 김약련(金若鍊)이 행장(行狀)을 짓고, 갈수헌(渴睡軒) 김위(金瑋)가 갈명(渴命)을 지었다.
▶김훈 (金壎)
생몰년 미상. 자는 숙화(叔和)이며, 서윤(庶尹) 우익(友益)의 5대손이다.
1741년(영조 18) 생원시 합격하다.
▶김한련 (金漢鍊)
1734년(영조 10)~미상. 자는 유탁(幼濯)이며, 호는 창랑자(滄浪子)이다. 방(埅)의 아들이다.
문행으로 사림에 추중(推重)되었다.
▶김영범 (金永範)
1772년(영조 48)~1838년(헌종 4). 자는 숙일(叔一)이며, 호는 일간(逸澗)이다. 현감(縣監) 방(埅)의 손자이다.
1804년(순조 4) 문과 급제하여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을 지내다.
▶김낙주 (金樂周)
1778년(정조 2)~1835년(헌종 1). 자는 성유(聖有)이며, 호는 국은(菊隱)이다. 현감(縣監) 방(埅)의 증손이다.
1810(순조 10) 문과급제, 낭천 현감(浪川縣監)을 지내다.
일포(逸圃) 박시원(朴時源)이 행장(行狀)을 지었다.
▶김낙연 (金樂淵)
생몰년 미상. 생원 지(墀)의 증손이다. 1825년(순조 25) 문과급제, 벼슬이 돈녕도정(敦寧都正)에 이르다.
▶김석규 (金碩奎)
1826년(순조 26)~미상. 자는 덕문(德文)이며, 호는 치암(恥庵)이다. 휘경(輝京)의 아들로 현감(縣監) 낙주(樂周)의 손자. 어머니는 반남 박씨로, 진사 종교(宗喬)의 딸이다.
어려서부터 글공부에 착실하여, 배운 바를 실천하기에 힘써, 몸가짐이 어른 같았다.
자라서 백가서(百家書)를 섭렵, 한번 읽은 것은 잊지 않을 만큼 남다른 총명이었다.
1850년(철종 1) 어머니가 병으로 누워 해를 넘기자 그는 방문 밖에서 냄비를 걸고 손수 죽을 끓여 입에 맞도록 공궤했으며, 위독하자 손가락을 잘라 주혈(注血)했고, 아버지 병에도 변(便)을 맛보아 증세를 징험했으며, 상사(喪)에는 슬픔이 지나쳐 병을 얻었다.
그는 어버이 뜻을 좇아 몇 차례 과거에 응시했으나 불리하여 부모가 몰한 뒤엔 과거를 단념하고 학문과 행실에 힘썼다.
날마다 사당에 참배, 종일토록 책상 앞에 단정히 앉아 독서에 전심했다.
1880년(고종 17) 수신사(修信使)로 일본에 갔던 김홍집(金弘集)이 <조선책략(朝鮮策略)>이란 책을 가져와 왕에게 바쳤는데, 일본에 주재해 있는 청국 참사(淸國 參事) 황준헌(黃遵憲)이 지은 책으로 그 내용은 우리나라 외교문제를 논하여, 조선은 러시아의 남하정책에 대비, 동양 삼국인 일본․청국과 수호(修好)하고, 미국과 제휴해야한다는 것이었다.
고종은 이 책을 대신들에게 검토케 하는 한편, 그를 복사하여 전국 유림(儒林)에 배포하여 유생들의 식견을 넓히려했으나, 유생들은 일본과의 수교(修交)도 부당하려니와, 서양나라들과 사귄다는 것도 사교(천주교를 지적)를 인정하는 결과가 된다하여 맹렬히 반대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碩奎)는 일본이나 서양나라와 수교한다는 것은 국시(國是)를 뒤엎는 일이라 하여, 영주향교에 동지를 모아 사방의 유림에 통문을 돌렸고, 도산서원(陶山書院)에서도 그렇게 하여, 영남유림에서는 이만손(李晩孫)으로 소수(疏首)를 삼고, 그(碩奎)를 부소수로 삼아, 반대하는 소(疏)를 올리기로 되었던 것이다.
그가 소(疏)를 올리려 상경 할 때, 그 아들 정현(正鉉)이 울면서 자기가 대신하려 했고, 그와 잘 아는 어느 대신도 글월을 보내 만류하려 했으나, 그는「지금 만일 주저앉으면 사론(士論)이 나를 무어라 하겠는가?」하고 그날로 사당과 선영에 하직하고 길을 재촉하여, 앞서 떠난 이만손(李晩孫)을 충주(忠州)에서 만나, 함께 대궐 앞에서 소를 올렸다.
왕은 비답(批答)을 내려 「알았으니, 물러가라. 다시 상소하면 징벌하리라.」고 했다. 그러나 그는 김조영(金祖永)과 함께 대궐문을 떠나지 않고 계속 상소하자, 왕이 노하여 덕천(德川)에 귀양하게 했다. 그는 아들 정현에게 「나는 이제 죽을 자리를 얻었으니 여한이 없다.」하고 태연히 귀양길에 올랐다.
그는 귀양살이에서도 <근사록(近思錄)>, <심경(心經)>을 읽으며, 세상일을 잊고 학문에 잠심, 때로 그곳 명산을 찾아 유상(遊賞)하며 울회(鬱懷)를 달래기도 했다.
그가 예사로운 선비가 아님을 알고, 그 고을 군수도 아들을 보내어 배우게 했으며, 이웃고을 수령(守令)들도 물품을 보내어 위로했다.
그는 그곳 향교에서<춘추호전(春秋胡傳)>을 빌어다가 읽으며, 오랑캐와 화해하여 환란을 빚은 사례들을 추려 한 책을 이루었으니, 그로써 나라의 문호개방을 주장하는 사람들을 깨우치려 했던 것이다.
1883년(고종 20) 여름에 이질(痢)을 만나 6월 20일 아침, 집에 알리는 글월을 써놓고 덕천 배소(配所)에서 숨을 거두니 향년 58세이다.
그는 성품이 굳세어 영합(迎合)을 싫어했고, 신념이 투철하여 한번 옳다고 단정한 일엔 죽음으로 지켜 뜻을 바꾸지 않았다. 그는 젊어서 성품이 너무 강하고 과격함을 고치려하여, ″화평(和平)〃이라고 써서 벽에 걸고, 힘써 온화로움과 너그러움을 길러, 날카로운 모서리(圭角)을 갈아 없앴다고 한다.
당시 과거에는 온갖 부정한 수단이 많았으나, 그는 「임금을 섬기려고 하면서, 먼저 임금을 속인대서야 쓰겠는가. 비록 출세를 포기할지언정 그런 짓은 안한다.」고 했다.
그는 항상 세금을 남 먼저 바쳤으며, 후진을 지도함에는 반드시 행실을 먼저 가르치고 문장을 뒤로 했다. 그 문도들이 그를 위하여 계(契)를 설치하려는 기미를 알고 「너희들이 나를 모리(謨利)에 빠지게 하려느냐?」하고 기어이 저지하였다. 서산(西山) 김흥락(金興洛)은 그의 행장에서「공의 경학(經學), 행실, 재능으로 당세에 쓰였다면 크게 업적이 있었으리만, 시세가 불리하여 쓸쓸히 배소(配所)에서 명을 마치니 못내 애석한 일이나, 요설(妖說)이 세상을 어지럽힘에 다하여 몸을 돌아보지 않고 대의를 천하 후세에 밝혔음은 공의 본래의 온축(蘊蓄)이었거니, 다시 무엇을 한할 것인가.」라고 했다.
저서로 시문약간 권과『서천록(西遷錄)』,『도설잡기(圖說雜記)』,『호전찬요(胡傳纂要)』 세 책 등이 있다.
서산(西山) 김흥락(金興洛)이 행장을 짓고, 향산(響山) 이만도(李晩燾)가 갈명(渴命)을 지었다.
▶김휘봉 (金輝鳳)
생몰년 미상. 호는 오소(梧巢)이며, 지평(持平) 만주(萬柱)이 후손이다. 경사(經史)에 두루 통하고, 음양, 병학(兵學)에도 조예가 깊었으며 글씨를 잘 썼다. 유고(遺稿) 있다.
▶김호규 (金浩奎)
1880년(고종 17)~1942. 자는 공박(公博)이며, 호는 가암(稼巖)이다. 휘도(輝度)의 아들, 운학재(雲鶴齋) 한주(漢柱)의 칠 대손이다.
정산(貞山) 김동진(金東鎭)의 문인으로 집이 가난하여, 힘써 농사지어 어버이를 봉양하며 학업에 분발했다. 스승 정산이 연하동(煙霞洞) 산중에 은거할 때도 그가 취사(炊事)를 담당했고, 정산이 왜경에 감금되어 있을 때도, 스승을 위하여 극진한 정성이 적추(賊酋)를 감동시켰다. 그는 항상 스승의 곁을 떠나지 않고 한 결 같이 모셔 따랐다.
그는 학문을 깊이 이루어, 정산도 그의 학문의 경지를 인정했으며, 뒤에 소수서원에서 선비의 모임을 베풀 때 그를 주석(主席)으로 삼았다.
김인택(金仁澤)은 이르기를 「나는 영남을 두루 다녔으나, 경학(經學) 행검(行檢)으로, 이 늙은이(稼巖)에 견줄만한 이를 보지 못했다.」고 했다.
저서로는 『가암유고(稼巖遺稿)』 세책이 있다.
이회춘(李會春)이 갈명(渴命)을 지었다.
백암(栢巖 : 김륵)의 사손이 세거하는 귀 학 정 (龜鶴亭).
귀성공원(龜城公園) 서편 서귀대(西龜臺) 아래 자리한 귀학정은 선조 무렵 나라 일에 크게 힘쓴 백암(栢巖) 김륵(金玏: 참판 지냄, 시호는 민절)이 이룩한 정자를 이름이나, 정자에 잇대어 그 서편에 백암이 살던 고택이 있었고, 옆에 귀학정이라 일컫는다.
