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월 이십삼일의 강호(江湖)
무정태공(無情太公).
그는 늘 죽간(竹竿)을 철목하(鐵木河)에 드리운다.
그는 말수가 거의 없는 사람이었다. 그는 말하는 것조차 낭비라고 여기는 듯 늘 침묵하며 하루 일과를 보낸다.
백무엽이 이제껏 그와 말을 나눈 것은 단 한 번, 쾌활화림에 발을 들여놓을 때의 일이었다.
당시, 백무엽은 인문의 비밀장소에서 백 일 연무(百日練武)를 마친 직후였다.
인문의 제일좌는 그에게 단 한 가지를 명했다. 그것은 바로 쾌활화림에 들어가 몸을 의지하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백무엽은 명에 따라 쾌활화림의 서기로 들어갔고, 오늘까지 이중생활을 하며 지내 온 것이다.
백무엽은 발목까지 빠지는 눈밭을 헤치며 철목하를 따라 걸었다.
천지간은 온통 백색의 눈뿐이다.
'어떻게든 천진부의 쾌활화림에 와야 했었다. 그 날도 꼭 오늘같이 눈이 많이 오는 날이었지.'
'저 곳이다.'
백무엽은 철목하 기슭을 따라가다가 입술을 질끈 물었다.
강물 흘러가는 소리가 벼락치듯 들려 온다.
물이 휘어지고 있는 곳, 한 칸의 모옥(茅屋)이 곧 쓰러질 듯 허름하게 세워져 있었다.
그 위, 하늘은 잿빛이었다.
눈은 소리를 내지 않고 떨어져 내렸다.
<천망헌(天望軒)>
Pꠑ한 칸 모옥에는 그러한 현판이 걸려 있었다.
철목하를 굽어보는 위치에 세워져 있는 천망헌, 그 곳에는 단 세 가지가 있다.
하나의 죽간(竹竿),
하나의 다로(茶爐),
하나의 죽립(竹笠).
천망헌의 주인이 무정태공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백무엽뿐이었다.
무정태공은 진실된 정체가 밝혀지지 않는 거부(巨富)로, 금적산에 비해 한결 더 검소하게 살고 있었다.
적어도 금적산은 세 끼 밥은 먹는다.
하지만 무정태공은 밥도 먹지 않았다.
-손을 놀리는 자는 바보다! 그러나 더 바보는 모아 둔 재물을 축내는 자이다. 자기 손에 들어온 재물은 단 일 문(文)이라도 써서는 아니 된다. 노부가 강에서 낚시를 하는 이유는 그 때문이다. 적어도 물고기는 낚을 수 있을 테니까! 허기를 메울……!
무정태공, 그는 낚시와 차(茶)와 강(江)을 벗삼아 살고 있다.
백무엽은 어깨 위에 눈을 맞으며 천망헌 쪽으로 걸어갔다.
'과연 벽진자(碧眞子)라는 사람일까? 그는 마혼십가(魔魂十家)의 혈화삼에게 죽었다고 소문난 사람인데…….'
백무엽은 느릿느릿 띠집 쪽으로 걸어갔다.
눈이 어깨 위에 수북이 쌓였으며, 백무엽의 눈에서는 전에 없던 자망(紫望)이 아련히 흐르고 있었다.
그것은 그가 천년금선사(千年金線蛇)와 화갈내단(火蝎內丹)을 취했기 때문에 생기는 진원정광(眞元精光)이었다.
일 주야 정도 운기행공하게 된다면 그 빛은 안으로 갈무리되어질 것이다.
휘익-!
한 줄기 바람이 불면서, 백무엽의 머리카락이 흔들렸다.
아아, 천(天)이여!
그 누가 백무엽의 얼굴을 하늘이라 하지 않겠는가!
꽤나 염세적으로 보이는 얼굴이다. 퇴폐적인 아름다움과, 그 모든 아름다움을 비웃을 냉소를 가진 입매.
백무엽은 또다시 걸음을 내딛었다.
