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
만수전(萬壽殿)
정의
인조의 계비인 장렬왕후(莊烈王后) 조씨(趙氏)를 위해, 효종이 수정전(壽靜殿)에 이어 두 번째로 건립한 대비전.
개설
장렬왕후는 1638년(인조 16) 14세의 어린 나이로 43세의 인조와 가례를 올렸다[『인조실록』 16년 12월 4일]. 하지만 너무 어리고 병약했던 탓에 인조의 눈 밖에 나, 순탄치 못한 궁궐 생활을 하게 된다. 입궁한 지 7년째 되던 해부터는 왕후의 병증을 빌미로 한 궁궐에서 기거하지 못하였고 인조가 서거했을 때 대면하였다. 인조의 장남 소현세자(昭顯世子)가 죽고 심양에서 돌아온 봉림대군(鳳林大君)이 세자에 책봉되면서, 봉림대군은 장렬왕후의 비참한 생활에 어버이로의 도의와 인간으로의 신의를 보이며 장렬왕후의 힘이 되어 준다. 효종은 인조의 승하와 때를 같이하여 경덕궁에 있는 장렬왕후를 창덕궁으로 돌아오게 하였고 실추되었던 권위를 되찾아 주었다. 그리고 장렬왕후를 위로하기 위해 효종은 1654년(효종 5) 궁중 잔치를 계획하면서 수정전의 보수를 시작하였고, 얼마 뒤에는 장렬왕후를 위한 만수전을 건립하였다.
위치 및 용도
만수전을 보수하면서 궁궐의 가장 외곽을 두르는 둘레 600여 칸의 새로운 궁장을 완공하였다. 만수전 정전 영역과 별전 영역을 나누어 창경궁 다음가는 규모의 대비전을 완공하였다. 1687년(숙종 13) 9월 2일 화재로 소실된 이후 재건되지 못하고 다른 전각들이 들어서 만수전 영역을 채우게 되었다[『숙종실록』 13년 9월 2일].
변천 및 현황
수정당(壽靜堂)을 보수하여 대비전을 마련했지만 불과 1년이 지난 1655년(효종 6), 효종은 새로운 대비전에 대한 계획을 세웠다. 이때 동궐 안에는 대비의 전각으로 통명전(通明殿)과 수정당이 있었다. 당시는 수정당이 보수되기 전으로, 대비의 건강이 점점 악화되자 통명전을 뒤져 저주물을 치워 낸 상태였다. 이후 대비의 건강이 회복되자 이를 축하하는 풍정(豐呈)을 올릴 것을 계획하며, 풍정에 적합한 전각으로 수정당을 변화시켰다. 그런데 산을 등진 비좁은 장소에 대비를 모시는 것은 옳지 않다며 새로운 대비전 건립을 주장한 것이었다. 왕이 새로 지을 대비전의 장소로 물색한 곳은 천문과 천기를 관측하던 옛 흠경각 터였다. 이 장소는 「동궐도(東闕圖)」상에 보이는 궁궐 서편, 선원전(璿源殿)에서 그 후방 일대를 아우르는 영역이었다. 계획된 전각의 규모가 워낙 컸던지라 궁장을 옮기고, 기존의 건물을 철거하면서 터를 확보해야 할 만큼 거대한 공사였다[『효종실록』6년 12월 2일].
가장 먼저 확정되어야 할 과제는 만수전의 터를 충분히 확보하기 위해 궁장을 바깥쪽으로 물려 쌓는 일이었다. 대비전의 정전은 물론 별전까지 짓는, 게다가 누각까지 포함되어 있는 거대한 공역이었다. 이때 본래의 궁장 영역이 서쪽으로 더 확장되어 옮겨졌고 「동궐도」상에 보이는 곡선의 궁장이 그것이다. 왕은 백성의 부역을 최대한 줄여야 한다며 경덕궁 안의 승휘전(承輝殿), 어조당(魚藻堂), 만상루(萬祥樓) 등을 헐어 만수전 영역에 이건하는 것이 좋겠다고 명을 내린다. 워낙에 공역이 컸던 만수전 조성은 신료들의 계속되는 반대와 극심한 천재(天災)를 못 이겨 공사가 중단되기를 거듭했지만 1657년(효종 8) 4월, 2년여의 공역 끝에 완공되어 장렬왕후가 거주하였다.
조선의 대비전은 동조를 원칙으로 했으므로, 동쪽에 자리를 잡아야 했지만 만수전은 서쪽에 조성하는 파격적인 배치를 단행하였다. 효종의 강력한 영건 의지가 궁궐 제도를 논하며 반대했던 중론을 물리치고 대비전 영역을 바꾸어 놓은 것이다. 만수전은 숙종 때까지 장렬왕후의 대비전으로 쓰이다가 1687년(숙종 13) 화재로 소실된 후 재건되지 않았다.
