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우(申祐) 속수서원(涑水書院)
>역주 동국신속삼강행실도 1집(효자도 권1,2,3,4)
>동국신속삼강행실 효자도 제1권 주해
>효자도 제1권
>신우거려(申祐居廬)
申祐居廬
護軍申祐尙州人父版圖判書元儒卒祐居廬三年有二竹生于墳前人以爲孝感所致㫌閭
Ⓒ 필자 | 이성 / 1617년(광해군 9)
호군 신우 샹 사이니 아비 판도판셔 원 죽거 위 삼년 거려더니 두 대 무덤 앒픠 나거 사이 요 효감의 닐윈 배라 더라 졍녀시니라
Ⓒ 필자 | 이성 / 1617년(광해군 9)
신우거려 - 신우가 여막에서 살다
호군 신우는 상주 사람이다. 아버지인 판도판서 원유가 돌아가매 신우가 삼 년을 시묘하였더니, 대나무 두 그루가 무덤 앞에 솟아났다. 사람들이 이르기를, 효성에 감동한 것이라 하였다. 정려를 받았다.
Ⓒ 역자 | 정호완 / 2015년 5월 15일
연려실기술 별집 제4권 / 사전전고(祀典典故) / 서원(書院)
상주(尙州) 속수서원(涑水書院) 효종 정유년에 세웠다. : 신우(申佑) 안렴사(按廉使)이다. ㆍ손중돈(孫仲暾) 좌참찬을 지냈고 시호는 경절공(景節公)이다. ㆍ김우굉(金宇宏) 호는 개암(開巖), 부제학을 지냈다. ㆍ조정(趙靖) 자(字)는 안중(安仲), 호는 금간(黔澗), 본관은 풍양(豐壤)이다. 봉상정(奉常正)을 지냈으며 이조 참의(吏曹參議)에 증직되었다.
申祐 13?? ? 鵝洲 退齋
1 申祐 13?? ? 高麗按廉使申公墓表 墓表 鄭經世 愚伏集
2 申祐 13?? ? 先祖高麗按廉使府君事蹟拾錄 事蹟拾錄 申體仁 晦屛集
정경세(鄭經世) 1563년(명종 18)~1633년(인조 11)
愚伏先生文集卷之十八 / 墓表 / 高麗按廉使申公墓表
尙之轄丹密縣傍。有小石碑立路左。刻曰孝子里。古老傳以爲按廉使申公所居也。過者敬之。謹按公諱祐。仕高麗。官至掌令。嘗爲全羅道按廉使。麗朝故事。以時分遣近侍于諸道。祭告山川。廉問民俗。黜陟守令之幽明。名之曰按廉使。蓋極一時之選也。公處昏濁之世。能皎潔持身。事父母盡孝。父版圖判書諱允濡卒。廬墓三年。朝夕號于墓。有雙竹生墓前。人以爲孝感。事聞旌閭。以孝子名其里。事載國乘及輿地勝覽。公有二子。曰光富,光貴。光富有二子。曰士廉,士贇。士廉彥陽縣監。其玄孫元祿又以孝行趾公美旌閭。公之八世孫今侍講院文學達道氏與余友甚善。一日。以家狀示余而言曰。吾先祖歿已數百年。衣冠之藏。在所居之東十里許蛇浦兌向之原。而墓道無表。子孫又散居遠地。展省不能以時。恐久遂湮夷。撨牧或登丘壟。則雖雲仍亦不得識其處。況其卓絶之行又將泯泯無傳。則豈不悲且懼哉。族兄承旨公在世時。曁余諸同宗謀伐石具趺碣。未及樹而歿。今願得公一語而剞劂之。使先德顯於後。則爲賜大矣。敢拜以請。余惟按廉公之孝誠。旣已感鬼神而斡造化。赫赫在人耳目。奚待蕪拙而傳。顧余尙鄕之末學。而於公又外裔也。於義有不得以辭者。遂攷其狀而敍之如右。其立朝歷官次序及家居行誼。年代已遠而文籍無徵。不得以詳焉。其孫衆多。亦不能盡錄。略書于左。見今在朝者。文學君及其兄適道。祥雲察訪。弟悅道。禮曹佐郞。其所謂族兄承旨。名曰之悌。有文名取大科。爲士類所重。不幸而不克壽。有子名弘望。文學君有子名坫,丘。皆俊秀而溫雅。余所未及知者當亦不少。申氏之祿蓋未艾也。詩曰。孝子不匱。永錫爾類。又曰。君子萬年。永錫祚胤。非公之謂也耶。嗚呼休哉。
일성록 > 정조 > 정조 10년 병오 > 9월 7일 > 최종정보
정조 10년 병오(1786) 9월 7일(정축)
10-09-07[03] 각 해사(該司)에 상언 72도(度)를 판하(判下)하였다.
또 아뢰기를,
“의성의 유학 신정보(申鼎普) 등이 상언에서, ‘저의 선조 안렴사(按廉使) 신우(申祐)는 고려의 명신이고 향사(鄕祠)에 배향된 현인으로, 상주(尙州)에 거처를 정하여 분산(墳山)이 원사(院祠)를 바라다보는 곳에 있습니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작년 봄에 상주의 향품(鄕品) 김익권(金益權)이 안산(案山)을 서로 마주 대하는 요해처(要害處)에 자기 아비를 투장(偸葬)하였습니다. 그래서 본관에 정소하니, 본관이 선조의 외가 후손이었으므로 사건을 맡는 것은 부당하다고 인혐(引嫌)하여 영문(營門)으로 옮겨서 보고하고 선산(善山)의 관아로 송사를 옮겼습니다. 선산의 관아에서 파서 옮기라는 뜻으로 김익권에게서 다짐을 받고, 파서 옮기는 문제는 다시 상주의 관아로 옮겨서 정하였습니다. 그러나 본관이 처음부터 끝까지 부당하다고 인혐하니, 삼가 바라건대 기간을 정해 파서 옮기게 해 주소서.’라고 하였습니다. 선산의 관아에서 이미 파서 옮기도록 공초를 받았다면 송사의 이치로 보아 파내야 하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도 상주목(尙州牧)이 외가의 후손이라고 하여 인혐하는 것은 너무 지나친 것이니, 도신으로 하여금 다시 엄히 관문을 보내어 속히 처결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여, 그대로 따랐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제28권 / 경상도(慶尙道) / 상주목(尙州牧)
【효자】 고려 신우(申祐) 벼슬이 호군(護軍)에 이르렀다. 그 아버지 판도판서(版圖判書) 원유(元濡)가 죽자, 우가 3년 동안 여막에서 지냈다. 무덤 앞에 대 두 그루가 나니 사람들이 효도의 감응(感應)으로 이루어진 것이라 하였다. 일이 알려져 정려(旌閭)하였다.
