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무위호부(武術虎符)
장추산이었다. 그의 쌍철권은 번개보다 빠르고, 여기 얹힌 뚝심
은 산악이라도 무너뜨린다.
기공대 기공으로 맞섰을 때는 공력이 깊은 자가 이기는 법, <천
경> 양표의 기공 수준도 완숙의 경지에 도달했지만, 장추산이 연
마한 호천신강에 비하면 보름달에 반딧불처럼 엄청난 차이로 뒤떨
어진다. 게다가 무쇠주먹으로 한 대씩 얻어터질 때마다 기공이 한
푼 두 푼씩 흩어지고 있는 판국이라, 호체신공의 효력은 이제 궤
멸 직전의 상태에 이르렀다.
절묘한 기만술책, 앞쪽 정면에서 안춘 소저가 모습을 드러내어
유혹하는 바람에, 영락거사측은 깜빡 속아 모든 주의력을 그쪽으
로 쏠리고 말았다.
장추산은 바로 그 순간적인 기회를 포착, 배후로부터 기습공격
을 퍼부었다. 양동작전(陽動作戰)의 정면 연타(軟打)와 배후 강습
(强襲)이 대쪽 맞추듯 기막히게 들어맞아, 영락거사가 만리장성처
럼 믿고 의지하던 호위병 <석파>와 <천경>을 손바닥에 침뱉기로
순식간에 처치해 버린 것이다.
"아흐흑!..."
마침내 <천경>도 더는 버티지 못하고 숨막히듯 답답한 신음성을
터뜨리면서 땅바닥에 쓰러졌다. 그리고 고통에 겨워 비틀린 몸뚱
이로 풀밭을 마구 헤집어가며 버둥거리기 시작했다.
허리에 차고 있던 패검도 주인을 바꾸었다. 장추산이 제 물건
찾듯 칼집째 뚝 떼어 빼앗은 것이다.
얘기는 길었으나, 실상 찰나지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천경>이 땅바닥에 막 쓰러졌을 때, 허공으로 팽개쳤던 <석파>
역시 3장 밖으로 곤두박질쳐 떨어졌다. '파당!' 하는 굉음과 더불
어 다시 퉁겨 오르는 반탄력에 몸뚱이가 훌떡 뒤집히더니, 다시는
움직일 줄 모른다. 팔 다리를 길게 내뻗은 몰골로 보건대, 이미
죽은 모양이다.
"네놈이로구나!"
영락거사가 대경실색, 칼집에서 칼을 뽑아들기가 무섭게 급속
돌진해 왔다.
장추산은 빙그르르 우측방으로 돌아 그 앞쪽에 있는 안춘 소저
와 합류하려 달려갔다.
"그렇소, 나요! <뇌신> 장추산이외다."
그는 장애물을 피해 가로질러 나가면서 버럭 소리쳤다.
"당신은 어떻소? 늙은 개 잡놈, 주둥이만 벌렸다 하면 인의도덕
(仁義道德)을 떠벌이고 뱃속에는 더러운 똥만 가득차서, 사내놈은
날강도, 계집년은 하나 같이 창녀 갈보 노릇만 골라서 저지르는
연놈들이지! 겉으로는 허울 좋게 '제마위도' (除魔衝道)의 간판을
내걸고 속으로는 야비하고 염치없는 짓을 밥먹듯이 저질러 왔어.
나를 잡겠다는 명분을 이용해서 동업자 <단혼원앙>의 소굴을 기습
적으로 섬멸해 버린 자가 도대체 누군가? 이 늙다리 왕빠단! 같은
길을 걷는 동업자를 원수로 치부하다니, 이런 몰염치한 수단을 강
호사람들이 그냥 내버려둘 듯 싶으냐? 이 장추산도 너같은 부류를
살려두지 않을 테다! 너를 죽이지 않고선 내 분이 풀리지 않는단
말이다!"
그는 한 손으로 안춘의 섬섬옥수를 붙잡고 어깨를 나란히 맞춘
채 뛰면서 욕설을 퍼부어댔다. 뛰는 속도도 추격자들과 어슷비슷
하게 맞추어, 영락거사 일당이 뒤쫓지 않고선 못 배기도록 조절하
면서 내뛰었다.
"게 섰거라!"
영락거사 일행은 <석파>와 <천경>을 돌봐줄 한 사람만 남겨 놓
고 죽을 힘을 다 쏟아 추격하기 시작했다. 이리하여 고수 중의 고
수 네 명은 목표를 놓칠세라 전력 질주로 미친 듯이 뒤쫓아 갔다.
장추산의 속도는 빠르기가 절륜했으나, 힘을 쓰는 기척이라곤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날렵하게 달리면서 목청을 돋우어
큰 소리로 욕설까지 퍼붓는 것이, 자신의 경공신법에 원기와 정력
을 눈꼽만큼도 소모시키지 않는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 주고 있었
다. 호흡도 이 엄청난 고속 운동에 전혀 영향을 받고 있지 않는
것이 분명했다.
안춘 소저의 경공 수준은 그보다 훨씬 못 미치기 때문에, 웃음
소리를 낼 수는 있어도 원기를 소모당하지 않기 위해서 감히 말을
하지는 못했다.
"정말 재수 옴 붙었는 걸!"
장추산의 목소리가 귀청을 울렸다. 한마디 한마디씩 똑똑히 발
음하는 것이 5, 6장 뒤에 씨근벌떡 따라붙고 있는 추격자들에게
들으라고 하는 소리다.
"내 평생 암습을 몇 번 해 봤지만, 오늘에야 처음으로 실패했네
그려! 눈에 차지도 않는 조무래기 호위병 두 놈만 처치하고 오히
려 늙다리 잡놈이 풀어 놓은 사냥개 여우떼한테 쫓겨서 도망치는
신세가 되다니. 제미랄! 내 어쩌자고 이토록 운수 사납게 되었나
그래?"
그는 영락거사 신변에 따라다니는 패거리가 하나같이 화경(化
境)에 이른 고수 명숙들이란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혈혈 단신으로 위험을 무릅써가며 다수를 상대하고 싶지 않아 단
계적으로 하나하나씩 각개격파해서 섬멸할 기회를 만들고 있는 것
이다. 약을 바짝 올려 놓고 미치광이떼처럼 뒤쫓게 만들었으니,
이제 온 산을 마구잡이로 뛰어 끌고 다니면서 먼저 상대방의 기력
부터 소모시켜 지치게 만든 다음, 하나씩 처치할 작정이다.
얼마 안 있어 첫번째 기회가 왔다.
나무숲 한 군데를 뚫고 나가자, 눈앞에 장벽처럼 가파른 산비탈
이 불쑥 솟아나와 길을 가로막은 것이 보였다. 메마른 풀섶은 보
기에도 억세고 울창하지만 발을 딛기가 무섭게 꺾이고, 또한 그
밑바닥으로 뛰어들었다가는 아래로 미끄러져 그대로 고꾸라질 만
큼 경사면이 가파르다.
장추산은 그 언덕 비탈로 비약하다가 중간에서 돌연 발을 헛딛
고 엎어지더니, 몸뚱이가 주르르 급경사를 타고 미끄러져 내리기
시작했다.
"빨리 올라가요!"
그는 버럭 고함치면서 안춘 소저의 등을 위로 떠밀었다.
안춘 소저는 그가 발을 헛디딘 줄 모르는 듯, 떠미는 기세에 얹
혀 1장 가웃 도약해 올라갔다. 한 사람은 올라갔지만 또 한 사람
은 미끄러져 내렸으니, 둘 사이의 간격이 훨씬 벌어졌다.
추격자의 선두로 달려오던 중년인 하나가 그 광경을 보고 너무
도 기쁜 나머지 그가 진짜 발을 헛디딘 줄 착각했다.
"잡았다, 요 녀석 ! 으하하핫!..."
미치광이의 웃음이 한바탕 울리는 가운데 일약 3장(一躍三丈),
허공 위로 뛰어오른 중년인은 장검과 몸이 한 덩어리가 된 채 푸
른 무지개가 지면에 내리꽂히듯 <청홍입지>(靑虹入地)의 초식으로
허공에서부터 아래로 곤두박질치면서, 이제 막 미끄러지고 있는
장추산의 등쪽 심장 부위를 겨누어 일검을 찔러갔다.
그러나 장추산의 미끄럼타기는 중도에서 딱 멎었다. 중년인은
덮쳐내리던 기세를 미처 멈추지 못하고 그대로 떨어졌다.
"치익 !"
칼날이 땅 속으로 1척 남짓 뚫고 들어가는 소리가 났다. 위치는
목표의 발끝 3, 4척 벗어나 메마른 풀섶 덤불이었다. 벌떡 몸을
일으킨 장추산, 중도에서 허리를 비틀어 반격자세를 취했다. 선회
동작과 더불어 오른손에 쥔 장검이 칼집째 돌아가면서 상대방의
관자놀이 바로 아래 이문혈(耳門穴) 부위를 강타했다.
"철썩 !"
칼집이 찢어지면서 불쑥 삐져나온 칼날이 놀라운 속도로 중년인
의 머리통 상반부를 후려치고 그 반대편으로 빠져나갔다.
머리통 절반이 허공으로 붕 뜨더니, 뇌수와 피보라를 일으키면
서 어디론가 날아가 버렸다. 참혹하기 이를 데 없는 살육이었다.
"빚 하나 갚았다!"
그는 통쾌하게 소리치면서, 언제 미끄러졌느냐는 듯 질풍 같이
위로 뛰어 올라갔다.
산비탈 정상에 뛰어올라 고개를 돌려 굽어보니, 시체는 아래로
계속 굴러 내려가고 있는데, 영락거사 일당 셋은 동료의 죽음도
아랑곳없이 세상 끝까지 쫓아가서라도 장추산을 따라잡고야 말겠
다는 듯 어금니를 악물고 쏜살같이 뛰어오르고 있다.
"빨리 뛰어 ! 아직 세 놈이 남았어."
그는 안춘 소저의 팔목을 당겨 끌면서 힘차게 다시 내뛰기 시작
했다.
"저 위쪽으로 더 올라가서 기다려요! 기회가 왔어."
최고봉의 정상에 오르니, 펑퍼짐한 풀밭이 펼쳐져 있다. 다시
한 번 고개를 돌려 굽어보던 그는 그만 멍청해지고 말았다. 아래
쪽에는 귀신의 그림자조차 없었다. 시체도 나무숲 덤불에 가리워
보이지 않았다. 죽을 둥 살 둥 정신없이 따라붙던 영락거사 일행
셋이 어디로 사라졌는지 종적이 묘연해진 것이다.
"벼락맞아 죽을 겁쟁이 녀석 !"
그는 발을 동동 굴려가며 마구 욕설을 퍼부었다.
"늙다리 잡놈! 네가 어디 도망칠 수 있을 듯 싶으냐? 겁쟁이 !
비겁자! 헛된 명성만 늘어놓는 개 잡놈!"
그는 모른다. 그가 일검에 사람의 머리통 절반을 베어 날려보냈
을 때 뒤미처 그 참상을 목격한 영락거사 일당은 그만 간담이 서
늘해지고 말았다. 평소 비범한 고수 명숙이라 자처하던 그들이었
으나 동료의 머리통이 피보라를 일으키면서 허공으로 붕 떠오르는
것을 보았을 때, 장추산을 뒤쫓으려던 마음이 싹 가셨다. 그래서
이들은 추격을 계속하는 것처럼 보이고 중도에서 곁길로 빠져 삼
십육계 줄행랑을 치고 말았던 것이다.
