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291
10월27일 [연중 제30주간 목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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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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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BtlLJDPEuS4 (최연준 사도 요한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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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주님 성령의 능력 없이 저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단 몇 개월 만에 국격이 바닥으로 곤두박질치는 모습을 바라본다는 것, 참으로 비참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지도자로서의 덕성이나 품격은 둘째 치고, 이건 뭐 인간으로서 지켜야 할 최소한의 기본이나 상식을 찾아볼 수 없으니, 해도 해도 너무한다는 생각뿐입니다.
실망을 넘어 포기, 좌절을 넘어 회피가 정답인 이 시대, 바오로 사도는 그런데도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힘겨운 세상을 살아가면서도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를 구체적으로 가르치고 계십니다. 한 문장 한 문장 따라가 보니 참으로 감동적입니다.
진리로 허리에 띠를 두르십시오.
의로움의 갑옷을 입으십시오.
발에는 평화의 복음을 위한 준비의 신을 신으십시오.
믿음의 방패를 잡으십시오.
구원의 투구를 받아쓰십시오.
성령의 칼을 받아 쥐십시오.
늘 성령 안에서 온갖 기도와 간구를 올려 간청하십시오.
갈등과 혼돈의 시대, 우리는 더 깨어 있어야겠습니다. 진정한 진리가 무엇인지 식별할 수 있는 은총을 청해야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성령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성령의 동행이 필요합니다. 성령께서 우리 삶 한가운데 굳건히 현존하심을 의식하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주변을 유심히 살펴보다 보면 매일 매일 사랑의 기적을 연출해나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몇백 번 죽었다가 깨어나도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런데 그 대단한 일들을 아무것도 아닌 듯 태연한 얼굴로 매일 되풀이하고 있습니다. 성령께서 함께하시니 가능한 일입니다. 성령은 불가능을 가능케 하시는 분입니다.
성령께서 흘러넘치도록 우리에게 오실 때면 좋은 점이 한둘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마음의 문을 활짝 열어주실 것입니다. 안갯속 같았던 우리의 시야를 환하게 밝혀주실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하느님과 세상만사를 제대로 볼 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꽃이 피는 시절에도 기뻐하지만, 꽃이 지는 시절도 기꺼이 받아들일 것입니다. 막 출고된 신차처럼 건강미 철철 넘치는 젊은 시절에도 감사하지만, 낡은 중고차처럼 여기저기 아프고 골골할 때도 감사의 기도를 바칠 것입니다.
성령께서 함께하실 때 우리는 한없이 부족하고 나약한 한 인간 존재지만 대자연의 순환주기와 생로병사를 큰마음으로 수용할 것입니다.
성령께서 내 안에 활동하실 때 인생사 안에서 벌어지는 크고 작은 사건 사고들, 결코 호의적이지 않은 현실을 인생의 한 부분으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것입니다.
위로부터 주시는 능력,
주님 성령의 능력이 없이
저는 아무런 기도도 할 수 없습니다.
주님의 영이 제 안에서 기도하게 하시고
“주 예수님”이라고 고백하게 하시며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게 하소서.
주님, 기다립니다.
주님, 고대합니다.
주님, 소망합니다.
언제나 하나 되게 하시고
따뜻이 위로하시는
주님의 영을 제게 주소서.
(하레사쿠 마사히데, 하늘 아버지께 드리는 77가지 기도, 생활성서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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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A7-lJHK_-O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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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인생은 나를 향한 누구의 믿음을 받아들이는가에 달렸다>
베트남 전쟁에 맥주를 배달하러 간 한 남자의 실화를 그린 ‘지상최대 맥주 배달 작전’이란 영화가 있습니다. 1967년 뉴욕시 인우드에서 동네 친구들과 어울리며 술 마시는 걸 좋아하는 ‘치키 도너휴’가 주인공입니다. 미국은 북베트남과 한창 전쟁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치키의 친구들의 전사 소식이 계속 전해지고 있었습니다. 치키와 가장 친했던 토미까지 행방불명이었습니다. 토니는 치키가 나라를 위해 전쟁에 참여하도록 독려한 친구였습니다. 그는 술김에 자신의 친구들을 찾아 여전히 미국이 그들을 지지한다는 의미로 맥주를 전해주고 오겠다고 소리칩니다.
이 소문은 온 마을에 퍼집니다. 치키의 말을 믿는 사람은 거의 없었지만 그래도 전쟁터에 아들과 애인을 떠나 보낸 이들은 그들을 만나게 되면 자신들이 주는 선물을 전해주라고 많은 양의 맥주와 선물들을 싸 줍니다. 가족과 친구들은 치키가 당연히 안 갈 것이라고 은근히 무시합니다. 하지만 그는 점점 자신을 믿고 선물을 맡기는 사람들을 실망하게 할 수 없었습니다.
혹시나 해서 베트남으로 떠나는 배를 알아봅니다. 혹시 자리가 없으면 핑계라도 대겠지만 3시간 뒤에 출발하는 배에 딱 한 자리가 비어 있었습니다. 그는 운명처럼 맥주를 들고 급유 담당으로 배를 탑니다. 2개월 후에 베트남에 도착하고 사흘 동안 휴가를 얻습니다. 혼자 친구들에게 맥주 배달을 왔다는 그를 군인들은 모두 C.I.A. 요원으로 알고 도와줍니다. 미치지 않고서는 그런 일로 전쟁터로 올 사람은 없기 때문입니다. 덕분에 다른 친구를 찾으러 최전방까지 종횡무진으로 누비고 다닐 수 있었습니다.
점점 그는 자신을 C.I.A.로 믿고 도와주는 군인 장교들의 도움을 받는 것에 익숙해집니다. 물론 진짜 C.I.A.에게 쫓기기도 합니다. 하지만 종군 기자들보다 더 훤하게 전쟁의 상황을 파악해갑니다. 그리고 의미 없는 전쟁에 자신이 친구의 입대를 종용한 것을 후회합니다. 친구들은 처음엔 이런 미친 짓을 하는 치키에게 화를 내다가도 나중엔 고마워하게 됩니다. 나중에는 그 친구가 전사한 것을 알게 되고 전쟁의 참상을 알리는 데 일조하게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들은 두려움으로 예수님의 일을 하지 못하게 만들려고 합니다.
“어서 이곳을 떠나십시오. 헤로데가 선생님을 죽이려고 합니다.” (루카 13,31)
하지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가서 그 여우에게 이렇게 전하여라. ‘보라, 오늘과 내일은 내가 마귀들을 쫓아내며 병을 고쳐주고, 사흘째 되는 날에는 내 일을 마친다. 그러나 오늘도 내일도 그다음 날도 내 길을 계속 가야 한다. 예언자는 예루살렘이 아닌 다른 곳에서 죽을 수 없기 때문이다.’” (루카 13,32-33)
바리사이들은 예수님께서 생명에 집착하는 겁쟁이로 봅니다. 그래야 한다고 강요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당신 정체성이 ‘예언자’라고 하십니다. 예언자는 목숨을 걸고 하느님 말씀을 전하는 직무를 수행하도록 하느님으로부터 파견받은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에 대한 세상의 믿음이 아닌 당신에 대한 아버지의 믿음을 받아들였습니다. 우리는 누군가의 믿음을 받아들이고 그 믿음이 옳았다는 것을 증명하며 삽니다.
마이클 조던이 마이클 조던이 될 수 있었던 가장 큰 힘이 되어주었던 분들은 누가 뭐래도 그의 부모님이었을 것입니다. 그는 흑인이었고 뉴욕 브루클린의 빈민가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의 보잘것없는 월급으로는 도저히 생계가 어려웠고 그 가난과 멸시 속에서 그는 어떤 희망도 품을 수 없었습니다. 이런 모습을 지켜보던 아버지는 그가 열세 살이 된 어느 날, 옷 한 벌을 건네며 물었습니다.
