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무 살 라일락 [유강희]
라일락, 구름의 주소가 많은 스무 살
저 나무는 어디를 건너왔나
땀방울이 몽긍몽글 피어났네
향기가 수치가 되는 날들 지나왔네
지치지도 않은 절망,
옥상으로 올라가는 계단처럼
햇볕의 상처를 보여주는
모서리 딛고 네가 걸어오네
내 앞에서 한번 웃어주지 않겠니?
내가 열 수 없었던 눈물의 섬들
봄비가 대지의 틈을 꿰매듯
라일락, 너무 많은 모음과 자음
나는 어떻게 저 위를 지나가나
설움을 풀어내는 맷돌을 베고 누워
어젯밤, 두더쥐를 삶아먹었다는
여자의 고백이 참 희망적이네
그런 말을 중얼거리듯 피어 있는
라일락, 다시 돌아오지 않는 스무 살
- 고백이 참 희망적이네, 문학동네, 2018
멸치 [김경미]
잡아도 잡아도 멸하지 않는다 하여 멸치라 했다 한다
그렇다면
연보라빛 오월의 라일락나무들도 멸치다
유월, 담벼락에 온통 줄도장 찍는 줄장미들도 멸치다
그때마다 자궁 속 다시 나오고 싶은 여자도 멸치다
그 밤마다 치마 속 다시 들어가고 싶은 남자들도 멸치다
저 파닥이는 흰구름도 빗물도 빗물 적시는 먼지도
무엇이든 다 매만진다는 세월도 추억도
다들 단도처럼 반짝대는 멸치다
당신이라는 세상, 그 수상한 것만 빼면
- 고통을 달래는 순서, 창비, 2008
봄날의 심장 [마종기]
어느 해였지?
갑자기 여러 개의 봄이 한꺼번에 찾아와
정신 나간 나무들 어쩔 줄 몰라 기절하고
평생 숨겨온 비밀까지 모조리 털어내어
개나리, 진달래, 벚꽃, 목련과 라일락,
서둘러 피어나는 소리에 동네가 들썩이고
지나가던 바람까지 돌아보며 웃던 날.
그런 계절에는 죽고 사는 소식조차
한 송이 지는 꽃같이 가볍고 어리석구나.
그래도 오너라, 속상하게 지나간 날들아,
어리석고 투명한 저녁이 비에 젖는다.
이런 날에는 서로 따뜻하게 비벼대야 한다.
그래야 우리의 눈이 떠지고 피가 다시 돈다.
제발 꽃이 잠든 저녁처럼 침착하여라.
우리의 생은 어차피 변형된 기적의 연속들,
어느 해였지?
준비 없이 떠나는 숨 가쁜 봄날처럼.
- 마흔두 개의 초록, 문학과지성사, 2015
공즉시색 -수덕사 일기 3 [김형경]
비우고 비우고 비우려 해도
텅 빈 내 영혼은 더 비울 게 없다
비어 있다는 사실조차 비워내라고
도감 스님은 염주 알을 굴리며 법의 를 펄럭이며
사월은 화려하다 핑크에서 퍼플까지 사월에는
절망도 화려함을 돋보이게 하는 장식이 되고
저 산을 깎아 저수지를 만들거나
저수지에 사람을 빠뜨려 사랑을 만들거나
돌멩이를 들어 세상의 정수리를 내려치는 모든 일이
물귀신 같은 사월에는
그러나 노스님은 비우라고 한다 영산홍과
자목련을 가리키며 희고 통통한 손가락 끝에
날아와 앉는 나비를 보여준다
나비가 날아온 서방정토로 햇살이 기울고
지구조차 서쪽으로 비스듬히 기운다
비우고 비우고 비우고 싶다
나비 한 마리가 이 땅의 질서라면
라일락 한 송이가 한 덩이 빵이라면
서방정토가 난지도나 강화도쯤이라면
비우고 비우고 또 비울 수도 있지만
그 이치를 몰라서가 아니다 백이와 숙제처럼
고사리나 캐고 개자추처럼 개자추처럼 집 없는 뱀이 되어
용서하는 법을 몰라서가 아니다
아직도 아귀의 신음소리 들리는 이 사월에
아직도 몽달귀신 되살아나는 이 산사에서
- 시에는 옷걸이가 없다, 사람풍경, 2013
개평 같은 덤 같은 [임영조]
내 나이 딱 오십이 되면
밥 빌던 직장을 그만두리라
속으로 다짐하고 또 했다, 헌데
막상 쉰이 다 돼가는 어느 날
본 나이로 할까, 호적 나이로 할까
호적 나이라면 아직 이태나 남았는데
치사한 잔머리를 굴리다 예라!
