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 월
심 상 대
달이 떴다. 연이틀 대밭머리에서 후드득거리던 가랑비가 어제 저녁나절 그치고 새벽부터 종일 맑은 뒤라, 둥글고 커다란 열엿새 만월이 대밭 위로 떠올라 마당가 감나무 꼭대기에 걸렸다. 만월은 청청한 달빛으로 흘러내려 물오른 오월의 감나무를 통째 흠뻑 적시며 이파리마다 윤기를 더하고, 그 아래편으로 쏟아져서는 상추며 쑥갓, 고추포기와 오이순이 줄지어 선 돼지막 맞은편 텃밭을 훤하게 드러내 보이고 있다.
알루미늄 새시로 된 부엌문이 열리더니 새하얀 고무신 한 짝이 달빛 속으로 나선다. 안채 처마밑에서부터 마당 건너 슬레이트 조각이 기대어 있는 헛간 안쪽까지 달빛이 괴괴하다. 마당은 달빛의 늪이다. 막 부엌문을 나선 아낙은 또 한 짝 고무신을 달빛 웅덩이 속에 담그며 섬돌을 딛고 마당으로 나선다. 가는 주름이 잡힌 연한 하늘빛 치마와 깃이 커다란 흰 저고리가 달빛에 젖는다. 작고 가냘픈 몸매에 한쪽 소매는 단정히 단추로 여몄으나 한쪽 소매는 말아올려 걷어붙이고 있다.
“그려……”
아낙은 허둥대며 말을 참는다.
“쪼깐 참어야.”
달을 보고 하는 말이다. 말을 아껴 참느라 아낙은 팔뚝이 드러난 한쪽 팔을 들어 봄볕에 그을은 얼굴 앞에서 살살 흔들었다. 비어 있는 돼지막 못 미쳐 마당가 상수도 곁에 장독대가 있다. 달빛에 번쩍이는 옹기가 가지런히 줄지어 선 장독대로 다가간 아낙은 커다란 독과 빈 플라스틱 우유통 사이에 놓여 있던 호미를 집어든다.
“내가 진작 안 씻어뒀냐……”
입술을 열어 웃으면서 깨끗하게 씻긴 호미날을 만져본다.
“요놈을……”
아낙은 장독대 곁에 여러 장 더미지어 쌓여 있는 시멘트 블록 곁에 쪼그리고 앉는다.
“니가 좋아헐 것잉게……”
시멘트 블록 곁에 선 봉숭아 포기를 떠내면서 아낙이 다시 말한다.
“삘건 것 한나하고 흐컨 봉숭아도 한나하고……”
쪼그려 앉은 아낙의 몸은 작고 둥글다. 반백의 파마머리와 흰 저고리 위로 달빛이 쏟아져내린다. 봉숭아 포기가 흔들린다. 갑작스레 개 짖는 소리가 터진다. 개 짖는 소리는 카강카강 화급하게 일어서더니 끄응 하고 곧 가라앉았다가는 다시 자지러지게 카강 캉캉캉 길게 이어진다. 달빛 탓이다. 달빛에 번쩍이는 토란잎과 그 그림자에 놀란 탓이다.
봉숭아 포기와 호미를 부엌문 앞에 놓여 있던 고동색 플라스틱 함지에 담은 아낙은 흰 수건을 비틀어 말아 똬리를 만든다. 손으로는 똬리를 틀며 눈으로는 마당 건너편 헛간에 붙은 곁방을 바라본다. 봉창문 아래 슬리퍼 한 짝이 놓여 있는 곁방은 키 낮고 작아 움막과도 같다.
“경주야, 니 방은 조로콤 고 모냥 고대로 있은께 염려 말어야. 한나도, 십육년 동안 한나도 손을 안 댔어야. 조놈은 내 아들 경주 방인께, 어느 놈이고 손을 대들 말어. 문살 한나 책장 한나 건들믄 그날을 지삿날이다, 하고 내가 지켜부렀다. 대학교 댕기는 내 자석, 전남대학교 법과에 댕기는 내 자석 김경주 방이 저 방이다, 함시로 나하고 느그 아부지하고 시방까지 지켜부렀다.”그 방 섬돌 둘레에 돋은 이끼가 달빛을 머금어 허옇다.
“십육년 동안 한나도, 털끝만치도 손을 안 댔어야.”눌러 여민 똬리 위에 함지를 올려 인다. 그리고 걸음을 내디디며, 아낙은 고개를 들어 달을 본다. 둥글고 커다란 달은 밝디밝다.
“그려…… 그려…… 달은 열엿새 달이라 안 허디야……”낡은 철대문을 소리나지 않게 여닫고 아낙은 고샅으로 나섰다. 미처 뜯지 않은 상추포기가 성하게 자라 우뚝우뚝 선 앞집 푸성귀밭이 허물어진 돌담 너머에 있다. 고샅 어귀에 있는 이장네 우사 앞을 지난다. 돌담이 끝나는 골목길엔 피운 꽃을 다 지우고 이제 막 말라 죽어가는 대나무밭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져 있다. 아낙은 재게 발을 놀렸다. 달도 서둘러 흘러간다. 시멘트로 포장된 농로를 지나고 붉은 우편함이 처마에 매달린 잡화점방을 비켜서 뚝방길로 나서도록 아낙은 서둘러 발을 놀렸다.
“느그 아부지가 기셨드라면 또 난리를 쳤을 것인디.”앞이 훤히 트였다.
“야야, 나는 인자 다 잊어부렀다. 다 잊어부렀어.”
함지를 인 채로 아낙은 머리를 흔들었다.
