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도 |
월 |
등반자 |
대상(코스) |
등정여부 |
1927 |
9~10월 |
임무, 飯山達雄 |
오봉산, 수정봉, 관음봉 |
금강산 첫 암벽등반 |
1929-1930 |
동계 |
임무, 飯山達雄, 森田定夫, 岩永春市, 宮川泰 |
비로봉, 만물상, 삼선암 |
첫 동계등반, 비로봉 등정 실패 |
1930 |
여름 |
各務良幸, 河上壽雄, 박석윤, 福田, 鈴木 |
발봉, 집선4봉, 수정봉 |
등정, 집선 4봉(各務, 河上) |
1930 |
여름 |
河上壽雄, 寺師壽一 |
집선봉 S7 |
S7 등정 추정 |
1930 |
10월 |
아처, 매크리 |
석가봉, 마하연암 암봉 |
등정 |
1930~1931 |
동계 |
임무, 飯山達雄 |
비로봉(외금강) |
동계초등 |
下出繁雄), 寺師壽一 |
비로봉(내금강) |
동계 내금강코스 초등 | ||
1931~1932 |
동계 |
임무 |
비로봉(내금강) |
단독등반, 실패 |
1932 |
1월 |
飯山達雄, 飯沼貢 |
비로봉(외금강) |
등정 |
1월 |
下出繁雄, 中村兩造, 仙波泰 |
비로봉(내금강) |
| |
1932 |
7월 |
泉靖一, 原正典 |
채하봉, (1351m봉(동쪽 중앙)-육선봉-채하봉) |
등정 |
8월 |
도쿄대산악부 |
S1, S2, S3, 세존봉 |
등정, S2(등정 의문) | |
1933 |
3월 |
泉靖一 |
S3 |
동계 단독 등정 |
4월 |
飯山達雄, 泉靖一 |
1351m-S1 |
종주 | |
6월 |
飯山達雄,, 吉田, 高草木 |
S3 |
등정 | |
8월 |
飯山達雄, 泉靖一 외 1명 |
S3(남릉) |
등정 | |
9월 |
飯山達雄, 泉靖一 외 1명 |
S1-S2 안부 |
종주 | |
1935 |
4월 |
飯山達雄, 泉靖一, 吉田, Christian Hupfer |
S1, S2 |
등정(吉田 1봉에서 하산) |
8월 |
谷川, 田川 법정대산악부원 Christian Hupfer |
S3(남릉) S1 S2 |
등정 등정 꿀르와르에서 폭우로 하산 |
1927년 임무와 이이야마의 금강산 첫등반은 이후 1929년 12월의 동계등반이나 이이야마가 1928년부터 철도국 선전과에서 금강산 개발 업무를 담당한 것으로 보거나 등반 대상지가 어려운 난이도는 아닌 것으로 판단되어 사실일 듯하나 시기는, 이이야마의 초기 기록이 기억에 의한 오류가 잦은 것처럼 1928년일 가능성도 있다.
1929년~1930년 첫 금강산 동계등반은 『山書』(2020)에 「근대등반의 선구자 임무(林茂)」에서 자세히 언급하였듯이 임무를 리더로 이이야마, 미야카와(宮川秦) 등 (舊)조선산악회 회원들에 의해서 시도되었으며 비로봉 정상 등정에는 실패하였으나 삼선암 동계 초등을 하였고 1931년 1월 1일 동계 비로봉 초등을 외금강코스 스키등반으로 이뤄냈다. 임무는 등반대의 리더로 (구)조선산악회를 이끌었고 1931년 10월의 조선산악회 창립에 발기인으로 (구)조선산악회원들과 참여(총 14명 참석자 중 (구)조선산악회원이 5명, 철도국 직원이 7명)하여 임원투표에도 4표를 얻어 조선산악회 창립을 이이야마와 함께 주도한 것으로 여겨진다.