“이 옷이 얼마나 할 것 같니?”
“1달러 정도요.”
“너는 이 옷을 2달러에 팔 수 있겠니?”
아버지는 호기심에 찬 눈으로 그를 바라봤습니다.
“멍청이나 그 돈을 주고 사겠지요.”
그는 볼멘소리로 대답했습니다. 아버지의 눈빛은 진실하고 간절했습니다.
“너는 왜 시도해 보려고 하지 않니? 너도 알다시피 우리 집은 형편이 어렵단다. 만약 네가 이 옷을 팔면 나와 네 엄마에게 도움이 될 거야.”
그제야 그는 고개를 끄떡였습니다.
“한번 해 볼게요. 하지만 못 팔 수도 있어요.”
그는 정성껏 옷을 빨았습니다. 다리미가 없었기 때문에, 그는 손으로 옷의 주름을 펴고 바닥에 펼쳐 그늘에 말렸습니다. 이튿날 그는 이 옷을 들고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지하철역으로 갔습니다. 그는 6시간 동안 물건을 사라고 외친 후에야 옷을 팔 수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또 낡은 옷 한 벌을 건넸습니다.
“한번 생각해보렴. 어떻게 하면 이 옷을 20달러에 팔 수 있겠니?”
그 옷은 기껏해야 2달러의 값어치밖에 없어 보였습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그를 격려했습니다. 고민 끝에 그는 또 한 번 좋은 방법을 하나 생각해 냈습니다. 그는 그림을 공부하는 사촌 형에게 옷에다 귀여운 도널드 덕과 미키 마우스를 그려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리고 부유층 자제들이 다니는 학교 입구로 가서 물건을 사라고 외쳤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부잣집 도련님을 데리러 온 집사가 자신의 도련님을 위해 이 옷을 샀습니다. 추가로 5달러의 팁까지 받았습니다. 이것은 아버지의 한 달 월급과 맞먹는 금액이었습니다.
집으로 돌아왔을 때 아버지는 또다시 그에게 낡은 옷을 한 벌 건넸습니다.
“너는 이 옷을 200달러에 팔 수 있겠니?”
아버지의 깊은 눈은 오래된 우물처럼 그윽하게 빛났습니다. 이번에 그는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조용히 옷을 받아 들고 생각에 잠겼습니다. 두 달 뒤 드디어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인기 텔레비전 시리즈 미녀 삼총사의 여주인공 ‘파라 포셋’이 홍보차 뉴욕을 방문한 것입니다. 기자 회견이 끝나자 그는 곁에 있던 보안요원을 밀쳐내고 파라 포셋에게 뛰어들어 낡은 옷을 들이밀며 사인을 부탁했습니다. 파라 포셋은 어리둥절하다가 곧 미소를 짓고는 거침없이 사인했습니다.
“파라 포셋의 친필 사인이 있는 티셔츠를 200달러에 팝니다.”
치열한 가격경쟁 끝에 한 석유 상인이 1,200달러의 비싼 값을 주고 티셔츠를 구매했습니다. 그날 밤 아버지와 아들은 침대에 누웠습니다. 아버지가 다가와 물었습니다.
“얘야, 세 벌의 옷을 팔면서 깨달은 게 있니?”
“저는 이제 깨달았어요. 아버지는 제게 큰 가르침을 주신 거예요. 머리를 굴리면 방법이 있다는 사실을 말이에요.”
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습니다.
“네 말이 맞는다. 하지만 그건 내 맨 처음 의도가 아니었단다. 나는 그저 네게 알려주고 싶었어. 1달러의 값어치밖에 없는 낡은 옷조차 가치가 높아질 수 있는데 하물며 우리처럼 살아있는 사람은 어떻겠니? 우리가 삶에 믿음을 잃을 이유는 어디에도 없단다. 우리는 그저 조금 까맣고 조금 가난할 뿐이야. 하지만 그게 무슨 상관이니?”
바로 그 순간 그의 마음속에 찬란한 태양이 떠올라 그의 몸과 눈앞의 세상을 환하게 밝혔습니다. ‘낡은 옷조차 가치가 높아질 수 있는데 내가 날 업신여길 이유가 없지.’ 그때부터 그는 열심히 공부하고 운동하며 자신을 단련하기 시작했습니다. 미래에 대한 희망으로 가득 차서 말입니다. 농구를 시작하고 후보 선수만 할 때도 그는 좌절하지 않았습니다. 해낼 수 있다는 아버지의 믿음을 굳게 유지하였습니다. 20년 후 그의 이름은 전 세계 구석구석까지 널리 퍼졌습니다.
『당신의 주인은 DNA가 아니다』를 쓴 브루스 립턴은 의대에서 세포에 관한 것을 가르치던 교수였습니다. 당시 그리고 지금까지 과학계에서 믿어오던 것은 인간의 유전자가 인간의 모든 것을 지배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병에 걸릴 유전자를 부모로부터 물려받으면 그 병에 걸릴 수밖에 없다는 믿음이었습니다.
그러다 그가 시골에서 교수로 있을 때, 오토바이 사고를 당했습니다. 힘겹게 몸을 움직여야 할 때 자기 제자 중 카이로프랙틱을 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팔을 올리게 한 다음 “나는 브루스입니다”라고 말하고 힘을 주라고 했습니다. 그 팔을 제자가 끌어내리려고 해도 잘 안 되었습니다. 그는 과학자였기 때문에 ‘이게 뭐 하는 짓인가?’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다음 제자는 “이번엔 ‘나는 메리입니다’”라고 해 보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팔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작은 힘에도 버틸 수 없었습니다.
그는 혼절할 것처럼 충격을 받았습니다. 왜냐하면, 과학적으로는 자신 안에 있는 유전자가 외부의 믿음에 의해 영향을 받아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자신이 브루스인 것을 속이며 자신이 메리라고 말할 때는 DNA도 아무런 힘을 쓰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믿음이 자신 안에서 충돌할 때 세포로부터 당연히 나와야 하는 힘도 꺾일 수 있다는 것을 체험한 것입니다. 사람은 분명 유전자로도, 노력으로도 지배되지 않고 오직 ‘믿음’으로 지배됩니다. 예수님은 이 믿음을 바꿔주러 오신 분입니다. 믿음이 사람을 만듭니다. 그리고 그렇게 만들어진 사람은 그렇게 살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됩니다.
우리는 누구나 누군가의 믿음을 받아들이며 그 믿음을 증명하며 삽니다. 나를 사랑하는 이의 믿음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브루스라는 이름은 그 부모가 준 믿음입니다. 세상은 우리를 이용하려 들지 사랑하지 않습니다. 우리를 가장 사랑하시는 분은 우리를 창조하신 분이십니다. 그분께서 주시는 우리를 향한 믿음을 믿읍시다. 이것이 더 나아지는 유일한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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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순교로 가는 길>
이승아 씨가 ‘화니하니’란 자신의 블로그에 ‘내 것이 아닙니다...’란 제목으로 2013년 10월 1일에 올린 글입니다. 사진을 보니 매우 큰 집에 남부럽지 않게 사는 젊은 자매님입니다. 개신교 신자이지만 몇 단어는 천주교식으로 바꾸었습니다.
내 것이 아닙니다... 한때는 이 아름다운 집이 제 가장 큰 자랑이었습니다.... 심혈을 기울여 꾸민 아름다운 우리 집..... 잡지에 여러 번 나왔다고 내심 자랑스러워했던 우리 집.... 행여나 때가 탈까.... 혹여나 먼지 탈까.... 닦고 쓸고 했던 우리 집....