“그날 밤에 여그, 이 길바닥에서 니 소식을 들었어야. 그렁게 요 길바닥을 지날 때마다 내 속이 으짜겄냐” “참말로…”마을을 다 벗어났다. 아낙은 휘유,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십육년이여. 그랑게 벌써 십육년이나 되아부렀다. 으짜끄나. 니 소식을 갖고 여까정 찾아왔던 그 여학생은 진작 애기엄마가 됐겄는디. 아이고 으짜끄나……”오른쪽으로는 뚝방을 따라 길게 뻗은 하천이 있다. 하천은 바닥까지 자갈과 풀포기투성이다. 대신 왼쪽에는 물이 넘치는 농수로가 있다. 농수로의 물은 콘크리트 둑을 치며 넘칠 듯 출렁거린다. 그 넘실대는 물결 위로 달이 떠 흘러간다.
“느그 아부지 살아 계실 적에는 그 냥반 성화에 가고 싶어도 가덜 못했는디, 느그 아부지 돌아가시고 낭게 인자는 넘들 보기가 남세시러워야.”수로는 달빛의 비단길이다.
“니 학교 가는 길 따라나설 때믄 온 동네 사람들 다 나와 봤음 했는디 지금은 으째 내 맴이 이러까.”농수로는 달을 건져내고 검게 출렁이는 물결만을 담은 채 뚝방길을 비켜 마을 옆에서 방향을 틀더니 저편 들판 쪽으로 달아난다. 흙담에 기대어 붉게 피어난 접시꽃은 송이송이 자지러질 듯 현란하다. 담홍빛 속치마를 홀라당 벗어 뒤집어둔 것 같다. 닭장이 있고, 그 곁에 두엄더미가 있고, 그 곁에 외바퀴 손수레가 넘어져 있다. 접시꽃이 기대어 핀 흙담에서 두 집을 더 지나 팽나무 고목이 서 있고, 그 다음은 감자밭이다. 흰 감자꽃이 흐벅지게 피어 있다.
“다 잊어부렀다. 다 잊어부렀다.”
뚝방길가에는 잡초가 숲을 이루어 우거져 있다. 잡초 사이사이로 작고 하얀 꽃송이가 무더기무더기 박혀 있다.
“그랑께 인자는 아프지는 않지야” 깨진 코도, 텍아지도, 찢어져분 귀때기도, 피도 다 몰랐고 찢어진 디도 다 아물었을 것잉께 인자는 한나도 아프지 않지야”...“그려…… 나도 다 잊어부렀시야.”아낙은 함지 전두리를 움켜쥐고 있던 오른손을 내려 달빛을 젓는다.
“휘휘…… 인자는 암시랑토 않지야”
휘젓던 손을 등뒤로 돌려 붙인다.
“경주야, 저번 여름에는 경태가 왔어야. 애기에미하고 아그들을 다 델고 왔는디, 젤로 o이가 승민이라고 아들이여. 근디 고놈은 즈 애빌 안 닮고 똑 니를 닮았어야. 눈이 초롱초롱한 것이 으째 고렇게 즈 큰아부지를 빼다쐈으까 잉. 꼭 니를 빼닮았어야. 고놈을 데불고 여그 물가에 안 왔냐. 빨개 벗고 자맥질을 하는 폼이 영락없는 니여. 긍께, 가늘디가는 어깨뼈하고, 동그란 궁뎅이하고, 딱 니여. 고놈을, 고놈 등짝을 씻기는디 딱 니를 만지는 거 같았어야.”개망초꽃이 풀숲에 피어 있다.
“여그여, 니가 쪼깐해서 국민학교 댕길 적에, 자맥질하다가 뭣인가 버러지에 쐬여서 사타구니고 불알이고 팅팅 부어서 찔찔 울던 디가 여그여야. 여그서 에미가 고놈을 씻김시롱 생각을 했다. 다 잊어불자고 말이여……”달은 하천바닥에 고인 물웅덩이에 담겨 있다.
“경주야, 느그 동생들 다들 잘되었어. 경태, 경복이, 경술이, 춘애 다들 잘되었어. 잘들 살어야. 경태가 기술이 좋지 않냐. 긍께 고놈이 니 몫을 다 혀. 경태가 장남 노릇을 다 혀. 경술이는 아직 이르다고 애를 안 낳는다고 햐. 경술이만 애기 없이 신랑각시가 살고…… 돈 벌면 낳는댜…… 경태가 아들 둘 딸 한나, 춘애가 아들 한나 딸 한나. 경복이는 아들만 한나고. 다들 잘살어. 느그 아부지 돌아가셨을 때도 잘 치렀어야. 잘 치렀다고 모다들 칭찬이여.”녹슨 쇠파이프로 된 난간이 절반쯤 떨어져나간 낡은 콘크리트 다리를 지나 아낙은 하천을 건넜다. 넓게 펼쳐진 논 가운데 마을이 있다. 마을을 가로질러 난 길이 지름길이다. 이제 달은 모낸 논바닥에 떠 있다. 마을로 들어서자 낡은 트럭 타이어가 더미지어 쌓여 있고, 그 곁에 고구마순이 심어진 흙더미가 비닐에 싸여 있다. 둥근 흙더미가 통째 고구마밭이 되는 것이다. 골목 안에서 닭 우는 소리가 들린다. 서너 마리가 함께 맑고 높은 소리로 울더니 푸드덕거리다가 잠잠해진다.