죽음을 당한 인물이 누구냐? 강호상에 위명도 자자하신 <경천일
검>(擊天一劍) 관봉(關鋒), 무림계 10대 명검객 중의 하나로서,
그 검술이 이미 오래 전 심검합일(心劍合一)의 경지에 도달했다는
사람이다. 그런 인물이 영문도 모른 채 상대방의 일격에 아까운
목숨을 날려보내고 인간 세상에서 제명을 당할 줄이야 어느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영락거사는 내공 수준으로 따진다면 <경천일검>보다 한두 수쯤
높다. 그러나 검술 면에서 본다면 확실히 한두 수 뒤떨어진다. 이
런 막강한 검객이 목숨을 잃어버린 판국에 영락거사가 놀라 도망
치지 않는다면, 그것은 천하에서 가장 아둔한 바보 멍텅구리라고
해야 할 것이다.
영락거사는 뺑소니를 쳤다.
그렇다고 장추산이 어찌 그냥 내버려 둘소냐? 그는 안춘 소저와
함께 발길을 되돌려 역추격에 나섰다.
3리 남짓이나 정신없이 내뛰다가, 영락거사는 동료 패거리 일곱
명과 맞부닥쳤다.
"남문 형, 이게 어찌 된 일이오?"
패거리를 이끌고 오던 우두머리가 깜짝 놀라 물었다. 영락거사
를 비롯한 세 사람의 몰골이 차마 눈뜨고 보지 못할 정도로 낭패
스럽기 짝이 없는 것이다.
일당 중에서 내공력이 가장 심후한 영락거사였으나, 지금 그의
얼굴빛은 종잇장처럼 하얗게 질린데다, 숨결도 불안정하고 겉옷자
락이 땀에 흠뻑 젖어 거의 탈진 상태에 빠져 있다.
"우리는 장... 장추산... 그놈과 마주쳤소!..."
살모사의 눈을 가진 키다리가 가쁜 숨을 헐떡거리면서 영락거사
대신 대꾸했다.
"잘 됐소이다! 하하, 그놈도 지금쯤..."
우두머리가 물정도 모른 채 반색을 했다.
"그놈이 남문 장주의 측근호위 <석파>와 <천경>을 죽였소!"
"저런, 안 됐구려 !"
반응이 시큰둥하게 나오자, 영락거사와 함께 뛰었던 또 다른 동
료가 속이 상했는지 버럭 악을 썼다.
"잘 됐다, 안 됐다가 뭐요? 그놈이 단칼에 우리 <경천일검> 관
형의 머리통을 수박 쪼개듯 날려보냈는데, 이게 잘 된 거요, 안
됐다는 거요?"
"아이쿠! 그럴 리가?..."
"우리 나머지 사람들을 빨리 모아들입시다."
영락거사가 염치없는 기색으로 지시를 내렸다.
"그놈은 정말 너무도 무섭소. 우리 전 병력을 집중시켜서 상대
해야만 되겠소."
이때였다. 우측방 숲 속에서 느닷없이 2, 30명이나 되는 사람들
이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 계제운이 거느린 남녀 28명이다. 그들
은 단 두 세 차례 도약으로 거리를 바짝 좁혀들었다.
"전 병력이라? 당신들에겐 이제 몇 사람 남지 않았소."
계제운이 냉랭하게 쏘아붙였다.
"귀하가 영락장의 장주, 천풍거사 남문존신인 모양이구려. 이렇
게 뵙게 되어서 반갑소이다."
영락거사측 10명은 황급히 병기를 뽑아들고 전열을 갖추었다.
익숙하고도 재빠르게 포진(布陣)하는 품이, 영웅 호걸다운 기백
이 조금은 남아 있다.
"당신은...?"
영락거사가 의아스레 물었다. 상대방을 훑어보던 눈길이 감대랑
과 안춘의 몸종 소도에게 가서 멈추는 순간, 그는 가슴이 덜컥 내
려앉았다.
"소인의 성은 계씨, 계제운이외다. 당신은 날 모르겠지만, 나는
당신을 잘 알고 있소. 귀하께서 무림계에 명성을 떨치는 영도급
인물, 강호 천하의 명망을 한 몸에 받고 계신 대협이라더니, 과연
호걸 협사다운 기백을 제법 몇 푼쯤 지니고 계시는구려."
"당신은 도대체...."
"나 말이오? 장추산과 안춘 소저의 친구지 !"
"그렇다면...."
"당신, 방금 장추산과 마주쳤다고 그랬지요?"
"흥! 계씨라? 그놈의 친구라니, 너도 필경 사마외도 인물이겠구
나! 강호 무림계 사람들에게 멸시받아 마땅한 마도(魔道)의...."
"내가 정도를 걷든 마도를 걷든, 당신이 멋대로 손가락질할 구
석은 없어 !"
"도대체 어쩔 셈이냐?"
"당신 태도를 보아서 결정하지 !"
계제운은 음산한 미소를 띠었다.
"마도를 제거하고 정도를 지키는 것이 우리 무림계 사람들의 천
직이다!"
"그것 참 좋은 천직을 가지셨군! 당신, 어디 이 계제운이란 마
귀를 제거해 보실 작정이오?"
"바로 그렇다!"
"좋소, 그럼 잠깐만 기다려 주시구려. 소인이 먼저 한 가지 일
을 처리하고 나서 당신과 따져 보기로 할 테니까."
말을 마치자, 계제운은 뒤쪽을 향해 손을 번쩍 휘둘렀다.
숲 속에서 네 명의 장한이 휘적휘적 걸어나왔다. 두 사람이 각
각 하나씩 겨드랑이를 꿰어 부축해 나온 것은 뒷짐으로 단단히 결
박지은 <호풍환우> 능유광과 또 다른 동료 중년객이었다. 압송자
들은 보무도 당당하게 뭇 사람들을 앞질러 나오더니, 포로들을 계
제운의 발치 밑에 꿇려 앉혔다.
"남문 장... 주!... 날 좀... 구해 줘 !..."
영락거사가 발견한 <호풍환우>가 잔뜩 쉰 목소리로 처절하게 부
르짖었다.
"앗, 저런..."
영락거사가 아연 실색, 재빨리 계제운을 돌아보고 외쳤다.
"계가 놈아! 우리 편 사람을 어떻게...."
"모조리 죽여 없앴지 !"
계제운이 냉큼 말을 받았다. 어투도 반말짓거리로 바뀌었다.
"여기 이 두 녀석만 남겨두고 말이다. 알고 싶은 것도 이놈들한
테 자백을 다 받아냈으니까."
"자백이라니? 네놈이 뭘...."
"너희 부자가 장추산과 안춘 낭자를 모해한 경위, 암습한 내막
을 모조리 불게 만들었지 ! 이제는 이용가치도 없어진 놈들이야."
"어쩔 셈이냐?"
"즉결 처분이지 !"
"안 돼 !... 그럴 수 없어!..."
영락거사가 다급하게 외쳤다.
"얘들아, 쳐라!"
"예엣!"
장한 네 명이 목청을 모아 응답하더니, 그 중 두 사람이 날카로
운 협봉단도를 뽑기가 무섭게 내리쳤다.
"사람 살려!..."
<호풍환우>가 미친 듯이 비명을 질렀으나, 이미 때는 늦었다.
사람의 머리통이 뚝 떨어지자, 네 명의 장한들은 시체를 한곁으
로 걷어차 모아놓고 성큼성큼 뒷걸음질쳐 물러났다.
"이건 모살(謀殺)이야!"
영락거사가 부르짖었다.
"하하! 네가 그 비열한 수단으로 단혼장을 멸망시킨 것보다는
떳떳한 셈이지. 자아, 그럼 이번에는 너희들 차례가 돌아왔군. 장
추산과 안춘 낭자의 신상에 솜털 하나라도 이상이 생겼다면, 내
장담한다만 네놈들을 갈갈이 찢어서 항아리에 담고 소금 뿌려 육
젓을 만들어 버리겠어. 네놈의 온산 영락장도 닭 한 마리 개 한
마리 남겨두지 않고 벽돌 기왓장 하나 성한 것 없게 만들어 단혼
장보다 백 배, 천 배나 더 처참한 폐허로 만들어 놓을 테다!"
엄한 목소리로 호통치는 동안, 계제운의 얼굴에는 살기가 용솟
음쳤다.
"너희같이 써먹을 데도 없는 놈들을 죽여 없애지 않는다면 인간
세상의 내장이나 파먹는 구더기밖에 안 되겠지? 언젠가는 이 천하
를 치명적으로 썩힐 종기만 퍼뜨리는 구더기 놈들! 이제 너희들에
게도 마지막 때가 왔어 !"
손을 휘두르자, 등뒤에서 기색이 냉막한 사내가 툭 뛰쳐나왔다.
후리후리한 몸매에 평생 빚쟁이 노릇만 해 온 듯, 인정머리라곤
손톱만큼도 내비치지 않는 중년의 사내였다. 그는 느릿느릿 걸음
을 옮겨 앞으로 나서더니, 허리춤에서 협봉단도를 조심스레 뽑아
들고 손가락으로 칼날을 퉁겨 보았다. '쨍!' 하는 쇳소리가 맑고
도 야무지게 울렸다.
"남문 장주, 그대는 천하에 몇 안 되는 무림세가 명문 자제로
서, 강호상에 위명이 두드러진 고수 명숙이라던데, 그게 사실이
오?"
중년객은 칼날을 휘둘러 보이면서 음침하게 물었다.
"만약 사실이라면, 그대는 자신의 명예와 성망을 위해서라도 공
평하게 결투할 용기와 자존심도 갖추었겠구려? 이제부터 내가 그
공평한 기회를 드릴 터이니, 경솔하게 놓치지 않도록 하시오. 영
락장의 천풍절검이 무림 일절로 손꼽힐 터, 내 수중의 이 칼이 과
연 몇 초만에 그대의 목숨을 취할 수 있는지 두고 보기로 합시
다."
지명해서 단독으로 도전했으니, 영락거사의 입장에서 나서지 않
을 도리가 없게 되었다. 허나 상대방의 신분으로 영락거사와 같은
거물에게 도전할 자격이 과연 있는지 그것은 의문이다 .
이때 영락거사의 배후에서 장검을 뽑아들고 나온 사람이 있었
다. 나이는 환갑을 넘긴 듯, 살모사처럼 매서운 눈매에 섬뜩하도
록 차가운 냉전(冷電)을 뿜어내면서 흡사 유령이 하늘을 날듯 표
연한 자세로 영락거사를 앞질러 나오고 있다. 발바닥 밑에서 아무
소리도 나지 않는 것이, 풀초리 끝을 딛고 둥실 떠다니는 것처럼
날렵하다 .
"광망을 다 떨었나? 귀하, 이름은 도대체 뭔가?"
소리는 그리 크지 않으면서 날카로운 음성이 고막을 찔렀다. 환
갑 나이에도 공력이 철철 넘치게 담긴 목소리가 뭇 사람들에게 뇌
문(腦門)이 흔들리는 듯한 느낌마저 줄 정도로 충격이 크다.