1 역주 동국신속삼강행실도 1집(東國新續三綱行實圖) 신우거려(申祐居廬) 정호완(鄭鎬完) 2015
申祐居廬 護軍申祐尙州人父版圖判書元儒卒祐居廬三年有二竹生于墳前人以爲孝感所致㫌閭 호군 신우 샹 사이니 아비 판도판셔 원 죽거 위 삼년 거려더니 두 대 무덤 앒픠 나거 사이 요 효감의 닐윈 배라 더라 졍녀시니라 신... ...주 동국신속삼강행실도 1집 東國新續三綱行實圖 신우거려(申祐居廬) 정호완 鄭鎬完 이미지
2 역주 동국신속삼강행실도 1집(東國新續三綱行實圖) 효자도 제1권 목록
李公美 鄭承雨 朴暢 朴世延 少尹全謹 少尹許繼道 進士鄭慥 司直河玄夫 少尹尹安仁 少尹鄭包 中顯大夫南永伸 護軍申祐 府使金頎 淸城君鄭國鏡 觀察使金子粹 金元進 梁好 徐恭 䖝介 梁天龍 郡守文載道 鄭愈 鄭愻 池重海 掌令許少游 李成萬 鄕吏權呂生 鄕... ...道) 진사(進士) 정조(鄭慥) 사직(司直) 하현부(河玄夫) 소윤 윤안인(尹安仁) 소윤 정포(鄭包) 중현대부(中顯大夫) 남영신(南永伸) 호군(護軍) 신우(申祐) 부사(府使) 김기(金頎) 청성군(淸城君) 정국경(鄭國鏡) 관찰사(觀察使)
길야은(吉野隱)을 …… 돌아왔다 야은은 길재(吉再)의 호이다. 길재는 신우(申祐)의 조카사위였으므로 같은 시기에 개경을 떠나 함께 영남 지방으로 내려왔고, 각각 선산(善山)과 의성(義城)에서 살았다. 향산집(響山集)
대산집 제45권 / 발(跋)
주신재의 수묵 뒤에 쓰다 무자년(1768, 영조44) 〔書周愼齋手墨後 戊子〕
우리 서원에 선비 있으니 / 我院有士
그 마음이 옥과 같도다 / 其心如玉
하늘이 널 옥처럼 이루어 / 天其玉汝
거듭 복록을 베풀리라 / 申其祿矣
위의 16자는 신재(愼齋) 주 선생(周先生 주세붕(周世鵬))이 회당(悔堂) 신 선생(申先生)에게 써 주신 글이다. 주 선생이 백운서원(白雲書院)을 창시하여 많은 선비를 길러 내자 원근에서 훌륭한 선비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는데, 선생이 특별히 칭찬과 인정을 받았으니, 그 타고난 자질이 아름다워 도에 가까웠음을 또한 말씀하신 뜻 중에서 상상해 볼 수 있다. 선생이 스승의 문하에서 주선하는 즈음에 절차탁마하여 덕기(德器)를 성취한 것에는 반드시 그 방도가 있었을 텐데, 지금은 증명할 바가 없다. 그러나 선생이 끝내 효우(孝友)로 덕을 이루어 아름다운 명성이 성대하였고, 돌아가신 뒤에 정문(旌門)이 밝게 빛나 백대토록 사당의 제향을 누리니, “하늘이 너를 옥처럼 이루어 거듭 복록을 베풀리라.”라는 말씀이 마치 증서나 부절처럼 들어맞은 것이다. 어찌 훌륭하지 않은가.
증손과 현손에 이르기까지 어질고 효성스럽다고 소문난 이가 많아서 선조의 미덕을 이어 대대로 그 아름다움을 이루었다. 이것이 바로 하늘이 거듭 베푼 복록이 선생 자신뿐 아니라 자손에게까지 미친 것이다. 어진 후손인 신홍교(申弘敎)가 그 부형의 명으로 주 선생의 유묵에 배지를 붙여 첩을 만들어서 나에게 한마디 적어 줄 것을 부탁하였으니, 그 마음 씀이 이미 부지런하다. 그러나 이것으로 선조의 공렬을 이어 지키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한다면 아직 아니다. 모름지기 옛사람이 말했듯 인을 하는 근본인 효제(孝悌)에 힘써서, 자신을 수양하는 것은 옥처럼 윤택하면서 조금의 허물도 없게 하고 마음가짐은 옥을 잡고서 떨어트릴까 두려워하듯 경건해야 할 것이다. 선생의 자손으로서 욕됨이 없게 한다면, 하늘이 신씨(申氏)에게 복록을 내리심이 자못 정중(鄭重)할 것이다. 일단 권말에 써서 후인을 기다리노라.
아무 년 아무 월 아무 일에 선생의 외손 한산(韓山) 이상정이 삼가 쓰다. - 정중은 《한서(漢書)》 주(註)에 빈번하다는 뜻이라고 하였다. -
[주-D001] 회당(悔堂) 신 선생(申先生) : 신원록(申元祿, 1516~1576)이다. 본관은 아주(鵝洲), 자는 계수(季綏)ㆍ순보(順甫), 호는 회당이다. 퇴재(退齋) 신우(申祐)의 6세손이며 조식(曺植)과 주세붕(周世鵬)의 문인이다. 구봉령(具鳳齡), 조목(趙穆), 김인후(金麟厚) 등과 교유하였다. 빙계서원(氷溪書院)을 세워 김안국(金安國)을 제향하고 향약을 실시하는 등 향내 사업에 이바지하였다. 저서로 《회당집(悔堂集)》이 전한다.[주-D002] 옛사람이 …… 힘써서 : 옛사람은 공자의 제자 유자(有子)를 말한다. 《논어》 〈학이(學而)〉에서 유자가 “효제는 인을 하는 근본일 것이다.”라고 하였다.[주-D003] 외손 한산(韓山) 이상정 : 대산의 조부인 이석관(李碩觀)의 처, 즉 조모가 신규(申圭)의 딸이자 신달도(申達道)의 손녀이기 때문에 아주 신씨(鵝洲申氏) 집안이 대산에게는 외가가 된다.[주-D004] 정중은 …… 하였다 : 《한서(漢書)》 권99중 〈왕망전(王莽傳)〉에서 “하늘이 빈번하게 부명을 내린 뜻이 아니다.〔非皇天所以鄭重降符命之意〕”라고 하였는데, 안사고(顔師古)의 주에 “정중은 빈번하다고 말한 것과 같다.〔鄭重 猶言頻煩也〕”라고 하였다.
ⓒ 한국고전번역원 | 김성애 (역) | 2009
이민환(李民寏) 1573년(선조 6)~1649년(인조 27)
紫巖集卷之三 / 行狀 / 申梧峯行狀
夫源深者流遠。根厚者枝茂。此天理之必然也。水木尙爾。況積善之餘慶者乎。觀於鵝洲申氏家。尤信。在昔麗朝。全羅道按廉使
申祐。版圖判書允濡之子也。有至行。廬墓三年。日夜號哭。有雙竹生塋前。人以爲誠孝所感。事聞旌閭。丹陽郡守希信。乃其孫。卽公之七代祖也。公諱
