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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07월14일(일요일)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 탐방일정
탐방지 :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
탐방코스 : [시청역 1번 출구~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 2층 1,2전시실&3층 3,4전시실(‘한국 근현대 자수: 태양을 잡으려는 새들’)~시청역 1번 출구]
탐방일 : 2024년07월14일(일요일)
탐방코스 및 탐방 구간별 탐방 소요시간 (총 탐방시간 3시간22분 소요)
09:30~10:00 연신내역에서 지하철 3호선을 타고 을지로3가역으로 가서 2호선으로 환승하여 시청역으로 간 후 시청역 1번 출구로 나옴 [20분 소요]
09:50~10:02 시청역 1번 출구에서 탐방 출발하여 서울 중구 세종대로 99 번지에 있는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으로 이동 [12분, 669m 이동]
10:02~12:00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 2층 1,2전시실&3층 3,4전시실에서 전시 중인 ‘한국 근현대 자수: 태양을 잡으려는 새들’을 관람
[여성의 손자취를 따른 한국 근현대 자수
기자명 문지윤 기자
숙대신보 기사 입력 : 2024.05.27.
바늘로 수놓은 자수 작품 하나, 자수 작가 한 명을 떠올릴 수 있는가. 서울 중구에 위치한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선 지난 1일(수)부터 오는 8월 4일(일)까지 ‘한국 근현대 자수 : 태양을 잡으려는 새들’ 전시를 만날 수 있다. ‘자수는 여성의 부업’이란 사고를 바로잡는 해당 전시엔 200여 점의 작품이 함께한다. 본 전시는 ‘백번 단련한 바늘로 수놓고’ ‘그림 갓흔 자수’ ‘우주를 수건 삼아’ ‘전통미의 현대화’란 이름의 전시실 4개로 구성됐다. 박혜성 학예사는 “자수는 시대 변화에 따라 역동적으로 변화했지만 미술사에서 주목받지 못했다”며 “한국 자수의 가치를 알리고자 전시를 기획했다”고 말했다. 여성이 써 내려간 자수의 역사를 알아보자.
실과 바늘로 이뤄낸 여성 자립
19세기까지 여성의 취미로 인식되던 자수는 조선 후기에 들어 공예품으로 인정받았다. 제1전시실을 들어서자 구름과 박쥐가 새겨진 장식품 ‘보로’가 보였다. 조선시대 자수는 왕실 수방 소속 궁녀들이 제작한 ‘궁수’와 민간 여성들이 수놓은 ‘민수’로 나뉜다. 지난 1893년 조선이 제1회 시카고 만국 박람회에 출품한 보로는 왕실에서 제작된 궁수다. 출품 당시 동봉된 조선에 대한 소개서는 세계에 조선의 위치와 전통을 알렸다. 19세기까지 자수는 양반 가문 여인의 ‘규수 취미’로 여겨져 작품 활동이라 불리지 못했다. 수를 놓는 이가 도안 밑그림을 직접 그리지 않아 자수는 저평가됐다. 차영순 한국현대자수연구소 대표는 “밑그림을 그리는 일엔 교육과 훈련이 필요하다”며 “당시 여성에게 배움이 허락되지 않아 수와 밑그림의 주인이 달랐다”고 설명했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자수는 여성 교육의 핵심으로 부각됐다. 당시 공포된 학교령에서 여성 교육의 목적은 여성에게 ‘적당히 아름답고 우아한’ 예술을 가르쳐 안으론 현모양처, 밖으론 국가를 위한 봉사자를 양성하는 것이다. 자수는 여성이 근대국가의 국민으로서 교육 받을 수 있는 소수의 분야 중 하나였다. 비교적 경제적 여유가 있는 여성은 일본 도쿄에 위치한 ‘여자미술전문학교(현 여자미술대학)’ 자수과에 진학했다. 여자미술전문학교를 졸업한 대다수는 한국으로 돌아와 전국의 여학교나 기예학원에서 교사로서 제자를 양성했다. 교육의 영역 이 된 자수는 여성이 경제적으로 자립하고 사회활동에 참여할 기회를 마련했다.
하나의 교과목이 된 자수는 ‘기술’을 넘어 독창적인 창작과 표현이 강조되는 ‘미술’의 영역이 됐다. 제2전시실 중앙으로 향하는 길엔 1930년대 여자미술전문학교 재학생의 풍경 사생작이 보였다. 한 뼘짜리 작은 비단에 섬세하게 수 놓아진 풍경작은 마치 수채화처럼 보일 정도로 자연의 모습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여자미술전문학교는 학생 본인이 자수의 밑그림을 직접 그리도록 했다. 자수가 고등 교육화되며 야외 사생처럼 도안 제작에 대한 훈련이 교육과정에 편성된 것이다. 1932년 조선총독부 주관의 미술 대회인 <제11회 조선미술전람회>엔 자수 분야가 포함된 공예부가 신설됐다. 당시 자수는 직접 그린 실물이나 경치를 바탕으로 그림처럼 수놓아진 작품이 주를 이뤘다. 자수를 놓는 사람을 ‘쟁이’라 칭하던 과거 인식에서 벗어나 ‘자수 예술가’로 불리게 된 시기였다.
근대 자수의 위상은 점차 높아졌지만 일본 화풍 전파로 한국 전통 자수가 단절됐다. 1900년대 국내 여학교에선 여자미술전문학교 졸업생이 주요 지도자가 돼 일본 전통 자수의 영향을 받은 수업이 이뤄졌다. 제2전시실 한쪽 벽에서 마주한 ‘등꽃 아래 공작’은 1939년 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 졸업반 학생들이 3년에 걸쳐 공동 제작한 대형 자수 병풍이다. 해당 병풍엔 흰 꽃이 등나무 아래 한 쌍의 공작이 노닐고 있는 장면이 수놓아져 있다. 이는 메이지 시대부터 일본 자수의 대표적 소재로 활용된 공작도다. 제2전시실을 조금 더 들어가자 박을복 작가의 여자미술전문학교 졸업작품인 ‘국화와 원앙’이 눈에 띄었다. 불로장생을 의미하는 국화와 부부의 원만과 장생을 기원하는 한 쌍의 원앙이 수놓아진 해당 작품에선 고즈넉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오른쪽 아래에서 왼쪽 위를 향하는 대각선 구도는 당시 일본 미술계에서 유행하던 구도다.
흔들리는 자수의 위상
광복 직후 1945년, 이화여대의 자수과 개설은 전통자수 회복의 물꼬를 텄다. 이화여대 자수과의 초기 교수진은 여자미술대학 출신으로 구성됐지만 외국 화풍에 국한되지 않도록 교육과정에 전통자수를 포함했다. 1950년대 이후 이화여대 출신 작가들의 작품에선 일본 전통 자수의 영향에서 벗어나는 과정을 확인할 수 있다. 이화여대 자수과를 졸업한 박을복 작가 의 ‘정’이 그중 하나다. 이화여대 자수과 76학번이자 2022년까지 27년간 이화여대 자수과(현 섬유예술과) 교수로 재직한 차 대표는 “재학 당시엔 일본 유학 출신보다 국내에서 작품활동을 하셨던 교수님이 대부분이었다”며 “전통 자수 수업은 학부 시절부터 교수로서 재직 시절까지 계속 존재했다”고 당시 자수 교육 방식을 설명했다.
광복 후 자수계는 미술로서 확고히 인정받고자 추상적 표현을 시도했다. 당시엔 기존의 시각에서 벗어나 대상을 재구성 하는 추상 미술인 ‘큐비즘(Cubism)’ 양식이 대세를 이뤘다. 제3전시실을 따라 들어가면 최유현 작가가 1968년 제작한 ‘태양을 잡으려는 새들’이 위치해있다. 해당 작품에선 당대 유행한 추상적 화풍을 따라 바늘을 움직였던 노력이 드러났다. 새의 형태가 가시적으로 드러나진 않지만 다채롭고 촘촘한 색실에서 새의 깃털이 연상됐다. 직선과 곡선의 조화에 선 마치 새가 살아있는 듯한 생동감이 느껴졌다. 박혜성 학예사는 “태양은 예술가로서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로, 이를 향해 달려드는 새들은 여성 자수 작가들로 여겨져 해당 작품을 전시의 부제로 선정했다”고 얘기했다.
