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을 감사하며, 5월의 일기, 빈 둥지
2024년 5월 20일 월요일인 바로 오늘 일이다.
아내와 함께 ‘햇비농원’ 우리들 텃밭을 다녀왔다.
나는 예초기로 텃밭 둘레의 잡초를 쳐내야하는 농사가 있었고, 아내는 오이며 가지며 토마토며 갖가지 채소에 물을 줘야하는 농사가 있어서였다.
그 틈새에 아내가 가꾸는 앞뜰 꽃밭도 둘러보고, 텃밭 위쪽의 매실이 익어가는 풍경 구경도 했다.
장미꽃이 흐드러지게 피었고, 초록빛 매실이 알차게 익어가고 있었다.
“어? 저게 뭐야?”
매실나무 저 위쪽에 뭔가 끼어 있는 것 같았다.
의자 하나를 들고 와서 받침대로 삼아 올라가봤다.
바싹 마른 새둥지가 나뭇가지 사이에 끼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빈 둥지였다.
새로 그 둥지를 찾을 새가 없겠다 싶어서, 그 둥지를 고이 떼어내었다.
나뭇가지로도 엮었지만, 비닐 같은 것으로도 엮어서 지은 새둥지였다.
지난해 봄에 지은 것이겠다 싶었다.
그 빈 둥지를 보는 동안에, 문득 떠오르는 추억이 하나 있었다.
11년 전으로 거슬러 이맘때에 쓴 글에 대한 추억이었다.
그 추억을 떠올리다 보니, 또 콧잔등이 시큰해지고 두 눈시울이 뜨거워지고 있었다.
다음은 2013년 3월 15일에 ‘My Life-빈 둥지’라는 제목의 글로, 내가 카페지기인 우리들 Daum카페 ‘아침이슬 그리고 햇비’에 게시한 그 글 전문이다.
아내가 집을 비웠다.
아내가, 지난 1월에 취업차 일본으로 건너간 막내가 보고 싶다면서 2013년 3월 14일 목요일인 어제 오후 4시 25분 발 도쿄 행 비행기를 탔다.
서초동 우리 집에 함께 사시는 장모님도 손자 보고 싶다면서 따라나서는 바람에 집 분위기가 횅한 빈 둥지 같았다.
물설고 낯설고 음식도 선 타국 일본에서 혼자 외롭게 생활하는 막내를 조금이라도 더 챙겨주고 싶은 생각에서, 요 며칠 사이에 김치를 담근다느니 소고기 장조림을 만든다느니 하면서 분주했던 아내의 모습이 사라진 집은 정말 썰렁하기 짝이 없었다.
낮 2시쯤 해서, 도쿄 행 비행기를 타는 김포공항까지 아내와 장모님을 차 태워 데려갈 때만 해도, 잘 견뎌낼 것만 같았다.
식은 된장국을 덥히고, 냉장고에서 김치를 꺼내고, 보온된 밥통에서 밥 두 주걱을 퍼는 둥 해서, 대충 저녁 끼니를 때울 때까지도 그런대로 괜찮았다.
지저분해진 그릇들을 싱크대에서 씻으면서 생각이 하나둘 일기 시작했다.
그 생각의 핵심은 고독(孤獨)과 잔해(殘骸)였다.
누구나 할 것 없이, 그 언젠가는 혼자일 것이고 그리고 흔적 없이 스러지고 말 것이고, 나도 내 아내도 다 마찬가지라는 생각에 다다르자, 그만 울적해지기 시작했다.
1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서울 양천구 목동에서 살다가, 직장을 서울지방검찰청으로 옮기면서, 가까운 곳에서 직장을 다닐 요량으로 마련한 것이, 지금의 서초동 우리 집이다.
그 처음만 해도, 우리 집은 사람들로 들끓어 참 붐비는 집이었다.
나와 내 아내, 그리고 두 아들과 장모님만 해도, 다섯 한 가족이었으니, 그것만으로도 집안은 늘 벅적거리는 분위기였다.
