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샘레터 36/파란의 한국사]‘임시정부의 아들’ 김자동 선생
군청이나 면사무소를 가면 아무데나 쌓여 있는 일간신문들이 가장 먼저 눈에 띈다. 허나, 중앙일간지는 거의 없고, 아무도 거들떠보지도 않는 10개가 넘는 지방신문만 즐비하다. 간혹 한겨레신문이나 한국일보를 보면 화들짝 반갑다. 젊어 ‘잉크밥’을 먹은 때문일 것이다. 언제나 신문은 뒤에서부터 읽는다. 허나마나한 칼럼이나 왜곡된 사설은 제목만 훑고, 내가 가장 먼저 보는 면이 피플면이다. 어제, 카센터 사무실에서 본 한겨레, 김자동 선생의 오비추어리obituary(부음기사)에 눈길이 오래 머물렀다.
김자동(1928-2022.8.20.). ‘상해 임시정부의 산 증인’이자 ‘임정의 아들’로 불렸던, 동농 김가진(1846-1922) 선생의 손자이자, 백범 주석의 비서로 활약한 김의한(1900-1964)과 ‘상해 임정의 잔다르크’ 정정화(1900-1991) 님의 아들이 아닌가. 헌데, 그 이름 석 자를 아는 이들이 과연 얼마나 될까? 백범을 아저씨로 부르며 임정의 행로와 성장기를 함께했던, 그는 눈을 감는 순간까지 상해임시정부기념사업회 회장을 맡아 기어이 ‘기념관’을 만든 산파産婆였다. 해방 직후 <조선일보> 기자를 잠깐 하고 한국전쟁때 통역관을 지냈으며 <민족일보> 기자로 활약하다 조용수 사장의 억울한 죽음을 보고 언론계를 떠나 임시정부의 적통 계승하는 일에 헌신했다. 민주화와 평화통일 운동에 온몸을 던져 매진한 선생을, 정부는 그나마 국민훈장 모란장으로 ‘보답’했다. 그분의 삶의 궤적을 보고 숙연해진다. 삼가 옷깃을 여미며 명복을 빈다.
지난 주말, 최근 문화재청장을 지낸 지인이 우거를 방문했다. 인근 오수 ‘원동산圓東山’(소싯적 방학책엔가 실렸던 오수 의견 설화를 아시리라. 술 취해 잠든 주인을 불구덩에서 살리기 위해 자기 몸에 물을 묻혀 주인을 구하고 자기는 죽었다던가. 주인이 무덤에 갖고 다니던 지팡이를 꽂았는데, 느티나무로 자랐다던가. 견분곡犬憤曲(가사는 멸실)를 부르며 슬퍼했다는 얘기가 최자崔滋의 『보한집補閑集』에 실려 있는 의견義犬공원)을 구경시켜 드렸다. 그때 원동산 앞에 못보던 비가 있어 보니 <3 ․1독립만세 오수 함성의 터> 기념비이다. 2022년 8월 15일 세운 ‘따끈따끈한’ 돌비이다<사진>. ‘아, 이곳에서 1919년 대한독립만세를 불렀던 모양이구나’ 내 나이 60대 중반이 되도록 처음 듣는 사실이다. 인터넷 검색을 해본 후 나의 무식에 깜짝 놀랐다. 1919년 3월 10일 오수공립보통학교(오수초등학교 전신) 초등학생들이 훈도(선생님)의 말을 듣고 독립만세를 불렀다는 것이다. 훈도의 이름은 설산 이광수. 고종의 국장을 참관한 후 손병희 천도교 교령을 만나 만세운동을 벌일 거라는 말을 듣고 <독립선언문>을 받아왔다는 것 아닌가. 이 시골깡촌의 초딩선생이 초딩생들과 전국에서 최초로 만세를 불러, 전국 10대 의거지 중의 한 곳이 내 고향 오수獒樹였다는 것이 아닌가.