자수 작가들의 시대 흐름에 발맞춘 도전에도 불구하고 학계 내에서 자수는 주류 예술에 밀려나기 시작했다. 추상 미술이 주류인 당대에서 섬세한 표현이 부각되는 자수는 역사를 잇기 어려웠다. 일제강점기부터 대상 하나하나를 섬세하게 수놓는 자수가 재료와 시간을 낭비하는 예술이라는 인식이 생겼다. 1970년 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선 자수를 포함한 공예부를 제외시키려는 논의가 오가자 공예부 작가 일동이 건의서를 발표하기도 했다. 1981년엔 이화여대 자수과의 명칭이 섬유예술과로 변경됐다. 이는 전통자수가 학계에서 견고하고 독자적인 위치를 차지할 수 없었음을 드러낸다.
저물지 않는 자수 역사
1960년대 이후 학계 내 상황과 달리 학계 밖에선 자수가 산업화 시대에 국가 경제에 이바지한 전통 공예로 평가됐다. 산업화 시대에 여성의 사회진출은 제한됐다. 여성은 보수적 사회 분위기에 어긋나지 않는 부업인 자수로 경제활동을 이어갔다. 한국의 미가 담긴 자수품은 국내외에서 혼수, 예단, 장식 등에 사용되며 큰 인기를 끌었다. 제4전시실 중앙 벽면은 성인 키보다 큰 한상수 작가의 ‘궁중자수 모란도 병풍’이 채우고 있었다. 명주실을 굵게 꼬아 무늬의 결을 강조한 해당 작품은 만지지 않아도 눈으로 입체감을 확인할 수 있었다. 각 폭마다 배치된 부귀영화를 상징하는 모란에선 호화로움이 전달됐다. 1980년대까지 이어진 학계 밖 전통 자수의 호황은 여성의 손에서 시작됐다.
국가 경제에 이바지하며 전통을 이어가던 자수는 재료 비용이 증가하고 임금이 줄어들자 설 자리를 잃어갔다. 차 대표는 “20세기 이후 실 수급이 원활하지 않고 자수 작품에 들인 노력에 비해 제대로 된 대가를 받지 못했다”며 전통 자수 쇠퇴의 원인을 설명했다. 이는 실 산업 급감으로 이어졌고 남은 작가들은 비싼 수입 실을 사야 했다. 실 가격이 높아지자 전통 자수는 쇠퇴하게 됐다. 박 학예사는 “서구와 달리 한국에선 자수가 산업품으로만 주목을 받은 것도 명성 하락에 영향을 미쳤다”고 말했다. 1960~70년대 서구에선 페미니즘적 사상을 담은 자수 작품이 나타났다. 단순 공예를 넘어 사상운동의 매체가 된 서구의 자수는 시대의 변화에도 쉽게 하락세를 보이지 않았다.
현재 여성 자수 예술가와 전문가들은 전통자수의 역사를 계승한다. 한상수 작가는 자수의 작품성을 증명한 공을 인정받아 1983년 자수 분야 최초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됐다. 한 작가는 60여 가지의 유실된 전통 자수 기법을 바로잡아 체계화하고 전통 자수 작품을 복원하는 등 꾸준히 전통 자수 보존을 위해 노력했다. 한 작가를 포함하여 박을복, 정영양 작가는 본인의 이름을 내세운 박물관을 개관해 대중에게 자수 작품을 알리고 있다. 차 대표는 “자수의 가치와 위대함을 알리는데 가장 좋은 방법은 전시를 열어 작품을 발표하는 것이다”고 얘기했다. 박 학예사도 “자수 예술을 부흥시키기 위해선 알려지지 않은 작가와 작품을 발굴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한국 근현대 자수의 기록을 다시 쓰는 ‘한국 근현대 자수 : 태양을 잡으려는 새들’에서 한 땀 한 땀 정성으로 그려진 자수의 역사를 마주했다. 잊혀져 가는 줄도 모른 채 흘려보냈던 자수라는 예술을 들여다보자. 그 세심하고 다채로운 실들의 그림 속엔 혁명 같은 여성의 발자취가 새겨져 있다.
참고문헌
국립현대미술관. (2024). ‘한국 근현대 자수 : 태양을 잡으려는 새들’ 도록.
박혜성. (2020). 1950~1980년대 한국 자수계 동향 연구 : ‘전통’과의 관계를 중심으로. 예술체육, 21권4호, 1598-8635.
이화여자대학교 아시아여성학센터. (2011). 여성의 눈으로 보는 근대기의 여성 자수 : 2011 specialist workshop- 아시아 여성과 공예 II.]
[붓 대신 바늘을 휘두른 여성들···‘규방공예’ 편견 깨고 ‘예술’이 된 자수
이영경 기자
경향신문 기사 등록 : 2024. 6. 5. 18:26
‘한국 근현대 자수: 태양을 잡으려는 새들’ 전
‘규방 공예’로 폄하되던 19~20세기 자수
예술 장르로 재조명
인물부터 추상까지 주제 다양
나혜석 조카 나사균 작품부터
‘전위 작가’ 송정인 작품까지
자수 그대로도 충분했고, 자수 이상으로도 충분했다.
서울 중구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에서 열리고 있는 ‘한국 근현대 자수: 태양을 잡으려는 새들’은 그동안 ‘규방 공예’로 여겨지며 주류 미술사의 관심 밖에 있었던 자수를 하나의 예술 장르로서 호명하고, 재조명하는 전시다. 자수라는 장르에 덧씌워진 편견과 무관심을 걷어내는 동시에,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던 자수 작가들의 이름을 호명하는 전시이기도 하다. 나혜석의 조카 나사균, ‘전위자수’ 작가로 불린 송정인 등이 이번 전시를 통해 발굴·재조명된다. 전시명 ‘태양을 잡으려는 새들’처럼 자수 작가들은 자수라는 장르의 경계를 확장하고 넘어서며 독자적인 예술 세계로 성큼 나아갔다. 붓 대신 바늘을 휘두른 여성들의 자수는 섬세하고 아름다워 그 자체로도 경탄을 불러일으키지만, 현대 미술의 흐름에 발맞춰 자신만의 예술 세계를 추구한 작가들은 ‘자수’라는 장르의 울타리를 훌쩍 뛰어넘는다.
문화유산이나 전통 자수에 초점을 맞춘 전시들은 있었지만 근현대 자수를 종합적으로 조망하는 전시는 이번이 처음이다. 김성희 국립현대미술관장은 “그동안 상대적으로 주목받지 못했던 작가와 양식, 매체를 재조명하는 일 역시 중요하다. 처음으로 한국 근현대 자수의 흐름을 조망하는 전시를 개최해 전통공예, 규방공예로만 인식되던 한국 자수의 미학과 역사성을 확장하고자 한다”라고 말했다.
나혜석 조카 나사균 작품부터 여학생들 ‘집단창작’ 대작까지
1전시실에선 19세기말 제작된 전통 자수를 볼 수 있다. 활옷, 침구, 노리개 등 일상용품부터 혼례 등 잔치에 감상을 목적으로 제작된 대형 자수 병풍까지, 궁중에서 궁녀들이 수놓은 궁수와 민간에서 제작한 자유분방한 민수까지 다채로운 수의 향연을 볼 수 있다. 장수를 기원하는 십장생, 꽃과 새를 그려넣은 화조영모도 등이 10폭의 너른 병풍에 한땀한땀 수놓아졌다. 1983년 시카고 만국박람회에 출품됐던 궁에서 제작한 보료는 박쥐, 구름, 꽃을 섬세하면서도 과하지 않게 수놓아 고급스러운 궁수의 면모를 보여준다. 자수 제작은 주로 여성들이 했지만, 안주수라는 남성 자수장인 집단이 만든 작품들도 다수 선보인다. 평안도 안주 지역의 남성 자수장인들이 집단 제작한 병풍은 왕실에 들어가기도 했으며, 서민들의 집 한 채 가격에 맞먹을 정도였다고 한다.
2전시실에선 도쿄 여자미술전문학교 자수과 출신 작가들의 작품을 선보인다. 가정에서 여성들 사이에 전수되던 자수는 20세기 초 ‘수예’로서 공교육의 영역으로 들어가 여성교육의 핵심으로 부각됐다. 여자미술전문학교 출신인 나혜석, 박래현, 천경자 등의 그림으로 시작하는 전시는 동시대 미술의 흐름 속에 자수를 재배치한다. 나혜석의 조카였던 나사균의 작품이 눈에 띈다. 나사균(1913~2003)의 ‘죽계’는 닭의 볏의 입체감과 깃털의 부드러운 흩날림을 섬세하게 표현하고, 대나무의 광택과 입체감을 생생하게 수놓았다. 나사균은 결혼 후 작품활동을 중단해 남긴 작품 수는 많지 않다.
