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찾은 산책
어느 날 동료였던 세 여인이 서오릉에 나타났다. 재치 있는 재담꾼 청자 씨, ‘새노야’ 노래를 잘 불러 분위기를 잡던 점자 씨, 조용하면서 자신감 넘치는 순주 씨, 한때 존재감이 확실했던 멋진 여성들이다. 그 중, 청자 씨는 유독 내가 예뻐하던 후배다. 어느 봄날 일찍 출근한 내가 5층에서 정문을 내려다보고 있는데 노란 개나리를 한아름 안은 보라색 코트의 긴 머리 여성이 정문을 밀고 들어선다. 순간, 잔잔하던 내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는다. “저 친구 누구지? 봄을 안고 오네.” 그때부터 나는 그녀에게 빠졌다. 결혼 조건으로 상대의 가치관과 내면의 소리를 우선으로 했던 그녀, 그 선택이 돋보여 박수쳐 주던 근사한 후배다.
“우리가 몇 년 만이야?”
목소리도 여전하고, 우아함도 그대로고, 맘씨도 한결같은데 얼굴에 주름이 있고 머리카락이 백발이 된 게 좀 낯설다. 그래도 아름답게 보이는 것은 순수했던 그때 그 시절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서인가 보다.
우리는 들뜬 기분으로 낙엽을 밟으며 오름과 내림이 있는 흙길을 넘기로 했다. 호젓한 서오릉의 가을 길은 이름 모를 나무와 열매, 꽃, 단풍이 적당히 어우러져 자연스런 풍광을 제공한다. 그것이 이 산의 특징이다.
“이거 무슨 나문지 알아?” 청자 씨가 묻는다. 아무도 대답을 못한다.
“이게 팥배나무야.” 팥알처럼 주렁주렁 열매가 달려 있는 나무를 가리키며 아는 체를 한다. 거기에서부터 시작, 청자 씨의 식물 보감 보따리를 쏟아내는데 우리는 묵묵부답, 그녀의 설명에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다.
“이건 누리장이네. 반가워라.” 보석 같은 열매를 향해 친구인 양 반긴다.
“누리장이 뭐야? 흥부전에 나오는 화초장 이름 같다,”
몇 발자국 가다가 또 호들갑이다. “이건 작살나무, 이건 산수유, 이건 생강나무...감국, 산국도 있네,”
생강나무 잎을 따서 잘게 자르더니 우리 코앞에 대준다. 생강 냄새가 난다.
“언니! 언니는 어떻게 식물 이름을 그렇게 많이 알아?”
호기심 천국 점자 씨가 못 참고 묻는다.
“내가 초등학교 2학년 때였나 봐. 장충동 근처에 살았거든. 학교도 그 근방이었고, 미술 시간에 자기 모습을 그리라는 거야. 그래서 난 얼굴도 그리고, 몸도 그리고, 젖꼭지도 그리고, 그 아래까지 다 그렸지. 그랬더니 선생님이 가까이 오시더니 내가 그린 자화상을 갈기갈기 찢으면서 문제가 있다고 엄마를 모시고 오라는 거야. 나는 겁이 났어. 그때부터 학교가 싫어져서 안 갔어. 그리고 장충동 공원을 헤맸지. 공원에 있는 나무와 풀들하고 얘기하면서 땡땡이 세월을 보낸 거야. 그러다가 엄마에게 이실직고하고 전학 갔어. 그때부터 산에 있는 식물들이 모두 다 내 친구가 됐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점자 씨의 느닷없는 질문이 쑥 들어온다.
“언니, 아까 뭐라고 했지? 그 아작나무가 어떤 거야?”
“아작나무? 나 그런 나무 모르는데?”
“조금 전에 아작나무라고 가르쳐 줬잖아.”
“아! 작살나무?”
총명한 순주 씨가 자수정 빛깔의 송글송글 매달린 구슬 열매를 가리키며 거드는 바람에 우리는 까르르 웃음보를 터뜨렸다.
“넌 이름도 잘 짓는다. 작살나무가 어떻게 아작나무가 되니?”
“그게 그거지 뭐, 작살나무나 아작나무나...”
그렇게 깔깔대며 내려오다가 한때 날아가는 새도 떨어뜨렸다는 권력의 여인, 비운의 여인 장희빈이 묻혀 있는 대빈 묘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장희빈이 이 시대에 살았으면 어땠을까? 남성들도 꼼짝 못 하던 그 카리스마, 숙종의 마음을 사로잡은 그 여인의 매력은 어떤 것이었을까?”
“지금 살았으면 지략이 뛰어난 장관, 뻔뻔한 국회의원, 아니면 감각이 뛰어난 디자이너가 됐을 수도 있었겠다. 아니면 복부인 노릇을 더 잘하지 않았을까.”
"그러게. 시대를 잘못 만나 독 사발을 안게 된 거지.“
똑똑하고, 예쁘고, 날카롭고, 감각적이고, 독종이고, 욕심 많은 그녀를 재평가하는 것으로 장희빈 묘 앞에서 기념사진 한 장 찰칵!
“근데 장희빈이 잘나긴 잘난 여잔가 봐. 죽어서도 남자들을 홀린다니까. 아침 산책길의 첫 고비가 이 묘 앞이거든. 누구든지 여기까지 와서 한 번 쉬는 거야. 어떤 영감님은 마치 애인을 대하듯, ‘나 왔소!’하고 자기 존재를 알린다니까.”
희대의 악녀로 낙인찍힌 여인, 릉이 아닌 묘의 호칭으로 한구석에 안치되어 있으면서도 서오릉의 윗자리에 있는 어떤 왕비보다 뭇 남성들의 사랑과 관심을 받고 있다니 그것도 아이러니다.
산행을 끝내고 집에 돌아와 하루를 생각하니 흐뭇하고 짜릿하다. 이 기분이 뭐지?
작살나무가 아작나무가 되고 희대의 악녀 장희빈이 복부인이 되어 버리는 핑퐁 같은 마구잡이 대화가 내 안의 나를 찾게 하는 마법인가. 이삼십대에 만나 청춘의 에너지로 재기발랄한 온갖 아이디어를 나누며 새로운 것들을 함께 만들어 갔던 나의 동료들, 나는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환희의 순간을 느낄 수 있어 기쁘다. 묵상이나 기도를 통해 내 안의 나를 만날 수도 있지만 옛 친구들과 나누는 마구잡이 수다, 산책을 통해 나를 만나는 것이 더 행복하다.
오늘도 나는 내 후배들과 수다 떨며 즐거웠듯이 자연과 얘기하며 산책을 했다.
(2023.10월.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