“경복이는 뭣이냐 고놈, 자가용을 다시 샀디야. 이번 여름에는 고놈 타고 온닥 하드라. 춘애는 음식 배달 댕기는 자가용, 신서방 타고 댕기는 자가용, 자가용이 두 대여. 여름에 춘애도 온닥 하드라.”블록 담장 사이의 좁은 골목길 한쪽으로 승용차들이 줄지어 서 있다. 아낙은 그 곁을 아장아장 걸어간다.
“나는 참말로 한나도 부러운 것이 없어야. 긍께 니는 쪼끔도 걱정을 말어. 난 참말로 암시랑토 않은께.”논 가운데 있는 마을을 다 빠져나와 큰길 못 미쳐 주유소 가까이 다가갔을 때 달빛이 사위었다. 구름장이 온통 하늘을 뒤덮고 있다. 주유소 마당을 비켜 국도로 나서자 양쪽에 선 가로수 때문에 길은 더욱 어두워진다. 아낙은 어두운 길 가장자리로 걸어간다. 달은 오래도록 나타나지 않는다. 길 이쪽저쪽에 펼쳐져 있는 담양(潭陽) 들판은 시작도 끝도 가늠할 수 없는 짙은 어둠속에 엎드려 있다. 소형승합차 한 대가 불빛을 쏟으며 빠른 속도로 지나쳐가고서 또 막막한 어둠이 이어졌다. 약국과 농협과 철물점, 슈퍼마켓, 식당이 있는 네거리에 와서야 훤해졌다. 찻길을 건너 왼쪽으로 접어들어 초등학교 교문에 이르렀을 때 비로소 달은 먹장구름 속에서 퉁겨나와 휘영청 밤하늘 한가운데 떠올랐다. 초등학교 담벼락을 지나자 이내 낮은 담 너머로 중학교 교사가 보인다. 길 건너편으로는 늘씬한 송전탑과 대밭을 배경으로 선 수북(水北)교회의 십자가가 가로등 불빛에 말끔히 드러나보인다.
“난 한나도 부러운 것이 없어. 우리 아들놈이 한번도 물러서덜 않고 줄창 일등을 했응께. 수북면에서는 다들 알아야. 수북국민학교 수북중학교를 댕김서 한번도 일등을 놓쳐보덜 않은 놈이 내 아들이라는 것을 모다들 다 알아.”걸음을 다잡아 서두르며 아낙은 어깨를 젖히고서 비탈길을 내려간다. 대나무밭이 바람에 흔들린다. 스스스 댓잎이 운다.
“느그 동생들도 한나 섭섭해하덜 않어야. 형 땜시 국민학교만 마치고 공장살이 간 것을 원망시러하는 놈이 한나도 없어야. 다덜 잘되었응께. 공부하기 싫은디 잘되었다고들 혀. 다들 성공해부렀응께 참말로 잘되야부렀어야.”...소쩍, 소쩍, 소쩍새가 운다. 어쩌다 한번씩 가늘게 바람이 불고, 그러면 보 수면 위에 번져 있던 달빛이 후르르 흔들린다. 마을을 벗어나자 소쩍새 소리가 멎었다. 앞이 훤히 트인 길이 나타나고 길 저편 한가운데에 또다시 마을이 웅크리고 있다. 아낙은 오른쪽으로 비켜 논둑과 논둑 사이에 난 좁은 길로 들어선다. 마을을 비켜 가는 길이다. 그 좁은 길은 아직 비에 젖어 질척거렸다. 요철 심한 트랙터 바퀴 자국이 길바닥을 깊이 파놓았고, 움푹 파인 바퀴 자국엔 이전에 내린 빗물이 다 마르지 않은 채 고여 있다. 수로에서 베어 던진 갈댓잎이 길바닥에 더미더미 쌓여 있다. 아낙은 조심조심 마른땅을 골라 디뎠다. 마른 갈댓잎 밑에까지 물이 고여 있어 걸음이 여간 조심스러운 게 아니다. 아낙은 기어이 한쪽 손으로 허리를 짚고 논둑으로 올라섰다. 양쪽의 논과 수로는 연하디연한 풀싹의 색채를 띠며 어둠에 잠겨드는 그 끝까지 이어지고 있다.
아낙은 다시 걸음을 옮긴다. 아낙의 발길에 놀란 개구리가 물로 뛰어드느라 퐁당퐁당 물소리를 낸다. 물줄기가 떨어지기도 한다. 논둑 사이 좁은 길은 다시 너른 농로로 이어지고 있다. 그 갈림목에 비닐하우스 여러 채가 서 있고, 비닐하우스 주변에는 논을 성토해 만든 밭과 잡초 무성한 좁은 빈터가 있다. 갈림목이 가까워지며 가늘게 라디오 소리가 들려온다. 녹슨 비닐하우스 골조용 쇠파이프를 쌓아둔 가장 밝고 커다란 비닐하우스에서 울려나오고 있다.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검은 플라스틱 묘판이 쌓인 빈터 가장자리 풀숲에선 억새와 개망초의 흰꽃이 전깃불에 환히 제 색깔을 드러낸다.
“참말로 잡초랑께.”
아낙은 환한 전깃불을 비켜 어둑신한 농로로 들어선다.
“저것들만 보면 에미는 살이 떨려야. 다 잊어부렀는디, 다 잊어부렀는디…… 그날 봤던 잡초는 안 잊혀야. 참말로 요상해야. 그 많은 사람들이 죽어자빠진 아귀지옥이 다 잊히고, 그 곡소리가 다 잊히고, 총소리 비명소리까장 다 잊혀부렀는디, 먼 곡절로 그날 보았던 풀더미는 아직까장 안 잊힌다야” “억새 무데기를 봐도 그라고, 삘건 엉겅퀴꽃을 봐도 그라고, 살이 떨리고 환장을 허겄어야.”농로는 이차선 국도만큼이나 너르고 반듯하며 곧다. 환하던 불빛이 사위며 다시 달빛이 펼쳐진다.