형태
기록을 살펴보면 사람들은 만수전 영역을 ‘서원(西苑)’, ‘서궁(西宮)’이라 불렀다. 만수전은 영건 시 크게 두 부분으로 계획되었다. 먼저 대비의 정전이 되는 만수전과 부속 건물이 북쪽에 자리 잡았고, 별전으로 지을 춘휘전과 부속 건물들이 남쪽에 자리 잡았다. 영건 당시 효종은 백성의 고초를 생각해야 한다며 경덕궁의 전각을 철거하는 이건을 결정하였다. 경덕궁에서 철거된 전각은 만상루, 흠경각(欽敬閣), 제정당(齊政堂), 비승각(丕承閣), 관문각(觀文閣), 협화루(協和樓), 승휘전, 어조당 등이었다.
『만수전수리도감의궤(萬壽殿修理都監儀軌)』에 따르면 만수전 영역은 만수전, 춘휘전(春暉殿), 천경루(千慶樓), 백복헌(百福軒), 양지당(養志堂), 헌선합 등 부속 건물을 모두 합쳐 170여 칸으로 조성된 거대한 영역이었다. 만수전과 춘휘전은 대비전 영역의 정전과 별전으로 함께 조성되었다. 훗날 만수전은 화재로 소실되어 경복전의 터가 되었고 춘휘전은 선원전의 터가 되었다.
만수전은 문헌 사료에만 남아 있는 전각이기 때문에 건축물 형태를 추정하기 어렵다. 경덕궁에서 이건하였다는 승휘전, 만상루, 어조당 등은 「서궐도안(西闕圖案)」에서 보이는 장락전(長樂殿) 영역의 건물들이었던 것 같은데, 이때 조성된 만수전이 경덕궁의 장락전 형태와 비슷한 형태를 취하지 않았을까 추정할 수 있다.
참고문헌
『일성록(日省錄)』
『국조보감(國朝寶鑑)』
『농암집(聾巖集)』
『송자대전(宋子大全)』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임하필기(林下筆記)』「동궐도(東闕圖)」「서궐도안(西闕圖案)」
조옥연, 「조선 궁궐의 동조건축에 관한연구: 17~18세기 동궐을 중심으로」, 경기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9.
만춘전(萬春殿)
정의
경복궁 사정전의 동쪽에 있는 부속 전각.
개설
만춘전(萬春殿)은 경복궁의 편전인 사정전(思政殿)의 부속 편전으로 서쪽의 천추전(千秋殿)과 함께 짝을 이루는 건물이다.
위치 및 용도
경복궁 사정전 권역에는 중앙에 사정전, 동서쪽에 각각 만춘전, 천추전이 가로로 배치되었다. 세 전각을 둘러싸는 행각에 의해 독립된 영역을 구성하였다. 사정전은 왕의 일상적인 집무 시설로서 매일의 상참과 경연 및 하루 세 번의 강(講)이 이루어지는 곳이다.
사정전에는 온돌이 없는 데 비해 천추전과 만춘전에는 온돌방이 마련되어 사정전의 쓰임새를 보완하였다. 전각의 이름은 동쪽이 만춘, 서쪽이 천추로서 동쪽을 높이 보았다.
변천 및 현황
태조 당시의 경복궁 창건 기록에는 나오지 않고 세종대에 처음 기록이 나온다. 이로 미루어 이때 경복궁을 정비하면서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 이후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다가 고종대에 중건되었다. 중건할 때 서사관(書寫官)은 송희정(宋熙正)이었다[『고종실록』 2년 9월 17일]. 천추전이 고종대의 모습을 유지하는 것과 달리, 만춘전은 한국전쟁으로 소실되었다가 근래에 다시 복원하였다.
형태
「경복궁고도(景福宮古圖)」에는 천추전과 만춘전이 사정전 영역 바깥에 행각으로 연결되어 지금과는 모습이 달랐다. 「북궐도형(北闕圖形)」에 따르면 정면 6칸, 측면 4칸으로 모두 24칸의 규모이다. 전후좌우의 1칸은 퇴칸으로 각 6자[尺] 규모이며, 다른 칸들은 8자로 이보다 크다. 정면에서 보아 중앙부 2칸은 대청이고, 좌우에 퇴칸을 포함하여 각 2칸씩을 온돌방으로 만들었다. 온돌방의 전면부 퇴칸은 마루이나 측면과 후면은 방으로 시설하였다. 기둥은 각기둥을 썼고 익공작에 겹처마 팔작지붕을 얹었다. 「북궐도형」에도 ‘무익공(無翼工)’이라 기록되었다. 지붕에는 양상도회하지 않아 사정전과 위계상 차별을 두었다. 전면 중앙의 대청이 2칸이라 계단을 중앙에 둘 수 없어 남측 칸에 맞춰 치우쳐 설치하였다. 뒷마당에는 온돌과 연결된 2개의 굴뚝이 있다.
참고문헌
「경복궁고도(景福宮古圖)」「경복궁배치도(景福宮配置圖)」「북궐도형(北闕圖形)」
문화재청, 『조선시대 궁궐 용어해설』, 문화재청, 2009.
조재모, 「조선시대 궁궐의 의례운영과 건축형식」,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3.
명례궁(明禮宮)
정의
조선전기 월산대군의 사저였던 곳에 임진왜란 이후 왕실 소용의 내탕(內帑)을 마련하고 관리하던 궁가(宮家).
