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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만리 한반도 둘레길 고구려 길
1차 1월
단동에서 국내성 가는 길은 고속도로와 일반국도등 두 길 있디
요녕성과 길림성을 잇는 내륙 고속도로는 국도에 비해 100km 이상 먼 거리지만 졸본성을
거쳐 당일 국내성 탐방이 가능하고. 국도는 많이 험한 길로. 위화도를 마주한 강변길에서 압록강 상류를 따라 강변길과
내륙이 교차하면서 수풍댐까지 이어진다.
수풍댐에서부터 깊은 산골짝 길이며 산골 곳곳에는 일제 강점기 당시 독립투사들의 근거지 등 볼거리가 많으나 국내성을
거쳐 졸본성까지는 1박을 더해야 하는 시간적 부담이 있다.
오늘 일정은 고속도로다. 국내성까지는 1.000리가 넘는 길로. 새벽 6시경 숙소를 출발한다. 차는 시가지를 벗어나 퉁화 간 내륙 고속도로에
진입하는데, 고속도로에 통행 차량 한 대 보이지 않는다. 30여 분 지나도. 도로에 통행 차량 한 대 볼 수 없다. 40여 분 지나자
반대 차선에서 작은 화물차 한 대 지나는 게 전부다 고속도로를 통째로 전세 낸 기분이며 전설의 도로 같다..
20년 넘게 백두산 여행을 다니지만 아직도 알 수 없는 중국이다.
2.000여 년 전 주몽의 후처 소서노 부인이 온조와 비류를 데리고 남하해 한강 유역에 백제를 건국할 당시
이 길을 따라 내려갔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당시는 굽이길 오솔길이었다.
상행선 하나밖에 없는 고속도로 휴게소에 7시경 도착. 한다. 이곳에도 사람이나 차량 한대 보이지 않는다.
더 넓은 주차장에 우리 팀이 타고 온 차량 1대가 전부다.
편의점 문이 열려 있고 온수는 무료 제공되고 있다. 각자 준비한 컵라면 등으로 조식을 대신하고
생수 등을 팔아주며 미안함을 대신한다.
휴게소를 벗어나, 다시 고속도로에 진입하지만 차는 보이지 않는다. 8시가 넘고 환인 시가지 가까이에서
차들이 간혹 보이기 시작한다.
환인은 고구려 건국 당시 평야를 중심으로 지역 유력 세력들이 자리 잡고 있던 지역으로
고구려 건국 터 졸본성이 자리하고 있다.
환인 시가지 우회길을 벗어나자 졸본성 8km의 안내 표지판이 하나 나오고 전방에 오 녀 산(820m) 정상부 직사각형 형태의
졸본성이 아침 스모그에 가려 희미하게 시야에 들어온다.
졸본성은 자연지형 그대로 살려 축조한 산성으로 초기 왕권 기반이 없던 주몽은 천혜의 건국 터로 보았다.
BC 37년 오 녀 산 정상에 세운 고구려 졸본성은 고구려의 첫 도읍지로 정상부위 동쪽과 남쪽의 경사면이 완만한 두 곳에
성축을 조금 쌓고 북쪽은 200m 가까운 수직절벽 그대로 성벽이다, 남북 길이 800m 동서 너비 약 300m로 직사각형
형태의 정상부 전체가 성 터 자리 다..
광개토대왕 비문에는 홀본성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에 졸본성, 위서 고구려전에는 홀승골성으로 제각기 다르게
기록돼 지금 것 전해오고 있다,. 1996년 첫 발굴 당시 고구려 초기 유물 2.000여 점 발굴되고. 저수지. 망대. 병영 등 건물터가 원형 그대로 남아 있었다. 당시 성내 중앙부에는 작은 샘물터가 원형 그대로 남아있어 2000년 전
고구려의 샘물 맛을 지금 것 전하고 있었다.
9시경 졸본성 주차장에 도착되고, 매표소로 갔으나 많은 눈으로 오늘 입장이 불가하다며 통제한다.
주차장 앞에 자리한 박물관에 입장하기로 한다. 2.000여 년이 흘러 빛을 보게 된 많은 고구려 유물이 전시돼 있고
사진 촬영 금지라며 감시조가 따라붙는다.
2.000여 년 전 당시 고구려 철기문화의 정교함이 드러난 가마솥은 필자가 어릴 적 본 시골 소죽 솥과 똑같아 믿기지가 않았다.
주몽의 설화(삼국사기)
동부여에서 해부루가 죽자, 금와가 왕위에 오른다. 금 와는 사냥에 나섰다가 우발수에서 유화라는 여인을 만난다.
유화는 하백의 큰딸이다. 다 큰 처자가 해모수 유혹에 빠져 아버지 허락도 받지 않고 해모수와 혼인해 하백의 분노를 산다.
결국 집에서 쫓겨나 우발수에 혼자 살고 있었다. 금 와는 이를 이상히 여겨 유화를 데리고 대궐로 온다.
대궐에서 유화의 몸에 항상 빛이 따라다녔고 얼마 후 유화는 큰 알을 하나 낳는다. 당황한 금와왕은 알을 내다 버렸으나 온갖
새들이 날아와 깃털로 감싸 주었다. 얼마 후 그 알에서 아이가 태어났다. 아이는 크면서 활을 잘 쏘아 주몽이라 했다.
