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리엄 전킨과 메리 전킨 부부 선교사 편지⌟ - 그들은 군산의 밀알이었다!
팔십 년대 초 군산에서 일할 때 개복교회와 구암교회가 선교사가 세운 교회이며 군산의 모든 교회가 그들에서 파생되어 나왔다는 말과 구암에 선교사들이 세운 군산 예수병원이 있었다는 말을 들었다. 자주 방문하였던 선물 가게 주인 청년이 자기를 영명학교 출신으로 소개하였고 이웃에 사는 분이 멜볼딘여학교에서 공부하였다고 했다. 두 학교가 다 전킨 선교사 부부가 세운 미션 스쿨로 군산 근대 교육의 효시이었지만 당시에는 그 두 학교가 이미 군산제일고등학교와 영광여자중고등학교로 바뀌어서 그리 큰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그러나 군산, 익산과 김제가 개신교 기독교 인구 비율이 30%을 넘어섰다는 통계에 접하였을 때 우리 지역에 처음 온 선교사들의 희생과 헌신이 떠올랐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군산의 교회, 교육, 병원이 전부 다 전킨 선교사에 의해 시작되었다는 사실에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참으로 전킨 선교사는 자신의 짧은 생애를 바쳐서 군산의 어둠을 헤치고 미래의 문을 열었다. 문득 나와 아무런 관련이 없었던 그가 나의 믿음과 삶의 길잡이가 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내가 그에게 빚진 자라는 사실이 나를 감동의 도가니로 몰아 넣었다.
전킨 선교사!
그는 군산을 위해 땅에 떨어져 죽은 한 알의 밀알이었다. 그가 한 알의 밀알로 썩어서 30배, 60배, 100배의 결실로 거두어진 것이 오늘의 군산의 교회들과 교우들임이 분명하다.
그가 1891년 10월 유니온 신학교의 대표로 내슈빌 신학교선교동맹 선교대회에 참석하여 언더우드 선교사와 한국인 유학생 윤치호의 강연을 듣고 한국 선교를 결심했을 때부터 그는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군산지역을 위해 썩어질 밀알로 준비되었다.
나는 그의 전기를 읽으며 세 아들의 죽음과 본인의 병약(病弱), 조선의 문맹과 완고한 양반들, 음주와 도박, 불편한 환경과 이질적인 문화, 빈곤과 전염병의 위협에 시달리며 1908년 1월 2일, 43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날 때 까지 생명을 불 사른 그의 내면의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미국 어딘가에 그가 마음을 쏟아 부은 일기나 편지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가끔 하였다.
마침 이숙의 번역으로 ⌜윌리엄 전킨과 메리 전킨 부부 선교사 편지⌟가 보고사에서 출판되어 전킨 선교사 부부가 쓴 각자의 이야기를 읽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리 많은 분량이 아니어서 참으로 아쉬었다.
앞으로 SNS를 통한 초국적인 빈번한 교류와 한국교회 연구자들의 노력으로 더 많은 보고서와 편지 발굴이 있을 것으로 기대되며 그들의 육성을 따라서 1900년대 전후 우리 지역의 교회를 만나게 될 것이다.
편지를 읽으며 군산, 임피, 대야, 김제, 익산, 장항, 서천과 서해안의 섬들을 때로는 자전거로 때로는 배로 때로는 도보로 순회하는 전킨과 드루 선교사, 불선교사들의 그림자를 보았다.
다음은 1897년 5월에 후원자들에게 보낸 편지다. 초기 한국교회당의 모습이 선하게 그려진다.
1897년 5월
군산
여러분들에게
불과 2년 전, 우리는 첫 설교 여행을 위해 작은 돛단배를 타고 군산에 왔습니다. 1년 후 우리는 각 50달러씩 주고 구매한 두 채의 한국식 집으로 이사했습니다. 우리의 첫 여행 때 관심을 갖게 된 두 사람이 세례를 받았는데, 주로 그 둘의 자발적인 활동을 통해 우리의 주일 예배 참석자 명단에 40명의 이름이 오르게 되었습니다. 이 숫자의 절반은 거의 1년 동안 정기적으로 예배에 참석했습니다. 지난 주일에는 9시에 출석을 부를 때 20명만 참석했고, 5명은 늦게 왔습니다.