천재적인 개인의 작품만이 예술로 인정받을 수 있을까? 1930~40년대 여학교 학생들이 집단 제작한 자수들은 이런 근대적 예술관념을 깨버린다. 숙명여자고등학교 졸업반 학생들이 3년에 걸쳐 공동 제작한 ‘등꽃 아래 공작’(1938)은 가로 3m41㎝가 넘는 대작으로 공작의 화려한 깃털을 화폭 전체에 넓게 펼쳐놓았다. 공작의 화려한 깃털의 위세와 흰 등나무꽃의 잔잔한 아름다움이 어우러져 화려함과 섬세함을 극대화해 보여준다. 경북여자고등학교 학생들이 공동제작한 ‘해금강’(1931)은 해금강의 절경을 부드러운 톤의 색상으로 수놓았다. 수평으로 길게 뻗은 풍경의 배경까지 모두 자수로 수놓아 실의 결과 질감이 잘 느껴진다.
이렇게 다양한 자수···엥포르멜, 기하학적 추상까지
3전시실은 벽난로를 쬐며 책을 읽는 여성의 모습을 수놓은 김혜경(1928~2006)의 ‘정야’(1949)로 시작한다. 이화여자대학교 자수과 출신으로 동대학에서 교수를 지내며 후학을 양성하기도 한 김혜경은 인물화로 유명한 이인승의 그림을 밑그림으로 ‘정야’를 완성했다. 벽난로에서 주위로 퍼져 나가는 난로의 온기까지 느껴지는 작품이다.
해방 이후 자수는 이화여자대학교 자수과를 중심으로 풍요로운 시절을 맞이했다. 자수과 출신 작가들을 중심으로 추상미술이 대세를 이루던 당대의 흐름을 반영한 다채로운 자수 작품들을 볼 수 있다. 송정인(1937~)은 추상회화인 엥포르멜, 기하학적 추상 작품을 자수로 남겼다. 전통적인 재료인 비단 대신 철망, 마대 등을 바탕으로 삼거나 밀짚, 그물, 노끈, 쇠 등 낯선 재료와 파격적 기법을 사용했다. 박을복과 이신자는 1950~60년대 중반 큐비즘(입체주의)의 영향을 받은 작품을 선보였다. 박혜성 학예연구사는 “순수미술의 새로운 비전을 공유함으로써 순수미술과 동등한 자격을 인정받고자 하는 자수 작가들의 열망을 읽을 수 있다”라고 말했다.
송정인은 당시 누구보다 주목할 만한 활동을 했지만 1992년 개인전을 마지막으로 미술계에서 자취를 감췄다. 대한민국미술전람회(국전)에서 자수가 “재료와 시간을 낭비”하는, 현대화를 위해 극복해야 할 대상으로 여겨지며 퇴조의 길을 걸은 것과 무관치 않다.
육아·가사로 지속적 활동 어렵기도···경계를 넘나드는 바늘과 실처럼 예술을 하다
근현대 자수는 다채롭고 풍요로웠지만, 대부분의 작가들은 결혼 후 가사·육아를 전담하는 등을 이유로 지속적인 활동을 하지 못했다. 3전시실 마지막에 걸린 이장봉(1917~2016)의 ‘길’과 ‘파도’(1995)는 그래서 오랫동안 눈길을 붙잡는다. 여자미술전문학교 출신인 이장봉은 결혼 후 육아·가사를 전담하다 뒤늦게 다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파도’에서 푸른 원피스를 입은 여인은 가파른 암석 위에서 거친 바다를 바라본다. 19세기 낭만주의 화가 다비드 프리드리히의 ‘안개 속의 방랑자’를 차용한 작품이다. 인생의 말년에 딸·아내·엄마로서, 자수 작가로서의 자신의 지난 삶을 되돌아보는 듯한 여성의 덤덤하고도 고독한 뒷모습을 바라보면 먹먹한 감동이 느껴진다.
여성들에게 자수는 경계를 잇고 이면을 자유롭게 오가는 실과 바늘과도 같았다. 박혜성 학예연구사는 “20세기 한국자수의 아름다운 실의 향연 뒷면에는 서양/동양, 남성/여성, 근대/전통, 순수예술/공예 등 무수한 길항 관계가 존재한다”며 “바늘과 실은 바탕천의 표면을 뚫고 이면을 접촉하곤 다시 표면으로 돌아온다. 이분법적 경계에 의문을 던지듯 경계를 넘나 든다”고 말했다. 8월4일까지]
[실-바늘로 수놓은 자수의 매혹… “반복노동 고통만큼 큰 만족감”
동아일보 기사 업데이트 2024-07-01
김민 기자
뉴욕-런던 등서 텍스타일 전시 열려
국립현대미술관도 ‘근현대자수’展
잊힌 역사 재조명 과정서 주목받아
“주제의식-테크닉 지니면 예술품 돼”
패션 텍스타일과 자수를 전공한 최환성 작가의 ‘불가분의 유동’(2023년). 의류 브랜드와 협업해 자수 장식 의상을 제작하기도 하고, 자아 탐구를 소재로 한 작품을 만들기도 한다.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물감과 붓으로 그린 회화부터 통조림 수프, 바나나와 덕트 테이프는 물론 인공지능(AI)이 만든 이미지까지. ‘이것도 미술관에 넣을 수 있을까?’ 싶은 것들이 현대 미술관의 문턱을 넘나드는 가운데 최근에는 실과 바늘로 만든 자수와 태피스트리를 조명하는 움직임이 국내외로 일고 있다.
미국 워싱턴 내셔널갤러리는 20세기 초반부터 현대까지 돌아보는 ‘짜인(Woven) 역사: 직물과 모던 추상’을,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은 안데스 문명과 현대 미국 작가를 조명하는 ‘고대와 모더니즘 예술의 직조 추상’전을 열고 있다. 영국 런던 공공미술관인 바비컨센터도 ‘풀기: 예술에서 텍스타일의 파워와 정치’전을 선보인다. 현대미술관은 왜 실과 바늘에 주목할까?
● 잊힌 역사의 재조명
섬유를 소재로 한 예술은 여성 예술가를 발굴하는 과정에서 두드러졌다. 유럽과 미국에서는 순수 예술 대접을 받지 못했던 텍스타일을 20세기 초 여성 예술가들이 적극 활용했고, 1960, 70년대에는 페미니스트 예술가들이 저항의 표현으로 생각했다.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에서 열리는 ‘한국 근현대 자수: 태양을 잡으려는 새들’도 여성 예술가 재조명 과정에서 탄생했다. 박혜성 학예연구사는 “2017년 ‘신여성 도착하다’ 전시를 준비하며 일제강점기 도쿄 여자미술전문학교(조시비)에 자수를 배우러 간 한국 여성이 많았음을 알게 됐고 여기서 연구가 시작됐다”고 설명했다.
전시장에서는 학생, 장인이 만든 자수는 물론 추상 등 새로운 표현을 시도한 흔적을 만날 수 있다. 1992년 개인전을 마지막으로 미술계에서 자취를 감춘 송정인 작가가 그중 하나다. 초등학교만 졸업한 뒤 권복혜를 사사한 그는 철망, 마대, 그물 등 낯선 재료와 파격적 기법을 사용해 눈길을 끈다. 1967년 ‘새 시대’에 기고한 글에서는 “미술과 자수는 사용하는 재료가 다를 뿐 뚜렷한 주제 의식과 시공에 대한 감각, 테크닉을 지닌다면 예술품이 될 수 있다”고 썼다.
서울 강남구 에스파스 루이비통 서울에서 개인전 ‘착륙’을 여는 셰일라 힉스도 1960년대부터 활동했지만 최근에야 대규모 회고전을 열었다. ‘착륙’전은 커다란 섬유 덩어리를 쌓거나 다채로운 색감의 덩굴이 흘러내리는 모습 등 루이비통 재단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힉스의 ‘착륙’(2014년)과 ‘벽 속의 또 다른 틈’(2016년) 등을 전시한다.
● ‘반복 노동’의 매혹
실과 천이 주는 따뜻한 느낌, 만져보고 싶은 질감, 독특한 작업 방식 등은 현대 미술가들에게 새로운 표현 방식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한국 근현대 자수’전에 삼베에 금실로 자수를 놓은 작품 ‘무제’ 등을 전시한 이강승 작가는 “처음에 소외된 장르이자 반복적 노동을 한다는 자수의 개념적 의미를 가져오고 싶었다”고 했다. 그러다 ‘반복 노동’의 매혹에 빠졌다고 그는 말했다.
