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물기행 이만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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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물기행 이만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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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5.30. 02:29조회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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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교육사>를 쓰고, 민족교육을 실천한 이만규((1888~1978)
해방 직후인 1946년, 을유문화사에서 출간되었던 <조선교육사>는 42년 만인 1988년 거름출판사에서 복간됨으로써‘복권’되었다.
진보적 이론저서 복권돼
그러나 이 책을 저술한 이만규의 생애는 그가 북한에서 고위직에 몸담아 북한의 교육정책 수립에 중요한 역할을 했었다는 사실 때문에 아직도 이 땅에서 복권되지 못하고 있다.
이만규는 1888년 강원도 원성군 간현면에서 소농인 한산 이씨 이명직과 밀양이 본관인 박현숙 사이의 2남 가운데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당시 아버지 이명직의 재산이 겨우“밥 지어먹고 보통학교에 보낼 정도”밖에 안됐으나 고향에서 소학교와 상당한 수준의 한문공부를 끝낸 열여덟살이 되던 해 홀로 상경, 서울 생활을 시작했다.
서울에 올라온 그는 곧바로 학비와 숙식비를 전액면제해 주는 등 입학특혜를 주면서 첫 신입생을 뽑은 경성의학강습소(서울의대 전신)에 들어갔다.
그는 여기서 5년동안 의학전문지식을 배웠으며 이밖에도 정치·경제·역사·과학·문학·예능 분야의 서적을 두루 섭렵한 뒤 1911년 졸업과 함께 개성으로 가서 외과의사로 활동했다.
그와 그의 동기생들이 경성의학강습소 졸업과 동시에 얻은 의사면허증은 당시 조선땅에서 일제가 조선인에게 내준 최초의 의사자격증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는 개업 2년여 만에‘인술의 길’을 버리게 된다.
의사직 박차고 교사 택해
그는 의사를 그만두고 곧바로 당시 개성송도고보의 교장으로 있던 윤치호의 권유로 이 학교에 부임, 수학·국어·역사 등을 가르치는‘교사의 길’로 들어선다.
이만규는 송도고보에 부임한 뒤부터 1946년 6월 배화고녀의 교장을 그만둘 때까지 3년여(1938~41)의 옥중생활을 빼고는 글자 그대로‘교단의 삶’으로 일관했으며, 그 뒤부터는 거기서 얻은 교육적 경험을 교육정책으로 전환시키는 데 힘을 기울였다.
그는 송도와 배화고녀 시절 정식으로는 수학담당 교사였으나 일제 총독부 학무국의 감시를 피해 학생들에게 우리말과 역사를 가르치는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다.
배화고녀를 졸업한 조애영(81)씨는 "당시 이만규 선생님은 우리 학생들의 민족혼을 일깨우기 위해 한글독본과 역사책을 구해와 위험을 무릅쓰고 가르쳤다”며 “특히 여성의 잠재력 개발을 중요시해 ‘과도기의 여성은 한어깨에 두짐·세짐의 과제를 짊어져야 한다’고 늘 강조했다”고 말했다.
1936년 배화고녀 졸업앨범 첫장에는‘졸업생들에게 주는 말’이라는 6행의 짧은 시가 들어 있다.
“네 뿌리 깊었거니 / 저 바람에 뽑힐소냐 / 네 향기 맑았거니 / 저 냄새에 흐릴소냐 / 옛 동산 새 봄빛을 / 꾸며주면 하노라.”
단일민족의 전통문화와 자긍심을 상징하는‘네 뿌리’‘네 향기’와 일제의 강점 현실을 말한 듯한‘저 바람’‘저 냄새’를 극명하게 대조시키면서 마지막에 가서는 조국의 광복을 염원하는 듯한‘옛 동산=조선’에‘새 봄빛=광복’을 꾸며달라고 쓰고 있다.
‘민중의 교육참여’ 내세워
조씨는“당시 이만규 선생님은 우리 학생들의 영혼 속에 독립을 위한 항일투쟁의 정당성을 가르치면서도 한편으로는 인간과 자연에 대한 무한한 사랑과 겸손을 알려주었다”며 이만규의 북한정착을 의식,“분단이 우리 선생님을 빼앗아 갔다”고 오열했다.