개설
월산대군(月山大君)의 개인 저택인 연경궁(延慶宮)으로 의경세자(懿敬世子)의 사우(祠宇)인 의묘(懿廟)가 있던 곳이다. 월산대군의 사저는 임진왜란 시기 의주에서 환도한 선조의 행궁으로 이용되기도 하였다. 이후 왕실의 토지와 재산을 관리하는 내탕의 역할을 하는 명례궁이 설치되었다. 1897년(광무 1) 고종이 대한제국의 법궁인 경운궁을 건설하면서 명례궁은 그 규모가 축소되고 1907년(융희 1) 궁장토 정리의 과정에서 어의궁(於義宮), 수진궁(壽進宮) 등의 궁가와 함께 사라지게 된다.
위치 및 용도
현재 서울특별시 중구 정동에 위치한 덕수궁 지역 내에 위치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곳의 조선시대 행정 구역은 한성부 남서(南署) 명례방(明禮坊)이다. 명례궁은 임진왜란 이후 왕실 내탕 중 왕후 소용의 내탕을 마련하고 관리하던 궁가였다. 광해군대부터 고종 연간까지 꾸준히 그 기록이 『조선왕조실록』에 등장한다.
변천 및 현황
명례궁이 위치했던 터는 1469년(예종 1) 남이의 역모사건에 연루되었던 조영달(趙穎達)의 집이 있던 곳이다. 조영달의 집을 몰수했다가 1470년(성종 1) 세종의 막내 왕자였던 영응대군(永膺大君)의 부인 송씨(宋氏)에게 하사해서 왕실 소유가 되었다[『성종실록』 1년 1월 30일]. 1471년(성종 2) 송씨가 이 집을 다시 왕실에 바치자 연경궁이라 이름 하고 왕실의 별궁으로 삼았다[『성종실록』 2년 7월 24일].
1472년(성종 3)에는 의경세자의 사우인 의묘를 연경궁 후원에 세울 것을 계획하였다. 의경세자는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죽자 이후 덕종(德宗)으로 추존된 세자이다. 제사를 맡은 의경세자의 장남인 월산대군은 이곳을 하사 받았고, 이후 왕자의 저택이면서 사묘가 있는 제사궁(祭祀宮)이 되었다[『성종실록』 3년 12월 2일]. 이후 1475년(성종 6) 의묘의 위판(位版)을 경복궁 내 연은전(延恩殿)에 옮겨 모시면서 연경궁은 월산대군의 저택 역할만 하게 되었다.
1486년(성종 17)에는 잠시 옹주의 저택으로 하사되었다가, 1593년(선조 26) 10월 임진왜란으로 한양 내 모든 궁궐이 소실되자 이곳을 행궁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정릉동(貞陵洞) 행궁으로 불리던 이곳은 1611년(광해군 3) 10월에 경운궁이라는 궁호를 받게 되면서 공식적으로 정치를 하는 궁궐이 되었다[『광해군일기』 3년 10월 11일]. 그러나 광해군의 창덕궁 이어 이후 더 이상 사용되지 않았고, 인조반정 이후에는 행궁 대부분의 건물과 토지를 원래 소유자에게 돌려주어 더 이상 행궁의 기능을 하지 않았다.
이곳에 왕실 소용의 내탕을 마련하고 관리하는 명례궁이 설치된 것은 임진왜란 후로 보인다. 임진왜란 중 극심한 재정난 속에서 선조가 23인의 왕자와 옹주에게 어전(漁箭)·염분(鹽盆)·시지(柴地) 등을 임시로 변통해 나누어 주었고, 뒤에 이 선례에 따라 궁방전(宮房田)을 나누어 주었기 때문이다.
명례궁에 관한 기록이 『조선왕조실록』에 처음 등장하는 것은 1623년(광해군 15) 1월 11일의 기사다[『광해군일기』 15년 1월 11일]. 이후 고종 연간까지 꾸준히 자전(慈殿, 인조 연간), 중전(中殿, 현종 연간), 대비전(大妃殿, 숙종 연간), 대왕대비전(大王大妃殿, 숙종 연간), 양자전(兩慈殿, 숙종 연간), 동궁(東宮, 영·정조 연간)들의 내탕 마련과 궁가에서 발생한 문제들에 관여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1897년 고종이 대한제국의 법궁으로 사용할 경운궁을 확대 영건하면서 기능이 축소되었고 1907년 통감부의 황실 재산 정리 과정에서 사라졌다.
참고문헌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편찬부 편,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8~1995.
조영준, 「조선후기 궁방의 실체」, 『정신문화연구』제31권 제3호, 2008.
명례문(明禮門)
정의
창덕궁 후원 서쪽에 위치한 대보단 출입문.