그는 “(자수를 놓는) 노동의 고통만큼 작업이 완성됐을 때 만족감도 크다”며 “취미로 십자수를 해본 분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반복적 바느질을 하는 동안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이 생기는 것이 중요했다”며 “(반복 노동 속에서 깊은 생각이 나온다는 점에서) 개념 미술과 공예는 상반된 개념이 아님을 깨달았다”고 덧붙였다.
이 밖에 자수에서 사용되는 모양을 회화로 그린 써니 킴의 ‘Underworld’(1999년), 자수를 재료로 ‘자아 탐구’를 그린 최환성의 ‘불가분의 유동’(2023년) 등도 선보인다. ‘한국 근현대 자수’전은 8월 4일까지. ‘착륙’전은 9월 8일까지.]
[국립현대미술관, ‘한국 근현대 자수: 태양을 잡으려는 새들’ 개최…한국 자수의 역사
문화뉴스 기사 입력 : 2024.04.30.
장진경 기자
국가무형문화재 등 전통자수와 근현대자수, 동시대 미술 전시
2024년 5월 1일(수)부터 8월 4일(일)까지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
[문화뉴스 장진경 기자] 국립현대미술관(MMCA)은 5월 1일(수)부터 8월 4일(일)까지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에서 ‘한국 근현대 자수: 태양을 잡으려는 새들’ 전시를 개최한다.
이번 전시는 19세기 말 이후 동시대에 이르기까지 급변하는 시대 상황과 미술계의 흐름 속에서 역동적으로 변화해 온 한국 자수의 다양한 면모를 소개한다.
미국 메트로폴리탄미술관, 필드 자연사박물관, 일본 민예관, 국립중앙박물관, 국립고궁박물관을 포함한 국내외 60여 기관과 개인 소장품에서 근현대 자수, 회화, 자수본 총 170여 점과 아카이브 50여 점이 전시된다.
특히, 일제 강점기 도쿄에 위치한 여자미술전문학교(현 여자미술대학)에서 유학해 자수를 전공한 한국 여성들의 활동상과 자수 작품도 소개된다.
전시는 네 부분으로 구성되며, 각 부는 한국 자수의 역사적 흐름과 변화를 조명한다.
1부에서는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 제작된 전통자수를, 2부에서는 미술공예로서의 한국 자수 변화를, 3부에서는 해방 이후 아카데미 안에서 진행된 현대공예로서의 자수의 면모를, 마지막 4부에서는 한국전쟁 후 자수의 산업공예화 및 전통공예 계승과 현대화을 다룬다.
더불어 전시 기간 중에는 전문가 강연과 현대미술 작가와 함께하는 워크숍 등 다양한 연계 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할 예정이다.
한편, 자세한 정보는 국립현대미술관 누리집에서 확인할 수 있다.]
[정준모의 미술마을 正舌] "공짜인 듯, 공짜 아닌"...미술관·박물관 입장료
정준모 큐레이터·전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실장
아주경제 기사 입력 : 2024-05-21 12:08
◆미술관, 박물관과 돈
사실 우리는 평등하다는 사회에 살고 있지만, 특히 한국의 미술계는 물론 세계적으로 미술계를 바라보는 사람들 모두가 기회균등보다는 불평등하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다. 좀 속물적이지만, 그 이유는 세상의 모든 예술 중에서 미술이 가장 돈의 세계와 단단하고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특히 주요 미술관 박물관의 상설전 또는 특별전을 갈 때 마음을 졸이게 되는 것은 작품과 전시에 대한 기대는 물론 새로 발견 또는 구입한 다 빈치나 피카소의 내 일상을 초월한 가격을 스스로 추정해 보는 것도 한몫한다. 특히 신문이나 TV에서 보거나 들은 가격이 “정말 그 가치가 있는 것일까?”라는 의구심과 함께 전율을 느끼는 것은 인간이 속물적속성 때문이지 결코 내가 재물을 탐하는 사람이란 뜻은 아니다.
다만 미술이 문학이나 여러 형태의 음악과 다른 점 중 하나는 미술품이 완전하게 실재하려면 물리적으로 존재하는 사물 자체일 때 가장 완벽하게 기능한다는 점이다. 책 또는 사본(Replica)이나 복제품(Reproduction)으로 보는 미술품이나 유물은 실제 작품을 보는 것과 같은 경험이 아니라 훨씬 축소된 경험일 뿐이다.
따라서 언제나 미술관 박물관은 원본을 수집하고 보존하고 관리하며 조사하고 연구해 전시로 이어져야 해서 늘 더 많은 ‘돈’을 필요로 한다.
미술관 박물관은 시대에 따라 변화해야 생존이 가능한 공간이다. 그래서 많은 미술관과 박물관은 가상 현실, 인터넷 미술관을 개발하고, 전통적인 소장품 관리도 새로운 과학기술을 도입한다. 또한, 역사와 오늘의 문화를 포착하고 큐레이팅하는 데 전념하는 수많은 환상적인 블로그와 웹사이트를 개발하고 유지하고자 고군분투하고 있다.
또 문화사회적기업은 새로운 고객의 관심을 이끌어 내는 새로운 방법을 찾기 위해 노력하는 것도 중요하다. 게다가 미술관 박물관의 소장품은 시간이 갈수록 늘어나면서 이를 보관할 수장고와 전시할 공간이 필요해진다. 그래서 대개의 미술관 박물관은 십수 년이 지나면 증축은 물론, 더 새롭게 개발된 완벽한 작품보존환경으로 개선하고 조성하기 위해 최소한 개보수를 필요로 한다. 따라서 미술관 박물관은 문화유산을 수집 보존한다는 대의명분을 차치하고라도 많은 곳에서 ‘돈’을 필요로 한다.
미술관 박물관을 건립하고 유지보수하고 운영해 나가는 일은 국가와 사회의 몫으로 인식돼왔다. 영국의 보수당 정부가 1999년 어린이, 2000년 60대 이상, 그리고 그해 12월 모든 방문객에게 입장료를 인하하고 2001년 미술관 박물관에 부가세를 면제해 당근을 주면서 무료입장을 확대한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문제는 입장료가 아니야, 이 바보야
결국 연간 미술관 박물관이 납부하는 부가세만큼 실질적으로 미술관 박물관 예산을 증액해 주면서 무료입장을 이끌었고 2015년 총선에서도 무료입장을 유지하겠다고 공약했다. 이는 잠재적으로 유권자들에게 인기가 있었다는 증거다.
공짜 입장을 시행한 2001년 국립미술관, 박물관 모두의 방문객 숫자는 평균 70%로 늘었다. 정부의 압박으로 유료에서 무료로 전환해 공짜 입장을 실시한 첫 해 V&A 방문객은 전년 110만명에서 230만명으로 111% 늘었다. 그 후 2009년 영국의 미술기금(Art Fund)는 “2001년 무료 입장이 도입된 후 이전 유료 박물관 방문 횟수가 8년 전 720만명에서 2008년 1600만 명으로 두 배 이상 증가했다”고 밝혔다. 또 2010년 영국 상위 10개 중 8개의 관광명소는 무료 국립미술관 박물관이었고 2011~12 회계연도에 국립미술관 박물관 방문객은 4000만명이라고 발표했다. 계량적으로 무료입장은 관람객 방문객의 증가로 이어진 매우 성공적인 정책이었다.
하지만 특이한 현상은 방문객의 개별 신상에 변화가 있었다는 점이다. 2009년 연구에서 미술기금은 ‘입장료가 없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미술관과 박물관을 방문하는 것을 방해하는 다른 장벽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중 가장 높은 장벽은 전시된 미술품에 대한 지식의 부족과 미술관 건물 자체에 대한 위압감이 사람들에게 국가가 소장한 미술품을 감상할 자격이 없다고 느끼게 만든다는 것이었다.
특히 증가한 방문객 중 50%는 무료이기 때문에 방문했지만, 다른 50%는 입장료 유무와 상관없이 방문했다고 답했다. 따라서 무료 정책은 이론적으로 미술관 박물관에 대해 접근성을 넓혀주었지만, 학생들의 단체관람 외에 큰 변화가 없었다. 증가한 입장객 중 15%가 영국인이었고, 교육과 경제적인 중상류층의 20% 이상의 방문과 영국 남부 주민의 21%, 대졸 이상의 고학력자가 29% 증가했다. 이는 입장료와 상관없이 올 사람은 오고, 그리고 왔던 사람은 다시 온다는 사실을 증명한 셈이다.