본 나이 오십에 밥숟갈을 던졌다
어느새 나도 이태 후면 환갑이다
호적 나이로 치면 네 해나 남았다
갑년이라면 보고도 못 본 척
듣고도 못 들은 척
눈과 귀가 순해져야 할 텐데
나는 아직 눈이 바빠 탈이다
귀가 여려 탈이다
본 나이와 호적 나이 사이에
라일락꽃 흐드러진 봄이 오가고
한여름 매미소리 귀를 찢는데
오동잎 살랑살랑 가을바람 쫓는데
나는 아직 바쁜데 이를 어쩌나?
본 나이로 칠까 호적 나이로 갈까
망설이는 사이에 갑년은 올 것이다
이를테면 개평 같은 덤 같은.
- 그대에게 가는 길 2, 천년의 시작, 2008
오래된 물음 [황지우]
누가 그것을 모르랴
시간이 흐르면
꽃은 시들고
나뭇잎은 떨어지고
짐승처럼 늙어서
우리는 언젠가 죽는다
땅으로 돌아가고
하늘로 사라진다
그래도 살아갈수록 변함없는
세상은 오래된 물음으로
우리의 졸음을 깨우는구나
보아라
새롭고 놀랍고 아름답지 않으냐
쓰레기터의 라일락이 해마다
골목길 가득히 뿜어내는
깊은 향기
볼품없는 밥송이 선인장이
깨어진 화분 한 귀퉁이에서
오랜 밤을 뒤척이다가 피워 낸
밝은 꽃 한 송이
연못 속 시커먼 진흙에서 솟아오른
연꽃의 환한 모습
그리고
인간의 어두운 자궁에서 태어난
아기의 고운 미소는 우리를
더욱 당황하게 만들지 않느냐
맨발로 땅을 디딜까 봐
우리는 아기들에게 억지로
신발을 신기고
손에 흙이 묻으면
더럽다고 털어 준다
도대체
땅에 뿌리박지 않고
흙도 몸에 묻히지 않고
뛰놀며 자라는
아이들의 팽팽한 마음
튀어오르는 몸
그 샘솟는 힘은
어디서 오는 것이냐
- 온몸으로 밀고 나가는 것이다,민음사,2014
네살의 여자 [김경미]
야야야야
네살짜리 한 아이여자가 오월의 라일락꽃 느티나무 밑을
성냥개비 같은 두팔 활짝 바람에 꽂은 채
사과조각처럼 뛰어간다
그 속 원시의 주술사가 세차게 북을 두드린다
라일락빛 뺨 위로 얼마든지 무한한 날들이
여자의 입술을 귀로 귀로 복숭아처럼 끌어올린다
생에 그리고 사랑에
아직 더럽혀지지 않은 흰 치아 몇 톨이 보인다
질투와 연민으로 가슴이 에인다
훼손이여
나 생을 얼마나 편지 뜯어보지도 않고 탕!
