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1.1 수요일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 민수6,22-27 갈라4,4-7 루카2,1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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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축복 받은 우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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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우리는 방금,
'하느님 우리를 어여삐 여기소서. 우리에게 복을 내리옵소서.'
간절한 마음으로 화답송 후렴을 노래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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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은 2104년 새해 첫 날,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을 맞이하여 새로운 한 해를 활짝 열어주시며
우리 모두에게 평화의 축복을 내려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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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도 새해 ‘세계 평화의 날’을 맞이하여 감격적인 담화문을 발표하셨습니다.
‘형제애, 평화의 바탕이며 평화로 가는 길’이라는 주제로
전 세계 모든 민족이 참다운 형제애를 발견하고 경험하고 선포할 것을 당부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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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선물 받은 ‘마더 데레사 넘치는 사랑’이라는 마더 데레사의 전기 첫 장,
성녀의 친필 말씀도 새로웠습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그분은 당신을 사랑합니다.
그분이 당신을 사랑하듯이 서로 사랑하십시오.
그리고 그 사랑을 통해서 평화를 이루소서.
하느님은 당신을 축복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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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형제애가 평화의 바탕임을 고백합니다.
탓할 것은 그 무엇도 아닌 내 부족한 형제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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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하느님이 우리에게 주신 세상을 구원할 수 있는 화두는 형제애요 평화임을 깨닫습니다.
축복 받은 삶에 대한 응답이 형제애요, 형제애의 열매가 평화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축복 받은 존재들입니다.
오늘 강론 주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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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살아있음이 축복입니다.
비상한 축복이 아니라 평범한 축복입니다.
매일 이렇게 살아있음이 축복이자 기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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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진리를 몰라 불행이요 이 진리를 깨달을 때 행복입니다.
매일 끊임없이 하느님 축복을 받아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입니다.
하느님 축복 없이는 한 순간도 살 수 없는 우리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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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당연한 권리가 아니라 하느님 주신 은총의 선물입니다.
가장 쉬운 것이 남 판단하는 것이요 가장 어려운 것이 우리 자신을 아는 일입니다.
축복 받은 존재임을 모르고 지내는 경우는 얼마나 많은지요.
자신의 존재를 몰라 불평에 교만이지
축복 받은 존재임을 깨달아 알 때 저절로 감사요 겸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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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은 새해 첫날 대축일 미사 중 사제를 통해 우리 모두를 축복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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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복을 내리시고, 지켜주소서.”
“주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당신 얼굴을 비추시고, 은혜를 베푸소서.”
“주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당신 얼굴을 들어 보이시고, 평화를 베푸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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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기쁨은 우리 모두를 축복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행복은 하느님의 행복이요 우리의 기쁨은 하느님의 기쁨입니다.
그러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복하고 기쁘게 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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끊임없는 하느님 축복이 우리를 행복하고 평화롭게 합니다.
행복하고 평화롭게 사는 것이 우리의 의무요 권리이자 하느님께 드리는 최고의 보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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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형제자매로 함께 살 수 있음이 축복입니다.
형제애의 기초는 하느님의 부성(父性)입니다.
진정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당신 아드님의 영을 우리 마음 안에 보내 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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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영께서 “아빠! 아버지!”하고 외치고 계십니다.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는 종교가 세상에 어디 있습니까?
이 보다 더 큰 축복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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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을 한 아버지로 모셨기에 우리는 더 이상 종이 아니라 자녀입니다.
그분의 자녀이기에 우리는 하느님께서 세워주신 상속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세상 그 누구의 종이 아닌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하느님의 자녀이자 서로에게는 형제입니다.
하느님 안에서 온갖 차별이 철폐된 평등한 형제입니다.
이렇게 형제애를 실천하며 하느님의 자녀답게 살아 갈 때 비로소 존엄한 품위의 인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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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 친히 우리 모두 한 아버지를 모신 형제들임을 천명하셨습니다.
‘너희의 아버지는 오직 한 분, 하느님이시고 너희는 모두 형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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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상한 축복이 아니라
이렇게 평범한 하느님의 자녀로, 또 형제자매로 함께 살 수 있음이 축복입니다.
형제자매들은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 주신 무상의 선물입니다.
형제자매들이 다 같지 않고 다 다르다는 것 역시 얼마나 큰 축복인지요.
혼자 살지 말고 함께 서로 섬기고 협조하며 살라고 다 고유의 은사입니다.
작고 부족해도 함께 사랑하며 평화롭고 살 때
하느님은 놀라운 축복으로 그 빈자리의 부족을 다 채워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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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을 찬양할 수 있음이 축복입니다.
마음 가난한 이들의 특권이 하느님 찬양입니다.