하지만 남편이 아프고 보니 제가 있을 곳은 궁궐 같던 우리 집이 아니라 몇 평 안 되는 비좁은 병실이더군요.... 피곤한 내 한 몸 누일 곳은 푹신하고 안락한 라텍스 침대가 아니라 딱딱하고 좁은 보조 침상이더군요..... 내 꺼라 믿었던.... 남편과 공동명의로 되어있던 자랑스럽던 내 집도 알고 보니 제 것이 아니었습니다.... 바라만 봐도 뿌듯했던... 참으로 고운 접시들.... 참으로 이쁜 그릇들.... 난 왜 이렇게 꽂히는 게 많지? 남들은 그릇이면 그릇... 가구면 가구.... 옷이면 옷.... 하나만 꽂힌다는데 난 왜 이 모든 것을 다 갖고 싶지? 라며 투덜대게 만들었던 내 못 말리던 그릇 사랑..... 그 수많은 이쁜 그릇들도 남편과 함께 하는 병실에선 아무 소용이 없더이다!
제가 황량한 병실에서 쓸 수 있는 건.... 보잘것없는 플라스틱 접시와 종이컵뿐이더군요.... 5자 붙박이장에 가득한 수많은 옷과 제가 사랑해 마지않던 명품백들.... 이 또한 제 것이 아니었습니다.... 남편과 함께 하는 병실에선 편한 츄리닝과 레깅스면 족하더이다.... 귀히 여기던 명품백도 필요 없더이다.... 어디 그 뿐인가요? 이십년 넘게 나의 자랑이었던.... 나를 빛나게 해준다고... 나를 완전케 해준다고 믿었던 내 남편도... 제 것이 아닙니다.... 내 것이 아닙니다....
의사들은 말합니다....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이 또한 내 것이 아니라고..... 이젠 압니다.... 내 분신.... 내 생명.... 내 사랑하는 아이들조차 제 것이 아니라는 것을요.... 이 아이들 또한 그분이 제게 잠시 맡기셨던 선물임을 제가 잊고 있었네요! 이와 같은 이유로.... 근심, 염려 또한 제 것이 아닙니다.... 적혈구 수치가 모자라 수혈을 해도... 의사가 제아무리 무서운 말을 해도... 그것은 내 것이 아닙니다.... 내 아버지의 것입니다....
“여러분의 모든 걱정을 그분께 내맡기십시오. 그분께서 여러분을 돌보고 계십니다.”(1베드 5:7)
근심, 염려는 다 주께 맡기고 내 남편 또한 주께 맡기고.... 저는 이 밤 또 기다립니다.... 죽은 나자로를 살렸던 예수님이.... 베짜타 연못의 38년 된 병자를 찾아가셨던 예수님이.... 친히 내 남편을 찾아오셔서 살려주시길 기다립니다.... 내가 가서 고쳐주리라... 말씀해 주시길 기다립니다.... 그 분의 피값으로 살리셨던 내 남편을 또다시 살려주시길 애타게 기도합니다....
내 것이 아닌 걸 내 것인 양 소유하며 자랑하며 욕심내었던 제 무지를, 제 교만을, 제 과거를 회개하며 눈물로 기도합니다.... 의사의 권유로 내일 호스피스로 옮기는 울 화니가 무덤에서 걸어 나온 나자로처럼 그곳을 건강하게 걸어 나온 최초의 증인이 되도록 기도합니다.... 하느님이 함께하시면 불가능한 일이 없을 줄 믿습니다!!!
인생은 B(Birth)와 D(Death) 사이의 C(Choice)라고 하더군요... 그러고 보니 인생은 늘 선택의 연속입니다.... 저는 오늘도 희망을 선택합니다.... 절망을 거부합니다.... 내 남편이 살아서 하느님을 자랑하고 증거할 수 있도록 그분께 매달립니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평생 그분을 사랑하고 섬기겠지만.... 오늘은 꼭 그리 해주시길 무릎 꿇고 기도합니다.... 내 기도가....여러분의 기도가.... 오늘 밤 하늘 보좌를 흔들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주님의 오른손이 드높이 들리시고 주님의 오른손이 위업을 이루셨다! 나는 정녕 죽지 않고 살리라. 주님께서 하신 일을 선포하리라.”(시편 118:16-17)
이 자매는 모든 것을 내려놓을 줄도 알고 희망할 줄도 아는 훌륭한 신앙인 같습니다. 그리고 죽음 앞에서는 이 세상에서 지키려고 하는 모든 것이 무의미해진다는 것을 진솔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들이 와서 헤로데 왕이 예수님을 죽이려 한다고 겁을 줍니다. 이렇게 말하면 겁을 먹을 줄 알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 앞에서 예수님은 왕을 여우라고 하며 당신은 당신의 길을 갈 것이니 죽이든 살리든 맘대로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당신이 겁을 먹지 않는 이유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예언자는 예루살렘 아닌 다른 곳에서 죽을 수가 없다.”
당신의 목적이 바로 예루살렘에서 순교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어차피 죽어야 하는데 죽음으로 위협한들 겁을 먹을 수 있겠습니까? 죽기를 각오한 사람 앞에서 이 세상 모든 위협은 더는 위협이 되지 못합니다.
우리가 겁을 먹는 이유는 아직도 이 세상에 집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속도가 빠르면 빠를수록 생기는 것이 바로 ‘저항’입니다. 그 저항을 원치 않는다면 그냥 멈추어 서면 됩니다. 그러나 나를 미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하느님의 뜻입니다. 결국, 하느님의 뜻은 더 큰 저항을 만들어 내게 됩니다. 따라서 하느님의 뜻을 따른다고 하면서 모든 사람과 평화롭게 지내고 싶다는 생각은 버려야 합니다.
우리는 왜 남이 나를 미워하는 것을 두려워할까요? 이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가 아닙니까? 예수님은 우리도 당신 길을 따라 순교하기를 원하십니다. 이것이 가장 두려움 없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도 나를 미워하지 않도록 힘쓰며 사는 삶이 더 두려움 가득한 삶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살 필요도 없고, 믿음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렇게 살 수도 없습니다. 잃을 것이 없어야 두려움이 없어집니다. 자신의 목적지가 순교임을 명확히 아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무엇을 잃을지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믿음은 이 뜻을 명확히 내 마음에 새겨줄 것이고 다 잃어도 두렵지 않은 마음을 가지게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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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신문 홍보를 위해 출장을 다니면서 준비물을 챙기게 됩니다. 신분증, 핸드폰, 지갑, 옷, 상비약, 노트북, 책, 제의, 충전기, 구독신청서, 신문, 필기구를 준비합니다. 신분증은 비행기 탑승을 위해서 꼭 필요합니다. 핸드폰은 어려울 때 도움이 되는 친구와 같습니다. 정보를 검색하고, 표를 예약하고, 송금도 하고, 소식을 전할 수 있습니다. 지갑은 필요한 것을 얻는 데 도움이 됩니다. 옷과 상비약은 약방의 감초와 같습니다. 노트북은 강론을 준비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책은 영혼의 양식입니다. 제의는 미사 때 필요합니다. 특히 저는 체구가 작은 편이라서 저의 제의가 더 필요합니다. 구독신청서와 신문은 제가 출장을 가는 이유이기에 꼭 챙겨야 합니다. 출장을 다니면서 재미있는 경험과 뜻하지 않는 경험도 하게 됩니다. 세상은 넓고도 좁다는 것을 실감합니다. 이야기를 하다 보면 연결고리가 있어서 아는 사람을 보게 됩니다. 가끔 비행기가 연착되는 것은 바라지 않는 경험이지만 종종 있습니다.
