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유성 일행이 도착한 것은 아수라환상대진이 발동하고 사흘이나 지나서였다. 진 앞에 도착하기 한참 전부터 주유성은 일이 꼬였음을 깨 달았다. 인상을 찌푸리고 말했다. "뭔가 이상하네요. 우리가 가야 할 저쪽, 수상한 기의 흐름 이 느껴져요." 독촉하느라 지쳐 버린 남궁서천은 반색을 했다. "다행이군. 아직 일이 끝난 것은 아니라서. 그럼 어서 갑 시다." 주유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심상치 않아. 간단한 느낌이 아니야.' 사태의 심각성을 조금이라도 예상한 주유성이 자세를 바 로잡고 말을 달렸다. 남궁서천은 정말 깜짝 놀랐다. "헛! 주 공자가 말을 타고 달린다! 이럴 수가!" 그는 맹세코 저 지독한 게으름뱅이가 달리는 모습을 한 번 도 본 적이 없다. 그래도 놀라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그들은 주유성의 뒤를 따라 급히 말을 달렸다. 네 마리의 말이 먼지를 날리며 현장에 도착했다. 많은 수의 무인들이 주유성 일행을 돌아보았다. 주유성이 달린 것은 마지막 순간뿐이다. 하지만 먼저 와 있던 사람들이 보기에는 줄곧 열심히 달려온 것처럼 보였다. 남궁서천이 말에서 내리며 말했다. "이거 뭔가 이상하군. 무림맹에서 나온 숫자만 삼천 명은 족히 되는데 그들이 보이지 않으니." 무림맹의 마당발 남궁서천이 아는 얼굴이 거의 없었다. 그 나마 안면이 있는 몇 명은 무림맹 소속이 아니다. 남궁서천이 소리쳤다. "저는 남궁세가의 남궁서천입니다! 지금은 무림맹에서 일 을 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된 건지 소생에게 설명해 주실 분 안 계십니까?" 남궁서천의 명성을 들어본 사람들이 제법 있었다. "오, 광명검 남궁서천이다." "광명검이 나선다면 혹시 도움이 되지 않을까?" "에이, 이미 며칠째 달라붙어도 되지 않던 일이야. 광명검 이 나서도 소용없어." 사람들의 소란을 뒤로하고 곡부일이 나서서 포권을 했다. "저는 상건문의 곡부일이라고 합니다. 지금 여기 있는 진 법가들의 지휘를 맡고 있습니다." 남궁서천도 즉시 포권을 했다. "아, 곡 대인이시군요.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곡부일이 지금까지 일어난 일을 간단히 이야기했다. 그 이 야기를 듣고 남궁서천의 얼굴이 굳었다. "구천 명의 정파의 인재가 저 안에 갇혀 있다니. 저 진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아직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뒤늦게 진법가 두 분이 오셔 서 같이 연구했지만 진의 이름조차 알아내지 못햇습니다." "그럼 힘으로 부숴보면 어떻겠습니까?" "이미 사흘 전에 하남삼호 세 분과 다른 수백여 명의 협객 들이 진을 부숴보기 위해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하지만 그분 들 모두 진에 갇혀 생사를 알 수 없습니다." "무림맹에 연락은 됐습니까?" "물론입니다. 이미 전서구를 날렸습니다. 오늘이나 내일쯤 에는 무림맹의 지원군이 도착한다고 들었습니다. 무림맹에 남아 있는 진법가들이 모두 동원됐다고 합니다." 남궁서천이 불안한 표정으로 말했다. "무림맹의 진법가들 중에 실력자는 대부분 이곳에 와 있었 는데..." 남궁서천이 주유성을 돌아보며 말했다. "주 소협, 이 진이 무엇인지 알아보겠소?" 주유성이 고개를 저었다. 진의 원리와 비결은 사천의 진법 가 곽안모에게 제대로 배웠다. 하지만 진법 공부를 별로 하지 않아 세상에 알려진 진들 중에 아는 것은 많지 않다. 그의 얼 굴도 꽤나 심각해져 있었다. "아뇨. 하지만 이거 장난이 아니네요." 그는 진의 흐름을 느꼈다. 오만 가지 기가 증폭되고 왜곡되 는 것이 그의 예민한 감각에 잡혔다. 주유성이 작은 언덕 위에 올라가 뒷짐까지 떡하니 지고 진 을 관조했다. 언뜻 보면 기품까지 있었다. 주유성은 기감이 인간의 상식 수준을 넘었다. 그는 진 전체 에 흐르는 기의 영향을 몸으로 감지하며 서 있었다. 그렇게 한 시진은 족히 지난 후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죽음의 절진이라는 건 말로만 들었지 직접 보기는 처음이 네요. 여기 잘못 들어가면 끝장이에요." 바람이 적당히 불어 그의 머릿결을 날렸다. 검옥월이나 남 궁서린이 보기에 그렇게 멋있을 수 없었다. '주 공자에게 저런 면이.' '어머나. 내 가슴이 왜 이래.' 곡부일이 그런 주유성을 보더니 남궁서천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분은 누구신데 진을 보는 것만으로 평가하시는지요?" 곡부일로서는 불만스러운 모습이다. 새파랗게 젊은 놈이 멋을 부리는 것이 거슬렸다. "그는 올해 무림진법대회의 우승자입니다. 하남 서현 주가 장의 주유성 소협이지요." 이곳은 주유성이 사는 하남이다. 게으름뱅이에 대한 소문 은 날 대로 나 있다. 