하느님 찬양은 축복의 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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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목자들은 축복의 샘 아기 예수님을 찾아냈고 기쁨에 넘쳐 이 소식을 전합니다.
목자들이 예수 아기에 관하여 들은 말을 알려주었을 때
그것을 들은 이들은 모두 그 말에 놀라워합니다.
바로 놀라움은 하느님이 하신 일에 대한 반응이요 찬미의 발단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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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 역시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깁니다.
이 또한 하느님의 놀라움에 대한 반응이요 축적되는 하느님 찬미입니다.
마침내 목자들은 자기들이 듣고 본 모든 것에 대하여 하느님을 찬양하고 찬미하며 돌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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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 찬양과 찬미보다 더 큰 축복은 없습니다.
찬양과 찬미가 우리의 운명을 바꿉니다.
인생관을 바꿉니다.
부정적 비관적 인생관에서 긍정적 낙관적 인생관으로 바꿉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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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놀라운 은혜에 대한 자발적 응답이 찬양과 감사입니다.
찬양과 감사의 사람이 진정 부요하고 행복한 사람입니다.
가난한 목자들이 역설적으로 행복하고 내적으로 부요한 사람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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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은 하느님의 축복과 찬양, 평화로 가득한 분위기입니다.
하느님 축복에 찬양과 감사로 응답할 때 하느님 주시는 평화의 선물입니다.
바로 우리 수도공동체의 평화의 비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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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은 새해 첫 날, 천주의 모친 대축일에 우리 모두를 축복해 주시고자
대축일 미사에 초대해 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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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당신을 찬양하는 우리 모두에게 평화의 축복을 가득 내려주십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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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멘.
오늘은 새해의 첫날입니다. 교회의 전례는 새해의 첫날에 두 가지의 의미를 부여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참된 평화를 주기 위해서 오신 예수님을 생각하며 ‘세계 평화의 날’로 정했습니다. 두 번째는 참된 신앙인이며, 예수님의 어머니이신 성모님을 위한 날로 정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하느님의 어머니이신 성모 마리아’를 기억하는 날입니다. 우리 모두는 어머니의 몸에 10개월간 머물다가 세상에 나왔습니다. 우리가 세상에 나오기 전에는 어머니의 몸이 우리의 세상이었고, 우리는 어머니의 태중에서 모든 것을 받아들였습니다. 물론 우리는 세상에 나와서도 어머니의 끊임없는 사랑과 보살핌을 받으며 자랄 수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교회는 새해의 첫날, 우리 모두의 어머니이신, 교회의 어머니이신 성모님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새해의 첫날을 시작하며, 샤를르 드 푸고 사제의 詩를 읽어 드리겠습니다. 조금 길지만, 새해를 시작하는 우리들에게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나는 배웠다.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나를 사랑하게 만들 수 없다는 것을.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사랑받을 만한 사람이 되는 것뿐임을.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의 선택에 달린 일.
나는 배웠다.
내가 아무리 마음을 쏟아 다른 사람을 돌보아도
그들은 때로 보답도 반응도 하지 않는다는 것을.
신뢰를 쌓는 데는 여러 해가 걸려도
무너지는 것은 한순간임을.
삶은 무엇을 손에 쥐고 있는가가 아니라
누가 곁에 있는가에 달려 있음을 나는 배웠다.
우리의 매력이라는 것은 십오 분을 넘지 못하고
그 다음은 서로를 알아가는 것이 더 중요함을.
다른 사람의 최대치에 나를 비교하기보다는
나 자신의 최대치에 나를 비교해야 함을 나는 배웠다.
삶은 무슨 사건이 일어나는가에 달린 것이 아니라
일어난 사건에 어떻게 대처하는가에 달린 것임을.
또 나는 배웠다.
무엇을 아무리 얇게 베어 낸다 해도
거기에는 언제나 양면이 있다는 것을.
그리고 내가 원하는 사람이 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린다는 것을.
그리고 나는 배웠다.
아무리 내 마음이 아프다 하더라도 이 세상은
내 슬픔 때문에 운행을 중단하지 않는다는 것을.
타인의 마음에 상처를 주지 않는 것과
내가 믿는 것을 위해 내 입장을 분명히 하는 것.
이 두 가지를 엄격하게 구분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나는 배웠다.
사랑하는 것과 사랑받는 것을.”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탄생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세상에서 아기 예수님을 처음 받아 준 손은 목수 요셉의 거친 손이었고, 그분을 처음 맞아들인 장소는 누추한 구유였습니다. 그분께 찬미와 찬양을 드린 첫 번째 사람도 밤을 지새우던 가난한 목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 강생의 짧은 이야기는 약하고 보잘것없는 곳, 비천한 사람들 안에 우리가 믿고 있는 신앙의 핵심 진리가 있음을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가까이에 있는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들, 그들 가운데 단 한 사람만이라도 내 안에 깊이 받아들이고 사랑할 수 있는 장소가 있다면, 그곳이 나를 구원할 내 ‘인생의 구유’입니다.
