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제목 : ※유사성의 원리(Principle of Similarity)※
작가명 : 김미걸
E-mail : a_ppppp@hanmail.net
연재장소 : 새싹소설2
총편수 : 총 64편 완결
장르 : 로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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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인터넷소설닷컴 (http://cafe.daum.net/youllsosul)
41.
"심리적 스트레스가 너무 큽니다. 환자를 편안하게 해주세요.
그래야 이번 사고로 인해 다친곳이 빨리 회복될테니까요."
윤성이 어딨냐고. 오윤성이 누구냐고..
..나는 누구냐고...
눈물번벅이 된 얼굴로 묻던 언니는 결국 쓰러지고 말았다.
잠들어있는 언니눈가의 눈물자국을 닦아주고있을때면
이제서야 양도영도 병실에 있었음을 알수있었다.
더불어 김노을까지.
"안가고 뭐해요 여기서."
"언닌가봐?"
"눈독들이지말아요."
"연하에는 관심없다."
그거 다행이네요.
누워있는 언니를 안쓰럽게 내려보는 김노을과
알수없는 표정을 지으는 양도영을 지나쳐 병실을 나왔다.
그리고 언니를 찾았다는 소식을 못들었을
강표오빠를 찾기위해 병실에서 나오니,
반대편에서 걸어오는 축 처진 어깨의 강표오빠가 보였다.
.
.
"사실이야..?"
"..어?"
"언니가 기억을 잃지않았다는거..사실이야?"
캔커피를 하나씩 들고 1층 로비에 나란히 앉은 우리.
강표오빠와 나.
여러사람들의 시끄러운 수다소리에 내 질문을 금방 묻혀버렸다.
그러면 그렇다, 아니면 아니다.
대답 좀 해줘 제발.
멍해있던 오빠는 천천히 고개를 저을뿐이였다.
"몰라. 모르겠어 나도.
나는 그냥..혜원이가 기억이 돌아왔으면 좋겠어."
왜이렇게 착한건지. 왜이렇게 바보같은건지.
기억이 돌아오든 돌아오지않든 달라지는건 없는데
왜이렇게 언니가 잊어버린 기억에 집착하는건지.
윤성오빠가 불쌍해서?
자신을 기억해주는 사람의 수가 줄어들어서?
아니면. 언니가 평생토록 죄책감에 시달려 살길 바래서?
"왜? 왜 언니의 기억이 돌아오길 바래?"
질문이 사라지면 묻고 또 물었지만
오빠는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그저 바닥만 내려보는 오빠의 모습은 슬프기 짝이 없다.
오빠의 대답을 재촉하는것을 그만두고 자리에서 일어서면
너무나 구슬픈 오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 고백을 잊어버렸으니까.."
십년을 넘게 참고 참고 꾹 참았던 내 고백을.
희망이 없을 줄 알면서도 말했던 내 고백을.
혜원이는 잊어버렸으니까.
그때도 지금도 그 대답을 듣지 못해서.
그게 너무 화가나고 작은 희망마저 버리지 못해서.
이런 내마음을 혜원이가 알아주길 바래서..
.
.
..
"엄지씨! 오늘 왜그래??"
바닥으로 추락한 열두번째 그릇의 유리파편들이 사방으로 퍼지고
집중이 되지않는 답답함에 나오는건 한숨뿐이였다.
오늘은 그다지 손님이 많은 편은 아니였기에
육체적으로는 덜 힘든 하루였지만,
한시간에 한번꼴로 깨뜨려버린 접시에 월급은 점점 깍이고 말았다.
"엄지씨. 무슨일 있어?"
있죠. 많죠. 일이야 너무 많아서 큰일이예요.
너무 힘들어서. 혼자 감장하기엔 너무 커서.
그래서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어요..
손님도 없으니 일찍 들어가서 쉬라는 사장님의 말씀에
괜찮다고 웃어보인뒤, 유리파편을 줍는 미라언니를 도왔다.
지금 들어가서 쉬면 이번달 월급은 틀려진다구요.
그래서 나는 쉴수가 없어요.
악바리로 버텨야만 해요. 나는..
.
.
"먼저 가보겠습니다."
"그래. 가서 좀 푹쉬어!"
"네. 오늘 죄송했어요.."
"아니야. 들어가."
어두컴컴해진 7시가 되면 메고있던 앞치마를 벗어두고
사장님의 배웅을 받으며 김밥집에서 나오니,
꽤 차가운 바람이 내옆을 빠르게 스쳐지나갔다.
언니한테 갈까하다가 몸도 마음도 너무 치진 나머지
집쪽으로 몸을 틀어 발을 굴렸다.
언니가 기억을 잃었든, 잃지않았든 더이상 신경쓰지 않으려했지만
그것은 오늘하루 내 머릿속에서 떠나지않았다.
그렇게 멍하니 걷고 있을때면 낯잊은 목소리에 내몸은 사선으로 틀어지고..
미끌어지듯 멋지게, 혹은 우연찮게 멈춰버리는 자전거.
그 위에 차가운 바람덕에 볼이 빨갛게 언 김태양이 앉아있었다.
"타!
"뭐?"
"태워줄게!"
보통 이럴때는 삐까번쩍하게 멋드러진 자동차나
그것도 아니면 오토바이로 카리스마를 보여줘야 하는거 아니니?
왠 축 느러진 츄리링차림에 꽤 오래된 자전거라니..
타라는 녀석의 재촉에 뒤에 앉으면
자신이 두르고 있던 목도리를 내 목에 둘러주고는 활짝 웃어보인다.
목이 잔뜩 늘어난 티하나 입은 주제에 멋진척은..
출발하겠다는, 꽉 잡으라는 녀석의 말에
갈비뼈가 으스러지도록 꽉 잡자, 놀란듯 움찔거리는 녀석이였으나
이내 곧 뭐가 그리 기뿐지 온갖 탄성을 자아내며 발을 굴리기 시작한다.
속도는 걷는사람보다 두배정도 빨랐고
이상태에서 '오빠달려~!'라고 외치고 뒤에서 경찰차들이 쫓아온다면 참 웃기겠지.
여전히 소란스러운 녀석의 등을 때리며 조용히 하라고 꼬집다가
세차게 불어오는 바람에 녀석의 등에 얼굴을 묻어버렸다.
.
.
..
"잘가."
"에?!"
"왜? 뭐가?"
"그냥 가라구?"
그럼? 뭐, 자고 갈려고?
바래다 줬으니까 차정도는 대접해줘야지!
코코아 한잔을 대접해달라고 떼쓰는 통에
벌겋게 꽁꽁 언 두손을 보여주자 머쓱한듯 어깨를 들썩이는 녀석.
내가 그 자전에게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니자식을 잡고 있느라 손이 얼었다.
근데 뭐? 코코아 한잔?
이게 아주 웃겨 자빠지다못해 드러눕네 드러누워.
.
.
"엄지야아~ 자?? 응?"
"내가 핫초코 사왔어!"
"문좀 열어줘. 오빠 춥다잉"
씻고 나오니 현관너머 들려오는 김태양의 목소리.
금방 사라질줄 알았던 녀석의 목소리는
더욱 크게 울려퍼지기 시작했다.
추우면 설은찬집에 가라고 하자,
불이 꺼져있다며 아직 안들어왔다고 우겨대는 녀석이였다.
결국 현관문을 열었고
볼이 빨갛게 언 김태양이 활짝 웃으며 집안으로 발을 디뎠다.
"열어줄꺼면서 튕기긴.."
이라는 배부른 소리를 하며 말이다.
..
"물은 컵의 3분의 2정도. 핫초코는 두스푼 반. 알지?"
직접 타먹는 것이 아닌 타달라고 하는 주제에
원하는것이 뭔 그리도 많은지.
이것저것 까다롭게 구는 녀석에게
코코아 한잔을 타주고는 그 맞은편에 앉았다.
"오~ 울엄지 코코아 잘타넹??"
잔뜩 구겨진 내 표정에 이제와서 아부하기 시작하는 김태양.
아부도 앞뒤 상황을 봐가며 하시지?
물은 한컵 가득, 핫초코는 한스푼 넣어서 완전 맹맛일텐데 맛있기는..
하여튼 얄밉다니까.
어느새 맹맛인 그 코코아를 다 마시고 혼자 떠들기 바쁘던 김태양이
입술을 꾹 닫으면 무거운 침묵이 녀석과 내앞에서 흐르고,
그 침묵이 너무 싫은 나머지 괜히 녀석을 쫓아내기 바빴다.
그러면 바닥에 벌러덩 누워 못간다고, 배째라던 녀석은
팔로 두눈을 가린채 또한번 침묵을 불러왔으나
그 침묵도 서서히 울려퍼지는 김태양의 목소리에 모습을 감췄다.
..
엄지야. 내가 왜 한달만 사귀자고 했는지 알아?
..우리 아랫집 점보할머니가 엄지 너랑 한달만 사귀래.
.
.
한달후에. 우리 둘 모두 죽는데..
42.
7시를 알리는 알람소리에 눈을 뜨니
그 소리를 듣지못한듯 조용히 자고있는 김태양의 얼굴이 보였다.
이놈. 귀가 어둡..뭐야?
왜 니가 여기서 자는거야..!??
그것도 내옆에서...!!!
"으악!!!!!!!!!!!"
놀란듯 나도 모르게 튀어나오는 비명과
녀석을 저만치 밀어버리는 내 두발.
모두 뒤늦은 반응이였고.
춥다며 이불속으로 기어들어가는, 게슴츠레 뜬 녀석의 두눈을
찌를뻔한 욕구를 억지로 자제시켜야만했다.
.
..
"그게 있잖아..으아 미안해! 응?"
세수만 하고 집을 나서는 내 뒤를 역시 세수만 한 김태양이 따랐다.
어째서 이녀석이 내옆에서 잔건지.
술은 마신것도 아닌데 전날의 기억이 나지도 이해가 되지도 않았다.
그저 꿈이기만을 바랄뿐이였다.
"너희 뭐냐?"
연신 미안하다는 김태양의 목소리외 들려오는 또 다른 목소리.
그러니까.
평상위에 앉아 담배를 태우던 설은찬의 목소리였다.
아침부터 왜 같이 나오냐?
오호라. 둘이 벌써 그렇고 그런 사이?
설은찬의 말에 얼굴이 붉어진 김태양은 자랑스럽게 설은찬을 향해 웃어보였다.
넌 뭐야 이자식아.
지금 너때문에 오해를 샀구만 뭘 잘했다고 웃어?
연신 히죽히죽 웃는 김태양의 정강이를 차준뒤 계단으로 향했다.
대체 뭔생각을 했길래 얼굴이 붉어지는거냐구.
거기다가 웃긴 왜웃어? 아니라고 변명해도 쉬언찮을판에.
씩씩거리다가 다시 되돌아가 정강이를 부여잡고
끙끙대는 김태양을 향해 입술을 떼었다.
"오늘부터 100m 접근 금지!"
..
.
.
"뭐 이자식아? 여기서 무슨 놀이터인줄알아?!"
아침조회를 끝낸 담임의 뒤를 따라온곳은 교무실이였고
그런 담임에게 며칠전부터 생각해오던 자퇴에 대해 말을 꺼내자,
저렇게 불같은 담임의 설교 아닌 설교가 시작되었다.
"이새끼가 힘들게 복학시켜주니까, 뭐? 자퇴??"
점점 커져가는 담임의 목소리에 교무실 안 선생님들과
몇몇 학생들의 시선들이 단박에 내게 꽂히고..
담임을 보던 시선이 어느 한곳을 향해져버렸다.
..
그러니까..나처럼 설교를 듣고있는 김태양에게.
"교실로 돌아가. 가서 공부나해. 알겠어??"
"죄송해요. 자퇴해야되요."
하 참나. 이자식이 진짜.
쇼실로 돌아가라는 담임에게 들고있던 자퇴서를 내밀자
결국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담임은
한대라도 때릴 기세로 큰소리치기 시작했다.
자퇴하려는 이유를 말하라는 담임에게 입술을 들썩일때,
담임이 내팽겨친 자퇴서를 줍는 김태양.
결국 녀석의 손에 이끌려 교무실을 빠져나왔다.
.
.