“긍께, 무신 잡초귀신이 씨였는갑어야, 잉”
사방이 툭 트였다. 아낙은 저 먼데까지 드러나 보이는 달빛 아래 들판으로 나섰다. 담양 벌판을 둘러싼 산의 능선이 겹겹이 포개져 놓여 있다. 그 들판을 가르며 광주(光州) 쪽으로 곧게 뻗은 농로를 따라 끝없이 이어진 전선이 달빛을 받아 반짝인다. 만월의 달빛 탓에 하늘 가장자리의 별만이 중얼중얼 빛난다.
“그려, 그려…… 고것을 잊어분다믄 인종이 아니제. 인종이 아닐 것이여. 금쪽 같고 은쪽 같던 내 아들을 땅에 묻어불고 산을 넘어오던 날 밤, 지천으로 피어서 흔들리던 고놈의 풀꽃을 잊어뿐다면 참말로 사람이 아니제. 참말로 사람 노릇이 아닐 것이여.”눈을 찌르는 헤드라이트 불빛을 앞세우고 연이어 여러 대의 트럭이 굉음을 내지르며 달려왔다. 한참 동안 아낙은 길가에 비켜서서 지축을 뒤흔들며 달려드는 트럭을 다 맞고 떠나보냈다.
“그려, 그려…… 차분차분…… 찬찬히……”
아낙은 자신도 모르는 소리를 중얼거렸다. 다시 너른 들과 들 가운데로 뻗은 길이 훤히 드러나 보인다.
“오매!”
길가에 버려둔 양수기인 줄만 알았던 시커먼 그림자가 불쑥 일어서서 놀란 아낙 앞으로 한걸음 걸어나오더니 비척대고 앞서간다. 아낙도 곧 걸음을 옮기긴 했지만 놀란 가슴이 방망이질한다.
“……어따 놀래라. 뭔 사람이 그라요.”
앞선 그림자는 비척대며 고개를 숙이고 걸어가는데, 한쪽 다리를 절고 있다. 두 사람이 거리를 좁혀 나란히 걸을 때쯤 아낙은 후줄근한 감색 점퍼를 걸친 동행인의 얼굴을 보았다. 달빛에 드러난 동행인의 얼굴은 피로와 불만에 찌든 어린 사내아이의 그것이었다.
“악아……”
온몸을 흔들거리며 걷는 아이에게 아낙이 묻는다.
“뭣 땀시 여글 왔다 가냐?”
아이는 얼른 대꾸하려 하지 않는다.
“어디 가는 길이여?”
아이는 앞만 바라보며 아낙의 말에 짧게 대답한다.
“친구 찾으러 왔어라.”
“뭔 친구를 찾으러 왔냐?”
“네?”
“뭔 친구를 찾으러 왔냐고?”
“오늘 학교를 안 와갖고라. 선생님이……”
“여그까지 지금 학교친구를 찾아왔어야... 학교에서야?”
“그라믄 지금은 어디 가냐?”
아이는 곧 대답하려 하지 않는다. 다시 아낙이 물었다.
“학교로 가냐? 광주로 가냐?”
“아는 집에……”
“니는 힘도 없어 뵈는디…… 누굴 찾으러 다닐 것 같덜 않은디…… 그 친구는 뭣 땀시 학교를 안 왔다냐?...몰라라”
“그 친구는 집에 가보니 없어야?”
“야.”
“아무도 없어야?”
“할머니만 있어라.”
“할머니한티 잔 물어보제 그랬냐?”
“말했어라. 어디 간지.”
그러고는 말이 끊겼다. 두 사람이 향하고 있는 저편 산 아래 길에서 자동차의 헤드라이트 불빛이 줄지어 반짝이고 있다. 아이가 다시 짧게 말했다.
“모른다고……”
“악아, 니 중학생이냐?”
“고등학교 삼학년여라.”
“고등학교 삼학년?”
아낙이 놀랄 만도 했다. 아이는 키도 몸피도 작고 부실하다. 다리를 절며 먼길을 힘들여 걸어가는 모양이 안타까울 지경이다. 모터싸이클 한 대가 두 사람을 마주 지나쳐간다. 운전하고 있는 사람은 젊은 여자다. 여자는 짧게 자른 머리에 위아래 알록달록한 무늬 옷을 입고 있다. 두 사람은 말없이 걷는다. 길은 어이없을 만큼 멀다. 아낙과 아이는, 길이 커다란 콘크리트 다리로 이어지고 좌우로 하천 뚝방과 만나는 네 갈래 길목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아낙은 차양처럼 너르게 가지를 펼친 키 작은 나무 밑에 놓인 콘크리트 걸상에 걸터앉았다. 아이는 아낙이 앉은 맞은편 길가에 쪼그리고 앉는다. 담양들노래비가 아이 곁에 서 있다.
“악아……”
아낙은 함지 안에 봉숭아 포기와 함께 담겨 있는 보퉁이를 주섬주섬 끄른다.
“뭣을 좀 묵어야 쓰겄다... 잉... 저녁은 묵었냐?”
늙은 아낙과 젊은 남정이 말없이 두 사람 사이를 지나 뚝방길을 간다. 젊은 남정은 늙은 아낙의 어깨 너머로 뚝방 아래쪽을 손짓한다. 뚝방 아래 하천에는 검은 물이 흘러가고 그 검은 물 위에서 달빛이 출렁거린다.