천망헌에 직접 가 보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 언제고 찾을 일이 있다면 천망헌에 오게! 물론, 그런 일은 좀처럼 없을 것이네. 만약 그런 일이 벌어지게 된다면, 그것은 꽤나 심각한 일의 시작이 될 걸세!
무정태공은 자신이 천망헌에 있다는 것을 비밀스레 이야기하며 그런 미묘한 말을 했었다.
'그마저 무림고수라니… 아아, 인문에 있는 사람들도 모르고 있는 처지인데… 또 다른 세력이란 말인가?'
그 때 아주 미묘한 느낌이 뒤쪽에서부터 전해졌다.
바람결에 묻어 전해 오는 실낱 같은 기운이었으나, 그에게는 너무도 강한 기운으로 다가왔다.
'누군가 나를 쏘아보고 있다.'
백무엽은 남이 갖고 있지 못한 특이한 청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것은 인문이 준 것이 아니라, 본래부터 지니고 있던 능력이었다.
'호흡을 바람 소리에 감추었고, 막 쌓이는 눈더미를 골라 서 있다. 그래서 눈 오는 소리 가운데, 심장 뛰는 소리도 감춰졌다.'
백무엽은 누군가 자신을 보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일월(一月) 이십삼 일(二十三日)이다, 오늘은!
휘리리리리- 링-!
매서운 북서풍(北西風)이 몰아닥치며 철목하가 눈발에 휘감겼다.
그러나 백무엽은 누군가가 자신을 훔쳐보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남을 알아보는 인지력(忍知力), 이것은 인문 사람들이 내게 전해 준 천 종 절기(千種絶技)에 있는 것이 아니다.'
백무엽은 누군가 있다는 것을 그냥 알 수 있었다.
그는 누구일까?
대체 왜 그를 숨어 보고 있을까?
'나는 인문 사람들도 알지 못하는 능력을 하나 갖고 있다. 그것은… 바로 야수(野獸)와 같이 뛰어난 후각이다.'
후각이란 바로 냄새를 맡는 능력이었다.
백무엽은 야릇한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십오 장 뒤쪽 갈대숲 가운데에서 흘러 나오는 한 가닥 내음.
그것은 바로 꽃 내음이었다. 너무나도 아련하고 신비한 화향.
'두견화(杜鵑花)의 내음이다.'
백무엽은 뒤돌아보고 싶은 마음을 일으켰다. 그러나 그는 모르는 척 계속 걸어가는 것을 택했다.
-제십좌! 너는 인문으로 인해 목숨을 얻었다. 다시 말해, 너는 눈 속에서 죽었어야 했다. 네가 기억하지 못하나 너는 아홉 군데 상처를 입은 채 죽어 가고 있었다.
-너는 인문에 큰 빚을 지고 있다. 다시 말하자면, 너는 인문이 살수(殺手) 백 명을 기르기 위해 모은 영약(靈藥)을 모두 다 먹고 나서야 살아났다는 것이다. 네게 공치사하자는 것은 아니다! 다만, 네게 우리를 위해 살행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인문에는 법이 많다. 그 중 가장 지엄한 것은 인문에 대한 호기심(好奇心)을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너는 제십좌(第十座) 무화령(無花令)으로 불리리라. 너는 백 일 밀봉(百日密封) 수련을 받을 것이고, 능력에 따른 일을 처리하게 될 것이다.
-모든 사람이 바쁘다. 너를 오래 가르칠 수는 없다. 연공관에서 전수하지 않은 것은 추후에 가르치겠다.
아련한 기억들이 편린처럼 떠오른다.
'나는… 과거를 잊었다. 내가 기억하는 것은 아주 어두운 곳에서 태아(胎兒) 마냥 깨어났다는 사실뿐이다.'
백무엽은 잠시 상념에 젖어들었다. 그가 기억하는 마지막은 어둠이었다. 짙은 장막을 가린 듯한 어둠 속에서 그는 깨어났으며, 그는 그 곳에서 백 일 동안 누워 있었다.
그리고 목소리들이 그에게 절기라는 것을 전수했었다.
백무엽이라는 이름도 그 때 정해진 이름이었다.
백무엽은 당시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바보였었다. 다시 말해, 그가 갖고 있는 기억은 오직 천 일(日)에 불과했다.