또 입장료가 폐지된 사실을 모르는 국민이 40%에 달하는데 이들 숫자는 국립미술관 박물관이 무료라 해도 방문할 의사가 없는 것으로 밝혀졌다. 입장객이 급증한 것은 방문객의 약 40%를 차지하는 외국인의 방문이 늘었고 내국인의 경우 한 번 방문했던 이들의 재방문율이 늘면서 나타난 현상이란 점이 드러났다. 이런 조사결과를 토대로 이후 국가에 따라 내국인과 외국인, 타 도시, 다른 주에서 여행 온 이들에게는 입장료를 차등을 두고 받는 정책이 시행되는 기반이 되었다. 또 독일의 사회학자 폴커 키르히베르크(Volker Kirchberg)의 연구에 의하면 결국 방문객 증가는 공짜입장료와는 직접 관련이 없고 가장 중요한 걸림돌은 ‘시간 부족’과 ‘관심 부족’이란 점이 밝혀졌다.
정부의 지원이 거의 없이 민간의 기부금으로 운영되는 미국미술관의 주 수입원은 기부금(Donaition)이다. 그리고 입장료는 수입의 약 4~5%를 차지한다. 하지만 대형미술관의 경우는 다르다. 뉴욕의 수입의 10% 이상을 입장료로 충당한다. 2024년 입장료 인상으로 입장료가 수입의 16~17%에 달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이는 구겐하임이나 휘트니, MoMA도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이들은 입장객 감소를 걱정하지 않는다.
2015년 미국 성인 9만80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방문객 서비스 조직에 대한 국가 인식, 태도 및 활용 연구’(NAAU, the National Awareness, Attitudes, and Usage Study of Visitor Serving Organizations)에 의하면 6가지 기간(1주에서 2년까지) 중 하나에 처음 미술관 박물관을 방문하려는 미국 응답자 중 $20 이상의 입장료를 내더라도 좋은 미술관 박물관을 방문할 의사가 있거나 높다고 답한 비율이 의외로 높았다. 또 사람들은 “미술관과 박물관이 실제로 ‘전문적인’ 금액을 입장료를 내야 한다고 해도 기꺼이 방문하겠다”고 답했다.
결국 미술관 박물관의 입장료는 모든 사람이 미술관 박물관의 시설 또는 활동을 즐길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즉 타자에게 은혜와 축복을 주고, 자신의 몸을 보호하고 정신을 통일하고, 깨달음의 지혜를 획득하기 위해서 외우는 신비적인 위력을 가진 만트라(Mantra, 眞言)와 같은 것이다.
사실 문화예술사회적기업인 미술관 박물관의 사명이 문화를 장려하는 것이라면 입장에 금전적 장벽을 만들지 않는 것이 논리적으로 타당하다. 하지만 기관에서 필요한 비용이 국고나 지방재정 또는 보조금이나 후원으로 충당된다고 해도 보다 나은 활동과 서비스를 위해서는 ‘보다 많은 돈’을 필요로 한다는 점에서 유료 입장과 기부금은 불가피하다는 것이 공짜 입장을 실시해 온 영국이나 기타 국가의 결론이다.
◆나 대신 누군가가 내는 입장료
사실 무료로 입장이 가능한 미술관 박물관 같은 것도 없다. 사실 무료로 입장하는 이의 입장료도 누군가의 세금으로 이미 납부한 상태이다. 생전 미술에 취미나 흥미를 느끼지 못해 미술관이나 박물관을 찾지 않는 사람들의 세금까지 포함해서 입장료가 나간 셈인 것이다. 이는 소위 재화나 서비스를 제공하는 데 드는 비용을 해당 재화나 서비스의 혜택을 직접 받는 사람이 부담해야 한다는 ‘수익자 부담원칙’에 어긋나는 일이다.
하지만 표를 의식한 정부나 정치인들은 미술관 박물관이 무료라고 외치면서 정부가 지원해야할 예산은 계속해 줄여나가 미술관 박물관에게는 배드 파더(Bad Father)로 불린다. 영국의 경우 중앙정부가 예산의 절대적인 부분을 지원한다지만 그 예산이 방문객들의 요구를 충족시키기에는 부족하다. 그런데 그마저 줄였다.
영국에서 미술관 박물관에 지출되는 공공 자금은 2017년 통계에 의하면 매년 약 2600개의 공공기관에 약 8억4400만 파운드(11억 달러, 약 1조 4982억원)의 세금을 지출하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이는 10년 전에 비하면 연간 1억 파운드(1억3100만 달러, 약 1731억원) 이상 감소한 것이다. 실제로 인플레이션을 고려하면 약 1억1900만 파운드(1억4300만 달러)로 13% 줄어든 것이다. 또 2009년부터 2023년까지 미술관과 박물관의 지방정부의 예산은 36.7% 삭감됐다.
이로 인해 무료입장을 따라야 하는 미술관 박물관의 재정적 어려움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2023년 대영박물관(BM)의 30여 년 동안의 유물도난사건도 유물목록화 예산 부족으로 벌어진 일이라 한다. 사실 영국박물관 큐레이터의 평균연봉은 £3만1000(약 5343만원)에 불과하며 이는 런던의 교사 평균연봉보다 £6000(약 1034만원)이 낮다. 2020년 테이트 브리튼(Tate Britain)이 카페의 ‘커피 책임자’를 공채하면서 큐레이터 평균연봉보다 많은 액수를 제시해 공분을 사기도 했다. 사실 미술관 박물관의 이런 낮은 급여는 진정으로 실력있는 큐레이터보다 저임금에도 불구하고 일할 수 있는 배경 좋은 이들이 점유하는 ‘부티’ 나는 일터로 전락했다는 비판도 있다.
이런 저간의 사정은 우리나라도 다르지 않다. 우리나라가 미술관 박물관의 무료관람을 시작한 것은 명절이나 기념일, 또는 다른 정책의 보조수단으로 활용되다 2002년부터 국민의 문화복지 향상이라는 목표를 가지고 시행됐다. 이때까지는 자율적으로 선택적 무료관람을 시행하거나 입장료를 낮추었고 무료관람 대상도 연령별, 사회계층별로 선별 적용하고, 무료관람이 가능한 일시 및 기간 또한 제한적, 한시적이었다.
그러다 2008년 5월 전격적으로 기획전시를 제외한 상설전시 무료관람이 시행됐다. 그러나 입장객이 크게 늘었다는 보고는 없었고 오히려 국립중앙박물관의 경우 역대 최고의 관람객을 기록한 것은 2005년 용산 재개관으로 인한 개관 특수에 기인하는데, 이때 입장료를 2000원으로 상향했음에도 불구하고 관람객이 폭증한 바 있다. 이때도 입장료 유무가 관람객의 증감과 상관없다는 것이 증명된 셈이다. 그럼에도 무료입장이라는 정부와 정치가들의 생색에 미술관과 박물관이 병들어가고 있다.
사실 국립현대미술관이 과천에 문을 열 1986년 당시 상설전시 입장료는 110원이었고 개관기념특별전 ‘프랑스 20세기 미술전’은 성인 2000원, 학생 1000원이었다. 현재 입장료가 상설 전시의 경우 무료고, 기획전시는 2000원이니 4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변하지 않은 셈이다.
게다가 통합입장권의 경우 3개의 전시를 모두 합해 5000원에 불과하다. 국립중앙박물관의 경우도 상설전시관과 어린이박물관은 무료로 개장하고 주로 외부기획사가 대관형식으로 펼치는 특별전시의 경우 보통 1만원에서 1만7500원에 이른다.
따지고 보면 정부는 국립중앙박물관과 국립현대미술관을 공짜라고 하지만 서울관과 덕수궁관의 경우 상설전시가 없는 전시관이기 때문에 결국 입장료는 2000원에서 5000원 내외인 셈이다.
국립중앙박물관도 기획전의 입장료는 만만치 않다는 것이 일반적이고 보면 오히려 상설전시를 공짜라는 바람에 상대적으로 기획전시 입장료가 비싸게 느껴지는 결과를 낳고 있다.
무료를 표방하는 영국도 2023년 2월과 3월 사이에 수집된 자료에 의하면 성인 일반 입장권 평균이 2016년 £6(약 1만300원)에 비해 £7.60(약 1만3000원)으로 올랐다. 또 같은 보고서에 의하면 입장료를 징수하는 기관이 2016년 42%에서 2023년 7%가 증가한 51%의 미술관 박물관이 입장료를 받는다고 답했다. 그리고 입장료를 인상 또는 부과한 미술관 박물관은 ‘부정적인 영향이 거의 없는’ 범위 내에서 입장료를 인상했으며 실제로 일부는 꽤 오랫동안 가격이 너무 낮았다는 것을 조사에서 발견했다.