개설
대보단(大報壇)은 임진왜란 때 원군을 보내 조선을 도운 명나라 신종(神宗)을 향사하기 위해 만든 제사 시설이다. 1704년(숙종 30)에 예조 판서민진후(閔鎭厚)가 제안해 건립하였다. 창덕궁 서북쪽에 위치하였으며 궁장 바깥쪽에 연접해서 만들었다. 대보단에는 중문으로 열천문(冽泉門), 남문으로 공북문(拱北門), 동문으로 조종문(朝宗門)을 두었다. 한편 대보단에서 남쪽으로 멀리 떨어진 창덕궁 후원 영역에도 문을 하나 두었는데, 이 문이 명례문(明禮門)이다.
내용
『승정원일기』 1704년(숙종 30) 11월 13일자 기록에는 대보단을 설치할 때 사용할 제기(祭器)를 어떻게 만들 것인지, 의례를 진행할 때 신하들이 어떤 통로를 이용해야 할지, 대보단에 수직군사를 어떻게 할지에 대한 논의가 실려 있다. 이에 따르면 명례문은 주방(酒房) 뒤쪽에 있는 작은 문[小門]으로 대보단과 무관하게 이미 창덕궁 후원에 만들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때 대보단에 드나드는 출입문으로 용도가 변경됐다.
원래는 대보단에서 의례가 치러질 때 신하들이 창덕궁의 서북쪽 출입문인 요금문을 통해 궁성 안쪽으로 들어와서 명례문을 거쳐 조종문을 통해 대보단에 들어가도록 계획했다. 하지만 명례문이 창덕궁 후원 내부에 있었기 때문에 수많은 신하가 후원을 통과해서 대보단에 나가는 것이 옳지 못하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대안으로 대보단 남쪽에 행각을 만들고 여기에 나중에 공북문(拱北門)이 되는 작은 문[小門]을 두어 신하들이 이곳을 통해 출입하도록 했다. 이렇게 하면 신하들이 전혀 창덕궁 내부로 들어올 필요가 없이 궁장 바깥으로 난 길을 통해 대보단에 들어갈 수 있었다. 대신 명례문에는 훨씬 중요한 기능을 추가하였다. 대보단에 향축(香祝)을 보낼 때 향축이 통과하는 문 역할을 담당하게 했다. 기존 명례문은 향축이 지나가기에 너무 작아서 새로 크게 만들었다. 또 향축이 출발하는 인정문에서부터 명례문까지 길도 새로 만들었다. 한편 이곳에 있던 내의원 주방(內醫院酒房)은 내빙고(內氷庫) 뒤쪽으로 이건했다.
1797년(정조 21)에 대보단에서 춘향(春享)을 지낼 때 기존에는 향축이 돈화문을 통해 대보단으로 나갔는데, 우회하지 말고 명례문을 통과하도록 바꾸라는 지시를 내렸다[『정조실록』 21년 3월 2일]. 처음 대보단을 만들 때 향축의 통과를 위해 명례문을 만들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의절에 변화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790년(정조 14)에는 명례문 안쪽에 4칸 반 크기의 한려청(漢旅廳)이 들어섰다. 『만기요람(萬機要覽)』「군정편」훈련도감(訓鍊都監)에 따르면 한려는 효종이 심양(瀋陽)에서 환국할 때 8성(姓)의 한인(漢人)들이 호종해서 조선에 왔는데 그 후손을 훈련도감에 소속시켜 ‘한인 아병(牙兵)’이라고 했다가, 1790년(정조 14)에 ‘한려’라고 명칭을 고치고 대보단 지키는 일을 맡겼다[『정조실록』 14년 3월 19일][『정조실록』 14년 3월 19일].
「동궐도(東闕圖)」에 묘사된 명례문은 2칸의 모습이다. 동쪽의 1칸은 솟을대문 형식이고, 서쪽의 1칸은 동쪽보다 높이가 낮은 협문(夾門) 형식이다. 동쪽 솟을대문이 향로(香路), 서쪽 협문이 어로(御路)인 것으로 판단된다.
참고문헌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만기요람(萬機要覽)』「동궐도(東闕圖)」
서울학연구소 역, 『궁궐지(宮闕志)』2, 서울학연구소, 1994.
몽답정(夢踏亭)
정의
창덕궁 후원 신선원전 일대에 있는 정자.
개설
몽답정(夢踏亭)은 창덕궁 후원에 위치한, 전면에 방지(方池)가 있는 정자로 정조 등이 휴식을 취했던 장소이다.
위치 및 용도
창덕궁 후원 내 신선원전(新璿源殿) 일대에 있으며, 정조가 훈련도감(訓鍊都監)의 북영에 거둥할 때 휴식을 취했던 정자이다.
변천 및 현황
『동국여지비고(東國輿地備考)』에 따르면 훈련도감의 북영 안에 천석(泉石)의 승경이 있으며, 숙종이 몽답정이라는 이름을 하사했다고 한다. 그런데 『조선왕조실록』에는 1759년(영조 35)에 “훈장 김성응(金聖應)이 북영에 작은 정자를 한 채 지었는데, 내가 대보단을 바라보고 이름을 몽답정이라고 내려주어 이를 걸게 했다[『영조실록』 35년 2월 3일].”는 기록이 있어 차이를 보인다. 정조는 북영에 거둥하였을 때 몽답정에서 머물며 연꽃을 바라보며 휴식을 취했다[『정조실록』 19년 6월 20일]. 박제가(朴齊家)의 『정유시집(貞蕤詩集)』을 보면 몽답정에서 연꽃을 감상하며 매미 소리를 들었다고 한다. 박규수(朴珪壽)는 『환재선생집(瓛齋先生集)』에서 몽답정에서 바라본 비 내리는 풍광을 묘사하였다. 오늘날에는 정자 앞에 신선원전이 있지만 과거에는 북영의 군사들이 왕래하는 넓은 공간이 있었다.