之悌。字順夫。考諱夢得。贈通政大夫承政院左承旨兼經筵參贊官。祖諱應奎。贈嘉善大夫工曹參判兼同知義禁府事行承仕郞。恭陵參奉。曾祖諱翰。贈通政大夫掌隷院判決事。妣贈淑夫人月城朴氏。士人敏樹之女。厚陵參奉亨孫之孫也。以嘉靖壬戌七月辛丑。生公。公天性至孝。生八歲。丁母夫人憂。執喪終制。無異成人。小妹生未晬而母夫人下世。襁褓中啼聲甚哀。公亦稚齡。痛自悼念。常抱置所處房內。勤求乳嬭。親自護養。晝夜不離于傍。聞者異之。自幼刻意爲學。隣有一門老。挾冊請學。門老方鋤圃。久不出。公輒涕泣。立於樊外。必受課學。然後乃辭去。稍長。益辨志勵業。考左承旨公慨念門戶衰替。日夜勸督。冀其成立。聞安東金上舍彥璣有學行。敎誨生徒。公年未成童。負笈往從之。厲志力學。夙夜勤苦。金公奇之曰。此兒言貌謹重。篤學又如此。他日必成大器。年十七。讀書山堂。一日有村女美貌者。就見因以往來。或至夜深躕躇。公默識其意。使其女取楚來。正色曰。汝無端到此。夜分不還。必有意於吾也。汝以村女。陰懷貳心。欲䙝書生。焉得逃其罪乎。撻之以送。居數十日。一漢持酒饌進餽。公素不相知。問其故。漢曰。聞公有盛德。敎村女以正道。故來拜耳。蓋其女感其言。還告其夫也。公自少持身莊嚴。類如此。萬曆己丑。擢增廣甲科第三人。拜司贍寺直長。朝中人見公風儀秀出。動止閒習。無不嘖嘖稱歎。辛卯春。陞成均館典籍。卽授司憲府監察。秋。除禮安縣監。金鶴峯惜之曰。仕進之初。何汲汲求外補乎。近日朝議將薦君兵郞。盍少待乎。公答曰。仕路通塞有數。且縣近庭闈。便於省養。卽赴任。翌年壬辰。遭倭變。領兵赴東邊。聞賊充斥內地。還守本縣。安集使以安東無守。檄公兼任。仍招集兩邑兵民。親領赴龍宮地。遮截賊路。兵散而還。賊自安東犯本縣。公更謀擧兵。賊退乃止。當亂初搶攘之日。列郡守令皆棄城逃竄。而公以白面書生。獨提兵奮義。爲遏賊之計。時論韙之。巡察使以公不離任所。論啓賞職。兼禮曹正郞春秋館編修官。時歲荒民飢。公盡力賑救。逐日分給斗粟。曰人情見多則易費。不如隨急輒救。以此縣民賴免顚壑。遠近流丐。聞聲坌集。公無不賑恤曰。此皆國民。何分彼此。全活者甚衆。公常慨念年少未及溪門。自莅本縣。往來陶山。與長老士友。講究學問旨訣。商確政務。殆無虛日。公與烏川金內翰垓。同登己丑榜。亂離中。公守本縣。金內翰爲義將。因以相從。交契甚篤。每語及時事。輒相與慨然曰。吾輩當一心殉國。脫有不幸。可託以妻子。未久。金內翰卒逝。闔家飢餒濱死。公爲之愍念。盡力賑濟。率致稚兒于衙內。羸瘠骨立。夫人承公命。親自梳頮。去其垢蝨。先以稀粥。潤其枯腸。經月後始飯之。得以保活。幽明之間。終始不負。公之高義。可謂無媿愧古人矣。丙申夏。瓜蒲。體察使啓請仍任。丁酉春。拜司諫院正言。遞授侍講院文學。以親家在南方。去賊藪不遠。無意遠宦。從事於巡營幕下者二年。庚子春。拜全羅都事。辛丑。除禮曹佐郞。陞正郞。秋。除全州判官。巡察使以兼任留營事務煩劇。公盡心裁決。咸當於理。巡察弟。恃勢干請。公一切揮斥。抑強扶弱。威惠竝行。吏民莫不畏服。遞後。州人立碑頌之。壬寅春。拜司憲府持平。旋遞爲體察使從事官。秋。爲全羅道暗行御史。癸卯。按覈慶尙道軍務。甲辰夏。復除侍講院文學兼春秋館記注官知製敎。參宣武扈聖勳一等。乙巳夏。復入爲持平。兼職如故。時有風水災。自上求言。府中將陳箚。公構草。有權奸當國語。大司憲朴承宗怒其語逼時宰。格而不奏。遂呈告歸鄕。丙午秋。除統制使從事官。行裝諸具。無不破毀。人有言統營。工匠聚會處。何如是罷弊耶。公曰。吾嘗見統制使內外求請軸。其中所載。不可勝計。目閱可駭。吾何忍添名於其間乎。丁未春。除江界判官。以親病未赴。其夏。丁內艱。廬墓三年。哀毀盡禮。足不出山門。己酉。服闋。時昏朝政亂。除工曹正郞。不赴。庚戌。除忠淸都事。李蒼石贈詩曰。臺閣卽今多後進。朝廷誰復記先生。數月卽解歸。秋。除咸鏡道評事。辛亥冬。除全羅都事。皆不赴。癸丑秋。除昌原府使。爲繼母養。黽勉赴任。當路者以奴婢相訟事。請囑。公據理斥之。時鄭仁弘以領相在陜川。遙執朝權。四隣守令。莫不奔走干謁。惟恐或後。而昌原去陜川不遠。公絶不到其門。仁弘雖知其不附。而亦無以怒也。有一品官做言。府使私用宮闕綿布四十疋。播告仁弘。仁弘曰。吾聞其爲政。必不爲此也。公聞之。卽令鄕所。會府民。査覈綿布。而終不問做言者。及公之歸也。其人來餞路上。追謝而去。蓋其心服也。本府兵燹之後。學校頹廢。公卽鳩材營建。勸課儒學。有獷賊群聚島中持兵阻險。出入焚掠。隣邑懼不能下手。朝家甚憂之。公設爲方略。悉加勦捕。其黨瓦解。沿海諸郡賴以無事。事聞。陞通政階。戊午春遞還。閒居六年。至癸亥春。朝廷淸明。公聞反正之夜。廢主蒼黃逃竄。卽潸然出涕曰。自取誰尤。今上卽位初。擢拜同副承旨兼經筵參贊官。春秋館修撰官。以病陳疏不赴。甲子正月初八日。終于正寢。享年六十三。葬義城縣羽谷面栗谷里己坐亥向之原。丙戌。追贈嘉善大夫吏曹參判兼同知經筵義禁府春秋館成均館事。世子左副賓客。蓋以公在宣廟朝參勳。故有此恩例也。公天資粹美。器度寬偉。居家以孝悌爲本。持身以忠信爲主。平生以早失所恃。爲至痛。義興外家。母夫人結縭時寢房猶在。公自少往來之日。嘗到房外。遶壁叩窓。悲泣不自勝。傍人爲之隕淚。奉繼母吳氏。至老不懈。滫瀡之供。盡力取足。凡家間事。無不將順。蓋有人所難能者。而亦有人所不及知者。伯氏長於公纔一歲。而自兒時事之如嚴父。愛敬備至。壬辰亂。遭鴒原之變。身縻職事。未及奔赴救護。尋常追戀。輒泫然流涕。友愛諸弟。常加警誨。恩義俱篤。是以人無間言。公憫念宗姪之少孤零丁。祠廟之修。享祀之具。必躬自措置。分己田土。以助奉先之資。祭祀時。必前期齋沐。悲感之容。見於顏面。及其老病。猶敎督姪孫。略無暇日。子弟等諫其病中勤昔。公卽斥之曰。何忍使亡兄子孫。爲禽獸乎。歲癸亥。公年過六十。已患風痺。往調山齋。而繼母吳氏。亦感疾。公以山齋去親家稍隔。卽強疾來侍湯藥。過三冬。日夜不怠。元氣萎薾。殆不支持。子弟親屬。咸言他子弟多在親側。公宜退家調病。公堅執不許。及其病篤。不省人事。而憂慮母病。頃刻不弛。吳氏病革。公亦奄奄。子弟舁公還家。而母氏何嘗之問。嗚咽在口。侍者以砂糖入口。不能下咽。而惟聞喉中微聲。此物進母氏否。身後事無一毫言及。而母病何如之說。旣絶乃已。嗚呼孝乎。孝子不匱。永錫爾類者。其公之謂乎。公性勤儉仁厚。莊毅有守。居常晦默。不自矜伐。樂聞人善。而務掩其過。每早起頭不脫冠。腰不解帶。雖一家人。未嘗見其惰慢之容。平生華靡之服。不掛於身。嘗著木綿衣曰。此服於余甚便。平居手不釋卷。在官時。晝則整理公務。夜則張燈讀書。輒至夜分。夫人曰。釋褐已久。何乃自苦至此。公笑曰讀書豈但爲立揚而已乎。常戒其子弟曰。吾以草莽。幸叨科第。汝等須十分謹愼。勿言人之惡。人或議己。切勿相較。內外親屬之貧窮者。曲加矜念。隨力周急。至於婢僕下賤。飢寒疾病。無不救恤曰。是亦人子。而寄命於我者也。惠愛勤至。咸得歡心焉。其處鄕也和氣藹然。與人有父母者語。必敎之以孝養。