노동당 정부의 무료라는 소신에도 불구하고 정부나 미술관 박물관 이사회의 무료입장에 대한 재고를 막을 도리는 없을 것이다. 껍데기뿐인 미술관 박물관을 유지하는 것 보다, 입장료를 부과하는 것이 최선인 때문이다.
하지만 여전히 정부는 눈 가리고, 아웅하며 ‘무료’라 주장한다. 그런데 공짜를 즐기는 이들 조차 이제 묻기 시작했다. 실제로 혜택을 받은 사람은 누구이며, 정부 예산 즉 국민의 세금이 한계에 도달한 지금 무료입장이 살아남을 수 있는지 말이다. 게다가 맛있고 건강한 음식을 먹기 위해 기꺼이 지갑을 여는 요즘, 입장료를 낼 테니 보다 양질의 미술관 박물관의 볼거리를 제공해 달라는 요구도 만만치 않은 것이 요즘 문화 시민들의 요구다.]
[정준모의 미술마을 正舌] 미술관·박물관 입장료, 공짜는 없다?
정준모 큐레이터·전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실장
아주경제 기사 입력 : 2024-05-13 14:44
◆티켓 플레이션
올해 초 미술관 박물관의 입장료 인상이 줄을 이었다. ‘티켓 플레이션’(Thicketflation)이란 말은 줄을 잇는 입장료 인상 현상을 의미하는 신조어다.
이제 뉴욕을 대표하는 뉴욕근대미술관(MoMA)의 입장료는 성인 25달러(약 3만4000원)에서 30달러(약 4만1000원)로 올랐다. 휘트니(Whitney Museum of American Art), 구겐하임(Solomon R. Guggenheim Museum)과, 샌프란시스코 현대미술관(SF MOMA)도 뒤를 이었다. 이후 시카고 미술관(The Art Institute of Chicago)이 32달러(약 4만3000원)로 인상해 미국에서 가장 비싼 미술관이 됐다.
이런 현상은 미국만의 일이 아니다. 프랑스는 박물관법 제7조에 ‘입장료는 가능한 한 많은 대중이 접근할 수 있도록 책정돼야 한다 명시하고 있다. 그러나 1992년 행정부에 속하지만, 운영과 재정관리가 자율적인 공공행정기관으로 변모해 탁월한 경영수완을 발휘하고 있는 루브르의 운영 주체인 루브르 공공기관(l’Établissement public du musée du Louvre, EPML)은 2017년 이후 7년 만인 2024년부터 입장료를 17유로(약 2만4000원)에서 22유로(약 3만1000원)로 약 29%로 인상했다. 피카소 미술관은 1유로 올려 14유로(약 2만원), 베르사유 궁전은 1.5유로 올린 28.5유로(약 4만2000원), 로댕 미술관은 2유로 올라 14유로가 됐다.
입장료를 인상한 미술관 박물관은 대개 국가나 지방정부의 세금으로 지원을 받기보다는 민간의 기부금이나 입장료에 의존하는 미국 미술관이 앞장섰다. 이들 미술관은 코로나19로 인해 민간의 기부금이 보건 의료 쪽으로 쏠리면서 기부금이 줄었고, 관람객도 대폭 줄면서 재정난이 심각해졌기 때문이라고 한다. 게다가 팬데믹 이후 물가가 상승하면서 소장품을 유지, 보존하고, 시설관리 유지와 인건비 상승으로 경영압박을 받기 때문이라 설명한다.
하지만 미국에도 입장료가 무료인 미술관 박물관도 있다. 19개의 박물관, 21개의 도서관, 9곳의 연구소, 동물원 등을 관리 운영하는 스미스소니언(Smithsonian Institution)이 대표적인 기관이다.
스미스소니언은 미국 의회의 예산을 지원받는 연방 정부 기관이다. 6000여 명의 직원 중 2/3가 연방 공무원 신분이며, 연방대법원장이 이사회 의장을 당연직으로 맡고, 이사회에 상 하원 의원이 각각 3명씩 있지만, 미국 정부로부터 독립된 신탁 기관 즉 법인이다.
따라서, 스미스소니언은 ‘모든 사람의 교육 증진과 지식의 확산’을 기관의 설립목적 이런 목적을 달성하고자 ‘다양한 학문 분야에서의 연구를 수행하고, 그 결과를 전시하며, 대중에게 무료로 제공한다’는 원칙을 준수하는 미국 국민의 공공 자원으로 간주하기 때문에 무료를 원칙으로 한다. 민간 기부금이 중요 운영 재원인 미국의 미술관 박물관 중에는 로스앤젤레스의 게티 센터(The Getty Center)나 브로드 미술관(The Broad)도 무료다.
대표적인 입장료 무료 국가인 영국의 경우 런던의 영국박물관(British Museum), 국립미술관(National Gallery), 테이트 모던(Tate Modern)과 테이트 브리튼(Tater Britain), 빅토리아 앨버트 미술관 (V/A, Victoria and Albert Museum)등 대부분의 미술관 박물관이 무료다.
2001년 노동당 정부가 집권하면서 도입한 무료입장 정책을 지금까지 고수하고 있는데, 그 배경에는 워낙 약탈유물이 많아 소장한 탓에 무료라는 설도 있지만, 실제 정책 목적은 모든 사회 계층이 국가의 문화적 유산을 보고 감상할 기회를 확대하자는 것이다.
하지만 입장료 무료 정책은 미술관 박물관의 예산부족 문제로 이어졌다. 정부가 미술관 박물관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모든 예산을 100% 지원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특히 브렉시트(Brexit) 이후 영국의 경제가 나빠지면서 중앙정부는 물론 지방정부의 예산이 대폭 삭감되면서 많은 지역의 미술관 박물관들이 재정난을 호소하고 소장품을 판매해 유지하려는 움직임도 나타나고 있다. 따라서 간혹 간과하기 쉬운 미술관과 박물관의 문화유산 수집과 보존 그리고 전달이라는 가장 중요 기능을 생각해 재정적으로 안정적이며 지속 가능한 방법을 모색해 보아야 할 것이다.
◆무료냐?, 유료냐?
사실 미술관 박물관의 입장료의 유무에 관한 논쟁은 끝나지 않는 화두이다. 지금도 이를 둘러싼 논쟁은 여전해서 감상의 기회와 폭을 넓히자는 의견과 최소한의 질을 유지하면서, 폭을 확대하자는 의견이 여전하다. 그런데 문제는 둘의 의견이 모두 매우 논리적이며 타당해 보인다는 점이다.
우선 무료입장을 주장하는 이들은 첫째 모든 사람 즉 국내외인 모두가 문화와 예술에 접근할 수 있도록 기회를 균등하게 제공하는 것을 중요한 사회적 가치라는 접근성과 형평성을 강조한다. 특히 무료입장은 경제적 이유로 미술관 박물관을 찾지 못하는 이들에게 벽을 제거해 기회를 제공할 것이라 말한다. 두 번째 미술관 박물관은 공공재로, 중요한 교육적 자원이란 것이다. 특히 어린이와 학생에게 다양한 학문 분야에 대한 지식과 이해를 증진하는 데 도움을 준다.
세 번째 미술관과 박물관은 비영리를 전제로 한 영속적인 공공의 기관으로, 이들 기관은 공공의 이익을 위해 작동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미술관과 박물관은 중앙 및 지방정부의 지원을 받으며, 그들의 컬렉션과 전시는 공공의 자산으로 간주한다. 그리고 네 번째 무료입장은 방문객 수를 증가시켜 미술관 박물관의 전시와 교육프로그램에 참여를 높임으로써 기관의 설립목적과 목표, 임무를 달성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마지막으로 입장료가 너무 높거나 정당하지 않다고 느끼는 경우 때때로 부정적인 인식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도 지적한다. 하지만 이들의 주장은 결국 접근권의 평등으로 귀결된다.
이에 반해 입장료를 받아야 한다는 주장은 첫째 미술관 박물관의 입장료가 평균 미술관 박물관의 연간 필요한 지출예산의 약 5%에 불과하지만, 입장료 수입은 시설의 유지 및 개선, 새로운 소장품의 구입과 전시를 포함한 교육프로그램에 투입해 기관의 설립목적과 목표를 충실하게 수행 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보다 나은 프로그램의 제공과 함께 말이다. 그런데 두 번째 그보다 중요한 것은 입장료는 방문객에게 미술관 박물관 경험에 대한 가치와 감사를 불러일으키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특히 이들은 입장료를 낸 방문객은 더 깊이 보고 감상하며 스스로 성찰하는 진지한 감상자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미술관 박물관의 입장료는 정부나 지방정부의 공적 지원을 줄여 지역 사회에 더 많은 세금을 지원할 수 있도록 해서 사회적 약자를 돕는데 사용할 수 있을 것이라는 주장도 편다.