곡부일이 놀라서 소리쳤다. "주유성? 저 사람이 바로 주유성이라고?" 그 소리를 들은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주유성이라면 일포십한이라고 불리는 그 게으름뱅이잖아." "학문이 제법이라고 했으니 도움이 될지도 모르지." "명색이 진법대회 우승자라잖아." "이 사람들. 그는 무림맹에서 허풍대협이라고 소문났어." "아, 그렇지. 허풍대협이지." 사람들이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주유성을 쳐다보았다. 주유성을 가르친 진법가는 곽안모이다. 그리고 그는 사천이 주 활동무대다. 곡부일은 하남의 무인이고 덤으로 진법을 익힌 사람이다. 사천에서 손에 꼽히는 곽안모에 비하면 실력이 태양과 달만 큼 차이난다. 하남의 무인이라 사천의 곽안모와 친분 같은 것은 없다. 주 유성이 곽안무에게 어떤 평가를 받았는지 따위는 알지 못한다. 곡부일은 벌써 사흘이나 성과를 내지 못했다. 슬슬 걱정이 되고 이제 책임을 좀 떠넘기고 싶었다. 그는 주유성을 믿지는 않았지만 진법대회를 믿어보기로 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이었다. "무림진법대회는 아무나 우승할 수 있는 곳이 아니오. 그 러니 믿어봅시다." 진법에 막힌 상황에서 사흘이나 이곳에 있었던 곡부일의 발 언권은 아직 상당했다. 그의 말에 사람들이 조용히 수긍했다. 어디서 작은 불평들이 새어 나오기는 했다. "허풍대협이라니까." 남궁서천이 주유성에게 부탁했다. "주 소협, 저 안에서 사흘이나 지났다면 아무리 무공을 익 힌 사람들이라고 해도 문제가 생겼을 수 있소. 어떻게 손을 써볼 수 있겠소?" 주유성은 진을 계속 살피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게으름을 피워서 여기 늦게 온 것에 대해 마음이 불편했다. "구천 명이 갇혀 있다고요? 사고나 안 났으면 좋겠네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이 진의 변화가 어떤 종류의 것인지 깨 달은 상황에서 일이 쉽지 않은 것을 짐작하고 있었다. "진법가 분들은 모이세요. 일단 의논 좀 하고 뚫어보자고 요." * * * 무림맹의 고수 백여 명은 함정에 갇힌 지 사흘이 지났다. 그들은 그동안 빠져나갈 길을 찾기 위해서 무던히 애썼다. 제갈화운이 소리쳤다. "이럴 수는 없어! 입구만 있고 출구가 없다니! 무슨 이런 곳이 다 있어!" 취걸개가 붕 날아오더니 제갈화운에게 발을 뻗었다. 제갈 화운이 막아보려고 했지만 취걸개는 진짜 고수다. 거지의 더 러운 발이 제갈화운의 방어를 뚫고 가슴을 걷어찼다. "켁!" 제갈화운이 한번 막아보지도 못하고 신음 소리를 내며 나 뒹굴었다. "이 새끼야, 네놈이 설치지만 않았어도 이 고생은 안 해!" 사흘이나 굶은 취걸개가 성질을 부렸다. 모든 개방 사람이 그렇듯이 취걸개도 출신이 거지다. 어렸 을 때는 무던히도 굶었다. 그래서 음식을 아주 탐한다. 그런 그가 사흘을 굶었다. 내공이 고강해서 버티고 있지만 신경질이 나서 죽을 맛이다. 음식을 못 먹은 것보다 더 큰 문제는 물 공급이 없다는 것 이다. 이곳에 들어올 때 물을 가져온 사람은 아무도 없다. 무 공이 약한 사람들은 사흘이나 물을 마시지 못해 기력이 완전 히 쇠잔해져 있었다. 화산파의 백미화는 잔뜩 지쳐 있었다. 그녀의 무공은 일반 무사들보다 뛰어나지만 고수라고 하기는 조금 부족함이 있었 다. 그녀도 무공을 배울 때는 힘들게 배웠다. 하지만 이건 수련 이 아니다. 꽤나 곱게 자란 그녀가 사흘이나 물도 못 마시고 지낸 적은 없다. 그녀가 현기증이 나는 머리를 짚으며 말했다. "물만 주면 거지와도 결혼해 줄 수 있어요." 개방의 장도관이 옆에 축 늘어진 채 대답했다. "나 마시고 남는 물 있으면 나눠줄 테니 그때 결혼해 주시 오." "칫. 언제는 뭐든지 부탁만 하라고 하더니." "거지가 원래 그렇지, 뭘 기대했소? 말 많이 하면 더 힘드 니까 조용히 하시오. 나는 좀 더 쉬었다가 문이나 부숴봐야 하니까." 지루해진 백미화의 눈에 구석에 나뒹군 제갈화운이 보였 다. 그녀가 이를 갈았다. "오드득! 내가 다시 제갈가 놈하고 말이라도 하나 봐라." 제갈화운은 사람들의 비난을 한 몸에 받고 있었다. 청성의 마해일은 사람들 틈에 숨어서 그 모습을 보고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이 같은 일을 저질렀다면 앞장서서 화를 냈을 마 해일이다. 하지만 제갈화운에 대한 일은 그럴 수 없었다. '같이 저지른 일이 있고 앞으로 저지를 일이 있는데 가만 있어야지. 그냥 입 닥치자.' 제갈화운은 그런 마해일이 밉다. '다른 놈들은 다 가만있어도 저 새끼는 내 편을 들어줘야 지. 확 다 불어버릴까?' 하지만 그럴 수 없음을 자신이 더 잘 안다. 지금은 말 한마 디만 잘못해도 취걸개에게 얻어맞는 상황이다. 스스로 죄를 들춰냈다가는 몰매를 맞고 죽을 수도 있다. 지하에 갇힌 사람들은 그냥 죽을 생각은 없다. 그들은 지난 사흘 동안 빠져나갈 공간을 찾기 위해서 최선을 다했다. 우선 벽을 조사하고 위험이 없으면 검을 이용해서 파냈다. 