與有兄弟者語。必勖之以友愛。與儒士語。必勸之以讀書。待人接物。一以誠款。故至今鄕人莫不敬慕焉。其立朝也。志操堅確。進退明正。律己淸謹。務持大體。常曰居官者以罷職爲恐。則不得不屈於人。是以在官爲政。必行己志。寘散之日。尋常書札。絶不入京。一生蹤跡。未嘗及於權貴之門。嘗在京時。有連姻時士來見曰。某宰相愛君欲見。君須往拜。公不答。他日又來言。公曰。草莽寒士。何敢跡及權貴門庭乎。其人怫然而去。隣邑。有一朝士。方幸於權門。一日。夜來宿公寓所曰。某宰相常語及君。頗願見。君可往拜。公切責曰。君我俱是寒士。濫叨科第。此亦萬踰涯分。況仕路窮通有命。不可汲汲有榮進之心。我則決不敢。君當自愼行止。其人慙恨而去。未久。竟遭竄謫。公閒居有詩曰。可惜南州淪謫客。失群何事落深坑。自註其下曰。災厄之來。有係於天。有係於人。係於天者。吾無如何。係於人者。可愼而避之。某也。不念友生忠告之情。急於仕進。自蹈禍機。惜哉。渠能記憶吾言否。世之知公者。皆以公輔期之。卒之位不滿德。年未耄耋。豈非有數存乎其間。而抑難進易退之節。有以致之耶。柳西厓一見。稱其爲第一人物。張旅軒亦謂公賢人。稱道不已。諫詞曰。溫恭雅度非虛矯。樂易眞情是自然。先兄敬亭祭文。有曰。確乎難拔之操。毅然難犯之色。恢乎有容之量。今不可得而復見矣。又曰。秉簡而著直節之名。理劇而騰循良之聲。余雖不言。世固有知者云。則公之風神事蹟。槪可想見矣。公初居梧桐山北。自號梧峯。晩年。移居龜村。又號龜老。公娶咸安趙氏。贈嘉善大夫吏曹參判兼同知義禁府事行通訓大夫珍山郡守銅虎曾孫。贈資憲大夫刑曹判書兼知義禁府事址之女。生一女一男。女適進士李擧。男弘望。前司諫院正言。娶前參判李民寏女。有一男八女。男曰漢老。女壻士人柳重河金時任,李朝衡,任世準,都爾卨。餘未嫁。庶子漢傑,漢伯。公在宣城。當大饑。血誠賑救。全活屢千人。時公無嗣。夢忽有神人來告。君積善。天將錫君奇兒。君其受之。以望字名焉。庚子。正言果生。積善餘慶。其理有必然者。有才行。爲士類所重。當不墜家聲。流遠而枝茂者。其將復在斯歟。年月日。嘉善大夫前刑曹參判李民寏。謹狀。
최현(崔晛) 1563년(명종 18)~1640년(인조 18)
訒齋先生文集 拾遺 / 事蹟 / 三仁事蹟
耕隱先生
先生姓李。諱孟專。字伯純。號耕隱。世居星州北面椧谷村。自先考諱審之判書公移居善山南面荊谷村。在金烏山下洛水之西 先生生長名門。早擢高第。選補翰林。世宗朝。歷司諫院正言,知製敎。聞望夙著。中年見時事艱危。力求補外。得居昌縣監。以淸白聞。錄淸白吏 景泰甲戌間。時事一變。先生益自韜晦。無意世念。退老網障村。託跡盲聾。謝絶親朋。子弟問其故則曰。修養所忌。朔日每向朝暾而拜。子弟問其故則曰。祈禱已疾。嘗自吟曰。眼欲昏昏耳欲聾。見聞無敏與癡同。雖家人婦子。莫能測識也。與司藝金先生諱淑滋爲平生道義之契。佔畢齋入語則披露心曲。應答無礙。畢齋曰。我先生之疾。今庶幾矣。先生答曰。疾非庶幾也。阽死蓬廬。旣見君子。自不覺心胸豁然也。金先生識其微意。改容加敬。至於吐款相對。勸酬杯酌。忘其早暮而歸。夫人金氏以此知盲聾之非眞也。先生處于廳事。曝穀在前。每爲鷄雀啄盡而任其攤棄。未嘗語人。至臨沒。一家子弟始知之。先生誠孝出天。生事葬祭。一遵禮文。待人恭而少戲笑。視物淡而無所嗜。淸儉爲家。閫範嚴肅。禁子弟騎從曰。親病如此。乘馬從徒。情豈自安乎。家人子孫。非百里之遠。則皆舍馬而徒。第三子惇往來軍威聘家也。未嘗以騎從自逸。一日至延香。有農者追捕獐兒。惇爲奉病親。乞其獐。負入網障村。相去二十餘里。一家儉素如此。有一後生問曰。先生林下百年。家徒四壁。恐爲子孫憂。先生曰。貧窶傳家。何病乎。佔畢齋先生撰彝尊錄。記以師友之列而書曰。表裏無瑕。與物無競。中年不樂仕宦。退老網障。年至九十。夫人金氏亦無恙云云。雖以當時所諱。不敢直書。而微意已見。先生弟參判恭僖公諱季專記先生出處終始。其說頗詳。而亂離散失。先生私稿二秩。幷失於兵火中。先生生于洪武二十五年壬申。終于成化十六年庚子。享年八十九。葬于善山府東延香之南彌石山西向之原。有短碣而無文。夫人金氏之墓在其前。
先生娶直提學金成美之女。善山人。
爲尙州按廉使申祐之壻。 生四男一女。男一曰朝散大夫行大丘敎授恂。嫡孫淸河縣監堢源。外泒有修撰李德洙,都事李德泗, 淸州 判書鄭經世。尙州 曰惴。外泒有縣監李軫李輔, 軍威 承旨崔晛, 善山 進士申適道,掌令申達道,佐郞申悅道。義城 曰惇。外泒有牧使金涌,進士李榮男。曰怡。外泒有進士金安節,生員金光繼, 禮安 進士朴弘慶,幼學宋光弘。善山 女適輔德朴斯悌。姓孫之在星州者無多。在永川者稍多。六代長孫司果希芳。其子𤥵。支孫生員希陽。其子得澍,得㵟得以奉先生丘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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申仡 1550 1614 贈承旨申公墓誌 墓誌 崔晛 訒齋集
최현(崔晛) 1563년(명종 18)~1640년(인조 18)
訒齋先生文集卷之十二 / 墓誌 / 贈承旨申公墓誌
公諱仡。字懼之。其先鵝州人。八世祖諱祐。仕高麗。爲全羅道按廉使。以孝旌其門。是生諱光富。中顯大夫內府令。內府令生諱士廉。彥陽縣監。縣監生諱錫命。成均生員。於公爲高祖。曾祖諱俊禎。承仕郞。祖諱壽處士。考諱元祿。號悔堂。有孝友賢行。事聞旌閭。妣星山李氏。曾祖諱孟專。奉正大夫司諫院正言。祖諱瑞。通德郞通禮門通贊。考諱智源。秉節校尉。以嘉靖庚戌九月九日。生公。公稟質醇厚。慈詳惻怛。孝友因行。式遵先訓。歲丙子居外艱。廬墓終制。奉慈闈十八年。色養無違。癸巳。遭內憂。時丁大亂。不暇禮義。而葬祭一從禮制。追慕之心。終始不懈。事伯氏盡友恭。敎諸子以義方。嘗作一絕曰。持身如履薄。待人一至誠。若不謙受益。恐忝爾所生。又以取友必端。不妄交遊爲戒。處於鄕黨。謙恭自牧。與物無競。凡人有喪。莫不匍匐相救。癸甲兵荒之歲。饘粥不給。而親戚之飢餓者。必以周急。平生無疾言遽色。口不言人過。然其好惡取舍。一斷以義。未嘗枉道苟合。家契屢空。怡然自處。不以爲戚嗟。嘗曰。吾見世人。勤苦營產。以遺子孫。而有不能守者。此不知命也。中年多疾。守靜養痾。攻擧業。屢中鄕解。而亦未嘗留意焉。甲寅六月二十七日。以疾終于正寢。享年六十五。配順天朴氏。端良仁孝。允協公德。事君子訓子女。皆可爲壼範。與公同年生。而歿亦同年四月十六日。是歲十二月二十八日丙午。合葬于義城縣南五兔山兌向之原。嗚呼。以公兩美之相合。宜其克享遐福。而身不免窮厄。壽亦靳耆耋。天之報施善人。果止於是耶。崇禎己巳。贈公通政大夫承政院左承旨兼經筵參贊官。以男達道參寧社原從故也。男女六人。長適道中丙午進士。仕爲祥雲道察訪。次達道擢癸亥廷試壯元。今爲司憲府掌令。次悅道擢甲子增廣。兵曹佐郞。女適士人金有曄。無後。次適訓鍊奉事任乃重。次適僉正朴宗敬。內外孫男女總若干。諸孤遵公之志。克述家聲。意者天之福善之道。其有待於今日也。掌令述世系行蹟。請誌於余。余於公。爲兩姨兄弟也。以吾早失所恃。見憐於從母。公亦視以親弟。壬辰亂。托公伯仲爲命。生死共之。知兄之篤行。宜莫如余。有拙於稱揚。無嫌於溢美。至其世惇孝友。嘉言懿行。多有可稱。而今不盡述焉。皇明崇禎三年庚午五月日。前江原監司崔晛。謹誌。
