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조주의보 내린 사이 외 4편
조숙진
시간의 틈으로 손을 들이밀어
가까스로 그녀를 끄집어냈다
쓸까 말까 망설이다 집어 든 모자를 눌러 쓰고
겨울의 끝이 허술한 아파트 출입구에서 만났다
웃음기는 때맞춰 부는 바람에 날아가고
계절의 경계선을 밟으며 산 아래 산책로에 들어섰다
잡풀이 막아버린 우리의 숲길을 찾느라
한바탕 긴가민가한 암호를 찍어댔다
너에겐 너의 길이 나고 나에겐 나의 길이 생겼다
갈팡질팡하는 계절에 마른 손 흔드는 떡갈나무가 있었다
처음으로 같은 소리를 냈다 아니, 자동적인 날숨 같은
아직 겨울이었다
엄마가 돌아가셨어
듣고 싶은 노래는 지지직거리고
건네받은 비스켓에 크림은 없었다
오르막 도로를 기어오르는 차들의 기합 소리가
예리하게 허공을 찌르고는 사라졌다
얼어있는 철재 그루터기에 앉자 소름이 퍼졌다
많은 말이 귓바퀴를 돌다 말고 날아가 버렸다
다음에 또 만나
떡갈나무 마른 잎이 발밑에서
바스락 부서졌다
초록의 힘
비 온 뒤 땅은
생명이 트기 직전의 부풀어 오른 알
겨울을 갈아엎는 연장의 끝은
알껍데기를 쪼는 어미 새의 부리죠
코끝을 더듬어 오는 습습한 기운이
모두가 기다리는 그 순간이라 믿습니다
긴 잠에서 깨어나 기지개를 켜는 초록의 기미는
누구의 손길로 시작되는 것일까요
지문에 묻은 흙으로 싹을 틔우느라 바쁘고
상록의 숲에서 뽑아낸 초록 색소를 입힌 손은
촉촉한 밥 한 공기 채워 내듯 흙을 고릅니다
머릿수건 정수리의 색소가
하얀 구름이 되어 날아간다고 해도
부지런히 떫고 쓴맛 부려서 섞고 발효시켜
든든한 초록의 먹이가 되어 주고 싶습니다
땅심 없는 초록은 있을 수 없기에
땅은 초록의 본체지요
땅을 딛고 일어난 초록은
겉과 속을 완벽하게 뒤집는 큰 그림을 그립니다
초록으로 태어나서
초록으로 입안을 적시며
제철의 색으로 두둑이 배를 채웁니다
초록의 봉기는 무서운 속도로 집 앞까지 왔습니다
과연, 모성의 힘입니다
벚꽃 장날
어젯밤 켜 놓은 별빛이 출출함에 맛집을 기웃거리는 한낮에도 여전히 반짝이는 섬진강을 건넜습니다 하얀 물빛이 더없이 눈부십니다 한 번 들어서면 앞만 보고 달리게 되는 섬진강변은 장날이었습니다
갑자기 나타났다 사라지는 도깨비처럼 하얗게 이어붙인 천막 아래 산과 들 강과 길이 덩달아 들뜨고 덩달아 새 피가 도는 듯했습니다 마주 보면 헤픈 함박웃음이 팝콘처럼 넘치고 크기를 가늠할 수 없이 벙근 벚꽃 무리 박하사탕 하나 가슴에 넣은 듯 하얘졌습니다
비칠 듯 말 듯 봉지봉지 마다 붙인 이름
구름 꽃과 인사하고
구름 꽃으로 건배하고
구름 꽃과 맘껏 떠들어댔지요
욕심을 무너뜨린 값으로 내미는 너의 손닿을락 말락 우리는 밀당이 즐거웠습니다
바람의 재촉을 듣는 둥 마는 둥 해도 벌써 어딘가에선 파장의 낌새가 보였습니다 길가에는 일 년 만에 만난 반가움이 아쉬움으로 내려 눈처럼 쌓여 있었지만 툭, 얼굴에 부딪히는 그의 좋은 냄새는 싱그러웠습니다
작년 이맘때, 마지막 장날 구경 나섰던 두 분의 뒷모습이 벚꽃에 가려져 뽀옛습니
문신
조숙진
건너편 도로에 확 눈에 들어오는 박스 차 한 대
연두색 형광물감을 두르고 과감하게 사선으로 한 획 삐침했더군
검은색 도도한 어깨띠 위아래로 꼬마 군병들이 절하고 있는 듯했어
자랑하고 싶은 어지러운 문신 같은 거였어
언뜻
하나뿐인 그의 인생에서
숨기고 싶은 문신은 무얼까 묻고 싶었지
봄의 그림자에 덮인 채
웃음 뒤에 가려진 채
저 자동차의 문신 밑에 가려진 상처는 어떤 것일지
잊혀지는 어두운 삶의 궤적은 없거든
계절이 바뀌고 해가 바뀌면
계절에 뿌리를 내리고 꽃을 피우는 산야처럼
새롭게 새롭게 세월을 이어 가지
부러진 가지는 치료받고 긁힌 상처는 아물잖아
누군가의 삶에 박힌 불행의 문신은
맨발을 덮은 군화자국으로
마음에 쏜 말의 총알로