여기 귀학정파에서는 백암의 아버지 사문(士文)이 생원―문과로 좌랑(佐郞)을 지내고, 아들 백암의 귀로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증직, 생부 사명(士明)이 생원으로 역시 이조판서에 증직되었으며, 조부 우(佑)가 백암의 귀로 좌승지(左承旨)에 증직되었다.
백암의 맏아들 기선(幾善)은 찰방(察訪)을 지냈으며, 그 후손으로 1919년에 유림(儒林)대표로 파리장서(巴里長書)운동에 참여한 택진(澤鎭), 학문과 문장으로 알려진 사진(思鎭)등이 있었다.
백암의 사손이 세거하는 귀학정은 풍광이 아름답기로 영주에서 첫째로 꼽힐 만 했는데, 지금은 기슭을 스쳐 흐르던 귀천(龜川 : 서천)물이 멀리로 옮겨 가버린 데다가, 동귀대(東龜臺) 절벽 밑 깊고 드넓은 푸른 못이 펼쳐있던 자리는 주택지로 바뀌고, 시가지 확장으로 고층건물이 바싹 앞을 가로막아, 본래는 읍성(邑城)이 가까우면서도 그처럼 조용하고 아름답던 환경이 이제는 번잡한 도진(都塵)의 침노로 하여 크게 손상을 입고 있다.
백암의 정자와 사당이 함께 있던 귀학정 고택에는 얼마 전까지도 백암이 남긴 귀중한 유물이 많았는데, 근년에 거의 없어져버렸음은 그 후손엔 이를 나위도 없으려니와, 고장을 위해서도 못내 아까운 일이다. 현재 고택은 없어지고, 귀학정은 봉화군 문단으로 이건하였다.
▶김사문 (金士文)
1502년(연산군 8)~1553년(명종 8). 자는 질부(質夫)이다. 증좌승지(贈左承旨) 우(佑)의 아들이다. 문절공(文節公) 담(淡)의 증손이다.
1528년(중종 23) 진사, 1538년 정시(庭試) 문과에 급제하여 형조좌랑(刑曹佐郞)을 역임하였다. 권신(權臣) 윤원형(尹元衡)에 거슬려, 벼슬을 버리고 향리에 물러와 임천(林泉)에 자적(自適)했다.
이퇴계(李退溪)와 깊이 사귀어, 수창(酬唱)한 시가 여러 편 있다.
아들 륵(玏)의 귀함으로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증직되다.
(사문은 생원 장응신(張應臣)의 사위였다.)
옥천(玉川) 조덕린(趙德隣)이 갈명(碣銘)을 지었다.
▶김사명 (金士明)
생몰년 미상. 사문의 아우이다. 1537년(중종 32) 생원시 합격하다. 백암(玏)의 생부로,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증직되다.
▶김력(金朂)
생몰년 미상. 자는 역재(朂哉)이며, 사명의 아들이다. 선조 때에 참봉이 되다. 문학과 덕망이 있어 당세에 거듭 드러났다.
▶김사호 (金士皥)
생몰년 미상. 생원 사명(士明)의 아우이다. 1546년(명종 1) 생원시에 합격하다.
▶ 김늑(金玏)
1540년(중종 35)~ 1616년(광해 8). 자는 희옥(希玉)이며, 호는 백암(栢巖)이다. 성균생원(成均生員) 사명의 아들로, 그 백부 좌랑(佐郞) 사문에게 출계하였다. 문절공(文節公) 담(淡)의 현손이다. 백암리(栢巖里: 지금 봉화 문단)에서 나다.
어려서부터 슬기와 총명이 뛰어나고 몸가짐이 의젓하여 다른 아이들과 달랐다. 그 숙부 사호(士皥)가 「이 아이는 반드시 우리가문을 크게 하리라.」하여, 그 선대의 묘갈(墓碣)을 세우면서 글자를 새기지 않은 채 백비(白碑)를 세웠으니, 어린 백암의 장래를 기다림이었다.
13세에 소고(嘯皐) 박승임(朴承任), 금계(錦溪) 황준량(黃俊良)에게 배우며, 끼니를 잊을 만큼 글 읽기에 부지런했으며, 18세에 이퇴계 문하에서 사서(四書)를 배우고 물러와 산사에서 독서하면서, 밤을 꼬박 밝히곤 하여 절 스님이 그 건강을 염려하여 등불을 꺼주기까지 했다고 한다.
1564년(명종 19) 생원시에 2등으로 합격했다. 그 과거에 율곡(栗谷) 이이(李珥), 학봉(鶴峰) 김성일(金誠一), 오리(悟里) 이원익(李元翼)등 당대의 명류들이 함께하여 사람들이 용호방(龍虎榜)이라 했다.
그는 입년(立年: 30세)에 이미 학문과 인격으로 사림에 추중(推重)되어 34세로 이산서원장(伊山書院長)에 추대되었음에도 흑석사(黑石寺), 소수서원(紹修書院)등에서 한 결 같이 탐구(探究)에 분발했다.
그는 한 결 같이 실천도학(실천道學)에 정진하려 했으나, 어버이 뜻을 좇아 과거공부를 하여, 1576년(선조 9) 3월 식년(式年)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승문원 권지부정자(承文院權知副正字) 에 임명됨으로써 벼슬길의 첫발을 딛게 되었다.
1582년에 다시 전적, 정언을 거쳐 5월에 또 수찬이 되어「임금의 덕에 어긋남과 정사가 그릇되고 있음」을 상소(疏)하자, 임금이 불쾌히 여겨, 백암을 불러 힐책하자, 거리낌 없이 바른대로 대답했다. 임금이 더욱 노하여
「너가 나더러 예기(銳氣)가 지나친다고 한 것은 어디에 근거함이냐.」
「바로 오늘 경우 같은 것이 그렇습니다.」
임금의 노여움이 더욱 고조되어 공기가 자못 불안하자, 좌우 시신(侍臣)들이 잘 변명하여 임금이 성을 풀고 술을 내어 위로했다.
1584년에 지평, 전적을 거쳐 다시 지평이 되었다. 늙은 어버이를 봉양하기 위하여 외직(外職)을 구하여 7월에 영월 군수(寧越郡守)에 부임했다. 그 때 영월고을은 군수가 부임하면 갑자기 죽는 괴변이 있어, 백암이 부임한 것은 전후 일곱 군수가 연달아 죽은 다음이어서 영월은 사지(死地)라고 했다.
백암은 부임하자 단종릉(端宗陵: 그때는 노산릉)에 제문(祭文)을 지어 제사하고, 단종의 유해를 거두어 장사를 지낸 사람의 자손을 찾아, 호역(戶役)을 면제하고 능을 지키게 했으며, 이어 단종임금의 사당을 세워 위패를 봉안하였다. 왕비 송(宋)씨를 배향하고, 제청(祭廳)과 제실(祭室), 주사(廚舍)를 능 곁에 세웠다.
1589년 7월 임기가 다하여 홍문관 교리(弘文館校理)로 불려 영월을 떠날 때, 고을 백성들이 어머니를 잃은 듯 슬퍼하며 비석을 세워 그 덕을 기렸다.
1590년 사헌부 집의(執義)에 올라, 그 이듬해까지에 집의에 여섯 차례, 사간(司諫)에 다섯 차례, 사인(舍人)에 두 차례, 사성(司成)에 일곱 차례, 장악원정(掌樂院正)에 두 차례를 각각 거쳤다.
1592년(선조 25) 4월 왜군이 상륙하여 겨우 보름 만에 정부가 서울을 비우고 피난길에 나섰는데, 그 때 백암은 영남 안집사(嶺南安集使)라는 아주 중난(重難)한 책임을 맡게 되었다.
백암은 자격을 헤아려 인재를 골라, 여러 고을에 임시수령을 임명하여 각각 고장의 장정을 모아 지경을 지켜 적을 토벌케 했다.
또 새재(鳥嶺)는 이미 적의 길이 된 마당에, 죽령(竹嶺)마저 잃게 되면 적이 반드시 길을 나누어 곧바로 북상할 것인지라, 백암은 용궁 현감(龍宮縣監) 우복룡(禹伏龍), 전 판관(判官) 조붕(趙鵬)으로, 용궁과 예천의 군사로 다인(多仁 : 예천의 속현)의 적을 치게 하고, 예안 현감 신지제(申之悌), 신급제 권전(權詮)으로, 안동과 예안의 군사를 거느려, 의성(義城) 이하의 적을 막게 하고, 영천(榮川), 풍기, 봉화의 군사를 나누어 보내어 돕게 했다.
적이 예안―안동지경을 범하자, 백암은 정예를 뽑아 보내어 혹은 요해(要害)에 매복시키고, 혹은 밤을 타서 소굴을 습격하여 두 곳의 적을 도망치게 했다.
백암은 위에서 아래에 있는 적을 막음이 매우 유리함을 감안하여 병사(兵使) 박진(朴晋)을 만나 안동에 진(陳)을 머무르게 했다. 박진이 병권(兵權)을 맡아 이따금 의병의 활동을 억제했으니, 공이 자기보다 앞설까 꺼림이었다고 하는데, 백암은 더불어 교계치 않고, 참획(斬獲)한 바를 모두 그리로 넘겨주었다고 한다. (백암년보)
1594년 사헌부 대사헌(大司憲)이 되고, 5월에 가의대부(嘉義大夫) 이조참판(吏曹參判)에 올랐으며, 8월엔 홍문관 부제학(弘文舘副提學)이 되었다.
이듬해 8월에는 체찰부사(軆察副使)가 되어, 영―호남일대를 순찰하는 길에 올랐다. 초하룻날 출발하여 수원성을 거쳐, 직산(稷山)에 들려, 충청 병사(忠淸兵使) 원균(元均)을 불러, 절제(節制)에 복종하지 않음과 자중의 불화함을 꾸짖었다. 전주에서는 연무(練武)를 사열했으며, 남원(南原)에서는 도원수 권율(權慄)이 맞이했고, 전라 병사 이복남(李福男)이 순찰사(巡察使)에 복종하지 않으므로 장형(杖刑)에 처하고 파직시키도록 장계했다.