이런 유·무료 논쟁 중에 나온 대안 중 하나는 ‘기부입장료’(Donation Fee) 제도다. 이는 ‘관람객이 원하는 만큼’만 입장료를 내라는 뜻이다. 사람에 따라 1원만 내고 구경하겠다면 그것도 가능하다. 관객 스스로 입장료를 정하라는 것인데 이것 또한 방문객에게는 쉬운 일이 아니다. 많이 내는 것은 싫지만, 남보다 적게 내는 것도 속 보이는 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를 간파한 미술관 박물관은 ‘권장 입장료’(Suggested Donation)를 제시하기도 한다. 하나 ‘권장’을 꼭 따를 필요는 없다.
◆공짜는 없다?
사실 이들 주장은 영원히 결론을 낼 수 없는 난제다. 입장료를 둘러싼 두 가지 주장은 사실은 모두 논리적으로 모순되고 실제로도 틀린 주장임이 입증됐다. 입장료를 부과할 경우 부유한 사람만 오거나 가난한 이들이 오지 못해 관람객이 감소할 것이라고 했지만 입장료를 올린 미술관 박물관의 입장객은 오히려 증가했다는 보고도 있다. 또 많은 이들이 미술관 박물관의 입장을 무료로 할 경우 방문객이 늘 것이라 했지만 꼭 그런 것은 아니라는 연구 결과도 있었다.
물론 일부 미술관 박물관의 경우 소외된 관객의 참여를 위해 무료 또는 기부입장료 제도를 통해 관객이 증가한 사례도 보고된다. 사실 입장료를 둘러싼 이런 주장은 저소득층도 미술관 박물관의 입장료보다 높은 가격인 영화와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의 스트리밍 구독권을 구매한다거나 영화관이나 기타 놀이동산을 찾는 이들이 많다는 점에서 과도한 주장이다. 그래서 한편에서는 입장료는 보다 나은 서비스를 제공받을 수 있고 본인이 기여할 수 있다는 점에서 기꺼이 입장료를 낼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전적으로 입장료를 징수하지 않는 실질적으로 무료인 미술관 박물관은 없다. 대부분 미술관 박물관은 자체 소장품으로 꾸리는 상설전시(Permanent Exhibition)는 무료로 운영하지만, 모든 기획전시(Temporary Exhibition)와 특별전시(Special Exhibition)는 입장료를 받는다. 이는 무료 입장을 고수하는 영국도 마찬가지다.
영국은 대부분 미술관 박물관이 정부로부터 예산을 90%이상 지원받지만, 독립적인 법인 형태로 운영되는 ‘비 부처 공공기관’(Non Departmental Public Bodies: NDPB)이다. 하지만 예산을 보조하는 다양한 수익 구조를 만들어 운영한다.
즉 세상의 거의 모든 미술관과 박물관은 새로운 소장품의 인수, 보존, 유지 관리, 직원 급여 및 특별 전시회 비용이 예산에 큰 부담을 주기 때문에 대부분 운영자금의 대부분이 국가 또는 지방정부에서 나오지만, 그 부족분을 메꾸기 위해 입장료 징수는 물론 민간 기부와 후원금, 기념품 가게, 서점 및 기타 장소임대, 케이터링(Catering) 등의 사업을 병행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다. 사정이 이렇다면 세상에 실제 입장료가 공짜인 미술관과 박물관은 없다. 공짜처럼 느끼게 하는 착시현상만 있을 뿐이다.]
12:00~13:00 덕수궁 탐방
[덕수궁(德壽宮)
이칭별칭 : 경운궁(慶運宮), 정릉동행궁(貞陵洞行宮)
규모(면적) : 67,048㎡
소재지 : 서울특별시 중구 세종대로 99(정동)
문화재 사적 지정일 : 1963년 1월 18일
서울특별시 중구에 있는 조선시대 고종의 거처로 이용된 궁궐. 사적.
덕수궁은 처음 월산대군의 집터였던 것을 임진왜란 이후 선조의 임시거처로 사용되어 정릉동 행궁으로 불리다가 광해군 때에 경운궁으로 개칭되었다. 이후 1907년 순종에게 양위한 고종이 이곳에 머무르게 되면서 고종의 장수를 빈다는 의미에서 덕수궁(德壽宮)이라 다시 바꾸었다.
1897년(광무 1)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에서 이곳으로 거처를 옮긴 이후부터 중화전을 비롯하여 정관헌, 돈덕전, 즉조당, 석어당, 경효전, 준명전, 흠문각, 함녕전, 석조전 등 많은 건물들을 지속적으로 세워졌다. 이곳은 고종의 재위 말년의 약 10년간 정치적 혼란의 주무대가 되었던 장소로, 궁내에 서양식 건물이 여럿 지어진 것이 주목된다. 1963년 1월 18일에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역사적 변천
덕수궁이 있는 자리는 원래 조선 초기 성종의 형인 월산대군의 집이 있었던 곳으로, 선조가 임진왜란 뒤 서울로 돌아와서 이 집을 임시거처로 사용하면서 궁으로 이용하게 되었다. ‘정릉동 행궁’이라고 불린 이곳에서 선조가 죽고 뒤를 이어 광해군이 즉위하였다. 그해 창덕궁이 완성되었으므로 광해군은 이곳을 떠났으며, 경운궁이라는 궁호를 붙여주었다.
조선 후기에 덕수궁은 궁궐다운 건물도 없었고 왕실에서도 거의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다만 광해군이 선조의 계비인 인목대비를 이곳에 유폐시킨 일이 있고, 영조가 선조의 환도(還都) 삼주갑(三周甲)을 맞아 배례를 행한 일이 있을 정도였다.
고종 말년 조선 왕조가 열강 사이의 정치적 소용돌이에 휘말리면서 고종이 경운궁으로 옮기자, 비로소 궁궐다운 장대한 전각들을 갖추게 되었다. 1897년(광무 1)에 고종은 러시아공사관에서 이곳으로 거처를 옮겼다. 이 때를 전후하여 궁내에는 많은 건물들이 지어졌으며 일부는 서양식으로 지어지기도 하였다. 궁내에는 역대 임금의 영정을 모신 진전(眞殿)과 궁의 정전(正殿)인 중화전(中和殿) 등이 세워졌고, 정관헌(靜觀軒)·돈덕전(惇德殿) 등 서양식의 건물도 들어섰다.
고종이 경운궁에 머무르고 있던 1904년(광무 8)에 궁에 큰불이 나서 전각의 대부분이 불타 버렸다. 그러나 곧 복구에 착수하여 이듬해인 1905년(광무 9)에 즉조당(卽阼堂)를 비롯하여 석어당(昔御堂), 경효전(景孝殿), 준명전(浚明殿), 흠문각(欽文閣), 함녕전(咸寧殿) 등이 중건되었으며, 중화문(中和門), 조원문(朝元門) 등이 세워졌다. 이후 1906년 정전인 중화전이 완성되고 대안문(大安門)도 수리되었다. 이후 이 문은 대한문(大漢門)으로 개칭되었고 궁의 정문이 되었다.
1907년 고종은 제위를 황태자에게 물려주었으며 새로 즉위한 순종은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겼다. 태상황(太上皇)이 된 고종은 계속 경운궁에 머무르게 되었는데, 이 때 궁호를 경운궁에서 덕수궁으로 바꾸었다. 1910년에 서양식의 대규모 석조건물인 석조전(石造殿)이 건립되었다.
한편, 왕실의 크고 작은 일들이 이곳에서 일어났다. 1897년(광무 1)에 영친왕 이은(李垠)이 여기서 태어나서 1907년(융희 1)까지 거처하였고, 1904년(광무 8) 헌종의 계비 명헌태후 홍씨(明憲太后洪氏)가 인수당에서 별세하였으며, 황태자비 민씨(閔氏)도 석어당에서 별세하였다. 1907년(융희 1) 8월 순종은 돈덕전에서 즉위하였고, 고종의 순헌귀비 엄씨(純憲貴妃嚴氏)가 즉조당에서 별세하였다. 고종은 1907년 왕위를 물려주고 13년 동안 함녕전에서 거처하다가 1919년 이곳에서 승하하였다.
이와 같이 덕수궁은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이르는 약 10년간 나라와 왕실의 크고 작은 일들이 일어났던 곳이며, 궁내의 각 건물들이 그러한 역사적 사건의 무대로 활용되었다.