申元祿 1516 1576 鵝洲 季綏 悔堂
1 悔堂申公墓誌 墓誌 崔晛 訒齋集
2 贈通政大夫戶曹參議悔堂先生申公行狀 行狀 李光庭 訥隱集
訒齋先生文集卷之十二 / 墓誌 / 悔堂申公墓誌
公姓申。諱元祿。字季綏。號悔堂。鵝州人。六世祖諱祐。仕麗季。爲全羅道按廉使。時丁昏濁。獨持廉潔。以孝行旌其門。歷內府令諱光富,彥陽縣監諱士廉。至成均生員諱錫命。是公曾祖。祖諱俊禎。承仕郞。考諱壽。業儒素。妣義興朴氏。郡守惟昌之孫。主簿自儉之女。公幼而聰穎。志操耿介。惇行孝悌。不由勉強。先公早嬰風漸。醫治不效。公年十餘歲。登八公山採藥。從良醫劑之。日夜湯進。目不交睫。衣不解帶者八年。癸巳春。公年十八而遭憂。哀有過而禮無愆。自殯至葬。凡所以附於親者。盡其誠信。廬于墓側。泣血三年。人稱善居喪。戊戌。承慈敎遊國學。自是硏精篤志。講習不怠。嘗與伯氏。同屈於漢城發解。還途。伯氏遘瘧。未克前路。至天民川。秋水方漲。人言此水有毒蟒害人。不可徒涉。公負兄乃克濟。癸卯冬。聞豐基倅周愼齋世鵬。始建竹溪書院。士子坌集。公贄文往謁。愼齋出題試院生。批公所製文曰。我院有人。其心如玉。天將玉汝。申其祿矣。自是以德器稱之。因規以言行相顧之實。東方道學之緖。亹亹忘倦。辭歸之日。贈一絕云。爲學思原水。論交取兕觥。相規唯十字。庶悉百年情。其眷重也如是。而公亦佩服終身焉。連遭中仁廟國恤。時人。只擧義服之制。公獨以素餐終三年。辛亥春。公歎曰。光陰易邁。立揚無期。慈闈年深。甘旨不稱。古人云家貧親老。不爲祿仕。一不孝也。吾將冒恥笑。得除殘邑訓學。以遂負米之情。於是除湖南長水學。以資養焉。癸丑。荒政方棘。邑宰委公賑恤之任。公曰。此乃濟人之事。豈敢規避。竭誠措置。民賴以存活。甲寅。聞周愼齋易簀。奔往哭之。心喪三年。公之自竹溪還也。謂伯氏曰。豐川之有書院。乃是盛事。吾鄕獨無藏修之所乎。遂約同志。營建書院于長川之上。創立十餘間。因時不利而止。至戊辰秋。告于邑宰。專任其事。晨夜殫力。歲再周畢工。立祠廟。以鄕先正金慕齋奉安。方伯啓聞。賜額長川。其篤於庠塾之事。勉進後學。以衛斯文。乃公素志也。庚申。與同鄕姓族。結約修契。講信親睦。又與柳義興希潛。議立鄕約。春秋講禮。伯氏嫁女。勤苦資粧。使不費力。妹夫喪葬。獨當營辦。其四女一男。親自擇人婚嫁。使不失時。凡遇窮族婚喪。類如是。嘗書壁上曰。負重涉遠。不擇地而休。親老家貧。不擇祿而仕。知公前後除學。皆爲親屈也。及其親年益衰。專以定省爲事。未嘗遠遊。凡可以慰悅親心者。無不致意。嘗雜植奇花異草。每於佳辰令節。陪親邀兄。作宴親曲八闋。歌以獻酌。盡愛日之誠。敍天倫之樂。因口占一絕曰。愁裏生涯莫怨嗟。吾門一樂最堪誇。七旬兄弟斑衣處。百歲慈親有幾家。時親年九十餘矣。親之所厚者。必厚其人。進食必區二品。擇其美味而進之。請其所與而與之。所着褻衣。常作小槽。必手澣然後付人。便旋之器。亦必躬自除穢。不使之人。母病轉劇。遑遑晝夜床褥。小不安穩。則重茵累席。或藉以白絮柔毛。務安其體。憫其皮膚糜爛。裹衣抱坐。日復益勤。親曰。我不遄死。使汝勞苦。誰知汝之至此哉。公竦然曰。固所子職。是何言也。雖千萬歲。猶爲不足。有何勞焉。乙亥。親病日篤。嘗糞以驗之。飮泣籲天。食不下咽。及其終天也。不以百歲爲長。而以棄養之促。爲無窮之痛。送終之事。素講心上。家雖貧乏。辦若預搆。不及於兄姊。務合於禮制。無有遺憾。供奠之具。躬執其勞。不食菜醬。唯糜粥糲飯而已。嘗作慈堂影幀。至是揭之几筵上。朝暮哭拜。以致如在之誠。日三省墓。環繞哀痛。雨雪不廢。子弟泣諫。卽曰。命稟於有生之初。豈以此致死乎。丙子三月。得疾彌留。哭奠之禮。猶不少廢。至四月初七日。乃曰。明日是觀燈令節。可設別奠。命取薔薇花來。因扶起盥漱。病旋大作。已不可爲。內子來省。嚬顣曰。廬所非婦人所至。何以來爲。問後事不答。但云以母氏遺像。置我棺傍。吾將奉侍于泉下矣。至八日酉時。乃逝。嗚呼。人生天地間。孰無稟賦之良性。孰非職分之當爲。而鮮有全其孝悌之行者。公稟質旣異於人。而早知踐履之學。旣孝旣友。老而彌篤。不爲崖岸斬絕之行。只就日用間盡其所當行者。故知公者寡而名不顯於世。若其處心行己之正。待人接物之誠。敎子以義方。訓人以遜悌。存中者仁。處事也勤。堅苦篤行之志。孜孜焉惟日不足。雖不博究諸書以極其所就之地。而本原如此。其他不必論也。況孝悌百行之原也。公能力行於人所不知之處。克紹按廉公之芳躅。以立家範。君子多能乎哉。此可爲則於後世也。公生于正德丙子十二月癸亥。歿于萬曆丙子四月辛未。春秋周甲。六月某日。葬于八智山先塋下巽坐之原。配星山李氏。大提學堅幹之後。司諫院正言孟專之曾孫女也。祖通德郞通禮門通贊諱惴。考秉節校尉諱智源。與公同年生。柔婉淑愼。承公之志。家貧無戚容。施與無難色。事姑三十五年。孝誠亦純至矣。歿于萬曆癸巳。合堋公墓。生二男。長曰伈。司憲府監察。次曰仡。贈通政大夫承政院左承旨。監察娶司猛蔣崙女。生五男一女。長尙道判官。女適察訪李挺南。次泳道,志道,敏道,師道。承旨娶展力副尉朴倫女。生三男三女。長適道祥雲道察訪。次達道司憲府掌令。次悅道禮曹正郞。女長適士人金有曄。次適奉事任乃重。次適僉正朴宗敬。曾孫男女四十餘人。噫天將以是爲報耶。李氏卽我從母也。公之懿行。旣知之詳矣。且得伯氏所撰家狀。無一字溢美。所謂父母昆弟之言。人無間然矣。遂略加增剔。因以爲誌。崇禎乙亥冬十有一月日。通政大夫前守江原道觀察使兼兵馬水軍節度使巡察使崔晛。謹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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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만도(李晩燾) 1842년(헌종 8)~1910년(순종 4)