예배가 드려지는 방은 종이문 칸막이를 사이에 두고 두 개의 방으로 나뉘어 있습니다. 한 방에 여자들이 있고, 다른 방에 남자들이 있습니다. 교회 가구는 짚으로 만든 멍석 5개입니다. 모두 신발을 벗고 모자를 쓴 채 온돌 바닥 위에 방 양 쪽 옆으로 둘러앉습니다. 정식으로 선출된 인도자인 김 선생님이 원의 위쪽, 제 옆에 앉아 작은 종으로 예배를 시작하면서 찬송가를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는 기도를 드리고, 출석을 불러 결석자들을 확인하고, 결석자 이웃에 사는 사람들에게 주중에 그들을 방문해 달라고 부탁합니다. 그날의 말씀은 참석자 모두를 위해 소리 내어 낭독합니다. 인도자가 이런 구호를 하는 것은 큰 소리로 읽는 그들의 방식이고, 그렇게 함으로써 더 잘 이해되는 것 같습니다. 그 후 제가 한 시간 정도 가르칩니다.
…생략…
(어른)주일학교가 끝나고 잠시 휴식을 한 뒤에, 정규 예배를 드리기 위해 다시 모였습니다. 설교 제목은 ⌜주님께 드림⌟이었습니다. 첫째, “왜 우리가 드려야 하는가?”에 대하여 참석한 각자가 성경 번역본(복음서와 사도행전)을 손에 들고 있어, 우리가 고민하는 질문의 답이 있는 특정 구절을 찾도록 하였습니다. 그리고 나서 우리는 “어떻게 드려야 될 것인가?”라는 질문에 답을 하였습니다.
설교가 끝나고 우리는 주님께 첫 헌금을 들렸습니다. 드려진 금액은 운화 1달러 6센트(530개의 동전)였습니다. 한 달에 정기적으로 5달러 만큼을 버는 사람이 한 명도 없기 때문에, 이는 제 예상보다도 훨씬 더 많은 것이었습니다. 두 사람이 헌금을 세었습니다. 그것은 가난한 사람과 설교하러 보내질 수도 있는 형제들을 위하여 사용될 것이고, 만약에 남는 것이 있다면 원주민 교회가 필요로 하고 또 원주민 교회를 짓기 위하여 사용될 기초 자금이 될 것입니다.
오후에는 드루 박사님의 집에서 우리 선교사들만의 기도 시간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코크 박사님의 ⌜에베소 연구⌟로 우리 예배를 이끌고 있습니다. 데이비스 양은 오전에는 마을의 소년들에게 주일 학교를 가르치고, 저녁에는 여성도들과 집에서 모임을 가집니다. 이전 주일에는 14명이 참석하였습니다.
이 눈부신 봄날은 문을 활짝 열게 하지만, 예배 중에 마주하는 풍경은 버지니아에서 보았던 익숙하던 주일의 모습과 사뭇 다릅니다. 들판은 푸르고 하나님의 주신 꽃들도 여전히 아름답지만, 도처에서 고생하며 노동하는 아이들의 소리가 새들의 노래를 가리우고, 번잡한 괭이와 삽과 쟁기들이, 이들이 하나님 없는 민족임을 날 것 그대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윌리엄 전킨과 메리 전킨 부부 선교사 편지⌟, 26,27,28쪽
1903년 1월 1일
한국, 군산
친애하는 알렉산더 박사님께
당신에게 지난 번 편지를 보낸 이후에 이곳 군산과 전주에서 우리는 더 많은 문제와 걱정에 휩싸였습니다. 첫째는 제가 편도선염으로 오랫동안 극심한 고통을 겪었습니다. 결국 잉골드 박사가 왔는데, 그녀가 도착했을 땐 목구명이 찢어졌습니다. 불 선생 내외가 그와 함께 전주로 돌아가기로 하고, 그들이 떠나는 바로 그날, 반대편 목구멍마저 부어올랐고 나는 두 번째 고통을 감수해야했습니다. 다행스럽게도 이번 것은 짧았고, 박사가 4일 만에 자신의 손님들을 돌보러 갔는데, 불 여사와 마미 양이 좀 아픈 걸 알았지요. 그런데 지네가 불 여사를 물어서 우리가 크게 놀랐답니다. 그들이 전주를 떠나오기 전에 해리슨 부인도 발진티푸스에 걸렸는데, 지금은 심하게 앓고 있습니다. 가여운 잉골드 박사가 이 모든 상황을 어떻게 감당할지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이번 여름이 끝날 때 스테이션에 다시 의사를 모시게 되면 한숨 돌리게 될 것입니다.
방금 서울에서 밀러 부인이 복막염으로 세상을 떠났다는 전보를 받았습니다. 세 아이를 둔 아빠에게 기막히게 슬픈 일이지요 1년 전 신부가 된 원산의 아름다운 맥레이 여사가 천연두에 걸렸답니다. 존슨 부부가 돌아가신 소식은 들으셨을 테지요. 존슨 여사는 이곳에 오는 도중 고베에서 사망했고, 존슨 씨는 서울에 도착한 직후 천연두로 사망했습니다.