“요놈하고 요놈을……”
보퉁이에서 꺼낸 삶은 달걀 두 알과 음료수 깡통 하나를 손에 들고서 아낙은 오리걸음으로 아이의 등뒤로 다가간다. 아이는 달빛 번쩍이는 하천의 물결을 내려다보고 있다.
“요기를 혀야 쓰겄다.”
“고마워라.”
그제야 아이는 아낙의 얼굴을 바라보며 인사를 한다. 아낙도 비로소 아이의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보았다.
“찬찬히 묵어, 잉. 차분차분…… 찬찬히……”
아낙은 제자리로 돌아와 앉는다. 아이는 삶은 달걀과 알루미늄 깡통에 든 식혜를 마시고 아낙은 달을 본다. 바람이 불자 뚝방가에 우거진 잡초더미가 검게 번들거리며 흔들린다. 먼데서 들려오는 자동차의 소음이 들판을 쓸며 지나쳐간다.
아이가 먼저 몸을 일으킨다. 말도 없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비척대는 걸음으로 담양들노래비를 돌아 다리로 올라선다. 얼른 함지를 이고 아낙이 그 뒤를 따른다. 하천은 물은 적으나 폭이 너르고 길이도 끝을 알 수 없다. 달빛 번들거리는 물줄기며 허연 모랫벌이며 풀밭의 정경이 대낮처럼 훤하다. 양쪽 뚝방에는 붉은 칠을 한 수문이 간격을 맞추어 박혀 있다. 하천변에 우거진 갈대밭은 검푸른 더미를 통째 흔들며 일렁인다. 두 사람은 말없이 걸어간다.
다리를 건너 포장된 차도로 나서자 고추와 참깨 모종이 이랑지어 심긴 길다란 밭이 오른쪽에 나타났다. 삐걱대며 자전거 한 대가 지나간다. 어린 여학생이 온몸으로 힘주어 자전거 페달을 밟으며 두 사람 곁을 지나쳐 앞서간다. 서행을 지시하는 노란색 신호등이 깜박인다. 깜박이는 신호등 아래로 아이가 가고 그 뒤를 함지를 인 아낙이 따라간다. 언덕빼기로 올라서자 광주광역시 북구 태령동이라 적힌 입간판이 서 있다. 차나무로 울을 두른 사당이 그 아래에 있다. 고개를 넘고 대밭 그늘을 벗어나 내리막으로 내려서자 길 양쪽으로 논이 펼쳐진다.
“또 왔네, 또 왔네. 참말로……”
농수로에서 논배미로 쏟아져내리는 물소리가 철철철 들린다.
“그려…… 난 참말로 다 잊어부렀당께……”
철철철 물소리에 맞춰 논둑에 선 키 큰 개망초가 포기째 흔들흔들 흔들린다.
“암은…… 모다 잊어부렀제.”
아낙은 함지를 인 채 도리질한다. 굉음을 내지르며 트럭 한 대가 지나쳐간다. 두엄 냄새가 확 풍겨나는가 싶더니 길바닥으로 두엄덩이가 떨어져 흩어졌다. 두 사람은 우치공원으로 넘어가는 길을 버리고 왼쪽으로 접어든다. 5?18 묘지와 공원묘지를 가리키는 이정표가 서 있다. 동네를 지나 고갯길가 배롱나무 곁에서 걸음을 멈춘 아낙이 숨을 몰아쉰다. 아이는 절뚝대는 걸음으로 저만치 앞서간다.
“참말로…… 울고 넘던 고갠디……”
숨찬 목소리로 아낙이 말했다. 고개를 넘자 다시 길이 이어지고, 두 대의 승용차가 연이어 두 사람을 비켜 지나간다. 대나무 평상을 내놓은 길갓집 곁은 땅콩밭이다. 길은 다시 두 갈래로 갈라진다. 거기까지 땅콩밭이 이어진다. 아낙보다 몇걸음 앞서가던 아이는 비척대는 걸음으로 오른쪽 길로 접어든다.
“가냐? 악아, 가냐?”
아낙은 이별의 말도 없이 마을길로 들어가버리는 아이에게 묻는다. 하지만 아이는 대꾸가 없다.
“잘 가그라, 잉…… 몸조심하고…… 잘 가, 잉……”아이가 들어선 마을길을 지나쳐 아낙은 곧장 언덕빼기를 오른다. 언덕빼기를 절반쯤 올랐을 때, 요란하게 짖어대는 개소리에 마을 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이미 아이의 모습은 보이질 않고 개들만 마을이 떠나갈 듯 요란스레 짖어댄다.
“나는 모다 잊어부렀는디…… 느그 아부지는 돌아가심시롱도 못 잊어해야. 너만 찾어쌓는디……”달은 더욱 밝게 빛난다. 밤나무꽃으로 뒤덮인 산자락은 희디희게 부서지는 달빛의 내다. 밤꽃 냄새가 진동한다. 한 모롱이 산굽이를 돌자 소쩍새 소리가 들린다. 또 한 모롱이 산굽이를 돌자 계곡 건너 산자락의 밤나무밭 위에 내려앉은 달빛이 길게 펼쳐져 너울거린다. 밤꽃 냄새가 훨훨 풍겨난다. 다시 한 굽이 산자락을 돌아든다. 문득 달을 가렸던 구름장이 재빨리 스쳐지나가면서 어둠을 머금었던 천지가 다시 밝아진다. 그리고 수많은 묘지의 봉분들이 달빛 아래에서 일어선다.