향산집(響山集) 향산집 제17권 / 행장(行狀) / 성은 신공의 행장〔城隱申公行狀〕
공은, 휘는 흘(仡), 자는 구지(衢之), 호는 성은(城隱)이며 성은 신씨(申氏)이다. 고려 태사 장절공(壯節公) 휘 숭겸(崇謙)의 12세 후손 문하시랑 휘 익휴(益休)가 아주군(鵝洲君)에 봉해져, 이곳에 적(籍)을 두게 되었다. 그 4세손 판도 판서(版圖判書) 윤유(允濡)는 정숙(貞肅)이라는 시호를 받았으며, 아들 안렴사(按廉使) 우(祐)는 일찍이 포은(圃隱) 정 문충공(鄭文忠公 정몽주)에게 배워 대의(大義)를 들을 수 있었고 고려가 운이 다하자 길야은(吉野隱)을 이끌고 향리로 돌아왔다. 호는 퇴재(退齋)이다. 부친이 세상을 떠나자 여묘(廬墓)를 살아 효행으로 정려(旌閭)되고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에 수록되었으며, 속수서원(涑水書院)에 제향되었다. 아들 광부(光富)는 우리 조정에서 벼슬하여 대성(臺省 사헌부와 사간원)의 직책을 역임하고, 직간을 하다가 내부령(內府令)으로 좌천되었다. 이분이 언양 현감(彦陽縣監)을 지낸 사렴(士廉)을 낳고, 사렴이 성균 생원 석명(錫命)을 낳았으니, 공에서부터 4대 위이다. 증조부 휘 준정(俊禎)은 교수를 지냈고, 조부 휘 수(壽)는 인물이 뛰어나고 큰 절조가 있어 여러 번 침랑(寢郞)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부친 휘 원록(元祿)은 효우와 어진 행실이 있었고 호조 참의에 추증되었으며, 역시 정려(旌閭)되고 《삼강행실도》에 수록되었다. 호는 회당(悔堂)이며 장대서원(藏待書院)에 제향되었다. 모친은 숙부인 성산 이씨(星山李氏)로, 경은(耕隱) 선생 이맹전(李孟專)의 증손자 병절교위(秉節校尉) 이지원(李智源)의 따님이다.
가정(嘉靖) 경술년(1550, 명종5) 9월 9일에 의성(義城) 원흥동(元興洞)의 집에서 공을 낳았다. 공은 천성이 너그럽고 화락하였으며, 어려서부터 제자(弟子)의 직분을 잘 지키고 그 나머지로 학문에 힘을 써, 굳이 이끌고 재촉하지 않아도 스스로 성취하였다.
병자년(1576, 선조9)에 부친 회당공이 세상을 떠나자 죽을 마시고 거적에서 자면서 상례를 행하기를 과도하게 하고, 장사하고 나서는 여묘(廬墓)를 살면서 삼년상을 마쳤다. 그 후에 묘하(墓下)에 몇 칸의 집을 짓고 영모재(永慕齋)로 편액하여, 평생 슬픈 마음으로 살피는 장소로 삼았다.
임진년(1592)에 외침(外侵)이 일어나자 모친을 모시고 황학산(黃鶴山)으로 들어가, 전란이 어지러운 중에서도 몸을 편히 모시고 뜻을 받드는 데 모든 방도를 다하였다. 얼마 안 있어 삼경(三京 서울ㆍ개성ㆍ평양)이 함락되고 임금의 행차가 서쪽으로 갔다는 소식을 듣고는, 백씨 흥계공(興溪公)과 더불어 두려워하고 비분강개하여 눈물을 흘렸으며, 앞장서 의병을 일으키자 열흘 동안에 모인 사람이 수백 명에 이르렀다. 흥계공을 추대하여 맹주로 삼고, 편지로 김공 해(金公垓), 유공 종개(柳公宗介), 정공 세아(鄭公世雅)와 약조하여 일직현(一直縣)에 있는 정자(亭子)에서 회동하였으며, 마침내 좌위(左衛)와 우위(右衛)로 나누고 세력을 합쳐 적에 대항하였다. 의로운 함성이 한번 터지자 사람들이 마땅히 죽을 곳을 알고, 나약한 자는 기운을 내고 겁 많은 자는 용기를 냈다. 비록 전장에 나아가 적의 목을 벤 공은 없지만 근방의 네다섯 고을이 이 때문에 온전할 수 있었으니, 이것은 실로 공이 도우고 꾸민 덕택이었다.
이듬해 봄에 모친의 병이 깊어지자 공은 밤낮으로 병을 낫게 해 달라고 하늘에 빌고, 상을 당하자 거의 목숨이 끊어질 지경으로 애훼하였으며, 장사(葬事)와 제사에는 한 가지도 예에 어긋남이 없었다. 상복을 벗고 나서는 탄식하기를 “지난날 과거 보는 일에 마음을 끓이고 뜻을 바쳤던 것은 부모를 영예롭게 하고자 한 것이었는데, 지금 두 분이 이미 돌아가셨으니 이제 누구를 위하여 다시 하겠는가.” 하고, 이때부터 과거 공부를 그만두었다. 매일 정주학(程朱學)의 책들을 가지고 깊이 연구하고 그 뜻을 끝까지 궁구하여 때로 침식을 잊기까지 하였다. 장여헌(張旅軒 장현광(張顯光)), 서낙재(徐樂齋 서사원(徐思遠)) 두 선생과 매우 친하게 지내어 서로 만날 때마다 항상 경전의 뜻을 강론하였는데, 한번은 장 선생을 위하여 〈여헌설(旅軒說)〉을 지으니 선생이 보고 크게 감탄하며 칭찬하였다.
계묘년(1603, 선조36)에 조정의 명으로 최인재(崔訒齋) 등 제현(諸賢)과 더불어 《난중사적(亂中事蹟)》을 찬집하여 편수청(編修廳)에 올렸다. 완평부원군(完平府院君) 이 상공(李相公 이원익(李元翼))이 이 일을 담당하고 있었는데, 공이 기록한 글을 보고 고증이 정박(精博)하고 문장이 전아(典雅)하며 기사의 체요(體要)를 잘 파악하였다고 인정하였다.
무신년(1608, 광해군 즉위년)에 일도(一道)의 선비들을 이끌어 종질 홍도(弘道)와 함께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 선생을 위한 신변소(伸辨疏)를 올렸다. 신해년(1611, 광해군3)에 정인홍(鄭仁弘)이 요로에 있으면서, 퇴계 선생이 일찍이 자기 스승인 조남명(曺南冥 조식(曺植))과 성대곡(成大谷 성운(成運)) 두 선생의 병폐를 지적하고 중도(中道)를 허여하지 않았다 하여, 퇴계 선생을 처음 문묘에 제향(躋享)할 때 함부로 무함하고 핍박하는 말을 하였다. 공이 그 소식을 듣고 분연히 말하기를 “이 일은 의리에 관계되는 것이다.” 하고, 이에 퇴계와 남명 두 선생이 서로 허여한 의리를 찾아내어 정인홍의 주장을 반박하고, 대궐에 나아가 진소(陳疏)하니 그 대략은 다음과 같다.