형태
전면 쪽 2열은 석주를 세운 누의 형태이며 뒤쪽은 경사지에 기단을 쌓고 초석을 받쳤다. 정면 2칸, 측면 2칸의 작은 온돌방을 안쪽에 두고 분합문을 달았으며 바깥쪽에 툇간을 두었다. 건물의 편액은 없으며 팔작지붕 형태이다. 왼쪽 언덕에 바위글씨로 한자로 ‘몽답정(夢踏亭)’이라고 새겨져 있으나 누가 언제 썼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정자 앞에는 방지와 노송이 한 그루 있다.
참고문헌
『동국여지비고(東國輿地備考)』
『정유시집(貞蕤詩集)』
『환재선생집(瓛齋先生集)』
서울특별시 시사편찬위원회, 『서울의 누정』, 서울특별시 시사편찬위원회, 2012.
임의제, 「조선시대 서울 누정의 조영특성에 관한 연구」, 서울시립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993.
무덕문(武德門)
정의
경희궁 북쪽 궁장에 설치된 궁문.
개설
1616년(광해군 8)에 광해군은 인왕산 아래에 인경궁을 조성하기 시작했으며, 1617년(광해군 9)에는 사직단 남쪽 새문안동에 경덕궁을 새롭게 짓기 시작하였다. 1620년(광해군 12)에 경덕궁은 완공되었으나, 인경궁은 규모가 크고 화려해서 1623년(광해군 15)까지 완공되지 못했다. 결국 광해군은 새 궁궐을 사용하지 못하고 폐위되었다.
경덕궁은 인조의 아버지 정원군(定遠君)의 옛 집터에 건립된 것으로 인조반정 이후에 인조가 사용하면서 궁궐로서의 역할을 시작하였다. 인경궁은 광해군 폐정의 상징으로 여겨져 1633년(인조 11)부터 철거되었고, 창덕궁과 창경궁 수리공사 때 재목으로 사용되었다. 경덕궁은 1760년(영조 36)에 경희궁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경희궁을 처음 조성할 때 궁역을 둘러 궁장을 쌓고 정문은 동남쪽 모서리에 동향으로 자리 잡았다. 정문인 흥화문(興化門) 외에도 궁문을 사방에 두었는데, 동쪽에는 흥원문(興元門)을 지었고, 서쪽에는 숭의문(崇義門)을 두었으며, 남쪽에는 개양문(開陽門)을 내고, 북쪽에는 무덕문(武德門)을 설치하였다. 무덕문 밖에는 사직단과 옛 인경궁터가 있었다.
위치 및 용도
인조대에 인목대비(仁穆大妃)가 인경궁을 사용하였는데, 인조는 인목대비를 문안할 때 무덕문을 통해 경희궁을 나서서 인경궁으로 거둥하였다[『인조실록』 8년 3월 18일]. 영조는 사직단이 내다보이는 무덕문에서 사직단을 향해 부복하기도 하였다[『영조실록』 48년 6월 29일][『영조실록』 48년 12월 30일].
변천 및 현황
무덕문이 언제 소실되었는지는 명확하지 않으나, 경희궁의 건물이 철거된 1900년(광무 4) 무렵일 듯하다. 고종은 경복궁을 중건하기 위하여 경희궁의 전각을 헐어 재목을 사용하기도 하였다. 1868년(고종 5)에 경희궁은 공허지가 되어 용동궁(龍洞宮), 수진궁(壽進宮), 명례궁(明禮宮), 어의궁(於義宮)과 함께 경작지로 분배되었다. 이때 경희궁의 건물들이 철거되기 시작하였다. 1892년(고종 29)경에 그려진 「슈션젼도[首善全圖]」에는 경희궁의 궁장과 궁문이 그대로 그려졌으나, 1911년에 제작된 「경성부시가도(京城府市街圖)」에는 경희궁의 경계가 반듯하게 정리되었다. 아마도 이즈음에 궁장이 허물어지고 무덕문도 사라진 것으로 생각된다.
형태
「서궐도안(西闕圖案)」에 무덕문의 모습이 그려졌는데, 계상당(啓祥堂)과 광명전(光明殿) 북쪽에 있었다. 건물은 정면 2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이며, 동쪽의 1칸은 협문으로 지붕의 높이를 낮추었다.
참고문헌
『궁궐지(宮闕志)』「경성부시가도(京城府市街圖)」「서궐도안(西闕圖案)」
허영환, 『정도 600년 서울지도』, 범우사, 1994.
은정태, 「고종시대의 경희궁-훼철과 활용을 중심으로-」, 『서울학연구』34, 2009.