한번은 아침 7시 40분 비행기가 오후 6시 40분으로 연착된 적이 있습니다. 혹시 빠른 비행기가 있을지 몰라서 예정대로 공항으로 갔습니다. 다행히 오전 11시 40분 비행기가 있어서 4시간만 공항에 머물 수 있었습니다. 항공사에서는 음식을 먹을 수 있는 쿠폰을 문자로 보내주었습니다. 아쉬운 것은 맥주와 같은 주류는 안 되고 음식만 주문할 수 있습니다. 지난번에도 깜빡하고 맥주를 시켰는데, 이번에도 그랬습니다. 공항에서 주어진 4시간은 생각보다 빨리 지나갑니다. 2시간은 산보하면서 보낼 수 있습니다. 1시간은 강론을 준비하면서 보낼 수 있습니다. 1시간은 책을 읽고, 쿠폰으로 음식을 먹을 수 있습니다. 생각하기 나름입니다. 비행기가 연착되어서 집에도 늦게 도착하고, 일정에 차질을 빚는 것 때문에 짜증이 날 수 있지만, 어차피 연착되었으니 시간을 즐기는 것도 하나의 방법입니다. 책도 읽고, 산보도 하고, 강론도 준비하니 ‘1석 3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도 돌아갈 비행기를 구하였으니 감사할 일입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박해의 시대를 견딜 수 있는 준비물을 이야기합니다. 험난한 세상을 살아가야 할 신앙인들에게 필요한 준비물을 이야기합니다. 그것은 2000년 전의 먼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 우리에게도 해당하는 준비물입니다. 바오로 사도가 이야기하는 준비물을 함께 하고 싶습니다. “진리로 허리에 띠를 두르고 의로움의 갑옷을 입고 굳건히 서십시오. 발에는 평화의 복음을 위한 준비의 신을 신으십시오. 무엇보다도 믿음의 방패를 잡으십시오. 여러분은 악한 자가 쏘는 불화살을 그 방패로 막아서 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구원의 투구를 받아쓰고 성령의 칼을 받아 쥐십시오. 성령의 칼은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진리, 의로움, 평화의 복음, 믿음, 구원의 투구, 성령의 칼을 이야기합니다. 성령의 칼은 하느님의 말씀이라고 설명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 이런 모든 시련을 이겨낼 수 있도록 기도를 부탁하였습니다. 우리가 하느님께로 가기 위해서 꼭 필요한 준비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이라는 권력 앞에 당당하게 맞섰습니다. 두려워하거나, 피하거나,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십자가를 남에게 넘기지 않았습니다. 외로움도, 고통도, 죽음도 받아들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오늘도 내일도 그다음 날도 내 길을 계속 가야 한다. 예언자는 예루살렘이 아닌 다른 곳에서 죽을 수 없기 때문이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하며 우리 또한 주님의 길을 충실하게 따라가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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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13,31-35: 암탉이 병아리를 날개 아래 모으듯이 했건만
“헤로데가 선생님을 죽이려고 합니다.”(31절). 바리사이파 사람이 와서 이렇게 일러드린 것은 하느님의 백성이면서 올바로 살지 않아 하느님 나라를 빼앗기고 하느님 나라에서 쫓겨날 것이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그분의 가르침으로 많은 사람이 그분을 따르게 되면 지도자의 지위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예수께 떠나라고 했다. 주님께서는 헤로데를 두고 “가서 그 여우에게 이렇게 전하여라. 보라, 오늘과 내일은 내가 마귀들을 쫓아내며 병을 고쳐 주고, 사흘째 되는 날에는 내 일을 마친다.”(32절) 군중이 예수님을 믿고 따를까 염려했던 일을 하신다고 하셨다. 이것은 그분이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자진하여 십자가의 고난을 견디시겠다는 말씀이다. 주님께서는 그러므로 언제 어떻게 육신의 죽음을 겪으실 것인지 다 알고 계시다.
“예언자는 예루살렘이 아닌 다른 곳에서 죽을 수 없기 때문이다.”(33절)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이 많은 예언자의 피를 흘리게 한 죄 많은 도시임을 밝히시면서, 예언자는 예루살렘 아닌 다른 곳에서는 죽을 수 없다고 하신다. 그들은 하느님의 백성이라는 지위도 빼앗기고, 하느님 나라를 상속받을 수도 없는 처지가 되었다. 주님께서는 그들이 하느님의 선물을 잊어버리고 마음이 굳어져 자기들에게 도움이 될 것들을 가벼이 여긴 것을 이렇게 표현하셨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예언자들을 죽이고 자기에게 파견된 이들에게 돌을 던져 죽이기까지 하는 너! 암탉이 제 병아리들을 날개 밑으로 모으듯, 내가 몇 번이나 너의 자녀들을 모으려고 하였던가? 그러나 너희는 마다하였다. 보라, 너희 집은 버려질 것이다.”(34-35절)
그분은 모세를 시켜 그들을 가르치셨고, 바른 몸가짐과 칭송받을 만한 삶의 인도자로 율법을 주셨다. 율법은 그림자이지만 그 안에는 참된 경배의 예형이 들어있다. 그분은 거룩한 예언자들을 보내어 그들을 타이르셨다. 그렇게 당신 날개 아래에서 당신의 권능으로 지켜 주려 했으나 그들은 말씀을 듣지 않음으로 축복을 잃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은 복되시어라.’ 하고 말할 날이 올 때까지, 정녕 나를 보지 못할 것이다.”(35절) 예수님은 이제 예루살렘을 떠나, 당신께서 고난을 겪으실 때가 되면 다시 돌아오시겠다는 말씀이다. 우리의 잘못으로 주님을 우리에게서 밀어내지 않고 그분의 뜻을 사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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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인천교구 정천 사도 요한 신부님]
오늘 제1독서는 ‘에페소서’의 마지막 권고 단락입니다. 여기서 바오로 사도는 신앙인들의 여정을 악의 세력과 전투하는 것으로 묘사합니다. 그리고 이 전투에 하느님의 무기로 완전히 무장할 것을 주문합니다. 우리 몸에 갖추어야 할 무장을 조목조목 나열하는 부분은 매우 인상적입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갖출 요소들이 허리띠, 갑옷, 신발, 방패, 투구, 칼과 같이 당대에 실제로 쓰였던 전쟁 도구에 비유되기 때문입니다.
먼저, 허리띠는 허리 주변의 옷을 동여맴으로써 전투 과정에서 신속하고 활발하게 움직일 수 있게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계시하신 “진리”의 가르침으로 허리에 띠를 두르고 영적 전투에 참여할 태세를 갖춥니다. 하느님을 닮아 정의롭게 되려는 노력, 곧 일상에서 “의로움”을 실천하려는 자세는 악의 공격에서 우리 몸을 보호하는 갑옷을 입음에 비길 수 있습니다(이사 59,17 참조). 발에 “평화의 복음을 위한 준비의 신”을 신으라 함은 악한 세력의 방해에 굴복하지 말고 평화의 복음을 전파하려는 열정을 언제나 갖추고 있으라는 뜻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지니는 굳건한 “믿음”은 악한 자가 쏘는 불화살, 곧 악의 세력이 던지는 거센 유혹을 막아 내는 튼튼한 방패 구실을 합니다. 투구는 우리 몸에서 매우 중요한 부위인 머리를 보호하는 구실을 합니다. “구원의 투구를 쓰라” 함은(이사 59,17; 1테살 5,8 참조) 우리의 머릿속 모든 생각을 하느님께서 이루실 구원에 대한 확신으로 무장하라는 뜻입니다. 마지막으로 칼을 언급하시는데, 앞선 도구들이 방어하는 수단이었다면 칼은 공격에 쓰이는 도구입니다. 악의 세력에 대항하는 유일한 공격 수단은 성령의 칼로, 이는 곧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오늘 독서 말씀을 통해서 마치 전투를 앞둔 병사처럼 비장한 각오를 다지게 됩니다. 우리가 신앙 여정 안에서 상대해야 할 적은 매우 강한 세력들입니다. 끊임없이 우리를 죄악으로 유혹하며 하느님에게서 멀어지게 할 간계를 꾸밉니다. 이들에게 대항할 수 있도록 진리와 의로움, 복음에 대한 열정과 굳건한 믿음, 구원에 대한 확신과 하느님의 말씀으로 우리를 무장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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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강영구 루치오 신부님]
<下覽閑江 (하람한강)>
저는 몇 년 전 낙동강변에 있는 ‘가르멜의 모후 수녀원’에서 살았습니다. 사제관은 낙동강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도도하게 흐르는 강물은 너무나 고요해서 전율할 지경이었습니다.