"너 따위는 아직 영락거사에게 도전할 자격이 없어. 어중이떠중
이 같은 녀석들이 저마다 항렬 높으신 선배 어른을 집적거린대서
야 어디 될 법이나 한 노릇인가? 이리 나오라구. 너는 나 같은 사
람하고나 놀아야 제격이지 ! 참, 내 신분을 밝혀야겠군. 내 성은
진씨, 산서 지방의 진웅위(陳雄威)야!"
"옳아! 명협객 <비운신룡>(飛雲神龍) 진웅위 나으리셨군! 오래
전부터 그 명성은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왔소. 내 성은 석씨(席
氏), 강호상에 뒹굴면서 목구멍에 풀칠이나 겨우 하는 별 볼 일
없는 조무래기 건달이외다. 그러니까 당신도 나를 '석 건달' 이라
고만 알아두시오. 가만보니, 귀하의 <초상표>(草上飄) 경공신법이
정말 고명하시더군. <비운신룡>이란 별호가 과연 명불허전이라고
해야겠어 ! 기세면에서 당신은 이미 절반쯤 이겼다고 보는 게 좋
겠소. 자, 그럼 덤벼보실까?"
"석... 석... 앗, <환도>(幻刀) 석휘(席輝)!"
<비운신룡>은 한두 번 되뇌이다가 안색이 싹 변했다.
"흐흠, 물건 좀 볼 줄 아는 친구를 만났군!"
<환도> 석휘가 투덜거리더니, 이내 고함을 지른다.
"이야압!... 간닷!"
돌연 협봉단도가 일직선을 그으면서 들이쳐 나갔다. 8보를 내딛
는 동안, 서슬 푸른 칼끝에서 회오리 바람이 소용돌이치고 불끈
솟구친 도기(刀氣)가 조수처럼 밀려나갔다.
<비운신룡>의 눈길에 잡힌 것이라곤 한 가닥 몽롱한 광채가 허
공을 가로질러 들이닥치는 환영(幻影)뿐이었다. 그 빛그림자는 도
검 따위의 병기로 보이는 것이 아니라 여인네의 머리 빗는 참빗살
처럼 가지런한 빛가닥을 이룬 채, 절반은 허상(虛像), 절반은 실
상(實像)으로 반투명체가 되어서 질풍같이 쏘아져 들어오고 있었
다.
기선을 잃었으니, 이제는 두들겨 맞을 곤경에나 떨어지는 수밖
에 없다.
<환도> 석휘는 형체에 그림자 따라붙 듯, 바짝 육박해 들어왔
다. 수십 수백 줄기의 빛가닥이 토하는 듯 삼킬 듯, 온 하늘과 땅
이 빙글빙글 돌아가도록 선회하면서 어지럽게 춤을 추는가 하면,
살갗을 배어내고 뱃속으로 파고드는 듯한 서리찬 도기가 미친 바
람결에 성난 물결처럼 흉흉하게 용솟음치는 가운데, 일파(一波)에
이어서 또 일파, 홍수 터지듯 끊임없이 밀어 닥치면서 무시무시한
파상공격을 퍼붓는다.
<비운신룡>은 사면 팔방으로 내뛰면서 피신하는 길밖에, 수중의
장검으로 어떻게 한 번만이라도 막아볼 기회라곤 전혀 없었다. 이
제 막 오른쪽 늑골 부위로 쏘아져 들어오는 빛가닥을 막으려 하
면, 또 한 줄기의 실상을 가진 빛가닥이 어느덧 반대편 사타구니
뼈를 찔러들고 있다. 이러니 자기 보신책을 취하느라 피하고 물러
나기에만 급급할 뿐, 어디 반격을 취할 겨를이 있겠는가?
잠깐 사이에, 그는 사면 팔방으로 예닐곱 바퀴나 돌아가며 피신
했다. 도피하는 원둘레도 점점 커져서 4, 5장 폭으로 늘어났지만,
위기는 때없이 아무 방향으로 들이닥치고 가까스로 피해 도망치는
순간에도 칼끝에 끊겨나간 머리터럭이 푸수수 흩날리고 등줄기의
가죽 옷이 썩썩 베어지는 소리가 그칠 새 없어, 그럴 때마다 <비
운신룡>은 등골이 오싹하고 몸서리를 쳐야 했다.
"이봐, <비운신룡>! 경공신법만 믿고 계속 도피할 거냐?"
계제운이 버럭 호통을 질렀다.
"정식으로 대결하지 않는다면, 나도 부하들을 몽땅 풀어 네놈들
을 포위 공격하겠다. 너희 편 응원군이 몰려올 때까지 마냥 시간
을 끌어줄 수야 있나!"
"그게 무슨 개소리야!"
영락거사가 맞고함을 질렀다. 그는 상대측에서 진짜 포위 공격
령을 내릴까봐 두려웠다. 쌍방의 병력수가 너무 차이 나기 때문에
도저히 승산이 없다. 이럴 때는 주장끼리 단독으로 맞서서 해결하
는 길만이 최상책이다.
"계가 놈아, 오래 사는 게 싫다면 노부가 깨끗이 해탈을 시켜
주지 ! 일찍 죽지 못해 이렇게 안달하는 놈을 난생 처음 보았군."
"뭣이?"
계제운이 호랑이 눈을 부릅뜨고 영락거사를 노려보았다. 그것도
잠시, 그는 코웃음을 한 번 치더니, 얼음보다 더 차가운 눈빛을
번들거리면서 앞으로 천천히 걸어나왔다.
"어르신, 노염을 푸십쇼!"
중년인 한 사람이 얼른 그 앞으로 나와서 허리를 굽신했다.
"닭 잡는데 소 잡는 칼을 쓰겠습니까? 소인이 대신...."
"저리 비켜라!"
계제운은 싸늘하게 쏘아붙였다.
"이 개 같은 놈이 무례하기 짝이 없으니, 내 손으로 직접 처단
해야겠다."
"하오나...."
"물렀거라!"
"예, 예엣!"
중년인은 다급하게 응답하고 순순히 제 자리로 물러갔다.
계제운의 손이 칼자루에 닿았다. '스르렁!' 하니 용음이 울리는
가운데, 눈부신 광채를 사방으로 쏟아내면서 함광검이 칼집을 벗
어났다.
"어르신, 고정하십시오. 사람을 구하는 게 더 급합니다!"
감대랑이 고함쳤다.
"머뭇거렸다간 무슨 변고가 날지 모르오니, 속전 속결로 끝내십
시오!"
"흥!"
계제운이 코웃음을 치더니, 왼손을 번쩍 쳐들었다.
"남문존신, 이 개 같은 놈은 내 몫이다. 딴 사람이 끼어드는 것
은 절대로 용납하지 않겠다. 너희들이 몇 놈만 살려두고 나머지를
모조리 쳐 죽여라!"
도검이 밀물처럼 영락거사 일당을 사면으로 에워쌌다. 두 명으
로 1개 조를 편성한 공격진이 광풍 노도와 같이 돌진하면서 산악
이라도 무너뜨리고 바다를 뒤엎을 듯한 기세로 중심을 향해 바짝
죄어들었다. 서슬 푸른 살기에 가뜩이나 창백한 겨울 나무숲과 산
줄기마저 핼쓱하니 질렸다.
계제운이 함광보검을 휘두르자 풍뢰가 한꺼번에 터져나오고, 이
를 갈아붙이는 영락거사를 향해 뇌정 만균의 기세로 맹렬하게 덮
쳐갔다.
"쨍그렁, 챙! 챙!"
영락거사는 공격자의 살검을 강제로 맞받고서 뒤로 3보나 밀려
갔다. 금강선공을 쏟아부은 장검이라 함광보검의 무거운 타격을
받고서도 손톱만한 손상도 없었을 뿐더러, 광포하고도 웅혼하기
짝이 없는 야성적인 공격 검초도 거뜬히 막아낼 수 있었다.
"이야----- 앗!-----"
길게 터뜨린 기염 한 모금, 우내(宇內)의 풍운아요 일대의 호걸
영락거사께서도 마침내 반격을 개시했다. 천풍검법의 절초를 장강
대하의 물결처럼 도도하게 펼쳐내면서 한평생 갈고 닦아온 기량을
다하여 일검에 이어 또 일검씩 위태로운 공격, 필사적인 역습을
전개해 나가는 것이다.
두 사람의 검술은 모두 강공 일변도, 따라서 쌍검이 마주치는
쇳소리가 쉴새없이 귀청을 때리고, 실꾸리 얽히 듯 죽어라고 휘감
겼다가는 떨어지기가 무섭게 또 다시 맞부딪치면서, 3장 범위 안
의 나뭇가지와 풀잎을 후리고 베어 하늘 높이 흩날려 올리고 있
다.
뒤얽힌 싸움터 부근 사람들은 혹여 눈먼 검기에 다칠까 두려운
나머지, 분분히 자리를 떠서 멀찌감치 피해야만 했다.
쌍방은 필생의 절학을 모조리 펼쳐내어 1백 여 초를 겨루었으면
서도 좀처럼 승부 고하를 가려내지 못했다.
그러나 이들 주변에서 벌어진 처참한 악전 고투는 거의 종말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영락거사 측은 겨우 두 사람만 남아서 궁지에
몰린 야수처럼 발악을 계속하고 있었으나, 이들을 에워싼 3개 조,
6명의 장한들이 찌르고 벤 상처자국만도 10여 군데씩이나 되는 중
상을 입은 상태였다.
그들은 전신을 핏물로 멱감은 채 끈질기게 버렸다. 허나, 앞으
로 얼마나 더 지탱할 수 있을런지, 그것은 죽음의 장막이 눈을 가
리워야만 알 수 있으리라.
말라빠진 풀섶 덤불에는 일곱 구의 시체가 누워 있다. 그 중 두
구는 계제운측 사람이다.
영락거사도 이제 막다른 궁지에 도달했다. 그의 수중에서 펼쳐
지는 천풍절검도 이미 공격을 위한 초식이 아니었다.
동료들에게 퍼부어진 참담한 살상이 그의 정서에 영향을 끼친데
다, 계제운이 보여준 용맹성도 그의 혼백을 뒤흔들어 놓았다. 죽
음의 공포감 역시 그의 간담을 뚝 떨어뜨려, 이제 그는 기세면에
서 완전 참패를 자인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
손발이 차츰 느려지고, 자신의 기력이 마음을 따르지 못한다는
느낌이 민첩하게 움직이던 그의 신법에도 영향을 끼쳤다. 회피동
작을 취하기가 차츰 힘들다는 느낌이 들면서, 그는 즉각 위태로운
지경에 빠져들었다.
"으아악!-----"
마지막 한 사람이 터뜨린 참담한 절규가 허공을 그으면서 울려
퍼졌다.
동료의 비명소리를 듣는 순간, 가슴이 서늘해진 그는 맹렬한 기
세로 상대방의 일검을 봉쇄한 다음, 그 여세를 빌려 1장 바깥으로
비스듬히 빠져나오기가 무섭게 한 발로 지면을 툭 툭 찍으면서 싸
움터 외곽을 향해 몸을 퉁겨 날렸다. 이제 고립무원 상태에서 홀
로 더 싸워봤자 승산도 없거니와 그럴 만한 기력도 남아 있지 않
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오냐, 뛰자!....