그 천 일 간 백무엽은 밤이 되어야 했다.
저벅- 저벅-!
백무엽은 천망헌에서 백 장 떨어진 곳까지 다가갔다.
아아, 위화(葦花).
갈대가 천망헌을 온통 휘감고 있었다.
다른 곳의 갈대는 모두 얼어죽었는데, 천망헌 일대의 갈대만은 살아 있었다.
"이상한데? 갈대가 살아 있다니……?"
백무엽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걸음을 내딛었다.
세 걸음을 갔을까?
그의 눈가가 묘하게 찡그려졌다.
"이럴 수가? 모든 게 사라지다니……?"
그의 입이 가볍게 벌어지기 시작했다. 기이한 안개가 흐르더니, 천망헌이 감쪽같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짙은 안개는 언덕과 강, 그리고 띠집을 감춰 버렸다.
어디 그뿐이랴?
방금 전 나타났던 푸르른 갈대밭마저 모두 사라져 버리지 않았는가?
"이, 이런 일이 있을 수가?"
백무엽는 흠칫 놀라다가 무엇인가를 깨닫게 되었다.
'그렇다. 나는 진식(陣式)에 걸린 것이다. 진식 중의 최고라는 허무대라진(虛無大羅陣)에 걸리고 만 것이다.'
백무엽은 긴장을 하며 내공을 일으키려 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무화령(無花令), 그냥 있거라!"
허공에서부터 지독하게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 왔다.
"아, 아니?"
"얘야, 그냥 있거라. 크크, 네가 움직이면 너를 시험(試驗)할 수 없게 된다."
지금 들리는 목소리는 바로 야유향(夜遊香) 금적산(金積山)의 목소리였다.
"크크… 또 나타나 미안하구나. 입이 질긴 놈아! 쾌활화림에서는 너의 현재(現在)를 시험했다. 그리고 지금은 너의 또 하나를 시험하는 것이다!"
"너의 현재는 우리 모두 믿고 있다!"
"우리는 너를 믿는다. 너는 우리를 위해 싸웠다. 목숨을 걸고 충성스럽게! 하지만 우리는 너의 과거(過去)를 알지 못한다!"
"우리는 너의 과거를 알아야 한다. 그래서 오늘 이런 모임을 만든 것이다!"
"제십좌(第十座), 너는 죽거나 정식 제자가 될 것이다! 과거의 시험을 거친 후!"
"자아, 이제 시작한다!"
사방에서 목소리가 들리더니, 안개가 아주 짙게 휘몰아쳐 오기 시작했다.
휘류류류- 륭-!
안개가 해일이 되어 몰려들었다.
꽉 막힌 사방, 안개는 안력을 방해하는 신비함마저 지니고 있기에 백무엽은 단 한 치 앞도 내다보지 못했다.
백무엽은 이미 혼신의 공력을 끌어올린 후였다. 그의 쌍수에 담긴 공력은 만 근 거석을 일거에 박살낼 정도였다.
점점 두껍게 쳐지는 안개의 벽.
그러던 한순간, 팔합(八合)이 굉음(轟音)과 함께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안개(霧), 그것이 돌연 불바람(火風)으로 변화했다.
콰- 앙-!
안개가 쩌억 갈라지며 많은 사람들이 꾸역꾸역 나타났다.
채대(綵帶)를 손에 든 여인들, 섬섬옥수를 흐느적거리며 나비 떼 마냥 나타나는 여인들.
아아, 모두 벌거벗은 여인들이 아닌가?
투실투실한 가슴을 덜렁거리며, 올라 붙은 둔부를 좌우로 흔들거리며 다가서는 여인들.
"호호호… 어서 누워요!"
"우리는 천색(天色)의 마녀(魔女)들! 그대의 마음에 깃들이기 위해 왔어요!"
"흐으으… 응! 아름다운 분!"
진짜 들리는 목소리일까, 환각일까?
정사(情事)라는 묘한 노동을 바라는 요염한 눈빛들이었다.