1597년 왜적이 다시 침노하여 서울이 몹시 수런거렸다. 백암은 그때 어머니 장(張)부인의 상중(喪中)이어서 집에 있었는데, 나라의 위기를 당하여 상주의 몸이라고 해서 안연히 있을 수 없어 장정을 모으고, 사재(私財)를 내어 병기(兵器)를 만들고 군량을 모았으며, 격문을 여러 고을에 띄워 궐기하기를 촉구했다.
1602년 8월에는 동지상사(冬至上使)로 명나라를 향해 떠났다. 9월 1일 압록강을 건너 11월 4일 북경에 당도했다.
11일 하례(賀禮)를 행하고 이튿날 병부(兵部)의 질문에 대하여 백암이 조목마다 석연히 해명하여 대답하자, 상서(尙書)이하가 모두 칭찬을 마지않았다. 칙지(勅旨)를 받고, 27일 하직인사 자리에서 신종(神宗) 황제는 특별히 금장(錦裝) 대학연의(大學洐義) 20책 한질과 서촉(西蜀) 비단 두필과 벼루 8장 및 시초(蓍草) 한 속을 주었다. 귀국하여 복명한 것은 이듬해 3월이다.
성균관대사성을 거쳐, 1604년 8월 안동 대도호부사(安東大都護府使)에 부임하였다. 이듬해 7월 큰 비로 낙동강 둑과 반변천(半邊川) 둑이 함께 무너져 안동부성(府城)이 송두리째 물속에 잠기고 일대가 온통 매몰되고 유실되는 처참한 수해를 입었다. 백암은 감영(監營)에 상신하여 관찰사(觀察使) 유영순(柳永詢)이 경상좌도(左道) 열 네 고을의 민정(民丁)을 동원하여 제방을 튼튼히 복구했으니, 안동은 동남부의 중요한 고을이기 때문이라 했다.
1607년 정월에 체직되어, 이듬해 2월 선조가 승하하고 광해군이 즉위하자 다시 성균관대사성이 되고, 1610년 한성부 좌윤(漢城府左尹)을 거쳐 대사헌(大司憲)이 되었다. 앞서 1589년 백암은 이른바 봉자전의절(奉慈殿儀節) 문제로 하여 강릉 부사(江陵府使)로 좌천되었다. 봉자전이란 광해의 생모인 공빈(恭嬪) 김씨를 공성왕후(恭聖王后)로 추숭(追崇)하여 제사하는 별묘(別廟)를 이름이다. 봉자전 제사를 마치고 헌하반사(獻賀頒赦)를 행하려 하자, 백암이
「추숭은 이미 거행된 바이니 어찌할 수 없으려니와, 그 의식 절차에는 당연히 경중(經重) 이 있음을 참작해야 할 것인데, 이제 제사를 필한 뒤 하전(賀箋)을 바치고 반사(頒赦)까지 행함은 종묘 효경전(宗廟孝敬殿)의 예를 그대로 좇음이니, 그렇게 한다고 하면 어찌 별묘라고 하겠습니까.」
라고 하여 그 부당함을 알렸으니, 곧 아무리 어버이 위하는 정서에서라 할지라도 예(禮)에 마땅치 못하면 효도에 허물이 됨을 직간한 것이다.
광해가 크게 노하여 「내 뜻은 이미 정한 바이니 그대로 행해야 한다.」고 하고, 양사(兩司)의 벼슬을 갈게 하고, 백암을 강릉부사로 좌천시킨 것이다.
백암이 길을 떠나자 원로대신들이 모두 시를 주어 이별을 아쉬워했고, 그때 강연(姜綖)은 영천군수로,「김공은 벽립천인(壁立千仞)이라 이를 만하다.」고 그 굳은 지조를 감탄했다.
1612년 4월에는 삭탈관직을 당했으니, 직첩을 빼앗기고 향리에 돌아온 백암은 자연에 뜻을 붙여 소요자적(逍遙自適)하면서, 귀학정(龜鶴亭)은 성안이 가까워 조용히 지내기에 마땅치 못하다하여, 그 작은 아들의 집인 천운정(天雲亭:지금 이산면 석포리)에서 만년을 지냈다.
1616년 11월 15일 병을 얻어 이튿날 죽으니 향년 77세이다.
백암의 사람됨이 침정(沈靜) 돈후(敦厚)하여 남의 허물 말하기를 부끄러이 여겼으며, 집에 있어서는 효성이 두터웠고, 종들에게도 꾸짖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평소엔 조용하고 온화하여 그 입은 옷도 이기지 못할 듯 보이나, 일단 일에 임하여는 굳세고 결단력이 있었으며, 의연(毅然)하여 범하지 못할 위엄을 지녔다고 한다.
백암은 높은 지위에 있으면서 스스로의 생활은 매우 검소하여 낡은 신을 기워 신었으며, 나들이에는 필마(匹馬)로 다녀, 가난한 선비의 행색이었기에 길에서 만나면 그 지위를 알지 못할 지경이었다 한다.
1620년 사림에서 귀성(龜城)에 사당을 지어 그 고조 문절공(文節公) 담(談)과 박승임(朴承任), 백암을 함께 봉안하여 제사했으며, 1624년 나라에서 정랑(正郞) 김영조(金榮祖)를 예관(禮官)으로 사제(賜祭)했다.
1653년에 이조판서(吏曹判書) 겸 의금부(義禁府), 춘추관(春秋館), 성균관사(成均館事), 홍문관(弘文舘), 예문관대제학(藝文舘大提學), 세자좌빈객(世子左賓客)에 증직되었다.
1794년 민절(敏節 : 應事有功曰敏 勤行制度曰節)이라 시호(諡)하였다.
갈암(葛庵) 이현일(李玄逸)이 행장(行狀)을, 대사헌(大司憲) 권해(權瑎)․ 풍원부원군(豊原府院君) 조현명(趙顯命)이 신도비명(神道碑銘)을, 하당(荷塘) 권두인(權斗寅)․ 눌은(訥隱) 이광정(李光庭)이 묘지명을 각각 지었다.
저서로 백암집(栢巖集) 오 책이 있다.
▶김기선 (金幾善)
1568년(선조 11)~1613년(광해 5). 자는 원길(元吉)이며, 백암(栢巖) 늑(玏)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안동 張씨로 주부(主簿) 순희(順禧)의 딸이다.
임진왜란 직후에 그 아버지 백암이 안동부사(安東府使)로 있을 때다 王子 임해군(臨海君)의 궁노(宮奴)가 세력을 믿고 여러 고을에 다니며 행패가 심했는데, 어느 수령(守令)도 감히 제지하지 못했으나, 백암은 거리낌 없이 그 종(宮奴)을 옥에 가두어 법대로 다스렸다.
이 때 기선은 아우(止善)와 함께 서울 집에 있었는데, 임해군이 사람을 놓아, 기선에게 만나기를 청했다. 기선이
「나는 왕자를 알지도 못하는데, 무슨 일로 만나자는가.」
라 하고, 만나지 않자 보는 이들이 화가 미칠까 두려워했으나 그는 태연자약(自若)했다.
1608년 (선조 41) 천거로 안기도찰방(安奇道察訪)이 되고, 1613년(광해 5) 갑자기 죽으니 49세이다. 그 재식(才識)과 포부를 미처 펴보지 못했음을 모두 아쉽게 여겼다.
▶김견 (金鋻)
1590년(선조 23)~1626년(인조 4). 자는 응구(應久)이며, 찰방(察訪) 기선(幾善)의 아들로 백암(栢巖)의 장손이다.
1622년(광해 4) 생원시에 합격하고, 세상이 어지러워 문을 닫고 지내다가,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반란에 의병참모(義兵參謀)가 되었다.
그 2년 뒤 37세로 죽다. 현손 위(㙔)가 갈명(碣銘)을 지었다.
▶김택진(金澤鎭)
1874년(고종 11)~1960년. 자는 원중(源仲)이며, 호는 동려(東黎)이다. 백암(栢巖)의 12대 주손이다. 한국유림파리장서에 서명하였으며,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김사진 (金思鎭)
1878년(고종 15)~1954. 자는 근부(謹夫), 호는 서주(西洲)이다. 용규(龍奎)의 아들로 찰방(察訪) 기선(幾善)의 9대손이다.
어려서부터 활달한 성품에 얽매이기를 싫어하여 놀기를 즐겨했으나, 어느 날 문득 스스로 깨달아, 장난꾸러기 또래들을 물리치고 잠과 끼니를 잊어버릴 만큼 글 읽기에 부지런했다.
수산(睡山) 김휘철(金輝澈) 문하에서 경서(經書)를 두루 익히고, 주자서(朱子書)며 퇴계학(退溪學)을 연구했다.
1901년(고종 38) 병호(炳鎬) 이동정(李東亭)이 오산(梧山)에서 <성학십도(聖學十圖)>, <고경중마방(古鏡重磨方)>이며 여러 성리서(性理書)를 강론하는 자리에 참여하고, 그는 거기에 오래 머물며, 심학(心學)-성리학(性理學)을 깊이 탐구했으며, 면우(俛宇) 곽종석(郭種錫)에게도 물었다.
그로부터 더욱 궁리 치지(窮理 致知)에 분발, 꾸준히 탐구(探究)에 정진하여 그의 학문은 한층 깊은 경지에 이르러, 사림의 우러름을 모으게 되었다. 그는 여러 해를 침식(寢食)을 잊다시피 독서와 사색(思索)에 열중함으로써 건강을 헤쳐 한때 병으로 신고를 겪기도 했다.
1910년(융희 4) 왜적에게 나라가 강탈되자, 그는 세념(世念)을 끊고 한 결 같이 학문에 전심, 후진을 가르치다가 왜경(倭警)의 박해를 피하여 양양(襄陽) 中美里에 숨어 五년의 세월을 지나고 돌아와, 문을 닫고 탐구에 침잠(沈潛), <심리구원(心理究源)> <심즉리고증(心卽理攷證)>을 저술했다.