이만규의 이런 교육적 열정과 미래에 대한 진보적 사고 등은 그의 폭넓은 지식과 결합돼 <조선교육사> 전편에 들어차 있다.
1925년 신흥우 이상재등 기독교감리회 소속 청년들이 중심이 돼 독립운동단체를 조직했다가 일제에 의해 발각된‘흥업구락부’사건에 연루돼 3년 동안의 옥고를 치르면서 집필구상을 하고 출옥뒤 8년여의 사료정리와 분석끝에 나온 이 책은 2백자 원고지 3천장 분량으로 조선시대이전, 조선시대, 일제시대 교육 등으로 나뉘어 있다.
단재 신채호의 민족사관과 백남운의 경제사관을 저술의 밑바탕에 깔고 있는 이 책에서 그는 조선이 식민지로 전락한 원인을 민중이 교육의 주체가 되지 못했던 역사적 경험에서 찾고 있다.
이 책은 또 시종일관 민중에 대한 깊은 애정과 그들의 노동이 역사발전을 일궈낸다는 믿음을 견지하고 있으며, 따라서 그는‘노동하는 민중’을 억압하는 교육기능을 하고 있는 봉건제하의 지배이데올로기를 타파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그는 당대 기득권층의 교육 독점을 지양하고 노동하는 민중의 교육참여를 실천적 과제로 내세우고 있다. 특히 그는 이른바 잡과 교육으로 불리는 각종 기술교육과 가정의 굴레에서 벗어난 여성교육을 적극적으로 주장하기도 했다.
이만규는 이와 함께 지면을 통해 교육에 관한 글을 여러편 발표했는데 국가건설에 따른 교육정책을 제시하는 것들이다.
그는‘건국교육에 관하여’(<과학전선>1946년 2월호)라는 글에서 평등교육을 유난히 강조했는데“대자연에는 차별을 위한 차별이 절대로 없으며 만인평등의 원칙으로 되어 있다”고 쓰고 있다.
이는 곧 민주주의 원리의 두 개의 수레바퀴인‘자유’와‘평등’가운데 평등의 이념을 더 중요시한 것으로, 이만규와 당시 인민당 등 진보적 민주주의 세력이 평등의 실현을 통하여 자유도 실현될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음을 짐작하게 해준다.
48년 평양방문뒤 잔류
그는 또 이 글에서 해방 뒤 최초로 의무교육과 기본학제의 중요성을 주장한다.
그는 미군정이 실시하려고 한 6·3·3·4학제와는 달리 기본학제를 이동원(유아원) 3년(4~7살), 소학교 5년(7~12살), 중학교 3년(12~15살), 고등학교 3년(15~17살), 대학4~5년(18살 이상)으로 할 것을 주장하고 있다.
이와 함께 그는 당시 남북한 모두 구상하고 있던 6·6·4 학제는 생활수준이 높고 경제적으로 풍족한 국가에서 시행할 수 있는 것이라며 반대입장을 보였다.
의무교육 실시와 관련해 그는 경제문제, 특히 토지문제 해결이 중요하다고 역설했다.
바꿔 말해 의무교육의 실시는 신생국가의 취약한 국가재정으로는 전액 국고지원이 불가능해 과도기적으로 국민의 부담이 따라야 하는데 당시 국민의 8할이 토지를 소유하지 못한 소작인이어서 교육비를 지출할 형편이 못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토지개혁을 통해 농민에게 땅을 주어 의무교육 실시에 따른 교육비 등의 생산기반을 마련해 줘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편 이만규의 생애 가운데 몽양 여운형과의 교분을 빼놓을 수 없는데 그의 폭넓은 교육적 식견은 여운형이 주도한 건국준비위원회·조선인민당·근로인민당 등에서 교육·문화부문의 주요정책으로 채택되기에 이른다.
그는 송도고보 재임시절인 1914년 개성을 거쳐 중국으로 망명길에 오른 여운형과 운명적인 첫 해후를 가진 뒤부터 1947년 7월 여운형이 비운의 총탄에 맞아 세상을 뜰 때까지 진보적 민족주의자로서, 정치적·사상적 동지로서 같은 길을 걷게 된다.
이만규와 여운형의 교우관계는 이만규의 셋째딸인 각경과 여운형의 조카인 경구를 혼인하게 함으로써‘사돈지간’으로까지 발전하게 된다.