허나 좌측방 4장 바깥에서 사람의 그림자가 허공을 가로질러 눈
깜짝할 사이에 그의 도주로 방향을 차단하더니, 곧이어 서릿발같
은 검광이 번개보다 더 빠르게 쏘아져 왔다.
"으왓!..."
그는 아연 실색, 저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다. 맙소사! 인간의
몸뚱이로 어떻게 저토록 빠를 수 있단 말인가?... 날개가 달리지
않은 사람이 제비처럼 하늘을 마음대로 날아다닐 수야 없는 노릇
이 아닌가?
그런데 이건 숫제 날아왔다고밖에 할 수 없다. 게다가 속도는
그 자신보다 두 배는 더 빠른 듯 싶었다.
"어딜 도망치려구?"
날아온 사람이 싸늘하게 꾸짖었다. 몸에 섬뜩하게 와서 닿은 것
은 한 가닥 검기 (劍氣)다.
마침내 영락거사도 상대방을 똑똑히 알아볼 수 있었다. 안춘 소
저의 하녀 감대랑, 바로 그녀였다.
"쩡 !"
창졸간에 그는 공격해 온 일검을 전력으로 봉쇄했다. 위기가 닥
친 마당에 자신을 구하기 위해서 그는 혼신의 기력을 다 쏟았다.
이미 7할이나 소모된 금강선공이었으나, 아직은 상당히 강맹하
고도 끈질긴 위력을 갖추고 있었다.
그는 이것을 믿고 방어동작을 취한 것이다.
뜻밖에도 반탄력은 생전에 보지 못하던 맹렬한 것이었다. 그는
저절로 비명이 터져나왔다.
"으앗!"
비명은 외마디, 사람의 몸뚱이와 장검이 한꺼번에 퉁겨 1장 바
깥으로 수평비행을 했으니, 감대랑이 펼친 무공 수준은 영락거사
의 상상을 초월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
가로 날던 몸뚱이가 막 추락하는 순간, 등줄기에 엄청난 충격이
들이닥쳤다.
"따악!... 따악!"
등뼈가 으스러지는 듯한 첫번째 충격을 소화시키기도 전에 두번
째, 세번째 타격이 연속 날아들었다. 그는 가슴 앞뒤에 구멍이 뻥
뚫리고 텅 비어버린 느낌을 받았다. 목구멍이 근질근질하더니 찝
찌름한 액체가 쏟아져 나왔다.
타격을 가한 물체는 달걀만하게 생긴 철담(鐵瞻), 북부 지방 나
으리들께서 심심풀이 겸해서 손가락 힘을 단련하는 데 즐겨 쓰는
강철제 공이다.
호체선공도 이제 바닥날 지경, 기력도 공력도 거의 다 흩어진
판국에 무지막지스런 쇳덩어리 공격을 숨 돌릴 겨를도 없이 연거
푸 세 차례나 받았으니, 이걸 무슨 수로 견뎌낸단 말인가?
"꽈당!"
지면이 들썩거리도록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그는 땅바닥에 엎
어졌다. 이제 그에게 느껴지는 것이라곤, 눈앞이 캄캄해지고 하늘
과 땅이 빙글빙글 돌아가는 현기증뿐이다.
본능적인 손길로 다시 칼자루를 고쳐잡고 휘두르려 했을 때였
다. 오른손목이 감대랑의 발바닥에 꽉 짓밟히면서 손아귀가 도로
풀렸다. 칼자루도 주인의 뜻을 배반하고 후딱 누군가의 손으로 건
너갔다.
그 다음에는 주먹질과 발길질이 우박 쏟아지듯 한바탕 퍼부어지
기 시작했다. 온 몸뚱이가 녹신녹신하게 풀어졌는데도 뭇매질은
그칠 줄 몰랐다.
"으아아!------"
마침내 통뼈를 자랑하던 영락거사도 고통에 못 이겨 참담한 비
명을 토해내더니, 그대로 혼절하고 말았다.
장한 두 명이 그의 양 날갯죽지를 비틀어 세우더니, 정신이 피
어날 때까지 계속 따귀를 후려쳤다.
"내 철사로 네놈의 비파골(琵琶骨)을 꿰뚫어가지고 개 끌듯 완
산 천풍곡 영락장원까지 끌고 갈 테다!"
계제운이 그 앞에 서서 말했다. 으르렁거리는 목소리가 유별나
게 삼엄하고 냉혹스럽다.
"내가 말했지? 네놈의 영락장을 기와 벽돌 한 장 온전하지 못할
폐허로 만들고 네놈의 무림세가 터전을 뿌리째 뽑아서 개 한 마리
닭 한 마리 남겨두지 앓겠노라고 말이다. 나는 한 번 내뱉은 말을
반드시 지키는 사람이야!"
"내... 내 친구가... 온천하에 두루...."
영락거사도 완강하게 뻗대었다.
"문하 제자들도...."
"묻고 싶었는데, 마침 잘 말해 주었다. 네놈의 문하제자와 친구
들이 누군지 낱낱이 대라. 내 한 놈도 놓치지 앓고 뿌리째 없앨
테니까. 씨앗을 남겨 놓으면 또 싹이 트겠지? 너희처럼 이 세상에
해악을 끼치는 횡포한 부류를 깡그리 말살하지 않으면, 천하에 진
정한 태평성대는 영영 오지 않으리라."
"네 놈이 도대체 뭔데 그런...."
"잔소리 말고 묻는 대로 대답이나 해. 장추산과 안춘 낭자는 지
금 어디 있지? 그 행방을 대지 않으면... 흥! 내 우선 네놈이 보
는 앞에서 네 친구의 몸뚱이를 산채로 조각조각 저며서 죽일 테
다!"
영락거사의 창황한 눈초리가 주변을 둘러본다. 동료 10명 가운
데 다섯은 혼전 중에 맞아 죽었다. 이제 사로잡혀 있는 것은 자신
을 포함해서 모두 다섯, 그것도 하나같이 상처를 입었다.
다른 동료 네 사람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포로 한 사람에 두
명씩 장한들이 양 어깨를 비틀어 꿇린 모습이 이제 도살장으로 끌
려나온 황소나 다를 바 없다.
"장추산과 안춘 소저는... 벌써 탈출해... 탈출해 나왔소!"
그는 다급하게 소리쳤다.
"내 친구들을 능욕하지 마시오! 내 친구에게 모욕을 주지...."
"그들은 정말 탈출해 나왔단 말인가?"
"그렇소... 두 사람은...."
그는 황급한 목소리로 얼마 전 장추산을 뒤쫓다가 유인술책에
걸려 친구의 목숨까지 빼앗겼던 경위를 털어놓았다.
"좋아, 잠시 네 말을 믿어두기로 하지 !"
설명을 다 듣고 나자, 계제운은 사뭇 흡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두 사람을 찾아낸 다음에 너희들을 어떻게 처치할 것인지
다시 결정하겠다. 얘들아, 이놈들 몸에 숨긴 무기를 찾아내고 결
박 지어서 떠날 준비를 차려라!"
"예엣!"
장한들은 즉각 포로들을 엎어놓고 우선 몸 수색을 해서 암기와
잡동사니 물건을 모조리 압수한 다음, 양손을 뒤로 돌려 결박지웠
다. 그것도 모자랐는지, 포로들을 일으켜 세워서 오랏줄로 굴비두
름 엮듯 목에 올가미를 씌워 진짜 개 잡듯 끌고갈 준비를 마쳤다.
영락거사의 몸을 뒤지던 장한은 포로의 살갗에 붙여 놓은 가죽
주머니 속에서 괴상한 구리 패 한 개를 끄집어냈다. 길이 여섯 치
에 너비는 두 치, 적동(赤銅)으로 주조한 패였다.
양면 상단에는 호랑이 머리와 앞발톱의 도형이 새겨졌는데, 앞
면에는 만주어 글자가 세로로 한 줄, 뒷면에도 작은 만주어 글씨
가 넉 줄 새겨져 있었다.
계제운은 구리 패를 건네받고서 앞뒤를 뚫어보다가 얼굴빛이 싹
변했다.
적동 구리는 속칭 자금(紫金)이라고도 부른다. 이런 금속 패는
부잣집 나으리들이 흔히 노리개삼아 지니고 다니는데, 조금만 손
질해도 눈부실 정도로 광채가 난다. 호신부처럼 생긴 이 구리 패
도 소매춤으로 문지르자 눈부시게 번쩍거리는 것이 순금이 아닌가
착각할 만큼 빛이 났다.
"모든 사람을 데리고 먼저 떠나거라!"
계제운이 심복 부하에게 분부를 내렸다.
"내가 갈 때까지 앞쪽 산비탈 숲속에서 기다리도록!"
"예엣!"
부하들이 포로를 이끌고 출발한 후, 남은 것은 파김치가 되도록
지친 기색이 된 채 땅바닥에 주저앉은 영락거사뿐이다.
"이게 무엇인가?"
계제운이 구리패를 내밀면서 싸늘하게 물었다.
"길... 길상부(吉祥符)...."
영락거사는 풀죽은 목소리로 대꾸했다.
"호신 부적으로 몸에 지니고 다니는 거요."
"그대도 몽골 사람이나 투르판 족속처럼 호신불(護身彿)을 섬기
는가?"
"그, 그렇소...."
"정말?"
"사실이오."
"흐흠, 이 부적에 새겨진 글자는 엽전 뒷면에 주조된 것과 아주
흡사한데, 안 그런가?"
"난 모르오."
"모른다? 이것 어디서 났는가?"
"어떤 강호 친구한테서 빼앗은 거요, 나도 그게 도대체 어떤 부
적인지 잘 모르고 지니기만 했었소."
영락거사는 도리질을 해가며 뻗대었다.
"흥! 아무래도 쓴 맛 좀 봐야 순순히 자백을 하겠군!"
계제운이 흉악스레 으르릉거리더니, 연거푸 네 차례나 발길질을
날렸다. 영락거사는 흙바닥에 데굴데굴 구르면서 고통스러운 신음
성을 질러댔다.
"이래도 안 불 텐가?"
계제운은 한 발을 그 아랫배에 올려 놓고 힘주어 눌러가며 엄하
게 물었다.
"으아아!... 난... 난 정말 모르오!..."
그는 고통스럽게 부르짖었다.
"대라!"
계제운의 발길에 다시 한 번 힘이 부쩍 들어갔다.
"어흑!..."
"대라니까!..."
"아이유!..."
그는 미친 듯이 비명을 지르다가, 선혈을 한 모금 울컥 토해내
더니 그대로 기절해 버렸다.
그는 포로를 다시 깨어나게 해놓고 재차 심문을 계속했다.
"대라!"
계제운은 매섭게 호통쳐 물었다.
"날 죽여... 죽여다오!..."
그는 심신이 한꺼번에 붕괴되고 있다 .
"다시 묻겠다. 난 지금 이 구리 영패의 내력을 묻고 있는 거다!
이것이 무엇인지 대라!"
"난... 몰라... 모른다니까!... 으왝!..."
그는 또 한 번 피를 토하고 나서 두 눈이 훌떡 뒤집혔다.
계제운은 돌연 발바닥을 내려 놓고 포로가 한숨 돌릴 때까지 기
다려 주었다.
"10년 전, 이런 구리 영패가 모두 열두 개가 나갔지."
압력을 풀어 주고도 계제운의 목소리는 여전히 냉랭했다.
"오늘날까지 다섯 개가 아직도 각처에서 쓰이고 있을 것이다.
