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도열차 [이병률]
- 대륙에 사는 사람들은 긴 시간 동안 열차를 타야 한다
며칠 동안 열차를 타야 하는 대륙사람들은
만나고 싶은 사람이나 친척들을 아주 잠깐 동안이나마
열차가 쉬어 가는 역에서 만난다
그리고 그렇게 만나면서 사람들이 우는 모습을
나는 여러 번 목격했다
이번 어느 날,
저는 열차를 타고
당신이 사는 델 지나친다고
편지를 띄웠습니다
5시 59분에 도착했다가
6시 14분에 발차합니다
하지만 플랫폼에 나오지 않았더군요
당신을 찾느라 차창 밖으로 목을 뺀 십오분 사이
겨울이 왔고
가을은 저물 대로 저물어
지상의 바닥까지 어둑어둑했습니다
- 이병률 시인의 '장도열차' 시작,2002 가을호
밤 열차 / 이동순
밤 열차가 간다
덜커덩거리는 소리는 끝이 없다
언제 다 지나갈 것인가
나는 나도 모르게
열차의 수량을 헤아린다
아, 지금
어딘가 멀지 않은 곳에
나처럼 잠이 깨어 덧없이 열차의 수를
헤아리고 있는 사람이
있으리라
이 밤이 다 가기 전
내 그와 만나
한 잔의 쓴 탕약과도 같은 인생을
함께 마시고 싶다
- 아름다운 순간, 문학사상사, 2002
귀성 열차/신경림
눈 위에 주름 귀 밑에 물사마귀
다들 한결같이 낯설지가 않다
아저씨 워데까지 가신대유
한강만 넘으면 초면끼리 주고받는
맥주보다 달빛에 먼저 취한다
그 저수지에서 불거지 참 많이 잡혔지유
찻간에 가득한 고향의 풀냄새
달빛에서는 귀뚜라미 울음도 들린다
아직 대목장이 제법 크게 슨대면서유
쫓기고 시달린 삶이 꼭 꿈결 같아
터진 손이 조금도 쓰리지 않고
감도꽤 붉었겠지유 인제
이 하루의 행복을 위해
흘린 땀과 눈물도 적지 않으리
여봐유 방앗간집 할머니 아니슈
돌려 세우면 처음 보는 시골 늙은 아낙
선물 보따리가 달빛 속을 달려가고
너무 똑같아 실례했슈
모두들 모르는 사람들이어서
낯선 데가 하나도 없는 귀성열차
- 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 창작과비평사, 1998
완행열차 [허영자]
급행열차를 놓친 것은 잘된 일이다.
조그만 간이역의 늙은 역무원
바람에 흔들리는 노오란 들국화
애틋이 숨어있는 쓸쓸한 아름다움
하마터면 나 모를 뻔하였지.
완행열차를 탄 것은 잘된 일이다.
