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 승광재에서 황손을 만나다
전선재
송파지역 동기생 모임인 ‘솔모임’에서 전주지역을 여행했다. 밤새도록 내린 비가 아침까지 이어지고 있다. 지금은 추수기라 비가 오면 수확에 차질이 생길 텐데 라는 걱정과 간만에 부부동반으로 하는 여행에 날씨가 협조해줘야 좋은 여행이 될 수 있겠다는 기대를 안은 채 집을 나섰다. 이번 여행은 가을의 정취를 즐기며 호남지방의 역사, 문화를 탐방하고 맛 기행을 겸한 다목적이다.
오랜만에 하는 장거리 여행인데다가 궂은 날씨는 시야를 흐리고 앞서가는 차량이 뿜어내는 물보라가 운전하는데 신경을 쓰게 한다. 정안 휴게소에서 달달한 커피 한 잔에 이곳 특산물인 군밤을 까먹으며 정신을 가다듬었다. 다행히 전주에 도착하면서 비는 멈추고 간간이 햇살이 비치기도 하였다.
전주의 명물인 비빔밥을 먹기 위해 고궁 본점을 찾았다. 역시 명불허전임을 입증하는 본고장의 맛이다. 전국의 각 지역마다 전주 비빔밥이 있으나 오늘 비로서 원조의 참맛을 본 것 같다.
오찬 후 숙소인 승광재에 짐을 풀어 놓은 후에 관광을 위한 가벼운 차림으로 전환하였다. 한옥으로 조성된 거리는 깨끗하고 질서가 있어 보였으며, 한복으로 차려입은 젊은 남녀들이 눈에 띄는 등 과거와 현대가 한데 어우러진 모습이 보기 좋았다.
문화 해설사의 안내를 받으며 ‘태조 이성계 투어’에 들어갔다. 오목대는 이성계가 남원 황산에서 왜구를 물리치고 개경으로 돌아가던 길에 승전잔치를 베풀었던 곳이다. 이성계는 여기서 한 고조 유방이 불렀다는 대풍가를 부르고 개혁세력의 선두주자로서 새로운 왕조를 세울 것을 처음으로 피력한다. 이목대는 이성계의 4대조 할아버지인 목조 이안사의 출생지라고 전해지는 곳이다. 전주 이 씨들은 이안사 때까지 줄곳 이곳에서 살다가 함경도로 이사했다고 전한다.
한옥마을로 내려와 ‘역사투어’에 들어갔다. 경기전(慶基殿)은 태조 이성계의 어진을 봉안하고 제사를 지내기 위하여 태종10년에 지어진 건물로 광해군 6년에 중건되었다.
경기전 입구에는 '하마비'라는 비석 하나가 있다. 조선 태조의 어진이 봉안된 곳이기에 경기전을 지나갈 때는 누구든지 말에서 내려서 태조에게 예를 갖추어야 한다. 즉, '계급의 높고 낮음, 신분의 귀천을 떠나 모두 말에서 내리고, 잡인들의 출입을 금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평소에 무심코 지나쳤을 '하마비', 이렇게 역사적 배경을 알고 다시 보니 새롭게 느껴진다.
태조 어진은 평시 집무복인 익선관과 청룡포 차림의 전신상이다. 태조는 키가 크고 몸이 곧바르며 귀가 아주 컸다고 하는데 어진은 실제 크기와 동일하게 그린다. 태조의 어진이 청룡포인 것은 새로 태어난 아이의 몽고반점이 푸른색으로 태초를 의미하듯 조선을 건국한 최초의 왕을 의미한다.
정전의 추녀막에는 한 쌍의 목각 거북이 붙어 있다. 거북은 물에 사는 장수를 상징하는 짐승으로 목조건물의 취약한 화마를 제압하고 오래 지키고 견디라는 뜻이란다. 경기전내의 정전, 조경묘, 사고 등 중요 건물 주변에는 대나무가 무더기로 자라고 있었다. 대나무 줄기는 마디로 되어있고 공간이 비어 있으므로 화재로 열을 받으면 팽창하여 터짐으로 조기 경보수단으로 활용한 것이다. 자연의 특성을 슬기롭게 활용한 선조들의 지혜를 엿볼 수 있는 단면이다.