건강한 아이를 입양하기도 힘든데, 장애아를 입양해서 사랑으로 키우시는 분이 있습니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장애인인 아들을 위해서 함께 뛰는 분이 있습니다. 버려진 이들, 병든 이들, 장애인들 속에서 작은 예수를 보았고, 그들을 위해서 평생을 살아가는 분도 있습니다. 화려한 꽃이 되기보다는 썩어 양분이 되는 거름이 되는 분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평화는 돈으로 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평화는 총과 칼로 만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평화는 거창한 행사나 사업으로 지켜지는 것이 아닙니다. 평화는 하느님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으로 사람들을 대하는 것입니다. 성모님처럼 겸손과 순명으로 삶의 모든 파도를 받아들일 때 비로소 시작되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보호자 성모님 불쌍한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시어 귀양살이 끝날 때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뵙게 하소서. 천주의 성모님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시어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소서.”
2014년 가해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 - 엄마의 눈물을 먹고 자라는 나무
이철환 작가의 ‘연탄길 2’에 ‘송이의 노란 우산’이란 제목으로 소개된 사연입니다.
송이 엄마는 시장 좌판에 앉아 나물을 팔았다. 일곱살 송이는 아침밥을 먹고 늘 엄마를 따라 시장에 나갔다. 어른들만 있는 시장에서 송이의 유일한 친구는 까만 때로 얼룩진 인형뿐이었다. 머리카락까지 듬성듬성 빠져버린 인형은 흉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엄마, 저 할아버지 너무 무서워. 할아버지 옆에 가면 이상한 냄새가 나." 송이는 멀지 않은 곳에 힘없이 서 있는 할아버지를 가리키며 엄마 뒤로 숨어버렸다. 칠십이 넘은 할아버지는 지난해까지만 해도 할머니와 함께 시장에서 채소장소를 했었다. 하지만 할머니가 병으로 돌아가시고 나자 할아버지는 슬픔으로 온종일 술만 마시고 아무 데서나 쓰러져 잤다. 할머니 병원비로 할아버지는 산동네 집까지 모두 잃고 말았다. 시장 사람들은 말했다. 할아버지가 시장을 떠나지 못하는 것은 돌아가신 할머니를 잊지 못해서라고... 술에 취한 할아버지는 대낮에도 방앗간 옆 땅바닥에 쓰러져 코를 골았다. 시장사람들은 그런 할아버지를 예전처럼 대해 주지 않았다. 허구한 날 술에 취해 비틀 거리는 할아버지에게 막말을 퍼붓는 사람들도 있었다. 시장입구에는 가게를 지으려고 파헤쳐 놓은 길이 있었다. 어느 날 송이는 그 앞으로 뛰어가다가 그만 넘어지고 말았다. 송이가 넘어지는 순간 들고 있던 인형이 깊이 파헤쳐진 웅덩이로 떨어져 버렸다. 인형이 떨어진 곳엔 썩은 물이 고여 고약한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더러운 물에 빠져서 다리만 간신히 내민 인형을 바라보던 송이는 그만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송이는 훌쩍거리며 사람들이 지나갈 때마다가 손가락으로 인형을 가리켰다. 떠름한 낯빛으로 지나칠 뿐, 더러운 물로 들어가 인형을 꺼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 닭집 아저씨가 그곳을 지나가고 있었다. "왜 울어, 송이야." "아저씨....." 송이는 더 큰 소리로 울었다. "저건 안 돼, 송이야. 더러운 물 만지면 병 걸려. 엄마한테 인형 사주라고 아저씨가 말해줄게." 송이는 억지로 팔을 끄는 닭집 아저씨를 따라갔다. 그때 뒤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가야...." 뒤를 돌아보았을 때, 송이의 눈은 금세 휘둥그레졌다. 술에 취한 할아버지가 몸을 비틀거리며 인형 있는 곳으로 내려가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신발을 신은 채 냄새는 물로 첨벙첨벙 걸어 들어가 인형을 주웠다. 할아버지는 인형에 묻어 있는 더러운 물을 때 절은 옷소매로 조심조심 닦아주었다. "다치지는 않았냐?" "네.." 송이의 서먹한 대답에도 할아버지는 웃고 있었다. 도깨비 뿔처럼 마구 헝클어진 하얀 머리가 송이는 예전처럼 무섭지 않았다. 저녁부터 가을비가 보슬보슬 내렸다. 