서러운 종착역은 어둠에 젖어
거기 항시 기다리고 있거니
천천히 아주 천천히
누비듯이 혹은 홈질하듯이
서두름 없는 인생의 기쁨
하마터면 나 모를 뻔하였지
- 모순의 향기, 시인생각, 2013
1942열차 / 문태준
광양에서 하동 지나 삼랑진 지나 물금 지나 부전 가네
세 량의 객차를 달고 가네 북천 사람은 함안 사람을
부르네 함안 사람은 마산 사람을 부르네 나발과 꽹과리를
불고 치듯 시끌시끌하게 덜컹덜컹거리며 가네 젖먹이
아이와 젊은 연인과 축하객이 함께 가네 침침하고 눈매가
가느스름한 김천 출신의 나도 끼여 가네 시냇물에 고무신
미끄러지며 떠내려가듯 가네 소나기 구름 실어 나르는
바람의 널빤지 가듯 가네 연한 버들과 높은 미루나무와
먼 무지개를 싣고 가네 들판 수로의 깨끗한 물과 무논에
비추어보며 가네 무논에 비친 푸른 봄산은 일하는 소가
등에 태우고 가네 신록(新綠)이 가네 보자기를 풀어놓을
시간만큼 조금 조금씩 역마다 연착하면서
- 내가 사모하는 일에 무슨 끝이 있나요, 문학동네, 2018
동백열차 [송찬호]
지금 여수 오동도는
동백이 만발하는 계절
동백 열차를 타고 꽃구경 가요
세상의 가장 아름다운 거짓말인 삼월의 신부와 함께
오동도, 그 푸른
동백섬을 사람들은
여수항의 눈동자라 일컫지요
우리 손을 잡고 그 푸른 눈동자 속으로 걸어 들어가요
그리고 그 사랑이 허튼 맹세라면 사자처럼 용맹한
동백들이 우리의 달콤한 언약을 모두 잡아먹을 거예요
말의 주춧돌을 반듯하게 놓아요 풀무질과 길쌈을 다시 배위요
저 길길이 날뛰던 무쇠 덩어리도 오늘만큼은
화사하게 동백열차로 새로 단장됐답니다
삶이 비록 부스러지기 쉬운 꿈일지라도
우리 그 환한 백일몽 너머 달려가 봐요 잠시 눈 붙였다
깨어나면 어느덧 먼 남쪽 바다 초승달 항구에 닿을 거예요
- 붉은 눈, 동백, 문학과지성사. 2000
야간열차에서 만난 사람 [곽효환]
여수행 전라선 마지막 열차
자정을 앞둔 밤 열차는 우울하다
듬성듬성 앉은 사람들을 지나 자리를 찾고
헝클어진 머리를 쓸어 올리고 긴 숨을 내뿜고 나면
일정한 간격으로 덜그럭거리며 출렁이는
리듬을 따라 차창 밖으로 불빛이 흘러간다
강을 건너 한참을 달려도 끝없이 이어지는 야경들,
틈새가 없다
문득 창밖으로
어디서 본 듯한 그러나 낯선 얼굴이
물끄러미 나를 보고 있다
나는 그에게
그는 나에게
무엇인가 할 말이 있는 것 같은데
무엇인가 곧 물을 것만 같은데
정작 말이 없다
흘러간 불빛만큼이나 아득한 지난날들에서
누군가를 찾는데
없다
나도 그도 아무도 없다
문득 대전역에서 뜀박질하며 뜨거운 우동 국물이 먹고 싶다
옛날처럼
- 인디오 여인, 민음사, 2006
원산 [유진목]
원산으로 가는 열차에 올라
혼자서 잠이 들었다
한 사람은 지키지 않을 약속을 하고
한 사람은 약속을 따르는 것처럼
원산으로 가는 열차는 가득 차고
옆자리는 비어 있었다
어디로든 이동하는 동안에는 잠이 쏟아진다
창밖에는 눈이 쏟아지는 것처럼
깨어나면 낯선 이가 옆에 앉아 창밖을 내다보고 있다.
원산으로 가요
거기서 살아요
창문이 덜컹이는 방에 나란히 누워
한 사람이 천장을 가리키면
한 사람이 천장을 보는 것처럼
깨어나면 또 다른 이가 옆에 앉아 창에 기대어 졸고 있다
플랫폼에는 이불을 닮은 눈이 소복이 쌓여 있어
저기 저 열차는 바람에 흔들리는 창문 같지
이불은 차고
베개는 낮고
어느새 나타난 역무원이 호각을 불어
새들이 멀리 흩어지는 것처럼
나는 원산행 열차에 올라
잠이 들었다.
- 작가의 탄생, 민음사, 2020
사물의 깊이를 어떻게 만들어낼 것인가 [이현승]
이기는 데는 우연한 승리가 있지만
지는 데는 우연한 패배가 없다는 말은
노무라 가쓰야* 감독의 것이다.
