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물기행 고유섭
영원한 인간사랑 ・ 2024. 6. 13. 5: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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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물기행 고유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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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6.03. 01:11조회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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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사학 개척 고유섭(1905~1944)
다른 여러 분과 학문과 마찬가지로 미술사학이나 미학이‘근대적’ 형태를 띠고 우리나라에 나타난 것은 그리 오랜 일이 아니다. 이 학문들의 근대적 출발은 이 말들이 한국어에 편입된 식민지 때에 이루어졌다고 보는 것이 보편적 인식이다.
아직도 경제학·사회학·정치학·역사학 등‘변혁 지향적’사회·인문과학들과는 학문적 실세를 도저히 겨룰 수 없는 주변 학문에 머물러 있지만, 이 학문들은 그래도 몇몇 대학에 학과가 설치될 만큼 그간 힘을 키워왔고, 특히 80년대 이후 양적 확산을 이룬 미술비평의 자양분으로 작용했다.
정신의 역사에 마디를 지우는 것은 역사기록자의 편의라는 실용적 목적을 넘어선 오래된 관행이다. 그리고 한국미학·한국미술사학의 근대와 전근대를 가르는 마디는 흔히 고유섭(1905~1944)의 학문적 삶과 일치된다고 평가되고 있다.
한국 미술사학·미학·미술비평을 이루는 여러 줄기의 물살은 모두 고유섭이라는 수원자로부터 흘러나오고 있다. 또 실제로 고유섭은 미술사학·미학·미술평론 등 그 자신의 당대에는 지금보다 더 낯설었던 지적 영역을 직접 순례하며, 후대의 학자들이 풀어야 할 공안을 자신의 숱한 논문들에 응축시켜 놓았다. 그리고 그는 너무 짧게 살았다.
고유섭은 조선이 일본의 피보호국이 되던 해인 1905년 2월 2일 경기도 인천시 용동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고주연은 일본의 다이고 고등학교를 졸업한 인텔리로서 조선과 일본을 오가며 미두업에 종사했다. 그는 첫 부인 평강 채씨와의 사이에 장남 유섭과 딸 정자를 두었고, 둘째 부인 김아지오의 사이에 원섭과 진섭 두 아들을 두었는데 그의 이‘외도’는 유년기의 고유섭에게 상당한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짐작된다.
집안갈등 그림으로 잊어
실제로 고유섭이 10살에 인천 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할 무렵 어머니 채씨가 부평의 친정으로 좇겨났고, 따라서 그는 부모의 보살핌을 거의 받지 못한 채 보통학교 시절을 보냈다.
그것이 그의 성격을 내성적으로 만들었지만, 그 내성적 성격 속에 숨은 에너지는 3·1운동 당시 분출돼, 그는 보통학교 고학년생으로서 만세를 부르며 용동 부근을 돌아다니다 사흘 동안 구류를 살기도 했다.
16세때인 1920년 보성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한 고유섭은 25년 3월에 이 학교를 졸업하고 경성제국대학에 입학한다.
보성고보 시절 그는 아버지·여동생·서모·서외할머니와 함께 인천에서 살며 통학을 했는데, 자신과 여동생을 구박하는 서모와 서외할머니 때문에 더욱 과묵하게 변해갔다고 한다. 그는 집안에서의 갈등과 우울을 습작이나 그림으로 승화시키려고 노력했고, 이런 초보적 예술활동은 뒷날 대학에서 그가 전공을 결정하는 데 일정한 계기가 되기도 한다.
25년에 입학한 경성제대의 제2기생들 가운데 보성고보 출신은 고유섭과 이강국 둘이었다.
충남 예산 출신의 이강국은 고보시절부터 고유섭과는 절친한 친구로, 좌익운동에 투신해 해방 뒤에는 북조선인민위원회 외무국장을 지냈으나 간첩활동 혐의로 숙청당한 비운의 인물이다.
고유섭은 이강국 등과 어울려‘문우회’‘오명회’ 등의 서클 활동을 하며 예과시절을 보내고, 법문학부 철학과에 진학해 미학과 미술사를 전공한다.
경성제국대학의 전 기간을 통해 미학 전공자는 고유섭과 일본인 한 사람뿐이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는 미학의 우에노, 동양미술사의 다나카, 고고학의 후지다 등 일본인 교수 밑에서 공부한 뒤‘예술적 활동의 본질과 의의’라는 논문을 쓰고 졸업한다. 그리고 졸업 이듬해인 30년 4월 철학과의 조수로 임명된다.