당신이 우리 곁에 잠깐 머무는 동안 환자들이 크게 늘어났고, 매우 안타까운 사례를 보고도 돌려보내야 하는 일이 생겼습니다. 바로 오늘 아침 오긍선의 고향 공주에서 180리 떨어진 곳에서 두 청년이 무서운 병에 걸려 찾아왔습니다. 그들은 병자를 치료하기 위해 궁말(구암)에 온 “위대한 사람”에 대해 큰 희망을 오랫동안 품어 왔습니다. 그들에게 이곳에 오느라 들인 수고와 고생이 헛되었다고 말하는 일이 너무 힘든 일이었습니다. 나는 그들에게 아침 식사와 몇 권의 책을 주었지만 그들의 고통에 비하면 빵을 달라는데 돌멩이를 주는 일 같았습니다.
…생략…
⌜윌리엄 전킨과 메리 전킨 부부 선교사 편지⌟, 31,32쪽
1903년 3월 26일
한국 군산
사랑하는 박사님께
…생략…
불 선생님이 동행하여 교리문답 수강생을 문답하는 일을 처음으로 도와주었습니다. 우리는 만자산에서 11명을 면담하였고, 그 중 3명이 교회에 교인으로 등록하였으며, 8명이 수강 신청했습니다. 송이동에서 12명, 승말에서 14명, 만자산에서 27명, 선교지부에서 12명 총 76명입니다. 이들 중 35명은 교인으로 등록하였고 45명은 임시 교인이 되어 기다리도록 하였습니다.
승말의 초심자 14명은 제가 미국에 있는 동안 승말로 옮긴 우리 교인 한 분의 노력의 결실입니다. 이곳 지도자의 딸은 대단합니다. 제가 그 아이에게 성경을 암송할 수 있느냐고 물었더니, 마태복음에서 시작하여 말씀 76절, 사도신경과 십계명까지 외웠습니다. 우리가 그 아이에게 장과 구절, 내용을 물어봐도 똑같이 쉽게 답했습니다.
우리는 요즘 선교지부 세 곳에서 온 60명과 신학 수업으로 매우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습니다. 테이트 선생님과 벨 선생님, 불 선생님이 각자 수업을 맡아서, 테이트 선생님은 로마서와 구약사를, 벨 선생님은 고린도서와 그리스도의 삶, 불 선생님은 지리, 저는 사도행전과 교회사, 신학 그리고 저녁에 찬양 수업을 합니다.
…생략…
⌜윌리엄 전킨과 메리 전킨 부부 선교사 편지⌟, 31,32쪽
1903년 4월 24일
군산
사랑하는 여러분들에게
…생략…
어린 조오지의 생일인 4월 22일 11시에 그의 작은 가슴은 더는 버티지 못하고 후식도 잠시 취하지 멋한 채, 새벽 한 시에 작은 숨을 내쉬고, 순수한 아기 영혼이 예수님의 품에 안겼습니다. 우리의 슬픔은 깊어져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습니다.
메리와 저는 아침까지 작은 침대 죽은 아기 옆에 앉아 있었습니다. 더욱이 에드워드와 윌리에게 사실을 말해야 하기에, 마음의 상처가 더욱 깊어졌습니다. 아기가 죽었다는 말을 듣고 에드워드의 작은 가슴은 울먹이며 헐떡거렸습니다. 윌리는 혼자서 들판으로 나갔습니다. 얼마 후, 윌리는 작은 장난감을 가지고 와서 말하였습니다. “엄마, 이걸 동생의 관에 넣어 주어도 될까요?”
우리는 바다와 맞닿는 강이 내려다보이는 집 위쪽 마당의 구석에 무덤을 팠습니다. 사랑하는 친구들은 작은 관 위에 흰 비단, 백합, 제비꽃을 올렸습니다. 불 선생님은 “고통 받는 아이들”을 읽으며 “이 작은 아이들 중 한 명이 죽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하늘에서 천사들은 항상 아버지의 얼굴을 봅니다.”를 읽었습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자여 잠드소서”와 “주 예수의 넓은 품에”를 찬송하였습니다.
예배를 드린 곳은 거실이었습니다. 학교 남학생들과 에드워드, 윌리는 그들이 자원하여 관을 메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무덤에서 짧은 한국어 예배가 있었고, 우리는 작은 무덤 위에 아몬드, 라일락, 데이지, 베르베나스 꽃으로 하얀 십자가를 만들어 덮었습니다. 희색과 분홍색 데이지 화환이 두 개 있었고, 에드워드와 윌리는 가장자리에 마다 제비꽃 다발을 놓았습니다.