얘기는 계속된다. 그 선생님은 중국으로 망명, 해방될 때까지 독립운동을 하였고(2009년 학부모회가 세운 기념비가 현재 오수초교 담 옆에 있다.사진), 그해 3월 23일 오수면민 2000여명이 대대적인 만세운동을 벌였다고 한다(집성촌 둔덕이씨 16명이 주도). 만세운동은 이후 장수군, 임실 청웅면 등으로 번져 전라도 한 촌에서조차 ‘민족정기’가 생생하게 살아 있음을 보여준 쾌거가 되었음이랴. 만세운동으로 투옥한 35명이 출옥하는 대로 모임을 결성한 게 <경착영춘회耕鑿迎春會>라는데, 글자 그대로 “밭을 갈면서 ‘봄’(해방, 독립)을 기다린다”는 의미이다. 일제의 지독한 탄압으로 모임은 해체됐으나, 회원은 거의 독립유공자가 되었다던가. 100주년을 맞아 <영춘>이라는 도록을 펴내 그 실상과 활동상을 보여주기도 했단다. 옛 오수역앞 동산에 그날의 만세운동을 기념하는 비가 세워져 그 뜻을 기리고 있다<사진>.
오호라! 내 고향 오수가 이런 고장이었구나. 이런 애국의 피가 면면히 흐르기 있었기에 ‘평화소녀상’도 몇 년 전 세웠구나. 초등학교시절 4km 떨어진 면소재지 오수에 활동사진(극장)을 보려 단체로 걸어오기만 했었지, 이런 재미있고 뜻깊은 역사이야기는 처음 알았다. 고향에 내려와 3년이 넘게 살면서 새삼 감탄한 게 한두 곳이 아니다. 얼마든지 누구에게나 자랑하고도 남을 내 고향 임실 그리고 오수. ‘임실치즈’로만 알려지면 안되는, 충과 효와 의가 살아 숨쉬는 곳이다. 옥정호 주변을 가보셔라. 임진왜란때 호남지역에서 첫 승전고를 올린 양대박장군 전승비 내용을 찬찬히 읽어보셔라. 충신이 따로 없다. 의병 1천명으로 왜군 1만병을 때려잡아 왜놈들이 호남을 넘보지 못하게 했다. 조선 정조임금 때에는 낙향한 선비 운암 이흥발 선생이 낚시를 하다 삼蔘을 낚아 어머니 병환을 낫게 한 효행이 전설로 내려온다. 운암은 숱한 제자들을 길러낸 전북 학맥의 시조격이라고 할까. 또한 위에서 언급한 오수개는 의견의 상징이 아닌가. 충으로서는 더 큰 건이 있다. 구한말 호남창의군 대장 이석용 장군은 호남지역의 의병을 모아 혁혁한 전과를 올렸다. 소충사에서 그 뜻을 소중히 기리고 있다. https://cafe.daum.net/jrsix/h8dk/1127
이러니 <충忠․효孝․의義>의 고장이 아니고 무엇인가. 대한민국에 무수한 고을이 있지만, 이 세 가지 덕목을 갖춘 고장이 어디 흔할까 싶다. 그런데 문제는 불과 3만명도 안되는 군민郡民들조차 이런 역사적 사실들을 몰라도 너무 모른다는 것이다. 알아야 면장을 해도 할 것이 아닌가. 의견만 해도 초등학교 교과서에도 실려 널리 알려야 하는 게 아닐까. 일제강점기 나라의 독립을 위해 저 만주벌판, 중국 상해, 일본 등에서 무수하게 죽어간 수많은 독립투사들, 그리고 그의 후손들의 현실이 ‘토착왜구의 그림자들과 언제까지 오버랩되어야 하는 것일까. 토착왜구, 이보다 더 크고 심각한 폐해가 어디 있을까. 과연 청사靑史는 언제나 정의正義의 편이 되려는지? 아지 모게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