금와왕의 일곱 아들들이 활을 잘 쏘는 주몽을 질투해 죽이고자 모의한다. 이때 주몽은 어머니 유화 부인의 권유를 받고
부여를 탈출하게 된다. 주몽은 송화강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오다 건국을 결심한 곳이 이곳 환인 오 녀 산 정상이다(삼국유사).
이곳에서 주몽은 운명의 소서노를 만난다.
소서노는 졸본 지역의 부잣집 딸로 우태와 결혼한 여자다. 이후 우태가 일찍 죽자 비류와 온조 두 아들을
키우며 과부로 살았다.. 소서노는 유부남 주몽과 재혼한다. 부여에서 예 씨 부인과 이미 결혼한 주몽은 졸본 지역에 뿌리를 내리기
위해서는 재물이 많은 소서노의 도움이 필요했다.
소서노의 내조와 재물 덕에 주몽운 오 녀 산에 쉽게 고구려를 건국했다. 이때가 BC 37년 주몽의 나이 22살이다.
훗날 주몽은 부여에 두고 온 본처 예 씨 부인과 아들을 불러와 태자로 삼고 왕위를 물려준다 이때 태자가 고구려 2대 왕 유리왕이다.
심한 배신감에 소서노는 두 아들 비류와 온조를 데리고 남하해 한강 유역에서 온조를 내세워 백제를 건국했다.
소서노는 남편과 아들을 도와 두 국가를 건국하는 여걸로 우리 역사에 신화적 인물이나 후세 사가들에게
큰 조명을 받지 못한다. 한 여자를 철저히 농락한 주몽은 고구려의 건국 왕으로 지금 것 추앙받고 있다.
북간도 겨울 여행은 늘 변수가 따른다. 많은 눈으로 오늘 졸본성 입장이 불가했다.
아쉬움을 남기고 다시 환인시가지 우회 도로를 빠져나와 고속도로를 타고 퉁화로 간다.
환인서 퉁화까지 200여 리(93km)로 한 시간여 소요되고 퉁화시내에 접어들자 도로에 차들이 많이 늘고 시가지는
활기차다. 퉁화시는 길림성 가장 남쪽에 자리한 도시로 3분의 2 이상 산으로 둘러싸여 장뇌삼 등 한약재가
많이 생산되며 우리 한반도 지형과 흡사하다
백두산에서 발원된 백두정간의 산줄기가 내륙도시 퉁화시와 강변도시 집안시를 동서로 갈라놓았다.
남쪽 백두대간의 산줄기는 한반도 영동 영서 지역을 동서로 갈라놓았다.. 원주에서 대관령을 넘으면 동해 바닷가 강릉시가 나오듯 그렇게 이해하면 된다.
퉁화에서 국내령을 넘으면 압록강변 작은 퉁구분지가 국내성이 자리한 집안시다,
12시경 퉁화에 도착되고 곧바로 식당으로 이동한다.
조식을 거른 탓에 각종 요리를 넉넉히 시켜 조식 겸 중식 자리를 가진다. 중국도 성장에 따른 식생활 물가 거품이
만만치 않다.
중식을 마치고 오늘의 마지막 종착지 국내성으로 피치를 올린다..
퉁화에서 국내성까지 300여 리(115km)로 두 시간 넘게 소요된다. 한산한 도로를 따라 국내령을 넘는다.
산비탈 곳곳에 장뇌삼 재배단지들이 많이 보인다. 고려인삼의 원산지가 본래 이곳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대관령을 넘으면 구릉지를 개간해 심어 놓은 고랭지 채소나 감자 옥수수 등을 많이 볼 수 있는데 분위기가 흡사하다,
2시가 넘자 국내성이 자리한 집안에 도착한다 , 집안시는 북한의 만포시와 압록강을 사이 두고 마주한 도시로 고구려 역사 왜곡의
대표적 도시다.
먼저 시가지 중심에 자리한 박물관으로 이동한다.
박물관 내부는 텅 비어 있고 관람객은 우리 팀이 전부다. 이곳에도 사진 촬영 금지라며 감시조가 따라붙는다.
국내성에서 발굴된 철기. 석기, 토기 등이 유리함 속에 전시돼 있으나 졸본성 유물과 별반 다를 게 없다.
밀착 감시조의 눈초리에 기분만 상한다. 사진 한 장 남기지 못하고 10여 분이면 관람이 끝난다.
우리 문화 유물을 관람하고 돈 주고 감시당하고 사진 한 장 남기지 못하는 현실이 못내 아쉽다
국내성 도심 거리는 깔끔하게 정비돼 있는데. 60년대 수학여행 당시 경주를 보는 듯하다
국내성터. 박물관. 호태왕비. 태왕능. 장군총과 , 5개 춤 무덤 등 고구려 중요 유적들이 2km 범위 내 도심에 집중돼 있어
도심을 걸어서 관람이 다 가능하다.
광개토대왕비
호태왕비로 이동한다. 호태왕비는 국내성 동북 방향 약 2km 지점 태왕촌에 자리하고 있다 고구려 19대 왕으로
광개토대왕 재임기간(391 ~ 412)중 영토 확장의 업적을 기리고
왕릉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해 그의 아들 장수왕이 414년 8월 29일 세운 석비로 정식 시호는 국강상광광개토경평안호태왕'비다
또는 호태왕비'라고 한다.
높이 6.39m 너비 1.35m ~ 2m며 , 무게 37톤으로 동양 최대의 비석이다. 고구려 특유의 필체로 1.4∼1.5cm 크기의 글이
새겨져 있고 글체가 마모된 자리에는 5mm 정도 깊이의 흔적이 남아 있다..