곧 꺾어질 듯 가는 허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백무엽을 포위하는 여인들의 수는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이것은 심마진(心魔陣)이다.'
백무엽은 눈을 부릅뜬다. 그는 극기훈련을 거친 초살수로서, 심마진의 환영 따위에는 걸려들지 않을 자신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가 내공심법(內功心法)을 발휘해 심마의 유혹에서 벗어나려는 순간이었다.
"흥! 내공을 쓴다는 것은 너의 과거를 밝히고 싶지 않다는 뜻이리라! 아니냐?"
차가운 여인의 목소리이다.
"내공을 쓰지 마라, 제십좌! 너는 심마진에 걸려야 한다!"
"심마진에 걸리지 않는다면… 너를 폭사(爆死)시키겠다. 우리는 이미 백 개의 뇌화탄(雷火彈)을 마련했다!"
"마음의 벽(心壁)을 허물라, 무화령!"
"당하라! 이것도 명령이다!"
차디찬 목소리들이 들려 오는 가운데, 백무엽의 눈빛이 흐트러졌다.
'좋소! 명이라니… 당하라면 당하겠소.'
백무엽은 천천히 마음을 풀어 놓았다.
사르륵 일어나는 안개, 그리고 벌거벗은 몸뚱이들의 현란한 율동이 쉬지 않고 이어진다.
귀무(鬼霧)가 뿌연 숨결로 일어나며 그의 몸을 휘말아 올렸고, 꽃뱀 같은 계집들이 점점 가까워졌다.
"하아아… 하아아……!"
터질 듯한 젖가슴이 몸 속으로 다가선다.
그것은 정녕 견딜 수 없는 유혹이었다.
'화갈내단(火蝎內丹) 덕에 춘정(春情)이 인다. 그 때문에 내공운용이 방해를 받고 있다.'
백무엽은 삼중 사중의 곤혹 속에 사로잡혔다.
기문진세는 그를 어지럽게 했고, 흐느끼는 소리가 그의 청력을 괴롭혔다.
"어서 부둥켜안아요."
"백서생, 우리들과 누워요. 마음에 숨어 있는 욕망(欲望)이라는 침대 위에 함께 누워요."
"마음을 가두지 마세요. 사슬을 끊어 버려요! 환상의 날개를 타고 훌훌 날아올라요!"
"그대는 기억하고 싶지 않는 과거를 가졌지요. 하지만 지금은 기억해도 됩니다. 이것은 마음이 하는 목소리입니다!"
여인들은 점점 다가선다.
아련한 눈빛들, 녹아 버릴 듯 보드라운 몸뚱이들.
우물(尤物)들은 점점 가깝게 다가섰다. 옥수(玉手)를 간드러지게 흔들고, 첨족(尖足)을 사박사박 내딛으며 홀리는 눈빛을 백무엽의 전신에다가 비(雨)로 퍼붓는 여인들.
"하아아… 어서 허물을 벗어요."
"아, 아무것도 감추지 말아요."
"우리는 바로 그대의 마음(心). 한 조각 붉은 마음이니, 우리들에게 무엇을 숨기겠습니까?"
"어, 어서 말해요!"
여인들은 완전히 백무엽을 휘감았다.
"그, 그래! 벽(壁)이… 허물어진다."
백무엽의 눈빛은 귀무를 닮아갔다. 그는 지금 아무것도 보고 있지 않은 듯 멍한 눈빛을 허공에 던지고 있었다.
지금, 그의 마음의 벽은 완전히 허물어지고 있었다.
뇌호혈(腦戶穴)의 상처로 인해 그는 기억을 상실했다.
인문은 그 비밀을 알아 내기 위해 이런 자리를 마련한 것이다.
입술은 아주 천천히 떨어졌다.
"가, 가고 싶지 않다. 나는… 그 곳에……!"
그가 내뱉는 말, 그것은 정말 차고 강한 말이었다.
"가지 않겠다. 가야만 하나, 가고 싶지 않다!"
술 취한 듯 떠도는 목소리, 그 목소리야말로 백무엽조차 알지 못하는 그의 과거가 말하는 목소리였다.