“다 왔네, 잉…… 어짜끄나, 어짜끄나, 다 와불고 말았네, 잉.” 함지를 머리에 얹은 채 아낙은 두 팔을 떨구어 휘저으며 허위허위 내닫는다.
“오매…… 왔네, 잉…… 참말로 꿈이 아닌갑네……”걸음이 빨라지고 숨이 턱에 차오른다. 깜빡 사위가 어두워진다. 구름장이 달을 가리며 흘러가고 있다. 아낙이 두 팔을 휘저으며 걸음을 서둘러 제3묘역 어귀 비탈길 아래에 당도할 때까지 달은 비켜가는 구름장 속을 들었다 났다 들었다 났다를 계속하였다. 길 아래 펼쳐진 억새풀밭과 봉분 위에서 달빛과 구름 그림자가 다투어 너울거린다. 오월화원은 어둠속에 묻혀 있다. 공중전화 부스가 그 곁에 있고, 맞은편에는 바가지를 바닥으로 내린 포클레인 한 대가 서 있다.
아낙은 소매를 걷어붙인 오른팔을 들어올려 단단히 주먹을 쥐어들고서 층계를 오른다. 묘역의 봉분들은 모두 희미한 어둠에 잠겨 있다. 층층이 앉은 봉분과 봉분 앞에 선 낮은 상록수와, 묘역을 둘러싼 현수막과 격문들이 다 잠들어 있다. 아낙은 숨을 고르며 그 어두운 묘지로 들어서서 봉분 사이를 걸어간다. 묘역 가운데쯤에 자리한 한 무덤 앞에 이르러 걸음을 멈추고, 함지를 내린다.
“달이……”
달이 없다. 구름장 속에 묻혀 있다. 아낙은 봉분 앞에 주저앉으면서 함지를 받쳤던 똬리를 풀어 그 흰 수건으로 상석과 비석을 닦는다.
“달 없어도 나는 훤해야. 오매…… 요놈, 내 자석.” 껴안듯이 어루만지며 검은 비석의 앞뒤를 알뜰히 훔치고, 그러고는 또 어루만진다. 달빛이 잠깐 비치다가 사라진다. 달빛을 놓칠세라 봉분 곁에 놓인 유리상자 속에서 한 청년이 활짝 웃는다.
“그려…… 내가 말혔었제. 그려…… 너는 시상이 야단시럽고 소란시러서 그냥 가만히 누워서 자고 있는 것이여…… 나는 고것을 다 알어야, 잉?” 흰 수건을 뒤집어 유리상자를 닦고, 유리상자를 열어 그 안에 있는 청년의 얼굴을 들어내 품에 안는다.
“오매…… 오매…… 으짜끄나……”
이마를 닦고, 눈과 코를 닦고, 볼과 입술을 다 닦았다.
“아직은 추워야. 쌀쌀맞은디.”
닦은 청년의 얼굴을 들여다본다. 그때 불쑥 달이 튀어나왔다. 아낙은 깜짝 놀라 얼른 유리상자 속으로 청년을 집어넣었다.
“요놈 한나 캐왔다. 내가 승민이하고…… 니 조카 승민이하고 씨를 뿌린 것인디…… 인자 막 꽃이 피기 시작한디, 삘건 거 한나하고 흐컨 거 한나여.”아낙은 함지에 든 봉숭아 포기와 호미를 집어든다.
“좋쟈?”
봉분 오른쪽에 빨간 봉숭아를 심고 왼쪽에 하얀 봉숭아를 심는다. 달빛이 비친다. 두 포기를 다 심고, 아낙은 조그맣고 험한 손으로 투덕투덕 두드려 땅을 다진다.
“요놈들은 요리 밤에 심어사 새북이슬을 홈빡 맞음시롱 아침에 쌩쌩이 살아날 것이여.” 허리를 펴고 일어나 한바퀴 무덤을 돌아본다. 어깨를 젖혀 휘영청 떠오른 달을 보고, 그리고 사위를 둘러본다.
“모다 편안들 하시오, 잉?”
달빛만이 괴괴하다. 어디서고 대꾸가 없다. 가는 바람소리만이 휘이, 지나간다. 다시 봉분 앞으로 돌아온 아낙은 함지에 든 보퉁이를 끄르기 시작한다.
“계란 삶은 놈, 고놈 두 알은 저그 아가를 줘부렀어야. 고놈 두 알하고…… 머시냐 마실 것 한나하고는 줘부렀다. 그래도 니 묵을 것은 많응께. 어쯔냐? 목이 마르지야?”아낙은 보퉁이를 끌러 내용물이 가득 담긴 비닐봉지를 들어낸다.
“여그 니가 좋아할 것이여. 요놈은…… 너 줄라고 갖고 왔어야.” 먼저 비닐봉지 안에 든 콜라 깡통을 꺼낸다.
“여그 니 좋아하는 콜라여. 생각나지야. 니 국민학교 댕길 때 콜라 묵고 싶어하는디 한번도 사멕이들 못했응께. 경태 고놈은 멀로 둘러대 거짓말로 돈을 타내서도 묵고 싶은 것을 사묵었는디 너는 고로코롬 착했지야.” 손가락을 세워 알루미늄캔의 고리를 따내려 하지만 쉽게 되질 않는다. 이리저리 애를 쓰다가는 호미날로 콜라 깡통의 고리를 따낸다. 팍! 하고 콜라 거품이 터져나온다.
