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물기행 이여성
영원한 인간사랑 ・ 2024. 6. 11. 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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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물기행 이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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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5.30. 23:53조회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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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식사 개척한 최초의 역사화가 이여성(1901~?)
“어쩜, 너무 곱네!”
“영낙없이 선녀다 선녀.”
1940년초 어느날 서울 종로구 옥인동 이여성의 2층 양옥집 앞에는 동네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어 탄성을 지르고 있었다.
고구려·백제·신라 때의 여인들이 그집 베란다에 그 고아한 자태를 화사하게 드러내보였기 때문이다.
이날 이여성의 집에서‘발생’한‘사건’은 아마도 한국 최초의 옥외 패션쇼였을 것이다. 이날의‘패션쇼’는 그가 자신의 연구의 결정체인 <조선복식고>의 사진도판을 만들기 위해 이화여전 학생들을 불러 고증에 따라 만들어진 옷을 입히고 포즈를 취하게 함으로써 생긴 해프닝이었다. 이때 찍은 사진 중 몇장과 그의 고분 속 의습 벽화 스케치, 그리고 연구논문으로 엮어진 <조선복식고>는 귀중한 자료로 지금도 여전히 필독서로 꼽히고 있다.
정치가·언론인 활약도
이여성은 근대적 학문의 기운이 이땅에 스민 이래 시대를 앞선 혜안으로 미술사, 그 중에서도 전인미답의 복식사 분야를 개척해 그 터를 다진 선구적 학자였다. 뿐만 아니라 진보적 민족주의의 입장에선 정치가였으며, 또 기사를 통해 제국주의의 폐해를 고발한 언론인이었고 또한 상고시대부터 조선말까지의 역사를 그림으로 표현한 최초의 화가이기도 했다.
특히 20년대 사회주의 사상에 감화돼 이 이념의 전파와 민족의식 고취에 힘쓰다가 해방이후 여운형의 측근으로 좌우합작·통일전선에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던 그의 일생은 모든 것이 미비하고 어지러웠던 시기에 한사람의 지식인이 사회와 역사를 위해 얼마나 많은 일을 꾸릴 수 있나를 보여준 대표적 본보기였다.
이여성은 1901년 경북 칠곡군 지천면 신동에서 만석꾼인 경주 이씨 이경옥과 윤정렬 사이의 2남4녀 가운데 장남(6·25전란중 인민군 종군화가로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북행길을 택한 서양화가 이쾌대가 그의 남동생이다)으로 태어났다.
대한제국 시절 창원고을 원을 지내기도 했던 그이 아버지가 워낙 대지주였기 때문에 그는 진보적 사회운동을 하는 친구·동지들의 오랜‘물주’이기도 했다.
이여성이 신식공부를 하기 위해 당시 집터 안에 교회·학교·테니스코트가 있었다는 그의 대구집을 떠나 서울로 온 것이 9살 때이다. 이후 보성고보를 졸업하기까지 서울 생활 동안 그는 체조 등 스포츠광으로 활달한 청소년 시절을 보내는 한편, 그림그리기에도 흠뻑 빠져 일기 쓰는 틈틈이 그 내용에 걸맞는 그림을 일기장 여백에 남겨놓고는 했다.
그는 가장 감수성이 예민한 시기에 그림을 통해 자신의 욕구를 표출했고 결국 평생 붓을 드는 삶을 살아 자신의 학문적 이상을 미술사를 통해 풀어헤치는 인생여정을 밟게 됐다.
월북 후에도 <조선미숧사개요> 등 미술사 책을 펴내며 김일성대학 역사학 강좌장으로 후학들을 지도했음에도 그는 그림을 정식으로 배우거나 미술사를 전공하지는 않았다.
나름대로 그림기리기에 어느 정도 자신이 붙으면서 그는 아마도 우리나라 최초일, 상고시대부터 조선말까지를 화폭을 통해 총체적으로 대관하는 조선역사와 연작의 제작에 들어갔다.
이여성의 둘째딸 미생(58)씨는“아버지는 근 30여년간 역사화 제작에 매달렸다”며“작품이 하나 완성되면 가까운 친구들을 불러 품평회를 갖곤 했다”고 전한다.