4면에 모두 44행 1,775자의 글이 새겨져 있으나 141개의 글은 현재 마모 돼 판독이 어렵고 한, 중. 일 북한 학자들이
지금껏 판독에 공을 들이고 있다.
중국공산당은 동북공정 프로젝트 이후 한국인의 접근을 철저히 차단시키고 자신들의 입맛대로
조작 내지 왜곡을 일삼다. 2004년 국내성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재시킨 이후 자신들의 역사라는 자신감을 얻고
이제 겨우 우리 한국인들에게 공개되고 있다
호태왕비는 고구려와 발해가 존립할 당시 국가 차원에서 신성시되고 보호됐으나, 926년 발해가 우리 역사
무대에서 사라진다. 훗날 조선 왕조가 들어서고 세종대왕 당시 왕실 조상들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용비어천가를
편찬할 당시 조선 왕실에서 압록강 북쪽에 큰 비석이 하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고구려의 비석임을 알지 못했다.
금나라 어느 황제의 업적을 기록한 비석으로 잘못 이해하고 만다.
청나라 등장 이후 백두산과 북간도 일대는 청나라 발상지로 선포되고 봉금제를 실시함에 따라 사람들 출입이 금지된다.
이때부터 북간도 전역은 200년 넘게 사람이 살지 않는 삭막한 지대로 변해 갔다.
19세기 청나라 말기에 이르러 봉금제가 해제(1881년)되고 뒤이어 조선에서도 도강령을 해제한다.
이때 국내성에 조선인들이 가장 먼저 찾아들었고 호태왕비를 발견하지만
이들은 비석의 중요성을 알지 못했다. 당시 일본은 대륙 침략의 본색을 드러내며 일본군 중위 사쿠 오를 이곳에 스파이로
파견해 첩보 활동 중 호태왕비를 발견하고 사쿠 오는 먼저 비문을 탁본해 일본으로 반출한다. 이후 약 5년에 걸쳐 일본 육군
참모부가 주도하고 민간 전문가들을 동원해 비밀리 비문을 연구한 후 일본은 왜곡 조작된 비문 판독 결과를 발표한다..
비로소 호태왕비가 세상에 알려지나 국운이 위태로운 조선은 특별히 대응이 없었다.
비문 내용에 관심을 보인 쪽은 당시 일본 학계로. 비문 내용 가운데 이른바 신묘년조(辛卯年條)라 불리는 조작된
탁본 글체 때문이다.
당시 일본은 조선의 침략과 지배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역사적 명분으로 강조되던
임나일본부설을 확인 뒷받침하는 결정적 증거라며 왜곡된 탁본 글체를 들고 나온 것이다.
임나일본부란 일본이 4세기 후반경 한반도 남부 지역에 진출해 백제, 신라. 가야를 지배했는데 특히 가야 임나라는 지역에
지배 기관을 두고 6세기 중엽까지 3국을 직접 지배하고 562년 신라에 쫓겨 돌아갔다는 내용들이다.
즉 일본은 서기 369년부터 562년까지 200여 년간 이들 3국을 직접 지배했다는 주장으로 남선경영설'이라고도 한다.
일본은 이를 통해 일본 고대사회가 크게 발전돼 있었다는 왜곡된 논리와, 한편으로 조선과 일본은 같은
뿌리에서 태어났다는 일선 동조론을 펼치며 한반도 침략과 식민 지배를 정당화하려는 논리로 이용했다.
그러나 임나일본부라는 단어는 6세기 초 일본사기에 간혹 나오는 단어나 조선의 문헌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었고 존재 여부조차
의심되었다.. 한 세기 가까이 훌쩍 지나 북한 학계 김석형 선생이 분국설을 들고 나온다.
백제가 일본으로 건너가 백제의 식민지라 할 수 있는 분국을 일본 곳곳에 수립할 때 임나일본부는 일본 내 임나라는 지역에 수립된 백제의
분국이라며 정반대 주장을 내놓는다.
또 호태왕 비문에 마모된 141자 자리에는 일본군이 초기 탁본 당시 석회로 글을 만들어 부쳐
글체가 조작되었다는 주장을 함께 제기했다.
이후 일본 학자들은 가야밎 백제와 잦은 교류를 들어 가야 지역에 일본인이 집중적으로 거주하자 이때 자국민을
통제하는 행정 기관이지 지배 기관은 아니다며 실토했다.
사쿠오가 마모된 자리에 석회를 발라 글체를 만들어 부쳐 탁본해 반출한
쌍구가묵본(新羅城城倭滿倭潰城)에는
일본군이 신라성에 가득 차고 일본이 신라를 궤멸시켰다.”라고 돼 있다. 그러나 100여 년이 지나 석회로 만들어 부친 글이
자연현상으로 떨어져 나간 뒤 1989년 중국 학자 왕첸에 의해 만들어진 탁본에(新羅城 □城倭寇大潰城)는 신라성에 들어온 일본군이
고구려 원정군에 크게 궤멸 됐다.라고 드러난다. 한 세기 전 일본이 탁본한 쌍구가 묵본과는 정반대의 뜻을 가진 원형 글자가
100여 년이 지나 다시 살아나면서 신묘년에 대한 논란의 종지부를 찍는다.
한국 팀이 입장하면 어김없이 감시조가 따라와 사진 촬영을 막고 내부까지 따라 붇어 뒷짐을 지고 지키고 서 있다..
