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순간을 못 참아서
곽 흥 렬
또다시 안타까운 소식이 전파를 탔다. 몇 달 전엔 구미의 한 원룸에서 청춘남녀의 집단 자살 사건이 일어나 사회적으로 큰 충격을 던지더니, 이번엔 서울의 어느 여자고등학교 학생 두 명이 고층 아파트 옥상에서 몸을 날려 함께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가슴 아픈 뉴스가 세상을 뒤흔들었다. 왜, 무슨 억하심정의 사연이 있었기에 꽃다운 삶을 그리 허망하게 마치고 말았는가. 이 비극적인 사건들을 접하면서, 오늘날의 생명 경시 풍조에 마음 한 켠이 착잡해져 온다.
요즈음 사람들은 내남없이 성정이 너무도 조급한 성싶다. 모든 것이 즉흥적이다. 쉽사리 만나고 쉽사리 헤어진다. 금세 달아올랐다 금세 식어 버린다. 도무지 진득하게 참아낼 줄 모르고 걸핏하면 극단적 선택으로 생을 마감하는 충동적인 행동을 벌인다. 어쩐지 문명과 인내심 사이에는 정확히 반비례 관계가 성립되는 것 같다. 참 희한하게도, 문명이 발달하면 할수록 인내심은 점점 더 떨어져 가는, 둘 사이의 확연한 인과성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급속도로 늘어난 전자기기의 영향 탓이라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특히 스마트폰의 일상화는 사람들의 진중하지 못한 성향에 불을 댕겼다. 가벼운 손동작 한 번으로 순간순간 휙휙 스쳐 지나가는 화면에 익숙해지다 보니,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가슴이 가을 낙엽처럼 메말라 버렸다. 속도가 조금만 느리다 싶으면 안절부절못하고 조급증을 낸다.
잠시를 참지 못해서 일어나는 사건 사고가 수직 상승 그래프를 그리고 있다. 반 박자만 마음의 여유를 가졌더라면 일어나지 않았을 불행한 일들이 태반이고, 한순간의 끓어오르는 분노심 때문에 저지르게 되는 범법 행위가 대다수이다. 그래서 우리 속담에 참을 인忍자 세 번이면 살인도 면한다고 했는가 하면, 부처님도 삼독三毒 가운데 하나인 진심瞋心, 곧 성내는 마음을 경계한 것인가 보다.
국문학자 조윤제 선생은 생전에 한민족의 성향을 ‘은근과 끈기’라고 설파했었다. 은근한 정과 진득한 끈기야말로 세상에 드러내 자랑할 만한 우리의 특징적인 민족성이라고 보았던 게다. 이 같은 주장은 불과 수십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틀린 소리가 아니었다. 우리는 세계 어느 나라, 어떤 민족보다도 느긋한 성정과 여유로운 마음을 지녔었다. 애절한 민요의 가락만 하여도, 유장한 시조창의 음률만 보아도 얼마나 은근과 끈기의 정서가 핏속에 흐르고 있었던 민족인지 충분히 미루어 알 만하지 않은가.
그랬던 것이, 1960년대 들어와 ‘우리도 한번 잘살아 보세’를 기치로 내세우고 경제 개발에 박차를 가하면서부터 상황은 백팔십도 뒤바뀌어 버렸다. 하루가 다르게 사는 형편들이 나아가고 생활 방식이 편리해지면서,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는 그만 은근과 끈기라는 이 소중한 정신적 자산을 도둑맞고 만 것이다. 요릿집에서 음식을 주문해 놓은 뒤 진득하게 기다릴 줄을 모른다. 조금만 늦게 나온다 싶으면 그새를 못 참아서 고래고래 고함을 질러댄다. 불과 몇십 년 전까지만 해도 듣기도, 보기도 어려웠던 ‘충동조절장애’라는 병명의 정신질환자가 날이 갈수록 급증하는 추세다.
우리 옛 조상들은 지금과는 완전히 딴판이었다. 시간이라는 무형의 기운에 지배당하지 않고, 오히려 그 시간을 조종하려 들었을 만큼 참으로 여유작작한 성정을 지녔었다. 다산 정약용 선생이 시 짓기 모임의 규약으로 쓴 죽란시사첩竹欄詩社帖만 보아도 당시 사람들의 한유로웠던 내면 정서를 충분히 읽어내고도 남을 만하다.
“살구꽃이 처음 피면 한 번 모이고, 복사꽃이 처음 피면 한 번 모이고, 한여름 참외가 익으면 한 번 모이고, 서늘한 초가을 서지西池에 연꽃이 구경할 만하면 한 번 모이고, 국화꽃이 피면 한 번 모이고, 겨울이 되어 큰눈 내리는 날 한 번 모이고, 세밑에 화분의 매화가 꽃을 피우면 한 번 모이기로 한다.”