1917년 고장의 선비 정돈섭(丁敦燮)․星州선비 이승희(李承熙:義士, 독립운동가)와 함께 서간도(만주)에 건너가 덕흥보(德興堡)에서 황무지를 개척, 농사를 경영했다. 숨 막히는 왜놈의 통치를 벗어나, 우리의 구강(舊疆)인 요동(遼東)벌판에 터전을 열어, 동지를 모아 꿈을 펼쳐보리란 뜻이었던 듯하나, 일이 뜻 같지 못하여 수년이 못되어 돌아왔고, 기미년 봄 외재(畏齋) 정태진(丁泰鎭)과 함께 다시 건너가 여러 해를 분주하다가 부득이한 사정으로 철수하고 말았다.
그가 서간도(西間島)에서 돌아오자, 3.1만세운동이 일어났다. 혹독한 적치(敵治) 십년에 억눌렸던 겨레의 울분이 폭발되어, 독립만세의 물결이 성난 파도처럼 삼천리 방방곡곡을 뒤흔들었는데, 맞추어 우리 유림(儒林)대표들이 그때 파리에서 열리고 있는 만국평화회의(萬國平和會議)에 「독립청원서」를 보낼 때, 그(西洲)에게 서명하기를 청했으나, 그는 연로한 어버이가 있음을 들어 서명을 사양했다. 앞서, 1907년(융희 1) 관동의 의병이 풍기-영주땅에서 왜군과 싸울 때에도 그는 이곡산(二曲山)중에 피하여 글을 읽고 있었으니, 그는 오로지 학문에 충실, 실천과 후진양성으로 자신의 임무를 삼았음인 듯 여겨지기도 한다.
그렇다고, 그가 경세치용(經世致用)을 외면했던 것은 아니다. 그는 이르기를 「학문이 경세달무(經世達務)」에 이르지 않으면, 이는 한갓 부유(腐儒)의 공론(空論)에 그칠 뿐인데, 공리(空理) 공론이 세상을 위해 무슨 보탬이 있을 것인가. 선비는 사민(사농공상)의 머리에 있어, 책임이 매우 무거운데, 자신이 얻은 바로써 남을 위하여 이바지함이 있으면 비록 해어진 옷에 아무리 천한 일을 한들 부끄러움이 없으려든, 요새 선비라는 이들이 이런 혼란한 때를 당하여 편안히 자기 집 쓰러져가는 방구석에 앉아 지조를 지키고 있으니, 어찌 슬픈 일이 아닐 것인가.」라고 개탄했다.
그는 도학자이면서도, 옛 실학의 대가 유형원(柳馨遠)의 <반계수록(磻溪隨錄)>․이익(李瀷)의 <성호사설(星湖僿設)>을 즐겨 읽으며, 유형원․이익을 천고의 경제대가라고 찬탄했다.
그가 서간도(西間島)에 황무지를 개척, 농장을 경영하려했던 것도, 장차 뜻있는 이들을 결탁하여 큰 꿈을 펼쳐보려던 계획이었는데, 그 사업에 연계를 가지려던 곽종석(郭鍾錫)이 파리장서(巴理長書) 사건으로 구금되고(곽면우는 기미년 3월에 구금되었다가, 6월에 석방되어 8월에 죽었음), 그(西洲)의 부친이 병석에 있게 되어, 마침내 요동벌에 일구려던 꿈은 무너지고 말았던 것이다.
그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일렀다.
「우리의 학문은 실심(實心)을 세우고, 실사(實事)를 행하며, 실리(實理)를 연구할 뿐이라」했고 또 「학문을 하는 것은 마치 집을 지음과 같으니, 심지(心志)는 그 터요, 경전(經傳)은 재료요, 추향(趨向)은 방위요, 백행은 칸살구조(間架)다. 그 터를 잘 다지고, 그 재료를 잘 다듬고, 그 방위를 바르게 잡고, 그 칸살짜임을 알맞게 하는 등 선후완급의 마땅함을 잃지 않고서라야, 잘 성취되는 것이다」고 했다.
그는 성명이기(性命 理氣)에 대해서
「하늘이 물건에 부여한 것이 명(命)이요, 사람과 물건이 받은 것이 성(性)이요, 일신(一身)에 주되는 것이 심(心)이니, 이는 품부(稟賦)를 말함이며, 인의예지(仁義禮智)는 성(性)이요, 측은(惻隱), 수오(羞惡), 공경, 시비는 정(情)이요, 허령지각(虛靈智覺)은 심(心)이니, 이는 체용(軆用)을 말함이다.
성(性)은 리(理)요, 정(情)은 주리(主理)가 있는데, 심(心)은 리(理)-기(氣)를 합한 것으로, 이는 이기(理氣)를 말함이다. 적연부동(寂然不動)하여 인의예지(仁義禮智)의 성(性)이 혼연히 가운데 있음은 심(心)의 체(軆)요, 감이수통(感而遂通)하여 측은, 수오, 공경, 시비의 정이 애연(藹然)히 나타남은 심의 용이다.…」라고 했다.
나라형세가 몹시 창망(悵惘)하던 1905년에 그는 그때 20여세의 청년으로 강개(慷慨)한 울회(鬱懷)를 달래고자 책을 덮고, 일가 선비 김세영(金世榮), 김동진(金東鎭)과 함께
죽장망혜로 강산순례의 길에 올라, 충청도 일대와 영남일대의 이름난 산천, 명승고적(名勝古蹟)이며, 선현(先賢)의 유적을 두루 탐방할 때, 수륙(水陸) 2,000여리 길에 지나는 고을마다에서 많은 지방의 인사들을 방문했다.
그 중에서 면우(俛宇) 곽종석(郭種錫), 의당(毅堂) 박세화(朴世和), 대계(大溪) 이승희(李承熙), 교우(膠宇) 윤주하(尹冑夏), 지암(持庵) 김재경(金在敬)등은 성망(聲望)이 높은 학자 지사들이었는데, 모두 그(西洲)를 맞이하여 함께 학문-국사를 논하고, 그의 조예와 탁론(卓論)에 마음을 기울여, 경의를 마지않았다 한다.
그는 근세 학자들을 평하기를 「성호(星湖:李瀷)는 <사칠론(四七論)>에 있어서는 이율곡의 그름(非)을 논변했으나, 심(心)을 논함에는 율곡에 암합(暗合)했으며, 화서(華西) 이항노(李恒老)와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은 율곡을 높이 믿었으나, 그 이치를 논하기는 주지는 이퇴계를 으뜸으로 생각했다」했으니, 선비들이 이르기를 「그 용심(用心)의 공정함이 후세의 표준이 될 만하다.」고 했다.
그의 저서로 『심즉리고(心卽理攷)』․『심리구원(心理究源)』․『증운도서범(證雲陶書範)』․『소학문답(小學問答)』․『독사비유(讀史備遺)』․『수지록(遂志錄)』․『요행일기(遼行日記)』․『시문잡저(詩文雜著)』등 모두 십 육권이 있다.
김승학(金承學)이 행장(行狀)을 짓고, 이가원(李家源)이 묘명(墓銘)을 지었다.
▶김덕규(金德奎)
생몰년 미상. 호는 죽사(竹史), 참판(參判) 늑(玏)의 후손이다. 류주목(柳疇睦) 문인으로 학문에 깊고 행실이 두터웠다. 유고(遺稿)가 있다.
▶김회진(金晦鎭)
1882년(고종 19)~1965. 자는 명수(明叟)이며, 호는 대관재(大觀齋)이다. 태규(台奎)의 아들로 두규(斗奎)에 출계하였으며, 처음 이름은 용(鏞)이다.
김이직재(金履直齋)의 문인으로, 문학과 행실이 있었다. 저서에 대관재집(大觀齋集)이 있다.
이산 번계(伊山 樊溪) 선성 김(宣城 金)씨
선성 김씨의 마을 번계(樊溪)는 지금 행정구역으로 이산면 석포리(石浦里)이다. 옛날엔 말암면(末岩面) 석포, 동포(東浦)라고도 했다. 바로 우금(友禁) 아랫마을이다.
진사로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를 지낸 김지선(金止善 : 백암의 둘째아들)이 처음 자리 잡아 살았으며, 백암이 여기에 천운정(天雲亭)을 이룩하고 만년 은퇴하여 여기서 여년을 지냈다. 지선(止善)의 고택이 천운정의 서쪽에 잇대어 있어, 정자와 그 사손이 세거하는 고택을 아울러 천운정이라 일컫는다.
본래는 내성천(乃城川)이 천운정(天雲亭) 가까이로 흘러, 그 앞 일대가 온통 물구덩이었는데, 지선이 여기 집을 세우고 나서, 물길을 멀리 서쪽으로 돌리고 마을 앞을 모두 농토로 개척했으니, 내성천 줄기는 이 마을의 울타리가 되었다 하여 마을이름을 “선성(宣城)”이라 했고, 인하여 지선은 “선성(宣城)”으로 스스로의 아호를 삼기도 했다.
수려한 구릉(丘陵)에 안겨, 앞에 평야를 펼치고, 멀리 그림 같은 야산봉우리를 늘어세운 천운정은 조용하고 아늑하면서도 풍광이 자못 명미하고 시원스럽다.
여기 지선의 자손에서는 그 증손 동주(東柱)가 진사, 동주의 손자 지(墀)가 생원, 위(㙔)가 문과로 좌랑, 증손 약련(若鍊)이 진사 문과로 참의(參議), 상련(象練)이 생원, 후손 성진(聲振)이 경술국치(庚戌國恥)에 자결했고, 회진(晦鎭)이 문행으로 일컬었다.
천운정에는 백암의 귀중한 유품 약간이 보존되고 있다.
▶김지선(金止善)
1573년(선조 6)~1622년(광해 14). 자는 봉길(逢吉)이며, 호는 번계(樊溪)이다. 백암의 둘째아들이며, 찰방(察訪) 기선(幾善)의 아우이다.
1601년(선조 34) 사마시(司馬試)에 장원(壯元)하였다. 1604년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에 제수, 중직대부(中直大夫)에 오르다.
이퇴계(李退溪)의 손자 이순도(李純道)의 사위이다. 유고(遺稿)가 있다.
▶김동주(金東柱)
1655년(효종 6)~1682년(숙종 8). 자는 계능(系能)이다. 생원 지선(止善)의 증손이다.