“니 중학교 댕길 때 동복(同福) 외갓집에 갔다옴시로 요놈에 콜라 땜시 징징 짜고 움서 걸어온 생각 나지야” “경태하고 춘애가 콜라 사묵자고 떼를 써서 외숙모가 준 차비를 몽땅 콜라 사묵어불고, 그 먼길을 징징 짜는 동상들 델꼬 경술이 들쳐업고 걸어온 생각 나지야” 그려…… 그려…… 느그 오남매가 함께 고로코롬 걸은 것이 참말로 고것이 첨이자 마지막이 되어분졌네. 뻐끔은 나가 묵고……?아낙은 깡통 전두리에 넘쳐난 거품을 입술로 핥고, 그러고는 깡통을 들어 무덤 위에 천천히 부었다.
“시언하지야 맘껏 묵어부러…… 씨언하게 씰컷 묵어야.”콜라 거품이 무덤을 덮은 잔디에 허옇게 묻어난다.
“그라고……”
아낙은 비닐봉지 안에서 연이어 김밥덩이며 맥주 깡통이며 새우깡과 양파링 봉지, 오렌지 주스 병이며 생크림빵을 꺼내놓았다.
“씰컷 묵어야. 에미도 씰컷 묵어불 텡께, 너도 씰컷 묵어분저라, 잉?” 그러나 아낙은 자신의 입에는 아무것도 넣지 않는다. 분주히 일어났다 앉았다를 거듭하며 김밥덩이와 과자 부스러기를 꾹꾹 무덤 옆구리 잔디 속에 박아넣고, 무덤 이쪽 저쪽에 줄줄 맥주를 쏟아부어주었다. 아낙은 마지막으로 바닥에 남은 김밥 꼬랑지 하나와 오렌지 주스 한 모금을 마셨을 뿐이다.
“오메, 배부른 거……”
청년은 여전히 활짝 웃고 있다.
“경주야…… 경주야…… 경주야……”
아낙은 연이어 아들을 불러본다. 그러나 대답은 없다. 달빛만이 무더기무더기 쏟아져내려 무덤가에 심은 봉숭아 꽃봉오리며 이파리와 줄기, 대궁을 하나하나 비춰줄 뿐이다.
“경주야……”
다시 불러본다. 여전히 대답이 없다. 아낙도 더 말이 없다. 달빛만이 덩이덩이 흘러내려 아낙의 희끗희끗한 파마머리와 깃 넓은 흰 저고리와 동그랗고 작은 등을 비추어준다. 아낙은 가만히 앉아 있다.
“난 암시랑토 안해야. 참말로…… 다 잊어부렀다. 참말로……” 다시 정적이다. 달빛만이 풍성하고 찬연하다.
“춥지야?”
한참이나 지난 뒤 고개를 든 아낙이 머리맡으로 던진 말이다. 길고 긴 한숨을 토해낸다.
“진작 와보았어야 할 것인디……”
아낙은 함지에 든 보퉁이를 주섬주섬 뒤진다.
“오덜 못햐, 오덜 못햐, 오덜 못햐…… 싫어라…… 꿈인디, 꿈인디, 하고는 또 하루를 속이고, 또 하루를 속이고, 바람소리만 휘이 지나가도 이제 오나, 내 자석이 이제 오나, 잠을 못 자…… 그날부터 오늘까지 문을 걸들 못하고 너를 지다리는디…… 어짜끄나, 어짜끄나…… 내 새끼를 어짜끄나…… 콩밭 매면 콩밭 가에서, 깨밭 매면 깨밭 가에서, 날마다 니를 지달리는디, 내가 먼 배포로 여글 성큼성큼 오겄냐?”보퉁이에 든 흰 옷가지를 꺼내든다. 내의 한 벌이다. 아낙은 옷가지를 무릎 위에 올려놓고 정성들여 꼭꼭 갠다. 러닝셔츠를 가지런히 개어 접고 또 접고, 팬티를 가지런히 개어 접고 또 접는다. 조그맣게 접은 옷가지를 비석 아래 놓아두고 호미를 집어든다. 상석 너머로 몸을 기울여 봉분 밑동에 호미날을 대더니 찬찬히 흙을 파헤친다. 손을 뻗어 흙을 헤쳐 흙속에 묻혀 있던 옷가지를 꺼낸다.
“따뜻하지야?”
아낙이 흙속에서 파낸 옷가지는 겨울 내의 한 벌이다. 땅에 묻힌 채로 눈과 비를 고스란히 맞으며 한겨울을 보낸 옷가지인 것이다. 그 흙투성이를 보퉁이에 담고 새 내의를 집어든다.
“요놈은 젤로 시원한 것인께. 내가 젤로 좋은 놈으로 골랐어야.” 호미를 들어 다시 흙을 헤집어 파고, 새 내의를 구덩이 속에 꼭꼭 눌러넣은 다음, 흙을 덮어 묻는다.
“다시는 안 올 것이여…… 나는 참말로 다시는 여글 안 올 것이다.” 흙투성이 겨울 내의와 빈병이며 깡통, 비닐조각을 다 쓸어 호미와 함께 함지에 담고, 그러고서 아낙은 다시 무덤 앞에 쪼그려 앉는다. 두 손으로 비석을 밀치며 아낙은 다시 한번 아들의 이름을 불러본다.
“야야, 아그야…… 경주야이…… 경주야이……”
아낙은 쳐든 얼굴에 하나 가득 웃음을 짓는다.
“그려……”
흙 묻은 손을 들어 아낙은 자신의 목을 더듬는다.
“요것은 쩌그, 저번 달에 에미 환갑이라고 며느리들이 해준 것이여야. 으짜냐? 좋쟈?”금목걸이를 꺼내 내밀어 보인다.