그러나 돌벽 뒤에는 철판이 버티고 있었다. 소리를 시험해 보 니 그 두께가 입구를 막는 철문 못지않았다. 설사 그걸 부순 다고 해도 그 뒤에 어떤 장애물이 버티고 있을지 모르는 상황 이다. 결국 그들은 사흘째 입구의 철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그러 나 단단하고 두꺼운 철문은 아무리 두드려도 부서지지 않았 다. 철문의 재질은 보통의 무쇠와는 달랐다. 그래도 무공의 고수들이 교대로 칼질을 한 덕분에 철문을 거의 반 척이나 파냈다. 그러나 먹고 마시지 못하는 상태에서 검기를 써야 하는 공격을 계속할 수는 없었다. 그 정도 파낸 상태에서 다들 완전히 지쳐 버렸다. 더구나 이제 칼도 멀쩡한 것이 별로 없다. 철문이 뚫리는 것이 먼저일지 검이 모두 작살하는 것이 먼저일지 의문인 상 황이다. 철문에 칼질을 몇 번 한 청허자가 지친 목소리로 말했다. "이 철문은 아무리 파도 끝이 나지 않는군. 얼마나 좋은 쇠 로 단단히 만들었는지 모르겠소." 제갈화운을 걷어차느라 힘을 쓴 취걸개가 널브러진 채로 대답했다. "이걸 정말 검마가 만들었는지 어쩐지는 모르지. 하지만 이런 좋은 쇠를 이만큼 써서 함정을 만들려면 황금을 한 무더 기는 써야 했을 거야. 아주 작정을 했어." "그래도 숨구멍은 남겨두었으니 우리가 죽지는 않았잖소. 목적이 있어서 그랬겠지." "우리를 산 채로 잡으려는 목적인지도 모르지. 이렇게 며 칠만 더 지나면 누가 싸울 수 있으려고." "늙은 거지, 말할 힘이 있으면 와서 칼질이나 하시게. 난 이제 지쳐서 검기가 잘 나오지 않소." 취걸개가 힘들게 몸을 일으켰다. "끙. 젊은 놈들은 이제 한두 시진을 쉬어도 칼질 한 번이 고작이니까 늙은 우리들이 해야지 뭐." 사흘 동안 탈진한 덕분에 현재 검기를 발출할 기력이 남은 고수는 별로 없다. 취걸개가 투덜거렸다. "갑자기 유성이 녀석이 생각나는군." "주 소협? 여기서 그 게으른 녀석이 왜 생각난다는 거요?" "움직이기 싫고, 어디서든 눕고 싶고, 먹을 것이 먹고 싶고, 내가 딱 그 녀석이 된 거 같단 말이지." 청허자가 오랜만에 웃었다. "하하. 그것도 그렇소. 하지만 그 녀석이 된다는 건 도인으 로서 수치스러운 일이지." "내가 아이들을 보내놓았으니 그 녀석도 지금쯤은 도착했 겠군. 바깥에서 대책 마련에 고심하고 있을지 모르지." 취걸개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이미 진법이 해체된 상황에서 그 녀석이 온다고 해서 무 슨 차이가 있을까. 그보다 바깥은 어떻게 됐는데 우리를 구조 하러 아무도 오지 않는 건지. 나는 그게 걱정이란 말씀이야." * * * 주유성은 세 명의 진법가와 같이 아수라환상대진에 대한 토론을 했다. 주유성이 땅바닥에 간단한 기의 흐름을 그려놓은 채 말했 다. "그러니까 계산 결과에 의하면 여기가 입구예요. 이곳으로 들어가면 진을 이루는 뭔가가 하나 있을 거예요." 평범한 실력인 세 명의 진법가들은 주유성의 설명을 이해 할 수 없었다. 주유성이 사용하는 개념은 이미 그 진법가들의 수준을 넘어섰다. 전혀 모르는 소리를 떠드니 믿음이 가지 않 았다. "이보시오, 주 소협. 내 주 소협의 말을 이해할 수 없소. 건 과 감 사이에는 당연히 곤이 있는 법이거늘 어찌 주 소협은 그 것을 부정하시오?" "아 진짜, 이 진은 흐름이 변해요. 곤이 곤이 아니고 감이 감이 아니라니까요. 태극이 시간에 따라 변하는데 곤이 왜 곤 이겠어요?" "어허. 주 소협의 학문이 높음은 알지만 그건 진법의 상식 을 벗어나는 일이오. 어찌 곤이 감이 된다고. 이게 무슨 전설 의 아수라환상대진이라도 된다는 말이오?" "어쨌든 제 말이 맞다니까 그러시네. 우리는 힘을 모아서 이곳을 먼저 풀어야 한다니까요. 그러면 진이 조금 흔들릴 거 예요. 잘하면 가까운 곳의 몇 명은 구해낼 수 있어요. 지금은 진 안에 있어본 사람들이 도움이 필요해요." 주유성은 계속 주장했지만 설득에는 실패했다. 진법가들 은 확고부동했다. "받아들일 수 없소. 믿을 수 없는 방법으로 입구를 추측한 곳에 사람들을 투입할 수는 없소. 그러다가 잘못하면 그들까 지 갇히게 되오. 이미 그런 식으로 하남삼호 세 분 대협을 포 함한 수백 명이 진에 갇혔소." 주유성이 사람둘을 둘러보았다. 사람들이 주유성을 보는 시선이 곱지 않다. "역시 허풍대협이야. 진법가들이 모두 아니라고 하는데 혼 자 맞다고 하잖아." "저자에게 맡기는 것보다는 차라리 무림맹 사람들이 올 때 까지 기다리는 게 낫지 않을까?" 주유성이 인상을 찌푸렸다. '게으름 피우다 늦게 온 내 죄지 뭐.' "쳇. 내가 자처한 평가인데 누구를 탓할 수도 없고. 알았어 요. 그럼 나 혼자 들어갈게요." 주유성의 선언을 들은 남궁서천이 깜짝 놀라 말했다. "주 소협, 위험하오." 그는 진법은 모른다. 그러나 세 명이나 되는 진법가가 주유 성이 틀렸다고 하자 못내 불안했다. "안 위험해요. 외곽을 살짝 흔드는 거라고요. 얼마든지 빠 져나올 수 있어요." 곡부일이 말렸다. "어허. 젊은 사람이라 철이 없군. 똑같은 소리를 하고 수백 명이 몰려갔지만 한 명도 빠져나오지 못했다니까." "시끄러워요. 난 들어갈거예요.