그대는 갯수를 모르겠지만 어떻게 쓰이는지 사용법을 알고 있을
터, 안 그런가?"
"당신... 그럼...."
영락거사는 반벙어리처럼 더듬거렸다.
"당신이 그걸 알고 있다니...."
"지난 번 한밤중 양주위(揚州衛) 수비부(守備府)에 들어와서 이
영패를 제시하고 관은(官銀) 지출 신부(信符) 반쪽을 가져간 사람
이 그대였지?"
"그건...."
영락거사는 부르르 몸을 떨었다. 얼굴빛은 아예 죽은 잿빛으로
바뀌었다.
"이 영패의 명칭을 알겠나?"
"난... 나, 나는...."
"이 영패는 무위왕부(武威王府)에서 발부된 거야. 위캉베레(裕
剛貝勒)께서 친히 나누어 주셨지. 천하 각 지방의 수성군(守城軍)
참장(參將)급 이상 되는 관원은 이 영패를 보는 즉시 전력을 기울
여 협조하도록 되어 있을 것이다. 이 영패를 소지한 자가 누구든
지 간에, 영패를 제시하면 무조건 협력해야 한다. 그리고 공적만
따지고 어떤 실패를 하더라도 책임을 묻지 못하게 되어 있다. 어
떤가, 내 말이 맞나 틀리나?"
"당신... 당신은...."
"이 영패의 이름이 뭔가?"
"무위... 호부(武威虎符)요...."
영락거사는 허탈하게 대답했다.
"이것 참 미안하게 되었구려."
계제운이 빙긋 웃더니, 포로의 결박을 풀어 주었다.
"듣자니, 5만 냥 은화가 엉뚱하게 딴데로 새어나갔다던데, 도대
체 어떻게 된 일이오? 하지만 이것은 분명히 알아둬야 하오, 그
은화를 지출한 증명부신은 이미 수비부에 회수되었으니까, 당신은
돈을 액수대로 수령해 간 셈이오. 뜻밖의 사고가 났더라도 그건
당신네 일이오. 다시 지불할 수는 없소."
"맙소사! 당신은... 도대체...."
그는 버둥버둥 일어나 앉았다. 경악에 찬 표정, 영문을 모르겠
다는 기색이 얼굴에 가득 서렸다.
"내가 누구인지 물어선 안 되오. 양주에서 일어난 사고를 내가
알고 있다는 것, 하지만 내가 직접 그 일에 참여하지 않았다는 것
만 알면 되겠소."
"그 은화 5만 냥은 장추산에게 빼앗겼소. 당신은... 장추산의
친구...."
"허튼 소리! 장추산은 그대들이 일을 저지르고 있을 때, 확실히
이 진강부에서 안춘 소저와 함께 있었어. 또 장추산은 내 사람이
아니야. 그 녀석이 당신 아들과 무슨 원한을 맺은 모양이지만, 그
것은 개인적인 원한 관계이니까 공연한 트집으로 그 친구에게 덤
터기를 씌워선 안 되오. 알겠소?"
"그래도...."
"그래도라니? 딴소리 마시오! 나는 당신 뱃속에 무슨 꿍꿍이 수
작을 품고 있는지 훤히 들여다보고 있소. 두 번 다시 그 친구를
찾지 마시오. 더구나 안춘 소저를 귀찮게 쫓아다녀선 안 되오. 하
루 속히 이 진강부를 떠나시오. 내 눈에 다시 뜨이지 않도록 조심
하셔야 하오! 내 말뜻 알아듣겠소? 흥!"
"나는 진강부를 떠날 수 없소. 나는 천지회 놈들이 이 진강부에
서 큰일을 저지르려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소. 놈들은 강녕부
쪽 주요 책임자까지 벌써 이리로 건너와서 계략을 꾸미고 있소.
그렇기 때문에 나도 중도에서 일을 포기할 수 없단 말이오. 나는
성공을 눈앞에 두고 실패하고 싶은 생각이 없소!"
"그게 정말인가?"
계제운이 반문했다. 놀라움과 반가움이 뒤섞인 표정이다.
"눈꼽만큼도 거짓이 없소. 그리고 이 일은 필경 장추산과 관련
이 있소."
"또 터무니없는 소리를 하는군! 장추산은 천지회 사람이 아니
오. 내 벌써 사람을 시켜서 시험해 봤고, 또 그 친구를 천지회와
원수지간으로 만들어 놓았으니까, 당신도 그 친구에게 엉뚱한 혐
의를 두지 말아야 되겠소."
"그놈이 천지회 소속원은 아니라 해도, 그놈의 신상에서 천지회
음모의 실마리를 찾아낼 수는 있을 거요. 이번에 이처럼 엉뚱한
사고만 터지지 않았던들, 난 벌써 천지회 수뇌급 인물의 은신처를
찾아냈을 거외다."
"그게 무슨 얘기요?"
"천지회에서 두번째 가는 수뇌급 인물의 연락참이 경구항 뒷골
목에 있었소. 그 집 주인, 이복이란 가명을 쓴 선주가 바로 강녕
부에서 건너온 중요 인물이오. 그런데 아깝게도 막판에 놓쳐 버렸
으니..."
"아뿔사!..."
계제운이 낮게 신음성을 터뜨렸다.
"일을 망쳐 놓았군!"
"그게 무슨 말이오?"
"당신하곤 상관 없소!"
계제운이 초조하게 손을 내저어 막았다. 자기 손으로 이복이란
놈을 놓아 주었단 얘기를 어떻게 한단 말인가? 그는 속으로 이를
갈아붙이면서 자신의 경솔함을 꾸짖고 또 꾸짖었다.
"좋소! 당신이 장추산을 어떻게 요리하든, 나는 상관하지 않겠
소. 그러나 안춘 소저만큼은 절대로 건드려선 안 되오. 만약 그녀
에게 무슨 일이 났을 때는 나는 반드시 당신에게 책임을 묻겠소!"
"그건...."
"가도 좋소. 떠나시오!"
그는 사람을 쫓아보내듯이 손을 내저었다. 들고 있던 구리 영패
도 포로의 발치 밑에 툭 던져 주었다.
"잠깐! 내 친구들은..."
영락거사가 급히 영패를 넣으면서 물었다.
"다 죽었소. 또 눈에 뜨이는 대로 다 죽일 테고."
계제운의 목소리가 다시 얼음같이 싸늘해졌다.
"저런!..."
영락거사는 얼굴빛이 핼쓱하게 질렸다.
"그 사람들도 무위호부를 보았겠지, 안 그렇소?"
"그... 그렇소만."
"당신이 무위호부를 어떻게 가지고 있는지, 그 내력을 모른단
말이오?"
"그렇소, 내 친구들은 절대로 모르오!"
영락거사는 배짱 좋게 부인했다.
"한마디라도 비밀이 새어나갔다가는 어떤 결과가 오는지, 당신
도 물론 잘 알고 있을 거요. 당신 부하들도 친구들도 다 떨어져
나가고, 무림계 동류들에게 적대시를 당하게 될 터이고, 위캉베레
친왕께서도 사람을 보내 그 호부를 회수해 가실 거요. 그 다음에
는 보나마나, 당신 처지는 극히 위험한 지경에 빠져들게 되겠지
!"
"하지만... 내 친구들을 다 죽이면...."
"좋소. 당신은 친구들의 힘이 필요한 모양이지만, 나는 당신 일
따위와는 상관없소. 목숨 붙은 자를 다 놓아 주지 못하겠소!"
"계씨 나으리 !..."
"이래도 못 알아듣겠소? 홍! 내가 어째서 그들은 못 풀어 주는
지 당신도 알 만할 텐데? 나는 절대로 내 신분을 노출당해선 안
된단 말이오!"
계제운의 말투에는 흉한 조짐이 가득 배었다.
"그래도...."
"가라니까!"
개 꾸짖듯 엄한 질타성이 떨어졌다.
영락거사는 펄쩍 뛰더니, 칼을 주워들기가 무섭게 쏜살같이 도
망쳤다.
외톨이가 된 영락거사, 놀란 가슴 마구 뛰는 심장 고동을 억누
르면서 두 다리가 거의 땅에 닿지 않을 정도로 날듯이 내뛰었다.
기력은 7할 정도 회복된 듯, 나무숲을 뚫고 들판을 가로질러 치
닫는 품이 한창 펄펄 뛰던 젊은 시절에 비할 만했다.
황급히 현장을 벗어나면서, 그는 한시 바삐 나머지 동료들을 찾
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이 장산 지구를 조속히 떠나지 못하면 너나
할 것 없이 여기다 시체를 파묻어야 하는 것이다.
다행히도 계제운이 무위호부의 내력을 알아보았으니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더라면 이 늙은 목숨을 어떻게 보전할 수 있었단 말인
가? 그는 품속에 구리영패를 다시 한 번 소중하게 만져 보았다.
무위부(武衛府)라면 북경성 동화문(東華門) 큰길거리에 있다.
그곳은 전조 명나라 시대 동창(東廠)이 자리잡았던 옛터다.
명나라 때 동창은 주씨 황실을 지켜 주던 특무기관이다. 지금의
무위왕부는 청나라 만주족 황실의 직속 특무기관 총사령부다.
동창과 무위왕부가 다른 점이 있다면, 동창은 명나라 황실 조정
에 속한 문무 대신들을 전문적으로 사찰하던 정보기관인 데 비해
서, 무위왕부는 한족(漢族) 출신의 관원과 백성들을 전문적으로
통제하는 기관이다. 만주족 사람들에 대해선 전혀 상관하지 않는
다. 무위부 소속의 모든 권력은 오로지 대외적으로 뻗어 만주족
황실의 정권을 굳히는 데만 충성을 다한다 .
현재 무위왕부는 위캉친왕(裕剛親王)이 전권을 장악하고 있다 .
그는 만주 팔기(八旗) 제2대 출신으로서, 조직의 천재다. 지난
날 오삼계(吳三桂)가 '삼번(三藩)의 반란' 을 일으켰을 때, 그의
휘하 특무 첩보원들은 서울과 지방 각처에 침투해 있던 반란군측
첩보요원을 뿌리째 뽑아 버리고 정보망을 완전히 파괴하여 오삼계
의 군사작전을 마비시켰다.
오삼계의 반란군이 호광(湖廣) 동쪽 경계로부터 단 한 발도 내
밀지 못한 채 와해된 것은 바로 위캉친왕의 특무기관이 활약한 덕
분이었다.
북경 도성 안에서 한족 출신 고관이나 관리들은 위캉베레의 이
름만 들추면 잠자리에서 꿈을 꾸다가도 소스라쳐 벌떡 일어날 지
경으로 무서워한다.
그러나 만주족 황실 인척과 각부 대신들은 한결같이 그를 영웅
으로 떠받든다. 위캉베레는 한족 출신을 이용해서 한족을 통제하
는 수완이 뛰어날 뿐만 아니라 계략을 꾸미고 실천하는 데도 가장
성공적인 권위를 자랑하고 있기 때문이다. 위캉베레의 공로와 업
적은 아무도 따르지 못할 찬란한 것이었다.