그토록 큰 강물이 흐르고 있는데도 아무 소리가 나지 않는다는 사실이 너무나 큰 충격이었습니다.
3급수도 안 되는 혼탁하고 더러운 강물은 상처투성이입니다. 온갖 잡동사니와 쓰레기들, 갖가지 부유물과 죽은 것들을 안고 강물은 소리 없이 바다로 향해 흐릅니다.
그래도 그 강물은 살아있을 뿐 아니라 낙동강변에 사는 2천만 시민들의 생명의 물입니다.
저는 사제관의 옥호를 하람한강(下覽閑江), ‘도도하게 흐르는 강을 내려다보는 집’이라 지었습니다. 그리고 저도 저 강을 닮아야겠다고 다짐했지요.
여우같은 헤로데가 큰 강 같은 예수님의 길을 어찌 막을 수 있습니까? 권모술수와 온갖 책략, 탐욕과 권력욕에 사로잡힌 헤로데가 시끄럽게 흐르는 작은 시궁창 물이라면, 예수님은 바다를 향해 도도하게 흐르는 큰 강물입니다.
예수님은 큰 품 안에 썩은 것, 병든 것, 죽은 것들을 품고 바다로 흘러가 그것들을 정화하고 다시 살려냅니다.
아무도 예수님의 길을 막을 수 없습니다.
행복한 날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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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교구 한재호 루카 신부님]
예루살렘은 ‘평화의 도시’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예루살렘이 평화로운 도시는 아니었습니다. 기원전 587년 바빌로니아에 의하여 도시가 함락되어 성전이 무참하게 파괴되었습니다. 약 100년 뒤에 도시가 재건되었으나 이후 그리스, 이집트, 시리아 등 주변 강대국에게 침탈을 당하였습니다.
예수님 시대에도 예루살렘은 로마 제국의 지배를 받고 있었습니다. 왜 예루살렘은 자신의 이름에 걸맞지 않은 역사를 지니고 있을까요? 예루살렘은 하느님을 모시는 성전을 갖추고 있었으면서도 우상 숭배를 마다하지 않았고, 하느님의 뜻을 거슬러 가난한 이들을 착취하였습니다.
예언자들은 이를 비판하며 예루살렘의 멸망을 선포하지만, 그곳 주민들은 회개하기는커녕 오히려 예언자들을 박해하거나 죽였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대로 평화의 도시 예루살렘은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루카 복음 19장 42절) 몰랐던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오늘도 내일도 그다음 날도 내 길을 계속 가야 한다. 예언자는 예루살렘이 아닌 다른 곳에서 죽을 수 없기 때문이다.”
예언자들 가운데 최고의 예언자이신 예수님께서는 다른 예언자들처럼 그곳에서 목숨을 바치시고자 하십니다. 이는 예루살렘에서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아 있는 이들을 비추시고 그들의 발을 평화의 길로 이끌어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이윽고 그곳 골고타산에서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루카 복음 23장 34절) 하시며 평화의 길을 선포하십니다.
또 그곳에서 부활하시어 “평화가 너희와 함께!”(루카 복음 24장 36절)라고 인사하시며 당신의 평화가 실현되었음을 보여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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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이압돈 압돈 신부님]
<핑계>
우리는 살아가면서 이런저런 핑계를 대곤 합니다. 핑계는 어떤 일을 정당화하기 위해 내세우는 방패막이를 말합니다.
예를 들면 주일미사에 빠진 이유에 대해 주위에 성당이 없었기 때문이라는 방패막이를 내세웁니다. 실제로 성당이 있었는지 없었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냥 대충 찾아봤는데 자기 눈에 보이지 않았을 뿐입니다.
이런 핑계는 대부분 잘못된 일에 대해 다른 것의 탓으로 둘러대는 변명입니다. 우리는 이런 핑계를 찾을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면 왜 이런 핑곗거리를 찾고 핑계를 대는 걸까요? 그 이유는 두려움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사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헤쳐나가는 것은 두려운 일입니다. 그것이 내가 잘못한 일에 대한 거라면 더더욱 그렇습니다. 이럴 때 든든한 방패막이가 하나쯤 있으면 훨씬 수월합니다.
그러나 변명, 핑계라는 방패막이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게 합니다. 또한 어려움을 정당하게 헤쳐나가지 못하게 합니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이 눈앞에 있는데도 핑계만 대고 있다면,어린아이가 해야 할 일을 앞에 두고 때 쓰고 있는 장면과 비슷할 것입니다. 그래도 어떤 일을 해야 하는데 핑곗거리가 있어 피해 갈수 있다면 그러고 싶은 게 우리 마음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우리를 구원하는 일을 해야 하지만 “이 잔을 제게서 거둬 주십시오.” 하고 기도하실 만큼 피하고 싶을 때가 있었습니다. 다시 말해 핑계를 대고 안 했으면 하는 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런 분이 아닙니다. 오늘 복음에 몇몇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와서 예수님께 좋은 핑곗거리를 제공해 줍니다. “헤로데가 당신을 죽이려고 하니 어서 이곳을 떠나시오.” 그러나 주님께서는 “예언자가 예루살렘 아닌 다른 곳에서야 죽을 수 있겠느냐?, 나는 내 길을 계속해서 가야 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주위의 많은 사람이 핑계를 댈 만한 거리를 주지만 그 모든 것을 마다하시고, 당신의 일을 계속하십니다. 그 일이란 예루살렘에서 당신을 바치는 일입니다.
예루살렘이 어떤 곳입니까? 하느님께서 보내신 사람을 돌로 치는 그곳이 아닙니까? 하느님의 뜻을 거역하는 그 심장부에서 바로 하느님의 뜻을 보여주시려 모든 것을 헤쳐나가십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는 두려움이 없는 분이십니다.
어떤 어려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예루살렘이라는 중심부에서 하느님 뜻을 보여주십니다. 우리는 두려움 때문에 핑계라는 방패막이를 찾고 있을 때 예수님은 두려움 없이 나아가십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는 핑계가 통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핑계를 대며 어떻게 좀 빠져나가 보고자 하여도 예수님께는 그 핑계가 통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 핑계를 대는 모습이 통하지는 않지만, 우리가 예수님을 닮았다면 핑계가 필요하지도 않습니다. 예수님을 닮았다면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자는 두려움을 모릅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사셨고, 또 그분은 세상을 이겼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닮아 하나 되어갈 때 우리도 그분처럼 두려움 없이 주님의 뜻을 따를 수 있습니다. 아직도 여러 일에서 핑계를 찾으며 망설이고 있다면 주님을 닮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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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나의 길>
루카 13,31-35 (죽음에 직면하시는 예수님, 예루살렘을 두고 한탄하시다)
그때에 바리사이 몇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와, “어서 이곳을 떠나십시오. 헤로데가 선생님을 죽이려고 합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가서 그 여우에게 이렇게 전하여라. ‘보라, 오늘과 내일은 내가 마귀들을 쫓아내며 병을 고쳐 주고, 사흘째 되는 날에는 내 일을 마친다. 그러나 오늘도 내일도 그다음 날도 내 길을 계속 가야 한다. 예언자는 예루살렘이 아닌 다른 곳에서 죽을 수 없기 때문이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예언자들을 죽이고 자기에게 파견된 이들에게 돌을 던져 죽이기까지 하는 너! 암탉이 제 병아리들을 날개 밑으로 모으듯, 내가 몇 번이나 너의 자녀들을 모으려고 하였던가? 그러나 너희는 마다하였다. 보라, 너희 집은 버려질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은 복되시어라.’ 하고 말할 날이 올 때까지, 정녕 나를 보지 못할 것이다.”