장물을 노출시키는 초조함이 그대로 묻어 있다. 기분 참 더럽다.
광개토대왕비
근래 세 번째 고구려비가 또 발견되었다.
2012년 7월 29일 국내성 집안시 마선향 마선촌 우안 강가에서 한 농민이 우연히 땅 속에 박힌 고구려 석비를 발견한다.
고구려비가 발견된 것은 호태왕비와. 충주 고구려비에 이어 이번이 세 번째다. 제작 연대는 호태왕비 이후로 보며
화강석에 다듬어진 높이 1.73m 무게 464.5Kg의 작은 석비다
현재까지 알려진 비문 내용에는 역대 왕들의 능에 비석을 세우고 안전하게 지키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고 한다.
현재 집안 박물관에 보관 중이며 중국 측은 이를 공개하지 않고 있다. 이 또한 동북공정의 완결판을 노리는 가짜일 수 있다고
일부 우리 학계서 주장하지만 발견 과정 등을 살펴보면 진품일 가능성이 매우 크다고 한다.
얼마 전 새로 발견된 고구려 석비 확인차 국내 유명대학 고구려 역사 학자의 국내성 답사기를 온라인상 접했다.
학자는 답사기를 통해 국내성 광개토대왕비는 태조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 당시 발견했다며 추정을 넘어 이것을 기정사실로
답사기에 기술하고 있다..
이성계는 음력 4월 18일에 서경을 떠나 음력 5월 7일 압록강 위화도에 도착한다
위화도에서 압록강 물이 불어나 강을 건너기 어렵다며 진군을 중단하고 음력 5월 22일 회군을 결행했다는
기록이 조선왕조실록에 실려 있다.
이성계가 위화도에 머문 시간은 15일이다. 위화도에서 국내성 가는 길은 일단 압록강을 건너야 한다.
강을 건너면 요동반도와 국내성은 정반대 길이며 국내성은 압록강 상류를 따라 험준한 산골길을 따라가야 한다.
지금도 위화도에서 압록강 건너 국내성 가는 길은 한 길밖에 없다. 현재도 산골 길이 많이 험하고 혼강과 지류 등을 몇 번식
건너야 하는데 600여 년 전 당시는 길조차 찾기 어렵고 강을 건너기도 쉽지 않던 험준한 길이다..
위화도서 국내성까지는 280여 km로 왕복 1400(560km리다. 마라톤 풀코스를 매일 한 번식 뛰어도 14일 걸린다는 계산이
나온다. 척후병이 적지에 말 타고 갔을 리 없고. 적국으로 들어가려면 최소한의 무장은 했을 것이다.
이게 가능한 일인가? 척후병이 적의 동태를 살피러 갔다면 요동 방향으로 갈 것이지 정반대 방향으로 갔을 리 없고
반역을 앞둔 역적 무리들이 문화유적 답사 갔을 리는 더더욱 없다.
압록강 물이 많아 불어나 강을 건너지 못하고 진군을 중단한다라고 조선 왕조 실록은 정확히 기록하고 있고. 또 반역의 깃발을 들고
회군을 결정한 뒤 척후병을 강폭이 넓은 압록강 건너 적지에 집어넣을 이유가 없었다.
광개토대왕릉비는 당시 누가 알았는지 또 발견된 경위 등의 기록은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고 단지 용비어천가를 편찬할 때
압록강 북쪽에 큰 비석이 하나 있고 비석은 금나라 황실의 것으로 알고 있었다는 조선왕조 실록의 기록이 있다..
학자의 답사기는 이 기록과도 배치된다.
지금 국내성에 우리 역사 학자들의 존재 자체가 없다. 단지 입으로 떠들어대는 추정만 있을 뿐이다.
어설픈 추정을 넘어 이제 소설을 써대는 우리 역사학자들의 민낯이다.
호태왕비 남서쪽 200여 m 지점에. 태왕릉이 자리하고 있다. 호태왕비서 잔디밭 사이 인도를 따라 잠시 이동하면 좌측에
태왕릉이 자리하고 있다. 태왕릉은 계단식 돌무지무덤이다.
1913년 첫 발굴당시 출토된 “원태왕릉 안여 산고 여악(願太王陵安如山固如岳)”이라는 글이 새겨진 벽돌에 근거해 태왕릉이라
불리게 되고.. 2003년 태왕릉 주변을 재 발굴할 때 “辛卯年 好太王…□造鈴 九十六”이라는 글이 새겨진 청동방울을
비롯해 금동제품이 추가 출토되고 이러한 자료들을 토대로 광개토대왕릉으로 추정하는데 국내 일부 학자들은
고국양왕의 능으로 보며 장군총을 태왕릉으로 추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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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왕릉은 평면의 한 면 길이 66m 높이 15m로 장군총 4배에 이르고 현재 많이 허물어지고 훼손된 상태다.
널방은 맨 꼭대기 층에 자리하고 있는데 널길이 딸린 무덤으로 널방은 인공으로 다듬은 석재로 축조되고
가로 3.24m, 세로 2.96m로 장방형에 가까운 방형이며 천장은 맞배지붕 형태로 마감되었다.
조상의 봉분에도 효를 다하는 우리 전통문화와 달리 지금 중국 측 임시 묘지기들이 관리 소홀로 태왕릉 봉분 위는
방문객들의 발길이 잦아 길이 나 반들반들하다. 묘지기 주거터라도 우리가 하나 마련해 줘야 할 것 같다.