무일전(無逸殿)
정의
세조가 창덕궁 후원에 지은 전각.
개설
1468년(세조 14) 8월 세조는 왕위를 물려준 후에 휴양을 하고자 창덕궁 후원에 새로운 전각을 짓게 하였다[『세조실록』 14년 8월 14일]. 이때 조성한 전각의 이름을 무일전이라 하며, 김개(金漑)·김국광(金國光)·노사신(盧思愼)·이극증(李克增)에게 공사를 감독하게 하였다.
위치 및 용도
1468년 세조가 휴양을 목적으로 창덕궁 후원에 지은 전각 이름이다.
참고문헌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김동욱 외, 『북한문화유산관련자료집 1 -개성역사지구』, 사단법인 ICOMOS한국위원회, 2004.
무일전(無逸殿)
정의
① 개경에 있던 태종의 잠저(潛邸)를 증수하여 조성한 경덕궁의 정전(正殿).
② 세조가 창덕궁 후원에 지은 전각.
개설
무일전은 두 개가 있는데, 태종에 의해 개성에 조성한 것과 세조가 창덕궁 후원에 조성한 것이 있다. 두 건물은 성격에도 차이가 있다.
먼저 태종대의 무일전은 개성에 있었다. 경덕궁(敬德宮)은 개성 남쪽에 있던 궁궐로써 정전이 무일전이었다[『태종실록』 1년 윤3월 11일]. 임진왜란 때 소실되고 지금은 흔적만 일부 남았다. 1693년(숙종 19) 숙종이 개성을 방문하여 손수 글을 지어 비석을 만들게 하고 비각을 세워 경덕궁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숙종실록』 19년 8월 30일].
두 번째 무일전은 세조대 영건한 것이다. 1468년(세조 14) 8월 세조는 왕위를 물려준 후에 휴양을 하고자 창덕궁 후원에 새로운 전각을 짓게 하였다[『세조실록』 14년 8월 14일]. 이때 조성한 전각의 이름을 무일전이라 하며, 김개(金漑)·김국광(金國光)·노사신(盧思愼)·이극증(李克增)에게 공사를 감독하게 하였다.
위치 및 용도
개경 남쪽 용수산에 위치한 태종의 잠저였던 경덕궁의 정전을 무일전이라 한다. 1468년 세조가 휴양을 목적으로 창덕궁 후원에 지은 전각 이름도 무일전이다.
변천 및 현황
개경에 먼저 조성된 무일전은, 1401년(태종 1) 윤3월에 개경에 있던 경덕궁의 정전을 좁다는 이유로 고쳐 지은 것이다. 전각의 명칭은 하륜(河崙)·권근(權近)에게 명하여 짓게 하여, ‘무일전’이라고 하였다. 경덕궁은 개경의 추동(楸洞)에 위치한 궁궐로 태종이 왕이 되기 전에 거처하던 곳이다. 태조는 조선을 개국하고 한양으로 천도하였으나, 정종은 1399년(정종 1) 개경으로 환도하고 이곳에서 지냈다. 고려의 본궁은 불에 탔기 때문에 마땅히 궁궐을 삼을 곳이 없어 태종의 잠저를 궁으로 삼고 2년여 간 산 것이다.
그 뒤를 이은 태종 또한 1405년(태종 5)까지 이곳을 궁으로 사용하면서 여러 전각을 지었다. 1401년(태종 1) 7월에 궁정(宮庭)이 낮고 좁아서 조회 받기 마땅치 않다 하여 총제(摠制)신극례(辛克禮)와 승추부(承樞府) 경력(經歷)박순(朴淳)을 명하여, 본궁(本宮)과 무일전을 헐고 고쳐 짓도록 하였다[『태종실록』 1년 7월 23일]. 이때 여흥부원군(驪興府院君)민제(閔霽)가 왕흥(王興)의 집을 사서 바쳤으며 그 인근의 인가(人家)를 왕이 사들여 궁역을 넓혔다.
관련 사건 및 일화
태종은 무일전에서 명나라의 황제가 보내온 고명(誥命)을 받아 조선의 국왕으로 인정받았다. 또 무일전에서는 명나라의 칙서를 받거나, 사신을 위한 연회를 베풀었다. 명나라에서 사신이 오면 선의문(宣義門)으로 나아가 맞이하고, 궁궐에 들면 무일전에서 연회를 베풀었다. 그 외에도 조하를 행하고, 왕의 생일을 축하하고 삼공신(三功臣)을 위한 잔치가 베풀어지기도 하였다. 1401년 4월에 태종이 친히 초시(初試)에서 합격한 이들을 다시 시험을 보는 복시(覆試)를 거행하여 조말생(趙末生)과 이적(李迹), 윤회(尹淮)가 합격하였다.
참고문헌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김동욱 외, 『북한문화유산관련자료집 1 -개성역사지구』, 사단법인 ICOMOS한국위원회, 2004.
문경전(文慶殿)
정의
조선후기 왕후의 혼전(魂殿)으로 사용하기 위해 경복궁에 지은 전각.