.
"김태양. 좀 놔봐. 아프다구!!"
내 손목을 잡고 있는 녀석의 손에 점점 힘이 실리면
느껴져오는 아픔에 놔달라고 해도 말이 없는 녀석이였다.
복도를 걷다가 갑작스레 놔버리는 녀석에게 기분이 상해,
잡혔던 손목만 내려보면 곧 녀석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그만두려는 이유가 뭐냐고 물으면 간단하게 돈이라고 대답했다.
"반엄지."
"돈 벌어야 돼."
반엄지. 엄지야.
그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돈 벌어야 돼.
적어도 나한테는 돈이 먼저야.
내 이름만 부르는 녀석에게 돈을 벌어야한다고 대답하고..
그것을 두어번정도 반복하다가,
녀석의 손에 들린 자퇴서를 되찾아와 다시 교무실로 향하면
다급히 나를 잡아채는 김태양이였다.
"학교 그만두지마."
"돈 벌어야.."
"혜원이누나 병원비때문에 그래??"
"....."
"그거라면 내가.."
..
말하던 녀석이 입술이 굳게 닫히고..
나를 잡고 있던 녀석의 두 손이 제자리를 찾았다.
"니가 뭐?"
"..어?"
"언니 병원비 대주게?"
"......"
얼마줄수 있는데? 얼마줄껀데?
언니랑 내가 굶지 않을만큼? 언니랑 내가 돈걱정 하지 않을만큼?
얼마줄껀데. 말해봐. 말해보라구..
..
수업이 시작된 복도에는
허탈한 내 웃음소리가 조용히 울려퍼졌다.
니가 무슨 돈이 얼마나 많은지는 모르지만. 필요없어.
그리고 니가 아무리 내 남자친구라도 동정은 하지마.
그런 동정받을만큼 나 불쌍하지않아.
얼굴을 푹 숙인채 중얼거리듯 미안하다는 녀석을 뒤로하고 걸었다.
오늘만큼은, 적어도 지금만큼은 김태양이 너무 미웠다.
너무 서러워 눈물이 멈추지 않을만큼.
입술새로 흘러나오려는 울음소리를 참는것이 벅찰만큼.
딱 그만큼 김태양이 너무 미웠다.
.
.
.
..
결국 제출하지 못한 자퇴서를 들고 집으로 가던 길에
나를 만나러가던 이모와 마주쳐 병원에 도착한 지금은 그저 멍할뿐이였다.
검사결과가 나왔다는 연락을 받은
이모와 함께 병원에 온 나는 그저 빈껍데기일뿐이였다.
몸속 그 모든것들은 김태양에게 있었다.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모습이 왜그리도 기억에 박혀버린건지.
괜스레 주머니안에서 쉼없이 울리는 핸드폰만 만지작댈뿐이였다.
.
잠시후, 내 이름을 부르는 간호사의 목소리에 정신이 깨지고..
내 손을 잡는 이모를따라 진료실로 발을 굴렸다.
..
나란히 앉아있는 이모와 내앞으로 검사한 사진들과 자료들을 펼친
윤정희선생님은 본격적으로 이것저것 묻기시작했다.
"그간 흉통이라던가 호흡이 가빠졌다던가,
혹은 쓰러진적이 종종 있었나요?"
"...몇번..있었어요.."
말없이 나를 보던 선생님의 두눈이 이모에게 향했다가
다시 내게 향하는사 싶더니 책상위 사진에게 꽂혔다.
그리고 다홍색 립스틱이 옅게 칠해져있는 선생님의 입술이 들썩였다.
이게 엄지양의 심장이예요. 이건 엄지양의 평균 맥박수…등등등,
검사결과를 설명해주던 선생님의 입술이 또한번 멈춰버렸다.
큰 한숨을 내쉬고 검사결과들을 한쪽으로 정리하는 윤정희선생님.
곧 그녀의 입술이 또한번 떼졌다.
"쉽게 말씀드릴게요. 엄지양은 현재 심근경색이예요."
철렁. 정말 철렁하고 심장이 내려앉음을 느꼈다.
심근경색..엄마가 앓았던 심장병.
엄마의 병명을 알게된후로 치료법과 생존확률,
몸에 좋은 음식들을 알아내기위해 인터넷에서 수백번 수천번 쳐봤던 단어..
"심근경색은 심장을 둘러싸고 있는
관상동맥의 일부가 막혀서 혈류가 차단되고,
차단된 이후의 심근이 피가 통하지않아 결국 썩게되어
심장이 제 기능을 할 수 없게 되는 질환이예요."
..
이 관상동맥이 동맥 경화증에 걸리면
심장으로 가는 혈액의 공급이 원활하지 못하게 되어 협심증이 나타나게 되요.
지금 엄지양은 협심증을 모른채 지내왔구요.
결국 피가 통하지 못해서
심장 근육의 일부분이 파괴되어 죽는데, 즉 심장이 굳는 병이예요.
.
.
내손을 잡고 있는 이모의 손에서 느껴지는 떨림과
주체할수 없을만큼 빠르게 뛰는 심장.
할말을 잃었다. 할말이 없었다.
굳이 말하라고 시킨다면
오직 죽는지, 사는지 그것만 물어볼것이 뻔했다.
"나..살수있나요?"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혈액공급이 원활하지 못하면 위험해져요.
그전에 응급치료를 해야하니 우선 입원을 통해 약물치료와.."
그럼 되요? 그럼 나 살수있어요?
..약물치료보단 한시빨리 이식하는것이 더..
언니와 내 뒷바라지하느라 입원하지 못했던 엄마.
솔직히 말하자면 돈이 없었다.
그 때문에 일하시던중 갑작스런 심장마비로 돌아가셨다.
그러니까 엄마랑 나랑 같은 병인데
나도 언제 심장이 멈출지 모르고,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거죠?
..
꽤 넓은 진료실에는 연신 흐르는 눈물을 참는 이모의 울음소리뿐이였다.
.
.
.
입원하기를 권유하는 선생님께 곧 다시 오겠다고 말한 뒤
나온 진료실앞에 굳은 채 서있으면,
나를 붙잡고 울던 이모가 결국 쓰러지듯 주저앉아 대성통곡을 하고
그제서야 내 시야도 흐려지고 눈물이 하나둘씩 물밀듯 흘렀다.
..
맞나봐 태양아. 그 점보할머니 쪽집게 인가봐.
나 죽는데. 언제 어디서 어떻게 죽을지 모른데..
언제 죽을지. 어디서 죽을지. 어떻게 죽을지 모른데..
나 죽는데..어떡해? 나 어떡해 태양아...?
언니는. 강표오빠는. 이모는. 다 어떡해..?
..너는...어떡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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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모의 울음소리가 점점 커지고
발치에 떨어진 눈물들이 하나둘씩 모여 흐르면
여전히 떠나지않는 김태양의 모습.
태양이가..활짝 웃는 모습..
43.
이제부터 본격적인 흉통이 있을거예요. 그러니 항시 진통제 챙기는거 잊지말구요.
그렇다고 진통제에 너무 의지하면 안돼요. 제일 좋지못한 자세니까.
하루빨리 좋은 결정 해주길 바래요.
모든 병의 치료는 때를 놓쳐선 안되니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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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방받은 약을 들고 한걸음 한걸음 병원을
나설때마다 겹쳐지는 태양이의 모습과 선생님의 말씀들.
결국 구르던 발이 멈춰지고
덩달아 발을 멈춰 의아한듯 나를 올려보는 이모.
너무 울어 빨게진 이모의 눈가를 보니 가슴이 아려오기 시작했다.
겨우 멈춘 눈물이 또한번 고여버리고..
애써 웃는 내게 역시 애써 웃어보이는 이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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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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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엘 가겠다구? 지금?"
"아무래도 다시 가봐야겠어요."
"그래도 몸이..그러면 그냥 내일..아니 나랑 같이.."
"괜찮아요. 담임선생님께 말씀도 드릴겸 가는거니까."
너무 걱정말구 들어가 쉬세요.
안색이 너무 안좋아요. 어제도 밤새 가게보셨잖아요.
..
이모를 태운 택시가 점이 되고 시야에서 사라졌음에도
한동안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할수없었다.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몸안에 숨어있던 눈물들이
모두 쏟아질것만 같았기에.
그저 초점없이 허공만 바라볼뿐이였다.
..
.
.
.
"12800원이요"
거스름돈과 버스표를 들고 올라탄 버스안.
학교에 가봐야겠다는 말은
그저 이모를 안심시켜드리기위해 했던 말이였다.
지금은 학교로 가는것보다 그곳으로 가는것이 더 급했다.
톨게이트로 진입하는 버스로 인해 수원과는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
"학생. 이 계란 좀 먹을려??"
"아니요. 괜찮아요."
옆에 앉은 할머니가 건낸 삶은계란을 나름대로
공손히 거절했는데 할머니는 왜 그런 눈길로 보시는 건지..
어쩔수없어요. 거절할수밖에 없다구요.
이제는 모든것이 바껴야하거든요. 식습관부터 하나하나..
그래서 못먹는 거예요. 먹을수가 없어요.
의사선생님께서 음식도 하나하나 가려먹어야한다고 하셨거든요.
이제 내몸은 내몸이 아니예요.
나는..아프거든요. 심장이요.
마음이 너무 아파요..
..
"할머니. 혹시 점 칠수 있으세요?"
"점? 점보다는 관상을 좀 보는데.."
"그러세요? 그럼 제 관상이 어때요?"
"예뻐. 아주 예뻐."
예쁜데..짧네.
짧고 굵네.
내 얼굴을 보던 할머니는
이로써 3번째 계란 껍질을 까기 시작했다.
짧고 굻어.
..죽어서도 기억에 남겠어.
.
.
"한다발?"
"네. 예쁜걸로 주세요."
약 보름만에 다시 보게된 꽃집주인양반이자,
짝퉁김흥국아쟈씨는 왠일로 수염이 깎아져 있었다.
더욱 놀라운것은 수염이 깎여져 있는 얼굴은 꽤나 동안이라는 것.
이제 아쟈씨는 짝퉁김흥국이라는 타이틀을 벗어 던지시겠군요..
"저번에 왔음서 또왔네?"
"할말이 있어서요."
"할말??"
..따지려구요. 따지러 왔어요..
.
.
유난히 바람한점 없는 오늘,
그 흔한 일렁임없이 잔잔히 흐르는 강가에 굳은듯 섰다.
고개를 푹 숙이고 강물만 내려보며 말이다.
평소처럼 엄마의 얼굴이 강물위에 그려져야 했는데
오늘은 왠일인지 그저 물속안 자갈들만 보일뿐이였다.
간혹 김태양의 얼굴도 그려지긴 했지만 말이다.
..
들고 있던 국화를 강물위에 흘러보내고
맞은편에 위치한 산만 멍하니 바라보았다.
따져야 했는데 입술이 떨어지지않았다.
울고 싶은데 그 많던 눈물마저 흐르지 않았다.
마치 모든것을 받아드린 듯, 거의 포기상태였다.
..
"엄마. 나 왔어요.."
내 얼굴 또 봐서 좋지? 그동안 뭐가 그렇게 바쁘다고
자주 찾아오지도 못했는지..나 많이 미웠지?
꼭 필요할때만 엄마를 찾네..참 못났다. 그치?
엄마. 나 아파. 아프데. 죽는데..어떡하지?
무서워.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어.
의사선생님 말씀대로 하고싶은데 무서워서.
너무 무서워서 엄두가 안나. 겁부터 나..
그렇게 하면 살수 있을런지..그렇게 하면 죽지 않을런지..
온통 이런 생각들뿐이야.
나 어떡해..? 엄마도 이랬어?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우리한테 말하는게 두렵고 미안했어?
나 어떻게해야 돼? 어떡해..나 어떡해 엄마...
..
.
.
또 한번 수염만 깎고 동안이 되어버린 꽃집주인양반을 통해
국화 한다발을 사들고 산 비탈길을 올랐다.
이 길을 오를때마다 느꼈던 힘겨움이 다 아파서 그런걸지도.
오르던 걸음을 멈춰 호흡을 일정하게 안정시켰다.
심장이 뛰고 숨한번 쉬는것이 여간 신경쓰이는게 아니였다.