영락거사가 지닌 무위호부 영패는 무위왕부에서 발행한 비밀 신
분증 세 종류 가운데 하나였다. 이들 특무 첩보원의 활동에 대해
서는 병부(兵府)가 비밀 기록을 작성하고 있다. 그리고 만주족 출
신으로서 각 지방의 팔기병을 통솔하는 참장급 이상의 장군은 모
두 이 무위호부를 일단 눈에 익히고 밀명을 받아서 부임지로 떠난
다.
임지에 도착한 다음, 무위호부와 관련된 일이라면 행정권은 모
두 병부 지휘로 그 책임이 예속되고, 무위호부를 소지한 사람의
공과성패(功過成敗)가 어떻든 그 결과는 모두 무위왕부에 보고되
고 위캉베레가 책임을 지게 된다.
집행처리의 원칙은 단 두 가지, 첫째 무위호부만 인정할 뿐 그
소유자가 누구냐는 것은 전혀 따지지 않는다. 두번째, 공로만 따
질 뿐 과실은 일절 묻지 않는다 .
첫번째 원칙을 세운 목적은, 영패 소지자의 신분과 내력이 누설
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다. 비밀첩보원의 신분이 폭로되었을
때 유일한 길은 양로원으로 은퇴할 뿐, 더 이상 이용할 가치를 부
여하지 않는다.
두번째 원칙은, 영패 소지자가 어떤 범죄사건에 연루되었을 때
그 죄를 일체 추궁하지 않고 군부측에서 비호할 책임을 명백해 규
정해 놓은 것이다.
청나라 황실에서는 군사권만이 지상(至上)이다. 한족 출신의 지
방관원들은 군정(軍政)에 절대로 참여하지 못한다. 한족 출신의
무관은 주장(主將)의 직책은 영원히 차지할 수 없다.
이 제도는 태평천국(太平天國)의 반란이 일어날 때까지 지속되
었다. 이 시기에 와서 증국번(曾國藩), 이홍장(李鴻章) 같은 시세
를 탄 영웅들 몇몇이 한때 주장의 임무를 맡기도 했다. 그러나 태
평천국이 멸망한 후, 증국번과 이홍장도 자기네 신분이 결국은 만
주족의 노예임을 일찌감치 깨닫고 순순히 군사권을 만주족에게 넘
겨줌으로써, 목숨을 보전할 수가 있었다.
영락거사의 심중에는 차츰 명확한 내막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계제운은 무위호부의 내력을 알고 있다. 심지어는 그 수량이 몇
개인지조차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양주에서 일어난 사고 내막도
훤히 꿰뚫어 알고 있다. 그렇다면 더 생각해 볼 것도 없지 않은
가?
그자는 무위왕부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을 터, 바로 위캉베레
의 신임을 받는 측근 심복이 분명할 것이다.
뛰면서 뛰면서, 계제운의 손에 얻어맞던 경위를 되새겨 보자니
이 분 무림계의 풍운 대호걸께선 생각만 해도 몸서리가 쳐지고 전
신에 솜털마저 곤두섰다. 그는 뛰면서 하늘을 우러러 감사했다.
천행도 이런 천만 다행이 또 어디 있단 말인가? 하느님이 돌보아
주시지 않았던들, 이 한 목숨이 지금처럼 붙어 있겠는가? 만약 혹
독한 고문에 못 이겨서 무위호부의 내막을 불었더라면 그 결과가
어땠을지 상상만 해도 소름이 쪽쪽 끼칠 판이다 .
(계제운이란 놈, 정말 음험하고 지독한 녀석이다!)
그는 속으로 계제운에게 저주를 퍼부었다.
(앞으로 나도 그놈을 조심해야겠어! 멀찌감치 떨어져 있기로 하
자꾸나. 멀면 멀수록 좋다. 그놈은 손만 뻗치면 언제든지 내 멱통
을 틀어막을 수 있다. 피하자, 피하는 것이 상책이다!...)
속으로 중얼거리면서, 그는 앞으로 쏜살같이 내뛰었다.
정신없이 소나무 숲을 빠져나온 것까지는 좋았으나, 탁 트인 풀
밭을 바라보고 내처 뛰려던 그는 갑작스레 두 다리가 뻣뻣이 굳어
지고 말았다.
전방 10여 보, 메마른 숲 덤불 속에서 장추산이 안춘 소저와 어
깨도 나란히 불쑥 몸을 일으켜 세우고 있었다. 두 남녀는 손에 손
을 마주잡고 아주 다정한 자세로 서서 그에게 시선을 못박은 채
빙글빙글 웃음기를 흘려 보냈다.
"이제야 오셨소?"
장추산이 짓궂은 웃음 섞어 물었다.
"어째 당신 혼자요? 사냥개하고 여우때는 다 어디 숨기셨나? 대
명 쟁쟁하신 강호의 선배 명숙, 당대의 풍운아께서 날 보고 또 뺑
소니를 치지는 않으시겠지? 이리 가까이 오시오. 우리 서로 좀 친
해 봅시다."
"내가 언제 도망쳤더냐?"
영락거사도 냉정하게 미소 지으면서 뚜벅뚜벅 그 앞으로 다가갔
다. 지금은 형세가 역전되었다. 2대 1로 싸워야 할 판이다. 그러
나 자신은 아직 원기가 회복되지 않았다. 도망치고 싶어도 내뛸
방법이 없는 것이다.
"아무렴, 그래야 영웅 호걸다우신 체통이 서겠지 ! 당신 그 음
흉한 웃음 뒤에 뭘 감추었는지 난 다 보인다구."
장추산의 말투는 가시 돋힌 조롱기를 잔뜩 머금었다.
"인원수가 많으면 불가 일세의 영웅 호걸답게 거드름을 피우고,
세궁역진(勢窮力盡)할 때는 웃는 얼굴 내세우고 간계나 쓸 수밖에
더 있겠나? 하여튼 나는 아무래도 다 좋지만 말이외다."
"소인배의 심보로 군자의 흉중을 어떻게 헤아리겠나? 나는 아무
간계도, 음모도 꾸민 것이 없다."
"그것 정말이오?"
"난 거짓말을 할 줄 모르네. 노부가 단혼장으로 자낼 왜 찾아왔
는지, 자네도 그 이유를 알고 있으리라 생각되는데, 어떤가?"
"말씀 안하셔도 알고 있소."
"아니지, 자네는 표면적인 이유만 알 걸세."
영락거사는 격앙된 마음을 가라앉히면서 1장 바깥에 뒷짐지고
섰다. 얼굴에는 자신만만한 미소가 배었다.
"나도 자네를 잡겠다는 구실로 쳐들어왔다는 걸 부인하지는 않
겠네. 하늘을 대신해서 도의를 실천하는 것이 우리 강호 무림계
사람의 본분이 아닌가? 그래서 우리들도 강호에 재앙을 끼치는 요
녀 <단혼원앙>을 제거하러 온 것일세. 허나, 이것은 표면상의 목
적이요, 골자는 따로 있다네."
"표리부동한 양반이라 역시 다르군! 어디 말씀해 보시오."
"하하! 우리가 어떤 희생과 대가를 아끼지 않고 무림의 군웅들
을 이끌고 요녀들을 토벌하러 온 덕분에, 자네도 그것들의 손아귀
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는 사실을 부인하지는 앓겠지?"
"흐홈, 말씀을 들어보니 일리가 있소이다. 그래 두번째 골자는
뭐요?"
"자네와 거래 좀 해보려고 ."
"잡놈의 영감! 당신 눈에는 내가 장사꾼으로 보이나?"
"장사꾼이든 아니든 간에, 자네하고 나하고는 배짱이 맞아. 장
사는 애당초 인의(仁義)가 없는 데서 거래되는 법이니까. 우리 협
상하세. 매부 좋고 누이 좋고, 피차간에 다 이로운 점이 있으니까
말이야. 내쪽에서 먼저 값을 부르기로 하지 ! 자네하고 내 아들
녀석 사이의 원협은 지금 이 시간부터 싹 물에 씻어 버리고 없는
셈 치겠네. 앞으로 영락장 사람들은 자네를 적대시하는 일이 절대
로 없을 걸세. 원수가 되기보다는 피차 벗으로 사귀는 것이 좋지
않겠나?"
"어허! 이 능구렁이 영감, 진짜 효웅(梟雄)의 면목을 드러내시
는군!"
장추산은 기가 막혀 말을 잇지 못한다.
"어떤가, 내 제안이?"
"당신 그 똥개 아들 녀석이 아무 까닭도 없이 먼저 나한테 독수
를 썼어! 빚진 놈은 바로 그놈이라는 것도 모르시나? 이거야말로
적반하장(賊反荷杖)도 유분수지, 당신이 무얼 내세워서 원한을 청
산해 주겠다는 거야? 내가 무슨 허물을 지은 장본인이라도 된단
말인가?"
"경위야 어찌 되었든...."
"잘 들어두시오. 난 당신네 친구와 부하들을 여럿 죽였어 ! 그
런데 당신네 영락장 사람들이 나를 원수로 여기지 않고 벗으로 사
귄다면, 그 죽어간 사람들한테 뭐라고 변명할 것이며 또 그 사람
들의 친구와 가족들에게는 무슨 낯짝으로 무슨 혓바닥으로 해명하
겠다는 거요? 이것만 보더라도 당신의 그 심보가 얼마나 비열한지
알만하구려. 나는 정말 당신이 불쌍하오. 귀하, 뜨거운 혈기를 지
닌 사람이라면 입에 담지도 못할 그런 개방귀같은 수작을 꿈에도
생각 못할 거요."
영락거사의 얼굴이 울그락 푸르락하다 못해 썩은 돼지간 빛으로
바뀌었다.
평생 살아오는 동안 이런 기막힌 모욕을 언제 한 번이나 받아보
았으랴? 그가 비록 신체의 원기와 정력을 충분히 회복할 때까지,
그리고 혹시 동료 응원군이라도 제 때에 나타나줄까 하는 기대감
때문에 될 수 있는 한 시간을 벌기 위해서 이 따위 비굴한 수작을
건네고는 있지만, 인내에도 한계가 있는 법이라 더는 참을래야 참
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이제 영락거사는 눈 코 입 귀, 일곱 구멍에서 생나무 타는 연기
가 풀풀 나오도록 격노했다. 수치스러움과 노염이 엇갈리니 이해
(利害)를 헤아리는 것조차도 까맣게 잊어먹었다. 이건 정말로 참
을래야 참을 도리가 없다!
"우르릉!"
돌연, 쌍장이 번갈아 연속으로 토해졌다. 금강선공을 응축시켜
발출한 대력금강장(大力金剛掌)이 뇌정 만균의 기세를 싣고 기습
적인 치명 일격을 퍼부어 나간 것이다. 여기에는 무림 선배다운
풍채라곤 조금도 없는 것이, 극도의 분노로 출수한 손속에는 일격
필중의 의지만 가득 담겨 있을 따름이다 .
장추산은 이 늙다리의 음험스러운 성품을 익히 알고 있었던 만
큼 진작에 방비태세를 갖추고 상대방의 눈빛 변화에 주의를 기울
이던 참이었다. 영락거사의 손목이 꿈틀하는 순간, 그는 수치감이
분노로 바뀌어 체면불구하고 돌발적인 기습공격을 해올 것임을 알
아차렸다. 그렇다면 이쪽도 맹탕 얻어맞을 수는 없는 일, 마땅히
대응태세를 갖추어야 할 터!... 그는 재빨리 움직였다 .