개설
문경전은 고종대 경복궁을 중건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새로운 종류의 전각이며 혼전으로 사용되었다. 문경전은 회안전(會安殿)과 같이 이용되었다. 혼전은 왕이나 왕비의 장사를 마치고 종묘에 입향할 때까지 신위를 모시는 곳이다. 왕의 신위는 삼년상 동안 모시고, 왕비의 신주는 왕이 죽어 종묘에 입향(入享)한 뒤 왕을 따라 배향할 때까지 혼전에 모셨다.
혼전은 사용 기간이 3년이나 되고, 조선후기에는 편전을 혼전으로 전용하는 경우가 많아서 편전의 사용에 영향을 미칠 정도였다. 고종대에 경복궁을 중건할 때에는 혼전으로 사용할 전각을 별도로 지어 국상에 대비했다.
위치 및 용도
문경전과 회안전은 빈전인 태원전(泰元殿)과 함께 경복궁 내 서북쪽에 있다. 문경전은 고종초에 중건되어 1890년(고종 29) 신정왕후(神貞王后)의 국장을 치룰 때 처음 사용되었다[『고종실록』 27년 4월 18일]. 태원전에서 발인 후 문경전에 신주를 모시다가 1892년(고종 29) 종묘에 옮겨 부묘(祔廟)했다. 회안전은 건립 이후 실제 혼전으로 사용되지 못하고 문경전의 보조적인 역할만 했는데, 신정왕후 국상 시에 재궁의 임시 보관처였다.
변천 및 현황
신정왕후의 혼전을 꾸미면서 문경전에 어재실(御齋室)과 예재실(睿齋室), 동행각을 신축하였다. 1904년(광무 8) 순종 비 순명효황후(純明孝皇后)가 승하하자, 문경전과 회안전을 경운궁 북서쪽 영성문 안으로 옮겨 의효전(懿孝殿)이라는 혼전으로 사용하였다[『고종실록』 41년 11월 5일]. 이 전각은 1921년에 창덕궁 신선원전(新璿源殿) 영역으로 옮겨졌다.
문소전(文昭殿)
정의
태조와 신의왕후 한씨의 초상화를 모시는 원묘(原廟).
개설
태조는 첫 번째 부인인 신의왕후(神懿王后) 한씨(韓氏)의 신주를 모시기 위해 인소전(仁昭殿)을 조성하였다[『태조실록』 7년 11월 11일]. 이후 태조가 승하하자 태조의 혼전으로 사용하면서 문소전으로 이름을 바꾸었다[『태종실록』 8년 8월 26일]. 태조와 신의왕후의 초상화를 함께 봉안하면서 진전(眞殿)의 성격을 갖게 되었다.
이와 별도로 1420년(세종 2)에 태종 비 원경왕후(元敬王后)의 혼전으로 광효전(廣孝殿)을 조성하였다[『세종실록』 2년 9월 9일]. 2년 뒤 태종이 승하하자 광효전에서 태종의 혼전 의례를 행하고 이를 마친 후 태종과 원경왕후의 신주는 종묘에 부묘하였다. 광효전에는 위패와 초상화를 만들어 모시고 종묘 의례와 달리 평소 살아 있을 때와 같이 음식을 올리고 제사 지냈다. 이와 같이 본래 태조를 위한 문소전과 태종을 위한 광효전이 따로 운영되었는데, 1431년(세종 13)에 원묘의 제도를 논의하기 시작하여 1432년 문소전에 광효전을 합쳐서 원묘를 단일화하였다[『세종실록』 14년 10월 29일]. 이후 문소전에서는 태조와 그 위로 4대를 합친 다섯 신위를 영구히 모셨다. 그리고 후대 왕이 왕위를 전해 준 선대를 문소전에 모시고 제사를 지내, 문소전은 종묘와 별도로 운영되었다. 이는 임진왜란으로 문소전이 소실될 때까지 이어졌으나, 임진왜란 이후 재건되지 않았고, 원묘제 또한 폐지되었다.
위치 및 용도
본래 창덕궁 북쪽에 위치하였으며 1432년(세종 14) 광효전과 합하여 경복궁 북쪽에 조성되었다. 태조와 신의황후의 혼전으로 사용되다가 원묘제에 따라 태조와 그 위로 4대의 신위를 모셨다.
변천 및 현황
문소전은 1432년(세종 14) 경복궁에 건립되기까지 여러 변화를 겪었다. 원래 태조의 비 신의왕후의 신주를 모실 당시는 경복궁의 별전(別殿)을 임시로 사용하였다. 이때는 원묘의 개념이 아니라 신의왕후의 혼전(魂殿)이었다. 신의왕후의 신주를 태조의 신주와 함께 종묘에 부묘하기까지 궁궐 안에서 모시기 위해 임시 설치한 것이다. 태조는 한씨가 조선을 개국하기 1년 전인 1391년(고려 공양왕 3)에 죽자 개국 이후 절비(節妃)라는 시호를 내리고 능호를 제릉(齊陵)이라 칭하였다. 1393년(태조 2) 11월에 삼년상을 마치고, 1398년 11월에 추존(追尊)하여 신의왕후로 삼았으며 여기에 초상화를 봉안하고서 인소전이라 이름 하였다.