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 고 있는지도 모르는데 구경만 할 수는 없어요." 남궁서천도 주유성을 말렸다. "주 소협, 하루 이내에 무림맹의 사람들이 도착하니 그때 까지 기다리는 것이 안전하지 않겠소?" 세상의 정의를 믿는 주유성으로서는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이야기다. "이미 사흘이 지났다면서요. 진의 꼬라지를 보니까 저 속 에서 보급품을 나눠 먹으면서 버티고 있을 것 같지도 않아요. 물 한 모금 못 마시고 사흘이 지난 사람들도 꽤 많을 거예요. 더구나 이런 진에 갇히면 심력을 소모한다고요. 시간 끌면 사 람들이 말라 죽어요." 주유성은 진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런 주유성의 곁에 검옥월이 붙었다. "검 소저?" 검옥월이 날카롭게 째려보았다. 그녀 딴에는 부드럽게 웃 음을 짓는 중이다. "제검이 약하지 않으니 도움이 될 거예요." 주유성이 활짝 웃었다. "좋아요. 제 곁에 바짝 붙어 있어요." 검옥월이 수줍어하며 주유성의 한쪽 팔에 몸을 살짝 기대 었다. 그걸 본 남궁서린이 주유성의 반대편 팔에 붙었다. "주 공자님, 저도 도움이 되고 싶어요." 처음에는 진에 들어갈 용기가 없었다. 하지만 검옥월이 하 는 꼴을 보고는 몸을 사리지 않기도 했다. 검옥월이 붙인 만 큼 몸을 붙였다. 여동생이 나서는데 남궁서천이 구경만 할 수는 없다. "쳇. 할 수 없지." 남궁서천이 주유성의 뒤에 섰다. "등은 내가 지켜줄 테니까 하고 싶은 걸 해보시오." 주유성이 동료들을 둘러보더니 말했다. "모두 바짝 따라와요. 너무 거리를 두지 말아요. 안 그러면 잃어버릴 수 있으니까." 안개 속으로 한 걸음 성큼 내디뎠다. "시작하자고요." 게으름뱅이도 할 때는 한다. 아수라환상대진의 무서움은 기를 왜곡시키고 감각을 흩뜨 려 놓는 것에 더해서 사람들에게 곡선을 직선이라고 믿게 만 드는 효과가 더해져서 극대화된다. 더구나 그 규모가 작지 않으니 진에 빠진 사람은 아무리 돌 아다녀도 바깥으로 나갈 수 없다. 바깥인 줄 알고 움직이면 그것이 안쪽이다. 일부러 안쪽으로 움직이면 여저히 안쪽이 다. 모든 길이 안쪽으로 꼬여 있도록 만들어진 진이다. 그렇 다고 진의 위력이 발휘되지 않는 중심 안전지대까지 들어가 지는 못한다. 주유성은 진에 들어간 후 바짝 긴장했다. '장난이 아니네. 기가 사방에서 몰아치잖아. 그리고 이거 반응이 얼토당토않네.' 기감이 특별히 에민한 주유성이지만 아수라환상대진의 기 에서 진짜와 가짜를 구별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뭔가 심각하 게 부자연스럽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그는 바깥에서 계산한 대로 걸음을 차곡차곡 옮겼다. "잘 따라와요. 바깥에서 기의 흐름을 보고 계산한 바에 의 하면 가까운 곳에 진의 기점이 하나 있거든요." 진 내에서도 가까운 거리는 소리가 제법 잘 전해진다. 방향 을 모를 뿐이다. 주유성이 움직였다. 그의 곁에서 사람들이 안력을 키운 채 조심해서 따라갔다. 주유성이 목표 지점으로 걸어감에 따라 기의 왜곡이 점점 심해졌다. 아무것도 모르고 움직였다면 왜곡된 길을 따라가 느라 기점에는 다가가지도 못할 정도였다. 그리고 왜곡된 기가 살기로 느껴지며 사람들을 압박했다. 주유성을 제외한 세 사람은 나머지 동료들이 자신을 공격 하려 한다는 압박감에 싸였다. 무공을 익힌 자들은 그것을 느 끼고 당황했다. 그리고 가장 수련이 낮은 남궁서린이 먼저 반응했다. 갑자 기 바로 옆의 사람이 자신을 공격하는 느낌에 급히 한 팔을 떨치며 비명을 질렀다. "꺄악!" 비명 소리는 가냘프지만 그녀의 손까지 그런 건 아니다. 남 궁세가의 무공을 익힌 그녀의 손이 남궁서천 쪽으로 날아갔다. 그 기세가 강력한 살기로 왜곡되어 남궁서천을 압박했다. 더구나 방향도 왜곡되어 있었다. 남궁서천은 급히 한 걸음 물러서며 살기를 경계했다. 그는 공격이 검옥월 쪽에서 왔다고 생각했다. 워낙 대단한 살기에 놀라 급히 검옥월에게 검을 겨누었다. 검옥월은 강력한 고수다. 남궁서천 쪽에서 살기가 와락 몰 려오자 자연스럽게 자신의 무기를 뽑았다. 아수라환상대진에서 이런 처지에 빠져서 죽거나 다친 무 림인이 한둘이 아니다. 더구나 주유성 일행은 기점 중 하나에 근접한 상태라 진의 위력이 더 강했다. 지금은 바로 옆도 제 대로 구분할 수 없었다. 검옥월의 대응이 기를 더 심하게 혼란시켰다. 남궁서천은 자신을 향해 살기가 뚝뚝 떨어지는 공격이 날아온다고 느꼈 다. 그는 신중한 기색으로 검을 뻗어 공격을 받아쳤다. 검이 날카롭게 안개를 갈랐다. 그 검을 뭔가가 강하게 밀어냈다. 소리도 없었다. "크윽!" 남궁서천이 신음 소리와 함께 한 걸음 물러섰다. 검옥월도 남궁서천이 자신을 향해 검을 뻗은 것을 느꼈다. 그녀에게 오는 기세는 거의 생사대적을 향해 최후의 절초라 도 뿌리는 고수의 그것이었다. 검옥월은 도저히 가만있을 수 없었다. 그녀의 검이 작은 변 화를 만들며 앞으로 쭉 뻗어졌다. 자연스럽게 치명적인 초식 이 발휘되었다. 그리고 그녀는 곧바로 뭔가 자신의 검을 밀어내는 것을 느 꼈다. 