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씨의 실직적인 시조는 신라 말기의 대문장가이며 소벌도리의 24대손인 최치원이다. 최치원은 869년(신라 경문왕 9년) 12살의 나이로 당나라에 유학을 간지 5년 후 17세에 과거에 급제하여 승무랑시어사에 이르고 자금어의를 하사 받았으며, 제도행영 병마도총 고변의 종사관을 역임하고 귀국하여 시독 겸 한림학사 병부시랑 지서서감이 되었으나 외직을 원하여 대산, 천려, 부성 등지의 태수를 역임하고 아손이 되었다. 그후 난세를 비관하여 전국을 유랑하다가 해인사로 들어가 은거하며 수도하다 63세로 생을 마쳤다. 그는 한시문집으로 '계원필경' (20권) 등의 명저를 남겼다.
경주 최씨는 최치원의 윗대에서 개성,삭녕, 동주(철원), 전주(최군옥)등의 본관으로 나뉘어지고 최치원을 1세조로 하는 경주 최씨에서 최치원의 첫째 아들 최승로의 후손에서 함양, 청주, 충주, 영흥, 용강, 수원,부안, 강릉, 강화, 화순, 통천, 양천, 원주 등으로 분관이 되었고 지손에서 해주, 진주, 탐진, 전주(최균)등으로 분관했다.
최씨는 경주 최씨가 주류를 이루고 있으며 해주 최씨, 우봉 최씨, 등도 많은 인물을 배출하였고, 전주 최씨와, 동주 최씨도 상당한 세력을 펼쳤으나 최씨는 조선시대보다 신라, 고려시대에 세력을 떨쳤다.
고려시대 경주 최씨를 대표하는 인물은 최승로이다. 그는 고려 초기 문신· 재상이고 신라 6 두품인 은함의 아들이다. 신라 경순왕이 고려 태조에게 투항할 때 아버지와 함께 고려에 들어갔다. 총명하여 일찍부터 학문계통의 관직생활을 하였다. 982년 (성종1) 정광행선관어사상주국으로 있을 때 성종이 경관 5품 이상에게 시정의 득실을 논하게 하였다. 988년에 수문하 시중이라는 벼슬에 오르고 청하후에 봉해졌다. 태사대광에 추증, 성종의 며정에 배향되었다.
그리고 현종때의 최항은 평장사 최언위의 손자이며 최광윤의 아들이고, 991(성종10)년 문과에 장원하고 우습유,지제고 등을 거쳐 1009(목종 12)년 좌산기상시. 한림 학사로서 사부가 되었고, 다음해 정당 문학으로서 30여년간 폐지 되었던 팔관회를 부활시켰다. 1012년 이부상서, 첨지정사가 되고, 1016년 내사시랑 평장사가 되었으며, 1020년 추충진절위 사공신의 호를 받았다. 다음해 검교태부, 수문하시랑동내사 문하평장사, 청하현 개국후가 되고, 수정공신의 호가 더 해졌다. 청렴결백했으며 불교를 깊이 신봉하여 황룡사의 탑을 감독하여 수리했다. 현종의 묘정에 배향, 정광에 추증, 시중에 가증되었다.
그밖에 최씨의 대표적 인물로는 동학의 창시자인 최제우와 동학의 제2대 교주인 최시형, 한말의 거유로 의병장이었던 최익현. 이외에 많은 분들이 있다.
태조에서 경종에 이르는 5왕의 치적평과 북쪽 경계의 확정 ·방위책, 공덕재 폐지, 불교 폐단에 관한 건의문과, 그 밖에 사회문제 및 대중국관 등 시무책 28조를 올려 당시 실시된 새 국가체제 정비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고려 왕조의 기틀을 잡는데 큰 구실을 했다.
특히, 세금을 거두는 지방 토호들의 횡포와 잘못된 점들을 고치게 하기 위해 지방에 12목을 설치하고, 그 곳에 각각 목사를 둠으로써 중앙 집권 체제를 갖추어 갔다.
1114416454_강릉최씨[2].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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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최씨의 시조는 신라개국공신 소벌도리(1대)--경주최씨시조 치원(24대)--강릉최씨시조 필달(28대) 최필달은 최치원의 아들 승로의 증손자--매창공파 세절( 47대)강릉최씨19세손--德洙는 시조로부터는 63 대이고 경주최씨로는39대이며 강릉최씨로는 35 대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