태왕릉
장군총
태왕릉 탐방을 마치고 다시 입구로 나온다.
태왕릉 입구에서 동북쪽 약 1km 지점 우산하 고분군에 장군총이 있다.
장군총은 77(413~490) 년에 걸쳐 축조된 고구려의 대표적 기단식 돌무지 돌방무덤이다
장군총이 차지한 면적은 860m² 높이는 12.4m로 피라미드 형태의 무덤으로 늘길 입구는 4층 남서쪽 계단
가운데 나 있고 널방까지는 길이 8.3m 폭 2.7m로 널방에서 밖으로 나오면서 늘길은 점차 넓어지는 형태다.
널방은 4층이며. 바닥면 가로 5.4m 세로 5.5m, 높이 5.1m다 널방의 4면 벽은 7층 가까이 긴 돌을 기둥으로 세우고,
그 위에 한 덩어리 평평한 큰 돌을 덮어 7층 꼭대기 외부는 돔 형태로 마무리되었다. 널방 벽면에는 채색의 흔적이 남아있어
벽화를 그린 자리라고 학계서 추정하지만 유물이 남아 있지 않아. 더는 알 수 없다.
장군총의 내부도
장군총을 두고 국내 학자들은 서로 엇갈리는 추정만 할 뿐 지금 것 누구도 올바른 답을 내지 못하고 있다.
근래 도울 김용욱 선생이 장군총은 고구려 시조왕 주몽 무덤이라는 새로운 주장을 들고 나오지만
학계서는 일고의 가치도 없다며 선을 끊는다.
추정은 누구나 할 수 있다. 자신들만의 로맨스라는 것이다. 학자들은 논문으로 답을 내야 한다
우리 학계서는 지금 것 올바른 논문 한 편 내지 못하고 북한이나, 중국, 일본 등의 학계 논문을 근거로 추정만 할 뿐이다..
필자도 한번 추정하겠다.
장수왕은 427년(재임 15년) 수도를 평양으로 옮긴다. 이때 고구려 시조왕(주몽) 주검을
평양으로 이장했다. 당시도 이장문화가 있었다는 것을 지금 우리가 알 수 있다.
장수왕은 평양 천도 이후 491년 평양에서 천수를 다 한다 이때 장수왕 나이 98세다.
당시 장수왕 주검이 국내성에 묻힐 이유가 없었다..
첫째는 거리 문제로 평양서 국내성까지는 1300리(530km)가 넘는다.
당시 최고 권력자의 상여라 해도 상여를 한 달 이상 이어 간다는 것은 당시 상항을 추정해 볼 때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이성계는 위화도 회군 당시
서경(평양)을 출발해 위화도까지 18일 걸렸다는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을 참고해 보면 서경서 국내성까지는 갑절의 거리로.
군인들이 가도 36일 걸린다는 계산이 나온다.
장수왕은 18살에 왕위에 올라 다음 해 자신의 가묘 조성을 시작해 77년이 걸려 완공(490년)하고 다음 해 스스로 묻힌다는 것은
자신이 98세까지 장수할 수 있다는 것을 미리 예견한 것처럼 돼 버린다.
당시 왕들의 평균 수명이 40대 전후라는 것을 감안하면 이것도 가능하지 않다.
중국 풍습을 따라 가묘를 미리 조성했다고 해도 장수왕은 40대 전후 무렵 가묘를 미리 완성시켜 놓는 것이 가묘의 특징이다.
당시 상황들을 살펴보면 장군총은 장수왕의 무덤이 될 수 없다.
광개토대왕이 죽고 2년 후 글을 새겨 비석을 완공하고 바로 태왕릉 앞에 세우지 않고
장군총 방향으로 200여 m 떨어진 지금 자리에 비석을 세운 이유를 한번 찾아봐야 한다.
비석은 죽은 자 무덤 앞에 세우는 것이 지금이나 당시 상식이다
비석을 당시 태왕릉 앞에 바로 세우지 못한 것은 당시 장수왕은 축조 중인 장군총에 아버지 주검을 비석과 함께 이장을 염두에 두었다
장군총 앞에 바로 세우지 못한 것은 장군총 축조 현장에 큰 장애물이 될 것이라 판단했고 장애물이 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최대한 장군총과 가까운 지점에서 석비가 시공되고. 2년(414년) 후 비석은 완공되지만 장군총 공사가 77년 걸릴 것이라고는
당시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장수왕은 평양천도(427년) 아후 국내성과 1300리 넘게 거리가 멀어지고 아버지에 대한 추모 분위기는
초기와 달리 거의 소멸되고 장군총 축조 공사 또한 동력이 떨어졌다.
이후 77년 걸려 겨우 장군총이 완공되고 광개토대왕 주검은 태왕릉에서 장군총으로 간단히 이장이 가능했다.
주검은 이장되고 태왕릉은 반드시 해체할 이유가 없고. 또 호태왕비(37톤) 이동에는 엄청난 동력이 필요한데 당시 장수왕 나이 97세로
추모 분위기나 동력 등이 거의 소멸되었다
또 4면 대부분 글을 새겨놓은 거대한 석비(37톤)를 글체 하나 훼손 없이 800여 m 이동한다는 것은 당시 이동수단과 동력으로는
아동 자체가 불가능했던 것으로 추정되고, 지금 자리에 본래 자연석이 있었거나 다른 곳의 자연석을 이곳으로 옮겨와
글을 새겨 비석이 완성되고 위와 같은 이유들로 지금 자리에서 관리된 것으로 추정된다.