안개(霧), 안개는 백 장 안을 회색으로 뒤덮었다.
백무엽은 그의 내면을 보고 있는 듯했다.
그런데 그는 견딜 수 없는 고통에 사로잡힌 듯이 얼굴을 너무도 추악하게 찡그리고 있지 않은가?
"으으, 그런데… 너… 너희들은 누구냐?"
백무엽은 과거의 한때에 사로잡힌 듯 보였다.
그는 사지를 휘휘 젓기 시작했다.
"암, 암습자들이군? 나… 나를 노리는군? 너… 너희들은 바로… 마가(魔家) 사람들이군?"
백무엽의 얼굴이 시꺼매졌다.
"당했다! 으으……!"
백무엽은 돌연, 허리를 새우처럼 꺾었다. 마치 등 뒤에서 내리쳐진 일 장에 당한 듯이.
"비… 비겁한 자들! 으으……!"
그는 천천히 무릎을 땅에 댔다.
아아, 정말 믿기 힘든 심리실험(心理實驗)이었다.
지금, 천하에서 가장 지독한 고문기구 하나가 환기(幻氣)를 흘리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천색형구(天色形具)!
백무엽은 그 물건에서 일어나는 요기(妖氣)에다가 아홉 고수의 내공잠력(內功潛力)이 합해져 나타나는 가공할 힘에 사로잡힌 상태였다.
백무엽은 비 맞은 개처럼 부르르 떨기 시작했다.
몹시 지독한 고통을 느끼는 듯, 그는 입술 사이에서 침을 질질 흘리기 시작했다.
"헉… 헉……!"
그가 격한 숨소리를 낼 때, 흩어지는 안개 사이로 아홉 개의 그림자가 나타났다.
하나같이 빼어난 경공을 가진 사람들, 이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수법을 발휘해 백무엽 주위로 모여들었다.
그 중에는 금적산(金積山)의 모습도 끼어 있었다. 그는 지극히 궁금해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제… 결단의 순간이 남은 것이오. 여러분들, 이 녀석을 우리 편으로 끌어들이느냐 하는 결단이 남은 것이오!"
금적산의 목소리에는 정(情)이 들어 있었다.
그는 서재(書齋)에서 백무엽을 고문하다가 백무엽에게 반해 버리고 만 것이다.
"모두 한 가지씩을 물읍시다. 그 후, 결정합시다!"
"좋소."
"제육좌(第六座)는 무화령의 현재를 시험했고, 그 결과는 만족스러웠소. 이제 남은 것은 과거를 시험하는 것이오!"
"구좌(九座)부터 시작합시다!"
누군가 말하자, 한 사람이 불쑥 모습을 드러냈다.
"크크… 몽유병자(夢遊病者)에게 말을 묻는 일은 노부가 제일먼저 해야만 하는가?"
손에 묵죽(墨竹) 한 가지를 든 사람, 그는 꽤나 추악한 용모를 지니고 있었다.
인문제구좌(忍門第九座) 묵죽령(墨竹令).
그는 백무엽이 인문에 발견되기 오 년 전에 인문에 들었다.
그의 나이는 중인 중 세 번째인데, 지위는 아홉 번째였다.
묵죽령은 아주 천천히 입술을 떼었다.
"무화령(無花令), 네 이름은 무엇이지?"
"……!"
백무엽은 무릎을 꿇고 있었다.
그는 고개를 번쩍 쳐들고 허공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두 눈에서는 피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가 이를 악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묵죽령의 목소리가 아주 야릇해졌다.
"말하라, 네 이름을!"
거종(巨鐘)이 울리는 듯한 목소리, 그 목소리는 마종신후(魔鐘神吼)라는 마교의 음공이었다.
목소리의 여운이 길게 남을 때였다.
"나는… 이름이 없다!"
백무엽의 입술이 오랜만에 달싹여졌다.
이름이 없다니? 그 말을 듣고 누가 놀라워하지 않겠는가?
"기가 막히군. 세상에 이름이 없는 놈도 있다니! 제기랄, 노부의 질문은 헛다리를 짚고 만 것이다."
묵죽령은 툴툴거리며 물러났다.