허깨비의 환영과도 같은 그림자가 두 차례 번뜩번뜩, 대력금강
장이 격중한 것은 허영(虛影)이었다. 격렬하게 발출된 강풍 기류
가 곧바로 2장 밖까지 뻗어 나가면서 '우르르르!' 하고 노성과도
같은 소음을 터뜨렸다. 광맹스럽기 짝이 없는 패도적인 장력, 사
람의 몸뚱이에 격중되었다가는 근육이 문드러지고 뼈다귀도 추리
지 못할 정도요, 천 근짜리 바윗돌도 산산조각 부서뜨려 날릴 만
큼 무서운 타격력이다.
"늙다리 개 녀석, 진짜 비열하기가 수준급이로구나!"
영락거사의 우측 후방에 귀신같이 모습을 드러낸 장추산이 버럭
고함쳤다.
"어떤 수단으로 무림에 위명을 떨치고 천하 영웅으로 자처했는
가 싶었더니, 바로 이따위 비겁한 짓을 믿고 그랬는가?..."
"헤잇!"
영락거사가 질풍같이 뒤로 2보 물러나더니, 매서운 일장을 후방
으로 흩뿌려쳤다. 이른바 <도타금종>(倒打金鍾), 후퇴 동작과도
같은 역습기세의 민첩하기란 섬전보다 더 빠르고 장력의 웅혼 광
맹스럽기도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이번 배후공격 역시 불의의 기
습돌격이다.
"뻥!"
장력과 장력끼리 착실하게 맞부딪는 폭음이 울렸다. 기류가 소
용돌이치면서 사면 팔방으로 뻗어 나갔다.
이번만큼은 장추산도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일장을 맞받았다.
금강선공 대 호천신강, 불문 절학과 현문의 절학이 처음으로 격돌
한 것이다.
"어흑!..."
영락거사는 가벼운 신음성 한마디를 내뱉았다. 배후 역습기세가
저지당했을 뿐만 아니라, 신형은 반대로 앞을 향해 급속 돌진하더
니, 2장 바깥까지 떠밀려나가서 거꾸러질 뻔한 몸뚱이를 가까스로
고쳐 세웠다.
장추산은 겨우 1보 밀려났을 뿐, 기합성을 길게 터뜨리면서 그
뒤를 쫓아 재차 돌진해 들어갔다.
"이야----- 압!"
영락거사라고 좌절할손가. 그는 대갈 일성을 터뜨리며 그 자리
에서 즉각 대선회 동작을 취하더니 쌍장을 한꺼번에 밀어쳤다. 산
악이 밀려와도, 바닷물이 덮쳐와도 정면으로 맞받겠다는 각오, 필
사적인 자세로 전력을 다 기울여 상대방의 돌격에 맞서나갔다. 이
른바 <파부침주>(破釜沈舟)의 태세!
그 옛날 초패왕 항우가 진(泰)나라 장감(章耶)의 대군을 공격할
때 황하를 건너자 도하용 선박을 모두 불태워 없애고 취사용 도구
와 막사까지 파괴하여 장병들에게 반드시 이겨야만 살아 남는다는
필사의 투지를 불러일으켰던 계략을 이제 영락거사도 본받으실 참
이다.
장추산 역시 9할의 공력을 끌어올렸다. 상대방이 회피동작을 취
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필경 고주일척(孤注一擲), 남은 밑천 다
걸어 최후의 단판 승부를 노리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그러나 금강선공은 그를 위협할 만한 것이 못 되었다. 그렇기 때
문에 사자가 토기 한 마리 잡는 데 전력을 다 쓰지 않듯, 그 역시
10성 공력을 다 끌어낼 필요는 없었다.
그러나 그는 한 수에서 계산 착오를 일으켰다. 영락거사의 경험
과 식견으로 말하자면 그보다 훨씬 풍부했다. 생강은 묵을수록 매
운 법, 영락거사의 명성도 결코 요행으로 얻어진 것이 아니었다.
그가 무림 천하의 풍운아로 명성을 떨칠 수 있었던 것은 그 나
름대로 성공할 조건을 갖추었기 때문이다 .
표면상으로 볼 때는 <파부침주>의 마지막 승부수를 노린 것 같
았으나, 이 능구렁이는 상대방의 공격력을 교묘하게 끌어내고 있
었다. 쌍장을 밀어내치는 순간, 그는 좌장(左掌)을 반 치쯤 짧게
밀었다. 공격해 나간 잠력은 산악을 부수고 바윗돌을 가루로 만들
정도로 강력했지만 결코 수평으로 밀어나가지 않았다. 그것은 교
묘하게 경사각도를 그리면서 상대방의 예봉(銳鋒)을 우회하여 접
촉했다.
"펑 !"
엄청난 굉음이 지표를 들썩이고, 기류가 흉흉하게 폭발했다. 뒤
로 곧장 밀릴 줄 알았던 영락거사의 신형은 뜻밖에 우측 후방으로
'휙!' 날으더니, 공중에서 <어룡반약>(魚龍反躍)으로 훌떡 몸을
뒤채어 3장 거리 밖 멀찌감치 빠져나가는 것이 아닌가!
장추산은 오히려 반대편으로 우전방 3보를 돌진해 나간 형국이
되었다. 기마자세를 굳히고 다시 급속공격을 퍼부으려 했을 때는
이미 접촉 기회가 사라진 뒤였다.
"개놈의 늙은이, 어딜 도망치려구!"
그리 멀지 않은 데서 경계하고 있던 안춘 소저가 급박하게 소리
치더니, 비약 동작으로 몸을 날렸다. 머리는 앞쪽, 두 다리는 뒤
로 뽑은 채, 거의 수평 자세로 돌진하는 자태가 경쾌하고도 날렵
하기 짝이 없을 뿐더러 속도 역시 질풍처럼 신속하기 이를 데 없
다.
"이크, 저런..."
장추산의 입에서 멍청한 실성이 흘러나왔다. 안춘이 저토록 초
절한 경공신법을 지니고 있을 줄이야 생각조차 못한 것이다. 아마
눈을 씻고 찾아봐도 천하 무림계의 경신법 명문 고수 가운데 이토
록 화경에 도달한 인물은 정말 몇몇 안 될 터였다.
그러나 그는 안춘이 교활한 미꾸라지 영락거사를 따라잡지 못할
것임을 깨달았다. 그는 우전방을 향해 곧바로 돌진해 나아갔다.
또 다른 방향으로 뒤쫓기 시작한 것이다.
영락거사는 착지동작을 취하기가 무섭게 방향을 꺾어 경사각도
로 내뛰었다.
풀섶 덤불과 나뭇가지 장애물을 이용하여 요리조리 돌아가면서
내뛰기는 비약보다 늦을 듯 싶지만, 실상은 그보다 훨씬 민첩하고
더 빠른 법이다. 그는 허공으로 날아서 장애물을 비켜가며 뒤쫓아
오는 안춘 소저를 손바닥 뒤집기로 쉽사리 따돌릴 수 있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5, 6장 거리를 멀찌감치 벗어나자 그 다음에는 이
쪽도 시위를 떠난 화살이다. 영락거사는 실로 불가사의할 만큼 쾌
속한 신법으로 내뛰기 시작했다.
하지만 원수는 외나무 다리에서 만난다는 격으로, 하필이면 그
방향에서 장추산이 더욱 빠른 속력으로 번개처럼 날아들었다. 쌍
방은 비스듬한 각도로 엇갈렸다. 결국 장추산이 영락거사의 도주
방향을 제대로 짚었던 셈이다.
빠르다, 너무나 빠르다! 외통수에서 맞닥뜨렸으니, 방향을 전환
할 시간적 여유도 없다. 돌진하는 기세를 멈추고 싶어도 몸이 말
을 듣지 앓는다.
"타앗!"
매서운 기합성 한마디, 영락거사는 총망중에 장검을 뽑아 돌진
하는 기세 그대로 흩뿌려쳤다.
마주쳐오던 장추산이 아래로 주저앉으면서 상체를 뒤로 훌떡 제
꼈다. 두 다리는 여전히 흩뿌려오는 칼빛 그림자 앞에 쭉 내민 자
세로 영락거사의 오른쪽 사타구니 위에 올려놓았다. 실로 위기 일
발, '휙!' 소리를 내면서 칼끝이 뱃가죽을 찢어낼 듯 아슬아슬하
게 스치고 지나갔다.
영락거사의 몸뚱이는 1장 바깥으로 비스듬히 날아가서 곤두박질
쳤다. 그러나 땅바닥에서 한 바퀴 뒹굴고 오뚜기처럼 발딱 일어나
자마자 다시 쏜살같이 내뛰기 시작했다.
"모두 덤벼들어 ! 저놈 산 채로 붙잡으라구!..."
그는 달아나면서도 미친 듯이 고함쳤다.
"5만 냥이 저놈한테 걸려 있단 말야!"
숲 속에서 사람의 그림자가 불쑥불쑥 일어났다. 가장 먼저 모습
을 드러낸 중년인이 '으흐흥!' 기합성을 터뜨리며 수중의 장검을
내질러왔다. 공격초식은 <사성일홍>(射星逸虹), 신검합일로 들이
닥치는 기세도 고삐 풀린 야생마처럼 흉맹스럽기 짝이 없고 털끝
만큼도 거리낌없는 장구 돌진(長驅突進)이다.
인원수는 도합 여덟 명, 그토록 고대하던 영락거사의 또 다른
패거리가 때맞춰서 들이닥친 것이다.
만약 장추산이 공격을 회피했더라면 틀림없이 중포위망에 빠졌
을 것이다.
"이야---- 압!"
또 다시 그의 입에서 대갈 일성이 터져나왔다. 좌장에 공력을
쏟아넣기가 무섭게, 그는 천균 일발의 틈서리를 비집고 전광 석화
와도 같이 육박해 들어가 장검의 칼날에 일장을 후려쳤다. 칼끝이
외곽으로 퉁겨나가는 찰나, 그의 신형은 벌써 상대방의 몸에 달라
붙고 있었다.
변화는 너무도 빨랐다. 찰나간의 그 변화를 똑똑히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어흑!"
중년인이 답답한 신음성을 토해냈다. 팔꿈치로 앞가슴에 <정심
촌>(頂心財) 한대를 얻어맞은 채, 그는 네 활개를 벌리고 벌렁 나
가떨어졌다. 늑골 부위가 안쪽으로 움푹 파인 것이 일격에 즉사했
을 터, 수중의 장검은 어느덧 장추산의 손아귀로 옮아갔다.
"으흐흥!"
노기 등등한 기합성 한 모금, 대라천절검의 무서운 절초가 펼쳐
졌다. 사람의 몸뚱이와 칼날이 혼연 일체, 신뢰 질풍(迅雷疾風)의
위력을 이끌고 벌떼처럼 쏟아지는 도산폐 검해(刀山劍海)의 수렁
속으로 풍덩 뛰어들었다. 죽느냐 사느냐의 고빗길에 서서, 장본인
포함하여 피아 쌍방 누구든지 일단 뻗친 그 살기를 억제할 자는
아무도 없다.
섬전이 번뜩번뜩, 벼락치는 소리가 '우르릉!'. 그 앞에 막아서
는 자마다 추풍 낙엽이다.
"으아아!..."
제일파로 접촉했던 세 명이 처절한 외마디 비명을 지르면서 세
방향으로 퉁겨 날아가 고꾸라졌다. 피보라가 소나기처럼 흩뿌려
날았다.