그것이 남궁서천의 반격이라고 생각한 그녀는 즉시 검 을 돌려 그 공격을 쳐내려고 했다. "앗!" 그녀가 작은 소리를 내며 놀랐다. 쳐내려던 목표는 오히려 검을 부드럽게 감싸며 계속 밀어냈다. 검은 이미 목표를 잃었 다. 그녀는 너무 놀라 급히 한 걸음 물러섰다. 남궁서천과 검옥월 두 사람은 잠깐 동안 서서 꼼짝도 하지 못했다. 주변에서 공격적인 살기들이 밀려들었지만 조금 전의 반격에 놀라 감히 경거망동하지 못했다. 그리고 갑자기 그 살기들이 씻은 듯이 사라졌다. 안개가 빠 르게 걷혔다. 주유성이 사람 머리보다 큰 돌멩이를 발로 툭툭 차서 굴리 며 말했다. "됐어요. 내가 여기 있을 거라 그랬잖아요." 그들이 서 있는 곳을 중심으로 폭 십 장 정도의 공간에서 안개가 빠른 속도로 사라졌다. 진 전체에 비해서는 얼마 안 되는 공간이지만 사람들은 눈이 다 환해진 기분이다. 그리고 안개가 사라진 끝은 진의 외곽과 닿아 있었다. 남궁서천과 검옥월은 서로를 향해 검을 겨누고 있었다. 이 제 그들은 조금 전에 자신들의 공격을 무위로 만든 것이 상대 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주유성이 그들을 말렸다. "두 사람 다 진정들 해요. 좀 전에 그건 둘 다 진법에 속은 거예요." 남궁서천은 검을 집어넣으며 생각했다. '많아야 스물이나 됐을까 하는 아가씨의 무공이 장난이 아 니군. 주변을 파악하기 힘든 그 상황에서 내 검을 정확하게 밀 어내다니. 더구나 그 위력은 나를 한 걸음 물러서게 했다. 이 여자. 강하다.' 검옥월도 남궁서천을 보며 감탄했다. '남궁세가의 검이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강검과 유검이 자유자재로 변하는 경지구나. 더구나 난 이자의 검을 보지도 못했는데. 중원의 무공을 우습게볼 수 없구나. 이 남자. 강하 다.' 그들은 서로의 실력을 경계하며 검을 집어넣었다. 남궁서린은 이미 엉덩방아를 찧고 있었다. 어디선가 날아 온 부드러운 힘에 밀려 넘어졌던 그녀는 그 덕분에 두 사람의 겨룸에서 피해를 보지 않을 수 있었다. 이제 진이 한 부분이나마 사라졌다. 진 바깥에 있던 사람들 이 입을 떡하니 벌렸다. 곡부일이 더듬거렸다. "저, 정말로 진을 해제했군. 허풍, 아니 주 소협. 그대가, 그대가 옳습니다." 곡부일이 순순히 자기가 틀렸음을 인정했다. 자기는 사흘 동안 머리를 싸매도 감도 못 잡던 진이다. 주유성이 손을 흔들어주며 말했다.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진의 한 귀퉁이가 뚫렸 으니 나머지도 풀어낼 수 있을 거예요. 저 사람들부터 먼저 구하죠?" 해제된 공간 구석에 몇 명의 남자가 탈진해서 쓰러져 있었 다. 사람들이 그들 중 하나의 얼굴을 알아보고 소리쳤다. "하남삼호 중 둘째인 하남흑호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진법이 겁나서 가까이 오지 않았다. 그 중에 용기있는 사람들이 달려들어 쓸진 몇 명을 진 바깥으로 끌어냈다. 모두 내공을 가진 덕분에 죽은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진법 에 갇혀 심력을 소모한 일반 무사들은 완전히 탈진해서 정신 을 잃고 있었다. 그나마 하남흑호가 정신이 있어 주유성이 그에게 다가갔다. "아저씨, 진법 안은 어땠어요?" 주유성은 방금 들어왔을 때 겪은 경험에 대한 확인이 필요 했다. 하남흑호가 손을 가볍게 떨었다. "사람들이 나를 공격했소. 공격할 리가 없는 사람들이. 나 는 살기 위해서 반격했어야 했다고. 일부러, 일부러 그런 건 아니야." "진정하고 말해보세요. 그래서요?" 하남흑호는 살아났음에도 불구하고 마음의 안정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고함 소리가 계속 들렸지. 진짜로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진의 속임수라고. 그러니 가만히 자리를 잡고 앉아 있으라고. 하지만 그 소리가 너무 늦게 전달됐어. 나는 정말로, 정말로 죽이고 싶지 않았어." 주유성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우리 일행이 싸운 것도 같은 이유지. 젠장.' 게으름뱅이가 짙은 안개에 싸인 진을 향해서 달려갔다. 남궁서천이 주유성을 쫓아가며 질문했다. "주 소협, 왜 그리 서두르시오?" "아마 부상자가 많을 거에요. 시간이 없어요. 지금도 사람 들이 죽어가고 있어요." 주유성이 빠르게 대답하고 진으로 뛰어들었다. 남궁서천과 검옥월은 주유성이 들어간 곳을 멍하니 보고 만 있었다. 조금 전의 경험으로 그들은 자기들이 따라가 봤자 방해만 된다는 것을 깨닫고 있었다. 검옥월이 안타까운 듯이 중얼거렸다. "주 공자, 이번에는 계산도 하지 않고 들어갔는데." 한참의 시간이 흐르도록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검옥월이 나 남궁서린은 걱정이 태산이었다. 갑자기 주유성이 들어간 곳의 안개가 빠르게 걷혔다. 이번 에는 거의 십이삼 장의 공간이었다. 