1930년의 박석윤과 카가미(各務良幸) 일행의 등반은, 당시 금강산을 개발하며 국립공원으로 지정코자 하였는데 그 일환으로 홍보영 영화 촬영 차 박석윤의 요청에 의한 것이다. 카가미(各務良幸)는 1929년 몽블랑의 몽모디(Mt. Maudit 4,465m) 동남릉을 초등한 산악인으로 당시 조선인으로 알프스 몽블랑 초등자(1927년)인 매일신보 사장 박석윤이 동행하였고 이 영화는 매일신보 사옥에서 상영하였으며, 조선산악회에서 1932년 12월 9일 상영한 <금강산의 록클라이밍(金剛山のロッククライミング)>이 이 때 촬영한 것으로 생각된다. 이 등반을 기획한 박석윤(당시 매일신보 부사장)은 집선4봉을 2/3 가량 등반하였고 수정봉 등정도 하였다. 등반에 참여한 카가미와 카와카미는 일본의 대학산악부의 새로운 등반 대상지로 집선봉이 각광 받을 것을 말하였다. 이들이 오른 집선봉 제4봉은 동석동에서 집선봉쪽으로 캠프사이트를 마련하고 그 배후의 암봉인 집선봉 중앙봉 제4봉(C4)을 오른 것으로 추정되나 명확치 않다.
이즈미세이치는 이 등반에 대해 1929년에는 카가미(各務良幸)와 카와카미(河上壽雄)와 테라시(寺師壽一) 그리고 1930년에는 카와카미, 테라시(寺師壽一)로 『朝鮮山岳』 4호(1937)에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오류로 보이나 1930년의 카와카미, 테라시의 등반 사진을 보고 집선봉 S7 등반 사진이라고 구체적으로 얘기하고 있어 카가미 일행의 등반 이후 추가 등반일 가능성이 있어 기록에 포함시켰다.
1931년 12월 동계 임무의 내금강 단독등반은 폭설로 실패하였으나 매일신보에 금강산 비로봉 스키코스 개척으로 소개되었고 그는 인터뷰에 비로봉을 스키로 횡단이 가능하다고 하였다. 임무는 지금까지 알고있었던 것과는 다르게 당시, 금강산 비로봉 동계 초등자로서 상당히 알려진 인물인 듯하다.
경성제대산악부의 이즈미 세이치는 1932년 7월에 경성중 산악부원이었던 하라(原正典)와 1351m봉 동쪽 중앙을 거쳐 육선봉을 지나 채하봉을 등정하였다. 일본 도쿄대키산악부의 1932년 등반은 본격적인 금강산 집선봉 등반 시대를 열었는데, 보고서에 따르면, 8월에 도쿄대산악부가 금강산으로 원정등반을 와서 1351m봉, 집선봉 중앙 S1, S2봉을 등반하였으나 이즈미를 비롯한 조선산악회원들은 S2봉 등정은 전위봉 등정이라는 의문을 제기하였고 S3와 세존봉을 올랐다고 적고 있다. 1933년 3월에는 이즈미가 단독으로 S3봉을 등정하였고 그 해 4월에 이야마와 이즈미가 1351m봉-S1을 종주하였다. 6월에 이야마와, 요시다(吉田), 타카쿠사기(高草木)가 S3를 올랐다. 또 8월에는 이야마와 이즈미 외 1명이 S3 남릉을 9월에 S1~S2 안부까지 종주하였다. 타카쿠사기는 1932년 조선산악회에 입회한 8명 중에 한명으로 흥남 조선질소비료회사 산악부 대표인 타카쿠사키(高草木伊達)이며 요시다도 조선산악회 회원이다.
1935년(쇼와 10년) 4월 이야마, 크리스찬 후퍼, 이즈미, 요시다가 S1(요시다는 S1 등정후 하산)을 올랐고 S2등정후 안부에 이르렀다. 8월에는 타니카와(谷川)와 타가와(田川)가 S3 남릉, 법정대산악원(일본)이 S1 등정하였고 후퍼 S2 안부에서 폭우로 하산하였다.