그가 미술사 가운데서 특히 복식사 분야에 먼저 관심을 갖고 연구하게 된 것은 당시 국학·민속학 연구열이 확산되던 지식인 사회의 분위기에 영향을 받은 탓도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역사화 제작과정에 의습에 대한 철저한 고증이 절실히 요구됐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일부 흑백사진으로나마 더듬어볼 수 있는 그의 작품은 당시 그가 상당한 경지에 이른 화가이자 꽤나‘까탈스럽게’ 공부하던 미술사가임을 엿보게 한다.
보성고보를 졸업한 뒤 곧 대구로 내려간 그는 한동안 사회운동단체인 혜성단의 간부로 활동했으나 1918년, 후일 무정부주의적 무장투쟁을 전개한 의열단의 단장이 된 김약산과 일제 때 ‘좌익계의 모사’라는 평을 들었던 초대 국회부의장 김약수와 함께 중국으로 가 난징의 징링대학에 등록했다.
이들은 경남 밀양의 부유한 우국지사 홍성규에 의해 의형제로 맺어진 사이였다. 홍성규는 어느 날 본명이 김두전·이명건·김원봉인 이들 세사람을 한자리에 모아 이들을 의형제로 맺어주고 독립투쟁의 의지를 잃지 말라고 당부한 뒤 각각 약수(물과같다), 여성(별과 같다), 약산(산과 같다)으로 이름지어 주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이여성은 김약수와 함께 귀국했다. 귀국 직후 그는 독립군에 군자금을 대기 위해 아버지 몰래 막대한 액수의 땅문서를 빼내팔다가 일경에 발각돼 체포되고 말았다.
대구 감옥에서 3년을 복역한 뒤 만기 출감한 그는 곧 일본으로 건너가 잇교대 경제학과에 입학했다. 일본유학은 그에게 사회주의 사상에 대한 인식의 지평을 넓힐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23년 1월 도쿄에서 이여성은 김약수·김종범 등 60여명의 계몽운동파와 사회주의 사상단체 북성회를 조직했다. 이여성은 복성회 동료들과 함께 국내에 사회주의 사상을 전파하는 데 힘을 쏟았는데, 특히 그는 이들 청년 급진주의자들의 주요한 자금원이 되어주었다.
독립군에 자금대다 수감
그의 가족이 전하는 바에 따르면 일본유학 이후 20년대말까지 이여성은 도쿄유학때 연애결혼한 부인 박인애와 함께 상해에서 생활했다. 상해 시절 중국옷을 입고 내내 중국인 행세를 했던 점에 비춰볼 때 그곳에서도 급진운동과 항일운동에 가담했던 것으로 보인다.
상해에서 부인이 두차례 사산을 하자 부인과 함께 귀국한 이여성은 <동아일보> 조사부장을 지내는 등 30년대 내내 언론에 몸담았다.
기자로서 그는 <동아일보>와 <신동아>에 다양한 분야에 걸친 기사를 썼지만 제일 많이 다룬 주제는 약소민족의 해방운동에 관한 것이었다.‘비율빈의 과거와 현재’‘애란의 민족운동, 애란은 영국의 정치적 식민지’‘최초의 약소민족 수삼년 이래 지구전적 상황’‘공업조선의 해부’ 등이 그의 펜끝을 통해 나왔다.
그는 가끔 신문에 풍자화도 그려넣었다. 36년 발표된‘무씨의 진단’의 경우 무솔리니의 아둔함을 소재로 파시스트에 대한 신랄한 비판을 가한, 기지가 돋보이는 작품이었다.
그는 동지들과 출판사 세광사를 만들어 자신의 글을 책으로 엮어내기도 했는데, 소작쟁의 등 당시 조선의 각종 통계가 망라된 <수자조선연구>(김세영과 공저), <애란의 민족운동>, <약속민족운동의 전망> 등이 이 출판사를 통해 나왔다.
그의 본격적인 전시활동은 33년부터 시작됐다. 33년 서화협회에 가입해 그해와 그 다음해 협전에 출품한 이여성은 35년 청전 이상범과 2인전을 가져 화단의 주목을 받기도 했다.