그 가운데서 주유성이 돌 을 밟고 있었다. 그리고 그 공간에는 다시 몇 명의 사람들이 쓰러져 있었다. 그중의 하나는 검게 굳어버린 핏물 속에 죽어 있었다. 주유성이 소리쳤다. "진은 내가 해체할 테니 사람들을 구해요!" 정신이 번쩍 든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그들은 이제 해체된 부분은 안전하다는 것을 깨닫고 움직임을 망설이지 않 았다. 주유성이 다시 진으로 뛰어들었다. 그리고 기점이 되는 물 건을 찾았다. 원래는 바깥에서 기의 흐름을 주의 깊게 살핀 후 계산까지 철저히 한 다음에 들어가서 해제할 생각이었다. 그렇게 하나 씩 진을 풀어나갈 계획이었다. 그것이 안전하고 심력 소모도 적으며 편하다. 그러나 시간이 많이 걸린다. 하지만 시간의 소모는 곧바로 사람들의 죽음과 이어진다. 주유성은 그걸 깨달았고 그 순간 할 일은 결정됐다. 주유성은 몸으로 때우기로 했다. 일단 진에 뛰어들면 다양한 기가 만들어내는 엄청난 양의 정보가 밀려들었다. 바깥에서 미리 계산을 해놓지 못했으니 어느 정보가 버릴 것이고 어떤 것이 잡아내서 처리할 것인지 구분할 수 없다. 마치 파도가 치듯이 계속 밀려드는 정보에 대한 실시간 계 산은 잔머리로 되는 일이 아니다. 더구나 이건 마교의 절진으 로 유명한 아수라환상대진이다. 천하의 주유성이 난생처음으로 머리가 터질 정도로 집중 했다. 기들이 움직이면 그 흐름의 방향과 좌표를 재빨리 계산 했다. 가짜든 진짜든 모두 계산해야 했다. 모든 정보를 계산 해서 그중에서 진짜를 골라냈다. 너무 집중하느라 머리에서 열이 펄펄 나는 느낌이었다. 내공은 물론이고 심력이 어마어 마하게 소모되었다. 그는 정보를 처리하며 그중 특히 왜곡이 심한 쪽으로 움직 였다. 그 과정에서 얻은 정보들을 다시 암산하며 정확한 위치 를 찾았다. 다행이라면 계산이 틀려도 치명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틀 리면 다시 계산하면 그만이다. 효과는 있었다. 몇 번의 착오 를 범한 끝에 그는 새로운 진의 급소 하나를 찾아내서 그 자 리에 박혀 있던 나무를 부숴 버렸다. 다시 안개가 걷혔다. 하지만 남은 것이 엄청나게 많다. 그는 계속 움직였다. 진의 기점을 몇 개 없애는 동안 심력과 내공이 과도하게 소 모되었다. 그 영향으로 그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하지만 멈출 수는 없었다. 다행히 진은 없애면 없앨수록 한 번에 해제되는 양이 커졌다. 기점들 사이의 상호작용이 풀려서 생기는 이익 이었다. 검옥월은 사람들을 옮기면서도 주유성의 동태에 신경 썼다. 짙은 안개 속에서 그가 나타나는 시간은 짧았지만 그때마다 놓치지 않고 주유성의 안색을 살폈다. 주유성의 얼굴은 이제 시체처럼 창백해져 있었다. 그녀는 자꾸 걱정이 되었다. '항상 여유만만하던 주 공자자 저 지경이 되다니.' 무공고수가 생명을 걸고 싸움을 하는 경우, 심력을 너무 소 모해서 맛이 가는 경우가 가끔 있다. 백발이 되는 경우도 있 고 핼쑥해질 수도 있다. 가끔 죽기도 한다. 검옥월이 보기에 지금 주유성이 모습이 그랬다. 그렇게 거의 한나절의 시간이 흘렀다. 구조되는 사람은 점 점 늘어났고 진은 점점 없어졌다. 그리고 어느 순간 모든 안개가 씻은 듯이 사라졌다. 아수라환상대진이 아무리 대규모의 질긴 진이라고 해도 그 형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기점이 일정한 개수 이상 살아 있어야 한다. 기점이 너무 많이 파괴되자 아수라환상대진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일시에 해제되었다. 진을 설치하는 데 사용한 것들은 단순한 돌덩이나 나무뭉치의 나열로 변했다. 막 큼지막한 돌을 굴려낸 주유성이 해제된 진을 보고 히죽 웃었다. 사람들이 주유성을 보고 있었다. 주유성이 검옥월 등을 보 고 손을 흔들었다. 그리고는 풀썩 쓰러졌다. 검옥월이 풀썩 쓰러졌다. "주 공자!" 그녀는 경공을 펼쳐 주유성을 향해 달려갔다. 화살이 날아 가는 듯한 기세였다. 남궁서천도 검옥월의 뒤를 따라 경공을 펼쳤다. 그의 눈이 커졌다. '설마 초상비? 저 나이에?' 경공의 경지 중 풀을 밟고 뛸 수 있는 수준을 초상비라고 한다. 그 위에 답설무흔이나 등평도수, 능공허도 등등이 많이 있지만 그런 건 일반 무인에게는 꿈같은 소리다. 답설무흔은 고사하고 초상비를 펼친다는 것 자체가 평범한 고수의 경지 는 아니라는 소리다. 남궁서천도 그 경지에 도달하지 못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검옥월만큼 되지는 못했다. 남궁서천의 경지는 밟은 풀이 살 짝 꺾이게 만드는 경지다. 그러나 검옥월의 경공은 정말로 풀 이라고 해도 크게 휘청거리기만 할 뿐 꺽이지 않을 정도로 멀 쩡하게 밟고 지나갈 만큼 가볍다. 어느새 날아간 검옥월이 주유성을 붙잡고 상태를 살폈다. "주 공자, 괜찮아요?" 주유성이 정신까지 잃은 건 아니다. "난 그냥 누워 있으면 돼요. 나 눕는 거 잘해요. 그러니까 내 걱정 말고 사람들이나 살펴요." '아이고 죽겠다. 머리도 아프다. 