송이는 노란 우산을 받쳐 들고 어둑해진 시장 길을 바쁘게 걸었다. 비를 맞고 누워 있을 할아버지가 생각났던 것이다. 방앗간 뒤쪽 처마 밑에 누워있는 할아버지는 비바람으로 얼굴까지 온통 젖어 있었다. 송이는 자기가 쓰고 있던 노란 우산으로 잠든 할아버지의 얼굴을 가려주었다. 그리고 두 손을 머리에 얹은 채, 멀리 엄마가 있는 곳으로 쪼르르 달려갔다. 그런데 송이가 뒤를 돌아보았을 때, 바람에 날아가 버린 노란 우산이 할아버지 옆에 벌렁 누워서 동그란 얼굴을 땅에 비비고 있었다. 송이는 서둘러 할아버지에게로 다시 달려갔다. 세차게 부는 바람 때문에 노란 우산이 날아갈까 봐, 송이는 할아버지 옆을 떠날 수 없었다. 노란 우산 밖으로 나와 있는 할아버지의 새까만 팔을 노란 우산 안으로 끌어당기며 송이는 말했다. "할아버지, 비와요. 여기서 자면 안 되는데.." 송이는 여귀꽃처럼 가는 팔로 비에 젖은 할아버지 다리를 처마 밑으로 힘껏 당겼다. 할아버지의 때 묻은 손을 송이는 꼭 잡고 있었다. 때 절은 손이지만 더러운 물에 빠진 송이 인형을 꺼내준 고마운 손이었다. "할아버지... 할아버지.." 두 눈을 꼭 감고 있던 할아버지의 눈가로 따스한 눈물 한 줄기가 흘러내렸다. 젖은 몸을 바들바들 떨고 있던 송이 눈가에도 어느새 눈물이 고였다. 멀리 엄마가 있는 곳에서 조그만 불빛이 붉은 눈을 깜빡거리고 있었다. 회색빛 하늘에선 굵은 빗방울이 후두둑 후두둑 떨어지고 있었다. 며칠이 지났다. 송이는 엄마 옆에서 때 절은 인형을 가지고 놀고 있었다. 그때 닭집 아저씨가 등 뒤에 무언가를 감추고 송이에게로 다가왔다. "송이야, 선물이다." "아, 예뻐라..." 예쁜 인형을 받아 든 송이 눈가엔 어느새 기쁨의 눈물이 맺혔다. "송이야, 저기 봐,. 이 인형, 할아버지가 힘들게 일해서 사주신거야." 닭집 아저씨가 손으로 가리킨 곳엔 할아버지가 서 있었다. 할아버지는 개나리꽃처럼 활짝 피어있는 노란 우산을 흔들며 송이를 향해 활짝 웃었다. 할아버지가 끌고 있는 낡은 손수레에는 펼쳐진 종이 상자들이 가득히 쌓여있었다. 그날 이후로 시장 사람들은 못 쓰는 종이 상자를 하나하나 모아 할아버지에게 주었다. 할아버지도 더 이상 술에 취해 비틀거리지 않았고, 길 위에 쓰러져 있지도 않았다. 더럽고 냄새난다며 모두 할아버지를 멀리 할 때, 어린 송이는 말없이 다가가 할아버지 손을 꼭 잡아 주었다. 외로움과 절망으로 아무렇게나 살아가던 할아버지는 송이의 사랑으로 다시 일어설 수 있었다. 할아버지는 더 이상 혼자가 아니었다.
하느님께서 이 세상에 당신 아드님을 보내시어 이 세상 사람들에게 사랑을 가르쳐주고 싶으셨습니다. 그런데 그 사랑이란 ‘하느님이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 가장 더럽고 역겨운 곳까지 내려갈 수 있음을 보여주는 그런 사랑’이었습니다. 아니 ‘가장 멸시받는 모습으로 나무위에 달려 높이 올려지는 그런 사랑’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 누구도 그 사랑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온 세상의 모욕과 멸시를 받는 그런 치욕적인 아들을 두고 싶어 하지 않았습니다. 마치 위의 이야기에서 송이의 더러운 인형을 자신을 더럽히면서까지 구덩이에서 꺼내주고 싶은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던 것과 같습니다. 그 때 그 사랑을 이해하는 한 ‘보잘 것 없는’ 여인이 있었습니다. 이 세상의 눈에는 가난하고 가녀리고 힘도 없는 작은 시골 처녀에 불과한 여인이었습니다. 그 여인이 그 사랑을 이해하였습니다. 그리고 당신은 상관없으니 하느님의 뜻만이 이 세상에 이루어지시도록 ‘아멘!’하셨습니다. 하늘도 인간 가운데 그런 사랑이 있음에 탄복하였습니다. 그렇게 사람이 되시어 이 세상을 구원하신 하느님의 아드님께서는 역겹기만 하던 인간이 예전처럼 거북스럽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 그나마 하느님을 사랑하여 하느님의 뜻을 위하여 가장 더러운 곳까지 함께 가실 줄 아는 사랑을 보여준 분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 어머니를 위해서도 천상영광의 관을 씌워주시고 그 어머니의 사랑을 닮은 이들에게도 영원한 생명을 선사하십니다. 마치 송이가 할아버지가 걱정돼 노란 우산을 들고 와 할아버지를 덮어드린 것과 같습니다. 이 세상에 당신의 사랑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줄 아는 한 사람이 있었다는 것은 하느님께서 온 인간을 다시 사랑하시게 만드는 출발점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에 하느님께서는 그 분을 당신 아드님의 어머니가 되게 하시고 새해 첫 날 이 신비를 묵상하게 하셨습니다.