<나의 길>
내가 있는 한
내가 걸어야 할
나의 길
내가 없어져
더 이상
갈 수 없을 때까지
멈추지 않고
물러서지 않고
돌아가지 않아야 할
걷기에 비로소
나일 수 있는
나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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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정신 무장, 성령 무장>
지난 바자회는 하느님 은총과 여러분의 기도와 후원과 봉사 덕분에 성황리에 아주 잘 끝났습니다.
날씨는 너무 화창하고 적당히 따듯했으며 많은 분이 바자회를 찾아와 주셨고, 봉사자들은 모두 기쁘게 봉사해주셨습니다.
옥에 티가 있었다면 민원 때문에 구청 직원이 와서 그만두라고 한 것인데 그런데도 큰 문제로 만들지 않고 마지막 날까지 다하고 끝을 잘 맺었습니다.
일은 이렇게 잘 마무리되었는데 문제는 그 다음다음 날 미사 때 생겼습니다. 외부의 문제가 아니라 제 내부의 영적인 문제였지요.
하필 미사 중에 그 일이 떠오르며 그 구청 직원의 괘씸함이 눌러도, 눌러도 계속 생각나는 거였습니다.
그 어린 것이 화를 벌컥 그리고 먼저 낸 것과 구민에게 봉사해야 할 공무원이 마치 군림하듯이 행세한 것이 괘씸하여 한 번 찾아가 따지고 잘못했다는 사과를 받아야겠다는 그리고 다시는 그렇게 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받아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겁니다.
그런 제가 너무 한심하고 그런 자신을 보는 것이 너무 슬펐습니다. 프란치스코는 미사를 드릴 때 하느님께 마음을 쏟으라고 했는데 제 마음이 자꾸 그 애송이한테 가 있었고 하느님 사랑으로 충만해야 할 제 마음을 부정적 감정이 차지하고 있으니 얼마나 한심스럽습니까?
이런 저를 바오로 사도는 오늘 강하게 나무라는 듯합니다.
우리의 전투 상대는 인간이 아니라, 권세와 권력들과 이 어두운 세계의 지배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령들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오늘 바오로 사도의 말씀이 아니어도 저는 자주 그런 생각을 하고 지향을 둬왔습니다.
이 나이를 먹어서도 시시하게 사소한 인간적인 감정에 지배당하지 말자고. 하느님께 가야 할 나이에 인간 문제에 너무 많은 감정과 에너지를 뺏기지 말자고.
그런데 이렇게 지향을 두고 애를 쓰면 쓸수록 제 옆에 사탄이 늘 도사리고 있다는 느낌이 나이 들면서 점점 듭니다.
특히 형제들이나 신자들과 미사와 기도를 함께 드릴 때보다 혼자 드릴 때 하찮은 생각이나 감정이 많이 듭니다.
흔히 말하듯 제가 정신 무장이 되어있다면 이런 것들이 감히 넘보지 못할 텐데 저는 아직 정신 무장이 덜 되어있다는 표시겠지요.
이런 저와 우리에게 오늘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의 무기로 완전무장하라고 합니다. 형제 여러분, 주님 안에서 그분의 강한 힘을 받아 굳세어지십시오. 악마의 간계에 맞설 수 있도록 하느님의 무기로 완전히 무장하십시오.
그런데 하느님의 무기가 무엇입니까?
그것을 바오로 사도는 오늘 여러 말로 하고 있지만 제가 그것을 한마디 말로 줄이면 바로 성령 무장입니다.
정신 무장이라는 일반적 용어를 신앙적 용어로 바꾸면 성령 무장일 것이고, 예수님께서 광야에 나가 대적하실 때 성령의 인도를 받아 나가셨듯 악령과 싸울 때는 성령의 인도를 받고 성령으로 무장하고 싸워야 합니다.
성령 충만, 성령 무장을 마음에 새기는 오늘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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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한 마리 여우>
여우는 밤에만 은밀하게 활동하고 낮이 되어 위험할 때면 굴속에 숨는다고 합니다. 예민하고 조심스럽게 움직이기에 겉으로는 온순한 것처럼 보이나 속으로는 간교하고 음흉한 것이 특성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헤로데를 왜‘여우’라고 칭했을까요? 헤로데에게는 예수님의 전도활동이 골칫거리였습니다.(루카 9,7이하) 그는 예수님께서 자기 제자들을 선동할까 두려워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자기 영토 밖으로 내쫓고 싶어 했습니다. 그러나 드러내 놓고 그 표현을 하진 않았습니다. 예수님께 대한 어떠한 찬성이나 반대의견을 전혀 취하지 않고 예수님에게서 벗어나고 싶어 했습니다.
그야말로 간교한 교활함과 비열함을 모두 갖춘 한 마리 여우였습니다. 이렇게 보면 가끔 ‘너는 하는 짓이 여우같다’는 소리를 하는데 정말 좋은 말이 아닙니다. 랍비문학에서 여우는 간교함의 상징입니다.
어째든, 예수님께서는 이 여우와 맞서서 마귀를 쫓아내고 병을 고쳐주며 당당하게 당신의 일을 계속하셨습니다. “오늘도 내일도 그다음 날도 내 길을 계속 가야 한다. 예언자가 예루살렘 아닌 다른 곳에서 죽을 수 없다”라고 하시며(루카13,33)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으시고 끝까지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이루셨습니다.
“내가 받아야 하는 세례가 있다. 이 일이 다 이루어질 때까지 내가 얼마나 짓눌릴 것인가?”(루카12,50) 하셨지만 마침내 “다 이루어졌다.”(요한 19,30) 하시며 숨을 거두셨습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의 구원자로서 활동하셨지만, 미처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한 사람들에 의해 처형을 당할 정도로 배척을 받으셨습니다.
우리도 시련과 고통 속에서 두려움과 포기에 직면하게 될 때 주님께서 나를 통해서 이루고자 하시는 뜻이 무엇인지 찾아야 합니다. 나를 연장으로 삼아 이루고자 하시는 것이 무엇일까? 성령의 도우심을 청하면서 가야 할 길을 끝까지 걸어야 합니다. 가야 할 길이 험난한 가시밭길일지라도 가야 합니다.
예루살렘은 하느님의 사랑과 예언자들의 눈물로 세워진 도시입니다. 그런데 ‘자식’이 ‘어미’를 배척하는 불효를 저지른 것입니다. “예언자들을 죽이고 자기에게 파견된 이들에게 돌을 던져 죽이기까지 하는 너! 암탉이 제 병아리들을 날개 밑으로 모으듯이 내가 몇 번이나 너의 자녀들을 모으려고 하였던가? 그러나 너희는 마다하였다.”(루카13,34) 하는 탄식에 등 돌린 자식에 대한 아픔이 배어있습니다.
그러나 “암탉이 병아리를 날개 아래 모으듯이” 어미의 사랑은 끝내 그를 품습니다. 그리고 미래를 약속합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은 복되시어라.’ 하고 너희가 말할 날이 오리라.(13,36) 하시며 죽음이 마지막이 아니라 다시금 보게 되리라는 희망을 줍니다. 그러나 그 깨달음을 얻기까지 얼마나 긴 세월이 필요한지요?