그 뒤 별다른 사건을 겪지 않다가 1945년 광복 후 덕수궁 석조전에서 미소공동위원회가 열려 한반도 문제가 논의되었으며, 1947년 국제연합한국위원회가 이 자리에 들어오게 되어 덕수궁은 새로운 역사의 현장이 되었다.
석조전은 6·25전쟁 중에 내부가 불탔다. 이후 덕수궁은 공원으로 바뀌어 일반에게 공개되었고, 석조전은 1986년까지 국립현대미술관으로 활용되었다.
내용
덕수궁은 당초 성종의 형 월산대군의 사가(私家)이던 것을 선조 때 임시로 왕이 거처로 사용하면서 궁이 된 것인 만큼, 궁이 자리잡은 위치나 건물의 배치에 있어서도 조선시대의 다른 궁궐들과는 다른 면모를 보인다.
그 위치는 한성부(漢城府)의 서부 황화방(皇華坊)과 정릉동(貞陵洞)일대로 이곳은 원래 태조의 계비 강씨(康氏)의 무덤인 정릉(貞陵)이 있던 곳이다. 능은 태종 때 옮겨지고 그 자리에 월산대군의 집이 지어졌던 것이다.
이곳은 도성 내의 주요 가로와도 직접 면하여 있지 않은 곳으로 조선 후기에 제작된 고지도에도 나타나지 않는다. 따라서 이곳은 궁이 있는 곳으로는 여겨지지 않던 것으로 보인다. 덕수궁은 결국 고종 말년에 왕이 이곳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갑자기 궁궐로서의 모습을 갖추었으며, 건물의 배치도 이때 들어와서 자리를 잡게 되었다.
현재의 상태에서 그 위치를 알아보면, 궁의 서쪽은 미국대사관 남쪽 길을 따라 러시아공관이 있던 언덕 일대와 신문로 일대에 해당되고, 북쪽은 영국대사관을 거쳐 성공회(聖公會) 앞길을 따라 덕수초등학교 담 위쪽을 지나 신문로에 이르는 지역에 해당된다. 이 자리에 1884년(고종 21) 갑신정변 이후로 영국, 미국, 러시아의 공관 터를 내주면서 궁내에 많은 변화가 일어났고 서양식 건물이 지어지고 도로가 생기게 되었다.
건물의 배치는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지는데, 정전과 침전(寢殿)이 있는 부분, 선원전(璿源殿)이 있는 부분, 그리고 서양식 건물인 중명전(重眀殿)이 있는 부분이다. 이 가운데 궁의 중심이 되는 곳은 정전과 침전이 있는 곳으로, 정전인 중화전이 남향하여 있고 정남쪽에 중화문, 그 남쪽에 정문인 인화문(仁化門), 동쪽에 대안문, 북쪽에 생양문(生陽門), 서쪽에 평성문(平成門) 등이 있었다.
정전의 뒤편에는 석어당과 즉조당이 있는데, 이 두 건물은 고종이 이곳에 오기 전부터 있던 건물들이다. 정전의 동편에 침전인 함녕전이 있고 함녕전의 서쪽에 덕홍전(德弘殿), 북쪽에 서양식 건물인 정관헌, 동북쪽에 수인당(壽仁堂), 동쪽에 영복당(永福堂)이 있었다. 중화전의 서북쪽에도 많은 건물이 있었으며 관명전(觀明殿)·보문각(寶文閣) 등이 중요한 것들이었다.
중화전은 처음 중층지붕의 장대한 규모로 세워져, 2층으로 조성된 월대(月臺) 위에 정면 5칸, 측면 4칸의 건물이었다. 그러나 1904년 화재 뒤 재건되면서 규모를 줄여 단층건물로 만들었다. 중화전 주변에는 사방에 행각이 세워져 있어 중화문에 연결되어 있었으나 이것도 철거되어 없어졌다. 중화문 역시 당초는 중층건물이었으나 재건되면서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단층 건물로 축소되었다.
함녕전은 정면 9칸, 측면 4칸에 한쪽 후면 4칸이 더 붙은 ㄱ자형을 하고 있으며, 익공형식(翼工形式)의 간결한 건물이다. 1985년 중화전 및 중화문과 함녕전이 보물로 지정되었다.
석어당은 궁내 유일한 2층 전각으로 본래 이 건물은 한때 인목대비가 유폐되었던 곳이며, 역대 국왕들이 임진왜란 때의 어렵던 일을 회상하여 선조를 추모하던 곳이기도 하다. 1906년 재건된 건물이 지금 남아 있으며 단청을 하지 않은 건물이다.
정관헌은 서양식 건물로 고종이 다과를 들고 음악을 감상하던 곳으로, 한때는 태조·고종·순종의 영정을 봉안하기도 하였다. 조적식 벽체에 석조기둥을 세우고 건물 밖으로 목조의 가는 기둥을 둘러 퇴를 두르듯이 짜여진 건물이다.
평성문 밖 지금 미국대사관 서쪽에는 이층 서양식 건물로 접견실 또는 연회장으로 쓰던 중명전이 있었고, 그 북쪽에 만희당(晩喜堂)·흠문각, 서쪽에 양복당(養福堂)·경효전 등이 있었다.
이 주변 일대의 건물에 대하여는 전체를 수옥헌(漱玉軒)이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선원전이 있던 지금 덕수초등학교와 전 경기여자중고등학교 일대에는 선원전 외에 사성당(思成堂)·흥덕전(興德殿)·흥복전(興福殿)·의효전(懿孝殿)이 있었다.
이밖에 궁의 북쪽과 남쪽 담장에는 구름다리가 가설되어 러시아공관 북쪽 언덕에서 큰 길을 건너 경희궁으로 이어졌고 지금의 지방법원이 있는 자리로도 이어졌다. 남쪽의 구름다리는 그 건너에 과거 의정부(議政府)가 옮겨와 있었기 때문에 궁과의 내왕을 편하게 하기 위하여 설치한 것이었다.
궁의 배치는 1904년 큰 화재가 있은 뒤로 변화되었고, 서양식 건물들이 지어지면서 기존의 건물과 조화를 잃게 되었는데, 특히 나중에 지어진 석조전 등 서양식 건물들은 기존의 정전 건물들과 축(軸)도 일치되지 않고 그 위치도 정전과 인접하여 대규모로 지어지면서 종래의 궁궐의 공간적 규범을 깨뜨리고 말았다.
화재 뒤 건물이 중건되면서 나타난 가장 큰 변화는 정문의 변경이었다. 덕수궁의 정문은 정전의 정남쪽에 있던 인화문이었는데, 1906년 중건공사를 하면서 정전의 동쪽에 있던 대안문을 수리하고 그 명칭도 대한문으로 고쳐 이 문을 정문으로 삼았다.
이에 따라 궁으로의 진입은 동쪽 모퉁이에서 시작되어 서쪽을 보고 들어가다가 다시 동쪽으로 꺾여 정전에 이르게 되었다. 대한문은 1968년 도시계획에 의하여 덕수궁 담장이 안쪽으로 옮겨지면서 1970년에 안으로 옮겨졌다
궁내에 서양식 건물이 들어선 것은 19세기 말부터이며, 이 가운데 돈덕전·석조전이 가장 큰 규모의 건물이었다. 돈덕전은 평성문 밖 북쪽에 있었으나 철거되었고, 그 남쪽 가까운 위치에 석조전이 세워졌다.
석조전은 정면 54m, 너비 31m의 장대한 3층 석조건물로, 이 건물이 들어서면서부터 이웃한 궁의 정전과 주변의 한식 건물들이 가지고 있던 고유한 건축구성에는 많은 변화가 생겼다. 더욱이, 석조전의 남쪽에 일본인들이 미술관을 세우고 그 앞에 서양식 연못을 만들면서 궁의 본래의 모습이 상당히 파괴되었다.
의의와 평가
덕수궁은 조선 말기에 궁궐로 갖추어진 곳이기는 하지만, 구한말의 역사적 현장이었으며 전통목조건축과 서양식의 건축이 함께 남아 있는 곳으로 조선왕조의 궁궐 가운데 특이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13:00~13:12 시청역 1번 출구로 원점회귀하여 탐방 완료
13:12~13:25 시청역에서 을지로3가역으로 가는 2호선 지하철 승차 대기
13:25~14:00 2호선 지하철을 타고 시청역에서 을지로3가역으로 가서 3호선으로 1차 환승하여 연신내역으로 이동한 후 6호선으로 2차 환승하여 구산역으로 이동 [35분 소요]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 안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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