무시무시한 도광 검영(刀光劍影)이 봇물 터지듯 사면 팔방으로
흐르는 가운데, 인간의 몸뚱이도 조각조각 흩어져 날아갔다.
섬전의 무지개가 질풍처럼 숲속으로 쏘아져 들어갔다. 한 발 앞
서 숲에 뛰어든 영락거사, 때맞춰 발걸음을 멈추고 흘끗 뒤를 돌
아보았다.
"으앗, 맙소사!..."
가뜩이나 창백한 얼굴빛이 돌연 시퍼렇게 얼어붙더니, 두 눈망
울에는 공포의 기색이 불끈 돋아났다. 후딱 외면해 버린 그는 미
친 사람처럼 정신없이 내뛰기 시작했다. 간담이 뚝 떨어지도록 너
무나 놀란 나머지 호흡도 제대로 가다듬을 겨를도 없이 무작정 뜀
박질을 개시한 터라, 그는 숨통이 터질 듯 가빴으나, 한 번 뛰기
시작한 두 다리는 주인의 말도 듣지 않고 점점 더 가속도를 붙였
다. 동료 여덟 명 가운데 목숨 붙이고 서 있는 사람은 하나도 보
이지 않았다.
"도망칠 생각은 말라구!"
장추산의 노기찬 고함소리가 바짝 따라붙는다. 그러나 영락거사
는 귀를 기울일 틈이 없다. 욕설이야 좀 들으면 어떤가? 무작정
내뛰는 것이 상책이다.
"에잇!"
장추산의 기합성, 뒤미처 손아귀를 벗어난 장검이 공기를 찢고
날아갔다.
"숲속은 위험해요!"
뒤쫓아 오던 안춘 소저가 다급하게 외쳤다.
영락거사는 그래도 죽을 운명이 아니었던지, 마구잡이로 내뛰던
다리가 공교롭게도 나무 뿌리에 걸려 앞으로 고꾸라졌다.
"푸르릇!"
그것은 요행, 뒤미쳐 날아든 장검이 그의 뒷통수를 뚫어낼듯 스
치고 지나갔다.
몸뚱이가 지면에 닿기 직전, 그는 왼손을 후방으로 힘차게 뿌리
쳤다. 길이 네 치짜리 유엽비도 한 자루가 손아귀를 벗어나 소리
소문도 없이 날아갔다.
안춘의 경고를 듣는 순간, 장추산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아 본능
적으로 한곁 커다란 나무 둥치 뒤로 몸을 피했다. 그와 동시에 코
끝을 스칠 듯 유엽비도가 들이닥쳤다.
영락거사는 언감생심 그 결과를 지켜볼 엄두도 내지 못한 채,
벌떡 몸을 일으키자마자 또 다시 다리야 날 살려라, 정신없이 내
뛰기 시작했다.
그 순간, 장추산은 대갈 일성을 터뜨리면서 일장으로 유엽비도
를 후려쳐 한 곁으로 날려보내고 있었다.
비도가 날아간 방향은 바로 안춘의 고함소리가 들려온 곳, 다시
추격을 재개하려던 그는 깜짝 놀라 걸음을 멈추었다. 무엇보다 먼
저 유엽비도를 쳐서 떨어뜨릴 일이 더 급한 것이다. 그의 눈길과
손길이 한꺼번에 유엽비도의 비행궤적을 뒤쫓았다.
"위잉!"
유엽비도의 파공음이 돌연 가속도를 붙인 듯 극렬하게 울렸다.
그는 재빨리 비행궤적을 쫓아 일장부터 후려쳤다. 제발 두 세
치만 비켜다오! 방향을 틀어라, 요놈아!...
실로 위기일발, 안춘의 신형이 나타난 위치는 과연 앞서 유엽비
도가 날아가던 비행궤도 선상에 있었다. 만약 그가 일순간이라도
뒤늦게 충격을 가했더라면 비도는 여지없이 그녀의 가슴이나 아랫
배를 꿰뚫고 들어갔을 것이다.
"너무 바짝 따라오지 마!"
그는 다시 추격의 발길을 떼면서 급박하게 소리쳤다.
안춘은 그 자리에 우뚝 멈춰섰다. 너무도 놀란 터라, 온몸에 식
은땀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숲가에 거의 접근했을 때, 그는 미친 듯이 내뛰는 영락거사의
뒷모습을 다시 포착할 수 있었다. 이젠 내 손아귀에 들어왔다. 더
는 못 도망친다!
그러나 숲 오른쪽에서 또 사람의 그림자가 불쑥 나타나더니, 헐
레벌떡 이쪽으로 달려온다. 한 둘이 아니고 여럿이다.
"계 형! 저놈 잡으시오. 영락거사요!"
장추산은 다급하게 소리쳤다.
그는 제일 먼저 모습을 드러낸 사람이 앞서도 때 없이 여러차례
나타나 도와주던 계제운임을 알아보았다. 그래서 소리쳐 응원을
요청한 것이다.
"궁한 도둑은 뒤쫓지 않는 법일세."
계제운이 달려와서 맞고함을 질렀다.
"난 저놈을 꼭 붙잡아야 쓰겠소!"
그는 한마디로 거절하고 계제운의 앞을 지나쳐 달려갔다.
이제 영락거사는 전방 5장 거리도 못 되는 곳에 있다. 그런데
어찌 쉽사리 놓아줄소냐?
그러나 그 순간 느닷없이 그는 등줄기 후심(後心)이 부위에 무
어라고 말 못할 이상한 충격을 느꼈다. 그것은 흡사 만 근짜리 쇠
몽치로 얻어맞은 듯 엄청난 충격이었다.
목구멍에 들쩍지근한 맛이 느껴지더니, 입 안으로 미끄러운 액
체가 솟구쳐 올라왔다. 그와 동시에 갑자기 눈앞이 캄캄해졌다.
충격으로 가속력이 붙은 몸뚱이가 주인의 뜻과는 상관없이 앞으
로 곤두박질치듯 두 배나 빠르게 질주해 나갔다.
"계제운, 나를 암습했구나!"
그는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꽈당!"
왼쪽 어깨가 해묵은 소나무 둥치를 들이받고 비스듬히 기울었
다. 정면 충돌이 아니어서 반탄력에 퉁겨나가지 않은 것이 다행이
었다. 몸뚱이는 자연스레 빙그르르 돌아가면서 앞으로 넘어갔다.
"우왁!..."
선혈을 한 모금 토해내는 찰나, 그는 넘어지려던 몸뚱이를 가까
스로 억제했다. 뒤편에서 안춘이 부르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추산!..."
그는 이미 절반쯤 혼미상태에 빠져들고 있었다. 그러나 살아야
한다는 본능이 더 이상 혼절하지 못하게 막아주었다. 도망치자!
여기서 도망쳐야 산다!
도망쳐야 한다는 강렬한 욕망이 불끈 치솟자, 그는 본능적으로
혼신의 기력을 모조리 끌어올려 떨치고 일어났다.
"계숙(桂叔)! 당신 무슨 짓을 한 거예요?"
공포에 질린 안춘의 고함소리가 또 귓전을 때렸다. 그 음성에
떠밀리듯, 장추산은 최대한의 속도로 서북쪽 숲 모퉁이를 향해 몸
을 날렸다.
"앗, 저놈이!..."
사람들의 경악에 찬 실성이 따라붙다가는 뚝 그쳤다. 실로 사람
들을 아연 실색하게 만든 기막힌 속도에 소리조차 뒤쫓을 수 없었
던 것이다.
얼마나 오랜 시간을 달려왔을까, 그는 끝끝내 더 이상 버틸 수
없는 지경에 다다랐다.
"추산 오빠!..."
귀에 익은 음성.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바짝 죄어왔던 의지의
고삐가 홱 풀어졌다.
"쿵!"
그는 달리던 힘을 제어하지 못하고 앞으로 곤두박질쳤다. 그리
고 모든 감각을 잃어버렸다.
장추산이 급작스레 두 배나 빠른 속력으로 밀림 깊숙히 사라지
는 것을 바라보고, 계제운 이하 20명의 일행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얼굴빛이 하얗게 질린 채 뒤쫓아갈 엄두조차 나지 않았다.
하기야 추격해 봤자 헛수고라는 것을 그들도 잘 알고 있었다 .
이건 숫제 인간의 능력으로써 다다를 수 있는 속도가 아니라 번
갯불이나 유성 흐르듯 한다고 해도 지나친 형용이 아닐 것이다.
"저럴 수가... 저런 일이 어떻게 가능하단 말인가?"
계제운이 하얗게 질린 채 소리쳤다.
"어르신, 저것은 소문으로만 전해 듣던 <유광둔영>(流光遁影)이
란 경공 절학올시다."
<지존마검> 우무극이 몸서리를 치면서 대꾸했다.
"저놈은 이미 유신반허(由神反虛)의 경지에 들어선 것이 분명합
니다. 앞으로 얼마 안 있으면 무상(無上)의 경지인 지행선(地行
仙)에까지 도달할 가능성도 많습니다."
안춘이 발광한 사람처럼 달려왔다. 얼굴에는 경악과 분노로 가
득찼다.
"계숙! 당신이 이럴 수가...."
그녀는 분노로 가쁜 숨결 때문에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동
그랗게 부릅뜬 눈매에선 불길이라도 뿜어낼 듯하다.
"이것아, 무례하게 굴지 마라!"
중년 하녀 감대랑이 그 앞을 가로막고 반말로 꾸짖었다.
"계후(柏候) 나으리께서도 부득이 그럴 수밖에 없었단 말이다.
장추산의 손에 영락거사를 죽게 만들 수 없었어 !"
"당신!...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그녀는 펄쩍 뛰면서 호통을 쳤다.
"당신들은 날 도와서 영락거사 부자 놈을 처치하기로 하지 않았
어요? 그런데 오히려 그 개 같은 놈을 살려 주다니!..."
"차일시 피일시, 이럴 때도 있고 저럴 때도 있는 거야."
계제운이 씁쓰레하게 웃고 대꾸했다.
"어떤 상황이든, 생각지도 못한 변화가 있게 마련이니까. 나는
꼭 그렇게 해야만 했어."
"왜 그랬죠! 무엇 때문에..."
"말 못한다."
"난 들어야겠어요!"
"뉴뉴, 너는 빨리 이 진강을 떠나서 소주로 가거라. 내 전령편
에 대감님께 보고서를 올릴 테니까, 물어볼 것이 있으면 네 아버
님에게 여쭤보도록 해라. 그게 좋지 앓겠나?"
계제운은 일부러 외면하고 말을 이었다 .
"이 일은 절대 극비에 속하는 것이라, 네 아버님도 말씀해 주실
지 않을지 나도 모르겠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당신이 말을 않는다면...."
그녀는 분노에 차서 악을 썼다.
"계숙, 당신하고 생사 결판을 내고야 말 테야! 죽기 살기로...
으흑!..."
그녀는 말끝을 다 맺지 못했다.
뒤에서 감대랑이 돌연 그녀의 뒤통수에 일장을 후려친 것이다.
안춘의 몸뚱이가 앞으로 쓰러지자, 감대랑이 한 손으로 움켜 부
축해 안았다. 하녀의 품에 안긴 채, 그녀는 이내 정신을 잃어버리
고 말았다.
첫댓글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