이어, 이번에는 제팔좌(第八座)가 나섰다.
그는 체구가 아주 장대했고 손에 장도(長刀)를 차고 있었으며, 또 한 손에는 혈잠화(血簪花)를 들고 있었다. 그리고 목에는 쇠사슬을…….
그는 죽은 눈(眼)을 갖고 백무엽을 바라봤다.
"무화령, 네가 전대거마라 해도 용서받을 수 있는 곳이 인문이다. 인문에는 한이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다. 그러니 무엇이고 숨기지 마라!"
"알… 알겠소!"
백무엽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의 살결은 밀랍처럼 창백해졌다. 지금 그는 혼백이 제압당한 상태였다.
혈잠령은 머릿속에 생각을 정리하다가 차게 토해냈다.
"이름이 없다면 뭐라 불렀었지?"
"그, 그것은……!"
백무엽은 다시 더듬었다.
'지독하다. 벽이 너무 크다.'
'아아, 저 놈은 정말 기억하고 싶지 않은 과거를 가졌다.'
사람들은 혀를 내둘렀고, 백무엽이 알아듣기 힘든 소리로 말을 했다.
"나, 나는…… 마(魔)!"
마(魔)라니?
마씨 성(魔氏性)일까? 아니면 어떤 신호일까?
"잘 모르겠소. 잘 모르겠소!"
백무엽은 다시 머리를 휘저었다.
"하긴… 그렇게 찾을 기억이었다면 벌써 찾았겠지. 제기랄, 과거란 것이 그리도 귀중한지 나도 잘 모르겠다!"
혈잠령은 투덜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이번에는 제칠좌(第七座)가 나섰다.
두 다리가 없는 노인, 그는 이름 대신 부평령이라 불리는 사람이다.
"자네, 그 때 어디로 가던 길이었는가?"
부평령의 어조는 조금 부드러웠다.
상승기류로 몸을 둥둥 띄우고 말을 하는 부평령, 그는 백무엽을 조금 측은하다고 여기고 있었다.
백무엽의 이마에 내천자가 그어졌다.
"그, 그 때 나는……!"
그는 아득한 과거를 회상하느라 진땀을 흘렸다.
완전히 마비되어 버린 뇌성(腦性)을 일깨운다는 것은 정말 힘들고 괴로운 일이었다.
"나는, 나는 찾아가고 있었소!"
"찾아간다고? 무엇을?"
"……!"
백무엽은 고개를 푹 떨구고 있었다.
그의 신경은 지극히 약해진 상태였다.
마치 깨어지기 직전의 유리거울이라고나 할까?
그런 그에게 잇따라 질문을 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었다.
부평령은 하는 수 없다는 듯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이번에는 제육좌(第六座) 황국령(黃菊令)이 나섰다.
"아까는 네 현재에게 물었으나, 지금은 네 과거에게 묻겠다!"
"……!"
"너는 무엇을 찾고 있느냐?"
"잘 모르오!"
백무엽은 땀의 폭포에 파묻혔다. 그의 입과 코에서는 피거품이 부글부글 끓어 나오고 있었다.
"제기랄, 현재도 그렇거니와 과거 역시 뒤숭숭한 놈이로다!"
야유향은 서재에서 그랬듯이 도저히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뒤로 물러났다.
제오령(第五令) 연자령(燕子令).
"몇 사람이 너를 해쳤느냐? 왜? 그리고 무슨 수법으로?"
"마가(魔家)고수들이 나를……!"
"마가(魔家)? 마혼세가 말이냐?"
"……!"
제사령(第四令) 설매령(雪梅令).
그는 눈이 흰 노사태(老師太)였다. 염주(念珠)를 또르르르르 굴리며 그녀는 입술을 연다.
그것은 매우 특이한 질문이었다.
"무엇을 좋아했지? 무엇이든 말하게!"
"내가 좋아한 것은… 하늘(天)과 바람(風)!"
"훗훗… 자네는 마음이 깨끗한 청년이네. 진작 알고 있기는 했으나, 이번 질문으로 인해 그것이 확실해졌네. 하늘과 바람을 좋아하는 사람치고 나쁜 사람은 없으니까!"