장군총 외부 형태는 7층 피라미드 형태로 화강함 장대석 1146개로 축조되고
장대석의 크기는 일정하지 않다 맨 및 층에 큰 돌을 사용했고 위층으로 올라 갈수록 조금씩 작은 장대석을 사용했다.
각층 단수는 1층 4단 2 ~ 7층까지는 각층 모두 3단으로 축조되고, 마지막으로 1층 기단이 밀리지 않게 한 면에 3 개식 4면에
12개의 거대한 호분석을 받쳐 마무리되었다. 북쪽면 호분석 하나가 분실 내지 유실돼 현재 11개가 받치고 있다.
장군총
아직도 주인을 찼지 못하는 장군총에 대한 아쉬움을 남기고 다섯 개 춤 무덤이 자리한 우산하로 이동한다.
가는 길 주변에 많은 고구려 봉토 무덤들이 방치돼 있고 관리된 흔적은 찾아볼 수 없다
깔끔하게 정돈된 경주 신라 무덤과 달리 많이 허술해 보이고 고분 수는 이곳이 더 많다.
다섯 개 춤무덤
국내성 우산하 고분군에 많은 고구려 돌방 봉토 무덤들이 있다.
춤무덤은 분지 중앙에 고분 5기가 동서로 길게 나란히 자리하고 있는데. 중국은 5회분 북한은 소매춤을 추는 고구려
여인들이 벽화에 그려져 있다고 해 다섯 개 춤 무덤이라고 한다. 우리는 춤을 무용이라고 하여 무용총이라 부른다.
3국이 현재 각기 다르게 부르고 있다.
다섯 개 춤 무덤은 서쪽에서부터 1호분 동쪽으로 가면서 2.3,4호분 동쪽 끝 무덤이 5호분 춤무덤이다.
주변에 돌방 봉토 무덤 등이 널려 있으나 4호분과 5호분에 벽화가 발굴돼 더 유명하다.
4호분은 봉분 둘레가 160m 높이 8m 널길 6m로 널길과 널방으로 구성돼 있고. 다른 고분과 달리 널길이 밖으로
나오면서 넓어지는 특이한 형태라고 한다.. 현재 개방돼 있지 않고 공개된 5호분은 다섯 개 춤 무덤 가운데 가장 동쪽에 자리하고 있다.
널방은 가로 4.4m 세로 3.5m 높이 3.9m로 널방이 차지한 면적은 15.4 m²(4.7평)다. 화강암으로 된 널길의 좌우 벽과 널방의 벽과 천장에는
벽화를 그렸는데 1.700년이 지난 지금도 채색이 선명하다.
널길 양 벽에는 연좌대에 앉아 창을 들고 널방을 지키는 역사의 모습을 그렸고 널방 네 벽 윗부분에는 황룡 두 마리가
서로 몸을 꽈 천장과 벽을 구분 짓고 천장에도 황룡을 그려 넣었다..
널방 동벽에 황룡. 서벽은 백호 남벽은 주작 북벽에는 현무 등 사신도를 생동감 넘치게 그려 넣고. 빈 공간에는 연화문, 화염문, 등
다채로운 문양을 섬세한 필치로 그려 넣었다.
천장에는 연꽃과 하늘 나무 등 황용을 타고 악기를 연주하는 신선의 모습과 별자리를 그렸고 북극성 등 별자리와 함께
황룡 2마리가 뒤엉켜 꿈틀 거리는 모습과 해와 달신을 그려 넣었다.
서벽에 수렵도 남벽에는 신선이 약단지를 들고 있는 것으로 보아 당시에도 약신을 믿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북벽에는 황용을 타고 승천하는 천왕의 모습 등에서 당시 신앙 세계를 고스란히 엿볼 수 있고.. 1.700여 년 전 고구려의 힘과
고구려 예술의 극치다. 제작기법이나 필체. 표현. 감각. 축조. 기술 등이 뛰어나다.
왕릉 이상의 초호화 무덤으로 6세기 당시 고구려 상위 계층 귀족들의 사회적 파워를 짐작할 수 있다.
수렵도
고구려 무덤은 강가 돌무지 무기단식에서 기단식, 계단식. 봉토돌방 방식으로 변천한다.
1. 돌무지무덤
가장 이른 시기 출현한 무기단 돌무지무덤은 강가 바닥에 냇돌을 사각형으로 깐 뒤 그 위에 주검을 놓고
다시 냇돌로 봉분을 덮은 가장 간단한 형식으로 고구려 건국 이전부터 시작해 AD 1 ~2세기경까지 출현한다.
. 강가 무덤은 당시 무덤 축조 재료인 냇돌(강변 돌) 조달이 수월해
강가에 무덤이 형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2. 기단식 돌무지무덤
땅을 고른 후 그 위에 넓적한 돌 등으로 기단을 마련한 것이 특징이다 2세기 후반부터 출현하는데
강가뿐 아니라 산기슭에도 축조되고 축조 재료도 냇돌 외에 모난
산석도 많이 사용되고 이 시기부터 무덤이 서서히 내륙이나 산으로 올라간다.