.
.
..
약간의 눈이 쌓인 묘앞에 놓여있는 국화 한다발.
시들지않은것이 요근래에 누군가가 다녀간듯 싶었다.
그옆에 들고있던 국화를 내려놓고 침묵을 지키자,
여기저기서 산새소리가 들려왔다.
.
.
오빠. 내가 오빠를 겨우 잊고..다른 사람을 사랑하게 됬는데..
이제는 그 사람을 잊어야 해. 어떡하지...?
첫사랑도 아니고 짝사랑도 아니고 두번째 사랑인데..
그래서 첫사랑처럼 마지막으로 남기려고 좋아했는데..
...사랑했는데..끝이라고 말하네..?
빨리 잊으라고..떠나라고 다들 나를 부르네...?
..나 어떡해?
내가 그사람의 첫사랑이라서. 첫사랑은 이루어지지 않는데서.
그래서 한달뒤에 죽는다는 점괘가 나온거고 심장병에 걸린걸까?
만약 내가 녀석의 첫사랑이 아니였다면 뭔가 다를까? 달라졌을까?
나 이제 어떡하지? 어떻게 해야 해?
..
나..너무 무서워..
지금도 쉬지않고 떠오르는 녀석의 얼굴이 사라지질않아..
녀석에 대한 마음이 자꾸 커져만 가..
이런 나 어떻게 해야 해..뭐라고 대답이라도 해줘...
.
.
.
.
.
"우리 진짜 인연인갑다. 운명!"
"......"
"벌써 우연히 세번이나 만났잖아~!"
수원행 표를 대신 끊어주며 정신없이 떠드는 사람.
터미널앞에서 정말 지나치듯 우연찮게 만난 사람.
우연히 세번만났으니 운명이라며 혼자서 잘도 얘기하는 사람.
그래, 김구라다.
오랜만에 마주친 김구라는 시끄러웠다.
저번 병원에서 만났을적엔
뭔가 분위기 있어 보이고 조용해서 적응하기 힘들었지만,
이번에는 되려 시끄럽고 산만해서 적응하기 힘들었다.
그러니까 너무 오랜만에
시끄러운 김구라를 마주했다는게 이유라면 이유였다.
..
김구라와 나란히 앉은 버스안에는 오직 김구라의 목소리뿐이였다.
그런 김구라를 보다가 창문에 얼굴을 기대면
차의 떨림이 그대로 전해지고..
빠르게도 움직이는 창밖의 풍경들에 넋을 잃고 말았다.
"야야야. 반엄지."
"왜요"
"어디 아프냐? 얼굴이 영 안좋다?"
"..안아파요."
안아파요. 나 멀쩡해요.
진통제 먹을만큼 아프지 않다구요.
안아파요..아프지 않다구요..
김구라와 마주한 눈을 신경질적으로 피했고,
창에 비친 내 얼굴은 잔뜩 일그러져있었다.
눈가가 천천히 빨갛게 되고
눈물이 고이면 입술을 지긋히 깨물었다.
울면안돼. 울지말자. 울지마 반엄지.
아직이야. 아프지 않잖아.
지금은 아픔따위 없잖아. 지금은 괜찮잖아.
그리고 앞으로도 괜찮을거야.
그니까 울지마. 울지말자. 참자. 울면 안돼.
더이상 눈물을 흘려선 안돼.
난 약하지 않아. 강해. 강하잖아 반엄지. 울지마.
..
내가 떠날때. 태양이 옆을. 그 모두의 옆을 떠날때.
내가 눈감을 때. 아픔에 못이겨 눈을 감아버릴 때.
그때 울자. 지금은 울지 말자.
숨쉬고 있잖아. 살아 있잖아.
.
.
옆에..태양이가 있잖아.
44.
"술 좀 사주세요"
혼자 떠들다 지쳐 잠들어버린 김구라는
수원터미널에 도착한뒤에서야 정신을 차렸고,
잘가라고 말하는 김구라를 붙잡아 술한잔 사달라고 하니
물끄럼히 나를 훑는 김구라의 두눈이였다.
그차림으로?
그제서야 김구라마냥 내몸을 쭉 훑으니
지금 현재 내모습은 교복차림의 고등학생인것을 알수있었다.
역시 안되겠지. 잘가라고 인사라는 건내는
나를 잡아끄는 김구라를 천천히 따랐다.
.
.
김구라와 온곳은 시내의 어느 한 호프집이였다.
그앞에서 통화중인 김구라를 바라보기만을 몇분이 흘렀을까,
통화를 마친뒤 다시 나를 이끄는 김구라였다.
\. 부끄부끄.
"적당히 마셔라. 오늘은 뒷처리 안해준다."
"알겠어요~ 가서 일보세요 싸장님"
술과 이것저것 안주거리로 가득한 술상을 차려주며
주는데로 받아먹지 말라는 말을 남기고 나가는 김구라의 지인.
그러니까 이곳은 김구라가 아는 형이 운영하는 호프집으로,
교복차림이고 미성년자인 나때문에
가게안 구석에 위치한 쪽방에서 술상은 그럴싸하게 차려졌다.
"주량은 얼마정도?"
"취할때까지요"
"오~ 멋진데"
내앞에 놓인 빈컵을 가득 메우는 맥주.
쭉쭉 마시고 취해보자는 김구라는 벌써 원샷을 한 뒤였고
그에 대조되게 잔을 들고 망설이는 나를 발견할수있었다.
몸을 위해서 마셔서는 안되지만
그것을 깨달은건 벌써 원샷에 들어간 뒤였다.
"술먹을 컨디션이 영 아닌것같다?"
"피차일반. 사돈남말하지 말아요"
시끄러울줄 알았던 술자리는 꽤나 조용했다.
말없이 술만 마시는 김구라나 나나,
챙겨온 술을 두어병정도 해치웠지만 벌써 취한듯 싶었다.
"궁금한게 있는데요"
"뭔데?"
"거긴 왜 간거예요? 광주요."
"..따지러."
따..지러요?
응. 따질게 좀 있거든.
누구..한테요?
대답없이 김구라의 입술이 닫히고
김구라로 인해 컵안에 남은 술들이 천천히 일렁이기 시작했다.
대답안해줄거예요?
..힘들다. 역시 이얘기는 힘들어.
대답을 마친 김구라는
반정도 남아있는 잔에 술을 붓기 시작했다.
"나 또 궁금한게 있는데요.."
"또? 뭔데. 말해봐."
"만약에..여자친구가 아프다면..어떻게 할거예요?"
..그냥요. 그냥 물어보는 거예요.
저번에 봤던 영화가 떠올라서..
얼마나 아프냐에 따라 달라지겠지.
죽을병이요. 죽을병에 걸렸다면..
대답을 생각하는 듯 떨궈지는 김구라의 두눈.
오늘도 여전히 김구라의 두눈은 옅게 충혈되어 있었다.
김구라의 대답을 기다리는 초조함을 술로 달래고..
조용한 친묵이 김구라가
내려놓은 술잔소리에 허공으로 흩어져 버렸다.
"사랑해줄거야."
..후회하지않을만큼.
.
.
.
..
"얼씨구. 아주 끝장을 봤구만?"
뒤늦은 새벽녘이 되서야 영업을 마친 찬우는
쪽방 풍경에 고개를 저었다.
이리저리 굴러다니는 빈병들과 한쪽 구석에서 잠들어있는 엄지.
마지막으로,
벽에 기대앉은 구라와 방안을 가득메운 담배연기들.
역시 방을 내주는게 아니였는데.
급히 후회하는 찬우였다.
"또 혼자 다마셨지?"
"쟤도 한병반이나 마셨는데."
"얼씨구. 자랑이다"
"지송"
무의미한 말들을 주고받던 찬우는
입을 닫아버리는 구라를 보다가 술상들을 치우기 시작했다.
하얀 연기로 가득한 방안에는
환기를 위해 열어둔 창문을 타고 차가운 한기들이 퍼지기 시작했고,
그에 추운듯 몸을 뒤척이는 엄지에게 이불을 덮어준 찬우는
그앞에 놓인 담배를 집어들었다.
"다시 피냐?"
"다시 끊을거예요"
감았던 두눈을 뜬 구라는 자고 갈거냐는
찬우의 질문에 고개를 저으며 엄지를 업기 위해 도움을 청했고,
이러쿵저러쿵 구시렁대면서도 돕는 찬우였다.
"집으로 데려다줘라."
"내가 딴길로 샐것같아요?"
"당연한거 아니냐?"
"에이. 섭하당.."
축 느러지는 엄지를 업고 찬우의 배웅을 받으며
호프집을 나선 구라는,
그냥 무작정 걷기 시작했다.
.
.
18층에 멈춰있던 엘레베이터가 내려오기만을 기다리는
구라의 다리가 한계에 도달했을때.
위태롭게 업혀있는 엄지가 당장이라도 떨어질것만 같을때.
구세주마냥 등장하는 그림자가 있었으니..
"김태양? 보고만있지말고 좀 도와줘봐!"
그랬다. 김태양이였다.
늦은 새벽녘 구라의 등에 업혀 자고있는 엄지를
멍하니 바라만보던 그림자의 주인공은 김태양이였다.
"이게 어떻게 된거야? 엄지가 왜 여기 있어?"
"이따말해줄게. 근데 너는 왜 이제오냐?"
...엄지 기다리느라.
.
.
광주에서 만났는데 술좀 사달라잖아.
그래서 사줬드니 얼마 못먹고 자버리더라.
그리고 집을 알아야 데려다주던지 하지,
결국 몰라서 우리집으로 데려온거고.
침대위에 누워 자고있는 엄지가 불편해보여
엄지의 블라우스 단추를 하나 풀어주고 이불을 덮어주는 태양을 보며
조금전 질문에 대한 대답을 줄줄이 늘어놓기 시작하는 구라였다.
그런 구라의 대답을 들으며
엄지를 내려보던 태양이의 입술이 천천히 떼졌다.
"형. 나는 형이 좋아."
엄지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태양을 보며
구라는 작은 웃음을 뱉어냈다.
입술을 꾹 깨물고있는 태양이의 모습은 불안함 그 자체였다.
큰어머니 기일날,
첫눈에 반한 여자애에게 핸드폰을 주고 왔다며 설레여하던 모습과
전화를 받지않아 초초해하던 모습.
밀어내기만 하던 엄지와 사귀게 됬다며 기뻐하고
엄지를 만나고 온 날이면 오늘은 이러이러했는데 잘한거냐고 묻던,
첫사랑에 울고 웃으며 자랑하던 모습들
그저 부러울뿐이였다.
그저..그때의 김구라도 되돌아 가고픈 구라의 입술이 떼졌다.
"동생 여자한테 관심없어 짜샤."
태양의 어깨를 툭 치고 방을 빠져나가는
구라의 그림자가 오늘만큼은 유난히 길게 느껴졌다.
.
..
달빛으로 가득한 방안 모습은 낯설었다.
그러니까 우리집이 아니라는 말.
지끈거리는 두통에 이맛살을 찌푸리며 몸을 일으키니
바닥에 앉아 침대에 얼굴을 묻고 자고있는 김태양이 보였다.
김구라와 몇마디 주고받으며 술을 마시던것만 기억나는 지금,
김구라를 통해 이곳에 왔음을 짐작할수있었다.
.
.
"뭐, 물 줄까?"
자고있는 태양이를 깨워 마주앉으니 설레이는 그 모든 것들.
말없이 바라보는것도. 나를 보는 녀석의 눈빛에도.
정말 그 모든것에 이렇게 설레이는구나..
모두 뒤늦게 깨달은 나였다.
엄지야. 아까..아니 이제 12시 넘었으니까 어제 그..엄지야?
마주앉은 태양이의 다리에 얼굴을 묻어버렸다.
고인 눈물이 흐르기전에 빠르게 감춰버렸고
이런 내 행동에 어찌할지 몰라 굳어버린 태양이였다.
"엄지.."
"..으..."
울어? 울어 엄지야?
멈추지않는 눈물에 입술새로 새어나오는 울음소리.
놀란 태양이가 남자의 힘으로 울고 있는 나를 일으키고..