3년쯤 계속되는 모교의 조수(대학시절인 29년 10월에 고유섭은 세살 어린 동향의 이점옥과 결혼했다) 시절은 고유섭의 한국미술사 연구가 그 기반을 다지는 시기이다.
그는 이 기간 동안‘미학의 사적 개관’‘금동미륵반가사유상의 고찰’‘조선탑파 개설’등의 논문을 썼다.
특히 고유섭은 이즈음부터 전국의 탑파에 대한 연구를 체계적으로 수행하기로 마음먹고, 경성제국대학 소속의 사진사 엔조지와 함께 전국을 돌아다니며 탑을 사진에 담아 분류 정리하기 시작한다. 이 작업의 일부는 34년 3월 대학의 한 강의실에서 열린 ‘조선의 탑파 진전관(眞展觀)’이라는 전시회로 이어지기도 했다.
‘진단학회’ 발기인 참가
그는 33년 4월 개성부립박물관 관장으로 취임하여 개성으로 이사한다. 11년 뒤 그가 간경화증으로 타계할 때까지 계속되는 개성박물관장 시절을 통해 고유섭의 한국미술사 연구는 활짝 꽃피어난다..
그는 이 기간에 개성을 비롯해 전국의 유적지를 답사하며 많은 논문을 썼고, 조수시절에 시작된 탑파의 연구를 회화사·조각사·공예사·건축사에 대한 연구로 확대시켜 나갔다.
34년 5월에는 이병도 등이 중심이 된‘진단학회’의 발기인으로 참가했고, 36년부터는 일주일에 한 차례씩 이화여전과 연희전문에서 미술사를 강의하며 후진을 기르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이 시기에 서울의 전문학교에서가 아니라 개성의 박물관과 자신의 집에서 뒷날 자신의 학문을 이어나갈 후진들을 만난다. 당시 대학생이거나 고등학생이었던 황수영(전 동국대 총장), 진홍섭(전 이화여대 교수), 최순우(작고·전 국립중앙박물관장)들이 그들로, 이들은 뒷날‘고고미술동인회’를 결성하고 그것을 한국미술사학회로 발전시키며 한국의 미술사학을 조직하는 데 중추적 역할을 하게 된다.
최순우·진홍섭씨 이끌어
황수영과 진홍섭은 당시 일본에서 학교에 다니고 있었는데, 방학 때면 고향인 개성으로 돌아와 고유섭과 함께 전국을 답사하며 고고학·미술사학의 기초를 다졌다. 황수영은 도쿄제국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하고 진홍섭은 메이지대학 정경학부를 졸업하지만, 고유섭이 그들에게 끼친 영향은 끝내 그들을 우리나라 미술사학의 주춧돌로 만들고 마는 것이다.
또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그의 논문들을 <송도고적><조선탑파의 연구><조선미술문화사논총><고려청자><한국미술사 급 미학논고> 등의 책으로 묶어낸 것도 황수영을 비롯한 개성의 제자들이었다. 고유섭의 개성박물관장시절과 그가 그 시절 맺은 사승관계로 해서, 한국미술사학사에서 개성이라는 지명은 종가의 위엄을 얻었다.
그가 대학시절부터 구상했고 개성시절에도 계속 마음을 쓰고 있었던 필생의 업은 한국미술사의 체계적 집필이었다.
존재하지 않는 이미지입니다. 35년께 쓴 것으로 짐작되는‘학난(學難)’이라는 글은 이러한 바람을 잘 드러내고 있다.
“동양인의 독특한 미술품에 대한 골동적 태도는 조선의 미술품을, 그리 많지도 못한 유물을 은폐시켜 세상의 광명을, 학문의 광명을 받지 못하게 하는 한편, 무이해와 세인의 백안간타적 태도는 유물의 산일뿐 아니라 학구적 정열의 포기까지 조장하려 한다...(우리는) 조선의 사상배경을, 특히 불교의 교리판석과 체계경위를 서술한 쾌저를 갖지 못하였다. 미술사를 다만 형식 변천의 외관사로만 보지 않으려 하는 나의 요구는 이와 같이 망막하다... 이미 문제가 이러한지라...(나는)7일을 위한(爲限)하고 우주만상을 창조하는 조물주의 기적적 쾌감을 가져볼 날이 없을 것 같다...”