"꽃(花)!"
"……!"
"강(江), 구름(雲), 달(月)……!"
이번에는 백무엽의 대답이 조금 길었다.
제삼령(第三令).
그는 무정태공(無情太公)이며 벽진자(碧眞子)였다. 그는 갈대를 손에 들고 있었다.
"무화령, 과거로 돌아가고 싶은가?"
"글, 글쎄!"
"……!"
제이령(第二令).
그는 죽립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허리가 구부정한 흑의노인의 몸에서는 풋풋한 흙 내음이 풍겨 나왔다. 그것은 훈기(薰氣)를 띤 아주 기분 좋은 내음이었다.
흙(土)! 그것은 생명의 근원이 아니겠는가?
그의 손에는 붉은 꽃 한 송이가 들려 있었다.
천일홍(千日紅), 한 번 피면 천 일을 간다는 꽃이었다.
'상(相)이 밝은 아이다. 이 아이의 과거를 의심할 수는 있어도, 이 아이의 마음을 의심할 수는 없다.'
그는 조용히 뒤돌아섰다. 그는 여덟 사람을 돌아보며 미소를 던졌다.
"노납은……!"
그는 과거 화상이었던 듯 자신을 노납이라고 칭했다.
"아무것도 묻지 않겠소. 왜냐하면… 지금 이 상태로도 무화령을 믿고 있으니까! 무화령은 장차 천하의 기둥이 될 것이오!"
그는 합장(合掌)을 하자, 꽃에서 말할 수 없이 강한 향기가 피어 올랐다.
이제 묻지 않은 사람은 단 하나였다.
인문제일좌(忍門第一座).
그는 머리결에 꽃 한 송이를 꽃고 있었다.
바로 두견화(杜鵑花)를…….
얼굴을 검은 면사로 휘감은 두견령(杜鵑令).
그는 수직조직이 아니라, 수평조직체인 인문의 제일좌에 있는 사람이었다.
한데, 놀랍게도 두견령은 여인이었다.
면사 속으로 보이는 얼굴 윤곽이 너무나도 아름답다. 그녀는 볼에 깊은 우물 두 개를 만들고 있었다.
현재, 그녀의 두 눈은 백무엽의 아스라한 눈빛에 던져지고 있었다.
하늘을 우러르고 있는 청년 백무엽!
그는 말로는 형용하지 못할 미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는 완벽한 순수 그 자체이다. 천색형구의 요기가 그의 이성을 제압했기에 그의 마음은 백지장보다 희었다.
어쩌면 그가 짓고 있는 표정이야말로 인문제십좌로 불려지는 백무엽의 본연의 모습일지 몰랐다.
그를 바라보는 한 쌍의 봉목이 기이하게 흔들거린다.
'너를 구한 사람은 나다. 당시 너는 마혼세가 사람의 수법에 당해 피투성이가 되어 운중애(雲中崖)에 있었다. 당시 눈사태가 없었더라면… 나는 너를 발견하지 못했을 것이다.'
두견령은 잘근잘근 씹었다.
'많은 것을 희생하고 너를 구한 이유는 단 하나, 네가 너무 아름답기 때문이었다. 이 마음만은 진실이다. 장차 너를 죽이게 될지 모르나, 한때 나는 너를 사랑했다. 너의 백치미를!'
두견령의 뺨에서 은빛이 떠올랐다.
아아, 눈물(淚)이라니?
정이 없는 인문의 우두머리가 눈물을 흘리다니…….
'이제는…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 모든 것은 지나가고 피비린내 나는 싸움만이 남을 뿐이리라.'
두견령은 아주 천천히 입술을 떼었다.
"나는… 묻지 않겠다!"
"으으… 응……?"
백무엽은 고개를 천천히 돌렸다.
"묻지 않다니?"
"문주, 어인 말이오?"
"놈의 진면목을 알 질문을 하리라 여겼는데? 아무것도 묻지 않으시겠다니?"
"대체 무엇을 말하시려고……?"