크리스찬 후퍼(Christian Hupfer, 1906~1960)는 경성대 독일어, 라틴어 강사이며 체조를 지도하였다. 돌로미테에서 암벽등반을 한 경험이 있으며, 집선봉 S2봉을 그의 클라이밍 안목으로 등반 루트를 찾아 올랐고 이를 근거로 이즈미 등은 동경대의 등반기록이 오류임을 주장하고 있다. 그는 등반 당시 집선봉 암벽에서 발란스 클라이밍(Balance Climbing)을 선보였고 그가 조선산악회와 경성제대 산악부원들과 등반하며 돌로미테의 인공등반 기술을 전수하여 당시 클라이머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생각된다. 1935년부터 1942년까지 경성제대에 근무하며 서울근교산에서 한국인 클라이머들과도 마주쳐 한국인들도 그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고 한다.
Ⅱ. 조선에서의 이즈미 세이치(泉靖一) 활동과 금강산 등반기
1. 조선에서의 이즈미 세이치
이즈미 세이치는 당시 조선에 ‘알피니즘’이 유입된 1930년부터 해방 전까지 경성중, 경성제대, 조선산악회원으로 많은 초등반을 하였다. 그 중에서 1933년 5월 서울근교산 등반사의 획을 긋는 도봉산 주봉 초등을 경성중 하라(原正典)와 이루었고 1935년 12월 경성제대산악부를 이끌고 동계 한라산 초등을 하였으며 1932년 금강산 채하봉 초등반을 시작으로 집선봉의 여러 코스를 등반하였다. 1930년대 중반 이전의 한국산 초기 등반사에, 아처와 임무 그리고 임무와 이이야마의 초등반에 이어 오꾸노 마사이(奧野正亥)와 큰 족적을 남겼다.
이즈미는 1930년대 중반 이후 학술탐사 활동에 주력하는데 이는 1935년 말 제주도의 동계등반 대장으로 동료를 잃고 그곳에서 지역 무속인을 만나 인류학에 관심을 갖게 되며 인류학을 전공하기로 결심하면서부터다. 1936년부터 37년까지 제주도를 여러 차례 방문했고 1938년 「제주도: 그 사회인류학적 연구」를 졸업논문으로 제출했다. 1938년 경성제국대학 몽강학술탐험대에 참여하여 내몽고와 소오대산을 조사하였고 또 대흥안령에 가서 오로촌족을 조사하였다. 1943년에는 해군성의 요청으로 이이야마와 서뉴기니자원조사단의 일원으로 참여하였다. 이 탐험은 순수한 학술조사가 아니라 전쟁 수행을 위한 자원조사 목적으로 이 조사계획은 일본군이 최대의 점령지를 확보한 시기에 입안된 것으로, 총력전연구소(總力戰硏究所’)의 구상을 바탕으로 해군이 서뉴기니에 기지를 마련해 장기전에 대비한 계획의 일환이었고 여기서 물자운반 방법은 1942년, 백령회원이 주축이 된 동계 마천령종주 백두산 등반시 익혔던 극지법 등반 방식을 사용하였다고 이이야마 는 얘기(飯山達雄, 1970, 『山族・海族:西イリアンに見る文明社会の原型』, 東京:毎日新聞社)하고 있다. 1945년 경성제국대학 대륙자원과학연구소가 신설되고 그 촉탁이 되어 1차 조사대로 네이멍구 베이징에서 조사를 하였으나 패전이 되어 중지하고 귀향하였다. 일본은 대동아전쟁이 발발하기 이전부터 총력연구소를 설립하여 인류학자들의 동원을 준비하였고 경성제대 대륙자원연구소는 일본의 대동아공영권 건설과 대동아전쟁 수행이라는 하나의 목표를 수행하기 위해 활동한 연구소로서 이즈미의 해외탐사 활동은 침략전쟁의 협조자 역할이라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더우기 대만에서 활동한 인류학자들은 과거의 일들에 대해 언급한 적이 있으나 한국에서 활동한 인류학자들의 침묵은 그들의 사후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이즈미의 『먼 산들(遙かな山やま)』의 후기인 우메사와(梅槕忠夫)의 「이즈미 세이치의 산과 탐험(泉靖一における山と探検)」에서 당시 조선에서의 등반 활동에 대하여 「알피니스트 시대」 글을 옮긴다.