우리의 일상 안에서도 어미의 사랑은 여전합니다. 내가 겪는, 어렵고 힘든 일이 자초했든 다른 사람에 의해왔든 주님께서는 그 안에 함께하십니다. 완고한 마음 안에도 여전히 계시고 그 마음이 풀어지기를 기다리십니다. 하느님이 어디에 계시냐? 고 항변하는 그 안에도 계십니다.
그리고 마침내 당신의 영광 안에 함께하기를 원하십니다. 분명코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깨닫게 되기를 원하십니다.”(1티모2,4) 그런데도 그분을 볼 수 없고 만날 수 없는 것은 내 눈이 가려진 탓이요, 내 마음이 여우인 까닭은 아닌지요? 나보다 나를 더 사랑하시며 나를 품고 계신 주님을 찬미하는 날 되시기 바랍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마음을 다하여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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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남들은 군대에 가면 고생해서 몸무게가 쫙 빠진다고 하는데, 저의 경우 신병교육대를 마치고서 10킬로 이상 살이 쪘습니다. 그래서 50킬로대의 몸무게가 거의 70킬로에 가깝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제게 군대 체질이 아니냐고 묻곤 했습니다.
당시에는 밥 먹고 뒤돌아서면 바로 배가 고팠습니다. 그래서 기회가 되면 무조건 빨리, 또 많이 먹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도 있더군요. 똑같이 먹고 똑같이 생활하는데도 전혀 살이 찌지 않는 사람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 사람은 먹지 않아도 될까요? 먹어도 안 먹어도 체중의 변화가 없으니 말입니다.
어차피 화장실 가서 다 뺄 것이라면서 밥을 먹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또 어차피 옷이 더러워질 것이라며 빨래하지 않고 사는 사람도 없습니다. 어차피 지저분해질 방이라면서 청소 안 하는 사람이 있다면 어리석다고 손가락질할 것입니다.
어차피 화장실을 가도, 어차피 더러워져도, 또 지저분해지더라도 해야 할 것은 해야 합니다. 특히 이 해야 할 것을 규칙적으로 할 때, 화장실 가는 것도 또 빨래나 청소하기 역시 쉬워집니다.
주님의 말씀을 들을 때만 알아듣고 고개를 돌리면 잊어버린다는 분이 계십니다. 이렇게 잘 잊어버리는데 성경 공부가 무슨 소용이 있겠냐고 하십니다. 매일 화장실 간다고 밥 먹지 않겠다고 말하는 것과 무엇이 다를까요?
주님 말씀이 전혀 이해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쓸모없다며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더 규칙적으로 주님의 말씀을 읽고 새기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성장하고 있음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바리사이 몇 사람이 “어서 이곳을 떠나십시오. 헤로데가 선생님을 죽으려고 합니다.”(루카 13,31)라고 말합니다. 바리사이는 늘 예수님을 제거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런데 왜 이런 말을 했을까요?
헤로데는 세례자 요한을 죽인 후 늘 불안에 싸여 있었습니다.(루카 9,7-9) 그래서 이제 자기 영지 안에 어떤 소요도 일어나지 않기를 바랐을 것이고, 이를 위해서는 예수님이 다른 곳으로 가야 했습니다. 이를 위해 바리사이를 부추긴 것은 아닐까요?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아직 죽음의 때가 오지 않았고, 아직도 하느님 아버지의 뜻대로 해야 할 일이 있다는 것을 밝히십니다. 그 모든 위험을 알고 있었지만, 이 모든 것이 하느님 뜻이라면 세상의 위협은 문제 되지 않습니다.
우리도 철저히 하느님의 뜻을 따라야 합니다. 반대되는 모든 세력에 동참하고 또 굴복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뜻만을 바라보며 힘차게 그 나라를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이를 위해 하느님의 뜻을 알기 위한 어떤 노력을 하고 계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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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영원한 현역의 주님의 전사들>
-영적 전쟁-
“나의 반석 주님은 찬미 받으소서.
그분은 내 손가락에 싸움을, 내 손에 전쟁을 가르치셨네.
그분은 나의 힘, 나의 산성, 나의 성채,
나의 구원자, 나의 방패, 나의 피난처,
모든 악의 세력들을 내 밑에 굴복시키셨네.”(시편144,1-2)
어제의 신선했던 충격을 잊지 못합니다. 10시30분 피정팀 14명의 미사 약속이 있었는데, 10시까지도 조용하기에 혹시 피정을 취소했나 생각했는데 임박해 가보니 13명 자매들과 1명의 형제가 미사 준비를 끝내고 앉아 있었습니다. 오랜만에 예쁘고 건강한 피정자들을 보니 반갑고 힘이 났습니다. 순간 피정자들이 “하느님의 선물”이란 순간적 깨달음이 새로웠습니다.
하느님의 선물임과 동시에 하느님의 전사, 믿음의 전사인 우리들입니다. 수도생활 처음부터 참 많이 강론 주제로 등장했던 “영적전쟁-주님의 전사”였습니다. 수도자는 물론 믿는 이들 모두가 제대가 없는 죽어야 끝나는 평생 영원한 현역의 주님 전사입니다.
정말 하루하루가 끊임없는 영적훈련에다 영적전쟁 중의 삶 같습니다. 규칙적 일과에 따라 아침 4시30에 기상과 동시에 시작되는 영적전투의 삶은 8:00시 끝기도로 끝나는 느낌입니다. 그래서 가장 해방감을 느끼는 자유로운 시간은 하루의 영적 전투가 끝났을 때의 끝기도 후 잠자리에 들 때입니다.
인류 역사와 시작된 전쟁입니다. 예나 이제나 생존경쟁 치열한 흡사 전쟁터 같은 세상입니다. 작금의 사회 현실이나 여야의 대립을 보면 그대로 전쟁 상황 같은 느낌입니다. 평화를 갈망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전쟁은 늘 있었습니다. 공격성, 잔인성, 폭력성이 내재한 인간 같습니다. 바로 이런 부정적 성향과 에너지를 분출시키는 대체재가 스포츠 운동 경기가 아닌가 싶습니다.
실제 전쟁의 참화는 너무 큽니다. 좋은 전쟁보다 나쁜 평화가 백배 낫습니다. 이런 실제 전쟁을 영적전쟁으로 변환시키는 것이 지혜입니다. 인간을 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이기적 나를, 눈에 보이지 않는 악의 세력을 영적 전투의 대상으로 삼는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우리 믿는 이들은 영원한 현역의 주님 전사들입니다. 믿음의 전사, 평화의 전사, 사랑의 전사, 기도의 전사들입니다. 참으로 평화를 위해 싸우는 주님의 전사들입니다.
오늘 제1독서 에페소서도 하느님의 무기로 무장하고 영적 전투에 임하라는 내용으로 가득합니다. 실감 나는 묘사를 그대로 인용합니다.
“주님 안에서 그분의 강한 힘을 받아 굳세어지십시오. 악마의 간계에 맞설 수 있도록 하느님의 무기로 완전히 무장하십시오. 우리의 전투 상대는 인간이 아니라, 권세와 권력들과 이 어두운 세계의 지배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령들입니다. 모든 채비를 마치고서 이들에게 맞설 수 있도록 하느님의 무기로 완전한 무장을 갖추십시오.
1. 진리로 허리에 띠를 두르고,
2. 의로움의 갑옷을 입고 굳건히 서십시오. 발에는
3. 평화의 복음을 위한 준비의 신을 신으십시오. 무엇보다도
4. 믿음의 방패를 잡으십시오. 여러분은 악한 자가 쏘는 불화살을 그 방패로 막아서 끌 수 있을 것입니다.