“요란시런 잔치까장은 아니고…… 환갑이라고 서울로 가서 큰 식당에서 식구끼리 잔치를 해부렀어야. 으짜냐? 좋쟈?” 달빛은 아낙의 목 언저리에서 진저리친다.
“느그 동상들은 큰형 생각함시로 모다 울었는디, 나는 울덜 않았다. 나는 요놈 조놈 맛난 음식을 다 묵었어야. 나는 울덜 않았어야. 진작…… 나는 진작 다 잊어부렀응께.”아낙은 허리를 짚고 무덤 앞에서 몸을 일으켰다. 소쩍새가 운다. 흰 수건을 틀어 똬리를 만들며 사방에 가득 찬 봉분을 둘러본다. 소쩍, 소쩍, 소쩍, 연이어 소쩍새가 운다. 달빛은 낱낱의 봉분을 하나하나 어루만지며 묘역 가득 고여 있다.
“잘 자그라, 잉. 잘 자, 잉. 다씨는 안 올 것잉께. 잘 자, 잉.” 똬리를 머리에 얹고, 함지를 인다. 걸음을 옮기기 전 다시 한번 둘레를 둘러본다.
“잘들 있으씨요, 이……”
돌아서던 아낙은 다시 몸을 돌려 쪼그려 앉으며 한쪽 손을 뻗어 유리상자 속에 든 청년의 얼굴을 어루만진다. 청년은 여전히 활짝 웃고 있다. 봉숭아 두 그루는 달빛 속에 꼿꼿이 서 있다.
비로소 아낙이 몸을 일으켰다. 아들의 무덤가를 돌아서 아장아장 걸어간다. 무덤 사이를 지나쳐 묘역에서 차도로 내려서는 층계참에 이르자 달이 구름장 속으로 숨어들었다. 길가에 줄지어 선 나무와 수풀 때문에 길은 몹시 컴컴해졌다. 하늘 가장자리로 몇점의 별만이 흐느끼듯 깜빡이고 있다. 아낙이 공동묘지를 거의 다 벗어날 때쯤에야 달은 구름장 속에서 튀어나왔다.
“그려……”
앞에 펼쳐진 내리막길이 훤하게 드러나 보인다. 아낙은 그제야 고개를 틀어 자신이 걸어내려온 길을 돌아보았다. 무덤은 보이지 않고, 그 위로 내리치는 달빛만이 청청하다. 한껏 중천에 뜬 둥글고 커다란 만월은 밝디밝다.
“그려…… 그려…… 달은 열엿새 달이락 안 한가.”
아낙은 다시 고개를 틀어 홀로 돌아가야 할 먼길을 멀리 바라보았다. 달빛이 문득 아낙의 검고 주름진 볼에서 빛났다. 양쪽 볼을 타고 흘러내리던 둥글고 굵은 눈물 두 방울에 달이 담긴 것이다. 눈물방울이 굴러내리자 그 달은 금방졌다.
첫댓글 오랜만에 올려주셨네요, 잘 읽을게요. 고맙습니다.^^
이 글에서의 달빛은 검나 가슴 찢어지는 슬픔일세... ㅠㅠ..
다시 읽어도 또 헤픈 눈물이 나와. 달빛 보고 짖는 개처럼 컹컹 울며 읽었어야. 내 아무리 그래도 저 아낙의 두 방울 눈물의 농도에 감히 대기나 하겄냐...
대답없는 그리운 이를 두고 혼잣말을 뱉어 내는 심정... 암도 모르제. 눈물이 곧 피여~!!!
희숙이는 읽고 싶은 글도 참 자~알 찾아내드라. 전남사람들외의 숱한 입들에서 아무리 쳐발린 말들이 쏟아져 나와도 5.18은 영원히 우리 전남사람들만의 기가막히는 서러움이라는 걸... 가족들 외에는 주변에 전라도 사람이 거의 없는 오랜 서울 생활에서 뼈가 아리도록 순간순간 절절히 느끼면서...이 잔혹한 영남민국은 절대 해결 안 될꺼야. 참 관심들 있으면 `개마고원'의 /영남민국 잔혹사/를 한 번쯤 읽어봐도 좋을 것 같애.우리 전라도사람들 만이라도. 광주일고 출신` 김욱 '서남대학교 교수가 저자야.
영자나 루미처럼 긴 글 잘 읽어 주는 칭구들이 있으니 품 팔아서 퍼다 나른 보람이 있네. 이렇게 후감 남겨 주니 또 반갑고. 말은 안 해도 표시 안나게 읽고가는 칭구들도 있겠지? 네가 권한 책 (개마고원출판사에서 찍어낸 건 가 보지?)도 함 찾아 읽어 볼게.
16년만에 아들을 만나러 가는 날이 왜 그날인지, 또 망월의 밤이어야 하는지 설득력이 좀 떨어지는 게 아쉽지만, 읽으면서 내내 '이게 내 일이라면 나는 어쨌으까... 암만, 가슴 무너져 한 줄도 쓰기 힘들었것제. 아들놈의 부드러운 뺨을 어찌게 잊을 수 있단 말이여.' 하면서, 눈물도 찔끔찔끔... 하면서.
이글을 읽다 보니 생각나는게 있네. T.V.를 보는데 진도쪽 할아버지가 나와서 본토발음에서 조금도 안 벗어난 향토어로 정신없이 말씀을 하시는 데 듣고있던 신 동엽 M.C.왈 ``이럴 때 자막의 고마움을 엄청나게 느낄 수 밖에 없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