“이모(李某 이황을 가리킴)가 조모(曺某 조식을 가리킴)와 성모(成某 성운을 가리킴)를 일러 ‘남을 업신여기고 세상을 가볍게 여긴다.’라고 하고, ‘노장(老莊)에 물들었다.’라고 하고, ‘중도(中道)라고 하기 어렵다.’라고 한 것은 그들이 벼슬하지 않았던 것을 가리킨 것이 아니고, 단지 그들의 기상을 논하여 치우친 데가 있음을 애석하게 여긴 것이니, 그들을 이끌어 크고 지극한 중정(中正)의 도로 돌아가고자 한 것을 언외(言外)에서 또한 알 수 있습니다. 지금 정인홍은 처신을 고상(高尙)히 하는 것을 중용(中庸)이라고 잘못 알아서 조모와 성모가 이모로부터 무함을 받았다고 하고, 또 과거(科擧)를 통하여 발신한 것을 가지고 머뭇거리며 세상에 영합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신이 알기로 조모가 과거 공부를 그만둔 해는 이모가 이미 높은 벼슬에 오른 뒤였는데, 만약 조모가 일찍 급제하였다면 그래도 머뭇거리며 세상에 영합하였다고 할 수 있었겠습니까. 또 가정(嘉靖) 을사(1545, 인종1) 연간을 벼슬하여서는 안 되었던 때라고 하였는데, 만약 나라가 위태로울 때에 주선한 것을 가지고 도를 잃은 것이라고 한다면 영무자(甯武子)가 어찌하여 성인에게 일컬음을 받았겠습니까. 이모는 천성이 순수하고 실천이 독실하며, 그 말과 글은 실로 선성(先聖)의 유지를 밝히고 후학(後學)에게 모범을 보였으니, 참으로 일상의 곡식과 의복처럼 없앨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정인홍은 이모를 문학(文學)으로 지목하면서 ‘문장을 쓰는 데 깊이 빠지는 걱정이 있다.’라고 하였습니다. 아, 이는 주자(朱子)가 이것으로 양명(陽明)에게 무함을 당한 것이니, 어찌 오늘날 다시 이런 말이 있으리라고 생각이나 하였겠습니까. 더구나 조모가 일찍이 이모에게 편지를 보내어 ‘선생 같은 분은 자신이 높은 경지에 이르렀습니다.’라고 하였고, 또 ‘제가 평소 경모하기를 하늘의 북두성처럼 하였습니다.’라고 하였으며, 또 ‘아름다운 문덕(文德)이 있는 선생에게 가르침을 받을 방법이 없습니다.’라고 하였으니, 그 경모하는 뜻이 지극하였던 것입니다. 이러한 조모의 말은 백세(百世)에 확실히 전해지는 것인데도 정인홍처럼 직접 가르침을 받은 자가 도리어 다른 주장을 외치니, 이는 비단 이모를 알지 못한 것일 뿐만 아니라 또한 자신의 스승을 알지 못한 것입니다. 아, 저 정인홍은 산림에서 명망을 얻어 스스로를 과대평가하고 한마디 말을 내어 천하를 바꾸려고 생각하고 있는 데다, 지금 성상의 돌봄을 받아 마음에 믿는 바가 있어 마음대로 붓을 놀리고 내키는 대로 말을 하여 사람의 눈과 귀를 어지럽히기까지 합니다. 이런 행실이 가져오는 폐단이 장차 인륜을 없애고 천리를 해치는 데까지 이를 것인데도 전하께서 바로 변척(辨斥)하지 않고 도리어 우악하게 허여하니, 신등은 사설(邪說)이 횡행하는 폐해가 장차 이로부터 점점 더 심해질까 두려워합니다.”
상소가 들어가자 폐주(廢主 광해군)가 윤음을 내려 부드럽게 타일렀다.
당시 조정에 흉악한 사람들이 가득하여 사류(士類)에게 화(禍)를 씌우는 짓을 일삼았으나, 그래도 이 일로 공을 해치지는 못하였다. 공은 세상일이 점점 어그러지는 것을 볼 때마다 항상 주먹을 불끈 쥐고 길게 탄식하였고, 일찍이 안동 교수(安東敎授)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공은 자식들에게 과거를 위한 글을 배우지 말도록 하고서 “지금은 선비가 벼슬에 나아갈 때가 아니니, 오직 문을 닫아걸어 자취를 감추고, 말을 삼가고 행동을 조심하여 조상의 덕에 누(累)를 끼치지 않아야 한다.”라고 하였다.
갑인년(1614, 광해군6) 6월 27일에 병으로 정침에서 임종하니, 향년 65세였다. 오호라, 공은 타고난 성품이 온유하고 순수하며 마음이 자애롭고 진실하였다. 평소에 장엄하고 경건하게 처신하여 말을 빨리하고 안색을 급하게 바꾸는 일이 없었으며, 비록 조용히 혼자 있을 때라도 태만한 모습을 짓지 않았다. 언제라도 선조를 추모하는 마음을 느슨히 한 적이 없으니, 제삿날이 돌아올 때마다 미리 목욕재계하고 제수(祭需)는 형편에 맞게 하되 정결하게 하는 데 힘써서 신명(神明)이 와 계신 것같이 정성을 다하였다. 백형(伯兄)을 섬기는 데 친애와 공경을 다하고, 아들들을 가르치는 데 반드시 의방(義方)으로 하였으며, 선생 장자(先生長者)의 문하에 유학시켜 그들이 성취하기를 바랐다. 그리고 일찍이 시를 지어 격려하기를,
몸가짐은 얇은 얼음을 밟듯이 하고 / 持身如履薄
마음가짐은 물이 가득 찬 그릇을 들듯이 하라 / 操心若奉盈
나태하지 말고 함부로 하지 말아서 / 毋情又毋荒
너의 선조를 욕되게 하지 마라 / 毋忝爾所生
하였다.
향당(鄕黨)에서는 몸가짐을 공손하게 하고, 누구라도 상을 당하면 달려가서 조문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남의 잘못을 말한 적이 없고 남과 시비를 다툰 적이 없었으나, 호오(好惡)와 취사(取舍)는 한결같이 의(義)를 가지고 결단하였으며 도를 굽혀 남과 영합하려 하지 않았다. 집이 몹시 가난하여 계사년(1593, 선조26), 갑오년(1594)의 병란과 흉년에는 죽으로 끼니를 잇지 못하는데도 굶주리는 친척은 반드시 구휼하였으며, 일찍이 “세상 사람들이 힘들게 고생하여 살림을 꾸려 자손에게 물려주어도 그것을 지켜내지 못하는 것을 내가 보는데, 이것은 천명을 모르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공은 젊을 때부터 경세제민(經世濟民)에 뜻을 두었으나 반평생을 초야에서 살았고, 낙척(落拓)하고 불우(不遇)하여 문을 닫아걸고 세상일에 상관하지 않았다. 항상 책을 가까이하며 유유히 홀로 터득한 흥취를 간직하였으나, 글을 지을 때는 공교롭게 하는 것을 추구하지 않고 오직 말이 통하고 이치가 순하게 할 따름이었다. 숭정(崇禎) 기사년(1629, 인조7)에 아들 달도(達道)가 공신으로 녹훈(錄勳)되어 승정원 좌승지에 추증되었다.
배(配)는 순천 박씨(順天朴氏)로, 평양부원군(平陽府院君) 박천상(朴天祥)의 후손이자 전력부위(展力副尉) 박륜(朴倫)의 따님이다. 남편을 섬기는 데 부덕에 어긋남이 없었고, 자녀를 가르치는 데 엄격하게 법도를 지켰다. 공과는 같은 해에 태어났고, 세상을 떠난 것도 같은 해 4월 16일이었으며, 고을 남쪽 오토산(五土山) 태향(兌向)의 언덕에 공과 합장하였다. 아들과 딸을 세 명씩 두었다. 장남 적도(適道)는 건원릉 참봉(健元陵參奉)을 지냈고 정묘년(1627)과 병자년(1636)에 의병을 일으켜 척화(斥和)를 주장하였으며, 이조 참의에 추증되었다. 호는 호계(虎溪)이며 단구서원(丹丘書院)에 배향되었다. 차남은 달도(達道)로, 홍문관 수찬을 지냈고 정묘년(1627)에 척화를 주장하였으며, 영사 공신(寧社功臣)에 들었고 도승지에 추증되었다. 호는 만오(晩悟)이다. 막내아들은 열도(悅道)로, 사헌부 장령을 지냈고 병자년(1636, 인조14)과 정묘년에 척화를 주장하였다. 호는 나재(懶齋)이며 역시 단구서원에 배향되었다. 장녀는 김유엽(金有曄)에게 출가하였고, 차녀는 주부(主簿) 임내중(任乃重)에게 출가하였으며, 막내딸은 첨정(僉正) 박종경(朴宗敬)에게 출가하였다.