5. 구원의 투구를 받아쓰고,
6. 성령의 칼을 받아 쥐십시오. 성령의 칼은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여러분은 성령 안에서,
7. 온갖 기도와 간구를 올려 간청하십시오. 그렇게 할 수 있도록,
8. 인내를 다하고 모든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며,
9. 깨어 있으십시오.
말 그대로 하느님의 무기로 완전 무장한 모습입니다. 진리, 의로움, 평화, 믿음, 구원, 성령, 말씀, 기도, 인내, 깨어 있음 등 바로 이것이 하느님의 무기요 우리 주님의 전사들이 무장해야 할 영적 무기들입니다. 이렇게 하느님의 무기로 무장할 때 백전백승에 영육의 피해도 최소화할 수 있습니다.
바로 우리가 끊임없이 바치는 시편 성무일도와 미사 공동전례기도 시간은 영적 훈련시간이자 이런 하느님의 무기로 무장하는 시간임을 깨닫습니다. 이렇게 하느님의 무기로 무장하고 하루하루의 영적전쟁을 치러야 하는 우리입니다. 그러니 에페소서를 쓴 바오로 사도야 말론 불퇴전의 영적전투의 베테랑, 주님의 전사임을 깨닫게 됩니다. 마지막 말씀이 심금을 울립니다.
“복음의 신비를 담대히 알릴 수 있도록 나를 위해서도 간구해 주십시오. 이 복음을 전하는 사절인 내가 비록 사슬에 매여 있어도, 말을 해야 할 때에 이 복음에 힘입어 담대해 질 수 있도록 말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 역시, 대부분 메시지 끝에는 “나를 위해 기도해 달라”는 당부를 꼭 첨가합니다. 옥중에 수인으로 있어도 치열한 영적전투 중인, 주님의 전사 바오로 사도입니다. 예수님의 예루살렘에서의 마지막 영적 결전을 앞둔 상황은 얼마나 비장해 보이는지요. 자기를 죽이려는 헤로데를 여우로 격하시키며 전의를 새롭게 하는 하느님의 전사, 예수님입니다.
“가서 그 여우에게 이렇게 전하여라. ‘보라, 오늘과 내일은 내가 마귀들을 쫓아내며 병을 고쳐 주고, 사흘째 되는 날에는 내 일을 마친다. 그러나 오늘도 내일도 그다음 날도 내 길을 계속 가야 한다. 예언자는 예루살렘이 아닌 다른 곳에서 죽을 수 없기 때문이다.”
사명 수행의 결의를 새로이 하며 죽음을 준비하는 하느님의 전사, 예수님입니다. 오늘 복음 환호송도 하느님의 전사, 예수님에 대한 고백이 참 아름답고 힘을 줍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 찬미 받으소서.
하늘에 평화, 지극히 높은 곳에 영광!”
이어 예루살렘을 심판을 예고하시며 안타까워하는 예수님 모습이 흡사 우리를 두고 하는 말씀처럼 들립니다.
“예수살렘아, 예루살렘아! 예언자들을 죽이고 자기에게 파견된 이들에게 돌을 던져 죽이기까지 하는 너! 암탉이 제 병아리들을 날개 밑으로 모으듯, 내가 몇 번이나 너의 자녀들을 모으려고 하였던가? 그러나 너희는 마다하였다.”
예루살렘이 상징하는바 우리입니다. 그대로 우리들의 회개를 촉구하는 말씀처럼 들립니다. 믿는 우리들의 삶은 영적전쟁입니다. 죽어야 끝나는, 살아있는 그 날까지 계속될 영적전쟁이요 영원한 현역의 주님의 전사들인 우리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 은총으로 우리를 영적 전의를 새롭게 하시고 하느님의 무기로 완전 무장시켜 주시어, 하루하루 날마다 영적승리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주님, 당신의 구원에 우리가 환호하며, 하느님 이름으로 깃발을 높이리이다.”(시편20,6).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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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오늘도 내일도 그다음 날도 내 길을 계속 가야 한다."(루카13,33)
<악마와 맞서 싸워 승리하자!>
오늘 복음(루카13,31-35)은 '죽음에 직면하시는 예수님과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두고 한탄하시는 말씀'입니다.
바리사이 몇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와, "어서 이곳을 떠나십시오. 헤로데가 선생님을 죽이려고 합니다." 하고 말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헤로데를 여우라고 하시면서 그들에게 이렇게 이르십니다. "오늘도 내일도 그다음 날도 내 길을 계속 가야 한다. 예언자는 예루살렘이 아닌 다른 곳에서 죽을 수 없기 때문이다."(루카13,33) 그리고 이어서 당신을 죽이려고 하는 예루살렘을 두고 한탄하십니다.
악마의 세례들, 곧 헤로데나 바리사이들이나 율법 학자들처럼 권력과 권세의 무리들인 악마의 세력들이 꾸미는 간계는 '죽음'입니다. 목적지에 이르지 못하도록 혼란을 부추기면서 방해하고, 결국에는 목적지에 이르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이런 악마의 세력들이 꾸미는 간계에 당당하게 맞서 싸워 이겨야 한다는 메시지를 우리에게 전합니다.
오늘 독서(에페6,10-20)도 같은 메시지를 전합니다. 오늘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우리에게 이렇게 권고하고 있습니다.
"주님 안에서 그분의 강한 힘을 받아 굳세어지십시오. 악마의 간계에 맞설 수 있도록 하느님의 무기로 완전히 무장하십시오. 우리의 전투 상대는 인간이 아니라, 권세와 권력들과 이 어두운 세계의 지배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령들입니다."(12-13절)
"무엇보다도 믿음의 방패를 잡으십시오. 여러분은 악한 자가 쏘는 불화살을 그 방패로 막아서 끌 수 있을 것입니다."(16절)
"그리고 구원의 투구를 받아 쓰고 성령의 칼을 받아 쥐십시오. 성령의 칼은 하느님의 말씀입니다."(17절)
바오로 사도의 이 권고가 지금 여기에서 실행되어, 호시탐탐 나를 노리고 있는 악마의 간계에 빠져들지 않고 승리하는 하느님의 자녀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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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ByzQz3UqPm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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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예언자는 예루살렘이 아닌 다른 곳에서 죽을 수 없기 때문이다."(루카 13, 33)
엄청난
하느님의 계획을
만납니다.
우리 곁에 오신
예수님의 마지막
삶이 다름 아닌
예루살렘임을
다시 만나게
됩니다.
구원의 여정을
충실하게
걸어가시는
주님이십니다.
실행에 옮기시는
예수님을 통해
길을 찾아
열심히 걸어가는
많은 신앙인을
다시 보게 됩니다.
떠날 때를
아는 것이
새로운 세계를
열어주는 만남이
됩니다.
삶의 소중한 가치는
삶을 살아내려고
노력한 내용의
가치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받아들임의 삶을
온몸으로
보여주십니다.
갈릴래아도
예루살렘도
모두 스승으로
다가옵니다.
필요한 것은
포용의
마음입니다.
사랑과 인내가
필요한 길입니다.
포용과 설득으로
우리를 초대하시는
예수님의
사랑이십니다.
죽음이 있기에
삶이 소중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예루살렘의
마지막 여정을
받아들이십니다.
목숨을 건
구원의 여정에서
사랑의 열정을
만납니다.
복음도 열정이며
십자가도
열정입니다.
구원을 향한
뜨거운 열정이
행복한 예수님의
삶이었습니다.
목숨을 걸고
열정을
불태우시는
사람의 아들
예수님이십니다.
우리의 열정은
어디에 있는지를
묻습니다.
열정의 시작이
십자가이며
용기임을
배우는 시간입니다.
우리의 예루살렘에서
예수님과 같이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를 청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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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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