박찬호 선수가 미국에 처음 갔을 때 같은 동료선수들이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고 합니다. 초기에 박찬호 선수는 자신과 같은 소속 식구들에게도 왕따였습니다. 그리고 한 선수는 자신이 씹던 껌을 뱉어서 박찬호 선수에게 던지기까지 하였습니다. 박찬호는 참을 수 없어서 그 선수와 맞붙어 싸웠는데 말을 할 줄 모르는 자신만 징계를 당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그는 다 때려치우고 한국으로 돌아가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리고 한국에 계신 어머니에게 전화를 하였습니다. 어머니는 밥은 잘 먹고 다니냐, 힘들면 돌아와라, 보고 싶다는 등의 어머니면 다 하시는 그런 질문들을 쏟아내셨습니다. 박찬호 선수는 비록 멀리 있지만 어머니의 그 사랑을 다시 느끼며, 이런 어머니를 실망시켜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고 다시 힘을 내보기로 했습니다. 통역 없이 모든 것을 새로 시작하기로 하였습니다. 보는 사람마다 ‘How are you?’라고 인사하였습니다. 물론 다른 말은 모르기 때문에 그 말만 몇 번이고 반복했습니다. 그리고 한국 음식은 다 버리고 치즈와 미국 음식만을 먹었습니다. 느끼해서 토할 정도가 되었지만 참아냈습니다. 나중에서야 깨달았다고 합니다. 그들이 싫어했던 것은 자신이 아니라 자신 몸에서 나는 마늘 냄새였다는 것을. 그들은 박찬호 선수 몸에서도 자신들과 마찬가지로 치즈 냄새가 나주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동료들과 좋은 사이가 될 수 있었고 좋은 성적을 거둬 크게 성공하게 됩니다.
이철환 작가는 ‘자식은 엄마의 눈물을 먹고 자라는 나무다.’(연탄길 2, 177)라는 말을 합니다. 예수님도 혼자서 성장한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으로 머물러 계셨던 것이 아니라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셨고 당신 자신을 ‘사람의 아들’이라 부르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는 몸과 지혜가 날로 자라면서 하느님과 사람의 총애를 더욱 많이 받게 되었다.”(루카 2,52) 그분이 몸뿐만 아니라 지혜도 함께 자랐다면 그분이 자라도록 누가 눈물을 흘리셨겠습니까? 당신 영혼이 예리한 칼에 찔려 눈물을 흘리신 분은 성모님이 아니고 누구시겠습니까? 또 성모님은 당신 아드님이 아니면 누구를 위해 눈물을 흘리셨겠습니까? 그리고 당신 구원의 가시밭길을 가시며 몇 번이고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드실 때마다 당신과 항상 함께 아파하고 눈물 흘려주시는 어머니 때문에라도 힘을 얻지 않으셨겠습니까? 낳으신 것뿐만 아니라 기르시고 함께 해 주신 것에서도 성모님은 하느님이신 그리스도의 어머니로서 부족함이 없으셨습니다.
오늘은 새해 첫 날입니다. 그리고 그 첫 날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신 그분을 기억합니다. 하느님을 낳으시고 기르셨듯이 당신의 자녀가 되는 우리들의 어머니가 되시어 우리도 보호해 주시고 길러주시기를 먼저 배워야 함을 알려주는 것 같습니다. 올 한 해도 어머니의 보호 속에서 몸도 지혜도 날로 자라는 한 해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들도 작은 예수님으로 키워주시기를 기도합시다. |
1월 1일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R) -루카 2장 16-21절
“목자들은 마리아와 요셉과 아기를 찾아냈다. 여드레 뒤 그 아기는 이름을 예수라고 하였다.”