여러차례 협전평을 썼던 안석주는 34년 협저평에서“이여성씨는 문필가로, 화필에도 이만한 역량이 있는가를 의심할 만큼 초인(初人)이 아닌 수완을 나타냈다”고 평했는가 하면, 조각가 김복진은“이여성씨가 장대한 계획 밑에 조선역사의 회화화를 비롯한 것을 소개하여야 되겠다. 이씨의 박식과 독학(篤學)과 윤필은 세칭 범속한 전문가의 지위를 뛰어넘었으며 또 동일히 논할 비례(非禮)를 나는 가지고 싶지 않다”라고 칭송했다.
<동아일보> 폐간 이후 미술사연구에 몰입해 혼자의 힘으로 엮어낸 <조선복식고>는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아 황무지 같던 이 분야를 개간했다는 점과 옛문헌을 정리한뒤 면밀한 과학적 분석적 접근을 시도했다는 점에서“명백한 현대의 고전”(이구열 근대미술연구소장)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여성이 회장으로 있던 복식 연구회의 회원으로 활동했던 단국대 석주선기념민속박물관 관장 석주선씨는“지금도 <조선복식고>만큼 이 분야를 풍속사적 시각에서 폭넓게 , 분석적으로 파고들어 학문적 깊이를 갖춘 책은 드물다”여“이 선생은 퍽이나 진지하게 우리 것을 찾으셨다. 복식회 모임에서 뵈면 워낙 광범위한 지식과 날카로운 분석력뿐 아니라 다감하고 자상한 인간적 체취가 늘 인상적인 분이었다”고 회상한다.
교분이 두터웠던 이광수가 친일파로 변절하자 냉정히 내왕을 끊었던 이여성에게 8·15해방은 엄청난 감격의 순간이었다. 이날 아침 그는, 그 전날 총독부 정무총감 엔도로부터 항복 이후 조선의 치안을 담당해줄 것을 요청받은 여운형을 대신해 한민당계열의 송진우에게 합작을 요청하러 갔다. 이 요청은 거부됐지만 이후 그는 여운형의 정치·사상노선을 충실히 따른‘오른팔’로 활약해 해방공간의 격랑을 좌우합작·통일전선의 노로 헤쳐 나갔다.
45년초 여운형의 추천으로 건국동맹에 들어간 이여성은 해방 뒤 건국준비위원회가 발족되자 문화부장·선전부장에 임명됐고 건준위가 조선인민공화국으로 비약발전하면서 중앙인민위원·선전부장대리로 선출됐다.
11월 인민당이 결성되면서 당무부장·총무부장·중앙정치위원을 역임한 그는 폭넓은 인간관계를 바탕으로 47년 여운형이 암살되기까지 주로 조직 강화와 우익진영 내 인민당 지지자 포섭 사업에 힘을 쏟았다.
영운형의 ‘오른팔’로 지내
이여성의 월북시기는 48년 4월께로 추정된다. 그달 20일 평양의 남북연석회의에 인민당(당시의 근로인민당) 대표 23명이 참석했고, 당시 군정의 좌익에 대한 압력 가중에 따라 이들은 평양에 계속 머물러 남북 제정당·사회단체지도자협의회에도 참석했는데, 이후 그의 행적이 북쪽에서만 나타나기 때문이다.
이여성은 북쪽에서 제1차 최고인민회의 서열 77위, 2차 1백64위에 올랐던 것으로 전해진다. 미술사 연구에 매진하던 그는 55년 <조선미술사개요>(평양·국립출판사), 56년 <조선건축미술의 연구>(〃)를 내놓아 당시 척박했던 북한 미술사학계의 기초를 다지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 책들에서는 마르크스·레닌주의와 강한 민족의식을 변증법적으로 조명해보려는 저자의 노력이 진하게 묻어나오고 있다.
60년대 이후 이여성의 활동과 생사 여부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일설에 따르면 대학 강의시간에 당시 북쪽에서 봉건 잔재로 강하게 비판받던 수묵화의 긍정적 측면을 강조하다 숙청됐다고 한다. 그 뒤 그는 순천 도자기 공장에서 화공으로 일한 것으로 전해진다.
한편 이여성의 3남2녀 가운데 장남 한구(당시 중1), 차남 한수(당시 국5)는 6·25 전란중 그리운 아버지를 만나보려 북행길에 올랐다 남쪽의 가족과 소식이 끊겨 결국 한가족이 부자와 모녀로 나뉘는 이산의 고통을 아직도 당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