문 닫아버렸는지
꽃 속의 뜻들 두려워 서성였는지 알지
알아도 멈출 수 없는 낭비 덕에 나 살아냈는가
느티나무 같은 네 살짜리 여자가 펼쳐 보이는 시간이
기울인 양초에서 떨어지는 촛농처럼
라일락 꽃잎에서 어깨로 얼굴로 똑, 똑, 너무 뜨겁다
- 제5회노작문학상수상작품집, 동학사, 2005
내가 사용한 공기 [이기철]
꽃이 벗어놓은 신발이 열매가 되는 날도
한 번도 그것의 고갈을 염려하지 않은 채
햇빛을 사용하고 공기를 사용한다
라일락이 낭보처럼 피는 날도
보랏빛에게 얼마만큼 아프냐 묻지도 않고
옷을 사용하고 신발을 사용한다
봄날이 오전 일곱 시를 데리고 오는 아침마다
치약과 면도칼과 비누를 소모하고
잠들기 전까지 헬 수 없는 수의 말을 낭비하고
허파는 공기를 오염시키고
내 몸을 빠져나간 오줌과 똥이 강물을 더럽힌다
바람이 풀밭융단을 밟고 지나가는 날도
만져본 적 없는 광년의 길을 걸어
내게 도착한 햇빛에게 고맙단 말 한 마디 없이 온기를 빼앗고
저 혼자 넉넉한 들판의 푸른 식구들을 베어 끼니를 때우고
내일 태어날 사람들을 생각하지 않은 채
아낌없이 산의 푸나무들을 소모한다
홀씨만한 참회도 없는 이런 말들이
시가 되기를 바라고
누군가가 이 시를 읽어주길 바라고
누군가가 이런 말에 감동해주길 바라는
아, 참회의 길은 어느 만큼 큰가
속죄의 길은 어느 만큼 미려한가
- 시와 정신, 2012년 봄호
라일락 [고진하]
하지만 세상의 어떤 지극한 보살이 있어
천 개의 눈과 손마다
향낭(香囊)을
움켜쥐고 나와
천지를 그윽하게 물들이는
너의 공양을 따를 수 있으랴
- 얼음수도원, 민음사, 2001
이별 [오탁번]
이제는 친구들을 만나는 일이
그전 같지 않아
삼겹살 곱창 갈매기살 제비추리
두꺼비 오비 크라운
아리랑 개나리 장미 라일락
비우고 피우며 노래했는데
봄 여름 지나 가을 저물도록
얼굴 한 번 못 보다가
아들 딸 결혼식장에서나
문상간 영안실에서나
오랫만에 만나 인사를 나누지
오늘 헤어지면 언제 또 만날까
영영 오지 않을 봄을 기다리듯
다 헛말인 줄 알면서도
자주 자주 만나자
약속하고 헤어지지
그래 그래 마음으로야
좋은 친구 자주 만나
겨울강 강물소리 듣고 싶지만
예쁜 아이 착한 녀석
새 식구로 맞이하는
아들 딸 결혼식장에서나
그냥 그렇게 또 만나겠지
이제 언젠가
푸르른 하늘 노을빛으로 물들고
저녁별이 눈시울에 흐려지면
영안실 사진틀 속에
홀로 남아서
자주 자주 만나자고
헛 약속한 친구들
그냥 물끄러미 바라보겠지
다시는 못 만날 그리운 친구야
죽음이 꼭 이별만이랴
이별이 꼭 죽음만이랴
- 오탁번 시전집,태학사, 2003
첫댓글 댓글이 많아진 시사랑
올려준 시들을 천천히 읽어볼께요
댓글 다는 모든이에게 행복이 함께하시라.^^*
라일락 향기가 참 좋습니다.
라일락 시모음의 향기 또한 짙어서 여러 시들 앞에 머무르게 됩니다.
시숲을 풍성하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향기는 쥐똥나무가 1등이고, 라일락이 2등이죠.^^*
때가 어느 때인데 라일락을ㅎㅎ
라일락 꽃 향기가 솔솔솔...^^*
때는 바야흐로 라일락이 그리운 思月이죠.
아무때나 그리운 라일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