참으로 기품 있고 낭만 넘치는 세상살이의 자세였다는 생각이 든다. 시간에 쫓기거나 서두르는 기색 같은 건 아예 눈 닦고도 찾으려야 찾아볼 수가 없다. 천지자연의 질서란 항시 변화무쌍한 것이기에 해마다 처음 살구꽃 피는 날, 처음 큰눈 내리는 날이 따로 정해져 있지는 않을 터. 그저 흐르는 세월에 내맡겨 풍류를 즐길 뿐이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라고 한 솔로몬 왕의 명언을 떠올린다. 한시를 참으면 백날이 편하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아무리 불같이 끓어오르는 심사일지라도, 그 순간만 슬기롭게 넘기면 힘겨운 일은 지나가고 마음의 평화가 찾아오게 마련이다.
지금 우리의 현실은, 참을성이라는 ‘마음근육 키우기’ 훈련이 절실히 요청되는 시점에 와 있다.
<'에세이 21' 2024년 가을호>
첫댓글 좋은날되세요
고맙습니다
반갑습니다.
한민족은 은근과 끈기가 있다는 말은 우리 학창 시절에 교과서에 있는 말 이었다
그만큼 다들 이해가 되는 말 이었다
그런데? 언제부터 인가 대한민국 국민은 성질 급한 민족이 되었다
해외여행을 다니다 보면 대한민국인이 성질 급한 민족 이라는거는 현지 가이드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이다
그렇다면 대한민국인이 성질 급한 민족이라는게 진정한 본모습은 아닐런지?
그렇지 않으면 가난하던 시절에는 은근과 끈기가 있었지만
잘 살려고 노력하고 잘 살게 되면서 성질 급한 민족성이 생기게 되었는지 그게 아리송 하다
성질 급한 민족성이 우리들이 더 잘살게 하는데 일조 한거는 틀림 없다
대한민국인이 세계적으로 자살율이 제일 많다는것두 이 성질 급한 민족성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한다
이상 위의 글을 읽고 나의 생각도 써 봤습니당
충성 우하하하하하
선생님께서도 이 문제에 대해 생각이 많으신가 봅니다.
'충성'이라는 구호를 붙이신 걸 보면 혹여 군 관계 일을 하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잘 읽고 마음 다독이고 갑니다.
건필하시길 바랍니다.
반갑습니다.
무더위에 건승을 빕니다.
구절구절이 좋은 말씀입니다.
지름길 보다도
둘러가는 길의 의미를 잃은 시대입니다.
우리의 학창 시절만 하여도
너무 급하게 서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실수한다고...
말이 빠르고, 행동이 빠른 사람에게
촉새라는 별칭을 붙였지요.^^
함께 하는 의미를 잃은 세대입니다.
혼밥 혼술, 혼자서 행하고
남의 비위 맞추기 싫어하고 갑섭도 안하는
인정이 사라진 세대이지요.
나의 행동 하나가 부모님 욕 듣게 하고
형제들에게 피해를 준다는 생각은 아예 없습니다.
나로 인해서, 나의 학교의 명예가 실추한다는 것은
자존감에서 사라져 버렸지요.
연대의식, 명예를 함께 지킨다는 것은 생각조차 못합니다.
모든 것을 돈으로 인격과 명예를 지킨다는 이기주의적
금권만능으로 사회가 변한 까닭으로 생각합니다.
서서히, 점차적으로 나아가고,
나 혼자라는 생각에서 벗어나면,
충동적인 생각이 줄어 들까요.
"나의 행동 하나가 부모님 욕 듣게 하고 형제들에게 피해를 준다는 생각은 아예 없다"는 말씀에 깊이 공감합니다.
요새 사람들은 지나친 개인주의로 인해 공동체 의식 같은 건 괄호 밖에 두고 사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저도 그게 아직 어렵습니다.
불편한 것은 꼭 짚고 넘어가는 성격을 고쳐야 하는
나이인데... 나름 노력중입니다만 ^^
다들 그저 그러려니 하며 살지만, 누군가는 짚어주는 사람도 있어야 하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나부터 반성하겠습니다. 친구들하고 가끔 농담삼아 한국인들에게 총기소지를 자유화한다면 하루에도 수십명씩 죽을 거라고. 한국인들이 언제부터 성질이 급하고 과격해졌는지 참으로 걱정됩니다.
선생님 말씀처럼, 우리가 어쩌다 이렇게까지 되었는지 생각해 보면 참 답답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문명 발달이 속도와의 싸움이었죠
빠른 이동, 빠른 결과도출
그 빠름에 내성이 생겨 더 빨리 더 빨리.
고갈되는 인내심, 충동적 대응.
무언가와 부딪혀 다 깨지고 부서져야
멈추는게 가능할까요?
지금의 조급증의 원인을 정확하게 짚어내셨다 싶습니다.
저 역시 이런 현상을 문명의 발달이 가져온 부작용 가운데 하나라고 보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