눈물에 잔뜩 젖어있는 녀석의 한쪽 바지와
점점 굳어지는 태양이의 얼굴이 보였다.
왜우냐고 묻는 태양이는 대답없이 울기만 하는 내 눈물을
옷소매로 하나하나 닦아 주었고,
그 옷소매는 서서히 젖어들기 시작했다.
"정말 사랑해 줄거야?"
..내가 아파도 사랑해 줄거야?
내옆에 있어줄거야...?
점점 커져만 가는 울음소리가 태양이의 품속에서 울려퍼지고..
나를 안은 손에 힘을 실은 태양이는
당연하다는 듯 대답한다.
..
투정이든 짜증이든 다 받아줄거야.
항상 옆에 있을거야.
김태양과 반엄지는 하나니까. 우리니까.
..내가 너를..사랑하니까...
45.
잔뜩 부은 눈을 떴을땐 김태양의 품속이였다.
그 품속이 너무 편하고 따듯해서 다시 눈을 감으면
찢어지듯 밀려오는, 참을수없는 아픔에
주머니에서 꺼낸 진통제를 물없이 삼켜야만 했다.
침대에서 내려와 고르지못한 숨을 헐떡이며
통증이 가라앉기만을 바랄때,
녀석의 잠귀가 어둡다는것에 대해 감사할 따름이였다.
"하..하아.."
서서히 가라앉는 통증에 긴 한숨부터 나오고..
얼굴에 번벅이된 눈물과 땀을 천천히 훔쳤다.
태양아.
우리 한달이 되려면 하나,둘,셋..21일 남았다..?
아직 반도 넘게 남았고 우린 한달후에 죽는댔으니까,
앞으로 이렇게 아파와도..갑자기 죽지는 않겠지..?
갑자기 너의 곁을 떠나지는 않겠지..?
그렇..겠지...?
.
.
..
해가 중천에 떴을때서야 학교에 가기 위해 모인 우리.
그러니까 김태양. 김구라. 김마리. 오영재. 나.
이렇게 다섯명인 우리.
김태양방에서 나오는 나를 보고는 지금까지 내 시선을 피하던 김마리는
옆동에 산다는 오영재와 쑥덕이며
제일 먼저 아파트 단지를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그 뒤를 해장을 해야한다며 구시렁대는 김구라가 따르면
김태양과 둘만 남은 이 상황이 어색할 뿐이였다.
그러니까 새벽녘에 있었던 일들이 떠올라
나 혼자 어색해할뿐이였다.
"추우니까 이거 해.
글구 오늘은 장갑도 준비했지롱."
오늘도 두르고 있던 목도리를 내게 준 김태양은
가방에서 장갑을 꺼내며 웃어보였다.
너는 지금 그걸 나보고 끼라는거야?
자신이 건네는 장갑을 떫은 표정으로 바라만보자
직접 내 두손에 껴주는 녀석.
이 센스의 출처는 꼭 김구라일것 같구나.
결국 내 두손에는
멋드러지는 검은 가죽장갑이 자리잡았다.
..
.
"어제 화낸건 미안했다."
"아니예요."
담임이 사준 베지밀을 들고 온곳은 상담실이였다.
베지밀을 먹지 못하는 나는 그저 만지기만 할 뿐이였고,
마주앉은 담임의 손에 있던 베지밀은
어느새 쓰레기통 신세를 지고있었다.
"그래. 천천히 얘기 좀 해보자."
"......."
"자퇴하려는 이유부터 말해봐."
"...돈이요."
돈이 없어요.
언니 병원비도 그렇고 학비도 그렇고.
너무 힘들어요..
좁고 너저분한 상담실에는 점심시간을 이용해
축구시합을 하는 학생들의 기합소리로 가득했다.
.
.
딱딱딱..
테이블위에서 톡톡톡 움직이는 담임의 손가락들.
흐르는 침묵에 한숨만 나올 뿐이였고
이내 감겼던 담임의 두눈이 내게 꽂혔다.
"우선 다녀."
"......"
"이번학년은 마쳐야지. 곧있음 방학인데.
또 다닐셈이야?"
답답한듯, 혹은 지친듯 한숨만 내뱉던 담임은
담배하나를 꺼내 입에 물었다.
하얀연기들을 뱉어내며
내가 내민 자퇴서를 훓는 담임을 향해 입술을 떼었다.
"아파서..학교를 다닐수가 없어요.."
..심근경색이래요.
그게 무슨 병이냐면요..관상동맥이..그러니까요.
쉽게 말해서 심장이 굳는 병인데요..
심장마비로 돌연사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래요..
..
저도 다니고 싶어요..
다른 애들처럼 보충수업도 열심히 듣고,
도서관가서 공부도 하고.
수능도 쳐서 대학도 가고 싶어요..
근데 죽는다잖아요..
언제 죽을지 모른다잖아요..
죽는다는데..그렇다는데 어떻게 학교에만 있어요..
학교에만 있을수가 없어요..
언제 죽을지 모르니까 미리미리 해야할일이 너무 많드라구요..
학교는 조금이라도 다녀봤으니까 됐어요..
괜찮아요..
.
.
이젠..사랑만 할거예요..
죽어서도 후회하지않게..그렇게 사랑할거예요..
사랑해야되요..
사랑..해줘야해요..
..
흐느낌이 전부였던 상담실에는
곧 수업을 알리는 종소리가 흘러들어왔다.
.
.
..
\. 순향병원 709호.
"광 3점에 청단,홍단 6점. 합이 9점!"
자자, 900원씩.
어? 아줌마는 광박이니까 1800원이네요!!
침대 두개를 합쳐놓고
병실 환자들의 보호자들과 판을 벌린 사람.
그래. 강표오빠다.
저 새집이 가득한 뒷통수는 강표오빠가 틀림없어.
3년전에 졸업한 음정상고 체육복을 즐겨입는 사람은
내 주위에 강표오빠 뿐이라구.
덤으로 그옆에서
돈을 줄수없다며 억지부리는 아줌마들을 맡은 언니까지.
아주 재대로 판을 벌린 모습이였다.
그나저나 강표오빠가 여깄다는건 김밥집엔 누가 있다는거야..!?!?
고스톱신이 내린 강표오빠를 끌어내 물으면
오늘은 쉬는날이라고 짧게 대답한뒤 다시 합석하는 강표오빠였고.
뒤늦게 나를 발견한 언니가 어서오라며 반갑게 맞아주었다.
.
.
..
"여기는 무슨 율무차가 400원씩이나 해??
완전 바가지가 바가지. 그치??"
막 뽑은 율마차를 건내며 내옆에 앉는 언니는
외상으로는 크게 다친곳이 없어,
거동하는데에는 큰 불편함이 없어보였다.
김이 피어오르는 율무차에 꽁꽁 언 두손을 녹일 때,
잔잔한 언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 곧 퇴원할거야."
"벌써? 의사가 해도 된데??"
"많이 아픈곳도 없는데 입원이 뭐냐.
솔직히 그건 오바잖냐."
결정한 생각을 쉽게 바꾸지않는 언니의 고집의 끝을 알기에
그 한마디 대꾸없이 율무차만 마셨다.
언니에게는 장점도 되고 단점도 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뭐냐면, 술을 마신 이후의 기억이 전혀 없다는 거다.
술에 취했든 취하지않았든
술을 마셨던 그 순간부터의 일들을 전혀 모른다는거다.
이것이 본인에게도 그렇겠지만 타인에게도 꽤 큰 영향을 미친다.
그날 옥상에서의 일을 언니가 기억하지 못한다는게 좋지만
내게는 또 하나의 충격인것처럼 말이다.
.
.
"언니."
허공을 맴도는 침묵을 깨트리고
텅 빈 종이컵에 향했던 시선을 언니에게 꽂으며 물었다.
"내가 갑자기 사라진다면 어떡할거야?"
"잊을거야."
아무런 표정의 변화도 없이
아주 당연하다는듯 대답하는 언니였다.
.
.
잊어버릴거야.
잊어버려서. 슬픔이란거 모른채 살아갈거야.
둥글게 반달모양으로 휘어지는 눈웃음을 보이며 말이다.
..
언닌 참 이기적이야.
어렸을때부터 엄마가 동생이고 어린 나에게 무엇하나 더 주면
울어서 어떻게서든 나보다 하나를 더 갖거나 뺏었으니까.
언니. 그래서 윤성오빠를 잊은거야?
슬프기 싫어서. 울기 싫어서. 그래서 사랑했던 사람을 잊은거야?
나는. 언니가 참 부러워..
.
.
.
"어서와요. 그렇지않아도 연락하려고 했는데.
앉아요."
진료실에 들어서는 나를 반갑게 맞아주는 윤정희선생님.
선생님의 미소를 보니
역시 사람은 웃는게 예쁘다는것을 다시 느낄수있었다.
잠시후, 내 거절에도 불구하고 직접 탄 유자차를
건내며 웃어보이는 선생님을 보고있자니,
병원이 아닌 꼭 어느 한 가정집에 온 기분이였다.
많이. 편안했다.
"어떻게, 결정하고 오는 길인가요?"
"..21일뒤에 입원할게요."
"엄지양."
어차피 저 21일후면 죽어요.
어떤 점보할머니가 저 그때 죽는다고 했데요.
그러니까 그때까지만이라도 편하게.
자유롭게 살고싶어요.
.
선생님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지는건 그리 오랜시간이 흐르지않았다.
날카롭게 변한 선생님의 눈썹과 두눈이
꽤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것 같았다.
"21일후에는요?"
엄지양은 그 시간이 지난 뒤에는
죽어도 괜찮다는거예요?
엄지양은 왜 하나만알고 둘은 몰라요.
점괘는 다 미신이예요.
운명은 자신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결과가 틀려진다구요.
지금 입원을 하고 정기적으로 치료를 하면,
21일은 물론이고 21개월, 21년을 더 살수도 있어요.
눈을 크게 뜨고 주위를 봐요.
엄지양은 살수 있어요. 내가 꼭 살릴거예요.
도대체 무엇때문에 망설이는거예요?
대체 망설이는 이유가 뭐예요? 말해봐요.
..
하나둘씩 흐르던 눈물이 어느새 교복치마를 젖셨고,
꾹 다문 입술새로 참았던 흐느낌이 흘러나왔다.
"...사랑이요.."
내가 아파도 내 옆에 있어주겠다는 녀석에게..
내 아픔을. 내 슬픔을 모르게 해주고 싶어요..
그저 내가 웃는 모습만.
내가 행복하고 건강한 모습만 보여주고 싶어요..
그냥..내 사랑만 주고 싶어요..
46.
멍하니 집으로 향하는 계단을 오를때.
PC방 문을 열고 조용히 나를 부르는 이모를 따라
이모의 집으로 향했다.
PC방 운영하랴, 노래방 운영하랴 집안일에 소홀함이 없잖아 있는
정돈되지않은 거실에 이모와 마주하고 앉았다.
집안일 이라면 둘째가라도 서러울 강표오빠마저
언니옆에 있으니 말 다한거지 뭐.
"혜원이는 곧 퇴원한다는구나."
"알고 계셨어요?"
"내가 너희일에 모르는게 뭐 있겠니."
하긴. 맞는 말씀이세요.
언니랑 내가 힘들어도 말한마디 없이 버티면,
이모는 오히려 당신을 탓했으며
말안한 우리에게 토라지시곤 하셨으니까요.
이모는. 엄마랑 다를바없으니까요.
"병원에서 연락이 왔어."
"....."
"엄지 너를 설득해달라는구나."
병원에만 있는것이 답답할테지. 무서울테지. 두렵겠지.
그치만 엄지야. 그치만 말이다..괜찮을거야.
엄지 너는 죽지않을거야.
너는 내 모든걸 포기하더라도 내가 살릴거야.
그러니까 엄지 너도 이모를 조금만 더 생각해줘.
이모는 엄지 너를 포기할수가 없어.
이모는..너마저 그렇게 보내고 싶지않아..
.
.
이모와 마주하던 두눈이
따듯하게 달궈진 거실바닥으로 떨궈졌다.
.
.
..
결국 눈물을 보이는 이모에게
확실한 대답을 하지 못하고 집으로 올라오니,
그앞에서 추위를 떨쳐내기 위해
발을 동동동 굴리는 김태양이 있었다.