이만규는 건국준비위원회 시절부터 근로인민당에 이르기까지 조직의 핵심적인 인물로 건국 초기에 많은 일을 했는데 그중에서도 주로 교육·문화부문에 관한 강령과 정책을 수립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 당시 여운형의 비서로 있으면서 이만규와 여운형의 교우관계를 지켜본 이기형(74·시인)씨는“이만규 선생은 몽양의 절대적인 지지와 신뢰를 받았다”며“그 당시 발표했던 주요 문건 가운데 정치·경제분야는 이여성 선생이, 교육·문화분야는 이만규 선생이 거의 초안을 만들었다”고 말했다.
이만규가 직접 기초했거나 그의 의견이 크게 반영됐음이 확실시되는 조선인민당의 교육·문화 정강·정책은 국가부담에 의한 의무교육과 수재교육 실시, 문맹퇴치 및 사회교육 촉진, 학술교육기관의 확충과 교육자·연구자·기술자 우대 등 5개 항목이다.
이만규는 이후 미·소 공동위 결렬, 여운형 암살, 5·10총선거 등 정치적 격변의 와중에 남북의 정당이 마지막으로 심혈을 기울인 통일정부 수립운동에 참가 1948년 6월 평양에서 열린‘남북조선제정당사회단체 지도자협의회’에 근로인민당 대표로 김구·김규식 등과 함께 갔다가 평양에 남게 된다.
그는 30여년간 실천적인 민족교육활동을 하면서 일궈온 교육사상을 북한의 교육정책 수립에 반영시켰을 뿐만 아니라 교육사 연구분야에도 영향을 끼쳐 1989년 도서출판 <한마당>에서 펴낸 북한의 교육사 연구자 박득준이 쓴 <조선근대교육사>에서 가장 빈번하게 인용되고 있는 책이 바로 이만규의 <조선교육사>이다.
이만규는 북한에서 교육성 산하 보통교육국장을 역임했고 그뒤 최고인민회의대의원을 거쳐 <민주조선> 사장을 끝으로 현역에서 은퇴, 78년 90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것으로 알려졌다.
이만규와 그의 부인 박현숙은 슬하에 2남4녀의 자녀를 두었으나 남북분단으로 인해 이만규 부부와 2남2녀는 북녘에, 이철경 등 두 자매는 남녘에 따로 떨어져 살아야 하는 이산가족이 돼야 했다.
큰아들 정구는 아버지와 함께 조선인민당·근로인민당에서 활동을 하다 남북협상 당시 함께 북한으로 갔으며 큰딸 인경, 셋째딸 각경, 막내아들 길구 등도 모두 북한에 살고 있다.
남한 두딸도 교육자 길
남한에는 둘째딸 철경과 막내딸 미경(73)이 남았으며 철경은 지난 89년에 세상을 떴다. 남한에 남아 있던 이들 두 자매는 모두 이화여대 음학과를 졸업해 이화여고·금란여고·배화여고 등에서 교사로서 여성교육자의 길을 걸었다.
특히 이들은 모두 한글서예의 대가로 현대미술초대전 등 국내외에서 수많은 전시회를 가졌다. 철경은 이와 함께 대한주부클럽연합회장, 한국여성단체회장 등을 맡아 여성·사회단체를 이끌어온 여장부이기도 했으며 이들 자매는 또 모두 신사임당의‘가도’‘부덕’‘서화’를 기리고 전통적 맥을 잇는 여성에게 주는‘신사임당상’에 뽑히기도 했다.
현재 서울에 유일하게 생존해 있는 막내딸 미경은“아버지의 가정교육이 남달라 언니(철경)가 스물세살이 되던 해에 모두 7개항의‘개화기의 여계서(女戒書)’를 우리 자매에게 주셨는데 희생과 봉사, 감정의 절제, 운명의 창조, 어른 공경, 생활문화 창조에 힘써 달라는 내용이었다.”고 말했다.
이만규는 이데올로기나 분단과는 상관없이 그의 삶 전체를 우리 민족의 내일을 위한 민족교육사업(남한에서는 교단활동과 <조선교육사> 등의 저술, 북한에서는 교육행정가로서 교육정책 입안)에 바쳤으며 다가올 남북통일시대에 비로소 ‘분단’된 그의 교육철학도 통합이 될 것이다.
[출처] 이만규|작성자 바람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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