3. 계단식 돌무지 돌방무덤
3∼5세기경 축조된 것으로, 이때부터 주검이 바닥에서 기단 위로 높이 올라가는 특징을
보이고 외부는 계단 모양을 취하게 된다.. 주검이 높이 올라갈수록 신분을 짐작할 수 있고 태왕릉이나 장군총이
대표적이며 고구려 돌무지무덤 중 가장 발전된 단계를 보여준다.
이때부터 강가 돌무지무덤이 사라진다.
4. 봉토 돌방무덤
3~5세기부터 등장하는 고구려 마지막 무덤의 형태로 당시 돌방 봉토무덤의 벽화를 통해 1500여 년 전 고구려 예술의 경지를
지금 우리가 고스란히 볼 수 있다. 우산하 고분군의 춤 무덤 등이 대표적이다
초기 봉토분이나 돌무지무덤은 부장품은 있어도 벽이 없다.(신라무덤의 특징)
후기의 굴식 봉토 돌방무덤은 벽면이 생겨 벽화를 그릴 수 있었다.(고구려 백제 무덤의 특징)
천추총 서대 총
국내성 서남쪽에 자리한 마선구 고분군으로 이동한다.
천추총은 마선구 평야에 자리하고 있고 네모난 대형 돌무지무덤으로 명칭은‘천추만세 영고(千秋萬歲永固)’
보고 건곤 상필(保固乾坤相畢)’이라는 글에서 이름을 따온 것이며. 중국의 공식 명칭운 마선구 1,000호 묘다
1935년 10월 일본의 조선 총독부에 의해 첫 발굴조사가 이루어졌다
무덤의 형태는 평면의 한 면 길이가 85m로 높이는 가장 많이 남아 있는 곳이 11m이며 훼손이 심한 쪽은 8m 정도다,
무덤 외부 맨 아래는 거대한 호분석으로 받쳐두었는데. 한 면에 5 개식 4면에 20개가 받쳐져 있고 널방은 기단 상부에
축조돼 있다, 국내성 고구려 무덤 중 크기가 가장 크다.
첫 발굴 조사 당시 무덤 주변에서 천추만세토록 영원히 견고하라는 뜻을 가진 ‘천추만세 영고’라는 글자가 새겨진 벽돌이
출토되고 격자무늬·노끈 무늬·구름무늬 등 기와들이 다량 수습되고. 2003년 주변 재발굴 당시 금실과 금제 장신구,
철제칼과 고리, 꺾쇠 등이 추가 발굴되었다.
무덤 주변에 작은 건물터가 한 곳 남아 있는데 당시 묘지기 주거 터이거나 제사를 지낼 때 사용했던 건물터로 추정하고 있다.
또 무덤의 주인은 광개토대왕의 아버지 고국양왕의 무덤일 것이라고 학계서 추정하지만 기록이나 유물이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아 더는 알 수 없다
국내성 주변에 수많은 무덤들이 있다
1962년 당시 중국 측의 첫 조사 결과에 따르면, 국내성 주변의 고구려 무덤은 무려 1만 2350기가 남아 있었고 1997년 2차 조사 때는
6854기가 남아 있었다 35 년 사이 무덤 절반이 사라졌다. 1980년대 중국의 산업화 과정에서 집을 짓거나 땅을 개간하면서,
무덤을 다 파헤쳤기 때문이다.
국내성도 이 당시 대부분 훼손되었다.
2004년 유네스코에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고부터 무덤의 훼손은 더 이상 없다.
서대총은 천추총이 자리한 마선구 고분군에 함께 자리하고 있다.
1937년 만주국 당시 일본이 답사하고 무덤이 마선구 퉁구 평야 서쪽 끝에 있고 무덤이 높고 크다고 해 서대 총이라
불렀다고. 전해진다
서대총은 국내성의 많은 무덤 가운데 가장 많이 훼손돼 있다.
평면 밑변 길이 55m 높이 7m이며. 무덤 한가운데를 깊이 파헤쳐 돌들이 한쪽으로 치우쳐 있어 대규모 인원이 동원된
도굴임을 알 수 있다.
학계서 서대총은 천추총과 함께 왕릉으로 보고 있으며 미천 왕릉이라는 추정을 내놓지만 유물이 남아있지 않아 더는 알 수 없다.
환도산성 |
환도산성은 도심을 약간 벗어나 있다 |
국내성 북쪽 약 2.5km 지점 해발 676m 산성자산에 자리하고 있다.
환도산성은 자연적 지세를 이용해 축조했고 성벽의 규모는 동벽 1,716m, 서벽 2,440m, 남벽 1,786m,
북벽은 1009m이며 총길이 6,951Km에 이르는 큰 성으로 산 능선을 따라 축조되었다. 동, 서, 북 3면은 험준한 자연 산세를 성벽으로
대신했고 성문은 남 쪽에 축조했다. 성문 앞쪽 산기슭 아래 2개의 작은 개울이 흘러와 성문 부근에서 합쳐 통구하로 흘러간다.
전형적 배산임수형 형태의 산성이다.
성터 안 동북쪽의 넓은 경사면에서 남북 길이 95.5m 동서 폭 76m의 궁궐터가 발굴되고 서벽 산기슭 아래서는
고구려 고분 37기가 발굴되었다.
국내성과 환도산성은 평지성과 산성으로 구분했다. 평시에 국내성에 거주하다 적이 쳐들어오거나 위급한
상황이 닥치면 방어력이 높은 환도산성으로 대피한 것으로 학계서 추정하고 있다.
환도산성
고분군
국내성
마지막 답사지 집안시 중심에 자리한 국내성으로 들어오자 어둠이 내린다.