그건 실패로부터 철저히 배우라는 뜻이고
실패가 그만큼 더 가까운 스승이라는 뜻도 된다.
가령, 죽을 힘으로 뛰었으나 눈앞에서 전철을 놓쳤고.
약속시간은 15분 후인데 배차간격은 30분일 때,
걷어낸다는 게 자책골을 넣은 수비수처럼
열차를 놓치기 위해 전력질주한 다리는 아직 후들거리는데
지연이 만드는 지연 위에서
실패가 낳은 실패 속에서
지연에게 배우는 지연
실패에게 배우는 실패로
15분에게 15분은 잔혹하고 골똘하다.
더러 사소한 불운이 평범한 아름다움을 일깨우기도 한다.
얼이 빠진 철로 위로 가뿐하게 내려앉는 참새들
참새들이 노는 철로 위로 파랗게 열린 맑은 하늘
자꾸만 어디서 타는 냄새가 나는 거 같다.
* 노무라 가쓰야(1935~2020). 일본 프로야구 선수. 감독. 칼럼니스트.
- 대답이고 부탁인 말, 문학동네, 2021
이수익 [오탁번]
1962년 서울대 영어교육과 2학년 이수익은
신춘문예에 시를 응모해 놓고
겨울방학이 되어 고향으로 내려갔다
부산행 완행열차는 가다 쉬다 했다
1963년 1월 1일 아침
가판대에서 서울신문을 사보고는 깜짝 놀랐다
그의 시 「고별」이 당선된 게 아닌가
당선소감도 떡하니 나와 있었다
부산 사투리로 이수익은 소리쳤다
-우째 이런 일이?
부산 앞 바다에서 높은 파도가 쳤다
우리 시대의 시인 이수익은 이렇게 탄생했다
당선소감은 문화부 기자 박성룡 시인이
시 쓰듯 대신 썼다
응모할 때 주소를 서울 삼촌집으로 해놓고는
방학이 되자 고향으로 그냥 내려간
이수익!
아기집 태아가
제 태어날 날짜 모르듯
시인은
저도 모르게 태어나야 시인이다
- 비백, 문학세계사, 2022
열차 시간표 [이병률]
막차를 기다리며 시간표를 올려다 본다
문적문적해진 시간들이
시간표에 적혀 있다
금이 가기 시작한 것일까
시간을 되돌리려 몸을 비트는데
자신의 혈관에 스스로 부딪혀 금이 간
시각표 한 귀퉁이에 생긴 균열
그 틈에 나방이 앉아 있다
기차에 올라 사무치게 울었던 시간도
간간이 그 이유를 물었던 시간도
펜 뚜껑을 열자마자 질질 흐르는 잉크처럼
용케도 이유가 찾아지지 않았던 시간에도 금이 가 있다
누군가도 등짝 잃은 사람처럼 아무 멱살에 안겨
어디 뜨거운 굴속으로 폭풍 속으로 들어가자 했을까
그곳이 막다른 시간의 저곳이어서 틈은 벌어졌을까
시간 사용자들의 균열을 받아내고 있는
저 시간의 못들
- 찬란, 문학과지성사, 2010
근황1 [김지은]
키 큰 미루나무들이 불을 당기면
방목으로 키워진 그리움이 회로를 타고 온다
외지로 나간 순한 이름들이
지리멸렬 접었던 하늘을 펼치고
멀어지는 길은
뻗어가는 수목원의 전원버튼을 밝히고 있다
감은 눈을 뜨는 국립박물관이
국경을 넘어 광야를 달리고
자기부상열차를 탄
춤추는 베네치아는
물의 도시에 입수한다
메마른 나무는 살이 차오르고
성성한 눈발은
백록담의 혈통을 잇고 있다
봇물로 터지는 물의 온도가
뜨겁게 자라나고
블라인드 사이로 몰아치는 허공
세상에 없는 눈부신 아침을 응시하고 있다
겨울나무의 주먹이
팬 사인회를 끝낸 입춘방을 열자
여위어 가는 달그림자
꽃망울을 흔든다
생꽃들 경쾌한 발걸음으로 길을 나선다
- 몽상의 저녁, 전망, 2019
태백 [유진목]
12번 플랫폼에서 스위치백 열차를 탔습니다. 11시 55분
에 청량리를 출발하는 열차였습니다. 우리는 밤새 북쪽으
가려고 했어요.