1681년(숙종 7)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으나, 이듬해 28세로 요절하다.
손자 위(㙔)가 묘명(墓銘)을 짓다.
▶김지(金墀)
1697년(숙종 23)~1723년(경종 3). 자는 헌가(獻可)이며, 호는 만간암(晩看庵) 또는 치옹(癡翁)이다. 원렬(元烈)의 아들로 백암(栢巖)의 6대손이다. 어머니는 전주 류씨로 목사(牧使) 정휘(挺輝)의 손녀이다. 생원시에 합격하다.
그는 효성이 있어, 그 어머니가 20년을 병석에 있어도, 아침저녁 온갖 정성으로 받들고 위로하며, 기쁘게 함에 힘을 다했으며, 손수 고담(古談)을 번역하여 늘 곁에서 읽어 드리곤 했다.
부친 상사(喪)에 복을 벗고는 날마다 사당에 참배했으며, 1750년(영조 25) 모친상을 당하여, 나이 이미 노경(老境)이었으나, 어린아이가 어머니를 잃은 듯 슬퍼하여, 날마다 걸어서 무덤에 다니며, 아무리 사나운 날씨에도 폐하지 않았다. 그 해 겨울 성묘길에 추위에 병을 얻어 죽었다.
우애도 두터워 그 아우와 한 방에서 나란히 하여, 모든 물건을 따로 가지는 법이 없었다. 그는 사람을 대함에 간격을 두지 않았고, 옳지 못함을 보면 정색으로 충고하여 일깨웠다.
향리의 후진을 가르치며, 달마다 초하루 보름에 강회(講會)를 열었다. 힘써 지도하여 성취한 이가 많았다 한다.
아우 위(㙔)가 묘명을 짓다.
▶김위(金㙔)
1709년(숙종 35)~1789년(정조 13). 자는 공준(公準)이며, 호는 갈수헌(渴睡軒)이다. 원렬(元烈)의 아들로 생원 지(墀)의 아우이다.
42세에 문과에 올라, 승문원(承文院)벼슬에 임용되고, 장녕전별검(長寧殿別檢)을 거쳐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 예조좌랑(禮曺佐郞)․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 이조정랑(吏曹正郞) 등을 지냈다.
다시 지평(持平)에 임명되었으나, 사은(謝恩)하고 즉시 벼슬을 사퇴하면서, 나라의 당면한 급무와 천재(天災)에 관하여 간절한 우국(憂國)의 정성으로 소(疏)를 올리자 임금은 가납(嘉納)하는 답을 내렸다.
1782년(정조 6)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에 임명되었으나, 이미 연로했고 은퇴한지 20년에 나갈 뜻이 없어 사양했다. 3년 만에 다시 종부시정(宗簿寺正)에 임명되었으나 역시 나가지 않았다.
그 3년 뒤에 80세에 통정(通政)에 올랐다.
그가 첫 벼슬로 강화도 장녕전별검(長寧殿別檢)에 있을 때, 강화유수(江華留守)가 그를 매우 후히 대접했다. 뒤에 그 강화유수는 조정의 인사를 담당하는 이조(吏曹)의 요직에 옮겨, 그(㙔)가 한번 찾아오기를 바랐으나 끝내 찾지 않았다. 이로 인하여 여러 해 동안 승진길이 막힌바 되었다.
일찍 병조좌랑(兵曹佐郞)으로, 어느 날 숙직(宿直)하는 날 밤에 아전이 보고해야할 사건을 보고하지 않아 문책을 받게 되자, 아전이 황겁하여 「당직이 잠들어 있었기에 보고를 못했노라」고 하여, 책임을 그(㙔)에게 돌렸다.
임금이 웃으며, 「이는 정말 갈수헌랑(渴睡軒郞)이로군」이라 했다. 이로 인하여 그는 파직되었으나 변명을 않고 물러나 버렸다.
성재(省齋) 권상익(權相翊)이 묘명(墓銘)을 지었다.
▶김호련(金虎鍊)
1718년(숙종 44)~1799년(정조 23). 자는 유정(幼精)이며, 호는 이동거사(里東居士) 또는 호호옹(好好翁)이다. 생원 지(墀)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정훈(庭訓)을 받아 행실에 힘썼으며, 친척이나 이웃의 어려움을 도움에는 항상 심력을 다하여 남보다 앞섰다. 가부(可否)를 결판하기 어려운 일에 부닥쳐도 그는 남다른 슬기로 사리에 맞게 잘 처결했으며, 문장에 있어서도 그 재주와 능력이 알려졌다.
그러나 과거에 불리하여 70세가 넘어 노직(老職)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에 올랐다.
집이 마을 동쪽에 있어 이동거사라 했고, 성품이 대범하고 너그러워 노여움이나 근심 걱정 같은 것을 오래 지니지 않으며, 집에 있거나 향당(鄕黨)에 있을 때에는 사람을 대하고 일에 임함에 매양 좋을호(好)자를 생각함으로 스스로 “호호옹(好好翁)”이라 일컬었다.
아우 승지(承旨) 약련(若鍊)이 행장(行狀)을 지었다.
▶김약련(金若鍊)
1730년(영조 6)~1802년(순조 2). 자는 유성(幼成)이며, 호는 두암(斗庵)이다. 생원 지(墀)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반남 박씨로 생원 태래(泰來)의 딸이다.
기상이 있고 문사(文詞)에 능했으나, 거듭 과거에 불리하여, 40이 넘어 1774년(영조 50) 사마(司馬)시에 합격, 그해 겨울 증광(增廣)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주서(承文院注書)에 보임되었다.
재위(在位) 52년으로 영조가 승하하고(1776년) 정조가 즉위했다. 그는 분번(分番)직원으로 상소(정조의 즉위를 반대한 洪麟漢-鄭厚謙등을 논죄함인 듯)가 있었다. 약련이 그 사건에 연루되어 크게 화를 당할 뻔했으나 정조의 특별한 처분으로 삭주(朔州)에 유배(流配)되었는데, 대각(臺閣)에서 번갈아 공박했으나 임금이 듣지 않고 이듬해 정월 특명으로 사면하여 풀려 돌아왔다.
그로부터 16년을 향리에서 문을 닫고 독서로 소요(逍遙)하다가, 1793년(정조 17) 승정원가주서(承政院假注書)에 복직되어, 성균전적(成均典籍)-병조좌랑(兵曹佐郞)을 거쳐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에 제수되었으나 나이가 많음을 이유로 사퇴하고 돌아왔다.
그로부터 몇 해에 걸쳐, 사간원헌납(司諫院獻納), 지평, 사간원정언(正言)등에 임명되었으나 다 취임하지 않았고, 1800년 정월 왕자책봉대례(大禮)에 통정계(通政階)에 올라 병조참의(兵曹參議)에 제수되었다. 이어 승정원우부승지(承政院右副承旨) 와 좌부승지(左副承旨)에 올랐으나 병을 이유로 취임하지 않고 물러왔다.
그해 6월 정조가 승하, 그 겨울 인산(因山)때는 날씨가 몹시 추워 모두 「늙은이로 먼 길은 위태롭다」고 했으나, 그는 「크신 은혜를 몰라서야 되겠느냐」하고 상경하여 졸곡(卒哭)을 지내고 돌아왔다.
그는 당당한 체구에 풍채가 빼어나고, 어릴 때부터 국량(局量)이 남달라, 문무의 재목이라고 일렀다. 집안에 처결하기 어려운 일이 있으면, 어른들이 매양 그의 의견을 들어 처리하면 잘 해결되었다고 하여, 그 명성이 일찍부터 향중(鄕中)에 알려졌다.
임금을 섬기려면 과거를 거쳐야 하므로, 그는 뜻을 굽혀 과거공부를 했으나, 천품이 호탕하여 시류(時流)를 따르지 않았다. 청탁으로 출세를 꾀하는 사람을 보고 「도적보다 심한 행위」라고 했다.
그가 일찍 정시(庭試) 문과에 응시했는데, 영조가 그때 영남사람을 못 마땅히 여겨, 영남선비들을 모두 쫓아버렸다가, 한강에 당도했을 때 다시 불렀으나 홀로 그는 집안 아우 한련(漢練)과 함께 배를 타고 돌아오고 말았다.
그때는 낭관(郎官)이 상사에게 출입할 때 반드시 부복(俯伏)했으나 그는 낭관으로, 남들을 따르지 않았다. 그는 「옛날에는 벼슬아치가 공무가 아니면 장관을 보지 않았으니, 이는 염치와 의리를 숭상함이요, 체모를 중히 여김인데, 요새는 지나치게 굽실거린다.」라고 했다.
영조 52년 세자를 모해(謀害)한 사람들을 논죄(論罪)하는 상소에 관련된 죄로, 그 이듬해 금옥(禁獄)에 갇히어 죽음에 직면하였으나, 그는 큰칼을 쓴 채 코를 골며 잠들만큼 자약(自若)함이 평소와 같았고, 신문(訊問)에 대한 공초(供招)에서도 조금도 두려움이나 꾸밈이 없었으니, 처음에 그 상소의 내용을 보고 말렸음을 실지대로 고백했고, 그 말린 까닭을 물음에 대해서는
「인산(因山)날이 박두하고, 임금께서 슬픔이 망극하신 중이라, 그 때가 아니라고 여겼기 때문」이라고 대답하였다. 위관(委官)이 그 무죄함을 딱하게 여겼고, 임금은 그 충직함을 헤아리게 되었다. 그는 말하기를
「내 공초(供招)에는 위로 임금을 속이지 않았고, 안으로 양심을 속이지 않았으니, 어디에도 부끄러움이 없노라.」고 했다.
그는 활달한 기상과 넓은 도량으로 작은 일에 구애되지 않았다. 소탈하고 해학(諧謔)을 좋아했으나, 소신(所信)에 투철했고 지조가 있었다.
그는 좁은 거실에서 친구며 후진들과 글 읽기를 즐겨했는데, 겨우 말(斗)만한 방이라고 하여 두암(斗庵)이라 했다. 그는 특히 <맹자(孟子)>를 즐겨 읽었으며, 늙어서도 글 읽는 소리가 쇠북소리처럼 우렁차 지나다니는 이들이 문밖에 멈추어 오래도록 듣고는 했다 한다.