승광재(承光齋)는 대원군의 증손자이자, 대한제국을 선포(1897년)하신 고종 황제와 명성황후의 직계 손자이신 황손 이석님이 사시는 곳이다. 승광재는 대한제국의 연호인 광무(光武)에서 빛 광(光)자와 뜻을 이어간다는 이을 승(承)자를 따서 ‘고종황제의 뜻을 이어 가는 곳’이라는 의미에서 지어진 이름이다. 전주는 조선 황실의 발상지이자 태조 고황제 선친들의 본향으로써, 2003년에 전주시장과 전주시민들의 의지에 따라 황손 이석님을 모시기로 하고 2004년 이곳에 입주하게 되었다.
이제는 이석님께서 황실에 대한 전통, 문화, 역사에 대한 강연을 하시는 등 다양하고 특별한 문화공간으로 탈바꿈하고 있다. 우리에게 '비둘기 집'이란 노래로 더 친근한 가수이자 황손인 이석 씨의 숨결이 살아 있는 곳이다.
툇마루에 앉아 가을의 빗소리를 들으며 전주에서의 첫날,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노년의 한 사람이 대문을 열고 들어섰다. 어두운 조명으로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보무도 당당하게 우리 앞에 나타난 그 분은 분명 황손 이석님이셨다. 전주가 고향이고 여러 번 뵌 적이 있다는 동기 J가 제일 먼저 알아보고 인사를 드리고 이어서 나머지 사람들도 인사를 드렸다. 이석님은 손수 손을 잡아 주시고 저희들을 따뜻하게 맞아주셨다.
우리가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현역에서 오랫동안 국가안보를 위해 열심히 복무하다 이제는 전역하여 전주지역의 역사탐방을 왔다고 하니, 안심도 되고 후배들과 이야기를 하고 싶었지 않나 생각된다. 주고받는 대화 속에 이석님께서 나서 걸어온 발자취가 하나 둘씩 드러나기 시작했다.
대한제국이 아직까지 건재하거나 대한민국이 왕정국가였다면 황제가 될 수도 있던 분이기에 그 분과 지척에서 소통한다는 게 황송하기도 하였다. 이런 분은 살아온 길도 남다르지 않았겠나 싶었으나 예상과는 너무나 빗나간 전혀 다른 삶을 살아 오셨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한제국이 일본과 강제로 병탄조약을 맺고 일본제국의 식민지가 되면서 왕실도 무너지고 산산조각이 났다. 누구하나 돌보거나 지원해주는 자 없었으니 제 각기 흩어져 서민의 삶, 어쩌면 서민보다 못한 삶을 영위하였는지도 모른다.
이석님은 한때는 스페인 왕비와 결혼하겠다는 꿈을 가지고 외대에서 서반어를 전공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삶이 여의치 않자 가수가 되어 미8군 무대에서 연예인 생활을 하고, 미국으로 망명가서는 흑인촌에서 살면서 스무번이나 자살을 시도하기도 하였다 하니 그 삶이 어떠했을까 짐작이 간다.
그러는 가운데도 월남전에 참가하여 총상을 입고 지금은 국가유공자로의 삶을 살아가고 있고, 본향인 전주에 와서는 대학강사로 역사, 문화에 대한 강연과 조선 황실의 전통과 뜻을 이어가고 계신다.
그 분의 춘추가 83세시다. 지금은 도와주는 여자 분(마마님, 65세)이 계셔 어느 때 보다도 안정된 삶을 살고 있다고 하시니 그나마 다행이라 생각하며 오래오래 사셨으면 좋겠다. 이제까지의 삶의 여정을 곧 책으로 출간한단다. 앞으로 남은 여정을 어려움 없이 순탄하게 사시고 후손들에게 황손다운 삶의 참 모습을 보여주었으면 좋겠다. 국가에서도 황실과 그 후손들에 대해서는 적극적인 지원과 함께 그에 상응하는 예우를 갖추어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마마님의 제안으로 특별히 ‘비둘기 집’ 등 두곡을 같이 합창하였다. 이석님의 목소리는 아직도 건재하시고 말씀하실 때의 모습은 힘이 넘치고 박력이 있었다. 마마님께서는 기념사진을 찍게 배려해 주셨다. 황손을 중심으로 전체 사진, 남자분들, 여자분들 그리고 부부별로 찍는데 일일이 모델이 되어 주셨다.
우리 모두는 황손과의 만남으로 평생 잊지 못할 추억의 시간 그리고 역사적인 시간을 가졌으며, 꺼져가는 왕조의 불씨를 품에 안고 살리려는 황손의 몸부림에서 남다른감회와 고뇌를 느끼는 시간이 되었다.
밤새도록 내리는 비는 낙수물 되어 바닥에 떨어지고, 바람이 불때마다 울어대는 풍경소리가 잠을 설치게 하는 승광재의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