조금만 쉬자.' 주유성은 당문을 통해 전해진 의술을 제법 익히고 있다. 당문의 비전은 독이지 의술이 아니다. 그러나 독을 다루다 보니 중독과 해독, 그리고 무가답게 혈맥의 손상과 부상에 관 한 의술에도 꽤 높은 수준을 이루었다. 당소소는 비전을 못 전수받는 것에 대한 아쉬움 때문에 의 술에 제법 공을 들였다. 그동안 그녀가 주가장의 사람들에게 그렇게 독을 뿌려대도 죽는 사람 하나 나온 적 없다. 모두 그녀의 의술 덕분이다. 그 결과로 주가장 사람들은 독에 대한 기본적인 내성까지 가 지게 됐다. 그 의술이 주유성에게까지 전해져 있다. 워낙 먹는 거 좋아 하는 놈이라 잘못 주워 먹고 죽지 말라고 당소소가 가르친 것 이다. 그런데 당가에서 나온 것은 무공 쪽에 특화된 의술이다. 질 병에 대한 처치는 그리 대단하다고 할 수 없다. 하지만 주유 성은 그걸 얻어 배운 것만으로 일반 의원들의 경지는 예전에 넘었다. 결정적으로 당가의 의술은 지금의 무림인들처럼 부상당한 사람들에게는 탁월한 효과를 발휘한다. 주유성은 한쪽에 모아놓은 부상자들을 보고 마음 편히 쉴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이고. 머리가 아픈데.' 주유성이 힘겹게 일어섰다. 평소의 게으른 움직임이 아니 라 정말로 일어서기 힘들었다. 진을 휘젓고 다니느라 내공 소 모가 너무 커서 진기가 거의 고갈되었다. 머리는 너무 써서 멍하다. 더 이상 집중할 기력도 없다. 긴장이 풀리자 생각이 잘 정리되지도 않았다. 그래도 할 수 없었다. 지금은 게으름 피울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검 소저." "네. 말하세요." "나 좀 사람들에게 데려다 줘요. 내가 의술을 조금 알아요." 검옥월이 깜짝 놀라며 말렸다. "주 공자, 알긴 뭘 알아요? 공자의 지금 상태를 알아요? 그 예쁜 얼굴이 지금 반쪽이 됐어요. 당 이모도 못 알아볼 정도 예요." 검옥월의 말마따나 주유성은 지금 얼굴이 홀쭉해졌다. 주유성이 피식 웃었다. "그래도 난 살아 있잖아요. 괜찮아요. 나 튼튼해요." 검옥월은 잠시 멈칫거리다가 주유성의 팔짱을 꼈다. "알았어요. 내가 부축해 줄게요." 갑자기 남궁서천이 다가와서 주유성을 번쩍 들었다. "주 소협, 내가 데려다 주지." 남궁서천의 생각에 그게 가장 효율적이다. 그는 주유성을 들쳐 메고 사람들을 향해 걸어갔다. 검옥월이 자신의 겨드랑이에 남은 주유성의 팔의 감촉을 잠시 느끼며 아쉬워하다가 화들짝 놀랐다. '어머나,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야.' 그녀는 재빨리 머리를 흔들어 잡생각을 떨쳐 버리고 남궁 서천의 뒤를 따라 걸어갔다. 집계된 사망자는 무려 오백여 명이었다. 진에 갇힌 초기에 대부분의 충돌이 일어났고 그때 다수의 사망자가 나왔다. 그 리고 초기에 중상을 입은 사람들 역시 사흘 동안 진에 갇혀 고립되는 동안 대부분 사망했다. 중상자도 오백여 명이 나왔다. 그들은 초기에는 큰 부상이 아니었지만 지난 사흘간 부상이 악화된 사람들이다. 멀쩡한 상태였다면 모를까 사흘 동안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하고 오히 려 심력만 잔뜩 소모했다. 그것이 몸의 회복을 방해했고 그들 을 중상자로 만들었다. 단순히 기력이 쇠한 팔천여 명의 사람들은 안정이 최고였 다. 사람들은 그들에게 물을 마시게 하고 묽은 죽이라도 끓여 먹였다. 죽을 먹을 기력이 없는 사람들은 잠이라도 재웠다. 살았다는 안도감에 사람들은 쉽게 잠에 빠져들었다. 하지만 중상자 오백여 명은 그것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다. 칼밥 먹은 무림인 중에는 간단한 부상 정도는 스스로 처리 할 수 있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그들도 이런 증상에는 그리 도움이 되지 않는다. 애초에 무림맹에서 동원해 온 사람들 중에는 의술에 매우 밝은 자가 몇 명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진에 걸려 맛이 가 있는 상태다. 남을 치료하는 건 고사하고 자기 목숨이 간 당간당하다. 진이 발동된 후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근처에서 데려온 의 원도 몇 명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병 치료가 전문이다. 이런 식의 중상자들에 대한 처치는 그다지 능숙하지 못하다. 할 수 없이 주유성이 제대로 나섰다. "금창약. 금창약 가진 사람들은 전부 다 내놔요. 기력 회복 에 좋은 약 가진 사람들도 다 가져와요. 청명환이나 정심환 같은 거 있으면 대환영이에요." 금창약 정도는 무림인의 필수품이다. 소독과 베인 상처 회 복에 탁월한 효능을 보인다. 부상자들의 품만 뒤져도 잔뜩 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청명 환이나 정심환 같은 약은 이야기가 다르다. 그런 건 비록 소 림사 대환단 같은 기적의 명약은 아니더라도 엄청난 고가품 이다. 