2. 이즈미 세이치의 금강산 등반
1) 금강산 채하봉 초등반(金剛山 彩霞峯 初登攀)
•대상: 금강산 채하봉(金剛山 彩霞峰)
•코스: 외금강 온정리-동석동(動石洞)-채하봉(彩霞峯)-신금강(新金剛)-온정리
•기간: 1932. 7. 26-7.31(5박 6일)
•대원: 하라 세이노리(原 正典), 이즈미세이찌(泉 靖一), 최영오(崔榮梧, 30세, 人夫)
•일정
날짜 |
일 정 |
7/27 |
온정리(溫井里)-동석동(動石洞)-집선봉(集仙峯 1351m) 서쪽 면의 무명봉(無名峰) 안부 비박 |
7/28 |
계곡-육선봉(六仙峯) 5봉 정상 비박 |
7/29 |
채하봉 정상-만상대(萬象臺)계곡-옥룡굴(玉龍窟) 비박 |
7/30 |
성문동(聲聞洞)-백천교(百川橋)-송도리(松濤里)-(차량)-온정리(溫井里) 숙박 |
2) 금강산 집선봉 등반(集仙峯の 岩場)
•대상: 금강산 집선봉 동북릉 제3봉(S3)
•코스: 외금강 온정리-동석동(動石洞) – 동북릉 제3봉(S3)-온정리
•기간: 1933. 3. 25-4. 2(8박 9일)
•대원: 이즈미세이찌(泉 靖一) 단독등반
•일정
날짜 |
일 정 |
3/25 |
가부토(甲本)의 산행 취소로 단독등반하고자 이이야마(飯山)·요시다(吉田)의 동석동(動石洞) 스키행에 동행 |
3/26 |
외금강 온정리-(식량과 짐을 인부에게 운반 요청)-극락고개-신계천(神溪川)-보운암(普雲庵, 싸락눈 약 2척(약 60cm))-.법기암-(짐 도착)-동석동 정찰-법기암(이이야마 일행은 폭설에 따른 눈사태를 우려하여 온정리로 후퇴) |
3/27 |
법기암-동석동 정찰-온정리(미도착 식량 확인) |
3/28 |
온정리-극락고개-법기암-동석동(S4-5 꿀르와르 눈사태 목격)-법기암 |
3/29 |
법기암(4시 출발)-동석동(합수구 지점, 5시 10분 도착)-계곡 맞은편 S3봉 능선- S3-4 꿀르와르-S3-4봉 안부 도착(10시 반)-S3봉 정면(북쪽 사면)으로 등정- S3-4봉의 안부(12시, 점심)-S4봉 안부(3시)-동석동 합수구 강기슭(4시 도착, 총 10시간 소요-합수구 지점 왕복 추정)-법기암 |
3/30 |
법기암-동석동-법기암 |
3/31 |
법기암-극락고개-온정리 |
4/1 |
온정리 출발(야간열차) |
4/2 |
경성 도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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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즈미의 당시 조선에서의 활동과 등반기 번역글은 山書 31호 게재 예정이며, 글을 쓰기 위해 泉靖一, 1937, 「集仙峯の岩場」(1937), 梅掉忠夫의 「泉靖一における山と探検」(1971), 전경수의 「5. "大東亞戰爭"의 軍屬人類學」, 『植民과 戰爭의 日帝人類學(2) (臺北帝大와 京城帝大의 人脈과 活動을 중심으로)』 등을 인용, 참조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