"늦었네."
지극히도 낮은 목소리를 내뱉는.
계단앞에 멈춘 내게
다가오지도 않는 그런 김태양이 말이다.
추우니 들어가서 얘기하자고 하면
싫다는 말한마디없이 평상위에 앉아버리는 녀석이였다.
"앉아. 얘기 좀 하자."
"피곤해. 다음.."
"그럼 거기서 듣기만 해."
녀석이 저렇게 저기압인 이유는 나겠지.
내가 자퇴를 해서.
녀석의 옆으로 가려던 발걸음이 녀석을 통해 나오는
하얀연기들로 인해 멈춰졌다.
그것을 눈치챈 듯
물끄럼히 나를 보던 녀석은 작은 웃음을 흘렸다.
황당함과 어이없다는 웃음이였다.
.
담배를 피고 또 피고..담배곽안에 있던 담배가
두어개정도 남았을때서야 녀석은 말을 잇기 시작했다.
"자퇴..했더라."
"...응."
나를 올려보다가 다시 담배를 꺼내는 자신의 손을 잡는
내행동에 놀란 김태양. 그리고 나, 반엄지.
녀석의 주위에서 맴돌던 담배향들이
코를 자극해오기 시작했다.
"아 저, 그러니까.."
"......"
"담배..피지마.."
하아..한숨을 내쉬는 녀석에 손에 들린
담배와 라이터가 땅으로 떨궈지고..
내 허리를 감싸안는 녀석의 힘.
그러니까 내품에 묻은 녀석의 얼굴이
내 배꼽위에 있다고 해야겠지.
평상이 낮으니 이쯤이지,
조금이라도 높았어봐. 어우 생각도 하기 싫어.
놀라기도 했지만 민망함에 자신의 이름만 부르는 나를
더욱 세게 감싸안는 녀석이였다.
"화나."
힘든 너한테 힘이 되주고 싶은데.
힘내라는 말도 못하고 아픈말만 해서
울리는 나한테 너무 화가 나.
그래서 또 너한테 화풀이 하려고 했던게 너무 화가 나.
.
..
제자리에 있던 팔을 뻗어
말을 멈추고 한숨만 내쉬는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자,
얼굴만 빼꼼히 들어올려 나를 올려보는 김태양이였다.
그런 녀석의 두눈을 짝소리가 나게 가리면
아프다는 녀석의 외침.
.
눈물고였단말이야.
그러니까 쪽팔리게 왜 쳐다보냐구.
다시 내 배에 얼굴을 묻고 부비적대는 녀석을 밀자,
평상위로 벌러덩 누워버리는 김태양은 나를 향해
활짝 웃어보이기 시작했다.
그러면 점점 흐려지는 녀석의 모습.
대체 왜이리도 눈물이 많아진건지..
..
집안에 먼저 발을 디딘 내가 다리가 풀려 주저앉으면
뒤따라 들어오던 녀석은 괜찮냐며 묻기 시작한다.
다 너 때문이잖아.
그렇게 낮은 목소리로 날 부르니까.
그렇게 따듯하게 날 봐주니까.
긴장이 확 풀려서 그런거 아니냐구.
또 다시 점점 흐려지는 녀석의 모습에
지금 흘러나오려는 목소리가 떨리지 않기만을 바랄뿐이였다.
"안아줘."
"어..어?!"
"안아줘, 태양아."
흔들림이 없던 목소리에 남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쉴때
얼굴이 붉어진 녀석을 발견할수 있었다.
무슨 상상을 했길래?
큼큼, 헛기침을 두어번 내뱉으며 나를 품안가득 넣어버리는
녀석의 품은 매번 느끼는 건데 따듯했다.
서로의 체온이 닿지않고 옆에 있는것만으로도
따듯한 것처럼 말이다.
흐르려는 눈물을 꾹 참아내고,
옅게 배어있는 담배향에 나오려는
기침들을 삼켜가며 천천히 입술을 떼었다.
"우리 자자."
.
.
..
달빛과 알람시계의 빛이 전부인 방안.
언니 이불을 깔고 언니가 누워있어야 할 자리에는
숨소리만이 전부인 김태양이 누워있다.
그러니까. 하나뿐인 방안에 나란히 누워있긴 한데
한 이불은 아니라는거.
왼쪽으로 고개를 틀어 자냐고 물으면
되돌아 오는건 녀석의 숨소리뿐이였다.
자자는 내말에 성큼성큼 방안으로 들어와,
이불을 깔더니 재빠르게 이불속으로 들어가 누운 녀석이였다.
그런 녀석을 보며 씻지도 않고 그 옆에 누웠는데
녀석은 그뒤로 단 한마디도 없었다.
"김태양. 정말? 진짜??"
다시한번 물었지만
되돌아 오는건 역시 녀석의 숨소리였다.
반듯하게 누워있는 녀석을 향해 팔을 뻗자,
곧 녀석의 따듯한 체온이 느껴졌다.
그리고 또 하나.
차가운 내손에, 혹은 내행동에 놀란듯
움찔거리는 녀석의 얼굴과 조금씩 떨리는 두 눈썹.
그 모습을 보고있자니 웃음만 나올뿐이였다.
..
녀석을 향해 누워있다가 다시 녀석에게 등을 보인채
반대로 누워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달빛과 마주한 지금,
녀석도 있으니 제발 아무일 없이 날 이 밝기를.
지금 흐르는 이 시간이 무사히 흐르기를.
바라고 또 바랄뿐이였다.
.
.
"자..??"
오랜만에 찾아온 잠에 취했을때.
"엄지야. 자?"
조심스러운 녀석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있지, 엄지야."
우리 지금 사귀잖아..
엄지 너도 지금은 나 좋아하잖아..
나는 네 남자친구고. 너는 내 여자친구니까..
힘들면 힘들다고.. 아프면 아프다고..
서로 비밀같은거 만들지 말자. 응?
눈물같은거..참지 말자.
울면 좀 어때. 약해지면 좀 어때.
둘이잖아. 혼자가 아니잖아.
우리..사랑하잖아..
..
밀려왔던 잠이 사라지고 수많은 눈물들이 베개를 적셨다.
호느낌이 새어나가지 못하게 이불을 물어도 보고..
들썩이는 어깨를 눈치채지 못하게 몸을 웅크려도 봤지만.
그 어두운 방안에는 내 흐느낌 소리와
놀라 일어서는 태양이의 뒤척임 소리뿐이였다.
"불..키지..으..."
미안해. 혼자가 아닌 둘인데.
사랑하는데. 아직은 눈물을 보일수가 없어.
힘든것도. 아픈것도. 그 어떤것도 보일수가 없어..
어떻게 보여줘야 할지 모르겠어..
정말 미안한데..너무 이기적인데..
계속..지금처럼 조금만 더 모른척해줘..
조금만 더.. 미안해.
같이 힘들어할 너를 볼 자신이 없어.
미안해. 미안해 태양아..
..
.
울고있는 내옆으로 와 내몸을 트는 녀석.
팔로 눈을 가린채,
날 내려보고 있을 녀석와 마주했다.
"엄지야."
"...."
"엄지야."
"..으..."
부르지마. 그렇게 따듯하게 부르지마..
나중에 나 어떡하라구..
나중에 너는..어떡하려구..
47.
째깍째깍.
시계침 소리만이 가득한 방안이였다.
내 흐느낌소리가 사라졌을때서야
다시 내옆에 누워버리는 녀석.
을면서 미안하다는 말만 되풀이 하는
나를 토닥이던 녀석의 손길은,
내 두눈을 적시기에는 충분했다.
항상 자신보다 나를 더 생각해주는 녀석에게
내 아픔을 모두 기대고 싶었지만 그럴수가 없었다.
내 아픔을 모두 받아낼 녀석에게 상처를 줄수가 없었다.
.
.
눈을 가리고 있던 팔을 치워 고개를 틀면
나를 향해 돌아누운 녀석이 보였다.
"태양아.."
있잖아. 아까 했던말..
우리 자자..고 한말. 나 그거 진심이야.
확김에 했던 말 절대 아냐.
나 정말 진심이야..
너는 모르겠지만 나는 처음인데..
그 처음이 니가 되길 바래.
난 그래, 태양아..
..
말을 멈추면 곧 녀석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나도 처음인데."
라는,
꽤 억울한 목소리가.
너는 모르겠다는 내 말이 심히 거슬렸나보다.
"근데 엄지야.."
"...."
"꼭..지금이여야 해?"
"..응."
응. 지금이여야 해.
시간이 없어.
나중에 내가 건강해질수도 있지만
그건 모르는 일이니까.
그래서 나는 지금이여야만 해.
이기적이겠지만. 이기적이지만.
그 어떤 방법을 통해서라도
내 사랑을 모두 보여주고 싶어.
너와 내가 하나가 되길 바래.
내가 네것이 되길 원해..
.
.
잠시 찾아온 침묵이
태양이가 뒤척이는 소리에 모습을 감추고..
팔을 받치고 내위에서
나를 내려보는 녀석과 두눈을 마주했다.
"괜찮아..?"
"응. 괜찮아."
괜찮아. 너니까. 김태양이니까.
만약, 나중에 내가 건강해지고
그때 니가 내옆에 없더라도.
그래도 나는 괜찮아. 후회하지않아.
절대로 너를 원망하지않아.
지금 내가 너를 사랑하니까.
..
받치고 있는 녀석의 팔을 잡음과 동시에
녀석의 쉼호흡이 흩어지고..
나를 보고 있지만 망설이는 녀석을 향해 웃어보였다.
"괜찮아. 괜찮아 태양아.."
팔을 뻗어 녀석의 볼을 쓰다듬으면
점점 가까워지는 녀석의 얼굴.
나를 안고 있는, 맞닿은 녀석의 입술에
나 또한 녀석의 목을 감싸안았다.
..
자신의 목을 감싸안은 내팔에서 전해오는 그 떨림에
뜨거운 체온이 살짝 떼졌다.
"괜찮으니까 무서우면 지금이라도.."
"아니야. 괜찮아. 아니야."
괜찮아. 무서운게 아니야. 무섭지 않아.
지금 내앞에 있는게 너라서.
김태양 너라서.
그래서 나는 무섭지 않아.
나는..행복해. 너를 원해.
여전히 웃어보이면 또다시 느껴지는 녀석의 체온.
나를 감싸안은 팔을 풀어
교복블라우스를 하나씩 푸는 손길에.
더욱 더 뜨거워져만 가는 체온에.
녀석을 안고있는 내 두팔에는 힘이 실린다.
.
.
..
제발. 제발. 제발 지금만은.
지금 이 시간만은.
녀석과 함께 있는 시간만은 방해하지 말아주세요.
제발. 지금만은 아픔이 없게 해주세요.
조심스러운 녀석의 손길을.
눈물나도록 간절한 내 바램을.
..하늘은 외면하였다.
하늘은 오늘도 내편이 되어주지 않았다.
"으....아.."
"엄..지야..?"
"..으. 으.."
"엄지야.."
자신을 밀어내버리는 내 행동에 놀란 태양이는
잠시 멍해있다가,
아픔을 호소하는 나를 흔들기 시작한다.
그러면 나는 또한번 녀석을 밀쳐내며
잠바주머니에 있는 약을 찾아나선다.
두알정도 꺼낸 약을
내앞으로 내밀어지는 물과 함께 삼켜버렸다.
.
가라앉기를.
심장에서 전해오는 이 아픔이 한시빨리 가라앉기를.
바라고 또 바라면 그때서야 내 두눈에 잡히는 태양이의 모습.
멍하니 나를 내려보고 있는 모습.
어떡해요. 어떻게 할거예요..
태양이가 봐버렸잖아요..
내 아픔을 태양이가 알아버렸잖아요..
이제 어떻게 할거예요.
어떻게 해야해요, 나..
..
숨쉬는 것이 편해질때 내앞에 앉은 태양이는
끌러진 내 블라우스 단추들을 하나하나 정돈해주기 시작한다.
옷맵시가 정돈되면 얼굴 가득 흐르는 땀과 눈물들도 닦아주었다.
아무말없이.
내가 먼저 말해주기를 기다리는것마냥..
"태양아.."
"....."