뼈에 새겨진 손가락 총 자국 그대로
옷자락에 가려지고 땅속에 묻혔어도
빛으로 한 발짝 나오고 싶은 간절함이 자라는 건 가봐
계절이 바뀌어도
해가 바뀌어도
결코
지울 수 없는 대물림의 표식이야
혀끝의 모의
조숙진
입에서 불을 뿜는 동물을 보았습니다
당신의 바로 곁에도 보입니다
물 쏘는 소방호스처럼 입이 향하는 곳에
불꽃이 입니다
기름이 튀 듯하고 물감이 번지듯 합니다
위태로운 외줄 타기에서 추락한
노란 띠로 묶인 집
파란 세상을 꿈꾸는 아기새들의 솜털은 보송보송한데
밧줄을 잡느라 허둥대는 가장의 몸부림이
쇠도 녹이는 우리들의 혀의 끝에서
한참을 타올랐어요
그냥 아픈 배도 가르는 세상이죠
세상의 매운 입김은 어디에도 닿아 있네요
잔뜩 숨을 부풀린 파도 한 채 몰아붙이면
모래 속에 부유하는 불쏘시개들
잦아들다가도 걷잡을 수가 없는 불바다로 다시 핍니다
기적처럼 살아남은 인생들이
구름으로 높이 띄워 올린 냉랭함은
한껏 부풀었다 손대면 푹 꺼지는 빵이에요
두 가지 색의 혀를 날름거리는
새 품종의 인류가 우리 안에서
태어나는 순간이죠
호흡 같은 말의 씨를 뱉으려다
꿀꺽 삼킵니다
당선 소감
조숙진
창문 밖 에어컨 실외기 위로 빗방울이 듣습니다. 얇은 철판에 떨어지는 빗소리, 빗방울은 서서히 날다가 나뭇잎에 꽃잎에 사뿐히 들어 만남의 설렘을 풀어 놓습니다. 전화를 받은 이후 한동안 시간을 천천히 누렸습니다.
삶의 결을 거스르는 것들로 자꾸 내 안의 산속을 헤매기 시작했습니다. 그만큼 자신을 챙기는 일이 갈급했습니다. 시를 읽는다는 것은, 쓴다는 것은 새로운 기회였고 용기였습니다. 본능처럼 자연스럽게 스며들었습니다. 행복한 배설을 느끼기도 하고 마음껏 누리는 사유의 시간이 달콤했습니다. 저를 찾아가는 길인데 뜻밖에 세상의 다른 출구가 보였습니다.
길에서 만난 꽃소식이 있었습니다. 산책길, 공원길, 산길 여기저기에 꽃소식이 저를 기다렸다는 듯이 눈앞에 있었습니다. 저도 덩달아 꽃을 피워보고 싶었습니다. 저를 반겨주던 한 꽃은 제게 꽃소식을 물었습니다. 신병은 시인님, 꽃이 되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길이 되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도 자신을 찾는 누군가에게 의미가 되는 길가의 꽃이길 바랍니다. 향기가 있어 번지고 스며드는 꽃이면 좋겠습니다.
눈에 넣고 싶은 것들이 많아서인지 그만큼 자주 눈이 아팠고 진득하게 앉아 꽃을 보고 싶은데 방석은 얇아졌습니다. 저의 습작들은 담금질의 진통을 견뎌내야 했습니다. 무지를 깨닫는 순간 갈피를 잡기 힘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조바심이 난 길에 ‘애지’는 이정표가 되었습니다.
작년 봄, 벚꽃 사이로 떠나가신 부모님이 생각납니다. 살아 계셨더라면 아버지는 당신의 경계 밖까지 제 이름을 손잡고 다니셨을 것입니다. 보기 드문 미소를 지으셨을 어머니 얼굴도 떠오릅니다. 남편의 적극적인 격려와 솔직한 표현을 신뢰합니다. 가끔 보는 엄마의 글에 환호와 인정으로 답글이 되어주는 가족에게 감사합니다. 문학의 세계로 가는 첫 동지가 되어준 성미영 시인님 감사합니다. 이름 모른 꽃으로 오셔서 맑은 시심의 경지를 보여 주시는 유동애 시인님 감사합니다. 제가 기웃거렸던 길가의 꽃인 여러 시집의 시인님들 감사합니다. 함께 떠다니는 것이 삶의 일부분이 된 행성101호 문우들이 있어 감사합니다. 영광을 안겨 주신 반경환 작가님과 심사위원님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첫댓글 축하합니다.
축하드립니다 조숙진 시인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