호계는 4남 2녀를 두었는데, 장남은 집(㙫), 차남은 균(均), 삼남은 진사 채(埰)이고 막내는 점(坫)이다. 딸은 김상각(金尙珏), 현감 정복형(鄭復亨)에게 출가하였다. 만오(晩悟)는 3남 2녀를 두었는데, 장남은 위솔(衛率) 재(在)이고 차남은 문과에 급제하여 좌랑을 지낸 규(圭)이며, 막내는 무(堥)이다. 딸은 윤이관(尹以觀), 참봉 박충기(朴忠基)에게 출가하였다. 나재는 5남 2녀를 두었는데, 장남은 기(㙨), 차남은 급(圾), 삼남은 감(堪), 사남은 전(塼), 막내는 성(垶)이다. 딸은 김종원(金宗源), 주서 권주(權霔)에게 출가하였다. 측실에게서 두 아들 증(增)과 벽(壁)을 두었다. 증손 이하는 많아서 다 적지 않는다.
공의 10세손 돈식(敦植)이 일월산(日月山) 속으로 나를 찾아와, 공의 유고(遺稿)를 꺼내 보이면서 굳이 고쳐 주기를 청하고 이어서 행장을 써 달라고 부탁하는데, 나의 분수로는 감당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유고의 글 속에서 무신년(1608, 광해군 즉위년)과 신해년(1611)에 올린 두 상소문을 읽고는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 옷소매를 적셨다. 오호라, 인륜(人倫)을 무너뜨리고 정도(正道)를 해친 것이 어찌 저처럼 심하였던가. 만약 당시 정인 군자(正人君子)다운 인물이 말을 하여 물리치고 발본색원(拔本塞源)하지 않았다면 저 가라지 같은 존재가 몰래 자라나는 것이 어떠하였겠는가. 그러니 공이 후세에 공적을 끼친 것이 어찌 다만 한때에 오랑캐를 물리친 공적뿐이겠는가. 이 못난 후배가 어찌 감히 이 일에 무심할 수 있겠는가. 마침내 가장(家狀)에 근거하여 위와 같이 억지로 고치고 순서를 지어, 최인재(崔訒齋) 선생이 지은 묘지문(墓誌文)의 아래를 채웠으니, 오직 세상의 군자들이 참고하고 채택하기 바라노라.
[주-D001] 구지(衢之) : 《인재집(訒齋集)》 권12 〈증승지신공묘지(贈承旨申公墓誌)〉에는 ‘衢’가 ‘懼’로 되어 있다.[주-D002] 길야은(吉野隱)을 …… 돌아왔다 : 야은은 길재(吉再)의 호이다. 길재는 신우(申祐)의 조카사위였으므로 같은 시기에 개경을 떠나 함께 영남 지방으로 내려왔고, 각각 선산(善山)과 의성(義城)에서 살았다.[주-D003] 김공 해(金公垓) : 김해(金垓, 1534~1593)로,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달원(達遠), 호는 근시재(近始齋)이다. 증광 문과에 급제하였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영남 의병대장으로 추대되어 분전하다가 진중에서 사망하였다. 저서로 《근시재집》이 있다.[주-D004] 유공 종개(柳公宗介) : 유종개(柳宗介, 1558~1592)로, 본관은 풍산(豐山), 자는 계유(季裕)이다. 식년 문과에 급제하였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태백산을 근거지로 분전하다가 전사하였다.[주-D005] 정공 세아(鄭公世雅) : 정세아(鄭世雅, 1535~1612)로, 본관은 영일(迎日), 자는 화숙(和叔), 호는 호수(湖叟)이며 시호는 강의(剛義)이다. 사마시에 입격하였고, 임진왜란 때 의병을 모아 영천(永川)에서 적을 무찔렀다. 저서로 《호수실기(湖叟實記)》가 있다.[주-D006] 최인재(崔訒齋) : 최현(崔晛, 1563~1640)으로,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계승(季昇)이며 호가 인재(訒齋)이다. 정구(鄭逑)의 문하에서 수학하고 증광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부제학과 강원도 관찰사를 역임하였다. 예조 판서에 추증되고, 시호는 정간(定簡)이다. 저서로 《인재집》이 있다.[주-D007] 정인홍(鄭仁弘) : 1535~1623. 본관은 서산(瑞山), 자는 덕원(德遠), 호는 내암(萊菴)이다. 임진왜란 때 합천(陜川)에서 의병을 모아 왜병과 싸웠고 영남 의병장의 호를 받았다. 광해군이 즉위하자 정권의 실세로 등장하였고, 인목대비(仁穆大妃)를 폐비시켜 서궁(西宮)에 유폐시켰다. 영의정에 올랐으나 인조반정 후 참형을 당하였다.[주-D008] 함부로 …… 하였다 : 1610년(광해군2)에 오현, 즉 김굉필(金宏弼), 정여창(鄭汝昌), 조광조(趙光祖), 이언적(李彦迪), 이황(李滉)의 문묘 종사가 이루어졌는데, 정인홍은 자신의 스승인 조식(曺植)이 포함되지 않고 이언적과 이황이 종사된 데 불만을 가졌고, 1611년에 회퇴변척소(晦退辨斥疏)를 올려 이언적과 이황을 맹렬하게 비판하면서, 이록(利祿)을 탐내고 진퇴가 분명하지 않으며 몰염치한 사람들이라고 매도하였다.[주-D009] 가정(嘉靖) …… 하였는데 : 1611년(광해군3)에 정인홍이 회퇴변척소(晦退辨斥疏)에서, 을사년(1545, 인종1)과 정미년(1547, 명종2)에 사화가 일어나 소인이 득세하여 군자를 해칠 때 이언적과 이황이 벼슬을 그만두지 않고 소인들과 같이 행동하였다고 비난한 일을 말한 것이다.[주-D010] 영무자(甯武子)가 …… 받았겠습니까 : 영무자는 춘추 시대 위(衛)나라의 대부이다. 《논어》 〈공야장(公冶長)〉에 공자가 “영무자는 나라에 도가 있을 때에는 지혜롭고, 나라에 도가 없을 때에는 어리석었으니, 그 지혜는 따를 수 있으나 그 어리석음은 따를 수 없다.〔甯武子 邦有道則知 邦無道則愚 其知可及也 其愚不可及也〕”라고 한 말이 있는데, 여기에서는 이황을 영무자에 비유한 것이다.[주-D011] 무신년과 …… 상소문 : 무신년(1608, 광해군 즉위년)에 이언적(李彦迪)을 옹호하기 위하여 올린 신변소(伸辨疏)와 신해년(1611, 광해군3)에 정인홍(鄭仁弘)의 회퇴변척소(晦退辨斥疏)의 내용을 반박하기 위하여 올린 상소문을 말한다.[주-D012] 한때에 …… 공적 : 신흘(申仡)의 세 아들 신적도(申適道)ㆍ신달도(申達道)ㆍ신열도(申悅道)가 정묘년(1627, 인조5)과 병자년(1636)의 호란(胡亂)에 의병을 일으키고 척화(斥和)를 주장한 일을 말한다.[주-D013] 최인재(崔訒齋) …… 묘지문(墓誌文) : 최현(崔晛, 1563~1640)의 문집인 《인재집》 권12에 신흘(申仡)의 묘지문인 〈증승지신공묘지(贈承旨申公墓誌)〉가 실려 있다. 인재(訒齋)는 최현의 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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