문장이 또한 그 인품을 닮아 활달하고 꾸밈이 없었다.
황한룡(黃翰龍)이 묘명(墓銘)을 지었다.
▶김상년(金象年)
1731년(영조 7)~1804년(순조 4). 자는 덕옹(德翁)이며, 호는 남고(南皐)이다. 지평(持平) 위(㙔)의 아들이다. 1771년(영조 47)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학식이 해박하고 행실이 두터워 사림에 추중(推重)되다.
죽어서 장사할 때에 자리가 남의 무덤 곁이어서 마땅히 금장(禁葬)을 당할 형편이었으나, 무덤 주인이 「군자의 장사를 어찌 금할 것인가. 저승에서도 군자와 이웃함이 또한 영광이 아니겠는가.」라고 했다. 이로써 그의 인망이 어떠했음을 짐작할만하다.
정산(貞山) 김동진(金東鎭)이 묘명(墓銘)을 지었다.
▶김영익(金永翼)
생몰년 미상. 생원 상련(象鍊)의 아들이다.
수직(壽職)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에 올랐다.
▶김휘만(金輝萬)
생몰년 미상. 이동거사(里東居士) 호련(虎鍊)의 증손이다.
수직(壽職)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 용양위부호군(龍驤衛副護軍)에 올랐다.
▶김하진 (金河鎭)
1860년(철종 11)~미상. 자는 승지(承旨)이다. 약련(若鍊)의 후손으로, 1885년(고종 22) 사마 양시(司馬兩試)에 합격하였다.
▶김성진 (金聲振)
1856년(철종 7)~1912. 자는 명옥(鳴玉)이며, 호는 어야(於野)이다. 백암(栢巖) 늑(玏)의 후손이며, 이산면 석포(石浦)에 살았다.
그는 글을 많이 읽지 않았으나, 재주가 있어 시문에 능했다.
본래 뜻이 크고 기개도 있었으나 날로 기울어 가는 시세(時勢)를 근심하여, 울분을 달래고자 술을 즐겨 마셨고, 술을 마시면 반드시 취했으며, 취하면 마을의 천한 사람들과 어울려 흙탕에 뒹굴기도 했으니, 사람들이 옛날 고양주도(高揚酒徒)의 풍이 있다고 했다.
1902년(고종 39) 혜민원주사(惠民院主事)에 제수 되었다.
1910년(융희 4) 7월에 나라를 빼앗기자, 그는 격앙(激昻)하여 옷을 찢어버리고, 서향하여 통곡, 죽음을 결단하고 며칠 동안이나 음식을 끊었다. 그 어머니 권씨 부인이 「네가 죽으면 내가 살아 무엇하겠느냐?」하고는 따라서 먹지 않으니, 그(聲振)는 마지못하여 뜻을 돌렸다. 「내가 비록 지금 죽지는 못하나 하늘과 해를 볼 수는 없다.」하고, 삼베 두건을 쓰고 죄인으로 자처하매, 사람들이 장하다 하여 시를 주어 기렸다.
1912년 모친상을 당하고, 이듬해 서간도로 가려다가 측근의 제지로 이루지 못했으며, 복상을 벗고 또 자결하려 했으나, 아들 도현(道鉉)이 멀리 떠나있어 돌아오지 않으니, 1915년 어느 날 「전날에는 어버이로 하여 죽지 못했고, 오늘은 아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노라 죽지 못하면, 이러다가는 내가 죽을 날은 없으리라.」하고, 스스로 만시(輓詩) 한 수를 지어 뜻을 보이고 인하여 음식을 끊었다.
소문을 듣고 영주군수 장윤규(張潤圭)와 헌병분대장(憲兵分隊長)이 의사를 데리고 와서 간곡히 달래었으나, 그는 「내 뜻은 이미 결단한 바이니 말하지 말라」고 했다. 의사가 가까이 다가가서 진찰을 하려하니, 「무슨 성가신 짓인가-」하고 큰소리로 꾸짖어 물리쳤다.
그는 사람을 시켜 목욕하고, 업혀서 뜰에 나가 북향하여 네 번 절하고, 2월 12일 한 덩이 피를 토하고 나서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숨을 거두었다.
기려자(騎驢子) 송상도(宋相燾)는 『기려수필(騎驢隨筆)』에서 다음과 같이 적었다.
-어느 사람은 말하기를 「김성진(金聲振)은 일찍 임군의 특별한 은혜를 입은 바도 없었고 또 평소에 볼만한 행실도 없는 터에, 죽지 않아도 될 처지에서 죽었으니, 허망한 일이 아닌가」라고 했다.
처음에 성진이 나라를 강탈당했음을 듣고 통곡을 하고 곧 자결하려 했으나, 어버이로 하여 이루지 못했다가, 복상(服喪)을 벗고 조용히 죽었으니, 이는 진실로 의로운 죽음 이어늘 어찌 허망하다 이를 것인가.
성진의 죽음을 허망하다고 말하는 사람이 그 평소의 품행이 혹 어질었다 할지라도 그 죽음에 이르게 되면 벌레처럼 스러져버리고 말 것인데, 성진은 비록 먼 후세에라도 동포(東浦 : 성진의 옛 마을) 부근을 지나는 사람은 반드시 마을을 가리키며 김모(聲振)의 절의(節義)를 감탄할 것이다.
▶김찬규(金燦奎)
1866년(고종 3)~1929. 자는 사석(士碩)이며, 호는 석연(石然)이다. 휘돈(輝暾)의 아들로 도사(都事) 지선(止善)의 후손이다.
구한국의 후능참봉(厚陵參奉), 승정원비서승(承政院秘書丞)을 역임하였다. 왜적의 강압으로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분개하여 벼슬을 버렸다. 1910년 나라가 강탈되자 처자를 이끌고 만주에 건너가 동지들을 규합하여 독립운동을 폈다.
그는 길림성(吉林省)등지를 무대로 활약하다가, 동지들의 숙박(宿泊) 편의를 위하여 봉천 서탑가(奉天 西塔街)에 여관을 경영하면서, 무장(武裝)독립운동단체인 군정서(軍政署)․의용단(義勇團)의 요인으로 활약했다.
1922년 4월 국내에 잠입하여 군자금을 모집하다가 그해 6월 19일 문경 산양면 불암리(佛岩里)에서 왜경의 검색(檢索)에 걸려, 소지했던 권총․실탄․도화선 달린 뇌관(雷管)․군정서 발행의 독립군자금모집 위임장과 암호 등이 발각됨으로 체포되어, 징역 1년 6개월을 치르고(복역처 미상) 1924년 2월 6일에 형기를 마치고 풀려났다.
그 해 여름, 앞서 복역 중에 알게 된 손병선(孫秉善), 전부터 알던 신태식(申泰植), 신석원(申錫遠)등을 동지로 맞이하고, 신기균(申璣均), 박수환(朴秀煥), 송필원(宋弼源) 등을 군정서 국내운동원에 임명, 독립운동자금을 모집하는 등 활동했다. 1925년 5월, 대구경찰서에 검거되어 7년 징역에 선고 받고, 대구감옥에서 복역하다가 평양감옥으로 이송되었으며, 병보석으로 출옥되었다. (년 월 미상).
1929년 11월에 64세를 일기로 생을 마쳤다.
[참고] 『慶北高等省察要史』
건국포장(建國襃章)이 추서(追敍)되다.
▶김세영(金世榮)
1879년(고종 16)~1941. 자는 사현(士顯)이며, 호는 성암(誠庵)이다. 제상(濟相)의 아들로 도사(都事) 지선(止善)의 후손이다.
여남은 살에 사서를 다 읽고, 풍기 산법동(山法洞)에 옮겨 살면서, 그때 금양정사(金陽精舍)에서 강학 하는 이동정(李東亭) 문하에서 깊이 학문을 닦았다.
그는 집이 가난하여 1901년 나라에서 측량국(測量局)을 설치하여 기사 후보생을 선발하는데 뽑혀 수개월을 강습 받고 기사로 임용되었다.
얼마 아니하여, 그의 학식과 재능이 알려졌다. 어느 고관(高官)이 그 재식(才識)과 인품을 아깝게 여겨, 벼슬에 천거하고자, 「시속을 좇아 머리를 깎고 양복을 입으면, 그대 만 한 재기(才器)로, 출세가 순조로울 텐데 지금처럼 그런 일에나 종사해서야 되겠는가?」라고 하자, 그는 「아무리 출세가 좋다지만 얽매인 생활로 영화를 누리기보다는 가난하고 고생스러워도 뜻대로 살고 싶은 것이 저의 소망입니다」고 대답했다.
이미 그때는 관리들이 대개 단발에 양복차림이었으나 그는 상투를 보존하여 선비차림 그대로 복무하다가 곧 버리고 물러와 풍기 이동정 문하에서 학문탐구에 전심했다. 김사진(金思鎭)도 함께 공부했다.
유학(儒學)이 쇠잔함을 탄식하여, 그는 1904년 도학 김사진(金思鎭), 최병인(崔炳寅)과 함께 권씨의 반구정(伴鷗亭)에서 5개월 동안 『주자대전(朱子大全)』이며, 여러 성리서(性理書)를 강론하는 모임을 베풀기도 했다.
이듬해 김사진(金思鎭)과 함께 호서(湖西)-영남지방 일대와 동해안 여러 고을을 두루 밟아, 면우(俛宇) 곽종석(郭鐘錫), 의당(毅堂) 박세화(朴世和), 대계(大溪) 이승희 (李承熙), 교우(膠宇) 윤주하(尹冑夏), 지암(持庵) 김재경(金在敬)등 많은 석유(碩儒) 지사들을 사귀었다.
이른바 을사조약(乙巳條約)에 격앙(激昻)하여, 많은 선비들이 의기(義旗)를 들어 일어설 무렵, 그는 머름(遠岩), 무섬(水島)에 숨어, 수십 년에 걸쳐 후진을 양성하다가 만년에 귀대(龜坮)에서 마쳤다.
저서로 『성암집(誠庵集)』 2책이 있다.