"그러니까..
"....."
"내가 좀 아파.."
심장이..좀 아파..아프데..
심근경색이라는데..
그게 뭐냐면..심장이 서서히 굳는 병인데..
사실 언제 심장이 멈출지 모른데..
약물치료로도 살수는있지만..그래도 이식을 해야하고..
그리고..그니까 아무튼 좀 많이 아파..
.
.
미안해..말하지 못해서..말하지 않아서..
내가 많이 아파서 미안해..
"미안해. 미안해 태양아.."
녀석과 마주하고 있던 얼굴을 무릎위에 묻어버리면
내 팔을 잡고 있던 녀석의 팔이 천천히 떨궈졌다.
.
.
..
"순향병원이요"
한동안 울고만 있는 나를 안아주지도,
달래주지도 않던 녀석은 무작정 나를 끌었다.
어디가냐고 물으면 아무말없이 걷던 녀석은
골목을 빠져나와 텅빈 도로에서 택시를 잡았다.
그런 뒤에서야 녀석이 가려는 목적지를 알수있었다.
순향병원. 거길 왜?
아무리 묻고 또 물었지만
대답이 없는 모습에 눈물이 고여버렸다.
이러지마. 이러지마 태양아..
화내지마. 아프잖아.
니가 이러면..마음이 너무 아프잖아..
..
.
.
어두운 병원복도를 녀석을 따라 걸었다.
그러니까 녀석이 나를 이끌고 있다고 해야겠지.
택시에 타고 이곳에 도착하기까지
녀석은 단 한마디도 없었다.
이곳. 순향병원 윤정희 선생님의 진료실 앞.
맞잡은 두손이 얼음장마냥 차가워 닭살이 돋기 시작했다.
..
"이시간에 왠일이니?"
그 흔한 노크도없이 진료실안으로 들어선
녀석을 향해 들려오는 목소리.
윤정희 선생님의 목소리이다.
녀석의 뒤에 가려진 나를 아직 발견하지 못한듯
회의중이니 나가라는 그녀의 목소리가 이어져 들려왔다.
"버릇없이 무슨 경우야. 나가렴."
"심장수술 할수 있죠?"
"뭐..?"
"살려줘요."
녀석의 말에.
녀석의 뒤에서 튕기듯 나온 내 모습에.
놀라는 선생님.
그리고 몇몇의 의사들과 양도영이 보였다.
"심근경색이래요. 살려줘요."
나를 보고 놀란 선생님이 입술을 들썩일때
먼저 선수쳐버리는 녀석이였다.
상황파악을 하던 그녀가
이마를 짚으며 동료들에게 무언의 말을 하고..
모두가 나간 진료실에는 윤정희 선생님과 녀석.
그리고 나.
이렇게 세명이서 친묵을 지켰다.
자리에 앉아 이마를 짚고 한숨을 내쉬며
잠시 자리를 비켜달라는 그녀의 정중한 부탁에
천천히 진료실을 나왔다.
.
.
그앞에 쓰러지듯 주저앉으면
여러명의 발소리가 가까워지기 시작하고..
그쪽을 향해 고개를 틀면
정신없이 뛰어오는 언니와 그 뒤를 따르는 강표오빠.
꽤나 난처한 표정의 양도영이 보였다.
아마도 양도영은 언니가 내 병명을 알고있는걸로 생각하고
내가 여기에 욌다는걸 말한듯 싶었다.
.
짝...!!
내앞에 멈춰선 언니가 거친 숨을 고르지도 않고
내 볼을 때리면.
그 소리는 조용한 복도에 울려퍼졌다.
"나쁜기집애."
"....."
"왜 말 안했어."
왜 혼자 아프려고 해. 왜 항상 혼자 해결하려고 해.
혼자 알고 있음 병이 낫는데?
너 안죽는데?!
혼자 아프다가 갑자기 죽으려고?
..
눈물이 가득 담긴 언니의 두눈이 내게 꽂히고..
그 모습에 덩달아 눈물이 흐르면 단호한 언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입원해."
제발. 제발 입원해 엄지야.
언니 혼자 두지마.
언니 혼자 두고 가지마..
.
.
.
..
\. 순향병원 902호.
"어디 아프거나 불편하면 그 벨 눌러."
내가 간간히 들리긴 할건데 그래도 혹시나 해서.
아프면 참지말고 벨 꼭 누르고.
잠이 안오면 이 오빠 불러라.
눈썹이 휘날리게 텨오마.
.
나를 맡은 담당으로서 이것저것 주의사항을 알려주기도 하고
축 처진 나를 웃겨주기위해 농담도 건내는 양도영.
적어도 10살차이 나는것같은데 오빠라니.
남사스럽네요. 양도영 선생님.
.
.
하늘빛 병원복을 입고
하얀 이불을 덮고 누워있는 기분.
무척이나 생소했다.
푹쉬라는 양도영이 불을 끄고 나가면,
2인실임에도 나뿐인 텅 빈 병실에는
간간히 들려오는 경적소리뿐이였다.
..
.
.
잠을 자기 위해 눈을 감은 그날.
태양이는 오지 않았다.
48.
\. 순환기내과 진료실 B-2.
쇼파에 앉아 깍지 낀 두손만 내려보는 태양이에게
유자차를 건낸 정희는 그 맞은편에 앉고..
따듯했던 유자차에서 김이 사라지고
차갑게 식었을때서야 태양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살려줘요."
엄지. 우리 엄지 살려줘요.
살려주세요..
나 엄지없이 못살아요..
살려줘요. 엄지 좀 살려줘.
살려줘. 살려줘 엄마..
.
.
너무나 애태로운 모습에.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 한줄기에.
허공으로 흩어퍼지는 말들에.
정희의 누둔이 커졌다.
분명. 엄마라고 했다.
한가족이 되었던 그 10여년동안
아줌마라는 그 흔한 호칭도 없었던 아이가.
다른 반항기도 없었고
미움과 증오마저 보여주지 않았던 아이가.
악역이라면 당연히 악역이였던 나에게
항상 웃어주었던 아이가.
드디어 엄마라고 했다. 엄마라며 나를 불렀다.
함께했던 그 긴 시간동안
나를 믿고 따라주었던 참 고마운 아이.
허나 단 한번도 엄마라고 불러준적이 없었던 아이.
내게 그 어떤 호칭도 붙여주지 않았던 아이.
그런 아이가.
그랬던 아이가 엄마라고 했다.
"....."
기쁨보다는 슬픔이였다.
엄마라는 그말에 마음이 너무 아려왔다.
그 아이의 눈물에. 옅은 흐느낌에.
"내 심장 줄게요."
또 다시 침묵을 깨트리는 태양이의 목소리에
정희의 두눈은 또 커졌다.
내 심장 줄게요.
엄지 살려주세요..
태양이의 입술이 닫히면 정희의 두눈이 감긴다.
말이 안된다. 이건 말도 안돼.
고개를 젓는 정희의 마음이 아려오기 시작했다.
마주하던 태양이의 시선을 피해버린 그녀는
사리에서 일어나 책상으로 향했다.
서랍에서 꺼낸 초음파 사진을 꺼내 내려보다가
조심히 태양이 앞으로 내밀었다.
"이게..뭐예요?"
"몇일전에 검사한 네 간이다."
정희의 말에 천천히 초음파 사진위로 향하는 태양이의 두눈.
말없이 사진만 보는 태양이를 향해
정희가 입술을 떼었다.
"간암..이라는구나.."
정희는 흔들리는 태양이의 두눈을 피했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말해야할지.
모두 막막할 뿐이였다.
한숨만 내쉬던 그녀는
머릿속을 헤집은 그 모든 생각들을 접어두고
간략히. 태양이가 알수있도록 말하기를 선택한다.
"후.."
그러니까 이게 간. 이게 암덩어리.
벌써 80%나 퍼졌다는구나..
하루빨리 입원해서 항암치료든 뭐든 시작해야 돼.
그리고 너도 이식을 해야만이 살수있는 확률이 높데.
진작에 병원을 찾지 그랬어..
나한테만이라도 그간 증상들을 물어라도 보지 그랬니..
태양이의 손에 있던 사진이 바닥으로 떨궈지면
믿을수없다는 그의 목소리가 울려퍼진다.
"말도 안돼. 누구예요?"
"....."
"나 검사해준 담당선생님이 누구냐구요!!!"
"......"
나 이제 열아홉이예요.
나 체육도 항상 올 수였고.
19년살면서 감기 걸렸던적이 손꼽아 셀수도 있다구요.
그건 누구보다 엄마가 더 잘 알고계시잖아요.
..
아니예요. 이거 뭔가 잘못됐어.
아니야. 이거 내 사진 아니야.
암이라니.
내가? 김태양이?
내가 간암이라뇨. 웃기지마요.
이거 다른 사람 결과랑 섞인거야.
나 아니야. 내거 아니야. 말도 안돼.
이건 아니야. 안된다구요..
나 아프지않아요. 멀쩡하다구요.
나 엄지랑 사랑해야되요.
항상 죽을때까지. 죽어서도 옆에 있어줘야 한다구요.
나 검사 다시할게요.
이번에는 엄마가 나 검사해줘요.
검사 다시 받을래요.
아니예요. 나 간암아니예요.
나 아니라구요..
.
.
..
어느새 자신의 앞으로 와 주저앉아
병명을 부인하는 태양이의 모습에
정희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너무 애처로우며 너무 처절한 모습.
자신보다도 사랑하는 사람을 먼저 생각하는 모습.
어찌 이리도 어리섞은 것인지.
왜이리 서로를 생각하는 마음이 같은것인지.
왜 하늘은 이들에게 이런 시련의 아픔을 주는것인지.
결국 정희의 눈에서 눈물 한방울이 흘러내렸다.
"엄마. 아니라고 말해줘요.."
"...태양아.."
"아니라고. 나 건강하다고. 그렇다고 말해줘요.."
나 죽지 않는다고. 나 아프지 않다고.
그렇다고 말 좀 해줘요..
"태양아. 김태양!!"
정희의 외침에 흔들리는 태양이의 두눈이
진정되는듯 싶었다.
"정신차려."
살고 싶으면. 건강해지고 싶으면.
계속. 영원히 엄지 옆에 있어주고 싶으면.
사랑해주고 싶으면.
정신차려. 엄마말 들어.
엄마가 너 살릴거야.
내가. 너랑 엄지 살릴거야.
어느 그 누가 너희 죽는다고 해도
내가 너희 그렇게 그냥 보내지않을거야.
그러니까 엄마 말 들어.
나를 한번 믿어봐.
넌. 살수 있어.
.
정희의 말이 멈추면
결국 태양이의 흐느낌이 잔잔히 울려퍼진다.
.
.
.
..
데려다줄테니 기다리라는 정희의 말을 뒤로하고
움직이던 태양이의 발이 어느 병실앞에 멈춰섰다.
902호. 여.반엄지(19)
병실문옆에 쓰여있는 이름을 어루만지는 태양이의 손길.
이름만 보아도. 생각만 해도 주체할수 없을만큼 뛰는 이 마음에
너무나도 벅차올라 감사하고 있는데.
왜이리도 우리를 떼어놓으려고 아프게 하는것인지.
내가 너를..어떻게 포기해야 하는건지.
..
태양이의 손이 제자리를 찾으면
조용히열리는 병실문.
놀란 태양이가 한발짝 물러서고 어두운 표정의 도영이 나온다.
그런 도영의 뒷너머로 보이는 것은,
불을 끈 어두운 병실과
등을 보인채 누워있는 엄지의 뒷모습.
또 한번 가슴이 먹먹해짐을 느끼는 태양이였다.
.
.
1층 로비로 내려온
태양과 도영의 사이에서 흐르는 침묵.
간간히 들려오는 발소리는 금방 묻히기 일쑤였다.
"윤선생님이 너한테 어떻게 말해야 할지,
많이 고민하셨어."
조금전 회의도 그때문에 모인거고.
선생님은 너와 엄지를
어떻게서든 꼭 살리고 싶어하셔.
그저 의사로서가 아닌 평범한 어머니로서.
그러니 선생님 말씀을 믿고 따라줘.
.
혹여 태양이가 다른 생각을 품을까봐,
말하는 내내 태양이의 눈치를 살피는 도영이였다.