<예, 좋습니다, 한번 해보겠습니다>
성모님의 말씀이나 태도, 하느님을 향한 자세를 보십시오. 언제나 한결같습니다. 침묵, 기도, 철저한 겸손, 앞 뒤 따지지 않는 순명, 단순하고 확고한 믿음입니다.
가브리엘 천사의 구세주 잉태 예고 앞에 성모님의 말씀: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장 38절)
아기 예수의 탄생 앞에: “그러나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며 곰곰이 되새겼다.”(루카 2장 19절)
예루살렘 순례 길에 소년 예수를 겨우 되찾고 난 후 이해할 수 없는 언행 앞에: “그의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루카 2장 51절)
그 외에도 성모님께서 공생활 중이신 예수님을 찾아갔을 때 보여주셨던 예수님의 태도(인간적인 눈으로 볼 때 엄청 서운할 말씀): “누가 내 어머니요 형제들인가?”
그리고 결정적으로 골고타 언덕 예수님의 십자가 밑에서 그저 함께 눈물 흘리시며, 함께 아파하시며, 함께 기도하시며 마냥 서계셨던 성모님...
성모님처럼 우여곡절이 많았던 인생도 드믈 것입니다. 그녀의 생애는 정말 이해하지 못할 일들, 불가사의한 일들, 어쩌면 억울하고 속 터지는 일들로 가득 찬 파란만장하고 특별한 인생이었습니다.
그러나 성모님은 단 한번도 No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단 한 번도 불평불만하지 않았습니다. 단 한 번도 이 사람 저 사람에게 가서 힘들다, 괴롭다, 못살겠다고 투덜거리지 않았습니다.
그저 삶의 다양한 국면, 이런 저런 기묘한 초대, 모든 이해 못할 일들 앞에서 성모님은 한결같이 Yes였습니다. 단 한 번도 거절하지 않고, 도망가지 않고, 늘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제가 너무 부족해서 가능할지 모르겠지만 하느님께서 그렇게 원하시니 한번 해보겠습니다.”
여기에 성모님의 위대성이 있습니다. 성모님의 앞뒤 따지지 않은 무조건적인 순명, 하느님 계획에 대한 전적인 믿음, 단순한 Yes가 결국 이 세상 구원의 출발점이 되었습니다. 그 결과 마리아는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어머니, 더 나아가서 인류의 어머니, 결국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셨습니다.
성모님께서는 출중한 외모, 뛰어난 학식, 타고난 재능, 내놓으라하는 가문 때문에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신 것이 절대 아니었습니다. 지극한 겸손, 하느님께 대한 깊은 신앙, 어린이 같은 단순성으로 인해 하느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으셨고, 그 결과 구세주의 어머니가 되셨습니다.
올 한해도 어김없이 우리 앞에는 다양한 삶의 국면들이 펼쳐질 것입니다. 성모님께서 겪으셨던 것 못지않게 여러 가지 이해하지 못할 일들, 기가 막힌 일들, 하느님께서 계시다면 어떻게 이런 일이, 하고 여겨질 일들도 벌어질 것입니다. 그래서 힘들고 슬퍼 눈물 흘릴 것입니다.
그럴 때 성모님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다양한 하느님의 초대 앞에 앞뒤 따지지 않고, 불평불만 주저리주저리 늘어놓지 않고, 그저 예, 좋습니다, 한번 해보겠습니다, 라고 응답하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호의적이고 적극적인 우리의 응답으로 인해 하느님께서는 다시 한 번 우리 안에, 우리 인생 안에 기쁘게 탄생하실 것입니다.
†살레시오회 한국관구 부관구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
<목자들은 마리아와 요셉과 아기를 찾아냈다.
여드레 뒤 그 아기는 이름을 예수라고 하였다.>
+ 루카 2,16-21
새해 첫날에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새해에 복 많이 받으시기 바랍니다.
민수기에 보면 “주님께 서 그대에게 복을 내리시고, 그대를 지켜주시리라.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비추시고, 그대에게 은혜를 베푸시리라.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들어 보이시고, 그대에게 평화를 베푸시리라”(민수6,24-26) 고 적고 있습니다. 복을 주시는 주체는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주님께서 함께하시지 않으시면 복을 누릴 수가 없습니다. 내가 무엇을 잘해서 얻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자비를 베푸시어 복을 누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주시는 복을 잘 담을 수 있도록 노력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복을 빌어주는 일을 소홀히 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어 제 오늘, 제야의 타종식과 해맞이 행사가 곳곳에서 있었습니다. 그런데 누가 복을 줍니까? 그 해가 복을 줍니까? 해를 만드신 분, 달을 창조하신 하느님께서 복의 주도권을 가지고 계십니다. 복의 근원은 하느님이십니다. 그러니 다른 곳에 가지 않고 하느님을 찬미하고자 이곳에 오신 여러분은 이미 복을 받으셨습니다. 앞으로도 넘치도록 받을 것입니다. 혼자만 받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을 통해 가족과 이웃이 함께 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느님의 복을 전달하는 연장입니다.