서주(西洲) 김사진(金思鎭)이 행장을 짓고, 강도희(姜道熙)가 묘지(墓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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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金鍌)
1596년(선조 29)~1660년(현종 1). 자는 여정(汝精)이며, 호는 매학당(梅鶴堂)이다. 승사랑(承仕郞) 수선(首善)의 아들로 어머니는 진성 이씨 희열(希說)의 딸이다.
1625년(仁祖 3) 문과에 급제하다. 성균관학유(成均館學諭), 전적(典籍),형조좌랑(刑曹佐郞)을 거쳐 유곡찰방(幽谷察訪)을 지내고, 다시 형조좌랑을 거쳐 성균직강(成均直講)․병조좌랑(兵曹佐郞)을 지냈다.
1643년(인조 21) 모친상을 당하여 3년을 여묘(廬墓)하고 황해도사(黃海都事)에 복직하였다. 1649년에 예조좌랑(禮曹佐郞)을 거쳐 당진현감(唐津縣監)이 되었다가 사건으로 파직되고, 이어 청주통판(淸州通判)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나가지 않았다. 1656년(효종 7)에 흥해군수(興海郡守)에 부임하여 치적이 있었으나 얼마 안 되어 파직되어 돌아왔다.
이로부터 세상에 뜻이 없어 향리에 작은 서재를 얽고 글을 읽으며 임천(林泉)에 소요(逍遙)하여 여년을 자적(自適)했다.
그는 효성이 두터워 아버지 병이 위독하자 하늘에 빌며, 손가락을 잘라 주혈(注血) 했다. 그 아버지가 병석에서 수박을 찾으나, 철이 아니어서 구해드리지 못했음이 한스러워 평생토록 수박을 입에 대지 않았다. 내외의 여러 벼슬을 지냈으나, 어머니 곁을 떠나 있기를 민망히 여겨 항상 벼슬에 나가기를 탐탁히 여기지 않았다.
서울에서 벼슬에 있을 때 같은 고장 사람인 성이성(成以性)과 한 집에 있었는데, 어느 날 조정의 고관(高官)이 성이성을 만나러 오자, 성이성이 그(매학당)에게 그 고관을 만나보라고 권했으나, 그는 사양하고 만나지 않았다. 그의 진출에 유리할까하여 고관에게 소개하려 했던 성이성은 나그네가 돌아간 뒤에 「알아둘 만한 분인데…」라고, 오히려 그를 위해 아쉬워해 하면서도 그의 깨끗한 인품에 탄복했다고 한다.
그는 젊어서 과거에 올라, 그만한 지체에 문사(文詞)도 넉넉했건만, 30년을 벼슬에 있으면서 승진이 늦었으나, 그는 조금도 개의치 않고 한 결 같이 청렴 검소로 직책에 충실했다. 사람들은 그의 청간(淸簡)함과 삼가함이 지나치다고 기롱하기도 했다한다.
옥천(玉川) 조덕린(趙德鄰)이 묘명(墓銘)을 지었다.
▶김종명(金宗溟)
1625년(인조 3)~1650년(효종 1). 자는 호원(浩源)이며, 호는 월헌(月軒)이다. 선(鍌)의 아들이다. 고산리에서 태어났다. 『월헌유고(月軒遺稿)』한 책이 있다.
▶김행추(金行秋)
자는 시백(時伯)이며, 호는 사정(思亭)이다. 명릉(明陵) 기미년() 12월 23일 태어났다.
▶김휘덕(金輝德)
▶김동진 (金東鎭)
1867년(고종 4)~1952. 자는 국경(國卿)이며, 호는 정산(貞山)이다. 헌규(獻奎)의 아들이다. 준수한 의표(儀表)에 재주가 뛰어나, 5세에 취학, 7세에 경서(經書)의 뜻을 알았고, 글을 붙일 줄 알았으며, 열두 살에 순흥 백일장(白日場)에서 장원에 뽑히니, 모두 감탄하여 노성(老成)한 사람으로도 미치기 어렵다고 했다.
그는 이 무렵에 이미 문필에 자부를 가질만했으나, 사장(詞章)에 힘씀은 옛사람의 이른바 완물상지(玩物喪志)라, 학문의 외도임을 깨달아, 문장공부를 버리고, 오직 독서 궁리(窮理)로 위기(爲己) 실천의 학문에 분발했다.
1884년(고종 21) 가을에 닭실(酉谷) 이재(頣齊) 권연하(權璉夏)에게 가르침을 청하자, 이재는 서산(西山) 김흥락(金興洛)을 사사(師事)하도록 인도했다.
1890년(고종 27) 봄 그는 원근의 선비를 불러, 풍영대(風詠臺)에서 음약례(飮約禮)를 행하고 파하면서 한 계(稧)를 이루어 돈신계(敦信稧)라 이름 했다. 해마다 꽃피는 좋은 철이면 풍여대에서 이 예를 행했으니, 쇠퇴해가는 유운(儒運)을 붙들고 풍속을 두텁게 함에 보탬이 있고자 함이었다.
정산은 문도들에게 주자서(朱子書)를 읽게 하고 이르기를 「퇴계선생께서는 “주자서(朱子書)를 읽어 학문하는 방법을 알며, 이미 학문하는 방법을 알면 반드시 감발 흥기(感發興起) 하여, 다시 사서(四書)를 읽으면 성현의 말씀의 절절(節節)의 깊은 뜻이 알아질 것이라”했는데, 이는 초학이 마땅히 명념(銘念)할 바이지만, 요즘 선비들은 과거공부에 급급하여, 경중과 본말(本末)을 분간하지 못하니 한심스럽다.」고 개탄했다.
1892년(고종 29) 도산(陶山)의 용산(龍山) 이만인(李晩寅)을 찾자, 용산이 『대학(大學)』을 강론할 때, 용산이 먼저 한 대문을 읽은 다음 정산이 이어 읽게 했는데, 정산의 깊은 뜻과 정밀함에 용산이 찬상(讚賞)함을 마지 않았다.
그날 밤에 용산의 아들 중담(中聃)이 정산에게 자기 방으로 가기를 청하자, 용산이 「너는 이 사람을 너희들 또래로 여기느냐. 실상 나한데도 두려운 벗이니라.」고 했다.
1895년(고종 32) 7월, 왜적이 경복궁을 습격하여 민비(閔妃)를 죽이자, 나라의 원수를 갚고자 사방에서 격앙(激昻)한 선비들이 벌떼처럼 의기(義旗)를 들어 일어났는데, 순흥(順興)에서도 군사를 모집하면서 정산을 방문하여 의병에 관한 기무(機務)를 묻는 이가 있었다.
1899년(고종 36) 그는 연화동(蓮花洞)에 장토(庄土)를 마련하고 옮겨 살았으니, 거기는 자리가 외지고 수석이 아름다우며 사람들이 순박하여 그가 일찍부터 뜻을 두었던 것이었다.
1904년(고종 41) 주자(朱子)의 무이정사(武夷精舍)의 고사를 본받아, 매학당(梅鶴堂)에서 향약(鄕約)을 시행, 공자를 비롯한 오성(五聖)과 송(宋)나라 유현(儒賢)과 이퇴계의 위패를 베풀고 의식을 행할 때는 참여한 선비가 200여명에 이르렀다.
학문과 행덕으로 그의 성망(聲望)이 날로 더하자, 원근에서 모여드는 문도가 더욱 늘어, 1906년에는 마을 부노들이 집 옆에 관선재(觀善齋)를 지어 수용했고, 이듬해에는 따로 집 뒤 깊숙한 곳에 은구재(隱求齋)를 지어 고금(古今)의 서책을 간직하고 거처했다.
1908년(융희 2) 문도들과 함께 소수서원(紹修書院)에 거처했다. 본래 가르치는 이에게는 서원경비로 공궤(供饋)하게 되어 있었는데, 정산은 그의 몫을 가난한 생도들에게 돌리고 자기의 식량은 집에서 날라다가 충당했다.
그는 날마다 의관을 정제, 생도들을 데리고 문성공(文成公-안향(安珦) 사당에 참배하고 물러와, 강당(講堂) 현판의 학규(學規)며 잠훈(箴訓) 등을 읽게 하고, 서로 읍(揖)하기를 마치면, 정산은 생도들에게 한 자리의 훈화(訓話)를 베풀었다.
1910년(융희 4) 나라가 무너지자, 정산은 울분으로 병을 얻자 문을 닫고 모든 내방객을 사절했다.
이듬해 봄 정산이 순흥 옥에 갇혔다. 그때 떠도는 말이, “고종이 밀지(密旨)를 내려 국내 인물들을 효유하여 국권회복을 기도(企圖) 한다.” 하여, 왜적은 정산의 집을 수색하고 포박하여 가두었던 것이다.
왜적도 정산의 당당한 풍모에 질리고 말에 눌려, 그의 앞에서는 감히 말 한마디라도 함부로 하지 못하고 한 결 같이 깍듯했다. 십 여일 만에 풀렸다.
1914년 여름 다시 구금되어, 왜적이 아무리 수사했으나 혐의를 뒷받침할만한 실증이 없어 20여일 만에 풀려났다. 이때 정산이 다시 구금되었음을 듣고, 회남(晦南) 김교림(金敎林 - 효자, 參奉. 순흥 고을 갑부)이 밥 짓는 종을 시켜 정사의 끼니를 받들게 했는데, 반드시 정산이 상을 물린 뒤에야 교림이 수저를 들었다. 20여일을 한 결 같이 했으니, 그 정성과 의리에 모두 칭찬을 마지않았다.
1919년 3월-민족대표 33인의 독립선언이 있은데 이어, 유림(儒林)대표의 파리장서(巴里長書)운동이 있었으니, 곧 1차 세계 대전이 막 끝나고, 이 해 1월부터 파리(巴里)에서 열린 「세계평화회의」에 한국 유림대표 137인의 이름으로, 왜적의 악독한 침략성을 폭로, 조국의 광복을 국제정의(正義)에 호소하는 장문의 탄원서를 보냈던 것으로, 이를 「파리장서사건」이라 이르거니와, 유림대표 137인 가운데 정산이 열 번째로 서명했다.