정종이 개경으로 환도하고 태종이 개경에서 머무는 동안 신의왕후의 초상화는 개성의 광명사(廣明寺)로 옮겨 모셨다. 1405년(태종 5) 11월에 한양으로 환도하면서 신의왕후의 초상화를 경복궁의 세자전(世子殿)에 모셨다. 이때까지는 다른 건물을 임시 사용하는 상황이었다.
1406년(태종 6)이 되어서야 인소전을 위한 건물을 지었다. 5월 27일에 왕이 창덕궁 북쪽에 인소전을 새롭게 지으려고 북문(北門)을 나가서 서운관(書雲觀)에 명하여 터를 잡게 하였다. 유한우(劉旱雨)가 “창덕궁주산(主山)의 기운이 이 땅에 모였는데, 만약 땅을 파서 집을 지으면 반드시 궁궐에 이롭지 못할 것입니다.” 하였다. 태종이 이직(李稷)을 불러 의논하니, “주산(主山)의 맥(脈)이 아니고 따로 궁륭(穹窿)의 모양으로 나와서, 남향의 형세를 이룬 것입니다. 전하께서 만약 가까운 땅을 골라서 진전을 지으려면 이곳보다 나은 데가 없습니다.” 하여 터 닦는 공사를 시작하였다. 그해 8월 22일 창덕궁 북쪽에 인소전이 완공되었으며 신의왕후의 명복을 비는 불당(佛堂)도 함께 조성되었다. 이때 박자청(朴子靑)이 공사를 주관하고 감독하였다고 한다.
1408년(태종 8) 5월 24일 태조가 승하하자 8월 26일에 창덕궁의 인소전을 문소전으로 이름을 고쳤다. 9월 9일 태조를 건원릉(健元陵)에 장사 지내고 우주(虞主)를 문소전에 모셨다. 이날부터 태조의 혼전으로 사용되었으며, 칠우제와 졸곡제를 이곳에서 지내고 1410년(태종 10) 5월 24일 대상제(大祥祭)를 지냈다. 7월 15일에는 담제(禫祭)를 지냈다. 7월 26일 태조와 신의왕후의 신주를 종묘에 부묘하고 7월 29일에 태조와 신의왕후의 진용(眞容)을 문소전에 봉안하였다. 이를 세종 연간까지 운영하였으며, 1422년(세종 4)에 태종이 죽자, 문소전의 전례에 따라 광효전을 지었다. 그리고 이곳에 태종과 태종 비 원경왕후의 위패와 초상화를 봉안하고 제사 지냈다.
이때 문소전에는 불당이 있었는데, 1419년(세종 1)에 각 도 승려들이 부처의 뼈와 사리를 헌상하자, 이를 문소전의 불당에 모아 두었다. 그해에 명나라 사신으로 황엄(黃儼)이 오자 그를 문소전 내불당으로 불러 석가여래의 사리 4개와 본국에서 고른 사리 550개를 내보이기도 했다. 1423년(세종 5)에는 신녕궁주(愼寧宮主) 신씨(辛氏)가 이곳에서 불경을 금으로 써서 태종의 명복을 빌기도 하였다. 이를 통해 문소전이 조선초기 궁궐 내 중심 불당이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1432년(세종 14) 1월 6일 안숭선(安崇善)의 상소에 따라 옛 원묘의 제도를 상고하여 문소전과 광효전을 합쳐 경복궁 북쪽에 새롭게 조성하였다[『세종실록』 14년 1월 16일]. 이때 조성된 모습이 현재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서례」에 그려진 모습이다.
세종은 문소전과 광효전을 합하여 원묘를 조성하였으니 명칭을 새롭게 고민하여 봉성전(奉誠殿)이라 하였다. 그러나 관료들의 반대와 유교국가라는 명분에 의해 1433년(세종 15)에는 창덕궁에 원래 있던 문소전의 불당을 철거하고, 불상을 비롯한 여러 불교 의례에 관련된 물건들을 흥천사(興天寺)로 보냈다.
형태
세종대에 문소전을 전당후침(前堂後寢)의 제도에 따라 설립하였다고 한다. 『국조오례의』「서례」에 기록된 문소전의 그림에서와 같이 3칸 규모의 전전(前殿)이 있고 그 뒤에 5칸 규모의 후침(後寢)이 있으며, 그 사이를 이어주는 복도각이 있다. 평소 후침에 신위를 모셔 두었다가 제사가 있을 때 전전으로 신위를 모셔 왔다. 세종대 기록된 『문소전의궤(文昭殿儀軌)』에 따르면 후침 5칸에는 고(高)·증(曾)·조(祖)·고(考)와 태조의 5위(五位) 신주를 봉안하고, 대제(大祭)를 올릴 때에는 전전 3칸에 모두 모셔 제례를 올렸다. 또 신주를 봉안할 때 태조는 북쪽에 두어 남향하게 하고, 소 2위(昭二位)는 동쪽서 서향하게 하며, 목 2위(穆二位)는 서쪽에서 동향하도록 하였다.
참고문헌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