그리고 너무 너무 고맙게도 우리 집안에 있어 가장 소중한 존재인 큰며느리도 맞았고, 또 너무 너무 기쁘게도 사랑하는 손녀 서현이도 태어났다.
게다가 집안 혈육들과도 편한 관계여서, 직계의 형제자매들뿐만이 아니라, 대구며 부산이며 해서 친인척들이 수시로 드나들어, 살림을 맡아 하는 아내로서는 늘 힘든 일상을 보내야 했다.
당연히 심신이 지칠 수밖에 없고, 당연이 비용이 더 덜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그래도 그때가 어울림이 있고 사람 냄새가 있어서 좋은 시절이 아니었던가 싶다.
그 이후의 삭막해지는 집안 분위기를 보면 그렇다.
장가든 맏이는 결혼하자마자 분가해서 떠났고, 편한 관계였던 집안 혈육들은 갖가지 이유로 멀어져갔고, 마침내는 ‘천사표’라는 별명이 붙여질 정도로 그렇게도 착하기만 한 막내까지 일본으로 건너가고 나서는, 서초동 우리 집은 어쩔 수 없이 적막한 분위기로 빠져들고 말았다.
게다가 가끔씩이라도 서초동 우리 집을 들러서 나와 내 아내 그리고 우리 장모님과 말동무가 되어주던 처제까지, 오랜 투병 끝에 지난해 여름에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고, 이어서 동서를 비롯해서 조카 둘과의 만남도 뜸해지고 말았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다보니, 내 기분이 울적해질 수밖에 없었고, 시간이 흘려갈수록 그 도가 지나쳐 짙은 슬픔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심심풀이로 군것질 할 생각도 없었고, 평소 잘 보던 TV도 재미가 없었다.
켜놓은 채 보는 둥 마는 둥 했다.
아내가 출국하기 직전에, 내가 카페지기인 Daum카페 ‘아침이슬 그리고 햇비’에 써놓은 글 한 편도 내 슬픈 심기를 슬쩍 건드리고 있었다.
‘한 줄 속닥속닥’이라는 글쓰기 공간에 쓴 글로, 이런 내용이었다.
「오후 4시25분 발 비행기로 일본에 있는 작은아들한테 갑니다. 어제 아들 봄 양복도 한벌 사고 김치도 조금 담그고 대천현대수산 김도 주문하고 장조림 조금 하고 바빴습니다. 아들한테 일자리 하나 알아보라고 했는데 아직 소식이 없어 다시 돌아와야겠어요. 가서 즐거운 시간 보내고 오겠습니다.」
아내와 부부되어 살아온 35년 세월이, 주마등처럼 내 뇌리를 스쳐지나가고 있었다.
단 하루를 아내 편하게 한 날이 없었다.
검찰수사관 시절에는 수사 핑계로 외박은 밥 먹듯 했고, 집행관을 거쳐 법무사인 지금에 이르기까지에는 주위를 챙겨야 한다는 이유로 술 마시기를 밥 먹듯 하고 있으니, 편할 날이 있을 리 만무했다.
주식으로 깨지고 부동산으로 깨지고 해서, 경제적으로도 궁핍한 나날들이 숱했다.
그렇다고 해서, 집안에서 맏며느리 대접을 제대로 받지도 못했다.
누구 탓할 것도 없이 서로가 고마워할 줄 모르는 집안 분위기로 인해, 아내는 늘 공으로 의무만 떠안아야 했다.
또 그렇다고 해서, 내 딱히 ‘이렇게 하겠다.’ 또는 ‘저렇게 하겠다.’라고 해서 아내를 위해 뭔가 다짐해줄 수 있는 세월도 아니었다.
다른 주위로부터 받치는 사연도 감당하기 쉽지만은 않았기 때문이다.
늘 그렇듯, 결국, 해답은 없었다.
그저 생각만 그렇게 미처 또 미처 갔을 뿐이다.
그 사이, 베갯잇은 푹 젖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