이 꽃들의 대부분이 심겨진 이래, 우리 정원에서 처음으로 핀 꽃들입니다. 우리 모두 사망 없는 사랑의 본향에 이를 때까지 우리가 얼마나 사랑하였는지를 듣지 못하는 우리 소중한 아기에게 어떻게든 우리의 사랑을 마음껏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생략…
⌜윌리엄 전킨과 메리 전킨 부부 선교사 편지⌟, 40,41쪽
그는 실로 군산의 오늘을 열였다!
1904년 9월 군산 선교부에서 전주 선교부로 자리를 옮기게 된 그는 선교부의 권고에 따라 약해진 몸을 돌보지 않고 서문교회 건축을 시작하였다. 그리고 테이트, 선교사, 매커첸 선교사와 함께 구역을 나누어 거리 전도를 하였다. 그러면서 수요 예배, 목요일 밤 기도회, 금요일 밤 주일학교 남교사 모임, 토요일 밤 주일학교 여교사 모임, 병원 전도와 신흥학교와 기전여학교 전도로 전주의 교회 부흥에 심혈을 기울였다.
평양신학교 강사로 1907년 6월 한 달 동안 평양에 머물면서 평양대부흥회를 목격한 그는 전주로 돌아와서 성령의 불길 속에서 타올랐다. 그는 전주의 5개 처소에서 야간기도회를 계속하게 하고 매커첸, 테이트와 함께 낮에는 성서를 가르치고 밤에는 부흥회를 열어 전주 대흥운동을 이끌었다. 당시 서문밖교회에서 500명이 자진하여 전도대원이 되어 5,000권이 넘는 쪽 복음서를 나누어 주고 교인들이 “날연보”를 바쳐서 헌신 봉사를 하였다. 그리하여 1907년 전주 지역에서 28개 교회가 새로 설립되었고 전주의 교회는 총 60개로 늘어났으며 세례를 받은 교인이 1,005명에 이르렀다.
그가 지도 순회하는 금구와 김제 지역에도 8개의 교회가 설립되었고 2개의 교회가 건물을 새로 신축하였다. 그는 287명의 학습자들과 문답을 하였고 148명에게 세례 학습을 시켰고 10명의 아기에게 유아세례를 주었다.
그는 1907년에 실로 땅에 떨어져 죽은 밀알이 되어 30배, 60배, 100배의 많은 영혼들을 수확하였다. 그러나 그의 고단한 몸은 성탄절 후, 과로로 급성 장티푸스와 폐렴에 걸렸으며 1908년 1월 2일 43세 나이로 세상을 떠나 하나님께로 돌아갔다. 그는 세 아들이 묻혀 있는 곳, 자기 청춘을 다 바쳐서 섬기며 사랑하였던 군산 궁말에 묻히길 원하여 군산 앞 바다가 보이는 곳, 세 아들 곁에 나란히 묻혀졌다.
슬픔에 빠진 전주 기독교인들은 그를 기억하며 기념하고자 1990년에 세워진 여자학교를 ‘전킨을 기념한다’는 뜻으로 첫 자를 다서 ‘기전학교’로 명명하였다.
참으로 고마운 것은 군산시기독교연합회 전킨기념사업회가 초교파적인 모임으로 세워진 것과 군산시가 전킨을 비롯한 많은 선교사들의 선교, 교육, 의료에 대한 헌신과 공로를 인정하여 도처에 기념비를 세우거나 기념관을 지은 것이다.
그가 군산에서 전주로 발령이 났을 때 교우들 뿐만 아니라 지역 주민들까지 합세하여 그의 전근을 반대하여 격렬하게 항의를 하여 선교부가 진퇴양란에 빠졌고 전킨은 떠나는 것을 고통스러워하였다고 한다.열렬하게 그를 사랑하였던 조상들처럼 군산 시민들이 다시 그를 기억하며 추모하니 모두가 다 그로 말미암은 믿음의 자녀임이 분명하다.
특별히 군산의 삼일만세운동 기념관은 괄목할 만하다. 군산의 만세운동은 영명학교, 멜볼딘여학교, 구암교회와 구암병원을 중심으로 하여 일어났는데 이는 다 전킨 선교사가 시작하여 기초를 확립한 곳들이다. 전킨 선교사는 한 알의 밀알로 땅에 떨어져 군산 근대화와 독립운동사에서 큰 족적을 남겼고 화산처럼 뜨거운 교회를 우리에게 남겨주었다.
2024년 5월 11일 토요일 인시
우담초라하니
소개하는 책
윌리엄 전킨, 메리 전킴 저, ⌜윌리엄 전킨과 메리 전킨 부부 선교사 편지⌟, 보고사, 2022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