개성시절에 그가 쓴 방대한 영역의 많은 논문도 모두 이 한국미술사의 집필을 위한 기초작업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어린 시절부터 선병질이었던 그의 건강은 40년대 이후 점차 악화를 거듭한다.
그는 이미 대학 조수시절에 쓴 일기에서“생활과 다투어야 하고 세상사람과 다투어야 하고 병과 다투어야 한다”고 쓰고 있거니와, 어린 시절부터 그를 괴롭혀온 결막염·`편도선염·중이염·위염 등은 그의 학문활동에 적지 않은 장애로 작용한 듯 하다.
그는 41년에 쓴 한 일기에서 문학에 대한 향수를 토로하며 공민왕을 소재로 한 소설을 쓰겠다는 뜻을 비치기도 한다.
병과 씨름 학문활동 장애
그러나 그가 그렇게도 꿈꾸었던 조선미술사도 소설도 이루지 못한 채, 고유섭은 44년 6월 26일 40세의 나이에 간경화증으로 삶을 마치고 개성 수철동의 묘지로 거처를 옮기고 말았다.
흔히 우리나라 최초의 미술사학자이자 미학자로 불리는 고유섭이 미술·미학계에 끼친 영향은 지대하다.
그가 한국미의 특징으로 지적한‘무기교의기교’‘무계획의 계획’‘무관심성’‘단아함’ ‘민예적 특성’ 등은, 그러한 지적을 수용하든 비판하든, 아직도 우리 미술사학 내지는 미술 일반의 중요한 화두로 작용하고 있다. 더구나 한국 미술 각 장르에 대한 그의 치밀한 논문들은 그 학문적 성실성과 정열로 후세의 동업자들을 질리게 할 정도이다. 우리가 늘상 사용하는‘분청사기’라는 말을 정립시킨 것도 그이다.
그의 미술평론들은 그리 많이 남아있지 않지만 그 글들은 그의 미술사적 천착과 미학적 기반에 뒷받침되어 있어서 든든하다. 이것은 얄팍한 인문적 교양과 주관적 감수성을 기반으로, 그것도 악문과 오문에 실려서 양산되는 요사이의 일부 미술비평과 비교할 때 더욱 또렷한 돋을새김으로 보인다.
올 봄에 고유섭 연구로 홍익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김임수씨는 고유섭 학문의 방법적 체계와 논리적 구조는 미학과 미술사학과의 내연의 관계에 있다고 말한다.
식민지 영향 비판받기도
또 젊은 미술사학도 김영애씨는 그의 석사학위 논문에서 미술사 이론·미 의식·미술장르별 연구·미학 및 평론 등으로 분야를 나누어 고유섭의 논문들과 그것들을 대상으로 쓰인 후대 학자들의 글들을 검토한 뒤, 고유섭이 자신의 졸업논문에 인용한 콘라드 피들러의 다음과 같은 문단을 고유섭에게 되돌려 준다.
“진정한 천재는 돌연히 나타나는 것으로 과거시대의 끝맺음이라기보다는 새로운 시대의 시작인 경우가 흔하다. 천재의 본질은 그가 사람들로 하여금 새로운 안목을 가지고 세계를 보게 한다는 것이다.”
그 새로운 안목의 내용은 김씨에 따르면 “진단학회를 통해 유행한 실증사학과 백남운 식의 사회경제사적 방법론, 그리고 유물이 적은 우리 미술사의 실정에 맞는 미술사 이론으로서 문헌학적 방법을 융합시킨 총체적 방법론”이다.
고유섭의 미술사관, 미학적 관점에 대한 글들은 요사이도 계속 발표되고 있다. 그 글 가운데는 고유섭이 처했던 식민지 시기의 교육환경이나 일본의 미술사가 아나기의 영향 같은 것을 지적하여 그의 관점을 비판하는 글들도 있지만, 그런 비판까지를 포함하여 후대의 고유섭 연구에 의해 고유섭의 미술사학은 계속 진화하고 있다.
“우리 학계에서 미술사와 고고학의 방법론을 처음으로 확립한 큰 스승”이라는 진홍섭 교수의 평가나“시대의 한계를 뛰어넘은 천재”라는 홍가이 교수의 평가는 그 진화의 방향을 암시하고 있다.
한국미술사학에서의 고유섭은 그 학문적 야심과 선구자적 위치만이 아니라 그 짧은 삶을 통해 못다이룬 성취 때문에 국어학에서의 주시경과 비견될 만하다.
[출처] 고유섭|작성자 바람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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