고구려 역사는 서기 3년 유리왕 때부터 이곳 국내성(퉁구성)에서 시작된다.. 장수왕 15년 평양천도(427년)까지 400년 넘게
대륙을 차지한 고구려의 야심 찬 수도다. 국내성 성벽의 형태는 석축이며 둘레 2686m 높이 5~6m이며 성문은 여섯 곳 있는데
남북에 각 하나식 동서에 각 두 곳 식 있다.
국내성은 졸본성과 함께 축성 연대가 확실한 최초의 성으로. 유리왕 22년(서기 3년) 10월 고구려가 졸본성에서 이곳으로 옮겨 왔다는
기록이 삼국사기에 서 전하고 있다..
아파트 담장처럼 변해버린 성터 초입에 접어들자
한글 안내 표지판이 반긴다. 안내 표지판에 국내성은 고구려 두 번째 수도라고 중국 측도 밝히고 있다.
고구려가 당시 자신들의 지방 정부라는 중국 측의 억지 논리라면 고구려 세 번째 수도 평양도 당연히
당나라 지방 정부가 되어야 한다. 신라와 연합해 자신들의 지방 정부를 무너뜨리고 신라에 갖다 바치는
논리적 모순에는 입을 닫는다. 이들은 지금도 힘의 논리를 주장하지만. 힘이 빠지면 주저앉는 법이다.
중국의 지난 역사가 그랬다,
러. 중 북경 회담(1860년)에서 극동 연해주를 통째로 러시아에 갖다 바치고는 지금 것 중국은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우리는 다음 역사를 준비해야 한다
국내성 터
국내성 일정을 모두 마치고 늦은 석식 시간이다.. 모두가 묘향산 식당으로 이동해. 2층으로 올라가자 한복을 이쁘게 차려입은 평양
미인들이 반긴다.
나이를 묻자 18살이라고 한다. 북한은 지금 미성년자들까지 합법적 외화벌이에 내몰고 있다.
묘향산 자연석 돌판에 굽는다는 쇠고기와 한식을 가미한 북한식의 푸짐한 석식 자리로 평양미인들의 즉석 라이브가 명창이다.
석식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오자
호텔 건너편 꼬지집에서 손님이 기다린다고 한다.
도로 건너편에 흐름 한 양 꼬치집이 보이고.. 도로를 건너가 꼬지집으로 들어가자
50대 초반의 건장한 남성이 반긴다.. 북한을 이탈한 탈북자다
손을 맞잡고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중국 소주와 양 꼬치가 올라온다.
잔이 몇 잔 돌자 형님으로 부르겠다며 말문을 열기 시작한다.
17년 전 고난의 행군 시절 배가 고파 무작정 압록강 사선을 넘고 중국말이 되지 않아 조선족 집단거주 도시
연길시에 숨어들었다. 그곳에서 조선족 상인의 소개로 과일상회 창고에 기거하면서 상자 나르기에 2년을 보내며
불안과 갖은 천박 속에 깨달은 바가 있었다 그간 모은 돈 3.000원을 들고 한국 사람들이 많은 선양 서탑 거리로 갔으나
탈북자 신분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6개월 만에 다시 빈털터리가 되고 북녘에 남은 노모가 보고 싶어
압록강에 달려가 밤새 울부짖다 중국 공안에 체포돼 북녘으로 넘겨졌고 극적으로 재탈북까지 사선을 넘나든
자신의 이야기 내내 눈시울을 붉히며 가슴속 응어리를 다 토해 내고 있다.
자신이 살아남아야 북녘에 남은 노모도 함께 살 수 있다는 강한 신념으로 서서히 삶의 방법을 터득했고 그간 배운 중국어로
압록강 밀무역 현장 통역을 하면서 이후 자신도 직접 밀무역에 뛰어들었다고 한다.
10년이 지난 지금 기반이 조금씩 잡히고 중국 공민증까지 취득해 지금 자유롭게 일하고 있지만 80 넘은
북녘의 노모가 갑자기 병들어 누웠다는 소식을 듣고 고향땅이 가장 가까운 이곳에 왔다며 지금은
좋은 약과 생활비 등을 수시로 인편으로 보낸다며 엄마가 살아 있는 한 이곳을 떠나지 못하겠다고 한다.
엄마가 오래 살아야 한다며 꼭 한 번이라도 만나 뵙고 밥 한 상 차려 드리는 것이 지금 소원이라고 한다.
형님 잘 사는 한국도 가고 싶고 백두산도 가고 싶다고 한다
잘 사는 한국이 아니다. 지금 남쪽사회는 양극화가 아주 심각하고 삶이 치열한 곳이다. 우리는 단일 문화권을 가진
같은 민족으로 다 같이 잘 살아야 한다.
평화통일의 그날까지 북은 북쪽에서 남은 남쪽에서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 하자
반드시 자유로운 그날이 올 것이다.
다음 차에 손 잡고 백두산을 함께 가자,
밤 12시가 넘고 있다.
내 손을 꼭 잡고 도로를 건너 호텔 로비까지 배웅하고 도심의 불빛 속으로 사라지는
그 뒷모습이 참 아프다.
우리 세대에 끝내아할 비극이다.
팔공산 자락에서,,,..,,,,,,,,,,,,,,,,,,,,,,,,,,
이 정 우
백두산과 11만 리 한반도 둘레길 어느 구간이던 정보가 필요하신 분은 연락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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