자신의 말을 듣지않는 듯, 초점이 없는 태양이의 두눈.
도영은 한숨이 절로 나올뿐이였다.
"엄지 담당이세요?"
"그래."
"울엄지..잘 부탁해요."
아파도 아프지 않는 척. 힘들어도 힘들지 않는 척.
항상 뒤에서 혼자 우는 애니까..
아파하는거. 힘들어하는거.
먼저 알아채주세요.
울면 울지말라고. 그냥 다독여만 주세요..
10살 연하니까.
삼촌은 연하한테는 관심없으니까.
그러니까 나 믿을게요.
우리 엄지..
잘 지켜줄거라고 나 믿을게요..
.
.
말을 마친 태양이가 자리에서 일어서면
곧, 화난듯 싶은 도영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니가 해."
니 여자야. 니꺼야.
김태양 니 여자라고.
난 환자의 병을 치료해주는 의사야.
의사라는 선에서 해줄수 있는게 있고,
해선 안되는게 있어.
니가 부탁한 것들. 난 해선 안돼.
아니. 안해.
..
굴리던 발을 멈춘 태양이는
귀를 기울여야만 들릴듯한 목소리로 말한다.
"깜박했네요."
내가 죽으면 말예요..
.
.
.
..
2층에 도착하면 엄지와의 첫만남이 떠오르고..
3층에 오르고, 4층에 오르고..
그렇게 계단 하나하나를 오를때마다
떠오르는 엄지와의 추억들.
그것이 너무 소중해, 다시 기억 저편에
차곡차곡 쌓아두기 시작하는 태양이의 처진 그림자.
.
.
똑똑똑..
아랫층 1402호의 문을 두드리는 노크소리.
그 앞에는 어깨가 잔뜩 처진 태양이가 서있었다.
노크소리가 점점 길고 커지면 굳게 닫혀있던
1402호의 문이 열리고..
열린 문새로 드리워지는 그림자가
곧 태양이의 발을 덮었다.
"할머니.."
태양이의 부름에 굽어진 허리를 두드리며
태양이를 올려보는 사람.
태양이의 아랫층 점보할머니.
"할머니.."
할머니..점 좀 다시 쳐주실래요..?
점괘좀 다시 봐주세요..
저 정말 한달후에 죽어요?
엄지도 한달후에 죽는거예요?
제발. 점괘좀 다시 봐주세요.
제발 아니라고 말씀해주세요..
49.
am. 5:37.
이른 새벽, 옅은 잠에서 깨어나면
어둠으로 가득한 병실이 나를 반겼다.
그안에서 눈만 깜박이며 굳은듯 누워있기를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깜박이던 두눈을 지긋히 감았다가,
다시 깜박이고..그렇게 반복하며 몸을 일으켰다.
"....."
태양이가 왔었나. 다녀간 흔적이 있나.
그 어둠속에서 녀석의 흔적을 찾았지만
내게 돌아오는건 여전히 짙은 어둠이였다.
.
.
멍하니 앉아있다가,
베개맡에 두었던 핸드폰을 집어들었다.
녀석의. 김태양의 핸드폰을.
그동안 꺼두었던 전원을 켜니 물밀듯 쏟아지는 문자들.
대체로 뭐하냐는, 어딨냐는 뭐 이런 것들이였는데
그중 최근에 온 문자는 불과 몇시간전에 온 것이였다.
‘어디니. 태양아. 연락 좀 해줘. 걱정되는구나.’
12/21 3:54am.
010-28x3-57xx
저장조차 해놓지 않은 번호로 온 문자.
누굴까. 남자? 여자?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을 질투하고 의심하며
여지껏 온 문자들을 죄다 지워버리고.
카메라 버튼을 눌러 들어온곳은 앨범.
거기에는 세개의 폴더가 있는데
'2~6'이라고 쓰인 첫번째 폴더를 여니,
앳되보이는 김마리.오영재.김구라.
그리고 이름모를 여자 한명.
김구라와 손을 잡고 있는 모습이 꽤나 예쁜 여자였다.
"....."
두번째 폴더를 열면 30대 중반의 여자사진으로 가득했다.
셀카사진으로 보이는
그 사진들의 이름은 모두 ‘엄마’였고.
하나하나 넘겨가며 보고 있을때,
마지막에는 그녀가 있었다.
그녀. 윤정희 선생님.
왜 선생님이 여기에..?
시선을 옮겨 그녀의 사진이름을 보면
‘새..엄마.’라고 저장되있는 것을 알수있었다.
.
.
"....."
마지막으로 '061201'이라고 쓰인
세번째 폴더를 열면 두개의 사진이 있는데,
하나는 자고 있는 한 여자의 모습을 찍은 사진이였다.
누군가의 어깨에 기대어.
녀석의. 김태양의 어깨에 기대어.
또 다른 사진은 낯익은 곳에 서있는 한 여자의 모습.
약간의 거리로 그 여자의 모습을 뚜렷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그 폴더에는 딱 두개의 사진이 있는데,
자고 있는 한 여자는.
낯익은 곳에 서있는 한 여자는.
그 사진들의 주인공은 모두 나.
..반엄지였다.
.
.
..
am. 9:29.
"학교가자!"
양도영이 챙겨준 밥을 먹고, 양치질도 끝내고
TV채널을 이리저리 돌리며 무료한 시간을 보낼때.
깔끔한 교복차림으로 병실에 들어선 김태양이
학교에 가자며 나를 부축였다.
어젯밤, 왜 오지 않았냐고 물으면 그저 웃어보일뿐
아무 대답도 없는 녀석은,
그저 멀뚱히 자신을 올려보는 내게 들고 있던 쇼핑백을
건내주더니 병실을 나섰다.
침대에 놓인 쇼핑백을 열어보니
그 안에는 예쁘게 게어있는 교복이 있었다.
.
.
.
"안돼."
교복으로 갈아입고 녀석과 손을 맞잡고
나란히 선 엘레베이터.
그 앞에서 만난 양도영은 잠시 외출하겠다는 태양이의 말에
안된다며 반대편 내손을 잡았다.
"딱 두시간이면 돼요."
"두시간이든 한시간이든 안돼."
"보여줄게 있어요."
"....."
"해줄게, 해줘야할게 있다구요."
울컥.
가슴이 젖어들었다.
분명 녀석이 뱉어낸 말들은
슬프고도 아픈말들인데.
그런 말을 하는 녀석이 웃고있어서.
웃어보여서.
그래서 나는 내손을 잡고 있는 양도영의 손을 쳐내고
녀석과 맞잡은 손에 힘을 실었는지도 모른다.
이제 내게 주어진 시간은.
녀석과 함께 할수있는 시간은 어느 그 누구도 모르기에.
죽는다 한들, 이기적이게도
그 끝은 녀석과 함께이고 싶어서.
그래서 나도 웃어보였다.
.
.
.
"자, 이거랑 이거 하고.."
병원앞에 세워둔 자전거 뒤에 먼저 올라탄 내 허리에
입고 있던 잠바를 벗어 묶는 녀석.
그 덕에 훤히 드러난 내 다리는 어느정도 가려졌고..
마지막으로 목도리와 가죽장갑을 끼면 준비 끝.
"으악. 출발합니다??"
자리를 잡고 내팔을 잡아가더니 자신의 허리에 두르는녀석이
페달을 밟으면 천천히 나아가는 자전거였다.
도로가 옆에서 천천히.
정말 아주 천천히 달리는 자전거.
달린다는 말보다 걷는다는 말이 더 어울릴듯한 속도였다.
"....."
나름대로 배려해주는거겠지.
나를 위해.
항상 나를 먼저 생각해주는 녀석이니까.
그치만..
"김태양아. 이거 너무 느리지않아??"
"뭐 어때~ 바람을 느껴봐. 시원하지??"
휴. 그래. 시원하다.
시원해서 아주 흥분할 지경이다 이것아!!!!
천천히 달린다지만은 그래도 겨울바람은 매서운거라구.
녀석의 등을 방패삼아 얼굴을 묻으면
문득 떠오르는 생각.
학교를 자퇴했다는 것.
"태양아. 학교가지 말자.."
크리스마스캐롤을 흥얼거리며 페달을 밟는
녀석에게 조용히 말하면,
녀석은 자전거를 세우고 내쪽으로 고개를 틀었다.
왜라고 묻는 녀석에게 자퇴했잖아라고 대답하면
되돌아오는건 차가운 바람뿐이였다.
곧, 좀 걷자는 녀석을 따라 자전거에서 내리면
학교가지 말자는 내말에도 불구하고
학교쪽으로 걷는 녀석이였다.
.
심장에서 느껴져오는 좋지못한 기분에
걷던 걸음을 멈추면
녀석은 한발짝 앞서 멈추고는 나를 내려보았다.
급하게 나오느라고 진통제도 챙기지못했는데
기분이 좋지 않다.
심장이.
아플것만 같았다.
"병원가자.."
병원갈래. 나 병원갈래.
학교 안갈래, 태양아..
나 살래. 살고싶어.
병원에서 치료받으면서 의사선생님들 믿어볼래.
무서워. 나 너무 무서워..
이렇게 같이 있는데..이렇게 손잡고 있는데..
그손을 내가 놔버릴까봐..
갑자기 내가 사라져버릴까봐..
병원가자.
학교가지 말고 병원가자. 응?
.
.
목놓아 울어버리는 내 눈물을
녀석은 말없이 하나하나 모두 다 받아주었다.
..
.
.
.
..
찍습니다~~! 준비하시고. 하나.둘.셋.
플래쉬가 터질때마다 분주하게 움직이는 녀석.
온갖 엽기표정을 짓기도 하고
앙증맞은 자세를 취하기도 하고.
그런 녀석이 렌즈속에 가득했다.
.
길 한복판에서 울던 내가 눈물을 멈추면
녀석은 무작정 나를 끌어 이곳으로 데려왔다.
그러니까 이곳은 시내의 한 스티커사진관.
자세좀 취해보라는 녀석의 성화에
녀석을 따라 온갖 포즈를 지어내기 바빴다.
.
사진기 밖으로 나와 고른 2개의 사진을
이리 꾸미고 저리 꾸미는 녀석은 무척이나 진지했다.
첫번째 사진은 정말 엽기포즈의 절정.
말로 표현할수없을 정도였고.
마지막 사진은
나란히 손을 잡고 활짝 웃는 모습이였다.
예쁘게. 정말 예쁘게 꾸민 사진을
4분할하여 2장은 자신이 갖고.
나머지 2장은 언제 챙겼는지
내게 주었던 자신의 핸드폰뒤에 붙이는 녀석은,
사진관을 나와 꾹꾹 붙여놓은 사진을 흐뭇하게
내려보며 잘나왔다고 재잘대며 떠들기 시작했다.
같은 교복을 입고 활짝 웃고 있는.
맞잡은 손에 포인트를 주어 꾸민 사진.
길가는 사람을 붙잡고
예쁘지않냐며 자랑하고 싶은 마음.
녀석도 나와 같겠지.
"엄지야."
잡고 있는 손에 힘을 실고
사진만 보며 걷는 나를 부르는 녀석의 목소리.
"엄지야."
한번더 나를 부르는 목소리에
고개를 들면 사진속 그 웃음이 보인다.
녀석이. 태양이가 활짝 웃는 모습이.
"엄지야. 반엄지."
아플때. 참고 참고 또 참았는데도 너무 아플때.
그래서 눈물이 나고.
흘린 눈물에 내가 보이면.
그때는 1번을 꾹 눌러.
그러면 내가 너의 아픔을 모두 가져갈게.
그러니까 1번을 눌러.
알겠지?
.
대답을 원하는 녀석의 뒷너머로 뜬 햇빛이 너무 강해,
자연스레 이맛살이 찌푸러져 버렸다.
.
.
..
정확히 두시간만에 병실로 돌아와,
녀석과 낮잠도 자고. TV를 보며 웃기도 하니
어느새 어두운 밤이 되있었다.
또 오겠다며 가는 녀석은 한사코 내 배웅을 거절했으며,
병실을 나서는 그 뒷모습이 보기싫어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어버렸다.
.
.
"....."