성경의 곳곳에서 복을 받는 길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몇 가지만 상기해 보겠습니다. “내 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주 너희 하느님의 계명들을 너희가 듣고 따르면 복이 내릴 것이다”(신명11,27).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이 모든 말을 명심하여 들어라. 그렇게 하는 것이 주 너희 하느님의 눈에 드는 좋은 일과 옳은 일을 하는 것이므로, 그래야 너희와 너희 자손들이 영원토록 잘 될 것이다”(신 명12,28). 결국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는 일이 복을 받는 길입니다. 더군다나 그 복은 당대에 끝나는 것이 아니라 후손에게까지 미칩니다. 그러니 하느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우리의 일상이 하느님의 마음에 든다면 그는 분명 복을 누리고 있는 사람입니다.
한편 “너 희가 주 너희 하느님의 말씀을 잘 들으면, 이 모든 복이 내려 너희 위에 머무를 것이다. 너희는 성읍 안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다. 너희 몸의 소생과 너희 땅의 소출도, 새끼소와 새기 양을 비롯한 너희 가축의 새끼들도 복을 받을 것이다. 너희의 광주리와 반죽 통도 복을 받을 것이다. 너희는 들어올 때에도 복을 받고 나갈 때에도 복을 받을 것이다.”(신명28,2-6)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역으로 내가 복을 받지 못하는 이유는 하느님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따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안에서도 밖에서도 복을 받으려거든 말씀에 순종하십시오. 말씀을 실천하십시오.
시 편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행복하여라. 악인들의 뜻에 따라 걷지 않고 죄인들의 길에 들지 않으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않는 사람, 오히려 주님의 가르침을 좋아하고 그분의 가르침을 밤낮으로 되새기는 사람, 그는 시냇가에 심겨 제때에 열매를 내며 잎이 시들지 않는 나무와 같아 하는 일마다 잘 되리라”(시편1,1-3). 주님의 말씀에 머물면 하는 일마다 잘 될 것입니다. 그러나 말씀 안에 머물지 못하면 마음이 허전하고 그 공허를 채우려 엉뚱한 곳에서 위로를 받으려 합니다. 술을 찾는 사람도 있고, 쇼핑에 매달리는 사람, 도박이나 다른 무엇에서 찾으려는 사람도 있습니다. 참 안타가운 일입니다.
오 늘 기억하는 성모님은 순종의 모범이십니다. 천사를 통해 주어진 하느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그 뜻대로 실천하였습니다. 그리고 끝까지 지켰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모님을 은총을 가득히 받으신 분, 복된 여인으로 부릅니다. 여러분도 말씀대로 행하는 가운데 복된 사람으로 기억되기를 희망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믿음의 사람이 되십시오. 성모님은 엘리사벳의 입을 통해 “행복하십니다. 하느님께서 하신 말씀이 꼭 이루어지리라 믿으신 분!”(루카1,45)으로 불리었습니다. 사실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은 믿음의 사람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누리는 것입니다”(갈라3,9).
시편24,4에서는 “손이 깨끗하고 마음이 결백한 이, 옳지 않은 것에 정신을 쏟지 않는 이, 거짓으로 맹세하지 않는 이라네. 그는 주님께 복을 받고 자기 구원의 하느님께 의로움을 인정받으리라.”라 고 말합니다. 허망한데 뜻을 두지 않는 사람으로 복을 누려야 하겠습니다. 많은 이들이 주님께 마음을 두지 못하고 인간적인 욕심 때문에 복을 잃어버립니다. 올 한해는 주님 안에서 복을 만들고 또 빌어주며 복을 많이 받으시기 바랍니다. 하느님을 차지한 지금 이 순간이 얼마나 큰 복을 누리고 있는 것이지 다시 한 번 감사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복은 이 세상을 넘어 영원한 천상에로 이어집니다. 그러므로 어떠한 상황 안에서도 믿음의 끈을 놓지 않기를 바랍니다.