군소문파라면 문중의 보물과 비슷하게 취급된다. 당연 히 가진 사람이 별로 없다. 진에 갇혔다가 멀쩡한 사람들 중 그런 약을 가진 자들은 이 미 그걸 모두 소모했다. 그들은 청명환을 먹고 운기를 하며 기력을 보충했다. 그걸 가졌다는 것 자체가 먹어도 될 만큼의 신분이 된다는 뜻이니 아무도 약을 남겨두지 않았다. 진 바깥에 있던 사람들 중에 그런 약을 가진 사람도 몇 명 있다. 그러나 그들은 그걸 차마 꺼내놓지 못했다. 자기네 문 파 사람을 위해서가 아니라면 문중의 보물을 내놓지는 못했다. 부상자나 사망자 중에 그런 약을 가진 사람은 하나도 없었 다. 약을 가진 사람은 대부분 무공까지 높아 서로 칼을 겨누 게 되면 반드시 이겼다. 그래서 중상까지 가지 않았다. 주유성은 쉽게 가는 길은 글러먹었음을 깨달았다. 좋은 것 을 보고 자란 그는 그런 약을 사람들이 아까워서 내놓지 않는 다고는 차마 생각하지 못했다. "어쩔 수 없네." 약이 없으면 직접 치료해야 한다. 주유성은 부상자들의 상처를 돌보기 시작했다. 그가 하려 는 것은 완전한 치료가 아니다. 숨을 붙여놓아 차후 제대로 치료받게 하는 응급 치료다. 그는 단검을 하나 빌렸다. 그의 뒤에 검옥월과 남궁서린이 금창약 봉지를 잔뜩 들고 따라다녔다. 사람들의 상처가 썩고 있으면 그 부분을 단검으로 잘라내 고 혈도를 짚어 지혈했다. 그가 단검을 휘두를 때는 잘 보이 지 않을 정도로 약한 검기가 흘렀다. 그 때문에 병마가 상처 에 침입하지 못했다. 대신에 매번 약간의 내공이 소모되었다. 주유성의 칼질은 절묘했다. 그는 썩은 기운이 느껴지는 부 분만 골라 정확히 잘라냈다. 팔다리를 잘라야 할 사람도 그의 손에 걸리면 상한 부분만 베이는 것으로 끝났다. 그러면 뒤따르던 검옥월과 남궁서린이 금창약을 뿌렸다. 그리고 일반 무림인들이 달려들어 천으로 상처를 감쌌다. 기혈이 뒤틀린 사람은 내공을 써서 바로잡았다. 타격계도 쓰고 내가수법도 썼다. 당연히 내공이 소모되었다. 본격적으 로 할 여유는 없으니 급한 것만 잡아놓고 나머지는 놀고 있는 고수급 무림인들에게 넘겼다. 완전히 맛이 간 사람은 상처를 째고 기혈을 잡는 것만으로 는 부족했다. 그런 사람은 눕혀놓고 추궁과혈을 해서 숨통을 틔웠다. 제대로 하는 것은 역시 다른 사람들에게 넘겼지만 아 무리 간단하게 해도 추궁과혈은 원래 내공을 상당히 잡아먹 는 수법이다. 주유성의 치료 속도는 빨랐다. 부상자 앞에 서면 쓱 보며 기를 점검했다. 곧바로 혈도부터 짚고 칼을 휙휙 휘둘렀다. 뒤틀린 기혈을 잡을 때도 두들겨 패듯이 후다닥 몰아쳤다. 그 엄청난 치료 속도에 사람들이 혀를 내둘렀다. 그러나 천하의 주유성도 그렇게 한 삼백 명 정도 하고 나자 이제 슬슬 한계가 왔다. 사람들은 모르지만 주유성이 해체한 것은 마교 비전으로 전해지는 전설의 아수라환상대진이다. 그것도 몸으로 부딪 치며 실시간으로 해제했다. 그 과정에서 대부분의 내공을 소 모했다. 삼백 명의 환자를 치료하는 과정에서 대부분에게 약한 검 기를 썼다. 내공을 써서 기혈을 타통시키거나 추궁과혈을 해 야 했던 사람도 백여 명이다. 이제 주유성의 끝없는 내공도 바닥을 드러내고 손끝이 덜덜 떨렸다. 사람들은 주유성이 치 료를 하도 잘하니 다라다니면서 도와주기만 할 뿐이었다. 검옥월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주 공자, 조금 쉬어야 하지 않아요?" "내가 쉬느라 죽는 사람이 나오면 밤에 잠이 안 올 거예요. 난 아직 살아 있잖아요." 검옥월은 그런 주유성을 보고 있자니 가슴이 콩콩거렸다. '게으른 줄 알았더니 아니었어. 역시 엄청난 수련을 거친 사람이야. 좋은 사람.' 주유성은 할 때는 한다. 원래부터 바짝 하고 쭉 노는 성격 이다. 제대로 하면 그 집중도는 장난이 아니다. 비록 지금은 놀려고 하는 일은 아니지만 그래도 그는 자신 의 한계까지 쥐어짜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모든 환자의 치료가 끝났다. 주유성은 그 자 리에 그대로 자빠졌다. "아, 나 이제 더 이상 못 움직여 차라리 날 죽여." 큰대 자로 쓰러진 주유성을 보며 검옥월이 날카로운 눈으 로 웃었다. "쉬세요. 주 공자는 충분히 했어요." 주유성이 고개를 슬쩍 돌려보았다. 부상자들에게 무림인들 이 달라붙어 간호하고 있었다. "이대로 쭉 쉴래요. 누가 찾으면 죽었다고 해요." 이제 사람들이 주유성을 보는 눈빛은 장난이 아니다. "주 공자, 대단한데?" 그를 허풍대협이라고 부르는 사람은 더 이상 없다. "진법대회 우승자라더니 정말이네. 그 큰 진을 혼자 해체 하다니." "의술도 보통이 넘었어. 응급처치라고는 하지만 오백 명을 두 시진 만에 다 치료했다고." "그럴 만도 해싸지. 외상만 있는 환자에게는 그냥 칼질 쓱쓱 하면 끝이었으니까. 손이 제대로 보이지도 않을 만큼 빨랐다 고." "혈도도 거의 동시에 짚었지." "의술은 당가에서 전수받았겠지? 역시 우리 같은 무림인에 게는 당가의 의술이야. 부상에는 정통으로 먹히네." |
첫댓글 즐독입니다
ㅎ늘 감사 히 잘읽고 갑니다
즐감 하고 갑니다
즐독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