평소와 다름없는 녀석이였지만 평소와 달라보이는 녀석이였다.
말하는것도. 웃는것도.
나를 보는 눈빛도. 내옆에 있어주는것도.
변한거는 정말 아무것도 없는데 녀석이 녀석이 아닌것만 같았다.
어둠으로 가득한 이불속에서 나와
머리맡에 두었던 핸드폰을 집어들었다.
핸드폰에 붙여둔 사진을 만지고 만지고 또 만지고.
닳을정도로 어루만지며 두눈을 감아버리면
오늘하루,
태양이와 함께했던 시간들이 필름처름 빠르게 지나갔다.
.
.
pm. 11:57.
"반엄지. 나 봐. 보여? 어?!"
무슨 내용인지는 알수 없으나
꿈속에 녀석이 나왔다는것에 대해 행복에 젖어있을때.
또다시 엄습해오는 아픔에 두눈이 떠지고..
벨을 눌러 양도영을 부르니
양도영과 저번에 한번 본 노간호사가 이리저리 내몸을 살폈다.
"눈 감지마. 정신차려. 알겠어?!"
너무나 아픈. 참을수없는 고통에
숨이 차오르고 두눈이 조금이라도 감기게되면
나를 흔들고 때리는 양도영이였다.
.
..
만약 죽는다면 이렇게 죽는걸까.
만약 죽게된다면 차라리 고통없이 죽는것이 낫겠지.
이런저런 생각에. 견디기 힘든 아픔에.
떠오르는것은 죽음.
그리고 또 다른 나. 김태양이였다.
.
.
.
..
"진통제 맞아서 잠 올거야.
내가 옆에 있을테니까 걱정말고 푹 자도 돼."
양도영은 노간호사가 꽂아주고 간 링겔을 확인하며
나를 안심시켜주기에 바빴다.
산소호흡기에 의지한채 숨을 내뱉고..
점점 밀려오는 나른함에 두눈이 감길때.
바퀴벌레가 나타났다며 병실 구석구석 뒤지기시작하는
양도영을 보다가 핸드폰을 꺼냈다.
1번을 눌렀다가 다시 닫아버리고.
전원을 껐다가 다시 켜버리고.
이런 행동을 여러번 반복하다가
다시 1번을 꾸욱 누르면.
컬러링인듯,
잔잔한 발라드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어. 왜.."
컬러링이 두번반복될때
자고있었는 듯,
핸드폰너머 녀석의 잠긴 목소리가 들려왔다.
"...."
녀석의. 설은찬의 목소리가.
잘못눌렀나?
통화를 끝내버리고 다시 1번을 누르면
방금 전 들려왔던 컬러링이 또 다시 들려오고..
-"왜. 김태양."
역시나. 김태양의 목소리가 아닌
변함없는 설은찬의 목소리도 들려왔다.
왜 전화했냐며 설은찬의 목소리가 울려퍼지는 핸드폰이
침대밑으로 힘없이 떨어지면,
놀란듯 다가오는 양도영과 쉼없이 흐르는 눈물들.
"..으...으.으.."
전화하라며.
아프면. 참고 참고 또 참았는데도 아프면.
그러면 전화하라며.
흘린 눈물에 니가 보이면 전화하라며.
그래서 전화했잖아.
너무 아파서. 참고 참았는데도 아파서.
니가 보여서. 니가 보고싶어서.
그래서 전화했잖아.
근데 뭐야.
왜 안받어. 왜 설은찬이야.
왜 김태양이 아닌 설은찬인거냐구..
어딜가려구. 어딜간거야..
내가 여깄는데 너는 어딜가려는거야..
50.
pm. 9:07.
병원에서 나온 태양은 집앞 문방구에서 산 편지와 색지,
그리고 색색의 매직들을 거실에 죄다 느러뜨리고 팔을 걷어부쳤다.
색지위에 '우리 엄지 전용 화장실'이라고 쓰고 또 쓰고.
글씨가 예쁘게 써질때까지 쓰는 태양이의 이마에서
땀한방울 하나가 떨어지면,
"너 뭐하냐?"
"쉿! 조용"
이제 막 집에 들어선 구라가 어질러진 거실을 보며
묻자,
돌아오는건 짤막한 대답이였다.
끙끙대며 쓰던 글씨를 이건 아니라며
줄을 쫙쫙 그어버리는 모습이 여간 웃긴게 아니였다.
열심히 하라는 구라에게 엉덩이를 씰룩 흔들어준
태양의 입술새로 드디어 탄성이 터져나왔다.
노란 색지위에 또박또박 쓰여있는
'우리 엄지 전용 화장실'.
꼬박 한시간동안 연습하여 써진 글씨였다.
색색으로 알록달록하게 꾸민 종이를
판지위에 붙이고.
붙인 그것을 쇼핑백에 담아 품에 안고
집을 나서는 태양이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
.
.
pm. 10:49.
버스에서 내려 품안에 든 쇼핑백을 조심히하며
병원근처 꽃집에 들어선
태양이의 얼굴에서 웃음이 떠나질 않았다.
꽃집 주인인 중년의 아주머니가 반갑게 맞아주면
태양이 또한 반갑게 인사를 건냈다.
"꽃 주세요! 꽃.꽃! 예쁜 꽃 뭐 있어요? 장미말구요!"
"천천히 구경해봐요. 꽃은 다 예쁘니까."
음. 음..이거! 이거 이름이 뭐예요?
노란 장미꽃 옆에 놓인 꽃을 가리킨 태양이는
낮은 탄성을 뱉어냈다.
장미꽃마냥 붉은것이 너무 아름다웠다.
"아네모네예요. 빨강 아네모네."
"우아..예뻐요! 진짜!"
"혹시 사랑하고 있나요?"
"..아. 네! 사진도 있는데! 보여드릴까요??"
"행복해보이네요. 그럼 이거 추천해줄게요."
..4월 4일의 탄생화.
그대를 사랑해.
.
한손으론 쇼핑백을 안고.
다른 한손으로는 꽃다발을 들고
병원으로 재촉하던 태양이의 발걸음이 멈춰졌다.
무어라 형용할수없는 아픔.
식은땀이 절로 흘렀다.
‘입원하자. 입원해야 돼.
이제부터 시작이야. 본격적인 통증이 시작될거야.
항암치료도 하고, 종양도 하루빨리 제거해야 돼.
더이상 그냥 두었다간
손도 대지 못한채 보고만 있어야 할지도 몰라.
나는 그럴수 없어.
입원하자. 태양아. 제발. 응?’
.
.
오늘 아침, 연락이 안된다며 집으로 찾아온
정희의 말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 태양이였다.
병원앞 벽에 기대어 있는 태양은
점점 가라앉는 아픔에 허탈한 웃음이 터져나왔다.
.
이렇게 죽는건지.
이젠 더이상 시간이 없는건지.
두려움보다는 슬픔이였다.
슬픔보다는 걱정이였다.
슬픔과 두려움,
그 끝은 항상 엄지였다.
.
.
.
pm. 11:38.
\. 9층.본관 여자 화장실.
하늘도 그의 사랑을 이제서야 돕는것인지,
아니면 늦은 시간이여서 그런지.
화장실에는 태양이외엔 아무도 없었다.
"이해하길 바래요 나의 아픔까지도
모두다 털어놓지 못했던 나임을.
무너지는 날보며 슬퍼할 그대의 눈물도 아껴주고픈
그댈 위한 마지막 나의 마음.."
텅빈 조용한 화장실에는 태양이가 흥얼거리는.
간혹 느껴지는 아픔에 중간중간 끊기는
노랫소리 뿐이였다.
.
화장실에는 총 3개의 칸이 있는데,
그중 가운데에 있는 칸 문밖에
예쁘게 꾸며 가져온 판지를 걸었다.
맨 끝글자가 약간 번진 듯 싶은 이유가
땀때문인지, 아니면 눈물때문인지..
꾿 닫힌 태양이의 입술이 말해주고 있었다.
..
.
am. 00:06
\. 902호 병실 앞.
한숨을 쉬며 병실을 나오는 노간호사를
붙잡는 태양이의 두손.
그 손에서 전해오는 떨림에 놀란 은정이였다.
"어때요? 엄지 괜찮아요??"
"진정제 맞아서 괜찮을거예요."
은정은 조심히 묻는 태양에게
짧은 인사와 함께 발걸음을 옮겼다.
.
숨막히도록 빠르게 조금 전 상황에 머리가 아파왔다.
급하게 엄지 병실로 뛰어들어가는
도영과 은정을 보고 온몸에 힘이 빠졌다.
들고 있던 꽃다발을 놓치지않기위해
온 신경을 곤두세워야만 했지만,
살짝 열린 문새로 흘러나오는 도영의 다급한 목소리에
꽃다발은 어느새 차가운 바닥위에 있었다.
.
.
.
뒷걸음치던 발을 다시 제자리로 옮겼다.
아프지않기를. 울지않기를.
어제 새벽녘에 그렇게 빌고 또 빌었거늘
왜 하늘은 나를 봐주지않는건지.
왜 하늘은 그녀에게 아픔과 눈물만을 주는것인지.
왜 나마저 그녀에게 아픔이 되고
눈물이 되어야 하는것인지.
터져나오려는 울분이 혹여 그녀에게 들릴새랴,
두손으로 막아야만했다.
.
병실앞에 멍하니 서있다가,
떨어뜨린 꽃을 집어들어 문앞에 예쁘게 놓으면
조용히 열리는 병실문이였다.
놀란 태양이의 몸이 그대로 굳어버리면,
"엄지 아니니까 긴장 풀어라."
약간은 지친 듯. 혹은 화난 듯.
건조한 도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
1.2.3..
빠르게 올라오는 엘레베이터 앞에 선
태양과 도영의 입술이 움직일 기미가 보이질않고..
7.8.9..땡.
엘레베이터 문이 열리면
먼저 탄 도영의 뒤를 따르는 태양이였다.
"입원해야지."
"....."
"그만 좀 울려라."
tv에서 본적있냐?
너무 울어서 쓰러지는거.
딱 그 꼴이다.
반엄지, 니 여자친구가.
니가 너무 그리워서. 니가 너무 슬퍼서.
그래서 운다. 울고있다.
울었다.
..
도영의 목소리가 사라짐과 동시에
또 한번 주저앉는 태양이였다.
도영이 놀란 마음을 가라앉힌다음,
침착하게 태양을 살폈고.
점점 거칠어지는 태양의 숨소리에 재빨리 3층버튼을 눌렀다.
이제.
그도. 그녀도.
모두 한계였다.
.
.
\. 307호.
"이간호사.
외과 홍유림선생님 좀 불러줘요."
도영에게 업혀 온 태양을 보니 눈앞이 노래졌다.
그렇게 부탁했거늘. 그렇게 경고했거늘.
결국 이런 모습으로 온 자식을 어찌 해야할지.
갑작스런 현기증에 그녀의 모습이 위태로웠다.
옆에 있던 도영이 괜찮냐고 물으면
괜찮다는 제스처를 취하는 그녀.
세상에서 제일 강한, 강해야하는 엄마.
어머니.
약해지면 안돼. 포기해서도 안돼.
모두가 어렵다한들,
내가 손을 놓지 않는 한 살수있을테니까.
..
"부르셨어요."
이간호사와 함께 병실에 들어선 유림은
급하게 뛰어오느라 흐트러진 옷맵시를 단정히했다.
두눈을 감고 있는 정희를 보다가,
슬쩍 곁눈질로 도영에게 눈치를 주면
도영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
"홍선생. 지금 맡고 있는 환자 없죠.."
"네. 내일 휴가라서.."
"정말 미안한데..그 휴가 미뤄줄수 있나요?"
윤..선생님..?
미안해요.
내 아들좀. 이 녀석좀 살려줘요.
홍선생, 양선생처럼 실력있는거 내가 더 잘 알고 있어요..
그건 홍선생도 알죠?
그러니까..이녀석좀 살려줘.
내가 정말..이녀석만 보면 가슴이 아파서
보고 있을 수가 없어..
치료받으며 아파할 이녀석을 보기가 힘들것같아.
새엄마지만 그래도 엄마인데.
엄마니까 강한데. 강해야하는데.
무서워.
내가.
..떠나보낼까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