이 사건으로 하여 정산은 동지들과 함께 성주(星州) 감옥에 갇혔는데, 감옥 속에서도 정산은 평소와 마찬가지로 의관을 갖추고 종일토록 단정히 앉아 있었다. 왜경(倭警)이 그의 갓을 벗겨버리려 했으나, 정산은 의연(毅然)한 기색으로 소리를 가다듬어 「머리를 자를지언정 갓은 벗기지 못할 것이니라.」고 꾸짖자 저들도 굽히지 못 할 줄을 알았다.
정산은 이때 40일을 옥중에 있었는데, 항상 관대(冠帶)를 갖추고 꿇어앉아, 경서(經書)며 예학(禮學)을 강론하여, 죄수 같지를 않았으니, 옥을 다스리는 자들도 처음 있는 일이라고 했다.
1924년 정월에는 제천(堤川) 경찰에 연행되어 10여일을 조사받기도 했다.
그러나 정산은 구국(救國)의 지사이기보다, 탐구(探究)와 실천으로 후진양성을 기임(己任)으로 삼아 쇠퇴해진 유학(儒學)을 붙들어 일으키고, 경박 퇴폐해가는 인심과 윤기(倫紀)를 바로잡기에 생애를 일관한 유학자요 교육가라 하여 마땅할 것이다.
그는 퇴계로부터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서산(西山) 김흥락(金興洛)으로 이어 내린 영남의 도학을 충실히 계승한 독실한 학자로서, 선유(先儒)들이 그러했듯이 「경(敬)」을 생활의 바탕으로 하여, 자아완성-사회정화(社會淨化)를 궁극의 목표요 사명으로 삼아 정진하기를 평생토록 한 결 같이 힘써왔음이 사실이다.
그는 근엄하면서도 온화하여, 사람을 대함에 귀천을 가림이 없었으며, 착한 말이면 흉금을 비워 받아들이고, 선하지 못한 말이면 그 옳지 못함을 순순히 깨우쳐 알게 했다. 사치를 싫어하여 거처와 음식, 의복이며 일체 생활이 극히 검소했으며 가난을 걱정하지 않았다. 겨우 끼니를 이을만한 가세였으나 마땅히 써야할 일에는 천금을 아끼지 않았으며, 남의 절박한 사정을 보면 힘껏 도왔다.
1903년(고종 40) 보리흉년을 만나, 굶주린 주검이 길에 널리는 처참한 상황이었다. 정산은 박토의 농사로, 자급하기에도 넉넉지 못한 형세였으나, 광을 열어 절박한 처지의 친척과 이웃에 고루 베풀었다. 측근에서 그를 딱하게 여겨, 말렸으나, 그는 「눈앞의 참담한 경상을 어찌 앉아서 보겠는가. 가진 것이 없어 널리 돕지 못함이 안타까울 뿐이라」고 했다.
1896년(고종 36) 족조(族祖) 휘정(輝挺)이 순흥부(順興府) 의병장으로, 토적(土賊) 한(韓)모와 알력이 있었는데, 한모가 관군(官軍)을 부추겨, 대신으로 휘정의 아들 건규(建奎)를 붙잡아다가 풍기에서 죽였다. 정산이 건규의 효성을 가상히 여겨 그 시신을 거두어 장사했다.
1904년(고종 41), 묵은 곡식이 거의 떨어지고 햇곡식은 아직 마치지 못한 초가을이었다. 어느 날 닭실(酉谷)에 사는 문인 권동섭(權東燮)이 찾아와, 며칠 지체하다가 물러가면서 「이 근처에 저의 토지가 있는데, 묵은 곡식이 아직 남아 있으니, 손님접대에 보태시도록 얼마쯤 드리겠습니다.」라고 하니, 정산은 「아닐세. 부모님이 계신데 아뢰지도 않고 어떻게 임의로 그럴 수 있겠는가.」하고 받지 않았다.
86세로 마치니, 장례에 모인 조객(吊客)이 천 여 명에 이르렀다.
저서로 『정산집(貞山集)』 원집 책, 속집 세 책이 있다.
김회진(金晦鎭)이 행장(行狀)을, 유동시(柳東蓍)가 갈명(碣銘)을, 이회춘(李會春)이 묘지(墓誌)를 지었다.
그가 살던 「도탄 - 현 부석면 도탄리(浮石面 上石里)」에는 그의 구택이며, 강학하던 도강서당(道講書堂)등이 있다.
▶김설(金설)
1906년~1985년. 자는 군설(君卨)이며, 호는 심농(心聾)이다. 정산(貞山)의 아들이다. 아버지의 학행을 계승하여 후진 양성에 전심하였으며, 많은 유고가 있다. 후학들이 심농학계(心聾學稧)를 맺고 비를 세웠다. 순흥향교 전교를 역임하였다.
▶김제선(金濟璿)
1911년~ 1977년. 자는 순재(舜在)이며, 호는 춘묘(春苗)이다. 정산 김동진의 조카이다. 정산의 문하에서 한학을 수학하였다. 초대 안동문화방송 사장을 역임하였으며, 순흥향교 전교를 역임하였다.
물야면 수식리 참봉공파.
응방산은 봉화읍 서북쪽에서 가장 높은 산이고, 가장 넓은 산이다. 해저마을은 응방산 동남쪽에 위치한다. 수식마을은 응방산 서쪽에 위치한다. 선성 김씨가 수식에 처음 이거한 사람은 문절공 담(淡)의 증손인 부정공(副正公) 사희(士熙)의 둘째인 참봉(參奉) 거(勮)이다. 이후 한천정사(寒泉精舍)와 행계서원(杏溪書院)이 창건되고, 명문의 후손들로서 일파를 이루었다.
▶김거(金勮)
1557년(명종 12)~1629년(인조 7). 자는 시민(時敏)이다. 백암(栢巖) 늑(玏)의 종제이며, 문절공 담의 현손이다. 문단리(文丹里) 집에서 출생하여, 수식으로 이거하였다. 1589년(선조 22)에 진사시에 합격하여 선공감참봉(繕工監參奉)을 역임하였다.
▶김이선(金履善)
1590년(선조 23)~1664년(현종 5). 자는 이길(而吉)이며, 호는 한천(寒泉)이다. 선공감참봉(繕工監參奉) 거(勮)의 아들이다. 1633년(인조 11)에 생원시에 합격하였으나, 성균관 학생으로 문묘에 아무나 많이 들이는 것의 폐를 논하는 상소를 올렸다. 조정의 이해관계에 따라 성인의 표창이 이루어지는 것을 비판하였다. 그 후 그는 세간의 이해관계를 떠나 출사를 단념하고 한천정사를 짓고 후진양성에 힘쓰며, 임천에서 자적하였다.
▶김강(金鋼)
1609년(광해군 1)~1669년(현종 10). 자는 치정(致精)이며, 호는 오수(迂叟)이다. 생원 이선(履善)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사복재(思復齋) 권정(權定)의 후손인 참의 윤검(允儉)의 따님이다. 1635년(인조 12)에 생원이 되었다. 그는 성균관 유생으로 병자호란을 맞았다. 재종형과 함께 5성(五聖)의 위판을 남한산성까지 봉안함으로써 명망을 얻었다. 강직하고 어떤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는 성품을 가졌다. 영남유생을 대표한 소수이기도 한 덕망과 학행이 높았던 당세의 학자였다. 향년은 61세이고, 배위는 경주손씨이다. 『오수실기(迂叟實記)』가 전하며, 서문은 이재(頤齋) 권연하(權璉夏)가 지었으며, 행장은 하당(荷塘) 권두인(權斗寅)이 짓다. 행계서원에 제향되다.
▶김랑(金鋃)
1643년(인조 21)~1719년(숙종 45). 자는 진원(振遠)이며, 호는 사인(思忍)이다. 생원 강(鋼)의 아우이다. 천성이 효성스러워 아버지의 병에 손가락을 잘라 주혈하여 소생하게 하였으며, 어머니의 병에도 손가락을 두 번이나 잘라 이지효자(二指孝子)라 일컬었다. 만년에 사인와(思忍窩)를 짓고, 참을인(忍) 자를 생활의 부호로 삼고 세업에 힘쓰며 자적하였다.
북벽(北壁) 김홍제(金弘濟)의 사인와운(思忍窩韻)이 있으며, 정산(貞山) 김동진(金東鎭)의 기문이 있다.
▶김홍제(金弘濟)
1661년(현종 2)~1737년(영조 13). 자는 도겸이며, 호는 북벽(北壁)이다. 아버지는 굉(鍠)으로 문절공 담의 7세손이다. 척당유고(倜黨有高)한 학자로서 출사 할 것을 단념하고 은거하여 뜻을 구하며, 학업에 정진하여 사림의 사표로서 명망이 높았다. 저서로 『북벽문집(北壁文集)』이 있으며, 두암(斗庵) 김약련(金若鍊)이 서문을 짓고, 이재(頤齋) 권연하(權璉夏)가 행장을 짓다. 백부인 강(鋼)과 더불어 행계서원에 제향되다.
이글은 영주시사 인물편에 실릴 글입니다. 내용이 잘못 되었거나 빠진부분이 있으면 꼬리글을 남겨주십시오.
* 실린 인물은 생진및 문과, 효자, 열부, 유행(옛 문헌에 실린분), 증직, 독립운동가 등 족보상 유고가 있다고 표기된 분, 또한 근현대 인물로 돌아가신분을 원칙으로하고 시장, 군수, 서장, 국회의원, 학교장 등 다양한 인물들입니다. 인물편에 실릴 인물들은 영주에서 출생했거나 영주에 살았거나 했던분들을 기준으로 삼았습니다. 또 인물 한 분에 원고 최대 분량은 A4용지 3매로 정했습니다. 선조분들 중에 빠진 분들이 있으면 연락바랍니다. 이 원고는 23일 시편위 교정,감수위원회에서 1차 교정을 볼 원고입니다. 최종본이 아님을 알려 드립니다. 집필자는 조현두 선생입니다. 많은 관심을 부탁드립니다.
(영주시사편찬위원회 교정,감수위원/ 김태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