11시 58분에 손목시계를 확인했습니다. 열차는 이제 출
발한다고요. 그때 알았습니다. 우리가 더 이상 만날 수 없
다는 것을요.
열차는 5분가량 지체하다 출발했습니다. 그사이 계단을
올려다봤어요. 플랫폼은 텅 비어 있었습니다. 역무원이 수
신호를 하고서 열차에 올라탔습니다.
우리는 약속을 많이 했는데 대부분 지켜 본 적이 없는
것 같아요. 옆 좌석에는 외투를 대신 벗어 두었습니다. 아
무려나 사람이 없었어요. 한 량에 세 사람쯤 돼 보였습니
다. 열차 안이 밝아서 차창 밖은 잘 보이지 않았습니다. 도
시를 떠나는 마음은 괜찮았어요.
가방에서 나는 두 사람분의 도시락을 꺼냈습니다. 어쩌
면 뒤늦게 도착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였습니
다. 그러면 플랫폼에 남아서 당신을 만났을 겁니다. 괜찮아
다음 열차를 타면 돼. 당신은 숨이 차서 금방 대답을 못해
요. 다음 열차는 없다고 말입니다.
스위치백 열차는 곧 운행을 하지 않는다고 해요. 한참을
자고 일어나면 산을 오르고 있던 게 생각이 났어요. 눈이
하얗게 쌓여 있는데 새벽에는 파랗게 보였던 걸요. 그때는
목이 메어서 보온병에 든 커피도 따라 마셨습니다.
나는 잘 도착했어요. 아침 일찍 투숙해 한낮을 잤습니다.
태백의 눈은 한 번도 녹은 적이 없다고 해요. 늦봄에 파묻
혔던 고라니를 녹이면 금방 산속으로 뛰어 숨는다고요.
- 작가의 탄생, 민음사, 2020
바깥으로부터 [황규관]
이제는 아무도 바깥을 보지 않는다
고속 열차의 창문에는 언제나
어둑한 블라인드가 쳐져 있고
이 옷을 입었다 저 옷을 입었다 하는 가을 산은
버려지듯 지나가고 있다
바깥을 바라보는 일은
바깥에게 나를 조심스레 허락하는 일
내가 바깥이 되고 바깥이
도착지를 변경해주는 일
그러나 아무도 바깥을 보지 않는다
메말라가는 산자락의 밭을
혼자이게 내버려둔다
눈동자는 바깥의 흔적
영혼은 바깥이 쌓아올린 오두막
누구도 바깥이 되려고 하지 않을 때
바깥은 버려지고
안은 점점 작아져간다
모래알처럼 작아져간다
흙먼지처럼 떠돌기만 한다
- 이번 차는 그냥 보내자, 문학동네, 2019
첫댓글 ' 문득 대전역에서 뜀박질하며 뜨거운 우동 국물이 먹고 싶다 / 옛날처럼'
1974 야간 열차에서 일어난 아찔한 일들 ^^*
1974 열차는 1974년에 만든 열차일까요?
열차에 붙인 숫자의 의미가 궁금하군요.ㅎ
천안 플랫폼에서 팔던 우동,
아버지는 천안을 지날 때면 꼭 우동 한 그릇을 드셨지요.
그때 열차 안에서 아빠가 열차를 놓치면 어쩌나 조마조마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런데 한번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지요. ^^
호두과자 한봉다리도 사오셨을 법한데
아버님의 날렵함이 아련히 떠오르시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