제이좌에서 제구좌까지가 깜짝 놀랄 때, 제일좌 두견령의 눈에서는 한망(寒芒)이 폭사된다.
"대신 네게 한 가지를 명하겠다!"
너무나도 차디찬 눈빛, 그것은 바로 눈(雪)의 빛이었다.
"나는… 네게 명령을 할 것이며, 그 명령은 절대(絶代)가 되어야 한다!"
"묻는 대신 명령을?"
백무엽이 희미한 어조로 반문했다.
"그 명령은 최고 최후의 명령이 될 것이다!"
"……!"
"그것은 바로 이 순간부터는… 모든 과거(過去)를 깡그리 잊어버리라는 것이다!"
"잊… 잊다니?"
"마음 속에서 너의 과거를 씻어 내라! 그 일을 하는 데에는… 내가 너를 도와 줄 것이다!"
정말 차고 강한 목소리, 마치 눈바람(雪風) 같은 한기(寒氣)를 띠고 있는 목소리였다.
한데, 그 차가움 가운데에는 힘이 실려 있었다.
불타오르는 정염(情焰), 그것은 분명 강한 애정의 열기였다.
"알겠느냐? 내가 너를 부르는 순간, 너는 깨어날 것이고… 영원히 너의 과거에 대해서는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
"그리고 너는… 생각조차 않을 것이다. 네가 누구였는지에 대해서!"
두견령의 목소리는 점점 강해졌다. 그리고 사람들은 혀를 내두르기 시작했다.
'나이가 어리기는 하나, 역시 지휘자감이다. 문주는 과거보다는 장래를 중시 여기고 있다.'
'아아, 과거를 캐묻는 것이 아니라 과거를 완전히 묻어 버리는군.'
'가장 현명한 판단이다. 가장 현명한……!'
'바로 그렇다. 제혼술(制魂術)로 모든 것을 완전히 지우는 것이다. 훗훗……!'
사람들은 이제야 제일좌의 의중을 파악한 듯했다.
그 뜻을 모르는 사람은 백무엽뿐이었다.
"네게는 과거(過去)가 없다."
"네게는 본성(本性)만이 있을 뿐이다. 너의 인간 본성이!"
"네가 누구건 이제 상관없다. 너의 과거는 제명(除名)되었으니까!"
"셋을 세면 깨어나라! 백설(白雪)의 마음으로!"
"두 번의 시험이 있었다는 것도 잊고 싶다면 잊거라! 시험 당했다는 것은 괴로운 일이니까!"
"모든 괴로운 기억을 잊어버려라. 어차피 알지 못할 것이니까. 너의 과거는 철저히 제명(除名)당하고 너는 무화령으로만 남게 된다."
"이제 너의 백설같이 흰 마음만이 깨어나는 것이다."
"하나… 둘… 셋!"
"여… 여기는? 그대들은?"
백무엽은 중얼거리다가 스르르 의식을 잃었다.
일월 이십사일 새벽.
백무엽은 서재(書齋)에 앉아 밖을 보고 있었다.
그의 손가락에는 잔(盞)이 들려 있었고, 잔 안에는 맑은 용정차(龍井茶)가 반 정도 채워져 있다.
창 밖에는 눈이 내리고 있다. 백무엽은 눈이 쏟아지는 것을 유심히 바라봤다.
'이상하게도 마음이 맑다. 아아, 최근 들어 지금처럼 마음이 맑기도 처음이다.'
그의 흐트러진 머리카락 아래에서 나타나는 얼굴에는 환한 미소가 떠오르고 있다.
'무슨 일인가 있었던 듯한데 생각나지 않고, 생각하고 싶지 않다. 나는 이러한 평화가 좋을 뿐이다.'
그의 미소는 점점 맑아졌다.
만에 하나, 무화과 가지에 홍건(紅巾) 하나가 매달린 것이 눈에 띄지 않았다면 그 미소는 꽤나 오래 갔을 것이다.
"나를 부른다, 문(門)에서!"
백무엽의 눈에서는 일순, 정광(精光)이 폭사되어 나왔다.
인문(忍門)이 그를 부르고 있는 것이다.
무화령(無花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