옛 날부터 사람이 살아가면서 바람직하다고 여겨지는 다섯 가지의 복을 오복(五福)이라고 했습니다. 중국 유교의 5대 경전 중 하나인 《서경(書經)》 1편인 <홍범(洪範)>에 나오는 오복(五福)을 보면, 첫 번째는 수(壽)로서 천수(天壽)를 다 누리다가 가는 장수(長壽)의 복(福)을 말했고, 두 번째는 부(富)로서 살아가는데 불편하지 않을 만큼의 풍요로운 부(富)의 복(福)을 말했으며, 세 번째로는 강령(康寧)으로 몸과 마음이 건강하고 깨끗한 상태에서 편안하게 사는 복(福)을 말했습니다. 네 번째로는 유호덕(攸好德)으로서 남에게 많은 것을 베풀고 돕는 선행과 덕을 쌓는 복(福)을 말했고, 다섯 번째로는 고종명(考終命)으로서 일생을 건강하게 살다가 고통 없이 평안하게 생을 마칠 수 있는 죽음의 복(福)을 말했습니다.
그러나 서민들이 원했던 또 다른 오복(五福)으로는
1. 치아가 좋은 것 2. 자손이 많은 것 3. 부부가 해로하는 것 4. 손님을 대접할 만한 재산이 있는 것 5. 명당에 묻히는 것을 말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현대인들이 생각하는 오복은 무엇일까요?
첫 번째로, 건강한 몸을 가지는 복과 두 번째로, 서로 아끼면서 지내는 배우자를 가지는 복, 세 번째로 자식에게 손을 안 벌려도 될 만큼의 재산을 가지는 복. 네 번째로, 생활의 리듬과 삶의 보람을 가질 수 있는 적당한 일거리를 갖는 복. 다섯 번째로는 나를 알아주는 참된 "친구"를 가지는 복을 현대판 신(新)오복(五福)으로 여기고 있다고 합니다.
그 러나 이 모든 것은 현세에 국한된 것입니다. 천상의 복과 연계되어 있지 않습니다. 참으로 누리는 복은 천상을 차지하는 복입니다.“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의 온갖 영적인 복을 우리에게 내리셨습니다”(에페1,3). 그러므로 믿음으로 하느님 안에서 복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저 는 지난 한 해 동안 “우선 사랑하라” 라는 주제를 가지고 지냈습니다. 더 많이 사랑하려고 했지만 사랑을 빌미로 상처를 준적도 있고, 돌이켜 보면 내 방식의 사랑으로 부담을 준적도 많았습니다. 주님께서 사랑하신 그 사랑으로 사랑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고 허물로 누벼놓은 날이 많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서는 크신 은총을 허락하셨고 한없는 사랑과 자비로 감싸 주셨습니다. 주님의 은덕을 생각하면 부끄러움이 너무 큽니다.
주님의 은혜에 감사를 드리며 2014년은 “사랑에 사랑을 더하여”라는 주제를 가지고 살려고 합니다. 해도 해도 다할 수 없는 사랑의 의무를 기억하며 ‘한 번 더’ 사랑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계명의 핵심은 사랑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당신의 생명까지 내어 놓으셨습니다. 주님께서 사랑하신 그 사랑을 살아야 할 소명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주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인식하는 만큼 나도 사랑해야 합니다. 주님을 사랑하고 그 사랑의 구체적 표현을 이웃을 통해서 해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만나는 모두가 주님 안에서 형제임을 잊지 않기를 바랍니다.
우 리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은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변함이 없습니다. 다만 내 마음이 흔들려서 그분의 사랑을 느끼지 못할 뿐입니다. 언제라도 그분의 사랑에 감사할 수 있는 열린 마음을 간직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사실 우리가 복을 누리고 있으면서도 그것이 복인 줄 모르는 까닭은 많은 경우 내 입에 맞는 복을 찾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올 한해는 주님의 복을 기억하고 그분의 이름으로 복을 빌어주며 그분께서 원하시고 기대하는 복을 누렸으면 좋겠습니다.
또 한 복을 누리기 위해 과거의 불행을 생각하지 않기를 권합니다. 그리고 지금 여기에 있는 복에 감사하기 바랍니다. 과거에 매이면 앞으로 나갈 수 없고, 지금 받은 복을 감사할 줄 모르면 더 큰 복이 주어져도 복으로 여기지 못하며 앞으로 받을 복도 깨닫지 못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오늘의 처지에서 감사함을 발견하고 기뻐하시길 빕니다. 주님의 복을 많이 받으십시오. ‘사랑에 사랑을 더하여’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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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주님의 은총이 가득한 새해 되세요.![~](https://t1.daumcdn.net/cafe_image/pie2/texticon/ttc/texticon28.gif)
새해에는 더욱 주님과 함께 하는 삶을 살도록 노력 하겠습니다.![~](https://t1.daumcdn.net/cafe_image/pie2/texticon/ttc/texticon28.gi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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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멘
모두 주님의 은총아래 새해 복되고 의미있는 한해가 되시길 진심으로 기도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